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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손정수의 반론에 답하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글머리에

 

작년 겨울호 『창작과비평』의 특집‘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촛불의 빛과 위력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글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의 시발 역시 촛불이었다.‘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는 한 방편으로‘문학의 새로움’을 화두처럼 붙든 것은 촛불집회의 유연하고 독특한 방식에서 기존 시위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새로움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이 달라지고, 어쩌면 세상 자체가 달라진 듯했다. 아니,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세상 자체가 이미 달라져 있다가 새로움으로 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래하는 새로움에 어울릴 법한 문학의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문학의 새로움’에 대한 필자의 탐구는 겨우 몇걸음을 내디딘 정도였다. 새로움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은 계속 쌓여가는 새것 더미 속에서‘새것다운 새것’과‘사이비 새것’-이를테면 포장이나 무늬만 새것인 것-을 분별하는, 품이 많이 드는 비평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이중적인 과제인 것이다. 지난 글에서는‘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몇몇 사례를 살펴보고 그 밑바탕에 깔린 편의적이고 허구적인 전제들을 지적하는 일에 치중했지만, 그 근본 취지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과제의 수행에서 구체적인 비평작업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

그후 필자가 비판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손정수(孫禎秀)의 거센 반론이 지난호 『창작과비평』에 실렸다. 특집 글 가운데 백낙청과 필자의 글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의 반론에 일일이 재반론을 펴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주로 필자에 관한 부분에 한정하여 답한다. 이를 계기로 문학의 새로움에 관한 논의가 조금이라도 진전되었으면 한다.

 

 

새것 강박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필자가‘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의 문제점을 제기한 데 대해 손정수는 새로움에 강박된 독법과 그렇지 않은 독법의 구분이 창비가 만들어낸‘허구적인 이분법의 구도’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넓게 보자면 새것에 대한 강박은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봐야 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점에서는 창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느 시점 이후 창비라는 출판자본의 운영방식이 그렇고, 백낙청의 배수아나 박민규 소설에 대한 편향 역시 넓게 보면 그런 강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걸린 비평가들과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을 대립시키는 구도는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소거한 후에야 가능한 허구적인 것이다.1

 

손정수는 여기서‘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을‘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 형식 자체가 지닌‘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비평이‘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의 관점에서 새것다운 새것을 가려낼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님은 이런 질문을 해보면 분명해진다. 가령 오늘날의 비평이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 속에 내장된‘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자본주의 상품미학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그런 노력을 포기할 때 문학이 (랑씨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을까? 요컨대, “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편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비평적 노력이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그러니 손정수는 배수아나 박민규 소설에 대한 백낙청의 비평이 “넓게 보면 그런 강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어림으로 말할 게 아니라 그것이‘새것에 대한 강박’에 휘둘린‘편향’인지 그런 강박에서 벗어난 독법인지 비평적으로 따질 일이다. 그럴 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새것에 대한 강박’을 불편해하기는커녕 되레 정당화하려는 손정수 자신의 태도가 아닐까.

여기서 강유정(姜由禎)의 반론에 대해서도 잠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는데, 그의 경우는 손정수와 또 다르다. 애초에‘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도 그런 강박이 있음을 지적당하자 논법을 바꾼다. 강유정은 필자가‘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을 비판하는 까닭이 “사실상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가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2에서 비롯된 것으로 넘겨짚는다. 필자는 2000년대에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작가층이 두터워지고 문학지형이 크게 바뀌고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대가 일방적으로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 장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소설의 경우 2000년 이전에 등단한 작가들과 이후에 등단한 작가들이 저마다 자기 문학의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함으로써 한국문학이 만만찮은 활력을 보이고 여러 세대와 성향을 가로질러 새로운 소설형식들이 실험되고 창안되고 연마되고 있다. 이 활력 가운데 서로 다른 세대와 경향의 작가들 간의 예술적 교호작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움과 낡음의 기준을 세대론적 경향으로 갈음하거나‘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에 따라 정하는 것은 편리하기는 하되 생산적인 방식은 아니다. 새로움과 낡음의 분기점으로 제시된 손정수의‘투명한 현실의 재현’이나 강유정의‘시각중심의 근대성’의 기준에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민규 소설 평가문제

 

손정수의 비판이 종종 억측이나 무리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데는 창비의 문학관이나 창비 내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완강한 선입관이 큰 몫을 하는 듯하다. 손정수를 포함한 몇몇 비평가들에게 창비의 실상에 부합되지 않는 이미지가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구도에서 볼 때 창비의 실상이 이미지보다 훨씬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령 박민규 소설에 대한 평가 문제에서 그러하다. 박민규의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는 창비 편집진 사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거니와 2005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카스테라』를 읽으면서‘한국문학의 보람’을 느꼈다는 백낙청의 발언은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3 그런데 창비 바깥에서는 백낙청의 박민규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의외로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창비가 시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손정수와 권성우(權晟右)는 판이한 문학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이 점에서는 통하는 바가 있다. 백낙청이나 창비의 평자들이 박민규 소설을 평가하는 것이 두 비평가의 구도나 그들이 생각하는 창비의 이미지와 어긋나는 것인데, 창비가 박민규의 장점도 못 알아보는 투박한 비평을 전개하는 것을 오히려 편하게 느낄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권성우의 인문학적 열정과 열린 자세는 높이 사줄 만하지만 그의 비평은 종종 사회학적 판단에 휘둘린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카라따니 코오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이나 백낙청의 박민규 비평을 검토하는 그의 글들4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요즘 한국에는 능력있는 젊은 작가들이 늘어나서 문학의 새로운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김정환(金正煥)의 발언에 대해 “2000년대 이후 많은 문인과 비평가들이 젊은 작가들의 문학세계에 대한 냉혹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비판들을 전개했다는 점을 감안하건대, 나는 김정환에게 문학적‘능력’과‘문학의 새로운 전성기’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묻고 싶다”5고 반문하는 대목이 그렇다. 김정환의 그런 견해가 마음에 걸리면 2000년대의 젊은 작가들의 가능성을 재검토하면서 능력있는 작가들이 없는지 살펴볼 법하다. 그런데 왜 다른 비판적인 논자들의 전거를‘감안’하면서까지 그 많은 젊은 작가들의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능력을 도매금으로 한데 묶어서 불신해야 하는지 의아한 것이다. 김원일, 조정래, 황석영, 방현석, 김남일, 정지아, 정도상, 안재성, 공선옥, 전성태 등의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가들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라는 점만이 다를 뿐 한 묶음으로 파악하려 하기는 마찬가지다. 필자가 지난 글에서 “황석영에서 안재성까지 예술적 성향과 수준이 현격한 작가들을 뒤죽박죽 도열시키는 방식도 문제다. 이들이 모두 사실주의적 서사를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할 뿐, 누가 그런 서사로써 우리시대에‘결정적으로 중요한’예술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는 불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이런 범주화 역시 일종의‘코드화’이다. 권성우가 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백낙청의 높은 평가를 무슨 다른 저의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도 이런‘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탓이 아닐까 싶다”6고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손정수는 앞의 인용문 가운데 마지막 문장만 떼어내어 인용한 후에 “한기욱의 글은 백낙청의 주관적 성향이 농후한 판단이 창비 내부에서 마치 객관적이고 반성될 수 없는 것처럼 공고화되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앞의 인용에서 한기욱이 권성우를 비판하는 근거는‘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권성우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이 논증할 필요조차 없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박민규 소설에 대한 백낙청의 평가를 의심하면 그는‘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된다”(320~21면)고 몰아붙인다. 왜 이런 무리한 오독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의 문장을 제대로 읽었다면 세대별·성향별 분류보다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적 판단과 세밀한 질적 차이의 분별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발언은 손정수의 그것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서술되어 있고, 그 취지도 정반대이다. 즉 권성우의 글을 읽은 후, 그가‘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탓에‘박민규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백낙청의 평가를 의심하는 것 같다는 필자 나름의 판단을 표명한 것이지 손정수가 주장하듯 그 역은 아닌 것이다.

 

 

‘투명한 현실의 재현’에 담긴 메씨지

 

필자에 대한 손정수의 반론은‘투명한 현실의 재현’과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한층 격해진다. 창비에 대한 선입관에 더해 필자가 백낙청의 “권위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 주체적이지 못”하다는(324면) 그 나름의 판단이 가세한 듯하다. 그는 자기 판단의 확신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넘겨짚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는 듯하다.

문제의 발단은 그가 최근 소설의 동향에 대해 “어느 시점 이후 소설은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지 않고 앞서 존재했던 텍스트들을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투명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상징적 상상이거나 혹은 상상적 상징일 것이다”7라고 기술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에 필자는‘투명한 현실의 재현’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낡음의 징표로 설정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그를 추궁했다.(44~45면 참조) 그 용어가 리얼리즘 문학의 실상과 한국 리얼리즘론의 진화과정에 대한 무시 혹은 무관심을 드러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손정수는 자신이 “그 글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329면)고 발뺌하지만,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는 소설을 뭐라고 부르건 그런 소설에‘투명한 현실의 재현’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징적 상상이거나 상상적 상징’이라는 개념은 “앞서 존재했던 텍스트들을 재전유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라깡과 데리다 같은 서구 현대 이론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있다. (물론 그게 꼭 바람직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에 반해‘투명한 현실의 재현’의 경우, 사실주의를 즉각 연상시키는‘현실의 재현’이란 개념과 주체가 객관적 현실을 환하게 투시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환상)을 내포한‘투명한 현실’이라는 발상이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일부러 어떤 효과를 노리고 한 말이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의 발언은 전체적인 맥락에서‘사실주의는 순진한 믿음(환상)을 지닌 것, 그래서 퇴물이 된 것’이라는 메씨지를 담고 있다. 실제로는‘불투명한 현실’을 붙들고 씨름하거나 재현주의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분투하는 많은 리얼리즘 작가들의 작업을 왜곡하며 부당하게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투명한’현실의 재현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단련된 작가와 비평가의 상식이거니와, 리얼리즘 작가들이‘재현주의’적 발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예술적 분투의 과정을 소설화한 사례도 여럿이다. 이론 쪽에서도 리얼리즘의 핵심은‘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르렀는가 여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44~45면)라고 반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이에 대해 손정수는 이 인용문의 끝에 달린 각주에 백낙청의 글만이 참조문헌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근거로 “결국 그가 말하는‘이론 쪽’이란 표현은 백낙청의 글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셈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어떤 이론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론이 백낙청의 글 속에 있다는 믿음이 그의 무의식에까지 잠복해 있는 모양이다”(322면)라고 응수한다.

‘이론 쪽’이라고 해놓고 백낙청의 글만 제시한 것은 여러 리얼리즘 이론들 중에 그의 이론이 필자의 논지를 가장 잘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손정수처럼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논자에게는 필자의‘이론 쪽’이라는 표현이나 각주 다는 방식이 거슬릴 수 있겠다. 또한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에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듯한 어법이 문제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백낙청이 한국 리얼리즘론의 중요한 이론가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필자는 그의 입장에 공감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끌어들인 것인데, 자신이 그의 리얼리즘론을 대단하지 않게 본다고 해서 남의‘무의식’까지 들먹일 정도로 흥분할 일은 아니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과 ‘시의 경지’

 

이왕 말이 나왔으니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의 특성을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백낙청은‘리얼리즘’을‘객관적 현실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뜻의‘사실주의’와 구분한다는 것은 염두에 둬야 한다. 영어로는 둘 다‘realism’이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현실인식에서 심화된 단계이고 예술적으로도 높은 경지이다. 이런 구분은 영미권의 주류 학계에서는 생소한 편이지만, 맑스주의 문예이론에서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가령 자연주의적 모사론에 기초한 사실주의에 비해 엥겔스의 저 유명한 발언에서처럼 리얼리즘이란 세부의 진실성 외에도 전형적 환경에서의 전형적 인물들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의‘전형성’은‘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형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은 소박한 사실주의와 현격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후 맑스주의 리얼리즘론은 전형성 외에도 총체성과 당파성, 변증법적 인식 등의 중요한 개념이 내부로 통합되면서 발전되었고 여기에 루카치(G. Lukács) 같은 이론가들이 뚜렷한 족적을 남겼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맑스주의 문예이론이 공식화되는 경향(백낙청의 어법을 빌리면 문학에 대한 물음보다 정답이 앞서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그 폐해 역시 적지 않았다.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맑스주의 문예이론이 큰 영향을 미친 한국의 평단에서도 이런 리얼리즘 개념들의‘경직화’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은 당시의 평문들을 읽어보면 실감할 수 있다.

이런 경직화 경향의 시대에 백낙청이‘시의 경지’를 리얼리즘의 핵심 문제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그의 리얼리즘론의 본질적인 변화라기보다 그간 잠재해 있던 요소들이 시대적 요청에 의해 또렷이 드러난‘진화’에 가깝지만, 어쨌거나 파격적인 행보로 여겨질 만하다. 가령 장편소설에 대해 “평균성과 다른 전형성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작품의 유기적 일부로서만 주어지며 그 성패는 바로 작품이‘시의 경지’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느냐는 문제 자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발언은 맑스주의 리얼리즘론의 금과옥조로 여겨지던‘전형성’개념을‘시의 경지’에 연동되는 상대적인 요소로 본다는 뜻에서 파격이다.8 그런데 여기서‘시의 경지’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파격의 정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가령 손정수의 이해방식을 살펴보자.

 

그 글에서 백낙청이 말하는‘시’란 바로 『논어』에 나오는‘시삼백 일언이폐지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에서의 그‘시’이고 따라서‘시의 경지’는‘사무사’의 객관정신이 투철하게 관철된 경지를 이르는 것이다.‘좁은 의미에서의 시’의 경우 전형성과 현실반영 같은 장편소설의 기준을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글에서의 백낙청의 주장인데, 그는 소설과 시의 장르적 차이를 관통하는 리얼리즘의 본질을 추구하면서‘지공무사(至公無私)’나‘사무사’와 같은 동양적 개념을 끌어들였고 그것을 통해 좁은 장르적 테두리에 집착하는 관념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 글에서‘좁은 의미로서의 시’를 따로 구분해두고 굳이 작은따옴표를 써서‘시’혹은‘시의 경지’라고 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비유적으로 제시된‘시’라는 개념의 유효성이 그것이 발언된 맥락을 떠나면 온전하게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322면)

 

백낙청이 말하는‘시의 경지’가 손정수가 풀이하듯 “‘사무사’의 객관정신이 투철하게 관철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은 맞다. 가령 백낙청이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전형성, 현실반영 같은 특정 기준들의 충족 여부보다‘지공무사’또는‘사무사’로서의 당파성의 구현 여부가 한층 본질적인 문제라고 믿고 있다”(「시와 리얼리즘」 429면)라고 말할 때 앞서 거론한‘시의 경지’자리에 “‘지공무사’혹은‘사무사’로서의 당파성”이 대신 들어 있다.‘시의 경지’〓‘사무사’〓‘당파성’으로 이해할 때에는 백낙청이‘전형성’이나‘현실반영’보다‘(객관성과 일치하는) 당파성’의 구현을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꼽았다는 의미가 성립된다. 얼핏 생각하면 리얼리즘의 중요한 개념들 가운데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의미의 파격은 있을지언정 기존 이론과 뚜렷이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의‘당파성’이 레닌의‘당파성’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내포한 것이고,‘당파성’과 동일시되는‘객관성’이란 것도 자연과학의‘객관성’과 다르다는 점을 음미하면, 이 등식에 담긴 발상은 경직된 리얼리즘론의 그것과 판다르다.9

그런데 손정수가 이해하듯‘시의 경지’에서의‘시’가 “비유적으로 제시된‘시’” 혹은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서의‘시’”(323면)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시의 경지’에서의‘시’가 바로 본디의 시이고‘좁은 의미의 시’는 그 본디의 시가 자주 출몰하는, 가령 서정시 같은 특정한 형식의 운문작품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고‘본디의 시’라는 것이 플라톤의‘이데아’처럼 원형이 미리 존재하고‘좁은 의미의 시’는 그것을 실현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좋은 시 한편을 쓰는 순간 본디의‘시’가 마법처럼 이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시’가 무엇인지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특정한 시 작품이 어떻게‘시의 경지’에 도달하는지 면밀히 검토함으로써‘시’가 무엇인지 그때그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백낙청은 이런 검토가 “실제로 씌어진 시의 언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운문일 경우 당연히 그 운율효과가‘의미’의 일부로서 감안되어야 할 것”(「시와 리얼리즘」 429면)이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일종의‘유물론적’작업의 검토를 주문한다.

 

시의 율격과 가락, 심상, 수사법 등 형식상의 세목들에 대한 관심을 이른바 형식주의 비평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이는 물론 편견이다. 형식주의자들이 형식주의적 편견 때문에 그런 세목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세목들의 참뜻을 온전히 밝혀내는 일이야말로‘유물론자’의 몫이다. 적어도, 육신을 가진 인간인 시인이 온몸으로 행한 발언이라야 제대로 된 작품이고 그것은 똑같이 육신으로 살아 있는 인간인 독자의 온몸에 실제로 작용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관념론’과 정반대인 한에서‘유물론적’작업인 것이다. (같은 글 429~30면)

 

백낙청이 제시한‘유물론적’작업은 결국 시 쓰기와 시 읽기를 관념적으로 하지 말고‘온몸’으로 하자는 것이다. 얼핏 지당한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발언의 의미는 당시의 리얼리즘 논자들이 “전형성 개념을 시에까지 적용하려는 무리”(같은 글 428~29면)를 종종 범하는 상황에서 리얼리즘에서 시를 논하는 방식은 “전형성, 현실반영 같은 특정 기준들의 충족 여부보다‘지공무사’또는‘사무사’로서의 당파성의 구현 여부가 한층 본질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앞서의 지적을 감안할 때 그 의미가 충분히 느껴질 수 있다. 말하자면‘사무사’를 지칭한‘시의 경지’도 관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유물론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유물론적’으로 문학하기

 

손정수가 이론적인 글이 아니라‘단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의 이론적 의의를 필자 나름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은 당시의 경직화된 리얼리즘에 맞서 시에서 리얼리즘 논의를 실답게 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성의 충족보다‘사무사’로서의 당파성의 구현 여부를 한층 본질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파격이지만 “전형성 개념을 시에까지 적용하려는 무리”를 피하면서 시를‘유물론적’으로 대하는, 어쩌면 리얼리즘 본래의 취지에 더욱 충실해진 입장이다. 따라서 그가‘시의 경지’를 리얼리즘의 핵심 문제로 제기할 때‘시의 경지’〓‘사무사’〓‘당파성’으로 변환하여 이해하고 마는 것은 그가 기존의‘당파성’개념을 되풀이하지 않고‘시의 경지’라는 새로운 표현을 제시한 뜻을 정당하게 사주는 방식이 아니다. 손정수처럼‘시의 경지’에서‘시’를 “비유적으로 제시된‘시’”로 보는 것도 결국 이런 관념적인 방식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둘째는‘시의 경지’라는 개념을 장편소설을 포함한 소설 작품에 관념적이 아닌‘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적용할 때의 획기적인 의의이다. 필자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시와 산문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흔히 산문으로 씌어져 있다는 이유로 소설의 언어 자체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장편소설에‘좁은 의미의 시’를 닮은 요소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주목할 것은 산문도 나름의 리듬을 지니고 있다는 것(물론 무미건조한 리듬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리듬은 소설가가 이야기를‘온몸’으로 밀고 나갈 때 그 이야기의 내용 못지않게 이야기의 방식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메타포, 알레고리, 시적 이미지 등의 요소를 활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되 어디까지나 산문으로서의‘리듬’과 호흡을 맞추어 자유자재로 풀어나가는 방식은 좋은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10

유의할 것은 이렇게 형성되는 소설언어의‘리듬’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정홍수가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의‘해설’에서 “신경숙 소설은 단어와 문장의 축조가 아니라 흐름이다. 사실감과 핍진성은 일물일어(一物一語)의 숨가쁜 대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서 온다. 그리고 그 흐름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가운데 조금씩 소설적 진실을 이룬다. 우리는 하나의 유동하는 덩어리로, 흐름의 전체에서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289~90면)라고 했을 때의‘흐름’도 이런 소설언어의 리듬이 시의 경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는 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11 박민규의 소설언어처럼 메타포나 발상이 자유자재로 변주되고 전복되면서 어느새 서사의 필수적인 요건이 되는 변신술의 리듬, 주노 디아스(JunotDiaz)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 2007)에서처럼‘랩처럼 박동치는’리듬12을 구사할 줄 아는 이기호의 소설언어 등이 있는가 하면, 『늑대』(2009)의 여러 단편들에서 단아한 스텝으로 곱게 곱게 나가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단호해지는, 전성태의 치밀하게 조율된 언어 구사도 서사의 유기적 일부를 이루는 일종의 리듬이요 호흡이 아닐까 싶다. 나타나는 양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꼽을 수 있는 특징은 산문의 언어지만 밀도가 굉장히 높고 살아 있는‘호흡’에서 나오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관건은 언어의 이런 시적인 운용방식을 산문의 사실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약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힘있게 만드는 방식으로 통합했느냐 여부에 있고 통합에 성공할 때만이 그 소설이‘시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글에서 필자의 소설평 가운데서‘시적 요소’‘시적 효과’‘시적 경지’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손정수는 필자가 백낙청의 논지를 잘못 이해하여 일어난‘에피소드’로 파악한다. 그런데 손정수야말로‘사무사’대신 제시된‘시의 경지’의 참뜻을 이해했다면 필자의 논의를 두고 “최근 소설의 성과를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서의‘시’가 백낙청이 애써 구분한‘좁은 의미의 시’로 단순화되어 적용되는 사태가 일어난다”(323면)든지 “시적인 요소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그 평가의 근거로 제시하는 뜬금없는 상황은 이렇게 일어난 것”(324면)이라든지 하면서 비난하는‘에피소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시의 경지’에서‘시’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서의‘시’”가 아닐뿐더러 필자가 거론한 황정은 소설의‘시적 요소’가 단순히‘좁은 의미의 시’인 것도 아니다.13 창비나 백낙청, 나아가 필자에 대한 어떤 예단 없이 읽는다면, 황정은 소설을 논하면서‘시적 요소’나‘시적 효과’를 논하는 것이 그렇게‘뜬금없는’일로 여겨질까?

물론 필자가 거론한 소설을 논하는 데‘시적 효과’와‘시적 경지’란 개념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가, 그리고 백낙청의‘시의 경지’를‘시적 효과’와‘시적 경지’로 나누어보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 대해 얼마든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필자가 거론한 황정은과 공선옥의 작품에 대한 토론으로써 비판하는 방식이 생산적일 것이다. 그런데 두 소설가에 대한 필자의 논의는 본문에서는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을 위한 자료로 거론될 뿐이다. 필자 나름으로는 제법 공들인 공선옥의 「영희는 언제 우는가」 논의에 대해 딱 한마디‘고평’이라고 평할 뿐(324면), 왜 그것이 부당한‘고평’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일러주지 않는다. 그리고 강영숙, 김사과, 황정은 논의에 대한 극히 부정적인 소견을 각주에서 간단히 표명할 뿐이다. 중요한 문학적 쟁점을 놓고 상대방의 논의를 한마디로 일축하는 대신 비평적으로 따져 묻는 것이 “창비에 소통의 의지는 분명하게 있었지만 그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점검해볼 필요도 있었다”(331면)라고 충고하는 것보다 논쟁을 포함한 비평적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은 문제의 특집 가운데 백낙청과 필자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세편의 글에 대한 호의적인 의견을 각주로 처리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지면 제한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면을 이해는 하지만, 그 글들에 대한 논의는 또 하나의 비평적 논쟁 혹은 대화의 계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창비의 지난호 특집에 실린 나머지 세편의 글은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위한 방향을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진은영의 글에서 제시된 자끄 랑씨에르의 감각적 분배의 재편에 대한 사유는 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에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고 생각된다. 김상환의 글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다양한 대상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창조적인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호베르뚜 슈바르스의 글은 주변부가 공유하는 문학적 특징에 착목함으로써 새것에 대한 강박에 경사되지 않으면서 우리 고유의 궤도를 차분하게 찾아나가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332면, 주 11)

 

세편의 글에 대한 손정수의 의견이 필자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왜 백낙청과 필자의 글에 대해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가령 슈바르스 글에 대한 논평 중에 “새것에 대한 강박에 경사되지 않으면서 우리 고유의 궤도를 차분하게 찾아나가는 방향”이란 것이 바로 필자도 지향하는 바 아니던가. 김상환과 진은영의 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진 비평가라면 필자와도 훨씬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했다고 느낀다.

비평도 문학의 필수적인 일부인 만큼‘사무사’로 임하는 것이, 즉 어떤 선입관에 매이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사무사’인데 상대방은‘사무사’가 아니라고 또하나의‘상’을 세우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유물론적’으로 비평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어떤 관념이나 코드가 아니라 오로지 작품의 언어를‘온몸’으로 실감하는 비평, 다른 비평가에 대한 이미지나 예단이 아니라 그 비평언어에 담긴 생각과 느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독법이 중요하다.‘사무사’로,‘유물론적’으로 하는 비평이라면 논쟁이든 대화든 생산적이지 않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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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정수 「진정 물어야 했던 것」,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328~29면. 앞으로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2. 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문학』 2009년 봄호 313면. 해당 대목을 전부 인용하면 이렇다. “한기욱은 문학적 본질에 대한 질문이 사실상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가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며 회귀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한 낯선 문학적 시도를 호명하고자 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시도를 강박증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3. 물론 이 발언도‘한국문학의 보람’을 신예작가들을 읽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박민규의 단편집을 그중 한 예로 든 것이지 한마디로 박민규가 한국문학의 보람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백낙청·황종연 대담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314~17면 참조).
  4. 권성우 「추억과 집착:‘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 『안과밖』 2007년 상반기호 및 「박민규, 혹은 비평의 운명·1」 『오늘의 문예비평』 2008년 여름호 참조.
  5. 「추억과 집착」 138면.
  6. 졸고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000년대 소설과 비평의 향방」,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46면. 앞으로 본문에 면수만 밝힘.
  7. 손정수 「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 『자음과모음』 2008년 가을호 226면.
  8. 백낙청의 발언은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8면. 이하 「시와 리얼리즘」으로 표기함.
  9. ‘당파성’과‘객관성’에 대한 논의는, 백낙청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5절‘레닌의 똘스또이론’과 「사회주의현실주의 논의에 부쳐」,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396~426면 참조.
  10. 이를 고려하면 백낙청이‘시의 경지’를 거론한 얼마 후에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실사구시·지공무사가 먼저이며‘재현’은 그에 따라오는-각 분야마다 다른 방식과 비중으로 따라오는-성과”(「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연애하는 여인들』에 그려진 현대예술가상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 90면)라고 하면서‘재현’마저 상대화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재현’문제에 대한 그의 본격적인 검토는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1996년 하반기호 참조.
  11. 소설의 고전 중에서 이런‘리듬’을 보여주는 예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네이버의‘지식인의 서재’코너에서 첼리스트 장한나의 다음 발언이 인상적이다. “최근 한달간 D. H. Lawrence의 대표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Lawrence를 읽는 내내 그의 냉철함과 칼날같이 날카로운 표현에 거의 계속 쇼크 상태였습니다. (…) Lawrence를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이 작가의 특징은 언어로 리듬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 또 같거나 비슷한 문장을 반복하는 Lawrence의 스타일 덕분에 처음으로 언어로도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에 따라 읽는 속도가 저절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작가들 중 이렇게 언어로 확실한 의도적인 템포를 만든 작가는 처음입니다.” http://book.naver.com/bookshelf/story.nhn?startmonth=200811.
  12. 주노 디아스의‘랩처럼 박동치는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졸고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341~43면 참조.
  13. 「모자」에서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 설정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필자 나름으로 추적하면서 “‘모자’와‘아버지’의 상통하는 심상을‘시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왜 모자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 노릇을 하는지를 “한국의 가족사에서 아버지가 무력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과 “그 아버지를 측은히 여겨 돌봐주는 무심한 듯 애틋한 태도”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했다(61면 참조). 필자가 지난 글의 황정은 논의를 돌아볼 때 오히려 아쉬운 점은 황정은 소설의 시적인 특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사주지 못한 점이다. 「모자」도 수작이거니와 「문」 「곡도와 살고 있다」 「오뚝이와 지빠귀」 「야행」 그리고 최근에 발표한 「대니 드비토」 등에서 황정은만의 독특한‘리듬’혹은‘호흡’이 느껴진다. 그런데‘시의 경지’를 부분적인 성취의‘시적 효과’/‘시적 요소’와 작품 전체의‘시적 경지’로 나눠보는 발상 자체가 이런 작품들의 시적 특성을 알아보는 데 일정한 제약이 되지 않았을까 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