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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테싸 모리스━스즈끼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묻는다』, 산처럼 2005
박유하 朴裕河
세종대 교수, 일문학 yuha@kornet.net
1990년대의 일본 민족주의는 ‘우경화바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그런 경향이 꼭 일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90년대 민족주의의 열풍은 냉전 이후의 전지구적 이동과 함께 ‘타자’와 ‘나’를 구분해줄 아이덴티티를 너도나도 ‘민족’에서 찾은 결과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형태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일본의 민족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군위안부문제에 그 계기가 있었다. 90년대초에 이루어진 위안부의 ‘증언’은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후 일본사회의 사상적 지형도는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역사(〓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다시 그려졌다.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누구나 위안부문제 혹은 위안부문제가 야기한 교과서문제에 언급하는 일로 역사(〓과거)에 대해 발언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일본사상계의 가장 큰 테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묻는다』(박광현 옮김)는 그러한 일본학계/사상계에서 영국출신 여성 역사가 테싸 모리스-스즈끼(Tessa Morris-Suzuki)가 ‘아이덴티티’와 ‘책임’의 상관관계에 관해 묻는 형태로 90년대 일본사회의 논쟁에 관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시하라 신따로오, 한국에도 소개된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의 저자 카또오 노리히로, 카또오에 대해 첨예한 비판을 펼친 타까하시 테쯔야, 그리고 서경식과 한나 아렌트 등을 언급하면서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역사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깊이있는 사유를 펼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일본’이 저지른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일본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내셔널 아이덴티티라는 개념 자체가 실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는 전제하에, 영국에서 태어났고 후에 호주 국적을 취득한 자신이 왜 과거 호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카또오가 말하는, ‘먼저 일본인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져야만 2천만 아시아인에 대한 애도가 가능하다’는 논리 등을 비판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유독 일본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외국인 혐오나 그 혐오를 지탱하는 민족주의가 실은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현대 호주 역시 민족주의에 기반한 외국인혐오가 팽배했고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애보리지니(Aborigine, 호주 원주민)에 대한 정복의 역사가 극복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저자의 지적은 지극히 설득적이다. 특히 미국 퇴역군인들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행한 전쟁범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호주에서도 과거 군인들이 행한 범죄가 논의되는 일은 없다는 설명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더욱 명료해진다. 민족적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과거가 존재한다면 치부에 관해서도 피하지 않고 사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아이덴티티의 허구성을 알게 된다면 실은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덴티티에 상관없이 그 책임에 대해 ‘함께’묻지 않는 한 그 땅 위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사후공범’일 수밖에 없고 과거의 증오와 폭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일이 과거와 다를 바 없는 현재와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저자의 위기감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전지구화되는 이 시대에 그렇게 과거에 직면하고 ‘책임’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비판적 상상력’—이 책의 원제는 ‘批判的想像力のために: グロ一バル化時代の日本(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지구화시대의 일본)’이다—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그러한 비판적 상상력에 기반한 지구적 연대를 가능하게 해줄 ‘네트워크’수립의 구체적 실현방식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국가씨스템을 지탱하는 우파들의 담론이 혐오감과 배척을 불러일으켜 필연적으로 전쟁을 부를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이기에, ‘평화를 위한 준비’로서 “신자유주의와 허무적 내셔널리즘에 대항”(25면)이 필요함을 말하는 저자의 주장은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적은 현재 일어나는 외국인배척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되는 다문화주의가 결코 자민족중심주의를 극복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또한 전지구화현상이 국경을 허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국가씨스템을 더욱 공고히한다는 지적도 귀담아들어야 할 부분이다. 다국적기업과 국민국가씨스템이 서로를 더욱 공고히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논의는 아니지만 지구화현상이 국경을 넘어선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식의 단순한 이해나 반대로 무조건 배척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담론의 장에서라면 저자의 논지는 한번쯤 음미될 필요가 있다. 다만 민주주의가 실은 근대국가에서의 ‘개인’이라는 개념 규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바로 그 부분이 민족주의를 떠받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번역서 제목을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묻는다’로 바꾸고 제목 중 ‘일본’을 붉은 글씨로 처리한 것은 책의 의도를 본의 아니게 배반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이 제목만 보면 ‘일본’이라는 지역의 아이덴티티에 관해 묻고 그런 사고를 만든 일본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저자가 ‘묻는’것은 결코 ‘일본’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일본을 붉은 이미지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표상의 주술에서 벗어나자는 것일 터이니 이 역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