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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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金龍澤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섬진강』 『맑은 날』 『꽃산 가는 길』 『그 여자네 집』 『나무』 등이 있음. yt1948@hanmail.net

 

 

 

다시, 끝

 

 

세상의 끝에서

시가 길을 잃었다

절망의 절정이 희망의 절정을 끌어올 때까지

절정은 불처럼 뜨겁다

 

울어라 봄바람아!

 

 

 

2003년, 지구 위의 봄

 

 

나는 잠들 수 없다

꽃이 피는 봄밤 나는 잠들 수 없다

내 머리는 쪼개질 것처럼 아프고

머리털이 뽑힌다

내 옆구리는 갈비뼈가 다 보이게 헐리고

내 발가락은 벌써 여러개가 잘려나갔다

보드라운 내 허벅지, 토실토실한 내 엉덩이는 찢어져 너덜거리고

내 가슴은 이제 피맺힌 심장이 다 들여다보인다.

내 손을 보아라

이게 손인가

내 눈을 보아라

이게 내 눈인가

내 귀,

내 입, 이게 내 귀 내 콘가

내 몸 곳곳은 피 흘린다

살이 찢기고 뼈 부러졌다

이게 사는 것인가

지구가 부서진다

나무가 쓰러지고

꽃들이 흩어지고

오! 아이들의 슬픈 비명소리

피는 멈추지 않고 흐른다

병든 땅에서 솟아나는 물은 피로 물들고

검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은 코피를 쏟게 한다

내 몸에서 자라는 모든 풀과 나무와 곡식들은 병들어 썩고 죽을 것이다

오! 죽은 피, 더러워진 피, 사랑도 이별도 이제 쇳덩이가 되리라

커다란 쇠손은 날마다 산을 허물고, 나무와 풀을 자르고

바다를 메워 생명들을 파묻고 눌러 죽인다

내 살 속을 흐르는 피를 땅 위로 솟게 한다.

개뼈다귀를 던지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개떼들아

푸른 골짜기와 맑은 바람과 들꽃들

보드라운 아이들의 살결과 향기로운 처녀들의 머릿결과 감미로운 밤은 사라졌다

나는 잠들 수 없다

이 더러운 욕망의 덩어리

이 탐욕과 오만의 구렁텅이를 날마다 헤맨다

사막 같은 목마름

구토와 허기로 나는 모래바람 속을 돌아다닌다

비를 따라가고 싶어도 

아기 손톱같이 자라나는 잔디 위에 가 이슬처럼 앉고 싶어도 

농부가 갈아엎어놓은 흙에 내리고 싶어도

검은 구름들이 몰려다니며 검은 바람을 일으킨다

강물은 넘치고

살육은 일상이 되었다

시인들은 도망가고

바다는 뒤집어진다

피에 굶주린 제국 야만의 얼굴을 보라

폭력으로 단련된 저 쇠처럼 굳은 얼굴들을 보라

아침마다 우린 무엇을 찾아 떠나는가

우린 꿈을 잃었다

맨발로 걸어갈 지구의 길은 막히고

누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누구의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아침 산의 얼굴

햇살을 받아든 오동잎,

아침 햇살을 가득 싣고 흐르는 강물이여!

괭이와 삽과 호미와 흙 묻은 손이여!

나는 긴 시를 쓸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랑 이야기를 쓰리라

내가 아기였을 적에

손에 들었던 한떨기

이슬 젖은 들꽃을 쥐고 웃던

오! 우리들의 어머니인 대지여!

바람이 구름을 싣고 내 머리 위를 흐르던 그날

내 손에 잡히던 호미 쥔 어머니의 손

평생 땅을 판 어머니 호미 끝에서 태어나는 밭이랑같이 긴 시는 어디 갔는가

어머니가 긴 밤을 새워 내 옷을 깁던 그 긴 이야기는 어디 갔는가

내 시는

나무와 나뭇가지 끝에서 돋아나는 꽃과 나무이파리와 그 열매 위에 피로 맺힌다

오!

오! 피 흘리는 지구여! 지구여!

나는 푸른 숨결을 지구 위에 토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