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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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5>시

 

송경동 宋竟東

1967년 전남 벌교 출생.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umokin@hanmail.net

 

 

 

 

 

버스 기다리는 척 벼룩시장이나 교차로를 슬쩍 뽑던 손

무담보 신용대출 854—2514 전봇대에 붙은 번호표를 몰래 뜯던 손

전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던 손

악수하기를 꺼리던 손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던 손

옹이가 박혀 있던 손

 

어이, 하며 저쪽 철골 위에서 환하게 흔들던 손

야, 임마, 하며 반가워 손아귀를 꽉 쥐던 손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

 

 

 

잃어버린 안경

 

 

올해 잡아먹은 안경이 네 개째다

5년째 안경 하나로 버티는 아내는

어디 재벌집 아들하고 살지

같이 못 살겠다고 한다

 

하나는 지역 민중연대 발대식 날이었다

새로운 조직을 띄우는 날

난 이제 구로지역 일에서는 좀 빠지겠다는 생각이었다

십몇년 쫓던 일에서 빠진다 생각하니

뭘 하나 잃어버린 듯 허전했다

안경 하나쯤이야 했다

 

또 하나는 여름에 잃어먹었다

남들이 이젠 그만 하라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노동자캠프 어쩌고 하는 일을 또 벌이면서다

변통은 물론 술이었지만

하지 말라는 일을 또 하나 저질렀다는

무거움이 뭐 하나라도 덜어내려마 했다

안경 하나쯤이야 했다

 

세번째는 얼마 전 농민대회에 나가서다

해 저물녘 제일 악독하다는 1001부대와 맞서 싸우다였다

아차 싶은 순간에 안경이 휙 날아갔지만

내달리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참이었다

오십대도 찾아보기 힘든 농민들

그 어른들 싸움에 안경 하나쯤 내놓는 거야 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또 하나를 잃어먹었다

잊고 지냈던 구로공단 옛사람들을 만난 날이었다

386이 정권을 잡았다고 떠들어대는 세상에서

하나같이 잊혀진 사람들

대우어패럴 서광 에이엠케이 나우 협진정밀

가리봉전자 삼경복장 대성전자 슈어프러덕츠

그곳에서 처음 노동운동을 열었던 노출 1세대들

아직도 참가비 만원에 허리가 휘는 사람들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선배

얼마 전 빔에 깔려 네 손가락이 뭉개졌다는 선배

악수를 하다보면 손가락이 없어 허전한 이들 많았다

기쁨과 설움을 많이도 처먹었던가보다

집에 들어와보니 안경이 없었다

 

처음엔 안경 한두 개쯤이야 했다

사람들은 다시 또 죽어나가고

세상에 보기 싫은 꼴이 한둘 아닌 마당이다보니

난 자꾸 안경이라도 잃어버리며

보기 싫은 세상에 작은 항거라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난 억울하다

내가 왜 이 못된 세상에 안경까지 잡아먹혀야 하나

힘없는 아내에게 그 짐을 늘 지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바란다

편파적으로 구체적으로 바란다

안경이나 뺏어가는 소극적 싸움이 아닌

진정한 싸움을, 내게 걸어달라고

차라리 내 영혼의 눈을 거둬가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