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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엄마’의 시대적 진실을 찾아서

『엄마를 부탁해』론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근대극복의 이정표들』, 역서로 『지식의 불확실성』 『근대화의 신기루』(공역)등이 있음. jatw19@moiza.chonnam.ac.kr

 

 

1. 들어가며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를 읽고 오랜만에 신경숙(申京淑)의 1990년대 작품들을 다시 살피면서 그에게‘소설’이란, 결국 한 인간이 살면서 맺어지거나 끊어진 숱한 인연들을 기억하며 복기(復棋)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인 한, 기억과 복기의 과정에서 사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상당수 작품이 『외딴방』(전2권, 문학동네 1995)처럼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자주 놓이는 것은-당연하리라는 생각도 새삼 했다. 피붙이 또는 살붙이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운명적 만남과 그런 만남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진실이 소설이 다루는 본래 영역 가운데 하나라면 신경숙이야말로 그 공동체의 영역을 정성스레 지키고 가꾸는 우리시대의 드문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러나 지금은 가부장적 가족체제는 형해(形骸)만 남았으되 그것을 대체할 바람직한 가족모델은 거의 전무한 시대다. 조부·조모와 오순도순 사는 3대 가족은 이젠 마치 원형 복원이 불가능해진 고분(古墳)처럼 보인다. 첫 소설집 『겨울우화』(고려원 1990)의 해설에서 정효구는 “신경숙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적 관계는 지극히 전통적이며 한국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적은바(307면), 그렇다면 “가족들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때마다 그 집의 재래식 부엌으로 들어”가곤 했던(『외딴방』 2권 170면) 어머니가 비로소 그‘실체’를 드러낸 『엄마를 부탁해』야말로 적어도 그런 맥락에서는 전통적·한국적·전근대적이라는 형용어가 딱 어울리는, 이를테면 탈가족화시대의1‘반시대적인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이는 개인이라는 이름이 모든 집합적 가치와 대등해지고 심지어 그보다 우월해진 우리시대의 개인주의 정서를 『엄마를 부탁해』가 거스르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엄마를 부탁해』가 그러한 정서를 거스르기만 하는가도 앞으로 더 생각해보겠지만 신경숙의 소설세계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팎에 스민 시대의 현실이 부각된 지는 사실 오래이다. 장편만 기준으로 해도 『외딴방』을 비롯해 1970년대와 80년대의 억압적 정치현실이 기억 뒤편에 자리잡은 순결한 청춘들의 비극적 애증을 기록한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나 가족의 파괴적인 해체로 인해 사회로 내몰린 개인들의 금지된 욕망과 내밀한 상처를 보듬는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 망국이라는 역사의 비극에 휘말린 한 무희(舞姬)의 정신적 궤적을 상상적으로 재현한 『리진』(문학동네 2007) 등이 그렇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서사적 고향이랄 수 있는 가족으로 회귀한 셈이다. 그간 신경숙의 작품을 애독해온 독자라면 이 회귀가 갑작스런 것도 아닐뿐더러 도시화된 자아에 대한 되돌아봄의 성격을 늘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런 회귀와 되돌아봄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신경숙 소설세계의 진전을 뜻하는 것인가도 물어봄직하다.

 

 

2. ‘되돌아온 감옥’ 대 ‘순수-증여의 실천적 전위’?

 

2008년 11월에 출간된 이후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소설시장의 현황에 비추어보면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고 자체도 상당히 이례적이지만 1985년에 등단한 신경숙 자신의 적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독자의 관심을 이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받은 예는 없었지 싶다. 알다시피 전지구적 경제위기가 가시화된 시점에 나온 『엄마를 부탁해』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나선 한 가족의 애끊는 이야기다. 얼핏 이와 유사한 가족서사로는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몬 1997년 외환위기 때‘아버지 씬드롬’을 일으킨 김정현의 『아버지』 같은 소설도 생각나는데, 『엄마를 부탁해』의 출간으로 목하‘어머니 씬드롬’이다.

1997년 당시에도 그랬지만 『엄마를 부탁해』라는‘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 평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해석틀은 일종의 문학사회학적인 것이다. 어떤 작품이 당대 독자들에게서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다면 독자들의 현실과 작품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연관짓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문학사회학적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다문화가정을 비롯한‘나홀로 가족’, 가령 씽글맘, 기러기아빠, 독거노인 등 2000년대 한국의 무시 못할 가족형식에서 『엄마를 부탁해』가 발휘하는 대중적 호소력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도 그렇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안전망이 극히 부실한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구성원을 보살피는 자의 대명사는 여전히 어머니인바, 『엄마를 부탁해』가 조명되는 것은 대개는 바로 그런 맥락이다. 실제로 몇몇 문학기자들은 신경숙을 비롯해 공지영, 하성란, 조경란, 서하진 등의 최근 작품을 한데 묶어‘가족서사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그리움과 정겨움이 묻어나는‘엄마’가 경기불황의 해결사로”2 뜨는 현상을 모성을 중심으로 쟁점화한 바 있다.

그런 식으로 형성된 쟁점을 평단에서 여성주의의 방향으로 더 키운 논자는 강유정(姜由楨)이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엄마는 현존하는 핍진한 70대 여성이라기보다는‘진정한 엄마’로 상상된 이미지에 가깝다. (…) 잃어버린 것을 증명하는 실체 그것이 바로 신화가 아니었던가? 잃어버린 무엇,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인 모성, 신화로서의 모성적 공간은 그러한 가치들이 가능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직접 내통한다. 우리는 실종된‘엄마’그리고 엄마의 신화적 가치를 추억하며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잊는다. 부재한 엄마에 대한 애도가 위기에 처한 가족에게 신화적 구원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되돌아온 감옥, 모성적 신화의 실체인 셈이다.3

 

비판의 신랄함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경숙의 신작(『엄마를 부탁해』-인용자)을 놓고 통속소설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비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의 부활이라기보다는 몰락을 의미한다”라고 말한 조영일을 들어야겠지만,4‘엄마’를 상상적 허구로 단정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사실상 현실을 호도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한 강유정의 신랄함도 따지고 보면 그에 못지않다.5 강유정은 근년에 나온 다양한 경향의 가족서사들에 가족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런 서사를 경제불황과 고용위기 시대에 나타나는 값싼 위안으로의 퇴행현상으로 단정한 것이다.

이 장편이 주는 감동 자체의 성격을 분석하고 감동을 영감보다 열등한 것으로 격하한 고봉준(高奉準)의 논지도 강유정의 평문과 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감동 대 영감의 구도를 설정한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특정한 정서의 습관적인 재생산에서 기인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그런 습관적인 재생산의 산물인 “‘상식/통념’을 부정”하면서도 “창조를 동반하는”것이다. 현재 작단의 가족서사가 전자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그가 문제삼는 것은 소설을 감동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타성이다.6 그는 “왜 항상 가족은 이해되고 소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이해와 소통을 지향하는 가족이야기의 대중적 호소력을 창조적 성찰(〓영감)과는 거리가 먼 독자의 감상적인 몰입이 낳은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의 평문은 『엄마를 부탁해』가 독자의 각성을 방해하는‘대중문학’일 뿐임을 주장한 셈이다.

비평의 생명이‘비판’에 있다고는 하지만 자의적인 도식을 설정하여 거기에 작품을 짜맞추고 재단하는 읽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상식/ 통념’을 부정”하고‘창조’를 동반한다는 영감의 요소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엄마를 부탁해』가 대중에게 안겨주는-감상(感傷)으로서의 감염이 아닌-성찰의 감동을 맛본 독자라면 감동을‘영감’과 구분하면서 전자를 “특정한 정서의 습관적인 재생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습관적인 정서’의 산물이 아닐까 반문할 법하다. 위반과 차이, 전복을 말해야만 겨우 반응하고 그외의 모든 것을 보수로 치부하는 관성 말이다. 마찬가지로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를 “지금 존재하는 사실적 어머니가 아니라 합의된 기억 속에 간직된 상상적 이미지”라고 규정하면서 ‘엄마〓신화적 모성〓되돌아온 감옥’이라는 등식을 설정한 강유정의 논지 역시 작품에 대한 일면적 지적일 뿐이다.

어쨌든 첨예한 사안들이 즐비한 여성주의 담론에서도 모성은 으뜸가는 화두인데,7 류보선(柳潽善)은 어머니의 모성과 관련해서 강유정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

 

하여간, 『엄마를 부탁해』가 문제적인 것은 모성을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살게 만드는 교환경제의 가속화를 막아 세우거나 교환경제를 넘어선 또다른 증여사회의 윤리적 계기로 충분히 설득력있게 맥락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자 발명인가. 급격하게 산업화가 진행된 이래 꽤 오랫동안 단지 전근대적 질서의 대표적인 표상이면서도 또 그외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해 유령처럼 도회를 떠돌던‘농경시대의 엄마’들을 이처럼 교환세계를 내파할 윤리적 전위들로 재탄생시키고 복원시켰으니 말이다.8

 

류보선이 읽은 『엄마를 부탁해』는 기본적으로 “지난 시대의 쓸모없는 실존으로 폄훼되었던‘농경시대의 엄마’를 다시 불러내어 그 엄마의 윤리를 중심으로 현재의 메마른 모더니티 너머로의 탈주 가능성을 모색한 소설이다.”(151면) 그는 신경숙의‘엄마’를 자본주의적 질서를 내파할 윤리적 전위, 또는 “순수-증여의 실천적 전위”로 규정한다. 그러나‘엄마’의 모성에 그런 식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류보선의 해석이 나는 좀 불편하다. 남성독자의 이런 적극적인 평가 자체를 여성에게 또다른 굴레를 씌우려는 간교한 수작으로 간주할지도 모르는 여성독자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를 부탁해』의 박소녀가 구현하는‘모성’이 과연 그러한 “발견이자 발명”에 해당되는가도 의문인데다가, 설혹 그의 평가에 동의하는 경우라도 “순수-증여”로 일면 구현된‘엄마’의 결코 간단치 않은 인간적 번민과 방황을 해명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품에 드러난‘엄마 찾기’의 과정을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순수-증여의 실천적 전위”로 표상된 엄마와, 현재성을 상실하여 향수(鄕愁)로 남은 “회귀하는 감옥”으로서의 엄마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인 듯하다. 이들 비평의 논조는 정말 같은 작품을 놓고 쓴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극단적으로 다른데, 생각해보면 작품을 논자의 편향된 도식에 따라 재단했다는 점에서는 잘 어울리는 한쌍 같기도 하다. 물론 남성비평가와 여성비평가가 『엄마를 부탁해』에서 각기 끌어낸, 이토록 대립적인 엄마라는 상(像)들이 박소녀라는 이름의 어머니의 일면 일면에 해당된다면 작품 자체의 어떤 전체적인 지평을 드러내는 데 이들의 주장을 활용할 필요도 있겠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도 『엄마를 부탁해』의 그‘엄마’를 찾아보도록 하자.

 

 

3. 가부장제적 모성을 넘어서

 

『엄마를 부탁해』의 해설에서 정홍수(鄭弘樹)는 “어떤 작가를 두고 평생 한 작품만을 쓰고 또 고쳐 쓴다고 말하는 것이 더없는 경의의 표현이 될 수 있다면, 이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문장을 약간 달리 표현한다면 신경숙의 모든 텍스트는 아직 미완이자 사실상‘하나의 작품’을 이루는바, 현재의 것은 과거의 것 위에 덧쓴 셈이 된다. 그 점에서 『엄마를 부탁해』도 예외가 아니다. 차이라면 신경숙의 과거 작품에서는 단 한번도 확실하게 서사의 중심에 서지 못한 어머니에게 집중적인 조명이 비춰진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후경(後景)에서 남편의‘새여자’에게 본처의 자리를 잠시 내줌으로써 가부장제가 부여한 아내의 역할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풍금이 있던 자리」(1993)의 그 엄마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엄마’로 좁혀진 이번 작품이 어떤 의미에서 신경숙 자신의 전작들, 특히 서사의 진동이 가족이라는 동심원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외딴방』의 후속편인가도 되물어봄직하다. 또 만약 후속편이라면 전작의 성취를 얼마나 심화한 작품인가도 따져볼 만한 쟁점이다.9

이 쟁점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데는 화자가 박소녀를 포함한 등장인물을 호명하는 방식을 따져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품 바깥에 존재하는 듯한 화자를 제외하면 소설가로서 작가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큰딸은‘너’로 불린다. 화자는 장자(長子)로서 엄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큰아들을‘그’로, 가부장의 특권을 사실상 다 누리고 산 남편을‘당신’으로 호명한다.‘나’의 자리는 실종된 박소녀가 차지하는데, 너→그→당신→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작가는 “한 형식이 또다른 자기 형식을 찾아가는 그런 거”라고 말한 바 있다.(신경숙·신수정 대담, 104면) 작가가 그렇게 해명한 호명방식 자체가 신선하거나 실험적인 서사방식은 아니지만 이런 흐름과 호명의 효과는 보기보다 간단치 않다.

우선 마치 초자아처럼 느껴지는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가 작가인‘너’의 음성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엄마 찾기’에 나선 작가 자신이‘나’를‘너’로 고쳐 부를 때 발생하는 효과는‘나’를 대상화하는 거리다. 또한 화자와 작가의 불일치 상황에서‘나’의 자리에 2, 3인칭이 들어섬으로써 엄마의 실종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든 각 인물로부터 독자도 일정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거리가 일률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처지에 따라 독자가 자신을‘그’나‘그녀’,‘당신’중 하나로 느낄 여지는 많다. 즉 그런 객관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엄마·아내를 잃어버린 등장인물과 자기를 순간순간 동일시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너에게 생긴 일에 대해서 길게 얘기해본 적이 언제던가. 언제부턴가 엄마와 너의 대화는 간소해졌다. 그것도 얼굴을 마주보고 하기보다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너의 말은 주로 밥은 먹었는가, 아픈 데는 없는가, 어버지는 어떤가, 감기 조심하라, 돈을 부쳤다,라는 것들이었고, 엄마의 말은 김치를 담가 부쳤다, 꿈자리가 사납다, 쌀을 부쳤다, 청국장을 부쳤다, 익모초를 달여 부쳤다, 택배기사가 전화할 테니 전화기 꺼놓지 마라,는 것들이었다.(46면)

 

그는 검사가 되지 못했다. 엄마는 그에게 니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것이 엄마의 꿈이기도 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청년시절에 꾼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의 엄마의 꿈을 좌절시킨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136~37면)

 

당신은 기진맥진한 듯 아내가 방으로 기다시피 들어와 겨우 베개를 찾고 이마를 찡그린 채 드러눕는 것을 보기만 했다. 언제나 아픈 사람은 당신이었고 그런 당신을 보살피는 사람이 아내였다. 어쩌다가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당신은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한 사람이었다.(171면)

 

‘너’와‘그’,‘당신’가운데 과연 내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론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런 식의 정색(正色)으로 표현하는 것을 낡은 감성의 발현으로 여길 독자도 있겠고, 실제로 가령 「달려라 아비」(2004)나 「칼자국」(2007) 등에서 김애란(金愛爛)이‘애비’나‘에미’의 신산한 삶을 발랄하고도 경쾌하게 소묘한 것과 비교하면 신경숙의 구세대적 성격이 더 부각되는 듯하다. 하지만 반(反)가족서사가 작단의 대세이고 가정파탄이 일상화되다시피 한 우리 현실에서 『엄마를 부탁해』가-게다가 뒤늦게 효심이 발동한 자식들을 동원해서-정색으로 도전해서는 더 어려워질 주제와 씨름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씨름을 좀더 온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의 일정한 호응을 유발하는 호명의 방식이 멜로 또는 통속의 경계와 아슬아슬한 접점을 유지하고 있음은 눈여겨봄직하다. 즉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현재 속의 과거를 무시로 소환하고 대화와 서술을 적절히 배분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다인칭적 호명방식은 엄마라는 존재를 사실상 잊고 산 가족에 대한 일종의 추궁의 방식인 동시에‘나’를‘너’로 고쳐 부른 작가가 작중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제어하는 화법이라는 것이다.10

 

너의 가족들은 큰오빠 집에 아버지를 두고 서둘러 헤어졌다. 헤어지지 않으면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줄곧 그래왔다. 엄마의 실종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상의하러 모였다가 너의 가족들은 예기치 않게 지난날 서로가 엄마에게 잘못한 행동들을 들춰내었다. 순간순간 모면하듯 봉합해온 일들이 툭툭 불거지고 결국은 소리를 지르고 담배를 피우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얘길 처음 듣자마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구들 중에서 서울역에 마중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 그러는 너는?

나? 너는 입을 다물었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조차 나흘 후에나 알았으니까. 너의 가족들은 서로에게 엄마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으며 스스로들 상처를 입었다.(15~16면)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가 자식의 그런 책임을 추궁하면서 효행의 덕목을 훈시하는 작품은 아니다. 효사상 자체도 현대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겠지만 3장까지 부재(不在)가 촉발하는 후회와 회한을 통해 드러날 뿐인 엄마가 마침내‘나’라는 주체의 자리에 서는 서사의 흐름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한다. 박소녀가 자신을 엄마가 아닌‘나’로 인식하는 4장은 그 자체로는 감상과 멜로에 충분히 거리를 두기 힘든‘사모곡’을 상대화하는 데도 일정부분 기여하는 동시에 농촌 가부장제하에서‘나’를 희생해온 한 여성의 억압된 내면을11 드러내는 데도 공헌하는 것이다.

여기에 시부모 부양의 부담을 (어떤 면에서) 자식보다 더 첨예하게 느낄 법한 며느리들의 목소리까지 들어갔으면 『엄마를 부탁해』가 가족서사로서 좀더 복잡한 가족감정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이런 서사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2000년 이후 나온 작품들-『바이올렛』 『종소리』 『리진』-가운데서 가장 신경숙답다고 해야 할 섬세하고도 정교한 기억의 서사가 펼쳐지는 동시에‘엄마’를 예술의 제단에 올리려는 작가의 강렬한 미적 신념이 유발한 문제까지도 작품에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성취의 가장 분명한 표징은 물론 보릿고개를 넘으며 한 가정을 온전하게 지켜낸 박소녀라는 여인네의 굴곡 많은 삶 자체다. 더불어 부재로 인해 증폭되는 엄마의 존재감을 자기 삶의 일부로 절절하게 시인하는 자식들과 남편의 증언이다. 근대의 해방적 모성 하면 으레 양손에 삼색기과 장총을 들고 전진하는 프랑스혁명기의-들라크루아의 그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구현된-마리안느를 떠올리지만 『엄마를 부탁해』의 박소녀는 그런 정치적 여성상과는 물론 거리가 멀다. 그런 박소녀로 말하자면, 글을 배울 수 없었고 그래서 바깥의 세상을 자식을 통해서밖에는 거의 알지 못했던, 늘 밖으로만 떠돌던 남편으로 인해 더 자식들에게 집착하고 그들의‘출세(出世)’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았던, 그럼에도 보살행으로써 자식 이외의 사람에게도 모정을 베푼, 그야말로‘전근대적’이라는 형용어가 어울릴 여성의 한 전형이라 할 만하다.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동아시아지역, 특히 산업화의 물결이 채 닿지 않은 유교적 농촌공동체가 경쟁과 이윤을 지향하는 근대사회체제에 잠식당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한-우리네 농촌에 여전히 잔존하는-어머니의 한 전형이라는 것이다.12

그러한 박소녀의 일상 갈피갈피에는 격동의 한국근대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가령 “너의 엄마 집은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하는 공장과도 같았다”(12면)는 진술만 해도 박소녀가 자식들에게 무한정 베푼 모정의 발현으로 제한할 일이 아니다.13 자식들이 어엿한 생활인으로 도시에 자리잡는 데 단순히‘엄마의 집’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보살핌으로 집약되는 엄마의 노동이 어떤 방식으로 도시라는 냉혹한 현실과 대비·연관되는가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장에 빗대진 엄마집은 끊임없이 산업예비군을 제공한 현장이기도 했다.‘근대화의 기수들’을 도시로 키워 보낸 엄마들이야말로 근대화의 혜택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근대화의 충격을 누구보다도 더 격렬하게 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중의 상처를 안고 있는-게다가 가부장제의 가족질서를 내면화한 면도 있는-박소녀이기에 그녀는 작가, 회사원, 가정주부 등 각자 자기 생활을 가진 자식들에게도 일정부분 질곡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그토록 애타게 엄마를 찾으며 죄의식의 합창에 합류한 데는, 그들이 그같은 상처가 있는 박소녀를 은연중 일종의 짐으로, 그러나 어떤 경우든 내려놓을 수 없는 짐으로 여긴 과거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치매에 걸려 길을 잃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벌어진, 식구들이 그 책임문제로 서로를 물어뜯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이혜경(李惠敬)의 『길 위의 집』(1995)이 그러했듯이, 집으로 귀환했다 한들 박소녀가 사모곡을 통해‘과거’를 대속하려 했던 자식들에게 또다른 착잡함을 안겨주리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함직하다.

어쨌든 이제는 떠나간 자식들의 빈자리를 더듬으며 그들의 편지를 기다리는 어머니 상은 확실히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오늘날 노후에 대한 사람들의 맹렬한 관심은 희생 및 헌신의 모성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거니와, 바로 그 모성으로 구현된 듯한 박소녀가 일부 독자에게 복고적 향수를 자극하는 면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러니 그런 독자들이 박소녀의 어머니됨을 농경시대의 모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일리는 있다.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에 장자를 세우고 하나씩 도시로 떠나간 자식들을 향해 해바라기한 박소녀만은 가부장제하의‘여자의 일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단적으로 자식과 남편이 그녀를 추억하며 변주하는, 이를테면 피붙이들이 부르는 죄의식의 합창이랄 만한 것도 그런 일생의 간난신고를 일관되게 증언하지 않는가.

그러나 부재에 의해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가 환히 밝혀지는 박소녀라는 여인을 자기를 잊고 자식과 남편에 모든 것을 거는‘가부장제적 모성’으로만 보는 것은 우리시대 특유의 시대적 착시가 아닐지. 아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만 알았지 바로 그런 모성의 결코 간단치 않은 인간적 내면을 희생과 헌신이라는 가치로써 왜곡해온 행태에 우리가 너무 무감각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면에서는 『엄마를 부탁해』 자체가 바로 그런 무감각에 대한 자기반성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4. ‘엄마’의 진실에 대하여

 

그런 의문은 텍스트의 표면으로 드러난‘엄마의 모성’이 박소녀의 전부가 될 수도 없고 또 전부도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서 나온다. 자식과 남편은 가정에 헌신했던 엄마이자 아내의 모습을 절절히 기억하지만 그런 기억들의 틈새에서 엿보이는 박소녀의 이면들은 엄마의 가부장제적 모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즉 “어깨와 치마 끝단에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싶어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엄마, “부엌이 감옥 같을 때는 장독대에 나가 못생긴 독 뚜껑을 하나 골라서 담벼락을 향해” 던지곤 했던 엄마, 세 자식을 양육하느라 허덕이는 둘째딸이 가정에서 해방되기를 바랐던 엄마의 속마음을 헤아려본 독자라면 그 모성이 “되돌아온 감옥”이기는커녕 바로 그런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 한 인간의 욕망을 숨기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내 딸. 너는 그걸 시작으로 내가 서울에 올라올 때면 나를 식구들 속에서 빼내 극장에도 데리고 가고 능에도 데리고 갔재. 서점에 있는 음반 파는 곳에도 데리고 가 헤드폰을 내 귀에 대주기도 했재. 이 서울에 광화문이란 곳이 있다는 거, 시청 앞이 있다는 거, 이 세상에 영화와 음악이 있다는 것을 너를 통해 알았고나. 엄마는 네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고나. 니 형제들 중에서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애가 너여서 뭐든 자유롭게 두자고 했을 뿐인데 그 자유로 내게 자주 딴세상을 엿보게 한 너여서 나는 네가 더 맘껏 자유로워지기를 바랬고나. 더 양껏 자유로워져서 누구보다도 많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기를 바랬네.(221면)

 

이른바 87년체제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성장한 오늘의 젊은이들, 특히 가부장의 허세를 꿰뚫어보면서 양성평등의 가치를 내면화한 여성들이 이 엄마의 희원(希願)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단언키 어렵다. 다만 어떻게 평가하든 둘째딸이 “더 양껏 자유로워져서 누구보다도 많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기를 바”란 엄마가 통속과 신파로 귀결되는‘모성의 신화’와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자의 세계에 단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25면) 캄캄한 일상에서 나온 촌부(村婦)의 절실함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읽을 때 농경사회의 가부장제에 묵묵히 순응한 엄마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자기의 꿈을 끝내 가두어둘 수 없었던 엄마가 『엄마를 부탁해』에서‘각축’하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물론 엄마의 두 얼굴은 박소녀라는 한 인간의 단순한 성격상 모순만이 아니다. 그 얼굴은 “먹고사는 일이 젤 중했던”시절에 식구들을 건사하는 과정에서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본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꿈은 가정에 묻되 그런 꿈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꺼버릴 수도 없었던 자의 맨얼굴‘들’이다. 그런 식으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 가운데는 “날마다 학교 좀 보내달라고 눈물 바람을 하던” 박소녀의 시동생인 균도 들어 있지만, 어쨌든 가부장제가 주조한 헌신적 모성이라는 상, 자식과 남편의 사모곡이 정형화하는 어머니의 상을 해체하는 또다른 개인으로서의 엄마가 작품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엄연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엄마를 부탁해』는 여자로서의 욕망과 배움의 의지가 좌절되는 박소녀의 일생을 기록한 것 못지않게 때늦은‘엄마 찾기’에 나선 자식과 남편의 삶을 상세하게 들려주기도 한다. 이 점은 그간 언론계나 평단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 이 글에서도 충분히 다뤘다고 볼 수 없지만, 박소녀가 갔음직한 곳을 추적하는 과정에 실종된 바로 그 시각 자식들의 행적도 낱낱이 담긴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로써 엄마의 실종 원인은 다른 어디가 아닌 그들 각각의 생활에 있다는 뼈아픈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14

그런 진실은 박소녀 역시 근대적 욕구의 소유자임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게다가 (앞의 인용문도 말해주듯이) 그 욕구의 원만한 발현에 대한 박소녀의 소망이 둘째딸로 표상되는 오늘의 여성에게 투사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와 같은 소망의 투사가‘통속적 모성’이라는 것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에필로그‘장미 묵주’의 대미도 작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15 엄마의 실종과 연관된 모든 상황이 실질적으로 종료된 에필로그에서‘고해의 합창’이 다시 울려퍼지는 것은 일단 부담스런 감상적 반복처럼 읽힌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초인적 일생을 회고하며 피에타상의 후광을 입히려는 시도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모성의 신화화 또는 이상화에 일조할 공산이 크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작가의 말처럼 “예술이란 고정된 관념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면(신경숙·신수정 대담, 120면) 주밀한‘복선’에도 불구하고16 『엄마를 부탁해』의‘진짜’결말은 엄마를 서사의 중심에 놓은 4장(‘또다른 여인’)일지 모른다. 4장은 박소녀가 새〔鳥〕의 몸을 받은 중음신(中陰身)으로 구천을 떠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제까지 전개된 사실주의 기조와는 좀 성격이 다른 장이다. 실은 그렇게라도 몸을 받으면 중음을 면하는 것이 불가(佛家)의 전통적 관념이지만, 어쨌든 독자는 박소녀의 의식을 가진 새가 이승을 등지기 전에 일생 동안 육친적 인연을 맺었던 여러 인물의 처소를 찾아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소설의 전체를 두고 보면 3장까지 멜로와 신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하곤 했던 사모곡만으로는 온전히 밝힐 수 없던 진실을 새로 윤회(輪回)한‘나’가 들려주는 구도다. 은폐된 엄마의 비밀이 박소녀가 죽은 뒤에야-즉 중음신의 목소리로-발설된다는 상황 설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정에 값하는 만큼의 어떤 인식의 충격이 따르는지는 좀 생각해볼 문제다.17 다만 그 구도에서 가부장제의 엄마든 개인으로서의 엄마든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박소녀의 숨겨진 삶의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뜻밖의 에피소드는 역시‘또다른 여인’으로서의 그녀가 이은규라는 외간 남자와 맺은‘관계’일 터인데, 이에 대한 논의를 생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의 숨겨진 애인’이라는 드라마 주제쯤으로 비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관계는 한마디로 착잡하다. 박소녀 자신이 “우리 자식들은 우리를 이해 못할 거요. 당신과 나를 이해하느니 전쟁통에 수십만 명의 사람이 죽은 일을 더 잘 이해할 거요”(231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통속과 멜로의 장르도 워낙 잡식성인 터라 연애라는 감정에 탐닉하기에는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던 이들의 사연마저 소화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지난 세기말에 많은 여성작가들이 숱한 방식으로 다룬, 집나간 엄마의 불륜이라는 풍속적 소재라면 모를까 박소녀와 이은규의 기구한 인연을 그런 식의 구도로 볼 수는 없다. “먹고사는 일이 젤 중했던” 적빈(赤貧)의 시절에 식구의 식량을 가로챈 남자 집에서 젖어멈을 자처한 박소녀의‘전근대적 심성’이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팔자 사납게 이후 박소녀의 한스런 삶을 고스란히 받아준 이은규의‘고지식함’은 독자의 눈시울을 쓸데없이 자극하는 멜로물의 소재로 가공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심정과 고지식함 자체가 감상과 통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5.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의 여운

 

서럽고 가난한 현실에서 질기게도 이어진 두 남녀의 만남을 단순히 사랑이나 우정, 순정 등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뭐라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힘든, 그래서 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러한 곡절을 들려주고 박소녀에게 시어머니 노릇을 했던 형님과 살던 집을 일별한 후 4장은 이렇게 끝난다.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날 때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네. 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소가 힘을 쓰며 막 일어서려는 참에 태어난 아이이니 얼마나 기운이 넘치겠느냐며 이 아이 때문에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니 잘 거두라 했다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 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면)

 

‘엄마’가 보는 엄마의 환영(幻影),‘엄마’의 고통 앞에서 웃지도, 울지도 않는 이 환영은 모성의 영원한 보편적 동일성-“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을 육화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결말의 궁극적 지향점은 그런 동일성이 해체되는 순간에 있다. 게다가 피에타상이 풍기는 관념의 광휘는 부족할지언정 그 순간이 단순히 해체로 끝나는 것만도 아니다. 엄마라는 존재를 극적으로 상대화하고 보살핌의 주체로서의 엄마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바꾸는 마지막 문장, 즉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앞에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가 붙음으로써18 자식과 남편이 불렀던‘죄의식의 합창’에 묻어나는 도덕적 질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근대화과정에서 두 얼굴로 분열된 엄마를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 성찰하기를 요구한다. 만약 “근대가 여성에게 근본적으로 해방과 억압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19기에 엄마의 분열도 필연적이라면 그런 성찰은 더욱 긴요하다. 또한 근대의 양면성과 불가분하게 얽힌 엄마의 질곡에 대한 통찰이 근대 탈피의 적극적인 모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페미니즘 담론에만 의지해서 해소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근대를 주도한 남성 자신이 해방과 억압의 굴레에 (어떤 면에서는) 여성보다 더 얽매여 있기에 그렇다. 요는, 근대 자체에 대한 탐구를 요청하는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의 여운을 성(性)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거짓화해와 대중기만으로서의 예술’” 운운하면서 다문화가정의 어머니를 포함한 “이제까지의 가치체계로는 포섭될 수 없는 새로운 엄마들,” 그런 낯선 존재들에 대해 『엄마를 부탁해』가 “결코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 평문도20 작품에 대한 결코 충분한 읽기는 못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런 편향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개인주의의 이름으로 어미의 헌신성이 갖는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엄마이기 때문에 펼칠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절실한 원념(願念)을 오늘의 현실로 되살려냈다는 것-이것이야말로 가족서사로서 『엄마를 부탁해』의 독특한 예술적 성취요 그 대중성의 비결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 자기를 바치는 어미로서의 희생정신과 어미 이전의 한 개인으로서 품은 소망이 “위기 자체가 정상인 상태, 즉‘정상위기’(normal crisis)에 직면한” 한국의 가족현실에서21 왜 양립하기 거의 불가능한가를 끝까지 직시할 때 독자가 실감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生)의 어떤 어렴풋한 기미야말로 신경숙 문학 고유의 사유가 개척한 진경(眞景)이다.

그런데 중음(中陰)에서 발생하는 그런 진경이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외딴방』이기도 하다. 지금의‘나’를 만든 (큰오빠가 대표하는) 가족의 희생적인 헌신을 기리는 동시에 한 시대의 진실을 문학에 대한 신실한 물음으로써 드러낸 『외딴방』이 없었다면 『엄마를 부탁해』의 성취도 기약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가족서사로 좁혀진 엄마 이야기의 성취는 문학 자체에 대한 도저한 물음과 해체를 동반한, 결코 특정 장르로 좁혀질 수 없는 『외딴방』의 복합적인 성격을 일정부분 단순화하는 댓가를 치른 것이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에서 두드러지는 그 댓가를 더이상 되뇌고 싶지는 않다. “과연 네가 구사하는 어느 문장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11면) 하는 작가 자신의 자문과, 그런 단순화의 댓가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부탁해』 자체는 결코 가부장제하의 모성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박소녀 개인의 복합적 진실을 되살림으로써 『외딴방』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신경숙의 소설세계를 성공적으로 잇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엄마를 부탁해』가 향후 신경숙 소설세계의 일정한‘전진’을 기약하면서 폭발적 대중성을 획득한 것은 작가에게는 물론 독자에게도 행복한 사건이겠다. 다만‘회귀’를 통해 전진하곤 했던 그녀의 작품세계가‘외딴방’에 묻힌 희재언니 같은 민중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면서 우리 당대의 시대적 현실을 얼마나 더 뜨겁게 증언해줄 수 있을지는 독자로서 좀더 욕심껏 기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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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젊은 시인은‘가족’을 이렇게 노래했다. “밖에선 /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 집에만 가져가면 / 꽃들이 / 화분이 / 다 죽었다” 진은영 「가족」,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2. 김미영 「그대 이름은 엄마, 엄마, 엄마」,『한겨레21』 2009.3.6.
  3. 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문학』 2009년 봄호 325~26면.
  4. 조영일 『한국문학과 그 적들』, 도서출판 b 2009, 277면.
  5. 강유정 유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목소리로써 일단 반박할 만하다. 신수정이 “이 소설 속의 엄마가 현실 속의 엄마 같지 않다고요. 파란 슬리퍼를 신고 발에 피를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대목도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엄마의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어 거의 성녀같이 여겨지는 대목도 있었다는 거예요”라고 지적하자 신경숙은 이렇게 답변했다. “파란 슬리퍼를 신고 발에 피를 흘리면서 돌아다니게 하는 게 과하다구? 이 소설에선 중요한 상징일 뿐이지만 현실은 더할걸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내다버리는 사람들이 숱한 게 현실이지. 현실이 더 과해요.” 신경숙·신수정 대담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문학동네』 2009년 봄호 120~21면.
  6. 고봉준 「감동의 문학과 영감의 문학」, 『문학수첩』 2009년 봄호, 특히 32~36면 참조.
  7. 이에 관한 다각도의 논의는 특히 Adrienne Rich, Of Woman Born: Motherhood as Experience and Institution (Norton 1976) 참조. 국내에는‘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라는, 다소 자의적인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8. 류보선 「‘엄마’라는 유령들: 신경숙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읽기」, 『문학동네』 2009년 봄호 149~50면.
  9.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외딴방』을-그리고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4), 「감자 먹는 사람들」(1996), 「종소리」(2001) 등 여러 중단편을-떠올리는 것은, 무엇보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한 주요 인물이 이미 과거의 작품들에서 선보인 바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선보인 정도가 아니라 큰오빠를 포함한 피붙이들을 뺀다면 『외딴방』 서사 자체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다. 『엄마를 부탁해』는 기본적으로 희재언니 같은 인물이 나오기 힘든 구도지만 이야기의 초점이 박소녀에게 맞춰짐으로써 『외딴방』에서 채 못다 들려준,‘나’를 키워주고 서울로 보내 작가로서의 성숙을 가능케 했던 가족의 진실이라는 문제가 좀더 집중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10. 다른 한편 『엄마를 부탁해』가 발휘하는 서사운용의 그런 미덕을 수긍할 때 떠오르는 것은 신경숙 자신의 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이때 글쓰는 이의 절절한 자의식이 소설형식 자체에 대한 물음과 해체를 동반하는 『외딴방』만큼 좋은 비교대상도 없는 것 같다. 간략히 말하자면 『외딴방』의 서사가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암중모색하는 과정 자체다. 그 과정에서 『외딴방』은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 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 사진 찍듯”(1권 43면) 쓰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그런 의지가 끝내 흔들리면서 개인의 삶에 삼투되는 시대의 현실이 더욱 생기를 띤다. 『엄마를 부탁해』는 물론‘장르’가 전혀 다르고 각 인물이 처한 상황을 독자인‘나’의 처지로 불러들이는 흡입력도 상당하지만, 정연하게 진행되는 그 호명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외딴방』의 불확실하게 흔들리는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면도 있다.
  11. 4장에서 엄마에게 1인칭을 부여한 것이 작가로서는 그런 점까지 의식한 선택이었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신경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3장까지 써왔을 때는 엄마는 정말‘나’라고 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니까‘나’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 살아온 엄마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은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어요. 이게 여성주의의 소설로 읽힐까봐 약간 우려가 없지 않으면서도 하는 소리예요.” 신경숙·신수정 대담, 104면.
  12. 이 소설의 어머니 상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판단할수록 “비근대적이라거나 전통적인, 심지어 자연적인 속성으로 간주되”기조차 한 관념으로서의 어머니도 근대가 만들어낸 것이고 따라서 그 형성과정에 대한 좀더 철저한 사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귀기울임직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희 「페미니즘과 근대성」,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창비 2009) 참조. 인용문은 136면.
  13. 그밖에도 맛깔스러운 세목이 적지 않다. 문맹으로 딸의 작품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박소녀와 점자도서관을 찾아 맹인에게 자기 작품을 들려주는‘너’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는 것도 그중 하나다.
  14. 그런‘소소한’진실에 대한 남편의 다음과 같은 자각은 특히 통렬하다. “열일곱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로 오십년 동안 젊어서는 젊은 아내보다 늙어서는 늙은 아내보다 앞서 걸었던 당신이 그 빠른 걸음 때문에 일생이 어딘가로 굴러가 처박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나서라도 바로 뒤를 돌아 확인했더라면 이리되지 않았을까. 젊은날부터 아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어딘가 함께 갈 때면 항상 걸음이 늦어 뒤처지곤하던 아내는 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당신을 뒤따르며 좀 천천히 가먼 좋겄네, 함께 가먼 좋겄네…… 무슨 급한 일 있소? 뒤에서 구시렁대었다. 마지못해 당신이 기다려주면 아내는 민망한지 웃으며 내 걸음이 너무 늦지라오? 했다.”(167면)
  15. 결말의 피에타상과 연관해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앞선 예술가가 만들어놓은 그 비탄의 자리, 비탄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단아함의 자리, 그 단아함도 넘어서는 예술의 세계 속에 엄마를 데리고 가고 싶었어요. 비판받아도 할 수 없지. 그건 내 욕망이니까. 한 시대를 그렇게 고단하게 통과해왔으면서도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잃어버림을 당한 채 파란 슬리퍼에 발등이 푹 파인 채 어딘가를 걷고 있는 엄마의 자리를 거기에다 만들어주고 싶었으니까.” 신경숙·신수정 대담, 120면.
  16. 연재본(『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2008년 가을호)과 단행본의 차이에 대해서 길게 서술할 지면은 없지만‘장미 묵주’의 복선에 대해서는 짚어둠직하다. 단행본 1장‘아무도 모른다’(이는 연재본 4장의 제목이다)에서 박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어디지? 생각하면서” 작가인 큰딸에게 “그 나라에 가게 되거든 장미 묵주를 하나 구해달라고” 말하는 대목(57면)은 연재본에는 없었다. 이는 작가가 에필로그의‘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7. 4장이 이 작품의‘백미’이기는 하지만 박소녀와 그녀의 시대가 손쉽게 화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또한 멜로물의 요소가 노골화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가령 박소녀의 실종 이후 이은규가 그녀를 찾으러 온 서울을 헤매고 다닌 것으로 기술되는 대목은 박소녀와 간단치 않은‘관계’를 맺은 이은규를 말 그대로 감상주의 소설에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느끼게 한다. 4장에서 새로 몸을 받은 박소녀를 머릿속으로 그린 독자라면 이야기의 진행 도중에 나오는 “내가 신고 있는 굽이 다 닳아버린 파란 슬리퍼를 벗고 싶어”(223면) 운운하는 대목도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는다.
  18.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와 유사한 표현은「종소리」에서도 한번 나온 바 있지만 이 물음만은「종소리」는 물론 연재본 4회(『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에도 없던 것이다. 단행본 4장의 이런 마지막 대목을 단행본에 첨가한 에필로그의 결말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점은, 후자의 피에타상이 독자에게 범접하기 힘든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단행본 4장을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는 연재본 4회와 대비할 때 좀더 분명히 실감되는 것은 그 물음의 여운이다. 독자는 가부장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박소녀의 간단치 않은 내면을 더 적극적으로 반추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재본은 “나의 두 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에 이어 단순히 이렇게 마무리된다. “엄마의 무릎에 등을 눕히고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내가 중얼거리네. 엄마-” 이에 비하면 개고한 단행본 4장의 결말은 확실히‘시적 개선’에 값하는 울림이 있다 하겠다.
  19. 김영희, 앞의 글 120면.
  20. 이도연 「기억을 구성하는 두가지 방식」,『문학들』 2009년 봄호 234면.
  21. 이에 대해서는 장경섭 『가족·생애·정치경제: 압축적 근대성의 미시적 기초』(창비 2009) 1, 4, 5부 참조. 인용 대목은 2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