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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은강
1971년 대전 출생. 2006년 제6회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kkori71@naver.com
양치기 소년
1
왼손이었을지 모르는 오른손은 실어다 한꺼풀 한꺼풀 야생을 내려놓던 날들은 불감이다 통증 없는 삶이 아름다우냐 맘껏 시들지 못하는 수명은 권태다 권태 속에서도 자살을 모르는 조화(造花)다 꿈꾸지 마라 왼손의 밤은 함구다
2
뿌리가 나의 생모란다 그녀에게 초유를 동냥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피, 아삭아삭 사과맛이다 서로 닮아가는 환멸이 좋아 같은 냄새의 불신을 낳고 전통적인 독법으로 내가 나를 속이며 이해의 장식을 번식시키고 불구의 혈자리를 찾아 맴도는 이 예쁜 환멸의 정물이 좋아 아무런 식욕도 없는
감동 없는 태양 아래 늙기도 꿈같은 갈증이 아버지란다 생의 발화지점에서 증발해버린 나는 어디로 가고 아주 많은 소음들이 제멋대로 착상을 했지 소음은 배꼽이 낳은 자식이란다 무음 속에서 득음하듯 수화(手話)로 사랑을 하고 네 귀의 속씨식물처럼 싹을 틔우고 싶은 내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생각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는 천진한 번뇌가 좋아 천진한 번뇌를 닮은 양떼구름, 양떼구름, 양떼를 몰고서 엄마 나는 바빌로니아로 갈래
고양이와 함께
여자는 모두 어미의 어미로 세습되고 어미의 세번째 쎅스의 잔여물로 태어난 나는 고독이 천지신명이라 제삼의 여자가 되었다
얘, 이교도의 여자야 치마를 올려봐 오빠들이 말했지 몇가닥의 수염을 적시며 오종종 통조림 바다를 누비는 오빠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가시도 없는 혀가 매끈하게 휘감겼지 뭉툭해진 발톱으론 제 목을 따지도 못하면서 얘, 이교도의 여자야 낭만의 절개를 벌려봐 고래(古來)의 뼈대를 핥으며 문지방을 넘어섰지 다산의 쥐들이 숭배하는 오빠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야옹 하고 꼬리를 세워봐 어여쁜 노랑 꼬랑지 치즈처럼 부드럽기도 하지
처형장인 줄 알면서도 꼬박꼬박 목을 내놓는 태양이 선혈을 뿌리며 지상으로 되돌아가듯 동사(凍死)한 밤들의 가랑이 사이에서 벌겋게 목이 타는 나는 이승의 뜨거운 시신, 사내 셋을 거느린 지중해의 밤이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