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도면회·윤해동 엮음 『역사학의 세기』휴머니스트 2009
탈근대의 렌즈에 비친 한일 역사학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baik2385@hanmail.net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이야기해주세요.” 이렇게 시작되는 첫구절과‘역사를 위한 변명’이란 제목에 끌려 마르끄 블로흐(Marc Bloch)의 저서 일본어판을 어렵사리 구해 읽은 기억이 난다. 전공인 사학과 과목들에 영 흥미를 못 느끼던 1970년대초 학부생 시절의 일이다. 역사에 관한 교양서나 드라마들이 인기 높은 것과 달리 대학에서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사지식은 별로 관심을 못 끄는 우리 현실에서 위의 질문은 여전히 울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이 물음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역이 역사학 자체에 존재한다. 역사학의 자기검증장치인 사학사(史學史)가 그것이다.
20세기 한일 두 나라 역사학의 역사, 곧 사학사와 본격적으로 씨름한 책 『역사학의 세기: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이 갓 출간되었다. 일본 역사교과서 논쟁을 계기로 2001년부터 시작된‘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5년간 활동 가운데 마지막 두해의 성과를 주축으로 하되 일부 다른 글들을 섞어 한권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 책의 필자 중 하나인 토베 히데아끼(戶邊秀明)는 사학사가 요구되는 상황은 “역사학이 사회와 관계를 적절히 맺지 못할 때, 단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시점”(402면)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판단을 따른다면, 이 책은 현재 양국의 역사학이 처한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그에 적절한 처방을 내리려는 한일 역사학자들의 집단작업의 소산일 것이다.
그렇다면‘역사포럼’은 역사학이 왜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가. 엮은이들은 한일 양국의 역사학이 국사-동양사-서양사의 3분과 체제로 유지되는 탓에 유럽중심주의가 유지·고착되고 자국사 위주의 연구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 병통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국가 단위의 역사를 연구주제로 삼는 현재의 국사중심 체제로부터 탈피할 것을 제안한다. 너무 단순하게 요약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런 진단과 처방은 탈근대 사조의 유행을 타고 탈민족주의가 역사학에서도 크게 힘쓰고 있는 지금은 꽤 익숙해진 주장이다.
이 진단과 처방은 별로 새롭지 않지만,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된 개별 사례연구는 풍부한 내용을 갖췄다. 제1부에 실린 양국 역사학의 기원을 규명한 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20세기 후반 양국 역사학의 주요 연구자 내지 사조를 다룬 제2, 3부는 바로 역사학의 현재성을 논쟁적으로 따지고 있어 한층 더 흥미롭다.
제2부에서는‘공전하는 탈식민주의의 역사학’이라는 표제가 말하듯이, 식민지 지적유산 극복을 지상과제로 삼아온 한국 역사학의 거장들이 가차없이 비판당한다. 서양중심주의자이자 유신체제의‘궁정역사가’로 규정된 서양사학자 민석홍(閔錫泓)이야 논외로 치더라도,‘내재적 발전론’을 실증적으로 구축한 한국사학자 김용섭(金容燮)이‘숨은 신’에 비유되며 지식권력화한 그의 내적 발전론이 추락할 때 비로소 새로운 대안이 나올 것이라고까지 혹평된다. 또 보편사적 개체성을 구현한 한국사의 체계를 세운 한국사학계의‘거인’이기백(李基白)의 실증사학도 극복대상으로 거론된다. 모두‘민족/국가 기획’이라는 근대역사학의 한계에 갇혔다는 이유로 부정되는 것이다.
제3부에서 일본의 역사학은‘독백하는 전후역사학’으로 규정된다. 일본에서‘전후역사학’이란 단순히 2차대전 종결 이후의 역사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제를 뒷받침한 황국사관(皇國史觀)이 몰락한 뒤 일본 역사학을 주도한 맑스주의적 방법을 핵심으로 하는 특정 경향과 연구자집단을 가리키는 일종의 고유명사다. 그것이 60년대에 확립되어 성행했고, 그에 의해 다듬어진 시대구분론·국가론·사회구성체론 등의 시각이 어느 면에서는 지금도 일본 역사학의 서술을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일국(一國)사관에 기초한 전후 일본 역사학의 부정적 측면을 함축한 용어로 정착된 듯하다. 여기서는 특히 그것이 대체로 일본의 입장만 중시하고 인근지역과 대화를 나눌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한계를 지녔다는 점이 고대사연구, 동아시아세계론 등 여러 각도에서 부각되고 있다.
이렇게 일본 역사학 역시 기본적으로 비판되지만 2부의 글들과 달리 그 속에서 생성된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도 소중하게 다뤄진다. 그중에서도 일본사 연구자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가 개척한‘민중사상사’가 두드러진다. 그는 고도 경제성장의 사회변화 속에서 민중이 느끼는‘풍요로운 사회’현실과 유리된‘전후역사학’을 비판하면서‘민중의 일상감각’에 뿌리내린 역사의 원동력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한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일본 역사학과 달리 한국 역사학은 극복의 대상일 뿐인가. 특정 연구자나 조류를 신화화하면서 그에 기대어 변화하는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하는 우리 역사학계의 경직성을 꼬집으려는 엮은이들과 한국 필자들의 강렬한 문제의식은 어느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식민주의의 영향을 과도하게 중시하고 근대와 탈근대 역사학의 과제를 이분법적으로 설정한 나머지 우리 역사학의 중요한 성취를 간과하고‘공전(空轉)하는’역사학으로만 재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점을 독자와 더불어 짚어보기 위해 이 책에서 (어떤 사정에서인지) 빠뜨린 나의 전공분야인 동양사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책의 논지대로라면, 해방후 한국의 동양사학이 “식민지시기 동양사학의 정치적 자장 안에서 출발”(246면)한 것은 분명하다. 한 일본인 연구자가 “한국에서는 액터(actor)가 바뀌었지만‘동양사’라는 개념은 계승”되었다고 최근 어떤 책에서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표면적 관찰이다. 한국의 동양사는 제국대학에서 조성된 동양사학이라는 제도와 실증적 사풍(史風)을 이어받았지만 동시에 1930년대 조선의 민간지식인들이 주도한 조선학운동의 유산도 계승한 것임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또한, 중국사 연구의‘유일한 모델’이자‘학문권력’으로 간주되는 민두기(閔斗基)의 실증주의자·근대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그가 1960~70년대 이래의 사회현실과 대응하면서 보여준 역사인식의 복합성 내지 탄력성을 시야에 넣어야만 그의 성과와 한계가 후학에게 지적 자산으로 오롯이 활용될 수 있을 터이다.
끝으로, 이 책이 제시한 처방에 대해 점검해보고 싶다. 여기서는 국사중심 체제로 구성된 20세기 역사학 제도를 넘어서자는 주장만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역사포럼’이 활동목표를 처음부터 “자율적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을 구축”하는 데 둔 것에서 드러나듯이, 새로운 동아시아사 또는‘실천적 동아시아’가 적어도 일부 참여자(李成市, 김기봉, 윤해동 등) 사이에서는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 구상과 실천이 우리 역사학의 대안으로 뿌리내리려면 1990년대 이래 우리 논단에서 전개되어온 동아시아담론과 (이 책에서 말하는) 성찰적 동아시아상의 거리를 주밀하게 검토하는 데서부터 출발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역사포럼’은 제도 밖의 학술활동으로 출발했으면서도 정작 제도 밖에서 생산되고 유통된 역사지식의 역할(또는 내가 말하는‘운동으로서의 역사학’)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제도 안에서 쌓인 대안의 가능성-그것이 거장들에 한정될 이유는 없다-조차 소홀히 다룬 감이 없지 않다. 역사학이 위기를 맞아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새로운 역사학으로 발전하려면 외적 요소와의 긴장관계를 통해 잠재하는 자기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근대역사학의 극복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에 제대로 적응해야 한다.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은 두가지 성격의 단일과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