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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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좌담

 

이런 사회 이런 정치를 나는 원한다

 

 

김대호 金大鎬

사회디자인연구소장. 저서로 『노무현 이후』 『진보와 보수를 넘어』 등이 있음.

 

백승헌 白承憲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변호사. 총선시민연대 대변인 역임.

 

주대환 周大煥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저서로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등이 있음.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연대와 열광』, 편서로 『87년 체제론』 등이 있음.

 

ⓒ이영균

ⓒ이영균

 

 

김종엽(사회) 바쁘신데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논의하려는 주제는‘이런 사회 이런 정치를 나는 원한다’인데,‘나는’이라는 말을 넣은 건 사회적·정치적 비전을 말함에 있어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을 걸고 얘기해봤으면 좋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런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무래도 현재 이명박정부가 취하는 정책이 배경으로 논의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현재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제어하고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사회적·정치적 비전과 연결될 때, 비전의 구체성과 실감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올해만 해도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비정규직법 논란, 미디어법 파동, 쌍용차 사태 등 큰 사건들이 줄을 섰지만, 이명박정부 출범 후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작년의 촛불항쟁이라고 하겠습니다. 촛불항쟁은 한편으로는 이명박정부의 공격적 신자유주의 정책과 상층계급 편향적 정책, 무리한 성장주의 등을 대중이 어느정도 제어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대중이 아무리 진보적으로 행동하고 현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일부 막아낸다 하더라도 그런 대중의 에너지와 시도가 진보개혁진영의 비전과 만날 때 더욱 의미있는 정치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과 총선 전후로 많이 제출된‘진보의 재구성’논의가 구체성을 띠고 발전해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먼저 진보개혁진영의 자기성찰과 관련된 얘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국사회의 토양과 진보의 성찰

 

김대호 저는 진보뿐 아니라 보수도 한국사회를 어디로 끌고가야 할지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여야가 다투고 있지만, 초기에 부작용이 좀 있더라도 그 방향으로 계속 가면 해결되겠다 싶은 느낌을 주는 해법이 어느 쪽에도 없어요. 청년실업 문제, 자영업 문제, 벤처중소기업 문제, 교육 문제,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권위주의 정부를 민주정부로 바꾸고, 그후에 노동운동이나 민주개혁세력의 힘을 강화하면 상당히 괜찮은 사회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노무현정부는 과거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 여러 원칙들을 지켰습니다.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 같은 4대 국정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김대중정부가 깔아놓은‘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시장경제’‘생산적 복지’라는 레일을 그대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는 우리가 꿈꿔오던 그런 사회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요. 참여정부가 내놓았던‘비전2030’을 봐도 저대로 가면 2030년경에는 선진국 수준으로 가겠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한나라당의 비전을 봐도,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것을 봐도 비슷하고요.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참여정부는 들인 품에 비해 신통찮은 성과를 내고, 범진보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끝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또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논의가 계속되기 전에 먼저 용어를 조금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기를 돌아보는 그간의 논의에서‘진보’진영의 성찰 지점과‘진보개혁’진영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포괄했을 때의 성찰 지점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사실 지난 정부가 끝날 무렵에 진보진영이든 개혁진영이든 동시에 좌절을 느꼈던 것 아닌가 해요. 즉 자유주의 세력 혹은 합리적 보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계에 봉착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그 이상의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좌절을 겪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함께 성찰할 부분이 있고, 따로 나누어서 살필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따로 나누어 본다면 정권을 직접 담당했던 노무현정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온건 보수 또는 자유주의적 정당은 사회를 한단계 높여 끌고가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동의받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지요. 또한 그 이상을 추구했던, 주대환 대표님을 포함해서 진보정당 노선을 취했던 분들도 진보정당이 성장해서 자유주의 정당의 대체자로 선택받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대환 진보진영과 개혁진영 각각 성찰이 필요한 상황인데, 저는 그 성찰의 방법론으로서‘모든 사물을 국민의 눈으로 바라보자’라고 정리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시대적 환경으로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인생의 아주 중요한 시기를 바쳤던 나름의 노선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노동당 노선’이라고 부르는데, 말하자면 87년부터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어서, 그것을 이념정당이 아니라 노동당 같은 대중정당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주의 정당을 넘어 한국의 정치를 보수-진보의 양대 축으로 만들자는 프로젝트인데, 그것을 작년에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십수년 인생을 바친 민주노동당도 탈당했고요. 그걸 포기하고 실패를 인정하고 나니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반성을 많이 했는데, 그 요체는‘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같은 진보진영 입장에서 서로 봐주고 하면 모든 행동에 다 이유가 있고 다 이해할 만하죠. 그런데 국민들은 어떻게 보느냐? 그게 중요하거든요. 국민들의 눈으로 보자. 그래서 저는 “태양계 바깥으로 나가야 태양계가 제대로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김종엽 오랫동안 투신하신 전략에서 벗어나셨는데, 그렇게 태양계 밖으로 나가서 보신 태양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요?

주대환 무엇보다 진보진영이 서 있는 자리인 한국이 어떤 사회인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 식으로 표현하면, 한국은 정말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다, 그리고 거기에는 계급이 형성되지 않은 배경도 있겠다 싶습니다. 얼마 전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봤는데, 굉장히 중요한 영화다 싶더라고요. 왜냐? 이게 대한민국 60년의 역사를 찍은 영화더라는 겁니다. 주인공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 대한민국의 역사가 일치해요. 두분이 결혼한 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였습니다. 그리고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8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농지개혁으로 자영농이 되는데, 결혼하자마자 독립 자영농으로서 인생을 새출발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바로 자영농의 나라, 그 자영농이 자신만을 믿고 자기만의 노력으로 자식을 아홉명이나 길러낸 그런 나라였다는 거죠. 그래서 계급의식이랄지 이런 걸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앞으로 계급이 형성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형성되지 않은 사회이고, 그래서 그런 한국인의 문화 혹은 한국사회에 맞는 정치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마디 덧붙인다면, 평등한 자영농의 나라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 나라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비전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김종엽 새로운 비전을 가다듬기 위해 우선 우리사회의 문화적 특징에 착근된 형태의 진보적 이념을 찾아야 하는데, 그 실마리를 해방후 한국사회가 자영농의 나라로 출발한 것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함의는 우리사회에는 평등주의와 자력갱생 의지가 강한 문화가 지배적이었고 거기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비해 김대호 소장께서는 평소에 이익집단의 사익추구와 집단간 상호불신 같은 것을 극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곤 하셨죠?

김대호 저는 어떤 복지국가 모델을 설정할 때 이익집단이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이익을 추구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일반적인 자유주의 국가보다 훨씬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나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문제는 자유주의 복지국가에는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성정이 우리보다 나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을 규율하는 질서를 만드는 공공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치나 정부를 포함한 공공이 제 역할을 못하다보니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이익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그게 심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공공은 상당히 무능한 데 비해 개인이나 집단들은 대단히 유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의 해법은 도덕적인 설득이라든지, 노무현 대통령처럼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는 공공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고 봅니다. 특히 게임의 규칙, 한마디로 법과 제도를 바로 세우고, 이것을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법과 제도는 이명박, 이회창씨가 말하는 그러한 법과 제도가 아닙니다. 시민사회 혹은 국민 다수의 총의와 상식이 만든 법치를 뜻하는 것이죠.

백승헌 법조인인 제가 할 말을 대신 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각 사회가 처한 조건의 차이는 사실 면밀하고 섬세하게, 전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우리의 국민성으로 얘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회의 특징은 역사적 경험이 제도로 나타나고, 그 제도가 다시 국민의 성정을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역사에 영향을 주는 피드백 과정에 의한 것인데, 국민성이라는 말은 고정된 조건으로 이해되어 그런 역동성을 무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지금 김대호 선생께서 공공의 무능과 개인의 유능 또는 악착스러움을 대비하셨는데, 저는 그 문제를 민주주의의 착근과정에서 정당한 공공적 합의에 기초한 질서의 효율성과 개인의 능력을 연결하는 작업이 지체되어 생긴 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유능과 공공의 무능을 단순히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가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천착했으면 합니다.

김종엽 김대호 소장께서 공공의 무능과 개인의 유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게임의 법칙을 잘 세워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래서 긴요한 것이 법이나 제도를 제대로 정립하는 것일 텐데, 더불어 법과 관행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겠습니다. 사실 현재 우리사회의 법은 매우 엄격한 편이어서‘걸면 다 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관행에 법을 들이대면 다들 화를 내지요. 법과 관행의 괴리를 잘 해결하지 않으면 단순히 게임의 규칙을 세운다는 것만으로는 안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참여정부를 구체적으로 평가해보고, 대안적 비전 쪽으로 논의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노무현정부 시절에 무엇을 잘했고 못했는지, 그 과정에서 진보개혁진영은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일지요.

 

노무현정부의 공과와 진보개혁진영

 

김대호 참여정부의 핵심가치는 뭐니뭐니 해도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첫째는 기존의 법제도를 지키는 준법 내지 정상화이고, 둘째는 기득권 집단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한 법적·제도적 불의를 혁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한국사회가 대단히 빠르게 변하는 편이라서 환경과 씨스템 그리고 리더십 간에 충돌이 생기는데, 이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참여정부가 가장 중시한 것은 사실 첫째였다고 봐야죠. 실제 이 부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탈권위주의, 반칙과 특권 타파 등이 대표적이죠. 근데 문제는 그것을 이루고 나면 법적·제도적 불의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공직선거법 문제나 헌법 문제예요. 이것이 후반기에 가서 대연정이라든지 개헌 시도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제대로 고치지는 못했죠. 또 하나는 환경과 씨스템과 리더십의 충돌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에 대처하는 것인데, 역시 제대로 안됐죠. 사실 청년실업 문제, 중소기업 문제, 자영업 문제, 비정규직 문제 같은 것들은 노무현정부 인수위 때는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이후에 급격하게 불거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사회변화에 따른 새로운 요구들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게다가 새로운 개혁과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정부의 4대 국정원리 같은 것들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론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죠. 참여정부는 사실 보수언론에 의해서도, 진보언론에 의해서도 지나치게 폄하됐습니다. 진보는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 얼치기 운동권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물론 그렇게 볼 소지도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 이상으로 진보와 보수언론, 지식인사회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엽 지금 참여정부에 대해 보수언론뿐 아니라 진보진영 또한 편향된 평가를 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회경제적 문제에 제대로 대응을 못한 것에는 참여정부로서도 뼈아프게 생각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이명박정부처럼 국민 전체의 이익에 반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지지층을 챙겨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지지층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지 않나 싶어요.

다른 한편 보수언론뿐 아니라 참여정부 그리고 진보진영까지도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이해한 것이 문제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민주주의를 절차적인 것에 한정한다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한 셈입니다. 민주주의를 한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한, 식사중에 식욕을 느끼기는 어렵듯이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도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장되고 심화된 사고가 필요했고, 거기서 핵심은 사회경제적인 민주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좌파들도 상당히 비판을 했었지만, 민주노동당은 대선에서‘민주주의 되고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이런 구호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구호가 의도와 달리 우파적 선동과 공명하는 바가 있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소한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대환 참여정부는 복지예산을 빠른 속도로 늘린 것을 비롯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집권기간에 빈부격차가 오히려 커졌지요. 그건 빈부격차와 양극화의 속도를 정부 대책이 못 따라잡았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시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양극화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민주화운동 시절의 사고습관에 젖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실 파악은 공무원들만도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민주당 안에‘민주연대’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80년대에 자기네가 좋아하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지금 살림살이가 어려워서 고통받는 국민들이 볼 때는 저 사람들은 웬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느끼거든요. 그래서 저는 자유주의자들이 정말 그런 대목에서 반성하고 자기혁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주의라는 것도 시대상황에 따라서 내용을 계속 쇄신해가야 하니까요.

김종엽 개혁진영이 과거의 사고습관에 젖어 있는 것처럼 진보진영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진보진영은 지나치게 노동자중심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노동시장 상황을 보면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자본주의화가 꼭 프롤레타리아화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고, 탈프롤레타리아화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역동적 과정인데, 그것이 자본축적에 더 유리한 경우도 많지요. 그런 상황에서 대중정당운동을 민주노총과 대기업노동자 중심으로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책개발도 늦었을 뿐 아니라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비경제활동 인구나 자영업자 그리고 무급가족종사자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책적 비전이 없습니다. 진보진영이 노무현정부가 신자유주의 한다고 비판했지만, 자신은 좁은 의미의 노동자를 넘어서는 포괄적이고 뚜렷한 민생대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주대환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여정부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렇게 비판할 만한 입장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대목에서는 국민의 눈에 비치기에 비전이 분명하지 않았죠. 그리고 진보진영 역시 뭔가 철지난 얘기를 하는 집단으로 비쳤을 겁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자신이 가진‘옳고 그름’의 기준을 국민에게 가르치려는 자세, 이런 것들이 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참여정부에 대해 성찰할 때 저는 정부와 지지층의 관계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회적 조건과 대통령 노무현의 구체적 정책기조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관계가 있었는데, 그런 긴장관계가 어느정도는 불가피하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대통령 재직기간에 계속 확장되었다는 겁니다. 그 긴장관계가 정치적 반대세력은 물론이고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지지자들과의 사이에도 있었던 까닭에 집권기간 동안 힘있게 정책수행을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후자, 그러니까 본래 지지층과의 내적 긴장관계는 퇴임 후에도 상당기간 영향을 미쳤어요. 좁게는 검찰의 매우 비정상적인 압박수사에 대한 진보개혁진영의 외면으로 나타난 바 있고, 또 우리사회 특히 지식인사회가 참여정부에 대한 성찰작업, 즉 장단점을 구분하고 무엇인가 미흡했다면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평가를 거의 진척시키지 못한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노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평가가 급격히 역전되는 면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제약조건을 무시한 평가가 기존의 부정적 시각을 되풀이하면서 민주세력 내부의 불신을 강화하는 면이 있었다면, 노무현정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가 집권기간의 모든 정책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가 될 경우, 그 또한 노무현정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부정확한 사고를 낳고 실제로 정치적인 분열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담합구조?

 

김대호 앞서 주대환 대표께서 성찰의 방법으로 국민의 눈으로 보자는 말씀을 하셨는데, 진보개혁 하는 사람들을 국민의 눈으로 보면 데모세력으로 보여요. 이건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모 내용을 보면, 법을 지키고 제대로 집행하자는 게 있고, 생존권투쟁을 위한 것이 있고, 이익집단의 자기 몫 챙기기가 있죠.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는 이것들이 모든 면에서 진보와 개혁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의 눈에는 상당수 데모세력이 처음에는 빼앗긴 자기 몫을 찾는 쪽이었는데 어느덧 남의 몫을 빼앗는 존재로 비치기 시작했죠. 진보와 개혁과 민주를 앞세웠던 집단들이 이제는 잉여와 지대를 수취하는 자가 되거나 그 방조자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점이 진보의 주력부대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자의 눈으로 보면 잘 보입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앞세웠잖아요? 민주주의의 핵심은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 이런 건데 그 가운데 분권과 자율은 힘센 이익집단이 자신과 연계된 가치생산집단을 착취하게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재벌과 보수 이익집단들에게 빨리고 그 다음에 대기업 노조 같은 진보 이익집단들에게도 빨리게 된 거죠. 저는 2007년과 2008년에 국민들은 충분히 그럴 법한 선택을 했다고 봅니다. 국민의 눈으로 볼 때는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개혁세력과 민노당, 진보신당, 시민사회단체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이 하나같이 데모세력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은 공히 세상 바뀐 걸 모르고, 국민이 생각하는 진보와 개혁의 새 방향을 잘 모르는 세력으로 비쳤습니다. 그래서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데모세력과 전혀 다른 쪽을 한번 내세워보자고 생각했다고 봐야죠. 그런데 상당수 진보개혁 지지자들은 국민이 너무나 후져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웃음)

김종엽 공적 이익을 침식하고 사적 이익을 향유하는 주요 집단이 보수세력이었는데 진보개혁세력도 거기에 하위파트너로 들어갔고,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 공생하는 담합구조를 만들어냈다는 말씀이군요. 사회운동에 헌신해온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챙겨먹었다고 생각되지는 않고, 노동자집단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그러기는 어려웠다고 보입니다. 물론 그 일부 노동자집단의 영향력이 너무 큰 것이 문제입니다만…… 여하튼 저는 진보진영의 비전에 어떤 취약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주대환 여러가지 면이 있겠는데요. 국민이 느끼기에 지금 당장 아픈 데를 처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일반적인 얘기만 반복하는 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게 정치를 하는 사람들만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니죠. 김대호 소장도 말씀했지만 국민은 모두들 한통속으로 보거든요.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당뿐 아니라 다른 두 세력에 의해서도 대표됩니다. 하나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거대 노동조합이에요. 이들이 파업한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 한번 나와버리면 민노당이나 그 누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노력이나 성과가 한칼에 날아가버려요. 또 하나는 이른바 재야라고 하는 분들이 개량한복 입고 나와서 데모를 계속하는 겁니다. 국민은 이분들이 브레이크 작용을 한다는 면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기는 합니다만, 별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맡길 만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보는 거죠. 브레이크라는 건 핸들이나 엔진과는 역할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종엽 참여정부의 평가 속에서 진보개혁진영의 문제에까지 이르렀는데, 평가 문제에 대해 마무리를 짓도록 하죠.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가 중요한 계기여서 그런 면이 있지만 참여정부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극적인 전환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대통령 서거 후의 정서를 보면 많은 이들이 2002년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저 사람에게 우리가 걸었던 꿈이 있었다’그런 마음을 회상해낸 것이지요. 그리고 노대통령이 실패했든 안했든 그의 의도에 일관성이 있었음을 인지하게 된 것 같아요.

어쨌든 국민에게 지금도 감동적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했던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만들기”였는데, 그게 포지티브한 비전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칙과 특권을 없애서 어떤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지가 모호하거든요. 그리고 반칙과 특권을 없애는 일이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것과 연결된다는 식으로 제시되지도 못했습니다.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거티브 캠페인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그것을 포지티브한 가치와 비전으로 흘러가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지요.

김대호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가치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고, 반칙과 특권 타파였습니다. 특히 기회주의, 권위주의, 지역주의 타파, 이게 다 원칙과 상식에 포함되는 얘기거든요. 그러면 국민은 왜 2006년에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가 노대통령 서거 후에 다시 폭발했느냐?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무원칙과 몰상식이 판을 치고 있거든요. 노무현정권 때는 반칙, 특권, 기회주의, 권위주의가‘경관’의 눈치를 보면서 어두운 밤거리 뒷골목을 헤매는 불량배 신세가 됐었죠. 근데 이명박정부 들어 이 뒷골목 깡패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나와서 전직 경관을, 호민관을 때려죽인 거죠. 그렇게 되니까 민심이 폭발한 거예요. 그런데 그전에는 왜 등을 돌렸느냐 하면, 사람들은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기본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것을 기본으로 깔고 법적·제도적 불의를 포함한 총체적인 구조개혁을 요구했는데, 노무현정권과 데모세력은 여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요? 다만 이명박정부와 범보수의 무능과 반동성이 드러나면서 반사이익을 누리는 측면은 있죠.

김종엽 비전이 있어야 힘들고 괴로워도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이 필요한 법이겠죠. 김대호 소장의 주장에 비추어보아도 지금은 추모 민심이 폭발했지만 대안적인 비전이 제시되지 않으면 다시 그 열기가 시들어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대안적이고 대중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비전, 이미 이야기되었듯이 우리사회 성원들의 성향과 특징에 맞는 그런 비전이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가? 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사민주의 프로젝트는 가능한가

 

주대환 저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이 두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야권, 혹은 진보개혁진영의 주요한 비전으로 자리잡아야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경쟁, 개인에게 부과된 무한책임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제 연대의 사회와 공동체적 가치의 부활을 바라고 있습니다. 유럽 선진국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이 세계사의 최첨단을 걷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식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러하거니와 또 한국의 진보든 보수든 간에 선진사회를 뒤늦게 추격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우리가 후발자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유리한 지점도 있지만 한편에는 우리 마음대로 비전을 지어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김대호 소장께서 평소‘공평주의’라는 말을 하시는데 저는 사실은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웃음) 근데 지금 진보진영 내에서도 조희연 교수, 손석춘 원장 같은 분들이 제각각 창조적인 이름을 단 비전과 노선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는 장사가 안된다고 봐요. 공신력있는 브랜드 하나로 가야 합니다. 한국 토양에 적용하다보면 내용은 결국 한국화가 될 수밖에 없지만 세계적으로 공신력있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학자들이 흔히, 세계 일류 좌파지식인들 흉내를 내서 그런지 몰라도 사회민주주의는 낡은 것, 옛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저는 답답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회민주주의를 낡은 것이라고 치부할 입장이냐는 거죠.

김종엽 지향하시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라고 말씀하시네요. 사회민주주의가 낡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주대환 대표의 저서를 읽어보면 사회민주주의의 뿌리를 우리사회 내부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농지개혁을 수행한 사람이 이승만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이라는 점을 강조하시고, 그런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초기부터 사회민주주의의 뿌리가 존재했다고 보시는 것 같아요. 결국은 사민주의라는 브랜드가 간명하고 공신력있다고 평가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한국적인 토양에 착근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사민주의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정책들이 작동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우리사회의 강력한 평등주의가 사민주의와 접맥되는 바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평등주의는 주대표께서 강조하는 농지개혁뿐 아니라 식민지와 전쟁에도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등주의는 잿더미 위에서 형성된 면도 크다는 것이죠. 이런 평등주의는 사회적 연대감을 총체적으로 파괴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현상을‘연대 없는 평등주의’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사회에서는 사민주의를 위한 하나의 토양이 마련되는 과정이 또 하나의 토양인 연대감이 파괴되는 과정과 동시적이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분단체제의 형성 속에서 남한에는 엄청나게 우편향적인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단체제하의 반공주의적 남한국가는 한마디로‘사람잡는’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성원들은 공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적응하려는 심성이 우세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민주의의 문화적 토양이 그렇게 풍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대환 맞습니다. 세금을 잘 안 내려고 하니까……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웃음) 그게 제일 큰 장벽인데 저는 그것도 낙관하거든요. 제가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당신은 스웨덴 얘기를 자꾸 하는데 스웨덴과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다. 그러니까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 모델을 한국에 도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지난 30년을 돌아보자는 거죠. 30년 전에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런 정도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상상이나 했습니까? 물론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서 많이 후퇴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만한 나라에서 내가 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30년 후에 한국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한국만큼 변화가 심한 나라에서 국민이 오늘 복지국가를 원하지만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백승헌 저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진보개혁담론을 얘기할 때 먼저 두가지 조건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진보와 개혁 모두를 합해도 그것보다 훨씬 강고한 보수진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개혁과 진보진영 안에서 담론상으로는 가능한 수준의 동의가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이죠. 이 두가지 조건을 전제로 해야만 오히려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사민주의를 언급하셨는데, 주대환 대표께서 말씀하시는 사민주의 이념의 유용성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는 활동으로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개혁진보적 가치관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넓혀가는 데 기여하는가 하는 점에서 평가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현실을 놓고 이야기할 때, 우리 모두가 낮은 수준의 연대, 낮은 수준의 동의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시기 개혁진보진영에서 뼈아프게 성찰할 부분 중 하나는, 작은 차이들을 넘어 정책 수준에서 합의하는 데 무능했다는 것이에요. 이 점에 대해 상당수 국민의 반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낮은 수준의 동의를 기초로 한 실사구시적인 공동의 노력이 노동현장이나 여의도 정치현장 등에서 얼마나 잘 구현되어왔는지 의문이죠. 제가 몸담고 있는 법조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성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김대호 저는 사민주의적 복지를 추구하더라도 그간의 축적된 경험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은 현재 케인즈주의적인 구복지국가 해법과‘사회투자국가’로 정식화된 신복지국가적인 해법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처와 레이건이 복지국가를 파괴했다고 하는데 당시 공적 지출이 영국의 경우에는 80년대 내내 GDP의 17% 수준을 유지했어요. 미국은 13% 수준을 유지했고요. 한국은 2003년 현재 퇴직금 부분을 걷어내면 5.7%밖에 안됩니다. 우리의 공적 사회지출은 새처와 레이건이 신자유주의를 할 때에 비해서도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거죠. 당연히 공적 사회지출을 늘려야 합니다. 또 복지후발국으로서 선진국의 경험을 교훈삼아 복지지출의 사회투자적인 요소에도 주목해야죠. 청년, 실업자, 아동에 대해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민주의적 비전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빈곤아동과 청소년에 대해서 국가가 교육비라든지 사회투자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아마 고시나 공무원시험의 저변이 확대되어버릴 거예요.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누리는 특권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죠. 사회투자는 결국 노동공급 관련 해법입니다. 양질의 노동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노동수요 영역인 대기업, 공기업, 정부, 대학, 전문직 세계가 대단히 불합리하고 불건전한 구조입니다. 중소기업에 입사하느냐,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입사하느냐에 따라 한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겁니다. 유럽이나 미국은 이렇지 않아요. 유럽의 진보나 사민주의는 사실 노동공급과 관련된 해법만 고민하면 되는데, 한국은 여기에다가 노동수요와 관련된 해법, 즉 시장정책을 같이 고민해야 하는 거예요. 제가‘공평국가’를 얘기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공정과 공평, 같아야 할 것은 같게 달라야 할 것은 다르게

 

김종엽 김대호 소장의 공평국가론은 조금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공평국가론은 국가의 우선적 책무를 사회생활의 게임규칙을 확립하는 것으로 보고, 그 규칙이 인간의 창의와 열정 그리고 협동을 유인할 수 있도록 기회의 공정함과 결과 내지 보상의 공평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이 지금 우리사회의 핵심과제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 조금 더 맥락화해서 부연해주시고 논의를 이어주시면 어떨지요.

김대호 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의 성장과 통합의 요체는 게임규칙 혹은 사회적 상벌체계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누릴 만한 사람은 누리도록 하고, 배려할 사람은 배려하고, 같아야 할 것은 같게 하고 달라야 할 것은 다르게 하는 것이죠. 현대 국가의 상벌체계의 핵심은 경쟁 기회와 조건 내지 출발선의 평등인‘공정’과,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인‘공평’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공정이 경쟁의 입구를 관리하는 기준이라면, 공평은 그 출구를 관리하는 기준입니다. 공평이 문제삼는 것은 승자독식의 현실이기도 하고, 별로 기여하지 않는 자가 너무 많이 누리는 현실이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나 패자가 너무 적게 배려받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국 민주화운동과 진보운동은 같아야 할 것을 같게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해왔지만 달라야 할 것이 어떤 조건에서 얼마나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냥‘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움직여왔죠. 물론 공평 문제를 고민하지 않기는 보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단지 유능한 사적 존재들의 자유 보장과 결과에 대한 승복만 강조해왔을 뿐입니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평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결과가 지금 한국사회가 목도하는 엄청나게 크고 불합리한 격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평국가라는 것이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기대와 감동을 불러일으키긴 어렵다고 봅니다. 공평국가는 중국의 한비자(韓非子)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데, 2천년간 한비자가 유가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어온 이유가 있거든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성공한 군주들은 겉으로는 공자와 맹자를 팔아도 속으로는 예외없이 한비자 사상을 체화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공평국가는 공화주의나 사민주의 같은 좀 따뜻하고 폼나는 사상 속에 내장되어 있어야 할 핵심가치 내지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공평국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진보개혁세력의 당파성은 명확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을 선도하고 체현하는 집단들, 즉 벤처중소기업가나 화이트칼라처럼 각종 경쟁제한 장벽에 기대려고 하지 않는 건강한 전문직과 청년세대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이 과연 있는지 묻고 싶어요. 한나라당은 아니거든요. 그들은 기본적으로 재벌, 대기업 쪽이니까요. 민주당도 아니고 민노당도 아니에요. 그러면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을 선도하고 체현하는 존재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름지기 진보개혁세력으로 자처하려면 이러한 집단과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이른바 3비(非)계층, 비경제활동인구, 비정규직, 비임금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오바마의 지지층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들 가운데는 이런 계층을 대변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거대한 정치공간이 비어 있는 것이죠. 저는 바로 이들이 노무현을 찍었다가 이명박을 찍었다가 하면서 스윙하다가 지금은 하늘에 거대한 비구름이 되어 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이런 층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려면 우파의 장기인 시장주의 정책과 좌파의 장기인 국가주의 내지 사민주의 해법을 결합시키면 된다고 봅니다. 거칠게 말하면‘좌파 신자유주의 2.0’또는‘우파 사민주의 1.0’같은 쏠루션을 만들어내면 거대한 민심의 비가 우리 쪽으로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주대환 그런 정당, 정치세력이 말하자면 미국 민주당 같은 것이 되겠죠.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에 연구하다 유고로 남겨놓은‘진보주의 연구’라는 주제가 있는데, 그 진보주의라는 게 미국식으로는 리버럴이라는 겁니다. 리버럴을 한국말로 옮길 때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의미가 달라지니까 고민 끝에 학자들이 진보주의자로 번역했단 말입니다. 말년의 노대통령이 공부한 진보주의라는 화두가 뭐냐? 저는 그걸‘대서양을 건넌 사회민주주의’라고 규정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의 접점이 될 거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지금 김대호 소장이 말한 시장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과 복지국가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될 것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보주의라고 하든 뭐라 하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두가지 큰 정치사상이 지금 상황에서 어쩌면 정치적으로 힘을 합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김종엽 두분이 서로 굉장히 다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이가 좋아지셨어요.(웃음)

주대환 그건 정치전략적으로 그렇고요, 물론 우리사회의 비전이라는 점에서 얘기를 하자면 사실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웃음) 고객이 원한다면 분식집에서 라면과 짜장면을 함께 팔 수도 있지요. 국민이 원하고 대중이 원한다면, 미국 민주당 같은‘자유주의+사회주의’정당을 만들어서 보수주의에 대항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김대호 한국사회는 복지주의만 갖고는 지지율 35%나 40%를 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복지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동시에 시장주의 내지 경쟁주의를 합리적으로 잘 만들어야 함을 강조할 때, 과반수의 지지율이 나올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선순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종엽 저도 공정과 공평이라는 가치가 한국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사회가 그런 감수성이 약한 사회여서도 그렇거니와, 김대호 소장께서 말씀하시듯이 한쪽에는 과소경쟁과 과소시장이 있어서 방대한 지대수취층이 존재하고, 다른 한쪽에는 과잉경쟁과 과잉시장이 있어서 다수가 심한 고통을 받는 실정이라서 경쟁과 시장을 효율화·균등화하고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공평이라는 말이 가치 영역을 넘어서 구체적 정책으로 가면 쉽지 않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공평이라는 게 결국 저울질이기 때문에 저울질이 정확하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사회적 상호비교 영역으로 오면 판정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이러저러하게 된 건데 그런 경과를 무시하고 현재를 기준으로 공평의 잣대만 들이밀 수 있느냐는 항의도 나오기 쉽습니다. 세력결집과 관련해서도 어려운 문제가 제기됩니다. 김대호 소장께서는 공정과 공평을 내걸고 우파 기득권자와 좌파 기득권자 모두와 싸울 필요를 얘기하시는데, 그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강자들과 투쟁하겠다는 거고,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큽니다. 공정과 공평이 매우 필요한 가치이고, 또 주대환 대표께서 주장하는 사민주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책으로 구현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저는 어떤 비전이든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프로그램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냉전은 다 끝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분단체제에서 비롯되는 보수적 가치관과 제도들이 민주주의 발전 그리고 진보개혁세력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보수층에서조차 합리적 집단이 형성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분단체제를 잘 관리하고 더 나아가 조금씩 극복해가는 것이 남한은 물론 한반도에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있어 폭넓은 자유와 기회를 제공한다고 봐요. 한국사회에 워낙 NL계의 과잉 민족주의적 담론이 승해서 분단체제 자체가 가진 여러가지 모순과 문제로부터 분단체제 극복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담론이 많이 확산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분단체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주대환 어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 기념토론회가 있어서 가봤는데, 사회민주주의라는 비전은 원래 대한민국 건국 당시부터도 통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또 과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로 가자고 한다면 우리가 완전히 한단계 도약한다는 얘기인데, 이 도약의 계기를 통일과 연결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분단체제론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분단체제는 이미 무너졌다고 보고 있어요. 예를 들면 남북간의 힘 관계가 2:1, 3:1, 10:1까지만 돼도 분단체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1, 30:1, 100:1 정도까지 되어버리면 성립할 수 없는 거죠. 지금 북풍이니 하는 게 전혀 남한사회에 먹히지 않는 것은 이미 분단체제가 붕괴됐다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단체제론 자체에는 썩 찬성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사회민주주의 같은 대안을 말하자면 한국이라는 나라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그런 비전과 통일 비전이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적극 찬성합니다.

김대호 OECD국가들과 여러 지표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GDP대비 복지비가 아주 적고 국방비가 높죠. 그리고 우리 젊은 남성들에게는 군복무로 인한 2년의 공백이 있어요. 개인의 자기계발에 굉장히 큰 질곡이죠. 그런데도 분단체제가 너무나 내면화되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국가 비전을 만들고 전략을 세운다고 할 때 이걸 의식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북한은 남한처럼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죠. 저는 북한이 지니고 있는 몇 안되는 강점이랄까, 민족적 자산 중 하나가 토지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합리적으로 관리했을 때 국가연합을 하든 통일을 하든 간에 한국사회가 그간 부동산 때문에 앓았던 고질들을 상당부분 완화할 수가 있겠죠. 그런 것이 결국 국가 비전과 관련해서 볼 때 엄청나게 큰 변수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디도스(DDoS) 공격에 의해 인터넷 접속장애가 있었을 때 국정원이 북한 소행이라며 아주 오래된 추억들을 되살려서 우리가 분단국가구나 하는 걸 새삼스럽게 알려줬는데요.(웃음) 이전에는 그런 걸 사회적 억압에 크게 활용했을 겁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변수를 무시하면 안되는 분단국가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례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국가 비전과 관련해서나 진보개혁운동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의식을 갖고 그로 인해서 왜곡된 것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북한 변수를 고려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의 재정 건전성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유사시에 우리가 엄청난 재정을 북한 재건을 위해서 쏟아부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단은 여전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그런 문제인 것 같아요.

백승헌 같은 말씀이지만 분단체제의 문제점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문제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이 오래되면서 당연시되고 둔감해진다는 점이죠. 우리 국민, 특히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분단현실이 냉전적으로 관리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교류협력정책을 통해서 관리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국민 다수가 본인들과 무관하게 어떤 형태로든 분단이 관리되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에 현실에 둔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교류협력정책으로 관리되지 않고 그 과정이 역전됐을 때 과거처럼 냉전적으로나마 리스크가 조절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류협력 기조는 무너지고 있는데 냉전질서는 복원될 수 없는 시기에 처해 있고, 그래서 정치·군사적으로나 문화·의식적으로나 매우 위태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전과 관련해서는, 통일된 큰 규모의 민족국가라는 비전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가 분단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에 나서기 위해서는 통일과정에서의 비전이 함께 제시되어야 하는데, 개혁진보진영 안에 이에 관한 논의나 성찰의 일정한 공백상태가 있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김종엽 창비가 그 점에 대해서 꾸준히 논의해와서 사회적으로는 어느정도 의식의 환기가 된 것 같아요. 주대환 대표께서 말씀하신 것과 입장은 조금 다르지만 창비도 분단체제가 계속해서 변동해왔다고 봅니다. 분단체제가 동요기를 거쳐 6·15정상회담 시기부터는 해체기에 돌입했다고 보지요. 그렇지만 해체기라고 해서 그 해체가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주대환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다른데요. 저는 그게 6·15선언 같은 걸로 인해서 붕괴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걸로 치면 7·4공동성명도 있었잖아요. 그후에도 그런 게 많았고요. 결국은 대치가 대치다울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분단체제론이 현실을 인식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느냐? 한때는 도움이 됐기 때문에 많은 식자들이 관심을 갖는 담론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을 인식하는 데 유용한가에 대해 의문입니다.

김종엽 충분히 가능한 문제제기입니다만, 제가 6·15공동선언을 얘기한 건 매우 중요한 계기여서 그렇지 그 사건 하나로 분단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남북간의 GDP차이만 보더라도 비대칭적인 형태로 변했죠. 하지만 GDP가 100배 차이라고 남북관계가 100:1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분단체제는 지정학적 상황 등을 고려할 때, 1과 1/2체제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대칭성이 커졌다고는 해도 북조선이 존재함으로써 한국사회가 극심한 기회의 제한에 처해 있고 적대적 공생에서 유래하는 모순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주대표께서도 통일 비전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을 위해서 남북의 통합을 위한 이행경로에 대해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창비는 그와 관련해 국가연합을 제기해왔습니다. 국가연합 단계를 강조하는 것은 분단을 극복한 형태의 국가가 통일된 한국이라는 식으로 당위론적 혹은 민족주의적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정치공동체 가운데 가능한 길을 장기적으로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저는 북조선이 사회주의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주대표께서 주장하는 사민주의도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근거담론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북조선이 나름의 자생력을 갖추는 한편, 긴 이행의 과정에서 남북이 미래의 체제를 서로 조율해가야겠지만요.

백승헌 국가보안법 예를 들면서 한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매우 오래된 것이고 냉전질서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폐지 논거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우리 형사사법체제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지요.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폐지된 이후의 형사사법질서를 고민하다보니, 사실 우리나라 형법 자체에 이미 상당한 냉전적 질서가 반영되어 있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형사법이 어느정도 정상화될 수는 있어도 냉전적인 형사법 질서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형법 자체의 개혁문제는 더이상 진척도 논의도 되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는커녕 개정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그후의 문제를 현실성있게 논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피해자가 줄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분단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해요. 남북의 경제규모가 100:1이 된다 해도 분단체제 자체가 벗겨지지 않는다면 그후의 발전과 진보는 진지하게 상상될 수 없는 것이지요. 분단문제의 고착화는 남북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측 모두 온전한 정상사회로의 발전경로를 모색하는 데 중대한 장애입니다.

 

세력연합과 리더십 구축의 과제

 

김종엽 다들 분단문제의 중요성은 공감하시지만 각자 제시하는 정치적·사회적 비전들이 분단현실 그리고 그것의 극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충분하게 발전되지 않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창비도 나름대로 분단체제 극복을 더 긍정적인 사회체제 비전과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해왔지만, 좀더 논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논의된 비전만 하더라도 몇몇 지식인이나 운동가들이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다양한 비전과 그것에 연계된 정책들을 대중 속에서 담금질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 세력연합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이 워낙 제대로 못하니까 반이명박전선이 강화되어 있지만 좀 시간이 지나면 보수세력도 이명박 이후의 리더십을 내세워 반이명박전선을 약화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사회 저류에 있는 지역적이고 세대적이고 계층적인 균열 속에서 어떻게 세력연합을 이룩할 것이며, 그들과 어떻게 정치적 사회적 비전을 함께 호흡할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대호 참여정부 기간에 범진보의 분열이 일어났는데 저는 이것이 이전과 다른 대단히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에서 지금의 한나라당 세력 가운데 일부와 범진보가 함께했듯이, 복지국가를 만드는 초기단계에서는 자유주의 세력과 좌파 내지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합치게 되어 있습니다. 김대중정부하에서는 어느정도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뒤에는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제한된 복지재정을 가지고 그 재정으로 공공부문을 키워 복지국가로 가자는 쪽이 있고, 그것을 바우처(voucher, 정부가 복지써비스 수혜자에게 지급하는 구매 쿠폰) 형태로 나누어서 소비자 선택권을 강화하고 공급자 경쟁을 강화하면서 복지재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쪽이 있습니다. 당연히 전자는 후자를 시장주의, 경쟁주의,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하에서 진보의 분열도 어쩌면 필연이고 발전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범진보의 분열보다, 의식하든 안하든 자기가 타고 있는 정책 플랫폼이 한국사회에서 잘 작동하는지를 치밀하게 실사구시하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오늘 주대환 대표께서는 한국적 풍토를 감안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얘기는 범진보가 자신의 정책 플랫폼이나 정책 패키지들을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았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진보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서 있는 정책 플랫폼의 작동 가능성을 실사구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우리가 진보와 개혁을 다 합쳐봤자 보수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 보수를 지지하는 수백만명을 우리 쪽으로 끌어와야 하는데, 저는 진보가 그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직도 범진보,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면 기회가 돌아올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2007년, 2008년에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 결코 어리석은 대중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진보적 시장주의, 진보적 경쟁주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잘 설계해서 대중에 다가가야 하고, 결국 거기에서 성패가 갈리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승헌 현재 우리 정치지형상 선거국면에서 실제적인 경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 반대세력이 일정부분 연대할 필요가 제기되지만, 제도적으로는 승자독식구조가 기초단체부터 대통령선거까지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진보개혁진영이 정강정책이 서로 비슷하고 인물 면에서도 소통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제도상으로는 연대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의 선거협력이나 후보단일화 문제 등에는 그 전선을 추동하거나 강제하는 요소와 그것을 주저하거나 반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항상 혼재되어 있습니다. MB정부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대중적 반감이 폭발하는 시기에는 추동하는 요소가 높아졌다가 소강국면에 들어서면 주저하면서 기존의 정당구조대로 그냥 흘러가는 양상이 반복되어왔어요. 울산 북구 보궐선거를 제외하고 지난 2년간 이 부분에서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경기 교육감 선거라는 두가지 예가 있었습니다. 앞의 예는 대중운동의 폭발기에도 정치세력간의 충분한 논의와 절도있고 계획성있는 대응 그리고 시민사회와의 결합이 약하면 선거 결과는 패배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 반면,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그와 대비되는 요소를 많이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면서 의미있는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정도가 준비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정책 차원에서 최소한의 공동 비전과 이견의 처리방향이 함께 논의될 수 있어야 하고요, 둘째는 사회자께서도 거론한 세력연합, 선거연합, 정책연합의 틀을 형성하는 작업이 필요하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선거시기의 작동원칙, 즉 룰의 합의입니다. 공정한 룰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여러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무리 반MB전선의 당위성이 강조되더라도 현실적으로 진보개혁세력 내 분파들의 항구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그들간의 이해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연합에서 다수 정당은 현실에 비해 과도하게 양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소수 정당은 연합이 다수 정당의 경쟁력 강화로 귀결될 뿐 선명성의 유지나 독자정당으로서의 발전에 장애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당에만 맡겨놓아서는 안되고 지식인사회나 시민사회운동 역시 각자의 처지에 따라 직간접적인 관여와 개입, 후원과 비판을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대환 제가 대안이자 우리 세력 내의 갈등을 치유할 방법으로 내놓은 것이 세계관과 정치철학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입니다. 기존의 진보, NL, PD이런 구진보를 혁신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과 짝을 이루어서 개혁진영에서도 혁신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케인즈(J. M. Keynes)는 자유당원이었습니다. 노동당원이 아니었죠. 무슨 얘기냐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현재 한국사회의 과제, 특히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있고 그래서 미국형 선진국이냐 유럽형 선진국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민주화투쟁기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양극화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고 느낄 때, 개혁진영이 먹고사는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집단으로 비치는 구태를 벗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양쪽이 접근 가능하고요.

그리고 결국은 정당을 같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그건 한국의 제도적 문제도 있고 역사적 배경도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소선구제를 하는 나라들을 보면 전부 양당체제입니다. 한국도 기본적으로는 60년 동안 양당체제를 해왔거든요. 그러면 한마디로 미국 민주당이냐 영국 노동당이냐 하는 택일의 문제인 셈인데, 영국 노동당이 여러가지 사회조건으로 인해서 불가능하다면 미국 민주당 같은 단일정당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고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 때 콘텐츠가 문제라고 보는 거죠. 즉 현대적인 정치이념과 풍부한 미래 비전을 가진‘사회주의+자유주의’정당을 만들어서 지역주의 보수정당에 불과한 한국 민주당을 대체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대호 진보가 역사의 주도권을 어떻게 쥘 것이냐와 관련해 고려해야 할 기본변수들이 있죠. 영호남이라는 지역대립 구조도 있지만 그보다 어쨌든 투표를 하면 진보개혁 쪽에 25~30%, 보수도 기본 35%는 가져갑니다. 결국 그 중간이 문제죠. 여기서 저는 당파성을 명확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진보는 어떻게 보면 제각기 가게들을 열고 있는데, 문제는 가게마다 손님이 얼마 없다는 거예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고객들을 맞이하는 가게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벤처중소기업이나 전문직이나 청년세력, 도전하는 비기득권세력, 화이트칼라, 회사로 치면 관리기술직, 기업 엘리뜨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당파성을 명확하게 하는 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금융 운용능력과 스케일이 큰 국가디자인 능력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사실 젬병이잖아요. 경제와 관련해서 실력이 있는 집단으로 바뀌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쪽에서 청계천이나 버스 중앙차로제 같은 걸 얘기하듯이 우리도 뭔가 그런 게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말이죠. 이건 공정과 공평 영역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디자인 영역인데, 여기서도 실력있는 모습을 보여야죠. 또 하나,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실 노대통령이‘바보 노무현’이라는 데서 매력을 느끼는 거거든요. 매력은 당파성의 영역도 과학성의 영역도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끌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제가 볼 때 우리 진보가 노무현 이후로 이 매력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매력을 확보해야만 비로소 수백만의 유권자들을 진보와 개혁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한국사회의 지독한 분열과 대립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같이하면 좋은 걸 누가 모르나요? 하지만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그랬고, 참여정부하에서도 협력해서 해낸 게 별로 없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계도,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관계도 여간 특이한 게 아닙니다.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보듯이 도장공장이라는 거대한 폭발물 탱크에 수백명이 들어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투쟁을 하는 나라도 한국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사측과 정부는 노조에 대해 고통을 분담하고 참고 기다리면 몇년내 대우차의 경우처럼 복직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어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골치 아픈 노조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정리하자는 식으로 나왔지요. 그만큼 타협, 절충, 합의가 어렵다는 거예요. 결국은 분열과 대립을 한방에 넘어설 수는 없고 그래서 백승헌 회장 말씀처럼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는 기술을 익혀야 하는 단계인 거죠. 그럴 때 핵심은 게임규칙입니다. 좋은 게임규칙은 열심히하면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다는 그런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사회의 게임규칙은 대부분 그렇지 않죠. 그래서 우선 공정하고 공평한 게임규칙을 만드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엽 세분이 말씀하신 내용에 연결되는 부분이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회장께서 말씀하신 이견을 처리하고 협동하는 능력은 진보개혁진영이 연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자신들이 문제해결 집단임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대환 대표께서는 미국 민주당 같은 정당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러려면 지금의 우리 민주당은 조금 더 왼쪽으로 가야 하고 진보정당들은 조금 더 오른쪽으로 가야겠지요. 내부의 차이는 당내의 논쟁그룹으로서 경쟁해야지 진보정당 분열에서처럼 종파주의적이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그리고 김대호 소장 말씀처럼 그런 정당이 현재 좌우 사이의 30% 정도 되는 유동 집단을 끌어안는 세력연합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논의를 잘 모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세력연합과 관련해서 통계가 말해주는 바가 몇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호남 인구의 감소로 기존의 지역균열은 약화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약화와 더불어 과밀해진 수도권으로부터 수도권중심주의가 형성되어 수도권 대 지방이라는 새로운 지역구도가 생겨나고 있지요. 세대균열의 경우 20대의 보수화에서 보듯이 일관성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계층적 균열이 훨씬 중요해졌고요. 현재 계층적 균열은 정치적 지향과 거꾸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런 문제의 해결을 포함해서 이제 세력연합에서 수도권과 계층 균열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영업자와 실업자를 다수 포함하는 비경제활동인구, 청년실업자를 포섭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식과 기술과 능력에 자신있고 경쟁적인 화이트칼라층의 가치관과 결합하는 사회적 비전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런 집단을 잡을 수 있으려면 비전과 정책에 더해 리더십 혹은 아까 이야기된 매력 같은 문제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백승헌 리더십 부분에 있어서 매력을 집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리더 개인의 매력뿐 아니라 진보개혁세력도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매력이 중요하지만, 리더 개인의 매력을 강조하다보면 리더십 배출의 개별성과 우발성을 미리 전제하게 됩니다. 지금도 정치 영역 외에서 성공적인 신화를 가진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과연 그 분야의 신화가 정치영역의 신화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이미 몇몇 뼈저린 실패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진지하게 고민할 것은 리더십 구축과정에 대한 합의입니다. 말로 하는 합의라기보다는 한 개인이 최초에 참여자에서부터 리더십구조로 올라서는 과정들이 일거에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또한 그 리더십의 추천 및 검증과정을 면밀하게, 가능하면 완벽하게 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되든 그 세력의 중심인물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대환 매력으로 치면 박근혜씨를 당할 사람이 없는데(웃음), 그거야 뒤집어보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인물의 문제를 그렇게 크게 보지 않습니다. 국민이 특정인물을 무작정 믿고 따를 만큼 그렇게 순진하지도 않고요.

 

중도주의 전략과 새로운 사상·이념의 제기

 

김종엽 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인물들이 나서겠지 하며 미루지 말고 리더십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백승헌 회장 말씀처럼 리더십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세력연합입니다. 이와 관련해 세대나 계층 같은 요인들을 깊이 고민하는 동시에 그들을 묶는 노선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창비는 이와 관련해‘변혁적 중도주의’를 주장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분단체제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한반도 차원의 큰 변혁을 이루는 과제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가 연결되어야 하며, 그럴 때 우리에게는 중도적인 것이 오히려 더 변혁적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비록 사익추구적이고 천민적이라 하더라도 재벌-보수언론-한나라당-뉴라이트로 연계되는 남한사회 보수블록의 자원은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이들의 저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중간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까지 끌어안는 폭넓은 중도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김대호 소장께서도 저서에서‘전투적 중도주의’라는 말을 쓰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대호 말씀하신 내용에 크게 공감합니다. 국민들은 자유, 개방, 풍요, 평등, 안정, 복지를 다 요구하죠. 이 가치들이 상생적으로 결합하려면 중심에 정의가 있어야 해요. 새는 좌우 양날개로 난다고 했는데, 날개는 몸통에 붙어 있습니다. 몸통이 공정, 공평과 자제, 관용을 체화해야 비로소 오른쪽에는 자유와 개방이, 왼쪽에는 평등과 복지가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위대한 나라를 향해 비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국은 중도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중도는 기존의 좌파적 가치와 우파적 가치의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이걸 한단계 높이는 통일이어야 합니다. 단적으로 복지와 관련해서도 중도는 기존의 진보보다 훨씬 강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하게 시장과 경쟁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죠. 또한 복지를 강화하기 때문에 시장에 대해서도 지금 보수보다 훨씬 전향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여간 좌파보다 좌파적 가치를 더 잘 구현하고, 우파보다 우파적 가치를 더 잘 구현해야 진정한 중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좌우 양측과의 두개의 전선을 감당할 수 있는 대중적 지지세와 전투성을 확보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중도가 진정한 진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는 미개척지입니다. 신대륙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주대환 김대호 소장께서 아주 독특한 해석을 하시고 또 제가 여러차례 그 얘기를 듣고 논평을 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도 같은 걸 느끼는데 김소장님은 역시 정답을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정치는 정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이라는 것은 역사가 흘러가면 결국 그렇게 가게 되는 겁니다. 좌로 갔다가 우로 갔다가 굴곡을 겪는 듯하지만 결국 어떤 길로 가게 되는 거죠. 그럴 때 좌다 우다, 혹은 진보다 보수다 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분명히해야 합니다. 일관된 철학을 얘기해야 하는 거고, 그래서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저의 해석은 좀 다릅니다.

우파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를 합쳐놓는다고 중도인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도는 원래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용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올바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보 또는 변혁의 길로 가되 올바르게 가는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닐까요? 제가 생각하는 게 바로 정치철학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 이미 이루어져 있는 사회체제로서의 사회민주주의 말고, 정치철학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원래 변혁적 중도주의다 하는 얘기를 나름대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웃음)

김종엽 좋은 얘기들이 많이 나와서 더 이어가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말씀씩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승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진보개혁진영의 자기성찰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찰을 하는 데는 힘도 필요합니다. 작년 촛불시위나 올해 노대통령 서거 이후 추모열기는 개혁진보진영의 성찰에 필요한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공동의 체험이 없었다면 패배주의에서 상당기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긍정적인 성찰을 방해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치면 반성의 필요성에 둔감해집니다. 특히 공동의 잘못에 대하여 나의 책임을 제외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성찰과 앞으로의 모색에서 모두 나를 포함한 전체에 대한 고려가 같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대환 87년체제론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다 되었군요. 저는 사실 87년체제론에도 별로 찬성을 안하거든요. 제가 뭐든지 쉽게 찬성을 안하는 사람이라서요.(웃음) 저는 87년 이후가 민주화의 과도기라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젠 끝났다고 보고요. 2002년 아니면 2007년에는 끝났다고 생각하죠. 어차피 단기에 끝날 과도기였기 때문에 하나의 체제라고 말할 수 있나 싶어요. 20년은 긴 역사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 그동안 개발독재에서 정상적인 자본주의사회로 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항상‘보통 자본주의 나라’라 말하던 상태 말이지요. 흔히 보수 쪽에서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됐고 선진화 단계에 왔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들의 표현 그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민주화의 과도기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현상입니다. 그와 더불어 복지국가의 물질적 조건,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데, 그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서 우리는 이 사실을 더 깊이 천착해야 합니다.

김대호 그리스나 로마 유적지를 보면 폐허 위에 기둥 몇개 서 있잖아요? 지금 우리 진보의 사상·이념의 모습이 그런 폐허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아 있는 기둥은 이를테면 우리가 배웠던 체계, 즉 맑스와 레닌이라든지 그람시 등등인데, 지붕은 날아가고 몇몇 기둥에 해당되는 것들만 남았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에 대한 대단히 불편한 감정, 자본주의와 시장주의에 대해서도 큰 반감이 남았어요. 그 다음에 북한에 대해서도 그리고 노조에 대해서도 80년대적인 생각, 막연한 친화감들이 남아 있단 말입니다. 기둥 몇개로만 남아 있는 사상·이념체계를 재건축해야 하는데 이걸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폐허가 아닌가 합니다. 사상·이념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인데, 제가 보기에는 영적인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우리가 예전에 가장 즐겨 부른 노래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라고 했단 말입니다. 이건 제가 볼 때 영적이고 종교적인 정서를 담은 노래예요. 그런데 요즘 여의도에 와서 보니까 이런 기풍들이 하나도 없거든요. 희생이나 헌신 같은 게 전혀 없어요. 다 양아치화되어 있다고 보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영적 피폐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범진보의 지리멸렬한 모습은 맑스-레닌주의의 파탄 못지않게, 성경이나 불경이나 중국 고전에 배어 있는 깊은 인문학적 내공 내지 영적인 가치의 부재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보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엽 인문학과 영성에 대한 강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동권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시민들의 「헌법 제1조」라는 노래로 바뀌는 발전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끝마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좌담이 상당히 논쟁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만 생각보다 서로의 논의가 수렴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진보개혁진영 전반에 중도주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사구시적인 작풍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입니다. 그것이 창비가 계속해서 강조해온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한반도적 실천지평과 연결된다면, 더욱 생산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대환 대표께서 마지막에 87년체제론을 거론해주셨는데, 사실 오늘 논의에서 그 문제를 다루지 못한 것은 사회자의 미숙함 때문이었습니다. 더 말씀을 나누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다만 저는 87년체제를 민주주의 프로젝트와 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며 상호 교착상태에 있는 체제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과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87년체제는‘민주화의 과도기’이며 이미 종결되었다는 주대표와는 의견을 달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논의에서 김대호 소장이 줄곧 주장한 진보적 자유주의와 그것이 가진 설득력의 원천, 그리고 그런 입장과 사민주의 결합의 필요성을 역설한 주대환 대표의 견해는 오히려 87년체제론 속에서 더 잘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87년체제는 분단체제와의 복합적 연관을 중심주제로 삼으며, 그 점에서도 우리 논의와 깊이 연결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끝으로 민주화 또는 민주주의가 사민주의와 내적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그런 연결점이 없이는 사민주의가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민주의자들이 민주화 문제를 더 깊이 고민했으면 합니다. 주대환 대표께서 87년체제론을 말씀하셔서 제 정리발언이 길어지고 새로운 논점을 던지는 식이 됐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논의할 다른 기회가 있기를 빌며 이만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열심히 좋은 이야기를 펼쳐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09년 7월 21일, 미디어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