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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산문

 

젠더 프리즘을 통해서 본 한국의 인문학

임옥희│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월요일독서클럽 회원

 

 

가끔 제도권 바깥에서 무엇을 모색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용운의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가 생각난다. 그 시에 따르면 우리사회에서 제도권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민적(民籍)”이 없으므로 “인권”이 없고, 인권이 없는 자 “인격”이 있을 수 없고, 인격이 없는 자 “생명”이 없으므로 따라서 유령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제도권 바깥에 있는 유령이 자기 존재증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의 질문을 조금 틀어보자. 제도권 바깥이 있을 수 있는가? 대기권 바깥에서 유영하는 우주비행사가 아니라면, 누가 과연 제도권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제도권 바깥이 아니라 대학제도 바깥에서 유랑하는 지식노동자로서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여자라는 이유로 쫓겨나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지식체계에 갇혀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백년 전 영국에서의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여자가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을 누가 감히 막겠는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취되었고, 강단의 인문학자들이 거리로 나와 현실정치에 관해 직접적으로 발언하던 시절은 끝났다. 한때는 위장취업이 불법이었지만 20대 태반이 백수인 지금의‘88만원 세대’들은 학력을 낮춰서라도 (위장)취업을 하고자 한다. 학력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일자리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일 것이다. 인문학 박사가 즐겁게 환경미화원을 하고(그것이 엄청난 뉴스거리가 아니라), 환경미화원이 벽화를 그리고, 홈리스가 저잣거리의 철학을 논하고, 길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가 인생을 노래하는 전인격적인 삶을 산다면 강단 인문학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토피아 사회가 어디에도 없다면, 역설적으로 강단 인문학은 언제나 필요할지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의 중시는 유교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신분상승의 수단이었다. 사서삼경을 읽고 해석하려는 목적이 입신양명에 있었고, 벼슬을 하면 가족 전체가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부모들은 경(卿)이나 대부(大夫) 같은 아들의 벼슬에 따라 대접받았다. 입신양명이야말로 효의 원천이었다. 자신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여자들은 아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해야만 했다. 한국사회에서 어머니로서의 성공이 자식의 성적순이라는 생각은 어머니들의 DNA에 각인된 것처럼 보인다. 더이상 신분제사회가 아닌데도 한국에서 명문대 학력은 아직까지도 신분을 대신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 교육이 계층 상승의 사다리이던 시절은 지났다. 대학 학력은 보편화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4.5%가 대학에 진학하며, 대학교육이 거의 의무교육처럼 된 지 오래다. 대학졸업장이 별다른 혜택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없을 때 상대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상당수 대학 졸업생들은 꽤 많은 빚을 짊어진 채 대학문을 나서고 있다. 공부를 하려고 등록금을 버는 것인지 등록금을 벌려고 공부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대학생들이 등록금에 허덕인다.

이런 상황이므로 대학의 인문학과는 불후의 명작들을 칭송만 하고 있을 형편이 못된다. 인문학도 시장논리에 맞춰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계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온사회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시대에 인문학의 경쟁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분명 위기에 봉착해 있다. 현재 대학의 인문학이 위기를 극복하는 자구책은 비인문학적인 방법으로 지식생산을 양화(量化)하는 것이다. 한 교수를 만났다. 많이 바쁘다고 했다. 강의부담이 많아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교수가 무슨 강의를 하느냐, 강의는 시간강사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교수는 뭘 하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 프로젝트 따오고 국제대회 유치하거나 참가하고 논문 실적 쌓느라 바쁘단다. 그러니 강의할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고 자조했다. 교수는 연구소라는 이름의 벤처기업가이고 시간강사들은 기간제 간접고용 하청직원이다. 학진 인문학 프로젝트 등재기간이면 전국의 대학이 들썩거린다. 인문학과가 배출한 실업자 구제책 중 하나가 바로 학진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대학 안에서 내부 식민지인이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유령들이 시간강사다. 일용잡급직인 그들에게는 지식노동자임을 인정해주는 4대보험 혜택도 없다. 학진인문학 프로젝트는 시간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것이며 학과로서는 학문 재생산의 인력을 유지하는 장치다.

이처럼 대학의 인문학은 신자유주의 경쟁논리에 따라 자본 창출과 경쟁력 향상에 매진하고 있다. 온사회가 한 목소리로 사교육시장을 비판하는 척하지만 정작 대학이 사교육의 온상이며, 대학의 인문학과는 사교육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공모하고 있다. 인문학과 졸업생들이 가장‘만만하게’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온갖 형태의 학원이다. 학원시장에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자격증(철학 논술, 글쓰기 등)을 배타적으로 보유하기 위해 인문학과들끼리 다툼이 치열하다. 고학력 실업시대에 인문학의 최대목표는 스스로가 생산성과 경쟁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해방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좌파 인문학자에게는 봉건적 선비의식과 근대적 계몽의식이 기묘하게 착종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잘못된 정치에 직언을 해야 한다는 선비의식과 사회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계몽의식이 그것이었다. 그 시절 그들이 창출했던 가치가‘사회적 약자를 위한 윤리경제학’이었다. 가난은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자본주의사회에서 윤리적일 수 있다고 말해줌으로써 가난한 영혼이 남루해지는 것을 막았다. 이런 가치에 기초하여 인문학은 분배정의에 따른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과 공동체의식, 통일에의 열망, 역사발전에 대한 희망을 거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지구적 금융자본주의시대의 인문학은 그것에 맞서는 성찰적 가치를 생산하기보다 완전히 종속되었다. 실용인문학, 테크노인문학, 싸이버인문학 등 무슨 명칭이든간에 그런 인문학이 추구하는 것은 시장경쟁력이다. 학생복지나 장학금 혜택에는 그토록 인색한 대학들이 학교자산으로 펀드투자나 하면서 금융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지만 강단 인문학은 그런 시대적 추세에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금융자본주의시대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극대화하라고 부추겼다. 이제 가난은 무능의 지표이고 부패는 유능의 지표가 된다. 공공의 선이나 공동체 운운은 조롱의 대상이다.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은 사회적 폐기물이 된다.

 

인문학의 보수화는 여성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여성주의는 인문학의 전통적인 토대를 흔들어놓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인문학이 추구해온 보편인간, 보편인권, 영원불멸의 텍스트에 여자, 흑인, 성적 소수자,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는 포함되는가? 여성주의는 인문학처럼 텍스트를 물신화하지 않고서 의심의 해석학으로 접근했다. 여성주의가 이질적 보편성에 기대어‘렛미인’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가로놓인 성벽을 허물려고 했다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인문학은 여성주의적인 문제제기에 대처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여성주의자들의 몫이었을 뿐 강단 인문학의 고민은 아니었다. 보수화된 강단 인문학에 의하면, 젠더의 관점으로 문학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시적 언어의 섬세한 결이 보여주는 미학적 층위와 문학적 순수성을 해치고 조야한 젠더정치만 남겨두는 것이다. 여성주의적인 해석과 관점은 여성학과에서나 해야 할 일이었다. 제도화된 여성학과 또한 자기들만의 해방구에서 한동안 자족하고 있었다. 양자는 인문학적 여성학, 여성학적 인문학으로 소통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소통해야 할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각자 자기의 언어시장을 형성하고 다른 궤도를 따라 돌고 있었다.

사실 대학내 여성학과(협동과정)는 안분자족할 처지가 아니다. 대학이 순전히 장삿속으로 만든 것이 협동과정이므로 이윤이 남지 않는 협동과정들을 왜 존속시키겠는가. 오렌지가 아니라 오륀지로 유명해진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이 재직 당시 대학경영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소신껏 없앤 것이 바로 여성학 협동과정이었다. 여성주의 자체가 관변화됨으로써 변화에 대한 열정은 우울로, 변혁에 대한 비전은 좌절로 되돌아온 마당에 여성학 협동과정쯤 없어진다고 누가 애통해하겠는가. 몇십년 동안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겨우 만들었던 여성부였지만 지금 여성부의 행태를 보노라면 모친살해충동이 절로 일어난다. 현 여성부는 촛불집회 같은 반정부시위에 참가하면 프로젝트 지원금을 끊겠다는 공문서를 현장의 여성단체들에 돌릴 정도로 가부장적 국가의‘사랑밖에 난 몰라라’하고 있다. 이처럼 뼈아픈 배신의 세월과 마주하면서‘뼈있는’여학생들이 여성학과에 입학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강단 여성학이 고립된 섬처럼‘나홀로 볼링’을 하고 있는 한, 여성주의적인 정치실천과 연대는커녕 대학 내에서 여타 학과들과 경합하면서 생존할 수 있는 학문적 언어나마 생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대학제도 밖의 여성연구단체라고 한들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 맹목의 지점을 끊임없이 의식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 아마도 다를 것이다.

인문학 또한 같은 학교, 같은 학과끼리 배타적 학맥을 형성해왔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 지적인 자위와 제도적 근친상간에 빠져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으로 인한 자기처벌의 결과 눈이 멀었을까? 그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근친상간임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경쟁이 치열할수록 인문학이 더욱 배타적인 이익집단이 되고, 그 결과 자기들끼리 결연한다면, 인문학은 오이디푸스와 같은 무지에의 욕망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젠더의 프리즘을 통과한 인문학이‘인간적인 삶’의 비전과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난, 질병, 문맹, 인종청소, 성차별,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같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순치시키려는 노력은 급진적(혹은 젠더화된) 인문학의 영역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유엔미래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이면 한국은 1인 블로거들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고학력 1인 블로거들이 이기적인 나르씨씨즘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런 개인들이 다중지성을 형성하고 비판적 사회의식을 견지하면서도 타자를 배려하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려면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해주는 인문학의 역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들이 심리상담 치료사의 카우치에 자신의 영혼을 전부 넘겨주지 않도록 하려면 말이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가족, 다혈통, 다양한 트랜스(젠더/쎅슈얼리티) 사회로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다문화의 경험이 일천한 한국사회에서 이질적인 다문화, 다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철학과 상상력을 제시하는 것, 급진적 인문학이 해야 할 항구적인 역할이 바로 그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