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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역방(逆方)이 주도한 제2의 창작
미셸린 이샤이 『세계인권사상사』, 길 2005
안경환 安京煥
서울대 교수, 법학 ahnkw@snu.ac.kr
‘촌평’도 엄연한 서평이다. 학술서의 서평은 촌평이라고 해서 이완과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후배는 ‘번역서’에 대해서 공개 서평을 거부해야 한다고 한다. 번역서 서평은 정신이 바로 박힌 학자의 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다.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다. 번역을 제대로 된 창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과격한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 인문학, 사회과학의 수준은 한국어 원전을 중심으로 논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당위가 현실적인 차원에서 뒷받침되는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러한 담론을 주창해온 『창비』 같은 지적 매체로서는 더욱 경청해야 할 경고로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후배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그의 엄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조효제(趙孝濟)가 옮긴 『세계인권사상사』는 그 자체로서 충분한 서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조효제의 저술은 미셸린 이샤이(Micheline Ishay)의 The History of Human Rights: From Ancient Times to the Globalization Era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다. ‘한국어 개정판’이라는 이례적인 수식어가 제목의 일부가 된 것은 이 책의 성과와 기여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원저와 번역서는 독자가 다르다. 번역의 과정에서 원전을 수정·보완하는 것은 번역자의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원문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옮기는 것은 번역서가 갖추어야 할 기본인만큼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충실한 역주가 딸려 있는가에 따라 학술번역서의 수준이 결정된다. 근래에 들어와서 이렇듯 평석(評釋)에 가까운 번역서가 심심찮게 탄생하는 것은 실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원저자로 하여금 원저의 내용을 수정하도록 요구한 ‘역방(逆方)’주도형 번역의 예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는데, 바로 이 책이 그러하다.
조교수의 번역서는 번역이 제2의 창작임을 내놓고 선언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색인을 포함하여 450면에 불과한 원저가 816면의 번역서로 불어난 이면에는 이러한 남다른 사연이 있다. 전편에 흐르는 논리적 긴장을 더욱 조이기 위해 역자가 쏟은 노력은 유별나다. 간단없이 원저자와 소통하였고 그 과정에서 저자 스스로 오류를 깨치게 하고 끝내는 수정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원저는 역자 스스로 평가했듯이 서구에서 출간된 최초의 세계인권법 통사(通史)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인권이라는 개념이 근대 서구문명의 성과라고 규정하는 성급함에 대해 약간의 각주를 단 선행저술은 적지 않다. 그러나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권 개념과 제도의 발전과정을 지리적 반경을 한정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술은 귀하다. 저자는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적 교리에 기초한 인권개념의 발굴에도 소홀하지 않다. 자유, 평등 같은 헌법 이념이나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정치이데올로기와 인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고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통사적 지적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저술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가 있다면 인권사는 “억압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34면)한다는 종래의 정설이다. 그러나 그 정설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일반기준은 “보편적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54면)라는 부정의 명제이다. 2천년의 인권사에 관한 성의있는 서술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독자가 착안하는 저술의 주안점은 결론부문에 해당하는 ‘21세기 초의 인권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밖에 없다. ‘인권세계관의 통합’이라고 제목붙인 제7장 ‘한국어판 보론’은 원저와 번역서가 출간된 시차를 메워준다. 9·11테러 이후 세계인권의 문제가 ‘전지구적 대테러전쟁’(Global War On Terror)으로 압축된 현상을 저자는 미국의 역할을 두고 극단적으로 맞서는 양대 분파, 즉 씨저파(Caesarists)와 스파르타쿠스파(Spartacists)의 대립으로 요약·정리한다. 씨저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그리스문명을 격파했고 정복지에서 새로운 법률을 시행했으며 로마식 공화주의적 시민자격을 전파했다.(581면) 한편 스파르타쿠스는 씨저의 통치에 항거했던 검투사 출신의 노예반란 지도자이다. 오늘날의 씨저파는 민족주의·고립주의가 초래한 반인권적 상황을 인권의 보편성과 지구화라는 명분으로 강요한다. 이에 대립하는 스파르타쿠스파는 반권위주의적·반제국주의적이며 동시에 흔히 고립주의를 취한다.(582면)
이러한 명징한(?) 대비는 학술이론으로서의 논리적 완결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상당한 정서적인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이 저술이 선사한 망외(望外)의 선물은 저술이 탄생한 여건과 풍토이다. 저자는 해당 분야에서 이름이 꽤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른바 정통학계의 대가는 아니다. 한 학자의 학문적 지위가 그가 몸담고 있는 기관의 지위에 따라 부침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의 무게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저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시켜주는 역작이다. 마지막 사족 한마디. 원저와 번역본을 면밀하게 대조하지 않은 것은 평자의 안이함 못지않게 번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