특집 | 대화
인문학의/에 길을 묻다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교수, 사학. 연세대 국학연구원장. 『창작과비평』 주간.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공저) 등이 있음.
최원식 崔元植
인하대 교수, 국문학. 문학평론가. 세교연구소 이사장. 『창작과비평』 주간 역임. 저서로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백영서 오늘 『창작과비평』 여름호 인문학 특집을 위해 이렇게 최원식 선생님을 만나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이 대화를 구상하며 최원식 선생님을 모시려 했던 중요한 이유는 물론 인문학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에 적임자이기도 하지만, 올해 회갑을 맞으신 데 나름대로 축하를 드리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창비의 전·현직 주간들이 모여 우호적인 이야기만 주고받는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불꽃이 튀는 대화를 이끌어가보겠습니다. 축하하는 자리에 가끔 불꽃도 필요하고 그러니까요.(웃음)
최원식 짐작은 했지만 제 회갑을 기억하는 것으로 대화를 준비해주신 창비에 감사드리고, 백영서 주간께서 직접 나서서 대화를 함께하니 더 뜻깊습니다. 불꽃놀이는 환영하고요.(웃음)
백영서 예, 말씀처럼 불꽃놀이를 벌여보겠습니다. 우선 인문학 특집의 대화라고 할 때 부담이 컸어요.‘인문학 위기’에 대한 얘기가 이미 식상할 정도로 많은데 왜 창비에서 지금 이런 기획을 준비했을까요. 창비는 작년 겨울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낯익은 질문을, 그러나 도발적으로 던진 바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이 시대에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시대가 인문학에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특집을 마련했어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여전히 많다는, 이 괴리나 모순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부터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제 식으로 풀어본다면 제도로서의 인문학,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인문학은 인기가 없는 반면에 인문학의 이념이랄까 인문정신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사회가 큰 기대와 요구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문정신 또는 이념으로서의 인문학과 제도로서의 인문학을 구별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현시점의 이같은 괴리와 관련해서 인문학의 의미를 정리하고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현시기 인문학 현상의 의의와 함정
최원식 저도 요즘 언론에 등장하곤 하는‘인문학에 빠진 CEO’또는‘노숙자를 위한 인문학’등을 접하곤 인문정신이라고 할까, 이런 것에 크게 주목하고 있는 현상을 잘 독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인문정신, 인문학, 인문주의 같은 것들이 새롭게 관심을 끄는 풍조란,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민중적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 요구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분명 그 안에 새로운 요구가 들어 있는 만큼 과거 르네쌍스처럼 하나의 거대한 사조로서 새 시대를 만들어내는 혁명적 추동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운위되는 인문주의는 사회적 실천이나 행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왕년의 운동적 학문의 요구와는 조금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의 인문주의론에는 혁명 이후를 겨냥하는 포스트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백영서 포스트라고 하면 무엇을 염두에 두시는 것인가요?
최원식 행동이나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된 왕년의 지(知)로부터 주지주의(主知主義) 혹은 개인의 완성으로서의 교양으로 전환하는 것을 부추기는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겁니다. 창비에서 이 기획을 준비한 취지가 요즘의 이런 사태를 긍정만 하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인문정신론이 왕년의‘행동’을 비판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되 이 국면을 과거 행동론의 미달점까지 개조하는 장으로 잘 활용해서 새로운 인문학, 또는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는 인문학으로 가져가자는 뜻이지요.
백영서 새로운 인문학으로 가야 한다는 데는 물론 동의하지만 왕년의 행동과 실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최원식 1930년대 한국평단에 교양론·지성론이 등장했어요. 최재서(崔載瑞) 평론집 『문학과 지성』(1938) 서문에서 이원조(李源朝)는 주지주의의 대두가 지니는 의의와 함정을 날카롭게 간파해요. 문학이 “지성과 관계를 맺는 대신 행동의 도구로서” 작동한 20년대 카프(KAPF)시대와 달리 행동의 구속을 벗어나 “지성 하나만을 가지고 백일하에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면 안될” 30년대의 진군 앞에서 이루어진 그의 모색은 암시적입니다. 저는 그때와의 유비(喩比)를 보는 거예요. 30년대 지식인들은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20년대식 행동이나 실천이 빠져든 안팎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교양 또는 지성 같은 인문정신의 세련된 세례를 거쳐야 한다는 고민이었죠. 그런데 알다시피 이 과정으로 들어가면 보통 내공이 없이는 행동과 실천으로 가는 출구 찾기가 간단치 않다는 게 또다른 고민이었어요. 우리에게는 70년대 민족문학론과 그후 겪은 복잡한 과정이 있잖아요? 최근 인문주의의 새로운 모색도 맥락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백영서 30년대와의 유비가 흥미롭지만, 지금 말씀하신 왕년의 행동이나 실천에서 벗어난 교양론·지성론과는 다른 맥락에서 요즈음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게 아닌가 싶은데요. 제가 질문드린 인문정신이나 인문학 이념의 배경에는 제도로서의 인문학이 새로운 요구를 잘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사람들이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지식이 생산·유통되는 방식에 갑갑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는 점, 그래서 제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지식의 연구와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판단이 깔려 있겠지요. 독서시장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많은 편이니, 인문학이 위기라지만 실상 인문학자들의 위기가 아니냐는 말들이 있잖아요. 그런 현실을 염두에 두자면 종래의 인문학이 아닌 다른 인문학의 새로운 이념과 실천이 요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인문학 위기의 주범이 무엇인지, 새로운 인문학과 대비되는 낡은 인문학이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위기인지를 먼저 따져봐야 할 텐데요. 저는 위기가 인문학의 본래 이념인 인간다운 삶의 고양을 충실히하는 총체성 학문이란 점을 깨닫지 못한 데서 온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학문의 분화가 심각한 현실에 맞서 파편적 지식을 종합하고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감각을 길러주며 현재의‘삶에 대한 비평’의 역할을 하는 인문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연과학과 분리되고 이어서 사회과학과도 결별하고 남은 인문학에 머물러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선택의 길은 위태롭기 짝이 없지요.
최원식 행동을 봉쇄하는 인문정신론을 경계하면서 제대로 된 인문학을 건설하는 게 핵심이지요. 그 점에서 70년대를 다시 생각하면, 새로운 인문학이 그때 생겨났다고 할 수 있어요. 인문학자들이 사회적 요구에 긴밀하게 응답함으로써 말이지요. 사실 그때도 제도 안의 인문학은 우리가 다 경험한 바지만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해직교수들, 그리고 학교 안에 있었지만 민족적·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했던 학자들에게서 새로운 인문학이 싹텄다고 할 수 있지요. 제도 안의 인문학에서도 자양분을 받긴 받았지만 그것이 살아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어떤 점에서는 제도 인문학을 넘어선 새로운 인문학의 싹이 성장했지요. 그러다가 이제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당시에 제도 바깥에서 부딪혔던 학자들이 길러낸 후배세대가 대학에 많이 들어가 있어서 지금 죽어 있던 제도 인문학 안에서 갱신의 요구가 나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사회적 요구에 창조적으로 응답했던, 굳이 인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해도 그 새로운 학문의 싹들이 변화된 상황에서 또다른 창조적 응답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한국 대학과 학문의 식민성
백영서 이미 오늘 논의의 중심까지 들어가주셨네요. 저는 역사학을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역사적 변화과정을 간략히 짚고 싶어요. 70년대에 새로운 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이미 나왔다는 말씀에 대해, 그렇다면 그전에는‘갇힌 인문학’이 있었다는 얘기가 될 텐데 그 연유를 먼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70,80년대 인문학이 왜 새로운 인문학을 요구하는 상황을 낳았을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근대학문의 수립과 식민성을 연결해보고 싶어요. 근대성과 식민성이 착종되는 과정, 이를테면 경성제국대학에서부터 제도 안의 인문학은 식민성과 연결되고 한반도의 사회적 요구와 상당히 괴리된 채로 출발한 것이 아닐까요. 그 식민성이 그후 분단시기 내내 냉전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요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왔지요. 그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70년대에 다양한 학문적 갈래로 펼쳐졌고요. 그중 하나가 바로 민족문학, 민족사학이 되겠습니다만. 그렇게 대학 밖에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요구가 생산·전파되다가 그것을 주동했던 세대가 제도 안으로 진입했지요. 저도 그중 하나일 텐데, 최선생님 지적에 따르자면 그런 사람들이 현상황에서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변화된 상황은 무엇인지, 왜 70,80년대의 새로움이 더이상 새롭지 않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분과학문 제도, 즉 통합적인 인문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 즉 모든 것을 대학들의 경쟁으로 몰아가는 문제가 있겠습니다.
최원식 저도 기본적으로 그 진단에 동의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이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겪은 왜곡은 민족·민중의 요구에 창조적으로 응답하며 성립하지 못했던 식민성에서 비롯하지요. 누워서 침 뱉기일지 모르지만, 그러다 보니 대학을 구성하던 교수들에게 과연 학자와 교육자로서 제대로 학풍과 교풍(敎風)이 서 있었는지 의심스러워요. 근대 이전을 이상화하는 건 아니지만, 대학이 근대로 들어오면서 전통을 바탕으로 창조적으로 이어졌다면 학자들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왕년의 학자들에게는, 물론 부정적 모습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 바탕에 통합적·인문적 교육에서의 자기수양을 갖고 있었지요. 학문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나 실천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었잖아요. 그 위에서 자기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을 통합적으로 수행(修行)한다는 의식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던 것이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균관이 일제에 의해 아주 못난 모습으로 해체되고 경성제국대학 같은 식민지 대학이 생겼죠. 그나마 식민지시대의 학자들에게는, 왜곡되었지만 여전히 전통적 학인(學人)의 자세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주류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 이번에는 미군정에 의해 서양 대학의 방식으로 식민지시대 제국대학의 특징이 해체돼버리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분단이었어요. 분단이 되니까 우리가 실상 섬의 처지가 되지 않았어요?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로 갇혀 지내다 보니까 학인들의 통학문성이라든가 세계와의 교통이 희박해지고, 레드 콤플렉스 탓에 민족적·민중적 가치가 억압되다 보니까 전인류적 가치에 둔감해졌습니다. 그러면 분과학문 체제는 잘 발달했느냐면 그렇지도 않지요. 사실 구미 또는 일본의 분과학문 전통은 좁고도 깊은 전문성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지요. 저는 사실 그렇게 깊이 들어가는 학자들도 보고 싶어요. 그런 학자들이 주류는 아니더라도 곳곳에 포진해 있으면 좋은 것이지요. 요즘에는 다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데, 신자유주의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는 반대예요. 물론 대학사회를 돈벌이 열풍에 몰아넣는 최근의 이상한 대학개혁에 저도 단연 반대하는 입장입니다만, 우선 왜 이런 사태가 왔는지 먼저 우리 교수들이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분과체제를 방패로 학생들이 죽든지 살든지, 어떤 개혁에도 등 돌리며 세상과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교수들의 나태가 신자유주의‘개혁’을 자초한 셈이거든요.
인문학의 엘리뜨주의를 넘어
백영서 지금의 학자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전통시대 학인들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나누어보면서, 긍정적 측면의 하나로 통학문성을 강조하셨고요. 저도 동의하는 바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통시대, 분과학문으로 분화되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잖아요. 분과학문 내에서 제대로 된 전문가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단순히 예전의 통합적 학문으로 회귀하자는 뜻은 아니겠지요. 새로운 인문학이라면 분과학문간의 원활한 소통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요구, 새로운 교양에 대한 요구, 새로운 지식론에 대한 요구인 것 아닐까요. 이렇게 분과학문을 넘어선 새로운 통합적 학문에 대한 요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동아시아 전통의 연속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서양에서도 고대·중세에서는 인문학이 학문 그 자체였다가 근대로 들어서면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갈라지고, 거기서 다시 또 사회과학이 떨어져나가 더 좁아져서 지금의 제도 속의 인문학이 남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학문 전통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인문학의 엘리뜨주의, 귀족주의 취향 같은 것들이 떠올라요. 전통시대 학인의 풍모가 사라졌다고 하신 지적에서, 물론 그런 의도는 없겠지만, 엘리뜨주의나 귀족주의가 연상되는 게 사실이거든요. 오늘날 인문학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 보수적 성향을 지닌 쪽에서는 귀족주의적 태도가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아주 비장하게, 인문학은 사회변화와 관계없이 뛰어난 개인이 고독 속에서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지요. 전통시대에도 인문학은 상류층, 사대부의 몫이었고 일반인에게까지 미치지 않는 영역이었지요. 지배층으로서의 교양, 높은 신분에 맞는 문화적 장식이었던 측면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짚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대학에서 그런 태도를 많이 보면서 솔직히 역겨웠기 때문에 인문학을 강조하는 부류 중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요.
최원식 글쎄, 인문학이 고독한 것이라고 옛 선비들을 들먹이며 비장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우스워요. 왜냐하면 그게 전통적인 학인의 태도는 아니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자기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의 결합을 향해 부단히 노고하는 게 학인의 자세 아니겠어요? 그런데 기본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에요. 옛날 학자들은 나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요새 학자들은 남을 위해서 한다고 난리를 쳐요.(웃음) 제 지침 중 하나가‘위기지학(爲己之學)’이에요. 공자는, 유교는‘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거든요. 사회를 위해 무얼 한다고 요란한 학자들의 공부가 위인지학인데, 학문은 기본적으로 나를 닦고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나의 자유를 추구하는 거죠. 그게 결국은 사회적 인격과 같이 가서 사회적 인격을 높이려면 나의 인격을 높이고, 나의 인격을 높이려면 사회적 인격을 높이는 식의 선순환이 있어야 진짜 공부지요. 서양도 비슷하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진짜 학자라면 통섭(統攝)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두루두루 다 꿸 수밖에 없죠. 아까 말씀의 취지에 동의합니다만, 동아시아가 통학문적이고 서양은 아니었다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학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독하게 인문학을 한다는 발상은 그 선순환이 깨진, 예컨대 딸깍발이 샌님의 발상이지요. 사회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에 대한 엘리뜨적인 비탄과도 같아요. 인문주의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기존의 인문주의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돌파한다고 하면서 혹 귀족주의 또는 엘리뜨주의로 흘러갈 위험에 대해 제가 그래서 처음에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백영서 지금의 인문주의 논의가요?
최원식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요. 30년대 교양론·지성론의 대두를 요새 다시 보면서 그 생각이 더 들었어요. 확실히 30년대 들어 서구문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바탕을 두고 교양의 온축(蘊蓄)이라든가 지식을 정교하게 다루는 훈련에 능한 비평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비평 수준이 높아져요. 불문학과 전통적 교양에서 자양을 길어올린 이원조와 영문학에 젖줄을 댄 최재서도 그런 새 경향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이원조는 최재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성론을 견제했어요. 다시 행동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최재서의 『문학과 지성』은 한장의 휴지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최재서의 친일로의 전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원조는 새 담론의 의의와 그 위험을 통찰한 겁니다.
백영서 그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 관련 논의들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수행중인 혹은 앞으로 추구할 인문학은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통합적인 학문 자체라는 게 중요하겠는데, 최근 주요하게 제기되는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으로 통섭에 대한 논의가 있고 또 대안적인 실천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선배님이나 제가 공감하는 바로서의 인문학이 분과학문간의 소통, 학제적 연구, 또는 통섭학문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이른바 통섭학문이란 과학적 문화와 인문학적 문화를 하나의 위계적 체계로 대통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인데, 현실에서는 지식기반사회가 요구하는 부가가치 생산을 돕는 것 정도의 소통으로 축소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확인한 바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인문학이란 무엇보다 자기와의 소통이고 새로운 실천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정리해보고 최근의 대안적 논의들과 비교해보면 좋겠습니다.
최원식 그렇죠. 공부를 하면서 자기의 자유를 돌보는 속에서 우리가 딛고 사는 사회를 좀더 복되고 아름답게 만드는 집합적 과정에 참여하는 보람이 종요롭고, 또 그 속에서 전인류적 가치로 이월할 무엇을 발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요. 전인류적 가치라는 게 그걸 겨냥한다고 해서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사회가 더 나은 단계로 진화하는 데 공부가 어떻게 관련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문학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밖의 인문학과 대학 안의 인문학
백영서 덧붙이자면, 인문학 위기의 주범을 분과학문 탓으로 돌리고 대학의 학제연구를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하는 방향을 반성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즘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에서 연구비를 받으려면 분과학문으로는 곤란하고 학제연구를 해야 하는 풍토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회와의 소통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爲己)의 학문이지요. 출발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개인수양과 경세가 함께 추구되는 학문이잖아요. 그래서 자기를 위한 것과 사회를 위한 것이 같이 가야 한다는 전통학문의 덕목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통합적 학문에 대한 요구를 이러한 의미에서 짚으면서, 대안적 인문학으로 제기되는 여러 흐름들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연구공간‘수유+너머’의 활동이라든가,‘노숙자를 위한 인문강좌’‘재소자를 위한 인문과정’등이 있습니다. 엘리뜨주의의 소산이냐 전위부대의 새로운 실천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겠죠. 수유+너머 같은 경우는 생활공동체이기도 해서 일본에서는 새로운 지식생산의 거점으로 주목하는 단행본이 나올 정도예요. 해외에서도‘클레멘트 코스’를 만든 얼 쇼리스(EarlShorris)라는 사람이‘급진적 인문학’이라고 해서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을 주장한 바 있고요. 그는 노숙자 같은 빈곤층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강하며, 그 길을 열어가도록 하는 게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대안적 인문학의 활동들도 새로운 실천의 일종일 텐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최원식 제가 잘 모르는 데라서 조심스럽지만 우선은 그런 흐름들이 잘 발전하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이런 흐름들이 의미있는 사조로 진화해서 인문학의 혁신을 이룩하는 데까지 이르려면 국지성을 극복해야 하지 않나 생각돼요. 인문학의 혁신이 이룩되려면 안팎에서 손뼉이 마주쳐야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밖보다는 안, 결국 대학이라는 제도가 아닐까 해요. 그 점에서 제가 보수적인지 모르겠지만요.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우선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70년대에 대학이 그랬듯이요. 그런데 대학에 있어보면, 그동안 사회민주화가 꽤 진전되었는데도 민주화는 대학 정문 앞에서 정지해 있다고 느껴져요. 대학은 아직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이죠. 백주간이 계신 연세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단과대학의 자율성도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말씀해주신 그런 급진적인 흐름이 나오는 것도 대학제도가 워낙 완강하다 보니 그 안에서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린 데서 비롯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수유+너머나 철학아카데미도 모두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한 절망에서 나온 거 아닐까요? 앞서 대학사를 개관하면서도 보았듯이 한국대학들에는 사실 이념이 없어요. 대학이 자리한 지방에 뿌리박고 민족의 대학 또는 민중의 대학으로 나아가는 그 나름의 교풍이 살아야 학풍도 진작되는 것인데, 있는 것은 그저 영어로 연구하고 강의해서 세계 명문대로 도약한다는 우스운 과장뿐이지요.
백영서 저도 대학에 몸담고 있고,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고는 하지만 그런 식의 대안적 인문학의 실천에 적극 참여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제 개인적 실천범위는 창비를 중심으로 하는 정도라 한계가 있습니다만, 저도 그러한 흐름들이 잘되어서 대학이라는 제도에 어떤 긍정적인 충격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도 밖의 공간에서 지식과 삶을 결합하려는 새로운 인문학 모델을 실험해 주목받고 있지만 제도 속의 대학과 달리 지식의 재생산에서 불안정한 것은 사실이지요. 불안정성을 유연성의 기반으로 활용하면 좋지만 그걸 넘어서려고 제도를 모방하는 길을 택한다면 그 자체의 신선한 매력이나 동력이 떨어지기 쉽지 않을까요. 가능하면 그런 동력이 대학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참여하는 개인이 대학의 안과 밖 양쪽에서 활동했으면 합니다. 저는 그 흐름들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정도의 입장인데, 정작 문제는 대학 안에 있지요. 대학이란 제도는,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보아 여전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까놓고 묻고 싶어요. 대학이 정말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가. 민족의 대학, 민중의 대학, 지역과 함께하는 대학이라고 하셨는데,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 대학이 바뀔 수 있을까요? 선배님께서는 학장도 거치셨고 지금 BK(두뇌한국)사업단장도 맡고 계시니, 대학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위치와 자원을 확보하고 계신 편인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대학이 변화할 수 있을지, 또 변화의 동력이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요?
최원식 나는 그런 질문이 싫어요. 불가한 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하는 것이-
백영서 예, 지지합니다.(웃음)
최원식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학장을 해보면서 사회민주화가 대학 정문에서 멈췄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이걸 어떻게 하든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못하면 글쎄, 나라의 장래가 없지요. 인문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사조로서 르네쌍스를 만들어냈듯이, 우리의 논의도 그렇듯 하나의 사조, 하나의 운동이 되어야죠. 분명 우리 70년대에는 거대한 사조가 있었거든요. 그 속에서 저는 창조적인 인문학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문학이 사조로서 지금 존재하는가, 그게 중요하지요. 그것이 지금 있다면, 전성기에 있는가 퇴조기에 있는가. 우리가 현재 중대한 기로에 있는데, 우리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그 지적 작업을 수행해야 해요. 그러려면 뭔가‘학술운동’으로 커야 됩니다. 지금 그걸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죠.
백영서 70년대에 새로운 인문학을 추구하는 사조와 운동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날 그것이 가능한가를 점검하기에 앞서 그때 바람직한 변화를 왜 더 많이 생성하지 못했을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변화의 동력이 학생들에게 있었고, 대학에 자리잡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이 주축이었다는 점이지요. 그들에게는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주류적 사조로 만들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음의 문제는, 제 체험에 근거한 얘기인데, 상당수가 대학제도로 흡수되면서 오히려 변화의 힘을 잃은 것 같아요. 비유하자면, 여성학의 경우 제도 바깥에 있을 때는 비판적인 학문이었는데 정작 대학에 여성학과를 만들면 그저 많은 분과학문들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아닌가 하거든요. 자원을 얻어서 지속적인 재생산은 가능한데 비판력을 잃게 되기가 쉽지요. 그렇게 제도 바깥의 힘이 대학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기계 속에 흡수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최원식 굉장히 중요한 지적을 하셨어요. 다른 하나는, 그때 창조적인 인문학을 했던 분들이 창조적인 만큼 소수여서 대학제도 전체를 바꿀 만한 힘에는 못 미쳤다는 거죠. 또 그때가 대학이 바뀌는 시점이었어요. 가령 저는 교양과정부가 서울대 문리대를 망친 주범의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문리대에 있었던 분들이 물론 엘리뜨집단이었지만 최후의 학인 같은 풍모가 약여해서 연대와 소통이 그런대로 잘됐고 나름의 사회의식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쨌든 교양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학의 대형화가-
백영서 대학의 대형화, 대중화죠.
최원식 예, 대형화와 대중화가 겹쳤지요. 그러면서 대학이 변했고, 또 하나는 그때 운동이 거대담론이었어요. 전통적인 권력, 거대한 국가권력만을 보고 있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각각의 분야들, 특히 대학제도를 바꾸는 일의 절실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독재의 탄압이 워낙 서슬퍼렇기도 했지만 그때는 정치권력만 잡으면 다 된다는 식이었잖아요.
백영서 맞는 말씀입니다. 70년대 새로운 흐름이 왜 제도 속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는가 생각해볼 때 국가권력의 변혁에 너무 치중했다는 이유도 있죠. 예컨대 대학의 학생회도 그렇고, 교수노조든 민교협이든 전국적 정치이슈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개별 학교 구성원들의 생활세계와 관련된 변화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쓴 게 아닐지요. 그와 더불어 구조적인 변화의 문제, 방금 말씀하신 대학의 대형화와 대중화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안을 못 찾고 주저앉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대학의 변화는 아주 강력한 동력, 국가나 시장에 의해 작동되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중계하는 중요한 에이전트가 학진이죠. 학진을 통해서 BK나 HK(인문한국) 사업 등이 추진되고, 교수 개인들의 업적을 관리하는 학술지 등도 이러한 변화에 개입하고 있어요. 특히 젊은 교수들이 많은 사업에 참여하고 주어진 평가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학문관에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변화의 축은 바로 경쟁력이죠. 대학간 경쟁을 통해 각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고, 그럼으로써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이나 저나 대학에서 그러한 사업을 책임지고 있으니, 최근 대학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국가 주도 학술프로젝트의 한계와 가능성
최원식 저도 고민이 많아요. 70,80년대에는 시민대학이나 민중대학 같은 곳이 굉장히 많았고 저도 꽤 다녔지요. 그것들은 분명 사조로서, 그리고 운동으로서 새로운 인문학이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 흐름들이 다 제도 안으로 들어갔어요. 요즘엔 대학마다 평생교육원 등이 있지요. 그전에는 제도 밖에서 이루어지던 운동으로서의 지식 교류나 실천이 제도화되면서 형해화된 측면이 분명히 있죠. 제가 있는 인하대는 공대로 출발했기 때문에 문과대학의 위상이 낮아요. 그래서 BK를 받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되었지요. 그런데 첫해에는 탈락을 했어요. 사실 그 이전에 대학원의 국문과는 꽤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BK가 생기는 바람에 오히려 어려워진 거예요. 거기 들어가지 못하면 기왕에 구축했던 것들마저 붕괴될 위험에 처했으니까요. 실제로 첫해 사업지원에서 탈락했을 때 인하대로 올 자원들이 다른 곳으로 다 가버리니까 타격이 컸거든요. 그러니 이게 참, 호랑이 등을 안 탈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결국 다음번 BK사업에는 참여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물론 국가주의 프로젝트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데 대한 고민도 있었죠. 하지만 우리 인문학의 학과체제를 보건대, 이 흐름을 타면서 겪는 파괴적 효과에는 분명 혁신의 요소가 있어요. 그럼에도 일을 해나가다 보니까 확실히 문제가 있어요. 아까 지적했듯이 제도화되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상당하다는 점, 그게 고민이죠.
백영서 방금 호랑이 등을 탔다고 적절한 비유를 하셨는데, 그럼 호랑이 등을 타서 잘된 점이 뭐고 문제점이 뭐였는지를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새로운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와의 소통일 텐데,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나 실천 같은 것에 관해서도 생각들이 바뀌는지요?
최원식 그 문제가 아직은 어렵더라고요.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면이 있어서요.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학제적 주제를 수행하려고 하는 학생도 많지 않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심사니 뭐니 여러 제도적 문제가 복잡해져서 아직 그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까 오히려 그런 쪽을 더 장려할 필요가 있겠다 싶네요. 그리고 사회와의 소통 문제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 그런 자부심이 있어요. 제가 1982년에 영남대에서 인하대로 옮겼는데, 우리 과나 유관 학과는 사회적 소통에 대한 관심이 많은 교수들이 초빙된 덕분에 기본적으로 학교 안팎이 잘 연결된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학문적 실천에 그것이 잘 녹아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일을 해보시면 알겠지만 학진의 규정을 따른다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그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거든요. 현재로선 변화의 싹은 오롯하지만 그 두가지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백영서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기본적으로는 같아요. 연세대 국학연구원장으로서 작년에 HK사업에 응모해서 채택됐는데, 응모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이렇게 설득했어요.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는 걸 꼭 국가주의라고만 볼 것은 아니다, 사실 국민의 세금이 아니냐. 국가주의의 노예가 되면 안되겠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학문적 방향에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되는 거지요. 전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학진의 번잡한 요구가 참 문제이긴 한데, 그것도 너무 고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대학에서 그것을 운영하는 우리들이 부단히 요구함으로써 바꿀 수 있겠다는 판단이에요. 오히려 제가 부딪히는 문제는 학교 내에 있는 것 같아요. 학내의 분과이기주의 같은 것이죠. 저희 국학연구원에는 오랜 전통이 있는 만큼 기득 관행들도 존재합니다.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BK사업과 달리 HK사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학원생 위주가 아니라 대학에 정규직으로 취직이 안된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새로운 연구자로 뽑아서 정년보장 자리까지 갈 수 있도록 돕고, 대학 내 연구소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중점 연구소로 부상시키라는 거예요. 그 배후에는 기존의 분과학문 체제에서 감당할 수 없는 학술의제를 연구할 우수인력을 키워달라는 요구가 있고요.
어쨌든 국가나 시장의 요구는 일관된 것 같아요. 기왕의 분과학문 제도는 잘못되어 있고, 그것으로는 국제경쟁력을 높이라는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니까 새로운 변화를 국가의 재정으로 추동하려는 것이죠. 실제로 해보면 활용할 여지는 충분한데, 문제는 기존 분과학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얼마나 잘해낼 수 있을까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글로벌 자본주의시대,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미국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밖의 나라들에서는 다들 대학에 이런 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단적으로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COE(Center of Exellence)프로그램, 즉 대학에‘탁월함의 거점’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한 단계(2003~2007)가 끝나서 이제 다음 단계인‘글로벌 COE’로 넘어가 있죠. 이것에 참여하는 쪽도 힘들어하지만 참여하지 못한 쪽에서는 다들 실패한 사업이라고 얘기해요. 그 이유 중 하나가 굉장히 번잡하고 관료적인 행정처리들이 많다는 거죠. 국가가 선택과 집중을 해서 몇개 대학과 과제에 지원해주는 식으로 과연 일본의 학술적 국가경쟁력이 높아졌느냐, 소위 세계 몇위의 대학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COE에 참여했던 주요 인력들, 대표적인 수행자들이 원래 학술적 발신력과 조직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행정업무를 관리하느라고 학자로서의 능력을 소진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더군요. 다들 COE사업을 하느라고 CEO가 되었다는 거죠. 우리가 참고할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사업의 책임자뿐 아니라 참여하는 사업단이나 연구자, 학생들이 선정과제를 놓고 그것이 정말로 국가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는지, 또는 오늘 우리 대화의 초점인 새로운 인문학의 역량 강화에 부합하는 의제인지 부단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최원식 문제는 많지만 어떻게든 해나가야지요. 주어진 한계 안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만들어갈 싹, 그 싹이 여러가지를 생성할 수 있는 조건은 있어요. 저는 그 안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금 더 맹성(猛省)했으면 좋겠어요. 제도 안에 있지만 왕년과 같은 사조로서, 운동으로서 나아갈 동력을 새로 만들어야죠. 여기에서 동기 부여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내부에서 토론을 통해 이 사업을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 그것을 통해 우리 인문학 또는 사회의 진화를 위해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점검해야겠지요. 그리고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까 사업단들끼리 연대하고 소통하면서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더 높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백영서 미국의 대학사회에서 교수의 경쟁력과 관련해서, 예전에는 “publish or perish” 즉 발표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들 했는데, 그다음에는 “publish and perish”라고 바뀌었답니다. 발표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 일본에서는 “publish and associate”(발표하라 그리고 연대하라)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새로운 학문적 업적을 창의적으로 내는 동시에 연대하자는 거죠. 대학이 원래 길드조합이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연대, 연합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학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겠죠. 기왕에 호랑이 등에 탔으면 그것이 대학의 변화, 새로운 학문을 만드는 과업에 하나의 거점이 된다고 여기고 운동성을 확보해야지요. 개별 대학 안에서 잘 안된다면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사업단들끼리 혹은 사회적 지지 속에서라도 해나갈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표현이 다소 강할지 모르지만 변화의 거점이자 운동의 거점, 또는 대학 안에서 일종의 학술게릴라 같은 자기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때에야 70,80년대 생성된 새로운 사조이자 학술운동의 맥을 잇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니면 프로젝트 하나 근사하게 하다가 돈 다 쓰면 남는 것 하나 없게 되는 위험이 늘 있지요.
최원식 근사하게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죠.(웃음)
평가제도의 개선, 누가 나서야 하는가
백영서 좀더 구체적인 주제로 들어가서 대학평가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우리 주제인 인문학의 발전에 좁혀서 살펴보더라도, 최근 학진이 요구하는 등재지 중심의 평가제도가 대학들에서는 계량적 평가의 강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SSCI(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처럼 국제적으로 등급이 매겨진 학술지들에 발표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평가제도와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의 발전이 어떤 관계가 있을지 점검해보았으면 합니다.
최원식 저는 그 평가제도가 일정하게 효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은 워낙 엉망이었잖아요. 예전에 한 원로학자가 돌아가셨을 땐가 그런 농담이 있었어요. 논문을 안 씀으로써 학계에 기여하는 마지막 분이 돌아가셨다고요. 학자들이 전부 논문 쓴다고 난리인데, 과연 그중에 괜찮은 논문이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 하는 의심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정도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학진이 하는 계량적 평가제도가 문제가 많지만 학자들이 대학에 임용만 되면 정년까지 자동 보장되는 구조에서는 일단 그런 평가가 어느정도 효과를 거둔다고 봐요.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의 평가제도는 문제가 심각해요. 우선 인문학에서는 저서가 논문 한편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잖아요. 그걸 저서 중심으로 바꿔야죠. 그다음에는 논문 평가에 질적 방법을 도입해야 합니다. 사실 지금의 평가제도는 학자의 수월성에 대한 변별력이 잘 드러난다고 보기 어렵거든요.
백영서 그와 관련된 말씀을 들으면 좀 답답한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몇년 전에 이 문제로 창비 지면에서 좌담(「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은 가능한가」, 2004년 겨울호-편집자)을 할 때도 다 나왔던 내용이거든요. 대학평가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어디서 다시 이 주제를 꺼내도 똑같은 얘기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왜 문제가 되풀이되고만 있을까요. 저는 남의 탓을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가제도의 대안을 만들자는 거죠. 입시생 부모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고민하다가도 막상 자식이 대학에 가면 나 몰라라 하듯이, 중견 이상의 교수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중견들이 나서서 대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평가제도가 나온 것이 학문의 탁월함이나 수월성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인데, 학진의 기준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학문의 탁월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대안을 만들어야지요. 그런 다음에는 그 대안을 가지고 압박해서 받아들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고 봐요. 학진도 자신의 기준이 절대적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바에야, 교수노조든 어느 단체든 여기에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지금은 교수들이 각개격파당하고 있잖아요. 이러다 보니 학진 기준, 아니면 중앙일보 평가기준, 요즘에는 조선일보도 새로 끼어든다고 하더군요, 대학에 엄청난 자료를 요구해 계량평가를 위주로 하는 이런 평가가 잣대가 되고 있어요. 인문학자들이 다들 평가기준에 저술이나 번역을 넣어달라는 요구는 하고 있어요. 아니면 학술규범이나 윤리의 변화를 요구하는 근본주의로 가고요. 저는 이 정도에 그치지 말고 학문적 탁월함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물으면서 평가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HK에서든 BK에서든 의제로 삼을 수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이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타이완의 제 친구 천 꽝싱(陳光興)이라는 학자가 최근 창비에 쓴 글에서 이 대안적 평가제도를 찾는 작업을 동아시아 지식인의 연대를 통해 해나가자고도 했지요(「화해의 장벽」,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편집자). 곧 이 작업이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학자들, 소장 교수들이 이 일에 나서기는 힘들어요. 늘 평가에 시달리고 있으니까요. 중견 이상, 저나 선배님 같은 사람들의 일감이지 않나 싶어요.
최원식 그게 왜 잘 안될까요? 요구를 안해서 그런 건 아닐 테고요.
백영서 결국 대안을 못 찾아서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분야들에서 대안을 못 찾는 것과 통하는 바가 있겠지요. 예컨대 공생사회(共生社會)의 모델이 무엇인지가 불확실한 것처럼요. 우파에 경쟁사회라는 모델이 있다면, 그 대안으로서 공생사회 모델은 지금도 혼미하잖아요.
최원식 글쎄요, 그런 큰 담론과 연관시켜도 되겠지만 이 주제는 좀더 정밀하게 따져서 채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지 싶네요.
백영서 주체가 없는 것 같아요. 대안을 찾는 교수가 없지요. 젊은 교수들이 열심히 움직이더라도 나이든 교수들이 도와주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왜 교수평의회나 교수협의회는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요. 그 문제가 큰 담론과 연결될 수 있는 고리 중의 하나가 학문적 탁월함이나 수월함의 내용을 재규정하는 일인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우리 얘기의 맥락에서 보면 평가의 기준을 사회와의 소통, 학문의 사회성, 또는 학문과 생활세계의 관계에서 따져볼 수 있을 텐데, 지금 대부분의 평가기준은 그렇지 않죠. 하지만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논의의 방향을 좀 바꿔서 분과학문을 넘나드는 통학문적인 동시에 사회와 소통하고 새로운 실천의 길도 제시할 수 있는 인문학 담론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중 하나가 동아시아 담론이 아닐까 싶어요. 올해 최선생님은 1993년 이후에 쓰신 글들을 묶은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를 펴내셨는데, 새로운 인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동아시아론에 대해 논의해보죠. 새 저서를 읽어보면서 오늘 논의와 관련해 주목한 것을 말씀드리면, 첫째는 선배님의 관심이 한국문학이라는 영역이나 전공에 갇히지 않고 여러 분과를 넘나든다는 점과 더불어 국경을 횡단한다는 점, 즉 동아시아 전체의 현상에 주목하신다는 점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사적인 문제까지 따라잡고 계시고요. 그리고‘한류’같은 대중문화를 통해 동아시아가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동아시아의 “공감각”을 만들자고 제안하신 부분이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얘기된 바지만 새로운 인문학이 생활세계나 감각의 문제까지 내려와서 뿌리내려야 한다는 점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창비의 동아시아 담론을 얘기할 때 우리 두 사람을 주로 거론하지요. 그것에 대한 비판 중에서 중요한 논점이 한반도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를, 즉 탈민족주의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죠. 또한 분단체제를 주목하고 한국의 현실에 착목하려는 방향에 대해, 결국 동아시아론은 한반도 문제를 푸는 담론이며 한반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검토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선배님의 동아시아론의 자전적 전개를 보여주는 글이 「천하삼분지계로서의 동아시아론」이지요. 거기 보면 몇개의 단계가 나오는데, 책 전체적으로 보면 초반에는 문명론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말씀하시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던 것 같아요. 김지하 시인의 영향도 엿보이고요. 그러다가 분단체제와 만나면서 그것이 운동론 또는 변혁론으로 뿌리내리는 면이 보입니다. 그 둘이 때로는 충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동아시아론 비판에 대한 반비판과 자기비판
최원식 옳게 보셨습니다.(웃음) 제 안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처음에는 동도론(東道論)적인 것이 강했는데, 분단체제론과 만나면서 그 둘 사이가 울퉁불퉁할 겁니다. 동아시아론을 구성하는 문명론과 운동론, 이 두가지가 이쪽으로 기울었다 저쪽으로 기울었다 하지요.
백영서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웃음)
최원식 그런데 한반도중심주의라는 비판은 좀 문제가 있어요. 동아시아론이 구름 위를 노니는 청담(淸談)이 아닌지라 분단을 당연히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적지 않아요. 동아시아를 논하면서는 남북문제를 제외해도 좋은가? 그렇게 해서 좋은 꼴을 못 봤어요.(웃음)
백영서 그래요, 우리의 현장이잖아요.
최원식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식민지시대를 연구하면서도 식민지라는 사실을 깜빡 잊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요. 특히 최근에 포스트주의가 유행하면서 더 그래요. 그런데 식민지시대의 문학운동에서도 그런 면이 보여요. 프로문학이 그래서 깨진 겁니다. 식민지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쏘비에뜨에 있는 듯이, 또는 선진자본주의사회에 사는 듯이 착각했던 거죠. 김두용(金斗鎔)이라는 맑스주의 평론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30년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도입을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건설기의 비평인데, 우리 조선은 사회주의 건설은커녕 혁명 전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는 거죠. 프로문학은 결국 식민지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위에서 자신의 논의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한 겁니다. 모더니스트들도 그런 면이 있었죠. 김기림(金起林)은‘오전의 시론’을 내걸며 서구적 현대를 꿈꾸었어요. 식민지라는 조건에 대해서 몰각했지요. 그런 점에서 프로문학과 모더니즘은 근대를 뛰어넘어 20세기 사조에 발맞춰 따라가려는 열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쌍생아적인 측면이 있어요. 김기림도 식민지와 진지하게 대면하면서‘오전의 시론’을 수정하는 자기비판 속에서 전체시(全體詩)로 나아갑니다. 교조주의자였던 임화(林和)가 식민지적 조건을 숙고하면서 근대문학론 및 민족문학론으로 전진했듯이, 김기림도 철없는 모더니즘으로부터 성찰적 모더니즘으로 이행하게 된 것이 모두 식민지라는 현실을 새삼 바로 보면서 이루어졌던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단도 마찬가지예요.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깜빡깜빡하는 문학과 연구가 적지 않아요. 분단을 너무 의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분단을 괄호치는 것은 더 문젭니다. 양극단을 넘어서는 게 중요하지요. 동아시아론이 그 점을 잊을 때 비슷한 경로에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최근에는 저도 한반도중심주의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지려고 노력은 해요.
백영서 제4의 거점을 얘기하셨죠. 중화중심주의도 아니고 일본중심주의도 아니고 한반도 허브주의도 아닌 제4의 거점 말입니다.
최원식 그동안은 동아시아론이 문명론으로 비약하지 않기 위해서 분단체제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왔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완화하는, 해독(解毒)하는 노력이 함께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백영서 그 말씀이 탈민족주의와 관련이 있는데요, 최근에 김흥규 교수가 사석에서 최선생님이 요즘 탈민족주의로 가고 있다며 비판하더라고요.‘한일연대 21’활동에 대표로 참여하셨다가 그만두신 것을 보면서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요.
최원식 제가 사실은 민족주의 저리가라 할 정도로 국수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인데, 스스로 제 정신의 균형을 위해서 그런 것이죠. 제가 탈민족주의라고 아무리 해봤자 워낙 타고난 국수주의자라서요.(웃음)
백영서 그렇게 얘기하시면, 창비의 동아시아론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민족주의의 확대라는 건데 그 혐의의 근거를 확실히 제시해주는 물증이 될 수도 있겠네요.(웃음)
최원식 ‘소국주의(小國主義)와 대국주의(大國主義)의 긴장’을 내걸었지만 실은 제가 진짜 대국주의자였기에 소국주의란 말 자체가 저 자신에게 아팠어요. 말하자면 끊임없이 스스로 백신을 주사하면서 독을 빼나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한반도중심주의나 민족주의가 결국은 한반도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것을 점점 절감하기 때문에 부러 소국주의를 자꾸 발화하는 거에요. 저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요.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걸림없는 대자유에서 놀자는 것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도 한반도중심주의조차 해독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어느 제자가 와서 제가 예전에 쓴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이 결국에는 리얼리즘 확대론이었는데, 이번 글을 보니까 확대론이 아니라 진짜 회통으로 간 것 같다고 하더군요.(웃음)
백영서 저도 지난 창비 봄호에 실린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를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인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에 해당되지 않나 싶었어요. 새로운 발상을 하게 만들고, 기존의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보완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그 글에서 중형국가를 말씀하시잖아요. 그 논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왜 소국인가, 이미 중형 이상이 된 마당에 소국주의로 가자는 건 낭만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소국주의란 대국주의를 견제한다는 의미의 발상이잖아요. 발상 자체는 신선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뿌리내리려면 중형국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제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고, 이제 새로운 인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길, 다시 말하면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지식의 생산을 창비의 활동과 관련해 살펴보면 어떨까 합니다. 사실 현직 주간이 이런 얘기를 하기가 좀 뭣하지만, 아까 얘기한 70,80년대의 지적인 새로움, 새로운 사조의 역할을 창비가 맡아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계간지가 담론의 장을 만들고 그것을 확산해왔지요. 당시에‘창비학교’라는 말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창비가 새로운 인문학의 사조를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봤으면 합니다. 저희가 최근에‘창비담론총서’세권을 내면서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주요한 담론 몇가지를 제시했습니다.(『이중과제론』 『87년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 창비 2009-편집자) 제가 총서 발간사에서 창비가 그간 좁은 의미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문학적 감수성과 현장의 운동경험이 어우러진 교류의 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담론의 생산이 가능하지 않았는가라고 썼는데, 동아시아론 이외의 담론들의 생산작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70년대 이래로 제기한 담론 가운데 민족문학론이니 리얼리즘론 같은 것도 있습니다만.
창비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최원식 이렇게 묶어내니까 담론과 담론 사이의 연관관계도 더 분명하게 보이고, 또 한 담론이 지닌 다양한 측면도 비교하게 돼서 여러가지 도움이 됐어요. 말씀하셨듯이 70년대의 새로운 인문학의 창출에서 창비가 맡은 역할은 막중했지요. 교과서와 학교 밖에서 창비는 지식과 정보의 강력한 원천이었고, 창비를 읽고 토론하며 쌓인 자양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일상의 무기고라고 할 수도 있었어요. 지적인 훈련이 주지주의로 제한되지 않고 행동과 조응했다는 점에서 30년대와 달리 행복한 결합의 시대였지요. 이번에 나온 책을 보면서 느낀 점은, 옛날의 창비는 이렇게 따로 묶어내지 않아도 저절로 논의와 행동의 중심이었다는 거죠. 저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70년대에 새로 일어난 사조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조가 끝나고 새 사조로 넘어갔다고 보지 않거든요. 다만 지금이 어떤 국면인가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전성기를 넘어섰다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야지요. 전성기를 넘어섰다는 것은 새로운 사조의 시작일 수가 있거든요. 물론 70년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죠. 이미 겪어온 판들을 어떻게 독해하면서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영서 저는 그 말씀이 확 다가오지가 않네요. 딱 잘라서 말하자면, 전에는 저절로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중심이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최원식 율곡(栗谷) 선생 말씀에, 창업기(創業期), 수성기(守成期), 경장기(更張期)가 있어요.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창업기에 있는데 수성기의 전략으로 가면 안되는 거죠. 경장기라면-
백영서 경장을 잘못하는 망하는 건데-
최원식 그렇다고 경장을 안하면 더 안되지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이 경장기 같아요. 이건 창비만이 아니라 70년대 새로 일어난 사조들이 다 마찬가지죠. 현재 우리가 여러 주객관적인 변화 속에 있잖아요.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우리도 살고 우리사회도 살지요. 그런 점에서 중심이냐 중심이 되고자 하느냐로 나누지 말고 창업기, 수성기, 경장기의 3단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백영서 역사순환론에 보면 창업기, 수성기, 중쇠기(中衰期), 중흥기라고 하지요. 중흥이 잘 안되면 곧 망하는 거예요. 중흥은 곧 개혁인데, 개혁은 모순이 있어서 하는 것이고, 그것을 잘못 덧들이면 몰락하는 거죠. 역사순환론은 운명론적 분위기가 있는 비유라 딱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창비가 중흥기를 거쳤느냐 아니냐가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해요. 그 비유에 따르자면 제2의 창업기가 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중흥기가 진행되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문제를 최근의 담론과 관련해서 돌아보면 현실과 밀착해서 발언하는 데는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고 봐요. 시사문제에 개입하는 것부터 정세 분석에까지 성공적인 면이 있는데, 이것을 보편적으로 소통하는 데는 약하지 않았는가. 국내에서도 그렇고 국외적으로도 그렇고 소통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싶고요. 이 논의들을 과연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소통하고 토론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좀더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총서 첫권의 주제‘이중과제론’의 경우, 분단체제와 연관해서 한국 현실에 뿌리내리는 논의는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을 좀더 확장해주는 면에서는, 본래 소통범위가 넓은 발상인데도, 충분히 이뤄지고 있지는 않다는 판단입니다.
소통의 문제 얘기를 하다 보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군요. 작년의 촛불집회 이래 주목받는 것으로 무수한 개인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생산의 주체로 떠오른 현상이 있지요. 그들이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문제제기를 함과 동시에 자신이 해결자로 나서는데,‘대중지성’이라고도 불리잖아요. 창비담론이 그들과 어떻게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가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변해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또 대중지성이니 뭐니 하고 이름붙이지 않더라도 대학 수업에서 만나는 보통 학생들, 취업준비에 시달리는 젊은 친구들의 일상적인 삶의 고민, 그야말로 인문학적인 문제제기와 어떤 통로로 만나야 하는가도 무시할 수 없지요.
최원식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실 BK와 HK가 후속세대의 위기에서 비롯된 만큼 후속세대를 어떻게 잘 육성하느냐가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배들이 어떻게 후속세대와 소통해서 그들이 자기 식대로 자기 시대의 인문학을 만드는 데 성공하도록 돕느냐의 문제입니다. 혹자는 이 국면에서 소통의 위기를 운운하는데, 글쎄 저는 둔감한 탓인지 비관적이지 않아요. 학교로 돌아온 뒤 오랜만에 학부수업을 하는데 역시 대학선생은 학부수업을 해야 맛이에요. 이번 학기에는 박태원(朴泰遠) 탄생 100주년이기도 해서 그의 장편들을 함께 읽어요. 학생들한테 많이 배웁니다. 리얼리스트는 비판하고 모더니스트는 옹호하는 박태원을 학생들은 실감에 즉해서 이런 기존 논의의 틀을 넘어 자기 식으로 독해하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보고서들을 간간이 만나면 정말 즐겁습니다. 소통의 위기는 과장됐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어른이 문제 아닐까? 애들이 만만치 않아요. 말도 조심해야 해요. 얼마전에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제대로 된 평론이 없다고 강의중에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했더니 다음 시간에 당장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가져왔어요. 나는 모르는 분의 글인데 훌륭한 거예요. 그 글을 보니 신군부 아래 굴종한 80년대의 이중성, 어쩌면 독재보다 더 무서운 도시화의 물결이 최후의 농촌을 삼키는 그 시대의 표정을 정말 잘 독해했더라고요. 집단지성 또는 대중지성을 실감했어요.
백영서 수업을 통한 소통의 즐거움에 대해 들으면서 떠오르는 얘기가 있어요. 이번 대화 준비과정에서 지방 사립대에서 영문학 가르치는 창비의 동료 편집위원이 실용적인 영어교육 시간에 가장 인문(학)적 주제들에 대해 토론수업을 한 경험을 얘기하더군요. 그 학생들에게 인문적인 교육이란 사치나 당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그것도 재미와 결합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해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고, 또 새 학기에는‘사학입문’이란 교양과목을 맡아 자서전 쓰기를 중심으로‘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면서 취업 대비 자기소개서를 쓰는 실용성과도 결합시켜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중과 소통의 통로를 넓혀가는 한편으로, 정보기술의 급속한 발전 덕에 지식생산자로서의 지위와 성취감을 갖게 된 대중의 집합지성과 직접행동이 갖는 문제도 주의해야 합니다. 종종 쏠림현상 같은 왜곡된 민중주의로 빠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주체로 요즈음 주목받는 대중, 다중이 70,80년대의 민중과 얼마나 다른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비로서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지요.
최원식 선배 또는 어른이 아니라 후배 또는 젊은이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그들과 소통하는 길을 찾는 것은 창비를 비롯한 70년대 이후 사조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저도 봐요. 그런데 제 판단으로는 그들을 이른바 민중도 아니고 대중도 아닌 다중으로 평가하는 데는 유보적입니다. 저는 예전부터도 민중과 대중을 칼같이 구분하는 데 비판적인데 서양에서는 대중이 피동적 객체일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거든요. 대중은 원래 불교용어인데, 비구(남성승려) 비구니(여성승려) 우바새(남성신도) 우바이(여자신도)를 통틀어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부릅니다. 승려와 신도가 똑같이 대중이니까 엘리뜨에 의한 대중 지배라는 서구 도식은 우리에게 잘 맞지 않아요. 그러니 평등의 눈으로 보면 대중이 민중이고 민중이 대중이겠지요. 촛불집회로 집중적으로 표현된 이 새로운 집단이야말로 민중과 대중 사이에 길을 낸 민중적 대중 또는 대중적 민중이 아닐까요. 선배들이 칩칩하게 새 시대에 개입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는 사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단 그들의 시대는 그들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문학으로서의 사회인문학
백영서 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문학의 과제를 토론해왔는데, 그걸 정리하면서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저는‘사회인문학’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제가 수행하는 HK사업의 과제명으로 신조어이긴 합니다만, 이 이름을 붙일 때 질문이 많았어요. 단순히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합치자는 뜻이냐고 묻죠. 저는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본연의 인문학, 사실은 학문 자체요 총체성의 인문학이기 때문에 본래 지니고 있던 사회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의 의제를 학술의 의제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며, 학문의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학술사적인 자기성찰이 첫단계로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회인문학을 얘기할 때 첫째로 성찰을 꼽습니다. 둘째는 소통입니다. 분과학문간 소통도 하지만 사회와의 소통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식과 삶의 소통, 학문 수행을 통한 삶의 변화를 기대하지요.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이처럼 성찰과 소통과 실천을 통해서 인문학의 사회성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의 인문학을 창비가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하는데, 예전과 달라진 점은 편집진의 구성원 상당수가 제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거죠. 오히려 제도 안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인데,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들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운동성을 회복한다든가, 현장에 밀착한 논쟁적 글쓰기, 이른바‘창비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지요. 그게 얼마나 성과가 있는지는 독자분들이 평가할 문제지만요. 그것이 인문학의 본래의 역할이자, 현재 제도로서의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서는 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최원식 인문(人文)이라는 게 인간의 무늬잖아요. 해와 별 등 천문(天文)은 하늘의 무늬고 강과 숲 등 지문(地文)은 땅의 무늬니까, 인간세상을 문채(文彩)나게 하고 빛나게 하는 문명과 문화가 다 인문인 거죠.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이 따로 있고 인문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문학이 문사철(文史哲) 위주로 축소되었죠. 그런 점에서‘사회’라는 말을 붙여서 인문학의 원래 의의를 되살리고자 하는 취지에 찬성이에요. 그런데 후배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 말은 통학문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가 않은 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사실은 사회인문학이라고 말을 내건다는 것 자체가 위기의 표현이거든요. 창비 안의 사회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과 문인들의 학제적 교류가 70년대만큼 원활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그 시기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시기는 르네쌍스 시대여서 온갖 것을 한 사람이 다 했잖아요.
백영서 르네쌍스인이죠.
최원식 맞아요. 르네쌍스인이었어요. 요즘 분들에게 르네쌍스인이 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공감각을 키우려는 의식이 더 요구됩니다. 이 시대에 맞는 새 모델을 만들어야 하니 지금보다 훨씬 힘들지도 몰라요. 그러나 창비처럼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인재집단이 드물기도 하려니와 현재 우리나라 운세로 보건대 미리 접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봐요. 사회인문학의 이름으로든 아니든 새로운 인문학의 출현을 요구받고 있는 이 시대에 창비가 그 허브 역할을 새로운 수준에서 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백영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고, 더군다나 지금 창비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주간으로서 뼈아픈 말씀입니다. 방금 천문과 인문 얘기를 하셨는데, 서양에서도 휴머니티(humanity)라고 단수로 쓰면 인간다움 내지 인간성이지만, 복수로 쓰면 휴머니티즈(humanities), 인문학이거든요. 곧 인문학이라는 건 영어를 놓고 봐도 인간성에 대한 탐구지요. 때로는 휴머니즘(humanism, 인문주의)도 인문학이라고 옮겨야 더 적합한 경우도 있어요. 인간성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 총체라는 의미라면 당연히 인문학도 총체적 학문이란 거지요. 저희 창비 편집진 내부에서도 전문영역을 심화하는 건 좋은데 그 영역들을 넘나드는 데에서는 더 분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지요. 이렇게 말하면 천재나 르네쌍스인이 될 수 있는 거지 일반인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핵심은 인간성에 대한 탐구 자체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죠. 더욱이 요즘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까지도 넘나드는 연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를 하기 위해서는 70,80년대의 유산을 돌아보며 반성할 점이 있겠다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인다면, 오늘 대화를 최선생님의 회갑 축하로 열었듯이, 마무리도 그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불꽃놀이를 제대로 볼 만하게 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대화를 하나의 선물이라고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서문에서 저를 가리켜 창비 안팎에서 동아시아론을 구현하는 동반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뿐 아니라 앞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인문학에서도 앞장서주신다면 그 일에서도 기꺼이 동반자가 되어드리고 싶다는 점을 독자와 더불어 약속하는 것으로써 대화를 마쳤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4월 23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