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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단상

 

강동호 康棟晧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을 위한, 타자를 위한 변론: 박민규론」 「실패의 존재론: 김현의 문학론을 읽는 방법」 등이 있음. finhir@naver.com

 

 

1. 시적인 것의 기이함으로부터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다소‘기이하게’들린다. 시가 삶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가 삶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단 말인가? 문학은 결국‘우리의 삶은 살 만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상기해본다면, 혹은 얼마 전 한 논자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1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詩作)이라는 제작(poiesis) 행위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양태 중 하나라는 사회학적 상식을 잊지 않는다면, 시를 삶에서 벗어나 유아독존하는 무슨 신비한 대상쯤으로 상정하는 믿음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은‘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재차 던지려 한다. 비록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부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와 삶이 분리되어 있다든가, 시인은 저속한 세계의 진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낭만적 이념과 관련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물음은 시가 무엇을 써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 이전에 무엇을 쓰는 것이 가능하냐의 문제, 다시 말해‘시적인 것’의 존재론과 맞물려 있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2(이하 강조는 모두 인용자)

 

다른 논자들에게도 여러번 인용된 바 있는 진은영(陳恩英)의 이 고백은 삶과 정치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아낼 수 없는 시적 언어의 원시적 운명, 즉‘시적인 것’의 존재론을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기묘한 감성적 충격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던 시들에서는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이 사라지고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을 최대화한 시들에서는 기묘함이 실종되는”3 이‘이상한’딜레마는 “얼어가는 물고기의 불타는 지느러미”(「Summer Snow」), “물속의 불꽃들”(「나에게」)이라고 쓴 것과 같이‘시인’의 존재태에 깊숙이‘기이한’방식으로 날인되어 있다.

시적 언어와 관련된 이 이상하고, 기이하고, 기묘한 사태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이와같은 독특한 존재론적 속성을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정치적인 것’으로의 도킹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삶이 시를 규정하고 시가 삶을 정의해버리는, 소위 해석학적 순환론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이른바‘삶/정치’와‘시’에 대한 저마다의 믿음을 최종불변의 공리로 삼는 무한투쟁적 존재신학(ontotheology)들과 결별하고,‘시적인 것’에 대한 물음 자체로써 삶과 겹쳐지는 공통의 지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시’와‘삶’을 한자리에 불러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와 삶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저‘기이함’의 총화를 인정함으로써 시적 언어의 근원적 존재형식과‘시적인 것’의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시적인 것’의‘기이함’의 원인과 조건에 대한 규명은‘시란 무엇인가?’또는‘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서술부(predicate)를 채우려는 독단론적 욕망과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와 마주했을 때 주관 내부로부터 일렁이는 “기묘한 감성적 충격”에서 출발하여 이 감각의 소요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는 것, 그러니까‘시적인 것’을 둘러싼 존재론적 범주를 경험적 사례들의 실타래로부터 역추적하는 과정이기에 연역적이라기보다 경험적인 것에 가까워야 한다.

물론 이 일은 단순히 경험적인 사례들의 집계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무한히 쌓여가는 시들의 전부를 감당할 각오를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시들의 구체적 양태들을 세밀하게 점검하기에 앞서 잠정적이라는 조건하에‘시적인 것’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한 최소한의 부표(浮漂) 정도는 설정할 필요가 있다. 시를 규격화된 형틀에 옥죄지 않으면서‘시적인 것’의 최소정의를 수립하는 일. 이를테면 그것은 이장욱(李章旭)에 의해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제기된 바 있다. “시민으로서의 사회참여가 곧바로 시인으로서의 시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시의 무엇이 이 전이과정을 방해하는 것일까? 해답은 생각보다 자명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가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잠재적인)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은 아닌가?”4 이 글은 바로 이 자명한 지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장욱의 명제가 시를‘규정’하려는 독단적인 존재신학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시를 특정한 내용에 구속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보편적 특질을‘존재형식’의 원리로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특정한 이념과 사상을 겨냥하거나 단일한 제작기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범주로서의 시작의 보편명제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만큼 자명하다. 그러나 자명해 보이는 일은 더러 공허한 법. 시가 삶의 표면뿐 아니라 잠재적 부면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의 경계는 지나치게 넓고, 그 넓은 개념을 투망으로‘시적인 것’의 실제를 포획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저 헐거운 투망이 지닌 자명성을 보다 정교하게 벼리기 위해 이 글은‘잠재적’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2. 삶과 시적 언어 사이의 간극

 

삶의‘잠재적’부면은 무엇을 일컫는가? 일단 그것이 삶의‘표면’과 대비되고 있으니, 쉽게 생각해서 표층적인 삶(‘표면적인 부면’) 이면에 존재하는 피안의 삶, 그러니까 삶의‘심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간 시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이고도 익숙한 신앙을 구성해왔다. 시는 표면적인 삶, 즉 삶에 대한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 생의 심부로부터 삶의 비밀을 길어올려야 한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시가 삶의 비밀을 파지(把持)하고 그 깨달음을 아름답게 기술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명해 보이지만,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정교해진 오늘날 이 문제는 생각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의 시인들은 세계의 맨틀로 진격하기에 앞서 돌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심보선 「슬픔의 진화」 전문(『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08)

 

첫 시집의, 첫 시의, 첫 문장으로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를 채택한 시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세계를 나르기조차 힘겨운 언어로 다음 연에서 바로‘세계’를 호명하고(“세계여!”), 더군다나 시의 제목이‘슬픔의 진화’인데 “더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하니 말이다. 심지어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이라는 대목에서는 과도한 연극성마저 엿보이니 시인의 절망은 혹 엄살이 아닌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심보선(沈甫宣)의 시들에서 작란하는 절망과 슬픔이 감정적인 것이기에 앞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시적 세계관이‘언어’를 만진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언어가 애초에‘세계’를 분실하였으므로, 시인은 자신의‘세계가 빠진 언어’로‘세계’가 도래하기를(“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애타게 갈구하고 간절히 요청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이 종국에 마주하는 장면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충만한 합일이 아니라 “설탕이 없었다면/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같은 엉뚱한 문장이다.‘세계 없는 언어’에‘세계’를 담아내려 해도 양자 간의 충일한 결합이 발생하지 않고, 도리어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같은‘세계 없는’엉뚱한 언어로 되돌아오니, 시인은 그저 침묵을 선택할 뿐이다. 그런데 침묵을 선택하자 돌연‘언어가 빠진 언어’(“(그러고는 영원한 침묵)”)라는 기이한 역설적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가?

그의‘언어’에는‘세계’가 없고‘세계’에는‘세계 없는 언어’들이 널려 있으니, 결국‘세계’에는 늘‘세계’가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반복은 단순히 말장난인가? 형식논리상 그것은 모순이지만 이러한 추론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이리라.

 

시를 쓰게 된 이래 줄곧,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주범이 된 느낌이다. “나는 거기 없었다”라고 강변할 때, 애초부터‘거기’가 없는 기이한 알리바이, 긍정으로 회귀하지 않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시. 그러므로 나는 텍스트로서의 시에 대해선 짐짓 초연하다. 오직 시를 쓴다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만 시는 나를 지배하고 나는 시를 경배한다.

 

‘부정의 부정’이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의 어법이라면,‘이상하게도’시의 문법에서 그것은 더이상 긍정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즉‘나는 거기에 있었다’는 긍정문은 물론이거니와, 부정문(“나는 거기 없었다”) 자체도 부정되는(내 언어에는 세계가 없으므로) “기이한 알리바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자체적인 자기-부정은 기묘한 궤도를 따르면서 긍정의 영역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세계 없는 언어’도‘언어 없는 세계’도 불가능한‘세계 없는 세계’혹은‘언어 없는 언어’같은 이중부정(double-negation)의 지대에 불시착한다. 그리하여 앞서의 시에서 시인은 과격한 고백을 통해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당겨, 세계와 언어 간에 발생하는 불일치에 따르는 좌절을 지시하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더욱 근본적인 무능함, 그러니까 그 불일치 자체의 불일치가 영원성의 구조를 지님을(“영원한 침묵”) 슬쩍 드러내면서, 언어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의 무능함을 실행한다. 이 실연(實演)되는 무능함은 다시, 앞서 시인이 발화한 부정적 명제 자체를 지우며, 시 자체가 지닐 수 있는 구조의 완결성을 무너뜨린다. 삶의‘잠재적 부면’과 닿아야 하는 자명한 명제가 생각보다 그리 자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폐허의 가면을 쓰고 누워 있네. 그 아래는 폐허를 상상하는 심연. 심연에 가닿기 위해, 그대 기꺼이 심연이 되려 하는가. 허나, 명심하라. 그대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대를 상상한다네. 그대는 세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폐허, 또 하나의 가면, 지구적으로 보자면, 그대의 슬픔은 개인적 기후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심연을 닮으려는 불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심연의 주름과 울림과 빛깔을 닮은 가면의 가능성을 꿈꾸시게.

-심보선 「먼지 혹은 폐허」 부분

 

재래적인 믿음에 따르면, 삶의 잠재적 부면은 바로 저‘심연’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고 시인은 그 “심연에 가닿기 위해” 기꺼이 “심연이 되”려는 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돌연 “그대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대를 상상”하는 일이 발생한다. 앞서 인용한 시에 기대어 말하자면, 나의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고(그러므로 나는 세상을 올바르게 상상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언어로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다만 언어의 한계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리라(“세상이 그대를 상상한다”).

이것은 시에 대한 윤리적 정언명령 혹은 사회학적 요구 이전에 제기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시가 공통적으로 떠안고 있는 존재론적 조건이자 언어적 한계를 환기한다. 세계에 무슨 대단한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에 대한 의식을 가진 첫 인류이며”, 그리하여 “그 어떠한 존재론적 토대 없이(신이 죽었기 때문에), 오직 언어만을 유일한 자원으로 세계에 유폐되어버린 첫 세대”이기 때문이다.5 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일종의 비관주의적 전망을 낳았다. 그러니까 언어의 한계에 대한 자각 이후, 시의 언어는 더이상 삶의 심층을 향해 직진하지 못하고 그저 삶의 표면, 언어의 표면에서 공회전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뿐이다.

 

 

3. 시적인 것의 순간

 

우리는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감정으로 음악을 만들었네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들만의 익스페리멘틀(experimental)이라고, 라고나 할까

-황병승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부분

 

그렇다면 우리는 이장욱의‘자명한 명제’와 결별하려는 것인가. 겉으로는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해를 최소화하자는 의미에서 덧붙이건대, 예리한 독자라면 심보선의 저 말이 단순히‘심연’에 대한 부정형이자 대척점으로‘가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가능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구현한 바대로 언어가 처해 있는 곤경은 그저 긍정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형의 어법을 취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는 것을 환기한다. 단순히 심연의 대척지점으로서‘가면’을 부정적 해법으로 제시했다면, 그것은 역으로 부정적인 형태의 실체화에 기여할 위험이 크다. 반면 저‘가면의 가능성’은 단지 부정적 실체로서의‘가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부정의 부정’으로서 그 가면이 산출할 수 있는‘가능성’의 지대, 즉 가면의 존재태가 빚어내는 어떤‘효과’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시는 이‘이중부정’의 시적 언어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언어의, 존재의,‘잠재적 부면’에 가닿으면서‘시적인 것’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잘 구현한 사례이다.

 

인정사정없이 깨진 것들은 눈부시다

인정사정 안 봐주고 부숴뜨리는 파괴자들을 비웃는

햇살은 지금 찬란하다

 

부서지는 것들은 부서지는 것들의 노래로 챙챙

햇볕은 지금 깨어지는 것쯤은 걱정 없지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니까

 

부서지는 것들 파괴된 것들은 모두 찬란하다

도공들은 빚어 구운 그릇을 망치로 내려치고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

지도는 만들어지면서 틀리기 시작하고

 

손깍지를 풀면서 기도는 완성된다

탈영병들은 노래한다

총성처럼 울려퍼지는 사랑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라고 가르치지 않듯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노래만이 찬란하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들은

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

-이현승 「모래알은 반짝」 전문(『아이스크림과 늑대』 2007)

 

이 시 역시 오늘날 많은 젊은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착목하는‘분열’과‘해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자가 이 시에서 시적인 섬광을 느꼈다면 그것은 시인이 특정한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같은 사유와 언어적 표현에서 삶의‘잠재적 부면’을 경험해서가 아닐까. 물론 “부서지는 것들 파괴된 것들은 모두 찬란하다”“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손깍지를 풀면서 기도는 완성된다” 같은 구절도 매력적이지만, 단지 이런 전언으로 끝맺었다면 그가 일으키고 있는 시적인 것의 파고(波高)는 매우 미약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가‘시적인 순간’으로 비약하는 지점은 다름아닌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들은/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라는 마지막 두 행이 적시하는 사태는 크게 두가지이다. 우선, 깨진 유리병들의‘금’이 지니는 존재론적 지위.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니까”라는 말이 내포하는 바처럼 존재의 파편들은(‘분해’) 단순히 대상(‘조립’)의 결핍이나 결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마저도 또 하나의 존재태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공백과 결핍은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라고 가르치지 않듯” 그저 완성된 존재를 기계적으로 구성하는 하위요소도 아니며 균열 없는 존재(‘유리병’)보다 존재론적으로 하등한 것도 아닌 셈이다.

그런데‘금’과‘균열’의 존재는 실체로서 있지 않다는 면에서 다소 특이한 구석을 갖는다. 요컨대 그‘금’을 단순히 결핍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가 와해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우리의 눈앞에 현시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금’의‘드러남’은 완전체의‘파열’을 경유할 때만 노출되며, 그 이전의 가시적인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이 시가 적시하고 있는 두 번째 사태, 즉‘금’의‘감춰짐’과 관련된다. 즉‘금’은‘유리병’이라는 온전한 대상에 늘 내장되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될 때에만 비로소 하나의 존재태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인가?‘금’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되 늘‘감춰진’것으로 가정하는 것, 나아가‘금’과‘유리병’사이의 존재론적 위계질서를 역전시키는 해체론적 사유, 이것이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깨달음만으로는 앞서 지적한 시적 언어의 근원적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발화주체가‘금’혹은‘균열’이라고 지시하는 순간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내용이 텅 비어버린 실체로서의‘금’만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실체화’덕분에 애초에‘금’이 지니고 있던 존재론적 위상이 증발하면서 또다시 세계가 누락된 기표만이 남게 된다. 정리하자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금’이냐‘유리병’이냐의 양자택일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존재지평을 시적으로‘구현’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돌연 금이 숨겨져 있던‘공간’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가 그러하다. 액면 그대로 금이 실재하거나 감춰져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긍정의 사태도 부정의 사태도 지시할 수 없는 지대를, 언어의 이중적 실패의 구조, 즉‘부정의 부정’이라는 존재형식을 통해 개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들은/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라는 의문형의 문장이‘시적인 것’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은‘금’에 대한 강조도‘감춰짐’에 대한 깨달음과도 무관했던 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감춰져 있던 비가시적‘공간’에 대해 풀릴 길 없는 의문을 표함으로써, 그 이전까지 자신이 발화했던 모든 진술들(“부서지는 것들 파괴된 것들은 모두 찬란하다”“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손깍지를 풀면서 기도는 완성된다”)의 존재론적 밑동을 파내고 독자를 돌연 미지의 지평으로 몰아간다.‘조립’(긍정)에 저항하고‘분해’(부정)를 넘어서는 이중부정의 운동은 이처럼 부재(금)의 현전(나타남)만으로 요약될 수 없는 상황까지 염두에 둔다. 말하자면 완전한 현존(균열 없는 실체)도 완전한 부재(실체로서의 균열)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부재의 현전’과‘현전의 부재’가 동시적으로 밀려오고 나가는 시공간(균열의 감춰진 곳에 대한 의문)과 맞닿는 것이다. 그‘공간’은 언어의 긍정적 기능, 즉 지시와 재현을 통해 확장되는 지대가 아니라 감춤으로써 겨우 열리는 곳이기에,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표식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사라짐’의‘드러남’, 혹은‘비실체적-실체’/‘실체적-비실체’같은 역설적 방식의 이중운동에 의해 간신히 나타난다. 그러한 맥락에서 위 시는 충만한 순수-기호도 불가능하고(유리병에는 저 금들이 감춰져 있으니) 반대로 순수한 공허와 균열의 지시도 불가능한(저 금들이 어디에 감춰져 있는지 모르니) 언어의 이중적 실패의 사태를 열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실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성을 내장한 실패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 공허의 사태는 발화형식으로 비유하자면,‘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아무것도 없는 사태가 있다’라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중부정의 시적 언어가 열어놓는 시공간, 즉‘유리병의 금’이 숨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저 공간의 존재론적 지위는 일종의‘잠재태/가능태’(dynamis)6의 지대와 같아서, 그것은 그저 현실태(energeia)로부터의 미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태에 늘 잠재적으로 내장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장된 것이 현시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이를 시적 언어가 처한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도출될 법하다. 이른바 언어의 죽음이라고 알려진‘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돋아난 이후, 시적인 것은 더이상 의미가 기표에 정박된 조화로운 정태적 상태(진리값의 재현이라는 언어적 현실태로서의 긍정)에서 배태되는 것도 아니고, 앞서의 긍정에 대한 극단적 파괴의 행위(언어적 현실태에 대한 부정)로부터 배출되는 것 역시 아니게 되었다. 대신에 그것이 구현하게 된 것은 이 양자 사이에서 가까스로 움트는 가능성의 동태적(순간적) 시공간이다. 그것이‘시공간’인 이유는‘시적인 것’이 배태되는 지점은 특정한 대상이나 실체가 아니라 “찰나의 무의미./혹은/무의미의 찰나”(심보선 「먼지 혹은 폐허」)가 도래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조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동태적인 까닭은‘시적인 것’은 언어의 정태적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있음과 없음’‘주체와 탈주체’‘건설과 파괴’‘해체와 구축’의 양태가 긴박(緊迫)하게 점멸(點滅)하면서 긴장의 성좌를 이룩할 때 발아하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시적인 것은 시가 담고 있는 의미, 의식, 사상의 완성도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체현하는 존재형식의 개방성과 방법의 다양체(manifold), 즉 시의 존재태 그 자체로부터 발현한다. 예컨대 우리는‘금’이라는 기표가 아니라‘금’의 실연(實演)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동시에 실연되는 시공간의 역장(力場) 위에서 시적인 것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이다. 이토록‘시적인 것’은 늘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니 시가 내용과 전언에 긴박(緊縛)되었을 때 기이하게도 활력을 잃는 이유도 그와 같으며, 반대로 시가 의미의 자기장에서 완전히 탈출하여 정신분열자의 기표 놀이에 함몰되었을 때 생기를 잃는 까닭도 그와 같다. 더이상 언어에 대한 믿음을 지닐 수 없는 오늘의 시대에 시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혹은‘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이중구속의 기이한 존재방식을 살면서 언어의, 존재의, 삶의 잠재적 부면을, 그 안이면서 동시에 바깥인 비가시적 순간을 열어놓는 것이다.

 

 

4. 쓴다는 것의 의지

 

영혼은 곧 의지이다. 단지 의지만을 위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한 의지.

-슐레겔

 

그렇다면 시는 삶과 무관한 바깥(블랑쇼)인가? 시는 진정 삶을 쓰지 않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는 삶을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로부터 삶을 온전히 게워내지 못한다. 언어는 삶의 잠재적 부면을 겨냥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걸쳐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목적어의 자리를 비운다는 것, 그것은 동시에 그 빈자리를 하나의‘목적어’로 사용함을 뜻한다. 시적 언어는 삶을 쓰는 것(긍정)도 삶을 쓰지 않는 것(부정)도 아니라, 삶을 쓰지 않음으로써 역으로 삶을 쓰게 되는(부정의 부정) 기이한 형국을 연출하는 것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다음 장면에서 이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숨을 참고 버티던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바나나가 썩고 있지 않았다. 얼음이 녹고 있지 않았다. 숲이 불타지 않았다. 당신들이 서로 멱살을 잡지 않았다. 아이들이 농담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농담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물들은 존재하기를 반복하지 않았다.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았다. 전등을 켜지 않았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사라진 물건들을 찾지 않았다. 2008년 다음에는 2009년이 왔다. 여름이 계속되지 않았다. 당신이 태어난 도시를 네번째로 방문하지 않았다. 입 맞추던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인사말을 잘못 발음하지 않았다. 미래의 수첩을 뒤적이지 않았다. 열을 식히지 않았다.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았다. 드러난 일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얀 토끼가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워하던 것들을 그리워했다. 변화하던 것이 변화했다. 되살아나던 것들이 되살아났다. 시계가 시각을 가리켰다.

시계가 시각을 가리키지 않았다.

-한유주 「되살아나다」(『얼음의 책』 2009, 239면)

 

‘시’를 논의하는 자리에 소설을 예로 들다니?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시적인 것’이지 장르로서의‘시’가 아니었다. 이같은 문제의식하에서 강계숙(姜桂淑) 역시 “‘언어의 죽음’이후의 소설이‘시적인 것’의 현현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한유주의 소설만큼 잘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하거나, 한유주 소설의 특정 부분을 인용하며 과감하게 “이것의 이름은 시”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7

그렇다면 위 대목에서 시적인 것은 어떻게 발흥하는가? 온통 부정 서술어‘않았다’로만 짜인 인용문은 의미론적으로는 실로 무가치해 보일 수 있다. 의미있는 부정문이 아니라, 그 무엇도 생산하지 않는 부정문이기 때문이다. 아니, 자세히 읽어보면 생산되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한유주가 감행하는‘쓰기-지우기’의 끊임없는 반복은, 부정되기 이전의 장면들을 독자의 뇌리에 잔상처럼 남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지난한 작업을 하는 것인지 물어볼 법하다. 일부 논자들은 작가가 전작 『달로』(2006)에서 명시적으로‘침묵’을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를 “씌어졌으나 종래엔 아무것도 쓰지 않은”8 텍스트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부정적 규정은 일부 독자들에게 작가가 실제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으며, 고로 자폐적인 일에 골몰하고 있을 뿐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유주의 언어적 존재태를 다른 방식의 명제로 전환하고자 한다. 어떻게?

한유주의 텍스트를‘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을 쓰는 텍스트’의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러한 독법의 변화로써 비로소 이 소설이 닿으려는 침묵이 단순한 부정의 영역이 아니라‘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즉 이중부정의 방식으로 드러나는‘침묵’과‘무’의 가능태였음이 드러난다.‘하지 않는 것을 함’혹은‘말하지 않는 것을 말함’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언어적 한계 속에서도 시가 감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재형식이다. 그리하여 한유주의 문장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파괴하는 것으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파괴를 건설하고, 전언의 점멸(漸滅)을 점화시킨다. 일부 비판자의 오해와 달리, 한유주의 텍스트는 언어의 오염에 맞서 그저 침묵하기를 주장하거나 스스로 침묵하려는 글쓰기가 아니다. 그녀의 글을 지탱해주는 미학적 힘, 즉‘시적인 것’은 전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전언을 둘러싼 문장들의 배치와 틈, 즉 부정의 부정이 열어놓는 가능태의 활력에 있다.

이것은 한유주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인가? 오늘날 시인들이 “흩어지는 연기를 한 시간 동안 바라”(이장욱 「아프리카식 인사법」)보고,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임을 깨달으며, “나랑 같이 사라져볼래?/음악처럼”(김행숙 「미완성교향곡」)이라고 유혹하거나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진은영 「멜랑콜리아」)한다고 선언하는 등 하나같이‘사라짐’이라는 현상에 착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처럼‘잠재태/가능태’의 영역으로 육박하려는 이들의 공통된 욕망과 관련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토록 끊임없이 사라지는/사라지려는 텍스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끝없는 부정의 연쇄 속에서도 기어코 남는 긍정의 잔해 같은 것은 없는가? 자세히 살펴본 독자라면, 인용한 한유주의 글에서 “2008년 다음에는 2009년이 왔다”“그리워하던 것들을 그리워했다”“변화하던 것이 변화했다”“되살아나던 것들이 되살아났다” 등이 긍정문으로 씌어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 문장들은 위 글에서 묘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것이 부정되는 가운데‘시간’이 흐른다는 것,‘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부정되지 않으며, 나아가 이같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변화’의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궁극적으로‘되살아남’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면들은 결국 텍스트의 저자가 무엇인가를 쓰면서(시간이 가고 있으니) 실행에 옮기고 있음을(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니) 나타내는 흔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쓰고 감행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언어의 창조도 아니고,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도 아니며,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행위도 아니다. 다만 “얼음을 녹이려면 기다려야 한다,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싶었다. 나는 기다린다”(『얼음의 책』 작가의 말 371면)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미 쓴 문장을 지우기 위해 감내하는 시간, 즉 의지(‘기다림’)를 쓸 뿐이다. 이러한 이중부정적 글쓰기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가‘변화’하기를 원하는 글쓴이의‘그리움’이며, 이‘의지’를 내장한 글쓰기가‘얼음을 녹이는 기다림’이라는 이중부정 형태의 글쓰기로 육화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시인들이 왜 들리지도 읽히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말을 그리도 힘겹게, 난해하게, 심지어는 기분 나쁘게‘되풀이’하는가의 대답으로도 읽힐 수 있으며, 앞서 살펴보았던 시적인 것의‘존재론’및‘미학’과는 다른 영역, 이른바 시적인 것의‘윤리’에 대한 가능성을 던져준다. 오늘날의 시가 보이는 표면상의 무수한‘무의미성’및 정치적‘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무엇인가를 지속해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되풀이’되는 활동의‘잠재적 부면’에서 그 행위를 지탱하는 모종의‘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린다. 그러니까 부정의 언어를 작동시키는 오늘의 글쓰기는 성공이라고 여기는 지점이 곧 실패의 지대이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만 시는 나를 지배하고 나는 시를 경배한다”(심보선)라는 고백처럼 자신의 의지만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끊임없이 죽이고 살리는 반복운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시적 언어는 삶의 그 어떤 부면에서도 안정적으로 정박하지 못한 채, 세상의 전 국면을 감당하기 위해 언어의 벼랑을 곧 시작점으로 삼아 “발자국을 밟으며 미래로 나아간다”(심보선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는 표현처럼 스스로의 언어를 찢고, 게우고, 상처내고, 토해냄으로써 삶의 모든 고착화된 부면을 부정하고 변화와 가능성의 지평(‘삶의 잠재적 부면’)을 향하여 영원히 주파한다.

 

 

5. 비명으로서의 시

 

현대의 시인들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시적 언어가 담지하는 세계에 대한 진리치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도, 시인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써야 하는) 뒤틀린 운명에 들려 있다. 세계를 직접적으로 현시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스스로의 언어 자체를 폐기할 수도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인해, 이들은 참담하다. 이 저주받은 이중적 불가능성을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앞서의 시인들이 환기하듯, 이들은 이러한 불가능성에서 탈출하려는 대신 불가능성 자체를 능동적으로 살아가면서, 그 언어적 실패의 운명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길을 모색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존재방식을 우리는‘존재론적 비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비명의 존재태는 투명하고도 충만한 의미전달을 겨냥하는 교신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발화행위와 다를 수 있으나, 그 미완의 말들은 세계에 대한 완전한 재현에 실패한 대신 실패로서 언어의 또다른 가능성을 내장하는 어떤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한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기적을 표현하는 가장 알맞은 방법은 언어의 명제가 아니다. 나는 그것은 언어의 존재,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9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은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 놀라운 것이다. 이 말이 시의 존재태, 즉 비명을 일컫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명은 투명한 의미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일반적인 맥락에서의 조화로운 소통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 근본적인 소통 불가능성의 구조가 또다른 소통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잠재태/가능태’의 존재형식처럼‘소통의 불가능성’을 역으로 하나의 소통 가능성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와 방법, 말하자면‘잠재태/가능태’로서의 소통을 일컫는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시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표면적으로만 옳다. 이는 시를 내용과 전언에 입각하여 읽을 때 나타나는 오독의 소산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시는 내용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방식, 즉 존재형식으로 소통하며, 시적 언어에 있어 중요한 것은 소통의 내용이 아니라 소통의 형식인 것이다.10 비명이라는 시적 존재태 덕분에 비로소 독자는 현실의 어법과 달리 오해로써 소통하는 길이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길이 제시하는 사태는 현실의 어법에서는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낱 말놀이에 불과해 보이고, 아울러 그러한 비명의 언어는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명시할 수도 없지만, 이 비명의 잠재적 층위에는 우리의 정형화된 삶과 언어 자체를 회의하도록 만드는 근원적이고도 위험한 물음이 잠재하고 있다. 이 물음이 독자와 감응하는 순간, 독자가 믿어왔던 굳건한 현실의 지대가 뒤틀리고,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잠재적 지대가 열리는 징조가 보일 것이다. 물론 그 지대가 완전히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독자가 경험하는 것은 끝내 잠재적이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징조에 불과하겠지만, 이러한 미완의 사태가 우리의 존재형식을 구성하기에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행여 이러한 되풀이는 곧 익숙함을 동반하지 않을까? 그러나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 저 분열된 상태를 지칭하는 비평적 수식어와 비평이 생산해내는 말들의 모양새뿐이다. 저 분열을 경험하는 것, 혹은 자신의 해체와 고착을 연이어 경험하는 삶은 그 한없는 되풀이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낯설 것이다. 나를 죽이고 되살리는 행위가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수영(金洙暎)은 일전에 이를 자유의‘이행(enforcement)’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리라. 그의 말대로 우리가‘자유’라고 발화하는 순간‘자유’를 붙들고 있는 것은 여전히 기표의 헐거운 갈고리뿐이니, 시는 이를 지시하지 않고 다만‘이행’하는 동태적인 존재형식을 살 때, 마침내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다. 즉 스스로의 육체인 시적 언어를 부수고, 파괴하고, 지워나가는 와중에 가까스로 현시되는‘바깥을 향한, 안으로 난’길을 따를 때, 비로소 삶의 잠재적인 지대에 잠재적인 방식으로 접선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이리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이 길이 시의 정치성을 말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 우회로일 것이다. “진정한 혁명의 고유한 임무는 단순히 세계를 바꾸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바꾸는 데에 있다.”11 저 진정한 혁명을 우리는 존재형식으로서의 시의 혁명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으나 다만 삶이 처한 시공간, 즉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부면으로서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쓴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 시의 잠재적 정치성을 긍정적 어법인 잠재성의 정치로 바꾸는 일은 오롯이 독자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아울러 저 시적 언어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찾아주는 것, 즉 시의 유물론적 조건을 탐사하고 그것을 현실의 언어로 변환시키는‘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을 감행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비평가의 몫이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의 미학과 사회적 현실 간의 상관도를 상세히 규명하는 사회학적 분석에 해당하며, 이를 근거로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던지는 복화술사의 정치에 속할 것이다. 허나 이 글이 감당할 수 있는 일 역시 여기까지이다. 그같은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아른거리는 저 가능성의 지평에, 미래의 일로 남겨둔다. 다만 변명을 덧붙이자면, 끝내 당도할 수 없는 저 미완의 지대로 인해 오늘의 독자가 이룩한 실패의 무늬가 다시금 저 지대로 가닿으려는 의지로 재점화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미래가 과거가 되고 과거가 다시 미래가 되어버리는 역설의 블랙홀에 이 글 역시 놓임으로써 오늘의 독자에게 남아 있는 한움큼의 잠재적 의지만이라도 일깨우는 한자락 가능성의 의지로 거듭나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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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40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같은 글 82면.
  4.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295면.
  5. Giorgio Agamben, tr. Daniel Heller-Roazen, “The Idea of Language,” Potentialitie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45면.
  6. 주지하다시피 뒤나미스(dynamis)는 우리말로 잠재태(潛在態)와 가능태(可能態) 모두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잠재태’(dynamis)를 단순히‘현실태’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로만 규정하지 않고,‘아직 이루어지지 않음의 이루어짐’혹은‘하지 않는 것을 하기’로 정의한 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다. 자세한 내용은 Giorgio Agamben, “On Potentiality,” 앞의 책 참조.
  7. 한유주의 시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강계숙 「‘언어의 죽음’이후의 소설」,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 249~50면.
  8. 김형중 「푸네스의 고독, 셰에라자드의 뜨개질」, 『얼음의 책』 해설, 350면.
  9.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Occasions 1912-1951 (Indianapolis: Hacket 1983) 43~44면.
  10. 비로소 우리는 시가 정치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이상한 딜레마’의 정체를 해명해주는 실마리에 가닿게 된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시 혹은 파시즘을 숭배하는 시를 부정해야 하는 근거와, 인권을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시가 그 정치적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미적일 수 없는 이유는 사실상 동일한 논리적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시적일 수 없는 것은, 말하자면 단순히 아름답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의 부재 때문만도 아니다. 정치적인 내용을 노골적으로 담은 시들이 그 이념적 내용과 상관없이 사실상 동일한 곤경에 처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넘쳐나는 정치적 신념이 시적 언어가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믿음을 구축하도록 만들고, 어느새 삶을 특정 부면에 접착함으로써 자기 존재형식 자체를 운동성을 잃어버린 불변의 정적 텍스트로 고착화하기 때문이다.
  11. Giorgio Agamben, tr. Liz Heron, “Time and History,” Infancy and History (Verso 1993) 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