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 시선과 시선
시는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가
창비시선 300번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박수연
신형철
오래 더불어 왔던, 더불어 가야 할 시
박수연(朴秀淵)│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에 실린 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논쟁에서 항용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가‘창비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문학적 관점이란 특정 핵심어 몇개로 지시될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개념화의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 개념화를 위한 시대적 이월 과정에서 하나의 용어가 항상 자기동일적인 내포로 고정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창비적 관점’이라는 말이 계속 사용된다면 그 말은 차라리 하나의 형상(figure)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거기에는 적극적인 형태와 소극적인 그림자가 동시에 움직인다. 따라서 한권의 시선집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들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 설명으로부터 도약하여 형상을 자기화하는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작품과 작품이 스스로를 열어 만나고 서로 스며서 이루어내는 그 시적 이해의 지평이야말로 언어와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가 끝내 도달해야 하는 장소이다.
창비시선 300번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를 개략해보니 그‘관점’이라는 말이 어떤 것인가를 그야말로 형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그 형상에 대해 시집의 엮은이들은 “사람과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라고 정리해두었다. 심미적 언어구성체에 대한 이해가 단지 언어의 미학적 모험을 용인하는 일로 그칠 수는 없는 법이다. 300번 기념시집이 그 모험의 표면보다도 저 심연의 토대를 드러내기 위해 주목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작품들은 자신의 독자들을 개별화시키지 않고 함께 묶어둔다. 이것이 바로 예술행위를 뛰어넘어 작품이 보존되는 경로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서로를 위한 존재와 서로 더불어 있는 존재”(『예술작품의 근원』)를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는 일이 그 결과일 것이다.
실로, 이 기념시집의 각 시편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의 풍모를 하고 있다. 시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듯 같은 말을 한다. 이것을 애써 시의 창비적 편향이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서로를 위하며 더불어 있는 모든 존재’의 징후적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 없이 작품들이 예술적 향유만으로 그친다면, 이른바‘언어적 모험’이 대략 추구하기 마련인 “섬뜩함 가운데로 내모는 저 충격”은 “작품을 중심으로 한 영리적 예술거래활동”의 출발에 불과하다고 하이데거는 쓴다. 여기에 작품은 없고 작품으로 보존되는 더불어 있음의 열림도 없다. 기념시집이 예술적 향유에 그치지 않고 작품들의 성채로 나아가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들을 상품화·개별화하는 일로써만 제 본분을 다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영토를 징후적으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음을 300번 기념시집은 형상적으로 주장한다.
시로써 사람의 애정을 도모해온 것은 따지고 보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창비시선이 한국현대시사에서 자임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애정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권력을 대상화해서 싸워온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모종의 연애편지였다. 이 연애편지가 때로 격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된 바 없지 않지만, 그 일탈이야말로 이른바‘창비적 관점’을 더 깊게 생각해보도록 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곁가지를 무성하게 해서 몸체를 두텁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오랜‘애정행각’이야말로 독자들이 새삼 기억해야 할 사항이다. 뒤집어보면 애정행각이란 열일 제쳐두고 오직 그것을 위해 집중하는 투신의 자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오랜 애정행각의‘애정’이 앞에서 말한 바의 더불어 있음에 대한 열렬한 지향이라면, 오랜‘행각’의 그 시적 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창비적 관점’이 지금의 한국문학에 대한 어떤 당파적 관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라면, 창비시선이 오래된 심미적 언어에 보인 관심의 보수성 자체는 오히려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연관성에 의해 가능한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언어의 감옥에 갇힌 미학적 혁명만으로 가능할 리 없다. 지금까지 창비시선 혹은‘창비적 관점’의 문학행위가 그 심미적 실천의 한 축을 형성해왔고 그 역할이 앞으로도 변함없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한국문학에는 여전히 있다. 자신의 주장을 견결히 지키는 일에 대해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중심주의라고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체가 없다면, 타자의 타자인 주체가 없다면, 심미적 실천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정치의 자리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자기 외부의 존재들이 들어와 스밀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가 필요한 법이다. 오래된 자기의 성찰과 주장이 작용하는 것도 이때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언어형식의 새로움이 가장 올바른 미적 척도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것이 낭만주의적 창조성을 가리키는 말이든, 미적 모더니티의 건설적 파괴를 가리키는 말이든,‘새로움’은 최소한 10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온 미적 규범이다. 시간상으로만 따져보아도 그 새로운 언어의 모험이라는 정도가 그다지 새롭지 않은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 태도가 자심해져 오히려 이제는‘새로움의 낡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시대는 아닐까? 새로움이라는 미적 척도가 존재의 내용은 그대로 둔 채 디자인만 새롭게 고안하는 신상품주의자의 태도와 결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음을 앙드레 고르(André Gorz)가 강조하고 있지만, 그 새로움의 추구가 20세기의 와중에 결코 긍정적으로 기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유종호(柳宗鎬)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다. 그는 1968년에 나온 신구문화사의 『52인 시집』에서‘새로움’의 시학을 역사상의 반민주주의적 태도와 연결시킨다. 유럽 모더니즘이 파시즘과 연루되는 정황을 모든 새로움의 운명이라고 못박을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혁명을 통한 새로움이 이미 무수히 반복된 근대적 시학의 자기규정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52인 시집』은 최근의‘새로움’이라는 미적 지평 못지않은 미학적 쇄신주의자의 태도로 충만하다. 이것은‘새로움’이 한국문학의 오랜 보수적 시기를 거쳐 지금에야 활짝 꽃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오래됨’과‘새로움’이라는 미적 지평보다도 그‘오래됨’과‘새로움’이 사용되는 공통의 정치적 지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새로움’의 자율주의라 할 만한 근대적 미(美) 이론도 이제는 폐기되어야 하는 낡은 이론인 것은 아닐까? 전위의 미학에 대한 평가 자체도 전복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새로움을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말 한마디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주체중심주의로서의 근대자본주의가 하루빨리 극복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글 「세계상의 시대」(1953)에서 그는 근대가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주관의 시대이며 주관적 세계상이 등장하는 시대라고 정의한 후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사건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해볼 때 새로운 시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늘 새로운 것으로서 고유하게 정립하는 그런 시대이다. 새롭게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상으로 변화된 세계에 속해 있다.” 요컨대 새로움은 주체가 세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자기 앞에 내세우는 개별적 주관의 산물로서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근대적 주체를 논의할 때 자주 고려하는 근대성의 요소이기도 하다. 이 분석은 최근 시들의 언어적 모험이 주체중심주의를 넘어선 타자지향의 윤리학적 성과라고 고평가되는 경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새로움은 누구의 새로움인가? 새로움이 이 세계를 미학화하는 하나의 경로라면, 그것을 진정한 타자지향의 새로움으로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하이데거에게 그 새로움이 주관적 세계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주관의 불가피한 작용을 거꾸로 적극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로 창비시선이 보여주는‘창비적 관점’혹은 삶에 대한 애정, 더 나아가 이른바 시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모종의 심미적 실천에서 주체적 관점이 더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낡아버린‘새로움의 미학적 척도’에 신들린 시대에, 그 새로움을 넘어 역으로 오래된 것을 추구함으로써 답을 만들어내려는 행동이다. 답 없는 질문에 대응하는 것은 그 답을 기획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때 시는 징후로서 미래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징후 자체가 행동이 된다.
이딸리아와 러시아의 전위주의가 다르듯이 한국과 서구의 전위주의가 같을 수는 없다. 한국의 전위들이 애호하는 김수영(金洙暎)은 정작 서구적 난해시를 모방하는 한국시인들에게 현실에 즉한 시를 쓰라고 일갈한다. 창비시선은 그 일들을 이른바‘새로움’의 맹목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수행해왔다. 지금은 대중의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새로움의 독재를 넘어 그것을 오래 고무시켜야 할 순간이다.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보수주의
신형철(申亨澈)│문학평론가
창비시선이 300번을 돌파했다. 많은 이들이 감회에 젖어 경의를 표했다. 올해로 36세가 된 창비시선보다 젊은 나에게도 어설픈 소회가 없지 않아서 짧은 글을 한편 썼다. 그 글에서 나는 36년 역사에 우선 경의를 표하되 그간 이 씨리즈에 가져왔던 아쉬움을 토로하는 데 더 무게를 실었다. 예외가 없지 않았지만 창비시선의 기조는 대개‘민중적 서정시’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 단아한 서정시들”이 대종을 이룬다는 것, 과연 이것이 창비가 표방해온‘진보’라는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적(시적)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고 있다는 것 등이 대강의 논지였다. 서구문학사에서 정치적 좌파와 (비록 애증의 관계였을지언정) 결합한 것은 대개 과격한 아방가르드였는데, 어째서 우리 쪽에서는‘서정’이 진보적인 시의 표준문법이 된 것인지 의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미학적으로는 보수적인 틀을 고수해온 것은 한국문학 특유의 현상” 운운하기까지 했다. 이 입장을 철회할 생각은 없지만 얼마간 거친 논변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서정시 vs전위시’라는 구도가 도드라졌다면 그 역시 사려깊지 못했다. 이번에는 더 근원적인 층위, 그러니까‘언어’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참조가 될 만한 하나의 사례를 살핀다. 망명시기 활동을 대표하는 시집 『스벤보르 시편』(Svendborger Gedichte, 1939)에 수록된 시 「후손들에게」에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나무에 관한 대화가 그 많은 범죄행위에 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파시즘의 시대에 자연(나무)을 노래하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는 탄식이다. 이후 여러 시인들에게서 참조·인용된 구절이거니와, 그중에서도 압권은 첼란(P. Celan)의 것이다. 시집 『눈 구역』(Schneepart, 1971)에 수록된, 제목은 없고‘브레히트를 위하여’라는 구절만이 부제처럼 붙어 있는 한 시에서, 첼란은 이렇게 응수한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그 많은 말해진 것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이 구절이 압권인 것은‘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요약될 브레히트의 강압적인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전복해서 이렇게 되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도대체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첼란은 묻는다. 역사의 비극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나무에 관한 대화이건 아니건, 도대체가 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죄악이 아닌가. 그러니 그 많은 죄악의 말들을 반복하는‘말들의 말’역시 죄악이 아닌가. 나는 브레히트가 아니라 첼란에게서 진정으로 급진적인 태도를 본다.
브레히트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첼란은 진실을 말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시는 진실이 표현되(면서 훼손되)는 장소가 아니라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첼란의 비의적인 언어들은 세상의 말들로부터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철책이다. 요컨대 문제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의 코기토(cogito)를‘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그 의심은 미학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는 도대체가 그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저 행과 연을 나눈 수필에 머물지 않고 언어를 의심하면서 겨우 한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형태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불능 등등의 언사들은 그래서 공허하다.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자기 자신을 최선을 다해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서정시 vs전위시’같은 따분한 구도 이전에 먼저 언어에 대한 태도가 있고, 그 태도가 미학적 진보와 보수를 규정한다.
창비시선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진보적인 시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 내용과 무관하게 미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300번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를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도 그것이다.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낼 줄 아는 뛰어난 서정시들이 십여편 남짓 있어 감동적이지만, 대다수를 이루는 소위‘민중적 서정시’들에는 언어에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들은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 안에서 너무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하다. 때때로 이 특질들이 독자들에 대한 겸손함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의심은 진실에 대한 경외와 나란히 가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태만은 진실에 대한 오만을 낳는다. 그 오만은 시의 언어, 언술, 형식에 대한 고민을 생략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태도로, 그저 독자에게 삶의 (진실에 미달하는) 지혜를 가르치려고만 한다. 그런 시들은 단번에 손쉽게 읽힐 뿐 두번 읽히지 않는다.‘한번 읽기’와‘다시 읽기’사이의 시간이 사유의 시간이다.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시 앞에서 독자는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의 부담을 덜어주는 그런 특질들은‘진보적’이라기보다는 그저‘대중적’인 것이다. 이 특질들이 한때는‘민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동일한 것이‘대중주의’로 비판받게 될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일반론으로 마무리하자.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우리는 세개의 명제를 얻었다. 1845년 봄에 맑스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1873년에 19세의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1」)라고 쓰면서‘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와 러시아 등에서 창궐한 아방가르드는 맑스와 랭보의 명제에 공감하면서 이에 덧붙여‘예술을 혁신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들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 명제를 쇠사슬로 묶어야 한다. 요컨대 제도와 인간과 예술의 동시다발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정치학과 윤리학과 미학은 한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의‘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늘 우리 앞에 존재해야 한다. 예술은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다발이 어렵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뒤에서 앞으로 진행돼야 한다.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서면 나머지 두 혁명이 유예된다. 한국에서‘진보’를 자임한 문학이 대개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길이 아니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