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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12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이반장

이반장

1982년 인천 출생. 경희대 디지털콘텐츠학과 재학중. libanjang@gmail.com

 

 

 

화가전(畵家傳)

 

 

화가가 되다 만 친구를 한명 안다. 학창시절 친구다. 친구는 오랜 시간 화가를 꿈꿨다. 그에겐 오직 그뿐이었다. 당시로부터 반평생이라 느낄 만큼 세월이 지난 지금도, 친구는 오직 꿈만 꿀 뿐이다.

되다 만 화가란 건 그러니까 굉장히 미묘한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요?

 

친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다. 상대방은, 대개 이럴 경우 할 말을 잃는다. 유년에 잿빛으로 화한 채 뻗친 머리카락은 위압적이고, 조그마한 동공은 집요하다. 수척한 뺨은 움푹 꺼져 있다. 상대는 뜻하지 않게 폐부를 찔러버린 건 아닐까 싶은 죄책감에, 없는 칼을 쥔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친구는 그저 할 말이 없었을 뿐이란 걸.

되다 만 화가란 건,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와 다시 만난 때는, 눈 덮인 연말연시다. 퇴근길. 도심 복판을 걷고 있다.

눈이 내린다. 도시의 형형한 조명에 잠시 반짝인 눈은 금세 녹아 흩어지고 없다. 건물들은 파랗고 빨갛게, 노랗고 푸르게 달아오른 채 그들만의 축제를 벌인다. 전광판은 미소 짓고 확성기는 축복의 노랫말을 퍼뜨린다. 주머니에 두 손 푹 찔러넣고 찬 보도나 전전하는 나 따위 아무개가 낄 곳은 어디에도 없는, 그런 신명난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되다 만 짐승에 가까울 것이다. 몇년 전 아내가 말했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

 

아내는 딸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 다른 손에는 큼직한 여행가방을 들고 있다. 딸아이는 사탕이나 쪽쪽 빨며 아내와 나를 번갈아 살핀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딸아이에게 이리 오라 말한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내의 다리에 두 팔을 두른 채 찰싹 붙어버린다.

쾅.

현관문이 닫힌다. 그들이 사라진 현관을 한참 살핀다. 한결 넉넉해진 신발장을, 휑뎅그렁한 칫솔꽂이를 살펴본다. 그곳에 더는 아무 변화도 없으리라 확신한 순간, 배가 고프다. 부엌에 가서 라면을 하나 끓이고, 내친김에 하나 더 끓인다. 빈 라면봉지가 부엌 바닥에 다섯개쯤 나뒹굴고 부서진 계란 껍데기가 수채바닥을 뒤덮을 무렵, 배가 부른 나는 만족스럽다. 그러고는 식탁에 멀거니 앉은 채 두어시간쯤 펑펑 운다. 평생 그토록 울어본 기억이 없다. 어느덧 땅거미가 졌다. 한숨 돌린 나는 주섬주섬 봉지를 줍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부엌 창 한구석의 거미줄이 달빛에 뽀얗게 달아오르고, 밤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고백건대, 나는 짐승이 되고자 한 적이 없다. 그런지라 아내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짐승이 되고자 한 적이 없는데, 짐승도 못된다니. 난감한 일이다.

 

그렇게 연말연시, 진눈깨비 휘몰아치는 도시의 밤, 되다 만 짐승과 되다 만 화가가 마주친다.

“아!” 하고, 무심한 투로 친구가 감탄한다.

아! 하고, 받아치는 나 또한 어쩐지 그가 새삼스럽지 않다.

이런 게 필연일까. 기차역 앞, 친구는 화판틀을 몇개 세우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 그림을 팔고 있다. 시대의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이다. 하지만 결국 조잡스럽게 모사된 가짜에 불과한 것들이다. 되다 만 명화들이다. 하늘은 친구에게 때이르게 빛바랜 머리와 목석같은 얼굴, 가래 끓는 목소리 등의 자질을 주었지만, 아쉽게도 그림재주의 성은만은 베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의 얼굴은 수염 난 목탄 같다. 해진 외투는 개집 아래 깔려 있던 걸 훔쳐 입은 게 틀림없다. 하지만 잿빛 머리, 움푹 꺼진 두 뺨. 그는 내 친구가 틀림없다.

“아!” 친구가 다시 감탄한다.

아! 다시, 나 또한 받아친다.

친구가 내 양손을 덥석 잡는다. 순간 쭈뼛, 목덜미에 오한이 든다. 친구의 손가락 몇개가 휑하니 실종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는 이내 내게 안긴다. 친구의 몸은 깔짚처럼 푸석하다. 적어도 손가락 두개만큼 경량화된 그.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저 팔을 두른 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버겁다. 먼지투성이 옷 뒤에 감춘 거친 살갗과 병든 뼈가, 내 빳빳한 정장에 순간 생채기라도 낼 것만 같은 것이다. 점차 짙어가는 눈보라에 그의 그림들은 추적추적 검게 젖어간다.

 

한때 친구는, 지나치게 화가가 되다 만 나머지 고사할 지경에 이른 적이 있다. 학창시절은 물론 졸업 후 줄곧 그는 꿋꿋했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 앞에 내저은 고개는, 지구가 지난 긴 세월 자전한 횟수에 근접해갔다. 그 고개들이 일제히 돌아가는 광경이란, 휘유, 그저 곁에서 보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싱긋, 큼직한 목제 화구통에 담은 물감과 붓만을 살림 삼아, 친구는 거리를 전전했다. 그에겐 그밖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제 한몸과 화폭만 있으면 방긋, 온세상 만천하가 자기 것이었다. 하지만 극장 간판은 걸리는 족족 웃음거리가 되고, 시민회관과 여러 공공기관에 기증한 그림들은 다음날 새벽 공사장 화톳불로 승화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길거리 초상화 사업은……

……고객들의 심적 내상을 생각하면 손해배상청구나 들어오지 않은 게 다행일 게다.

친구는 퇴짜 맞은 극장 간판들을 모아다 뒷골목에 가건물을 하나 조립했다. 비바람이나 가려볼 심산이었다. 한데 뒷골목의 해방구를 전전하던 건 그만이 아니었다. 유기견과 길고양이들. 젖은 해초 같은 몰골의 그들도 그렇게, 친구의 가건물에 의탁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 벼룩과 빈대를 한마리 한마리 짓눌러 터뜨리며, 친구는 연신 밭은기침만 해댔다. 남은 물감이라 해봐야 손톱 아래 말라붙은 게 고작이고 붓은 모조리 빳빳하게 굳었다. 밤마다 누워 빙산처럼 몸을 말던 친구는 못 쓰는 붓을 몇개 꺾어다 작은 화톳불을 피웠다. 하지만 웬걸, 친구가 다가앉기도 전에 이미 그 주변은 개와 고양이 천지였다. 아무리 휘휘 내쫓아봐야 일제히 내민 손톱 발톱 그리고 이빨 앞에 친구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결국, 국가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한다. 어느날 역사(驛舍)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에게 두명의 군장교가 다가온다. 빳빳하게 제복을 두른 그들이 모자를 벗고는, 군은 여러분에게 그럭저럭 적절한 보수와 그런대로 괜찮은 주거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런 곳에서 삶을 버리지 말고 자기들과 함께 대의를 위해 힘쓰라 한다. 하지만 친구의 귓속을 파고든 건 단 두마디뿐.

그럭저럭. 그런대로.

친구는 그조차 자신에게 과분하다 생각한다. 계산해보니 십년쯤 몸담으면 평생 쓸 만큼의 최상급 물감을 색별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군침만 흘리던 세필도 자기 것이 되고, 오래전에 반토막 난 조색판도 참나무 재질로 새로 장만할 수 있을 테다. 친구의 입에 꿀꺽, 침이 고인다.

 

“뭐, 그렇게 생각했네.” 술잔을 마저 비우며, 친구가 말한다. 우적우적 배추를 씹는다. 연탄 위에 고기가 익어간다. 시커멓게 그은 석쇠는 젓가락만 대도 부서질 듯하다.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가게 안을 피해 우리는 고깃집 앞 노천 식탁에 앉았다. 가게 안은 호박빛 조명과 연탄불로 이글거리고 있다. 힐끗 보기만 해도 동공이 델 듯하다. 침침한 이곳과 환한 저곳 사이를 두꺼운 통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그 어떤 야단법석도 그것을 넘지 못한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들이, 뻥끗거리기만 하는 입들이, 흥청망청 쏟아내는 말과 다짐들이, 유리 위에 이슬로 맺혀 줄줄 흐를 뿐이다. 저곳과 이곳, 두 세계는 결코 화합하지 못할 것 같다. 침범이란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만 같다.

밖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친구가 수레를 멀리하기 꺼린 탓이다. 수레에는 화구와 화가, 화폭, 그림 등이 잔뜩 얹혀 있다. 눈 덮인 낡은 천 아래 말이다. 한때 그의 삶에는 화구통이 전부였듯, 지금은 수레뿐이었다. 그래서 우린 이곳, 눈 내리는 차가운 밤 속에 앉아 있다.

어디 배치받았다 했지?

“남쪽 바다. 포병대. 자주포 조종수. 시력은 또 좋아놔서.” 친구가 답한다. 엄지와 약지로만 쥔 술잔이 위태로이 떨린다. “경치 참 죽였는데. 눈 덮인 산. 계곡 사이로 구불구불한 빙하. 소나무 숲. 가끔 앞바다에 고래들도 지나가고 말이야. 거기서 본 것만 옮겨도 평생 그릴 거리는 충분했을 거야. 그 정도면 겨우 십년쯤이야, 하고 받아들일 만했네. 어떤 때는 아예 눌러앉아도 괜찮겠다 싶었어. 그런데 어느날, 고정 안된 탑승구 문이 손가락 위로 쿵.”

손가락은 찾았나?

“기동중이었어. 뒤따르던 자주포 궤도 아래 빨려 들어갔을 거야. 땅에 거름 준 셈 치지 뭐.”

그게 입대하고선?

“석달. 그뒤 즉각 의가사제대 처분.” 친구는 풉 하고 웃어 보인다.

어떻게 검지하고 중지만 그렇게 나가나.

“마법…… 인가 보지. 다 가져가버리긴 미안했던 거야.”

마법이라……

친구의 지난날들에만 머물던 화제는, 이윽고 궤도를 달리해 내게로 향한다. 하지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친구의 삶. 작품이 공사장 인부들을 위해 따스한 불꽃을 피우고, 퇴짜 맞은 극장 간판이 떠돌이 개나 고양이들에게 비바람막이가 되어주고, 그의 두 손가락이 세상에 아직 마법이 있음을 증명해주는 동안 나 따위……

……관두자.

결과적으로 짐승만 되다 말았을 뿐이다. 뭐라 해봤자 변명이고 자기기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림에선 아주 손 뗀 건가?” 친구가 묻는다.

무슨 소리야?

“그림.”

나? 내가 그런 걸 했단 말이지?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만은 남으리라 생각했어. 근데 왜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거지? 자네가 있지 않고.”

잠시 고민한다. 아주 옛적에 가슴 깊이 침전한 게, 잠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뻐끔뻐끔, 간신히 몇차례 숨만 넘기고 다시 가라앉는다. 그렇게 그것은, 목숨만 부지할 뿐이다.

마법인가 보지. 내가 답한다.

 

밤이 깊어간다. 가게 안도 제법 비었다. 바스스, 연탄들이 꺼져간다. 침묵의 무게는 가게 앞에 쌓인 빈 술병궤짝의 수에 비례한다. 한때 가게 안에 북적대던 말들이 허공을 맴돈다. 갈 길을 잃은 채, 환풍구 속으로 소리 없이 빨려들어간다. 그 말들, 다짐들은, 전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 머물 곳이나 있는 걸까?

“왜 그러나? 울어?” 고개를 들자 친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니. 눈에 먼지가.

“그러고 보니 연탄불이 다됐어. 재가 풀풀 날리네.”

순간, 창백한 연탄이 폭삭 주저앉는다.

여기 더 있을 거야?

“어디 딴 데 갈 데 있나?”

도시의 빛이 차츰 죽어간다. 신명난 축제도 끝나고, 몇몇 전등만이 피로하게 점멸할 뿐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한때 가게 안에 북적대던 말들, 다짐들, 그들과 함께인 걸까. 거리에는 검게 녹아내린 눈과 구겨진 휴짓조각, 부서진 병조각뿐이다. 친구와 내 입김뿐이다.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을까.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에 친구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주인할머니가 다가와 연탄을 간다. 버석한 얼굴의 주름 틈틈이 피로가 비어져나올 듯하다. 숨결은 거칠다. 하지만 연탄재 한톨 흘리지 않는다. 입에서 얼결에 탄성이 나온다.

“뭘 감탄씩이나.” 내 탄복에, 주인할머니가 우물거린다. “그저 나만큼 오래 갈아봐.”

“할머니. 그래도 안될 사람은 안되기 마련이던데요.” 친구가 말한다.

“해보긴 한 거야?”

친구는 아무 대답도 않는다. 고깃점만 깨작깨작 입에 넣을 뿐.

“알아서들 시켜. 불 갈았으니 달아날 생각 말고.”

잠시 후, 생고기 한접시가 또 식탁에 놓인다. 친구는 그 전부를 석쇠 위에 쏟는다.

그러면 잘 안 익어. 내가 말한다.

친구는 한참동안 헝클어진 고기만 뒤적이다가 말한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자네 손가락만 빼면.

“자네 꿈도 마찬가지 아닌가.”

술을 넘긴다. 모래를 삼킨 듯 입 안이 서걱거린다.

옛날 그대로라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지만, 만약 예전의 나란 사람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은 거라면, 더더욱 견디기 힘들어했을 거야.

“언제쯤 견딜 만해질까? 솔직히, 내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되다 만 짐승의 얘기 해줄까?

“아니.”

되다 만 화가는?

“됐어.”

묘비에 새길 말은 생겨 다행이지 않나. ‘그들, 되다 말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다. 우리들이 내버린 지난 세월을 곱절씩 담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길고 어색한 침묵이. 하지만 그 침묵이 들어올려지자, 친구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연탄불 때문일까, 식탁 위의 전등 때문일까,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뜻 모를 명멸이 스친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먼 곳을 보고 있다. 나 따위는 결코 가늠할 없는, 아니, 세상 누구도 범접 불가능하게 머나먼 그런 곳을, 지금 이 순간, 감지한 게다. 나는 그러한 눈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확신한다. 순간, 가슴 벌렁벌렁, 뭔가가 용솟음친다.

“우리, 어디 가지 않을래?” 친구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거야. 우리들이 지금껏 가본 곳 중 가장 먼 데까지.”

뭐?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돼. 밤이 아닌가. 게다가 연말. 한창 마법이 충만할 시간이지.”

뭘 타고?

“생각이 있어. 자, 이거 들어봐.”

친구는 석쇠를 집어든다. 손잡이를 내게 내민다. 내가 그걸 받자, 자신은 두 손으로 땅을 짚는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위로 꺾는다. 유기견이나 다름없는 행색이다.

“자, 그걸 그대로 내 입안에 쏟아. 석쇠는 삽, 고기는 석탄인 거야.”

친구가 입을 벌린다. 그 속의 어둠은 폐쇄된 우물 안의 것보다도 더 맑고 깊다. 혀가 불꽃처럼 날름거린다. 석쇠는 제법 뜨겁다. 나는 꿈쩍도 않는다.

“괜찮아. 이제 나는 기차. 원하는 누구든 여기서 가장 먼 데로 실어다 날라주는 기차. 그리고 자네는 기관사. 기관사라면 마땅히 기차에 땔감을 채워야지 않겠어?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게.”

속는 셈?

“그렇지. 속는 셈.”

나는 에라이, 친구의 입 안에다 고기를 쏟는다. 자글자글, 고기가 친구의 입안에 쏟아진다. 그런데 어라, 단 한점도 옆으로 새지 않는다. 눈을 활짝 뜨니 친구의 입은 넓다. 내 한몸 담가도 될 만큼 광막한 어둠, 아니, 우주가 거기 있다. 그 복판에서 나는 본다. 마치 태양처럼, 작게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은 주변으로 별가루처럼 아스러진다. 어둠의 경계를 따라 나선형으로 번지며 내게 온다. 급기야 두 눈이 화끈거려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한판 더!” 친구가 외친다. 칙칙, 그의 양쪽 귀에서 연기가 솟는다. 두 눈이 번쩍인다.

어? 어?

“할머니! 할머니! 여기 고기 한판 더!”

“뭐? 밖에 갑자기들 웬 소란이야?” 가게 안에서 손님 시중을 들던 주인 할머니가 외친다. “뭔 고기를 달라는지 얘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아무거나, 아무거나. 아무튼 한판 더!”

그러자 곧 고기가 한판, 다시 연탄 위에 익어간다. 계산대 뒤로 돌아간 주인할머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들의 법석을 살핀다.

“제길, 익는 데 너무 시간이 걸려.” 친구가 툴툴댄다. “이래선 힘이 안 붙는단 말이야.”

어쩌지? 그냥 생으로……

“아냐. 아냐. 탈 나.” 친구가 기겁한다. “어쩔 수 없지. 할머니! 식탁마다 고기 한판씩 전부 올려주십쇼! 이번에도 역시 아무거나!”

그러자 곧 주인할머니는 식은 연탄들을 모조리 갈기 시작한다. 나는 그 위에다 되는대로 고기를 올린다. 친구는 여전히 땅을 짚고 무릎을 꿇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귀에서 솟던 연기가 차츰 잦아든다. 얼굴을 타고 줄줄 식은땀이 흐른다. 주인할머니는 뭣 하는 짓들인지 에그그 혀를 차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눈에는 순간 뜻 모를 명멸이 스쳐지난다. 가게 안에 몇 안 남은 손님들이 일제히 우리를 주목한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고기 익는 속도만은 평상시 그대로다. 자글거리며 핏물이 오르지만, 여전히 날것 그대로다.

“아, 안되겠어.” 친구가 신음한다. “이러다간 또 여기 주저앉게 될 거야. 제길. 지금이 아니면 안된단 말이야! 이젠 기차마저 되다 마는 건가!”

조금만 버텨봐!

식탁 위에 남은 반찬들을 모아 친구의 입에다 턴다. 술을 병째 쏟아붓는다. 하지만 잦아드는 불꽃을 타오르게 하기에는 무리다.

“이걸로 끝인가.” 친구가 한탄한다.

그 순간, 손님들이 몇명 다가온다.

“저 저기, 괜찮다면 이것도……” 자신들이 굽던 고기를 한판 내민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예? 아, 이게 대체……”

“이리도 애쓰시는 모습을 보니, 뭔가 거들어야겠다 싶었어요. 오랜만이네요. 이런 열기.”

손님들은 고깃집 안을 두루 살핀다. 얼굴에는 흐뭇함이 선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힘내세요.”

손님들이 팔을 걷어붙인다. 식당 가득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는다. 차마 손쓰지 못해 타지 않을까 염려되던 고기. 하지만 이젠 안심할 수 있다. 모두 알맞게 구워진다. 냄새가 너무 진해 눈물마저 괸다. 한때 세상 어디선가 소돼지의 형상으로 살아 숨쉬던 고기. 평생 풍선처럼 부푼 채 축사 안에서 비비적거린 그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한껏 생명을 불사르는 그들의 합창에는 실로 삶이 넘쳐난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친구는 어느덧 제법 기차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손과 발에 바퀴가 쥐어진다. 견고한 지지대가 바퀴와 바퀴 사이를 잇는다. 추레한 외투 위로 철옹성처럼 강판이 결박된다.

그리고 나는 본다.

친구의 입에서 본 것과 같은 별가루가 술집의 환풍구로부터 아스라이 휘몰아쳐 나오는 것을. 그들이 술집 허공에 오색찬연하게 흐드러지며 모두를 휘어 감고 친구의 입 안에 스미는 것을. 그에 친구의 불꽃은 더욱 신명나게 타오른다. 말들, 다짐들이다. 지난 세월, 술집에 내버려진 다짐들이 지금 이 순간 제 살 길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이를 전연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언급하고자 입을 뗀다. 스스로의 귀에조차 선할 만큼, 내 목소리는 들떠 있다.

이, 이봐. 지금 우리들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음? 뭐야 뭐야, 대체 뭔 일인데?” 친구가 답한다. “기차 되기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뭔 할 ㅁ”

그 순간, 별가루의 맥이 끊긴다. 동시에 친구의 눈과 입, 콧구멍에서 불꽃이 뻥 터진다. 하늘 높이 소용돌이친다. 인접한 가로수가 활활 타버린다. 가로등의 전구가 터져버린다. 밤하늘 속에 산개한 불똥이 마치 반딧불처럼 눈부시다. 온 하늘을 밝히며 은하수처럼 번진다.

“굉장한데!” 친구가 탄성을 내지른다.

“고기 다됐어요!” 때마침, 손님들이 외친다. 그들이 길게 대열을 이루어 내게로 고기를 한판씩 나른다. 나는 건네받는 즉시 친구의 입에 쏟아붓는다.

철컹 철컹, 친구의 기차화는 탄력을 받는다. 이제 제법 기차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한때 귀가 있던 자리의 찌글찌글한 굴뚝에서 칙칙 연기가 솟는다. 뽀얀 증기가 거리에 자욱이 깔린다.

“이봐!” 친구가 부른다.

왜, 뭐 더 필요해?

“아니. 출발할 때가 된 것 같아. 어여 타라고!”

나는 뒤돌아본다. 어느덧 고깃집 문가에 주인할머니와 손님들이 모여 있다. 내가 말한다.

아, 계산은……

“됐어.” 주인할머니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갔다와서 뭘 봤는지만 똑똑히 말해줘. 나도 댁들 같은 손님은 처음이라. 어여 가.”

“아 맞다!” 친구가 말한다. “수레를 좀 뒤에 연결해주겠나?”

수레는 그럴싸하게 친구의 뒤꽁무니에 장착된다. 마치 처음부터 그리 설계되었다는 듯.

친구의 등에 올라탄다. 그러고는 멀어지는 고깃집 주인할머니와 손님들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칙칙폭폭. 친구와 나는 밤을 달린다.

텅 빈 차도와 휑한 인도를 망설임 없이 달린다. 힘찬 질주에 도시의 첨예한 경계가 완만히 누그러진다. 서로 냉담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원색 조명들이 하나로 녹아든다. 차가운 겨울밤을 온몸으로 받아친다. 입가에 맺힌 침조차 얼어붙는다. 여전히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봐! 내가 외친다.

“왜?” 친구가 답한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그게 중요해?”

나는 아무 답도 않는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설령 있었더라도, 그 말은 지금 우리들에게서 한참 멀어진 뒤일 거다. 그만큼 친구의 속도는 압도적이다. 도심 한복판을, 방금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기차를 타고 질주하는 경험 앞에 한낱 사람의 말이란, 한없이 옹색할 뿐이다. 오늘밤은 달리는 친구와 그 위에 앉은 나, 우리 둘만의 세상이다. 승차감이 썩 좋지는 않다. 친구는 손바닥을 대면 찰싹 달라붙을 만큼 얼어붙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 어떤 말도, 색도, 소리도, 지금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생명을 표현하지는 못할 게다. 쿨쩍거리는 내 코처럼, 모든 게 달싹거리고 있다.

“어디로 갈까?” 친구가 묻는다.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가보자고 하지 않았어?

“한번 가면 다신 못 돌아올지도 몰라. 그전에 들르고 싶은 곳 없어?”

글쎄. 나 따위에게 이곳에 대한 미련이 있을 리가……

“가족은 어쩌고? 작별인사쯤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침묵한다. 흙을 한움큼 문 듯,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친구가 말을 잇는다.

“그럼 잠깐 여기저기 돌아다녀보자고.”

뭐하러?

기적소리와 함께, 친구는 한차례 크게 증기를 뿜는다. 그러고는 말한다.

“아주 오래전 언젠가, 깨달았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세상에는 작은 차이 하나 없었으리라는 걸.”

그래도 난 아마 자네가 그리웠을 거야.

“고맙네. 하지만 그리움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리고 바로 그게 문제였어. 아무리 그려대봤자, 결국 내게는 세상에다 하고 싶은 말이 한마디도 없었던 거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게 당연해.”

자네한테는 그래도 꿈이 있지 않나.

친구는 김빠진 웃음을 내보인다.

“꿈만으로 해결되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지. 이 도시 어딘가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걸세. 그들도 함께 데려갔으면 싶어. 한번도 보지 못한 놀라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평생 가고 싶었지만 결코 발을 들일 수 없었던, 그런 놀라운 곳들로 데려다주고 싶어. 오늘밤이 아마 내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드네.”

전부 태울 수 있겠나? 저 조막만한 수레에.

“까짓거, 늘리면 되지.”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친구의 허름한 수레는 그럴싸한 객실차로 바뀌었다. 분명 흉내에 불과한, 나무판자와 강판을 조잡하게 엮어 치덕치덕 물감을 바른 추물이었지만, 그 견고함에만은 거짓이 없어 보였다. 분명 그 누구든 정중히 받들어줄 것이다.

“어이, 안 추워?” 친구가 말한다. “기관실에 내려와 있지그래?”

그러자 곧, 친구의 심장이 코앞에 환히 타오른다. 기관실은 따스하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지난 모든 겨울이 단숨에 녹아내릴 만큼.

아무튼 그렇게, 칙칙폭폭, 친구와 나는 밤을 달린다.

 

첫번째 손님이 이영차, 기차에 올라탄다.

여학생이다. 방금 그녀는 느닷없이 하늘에서 추락했다. 기차가 멈추고, 보도 위에 등을 대고 누운 그녀에게 다가간다. 쪼개진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갈라진 포석 틈새를 꽃빛으로 물들인다. 나를 향해 눈을 홉뜬다. 흰자위는 이미 붉게 충혈되었다. 온몸에 힘을 뺀 채, 그 옆에 똑같이 누워본다. 포석은 차갑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휘황한 도시의 밤뿐이다. 나는 바로 위에 높이 솟은 세모꼴 건물을 가리킨다.

저기서 떨어진 거예요?

여학생이 볼멘소리로 대답한다.

“아 왜 또? 아저씬 뭐예요. 가만 좀 죽게 냅둬요. 하여튼 다들 하나같이…… 지겨워 죽겠어 정말.”

뭐가 그리 지겨우세요?

그러자 여학생은 두 눈 끔뻑끔뻑, 정면을 직시한다. 뭔가를 곱씹듯 입만 쭈뼛, 오물거린다.

저희와 함께 가요. 혹시 지금 어디 가고 싶은 데나,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여학생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상체를 일으킨다. 나는 혁대를 풀어 여학생의 쪼개진 머리를 꽉 조인다. 흘러내린 피와 쏟아진 뇌수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여학생의 머리는 그럴듯하게 결박되었다. 그때, 손수건을 댄 채 아야야 작게 신음하던 여학생이 내 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와. 아저씨 그 손 뭐예요, 완전 털투성이.”

얼씨구. 그의 말대로다. 손등이 어느덧 구불구불한 갈색 털로 덮여 있는 게 아닌가. 이러니저러니, 놀랄 일들로 가득한 밤이다.

 

두번째 손님이 이영차, 기차에 올라탄다.

어스름한 골목길 초입. 잠옷 차림의 할머니는 집 앞 현관 발치에 앉아 있다. 다소곳이 웅크린 채,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손에는 편지가 꼭 쥐여 있다. 봉투는 바람결에 저만치 날려가 녹아내린 눈 속에서 검게 젖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할머니 또한 봉투와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리라. 내가 다가가자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본다. 얼굴에 낙서 같던 주름들이 순간 진해진다. 그대로 왈칵, 눈물을 쏟는다. 막 자궁을 벗어난 신생아도 아마 그보다 더 목놓을 수는 없을 게다. 옆에 앉은 나도 덩달아 울음이 터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할머니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구겨진 편지를 반으로 찢어 팽 하고 코를 푼다. 남은 조각을 내게 건넨다. 나 역시 거기다 힘껏 코를 푼다. 그러고는 할머니에게 묻는다.

“할머니. 혹시 어디 가고 싶으셨던 데나, 꼭 한번 보고 싶으셨던 것 있으세요?”

할머니는 대꾸 없이 두 눈 휘둥그레 뜨고 나를 응시한다. 그러더니 자신의 이를 가리킨다.

“젊은이, 여기, 왜 그래?”

나는 입가에 손을 갖다댄다. 그랬더니 웬걸 맙소사, 엄지손가락만한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비집고 돌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셀 수 없이 많은 손님들이 이영차, 기차에 올라탄다.

집이 한채 부서지고 있다. 망치와 지렛대, 그리고 톱과 삽을 든 인부들이 허물고 있다. 문이 나가떨어지고 채광창이 앞뜰에 우수수 추락한다. 쿵쿵, 벽에 분화구가 팬다. 굴뚝이 우지끈 기울고, 잿빛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지붕이 주저앉는다. 그 앞에 무릎 꿇은 채 오열하는 땅딸보 아저씨가 있다. 윗옷 앞섶은 뜯어지고 얼굴에는 피멍이 들었다. 어찌나 심하게 땅바닥을 굴렀는지, 그가 걸친 것은 옷이 아니라 마치 길바닥 그 자체 같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한줄기 피가 눈시울에 고인다. 앞의 난장을 향해 목청껏 절규한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힘없이 묻힌다. 그의 뜻이 전해지기에는, 그 앞에 펼쳐지는 일들의 규모가 너무나도 크다. 한 개인이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도 거든다. 아저씨 옆에 선 채, 함께 절규한다.

그러자 아저씨는 절규를 멈춘 채,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턱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주먹에는 그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렸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뭐야 이 개새낀 씨발!”

아저씨는 내 위에 걸터앉고 재차 주먹을 내지른다. 반대쪽 뺨을 향해 튕기는 어금니를 느끼며, 달이 머리 위에 떨어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잠시 고민해본다. 아저씨는 그의 가슴을 잠식한 울분을 남김없이 터뜨린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센지, 집을 허물던 손들이 하나둘 멈추고 우리를 주목한다. 먼지가 차츰 가라앉는다. 뽀얗게 분진을 뒤집어쓴 인부들이 어리둥절한 채 한발 한발 다가온다. 아저씨의 새된 절규가 이어진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글쎄,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이 순간 내게 말이 가능했더라면 변명이라도 해보였을 게다.

인부들이 아저씨를 뜯어말린다. 이제 아저씨의 입을 벗어나는 소리는 한낱 사람의 말로는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아저씨가 다시, 주먹을 내지른다. 그 한방은 지금껏 잘 피해가던 내 돌출된 송곳니를 향한다. 아저씨는 주먹을 움켜쥔 채 뒤로 나가떨어진다. 엉망으로 까진 주먹은 피로 얼룩졌다. 아저씨는 주먹을 꼭 쥔 채 통곡한다. 얼굴에 말라붙은 피가 녹아 흐른다. 근처에 서 있던 인부들이 머쓱해하며 침묵한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널브러진 내가 삐거덕, 상체를 일으킨다.

“여러분. 혹시 지금, 아님 평생, 가고 싶으셨던 데나…… 꼭 한번 보고 싶으셨던 게 있다면…… 모두 함께…… 지금, 가시겠어요?”

아저씨는 눈물을 훔치며 나를 흘깃거린다. 그러더니 두 눈이 동그래진다.

“다…… 당신 그 귀는 대체……”

그러자 인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내 귀? 나는 손을 갖다댄다. 그러자,

얼씨구.

 

칙칙폭폭.

기차가 되어버린 화가와 되다 만 짐승이, 모든 게 지겨운 여학생과 서글픈 할머니가, 절망한 아저씨와 고달픈 인부들이 밤을 가른다. 밤은 깊고 해돋이는 요원하기만 하다. 도시의 푸른 적막 속으로, 다시 굵은 눈발이 흩날린다. 기차 안의 모두가 침묵한다. 칙칙폭폭, 친구의 힘찬 기차 박동을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 어쩐지 배가 고프다.

“뭐들 드시겠어요?” 차내 방송으로 친구가 묻는다. “원하는 걸 말씀들 해보세요. 갈 길 머니까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할 겁니다.”

하나둘, 승객들의 말문이 트인다. 작게 수군거리며, 뭘 주문할지 고민이 오간다. 각기 다른 삶과 출발점과 목적지들이 그렇게 뒤엉켜 각자의 음색을 섞어 들려주는 화음이란, 묘하게 벅찬 구석이 있다. 어쩐지 내 가슴 한구석만 빈 것 같은 기분에 침울해진다. 나도 모르게 갸우뚱, 고개가 기운다. 기관실로 돌아간다.

불은 어때? 친구에게 묻는다.

“충분해. 아까 대차게 시동 걸어줬으니 조금씩만 보충해주면 될 거야. 얼굴 괜찮나?”

“어. 내 몸이 이렇게나 단단한지 오늘 처음 알게 됐지.”

“내가 보기엔 평소 몸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자네 엉덩이……”

그래. 꼬리라네.

 

눈 덮인 길모퉁이. 기차가 잠시 멈춰선다. 때맞춰 자전거에 닭튀김 몇상자를 얹고 배달부가 도착한다. 금빛 가로등불 아래 배달부는 입을 헤 벌린 채 기차를 쳐다본다. 지갑을 꺼내들고 그에게 다가간다. 새벽을 달리느라 배달부는 파리하게 지쳤다. 앳된 얼굴에는 그가 거쳐온 세월에 비해 과도한 피로가 얼어붙었다.

“와. 아저씨 기차 좀 짱인데요?” 배달부가 감탄한다. “뭐하는 거예요?”

어디에 뭘 좀 배달중이었답니다.

“물건이 뭔데요?”

“사람요.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것을 향해, 누구든 무료로 배달해드리고 있죠.”

내 말에 배달부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본다. 그의 눈동자에 익숙한 명멸이 감지된다. 오늘 이 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동자에 스친, 바로 그 명멸이다. 배달부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한대 피우실래요?” 배달부가 묻는다.

한대 건네받는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한모금 깊이 들이마신다. 잠시 어질, 다리가 휘청인다. 밭은기침이 연신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평생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으니까. 배달부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기차에서 그윽한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의 발에 꽁초가 밟힐 때쯤, 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기다란 잿더미로 변할 때쯤, 배달부가 입을 연다.

“저 좀 배달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제 맘에 없는 것들 배달만 하는 것도, 씨, 지겹네요. 저도 좀 어디론가 배달되고 싶어요.”

그렇게, 몇번째인지 모를 손님이 이영차, 기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그는 막 기차에 올라타기 직전,

“아 아저씨, 그 늑대탈 좀 짱인데요?” 하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나는 살며시, 그 늑대탈이란 걸 주억거려본다.

 

손님들이 올라탄다. 객차가 하나둘 늘어간다. 손님들은 왁자지껄 떠들거나 조용히 창밖을 내다본다. 그렇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이란 그러니까, 휘유, 진땀나는 것이다.

영감 잃은 예술가도. 만년 구릿빛 상패 운동선수도. 방향치 모험가도. 뒷골목 사창가 진열장 아가씨도. 약 없어 진땀나는 중독자도. 허리 부러진 손수레 할머니도. 다리 아래 강물 내다보던 빚쟁이도. 수전증 측량사도. 기도암 성악가도. 천애고아 변기 속 신생아도. 고소공포증 등반가도. 막 상경한 분홍치마 아가씨도. 막 귀농한 고수머리 총각도. 땅 잃은 투기꾼도. 앙꼬 잃은 찐빵도. 길 잃은 개나 고양이도 모두 모여 밤을 달린다.

한참 도심을 질주하던 기차는 이내 외곽에 근접한다. 하늘을 향해 촘촘하던 건축물들이 성글어진다. 허물어진 옛 건물들을 비집고 수목이 어지러이 뻗쳐 있다. 조명이 차츰 뜸해진다. 타성에 물들었던 밤하늘은 서서히 본연의 어둠을 되찾아간다. 전방에 도시가 활짝 젖혀지고, 대신 광막한 들판이 펼쳐진다. 친구가 나를 부른다.

“이봐. 이 이상 탔다간 버티질 못할 거야. 곧 여길 벗어날 텐데, 자네 정말 이대로 갈 건가?”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이대로 말없이 떠날 셈인가?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한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직도 내가 왜 홀로 남겨졌는지 모르겠어. 그런 주제에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어.

“하지만 다시 기회는 없다고.”

나는 설레설레 고개만 젓는다.

“나를 위해서도 안되겠나?”

자네?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먼 옛날, 내게 이 꿈을 떠맡긴 건 자네였어. 빚 갚는 셈 치게.”

그랬나?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내 맘대로 떠맡아가버렸으니까. 자네 역시 본인도 모르게 떠넘겨버렸으니까.”

미안.

“사과할 건 없어. 말했잖나. 내 멋대로 가져가버린걸. 그리고 난 후회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을 봐. 난 이 많은 사람들이 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줄 거야. 삶에 그보다 더 멋진 게 또 있을까? 게다가 말일세, 그들은 이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나 또한 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걸세.”

너무 고상한데. 자네치고는.

“그러게 물려받은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나온다.

다음 역이 어디쯤이지?

 

역사의 승강장은 창백하게 죽어 있다. 한발 내딛기만 해도 허물어질 듯하다. 내부 광장의 유리지붕은 폭삭 주저앉은 지 오래다. 벽면은 담쟁이와 이끼가 잠식했다. 기둥들은 철근만 남긴 채 앙상하다. 비바람과 시간을 알몸으로 견딘 인고의 세월, 도시 변방의 역사는 이제 무너질 날이 멀지 않았다. 텅 빈 역사에 터벅터벅 내 발소리가 울리자, 그가 지금까지 버틴 건 순전히 나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문득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활짝 열린 지붕을 타고 달빛이 여과 없이 스민다. 그리고 그 복판에, 내가 한때 아내 그리고 딸아이라 불렀던 그들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왜 여기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엉거주춤 서 있다. 이윽고 아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럴 만도 하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본 나는 짐승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먼저 입을 뗀 건 나다.

오랜만이에요.

내 말에 일순간 가늘어진 아내의 눈은, 곧이어 환히 달빛을 머금더니 동그랗게 커진다. 그가 피식 웃어 보인다.

누군가 했더니…… 정말, 오랜만이네요.

딸아이는 경계하며 아내의 다리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어린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잘 지냈어요? 아내에게 묻는다.

내 말에 아내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건 당신보단 제가 할 말 같은데요?

아내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덩치도 산만해지고, 털도 복슬복슬하고, 발톱도 길고, 와, 이빨 한번 크네요. 꼬리는 또 어떻고…… 정말, 몇년 못 본 사이에 한마리 훌륭한 짐승이 다 됐어요.

나는 멋쩍게 미소만 지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아내가 주위를 살핀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냥 어느덧 여기더라고요.

마법이에요.

마법요?

예. 오늘밤, 그런 밤인 모양이에요. 봐요. 달도 유난히 커 보이지 않아요?

나를 따라 아내도 고개를 젖힌다. 딸아이도 함께다. 달이 크게 불거졌다. 사람들이 그 위에다 날린 꿈의 파편 하나하나 육안으로 선명히 보일 만큼. 잠깐의 침묵 뒤에 아내가 말한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어느 순간 당신은 박제가 됐죠.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딱딱하게 멈춰버렸어요. 보기 괴로웠어요. 기억하세요? 한때 당신에겐, 그 누구보다 더, 저 달보다도 더 눈부신 활기가 깃들어 있었죠. 그랬던 게 언젠가부터…… 한참 고민했어요. 나하고 아이 탓일까, 아님 내가 모르는 다른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아무 결론도 내릴 수 없었어요. 그러자 더 견딜 수 없게 됐어요. 중요한 건 그대로 있다간 당신한테나 나한테나, 무엇보다 이 아이한테, 결코 유익하지 않았으리라는 거죠.

그게…… 제가 혼자가 된 이유인가요?

여전히 뻔뻔해요. 그런 걸 묻다니.

미안해요. 아직 왜 그리될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 결론도 못 내리고 있어요.

솔직히 저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개의치 마요.

사실 그래서, 이렇게 만나도 되나 많이 망설였어요. 마지막 기회거든요. 떠날 계획이에요.

어디로 가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아주아주 먼 곳이에요. 두번 다시 못 돌아올지 몰라요.

아내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살짝 고개만 끄덕인다. 아내의 다리 아래 붙어 있던 딸아이는 어느새 내 발치에 와 있다. 살랑대는 긴 꼬리로 줄을 넘는다. 축 늘어져 구불구불한 털을 요리조리 다채롭게 묶어본다. 단단한 발톱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바닥을 두드린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본다. 아이의 맑디맑은 눈동자. 그 속에 샛노란 눈을 한 짐승이 보인다. 나는 무릎을 구부린다. 허리를 앞으로 푹 숙인다. 비죽 튀어나온 주둥이 앞에 아이의 얼굴이 바짝 와 닿는다. 아이의 여린 머리카락이 내 거친 숨결에 흐트러진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는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누군데?

늑대아저씨!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손을 내민다. 아이의 손은 내 손톱 하나를 겨우 쥔다. 살살, 위아래로 흔든다.

멀리서 친구가 기적을 울린다. 나는 아내를 올려다본다.

가요. 아내가 말한다. 부디 당신의 삶을 찾길 빌게요.

늑대아저씨 안녕. 아이가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네. 아내가 답한다.

지금 당신에겐, 꿈이 있나요?

아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게 바짝 다가온다. 딸아이의 손을 꼭 붙든다. 아내가 싱긋 웃어 보인다.

오늘처럼 타인의 일을 궁금해 한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가벼이 미소만 돌려준다. 아내가 말을 잇는다.

그러는 당신은요? 당신의 꿈은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시나요?

사람들을, 꿈을 배달중이에요. 내가 대답했다.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것을 향해, 누구든 무료로 배달해주고 있죠.

그러자 아내가 내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는다.

그럼, 저도 잘 부탁할게요.

나도! 딸아이도 덩달아 외친다.

딸아이가 내민 손에는 막대사탕이 하나 쥐어졌다. 나는 사탕을 받아 입에 넣는다. 사탕은 내 이빨 사이에 낄 정도밖에 안된다. 하지만 그 맛은 세상 무엇보다 선명하다.

눈을 꾹 감는다.

그리고 사탕이 다 녹을 무렵 눈을 뜨니, 어느덧 친구가 다시 달리고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지른다. 나는 기관실 복판에 가만히 서 있다.

“얘기는 잘 됐나?” 친구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땠나?”

달았네. 눈물 날 만큼.

 

칙칙폭폭, 밤을 달린다. 꿈의 대물림과 환희, 그리고 마법의 밤이다. 하늘에는 어느덧 두개의 달이 떠 있다. 하나만으로는 그토록 숱하게 쏘아올린 꿈들을 떠안기 벅찼던 걸까. 바다가 가깝다. 증기기관의 박동을 넘어 파도소리가 푸르게 밀려온다. 친구는 굽이굽이 해안선을 따라 달린다. 백사장은 눈이 시리게 투명하다. 별빛 촘촘한 밤하늘과 두개의 달이 바다에 고스란히 비친다. 저 멀리서 바다와 하늘, 그 두개의 우주가 물마루에 이르러 하나로 포개진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때?” 친구가 말한다.

 

기차는 백사장 곁에 정차한다. 승객들이 우르르 내린다. 다들 입을 벌리고 자신들 앞의 절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친구 곁에 앉는다.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한다. 후회와 자책의 시간들. 환희와 흥분의 시간들. 절망과 분노의 시간들. 황금빛 순간들. 검푸른 순간들. 그 모든 시간이 응집된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들의 지난 시간이 응집된 지금의 그들을 바라본다. 그 모든 시간들이 서로 부딪치고 스치는 지금 이 순간을 느낀다.

“우린…… 지금 대체 어디 와 있는 걸까?” 친구에게 묻는다.

“어디긴. 우리들은 물론,” 친구가 답한다. “저기 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본 곳 중 가장 먼 데에 있지.”

“그거 멋진데.”

친구는 아무 대답도 않는다. 그렇게 둘 사이에 살포시 침묵이 들어앉는다. 그러다 친구는 피로한 한숨과 함께, 예고 없이 입을 뗀다. 뜻밖의 말들이 흐른다.

“……그리고 난 이제 여기까지.”

어? 그게 무슨……

“말 그대로네. 지쳤어. 더는 나아갈 기력이 없네. 너무 오랜 세월을 허송세월해버렸어. 하지만 정말……” 친구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거야. 아무렴. 주위를 둘러보게. 정말 멋지지 않나? 내가, 되다 만 화가 따위가, 이보다 더 뭘 바라겠나. 고맙네. 마지막 밤에 이렇게 함께 해줘서. 내 삶에 다시 의미를 찾아줘서.”

잠깐. 어이, 그런 게 어디……

“받아주겠나?”

뭘?

친구의 시선이 백사장을 거니는 승객들을 향한다.

“저들, 그리고 나도. 비록 나는 여기서 멈추더라도, 자네는 더 멀리 나아가는 거야.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걸세.”

갑자기 왜 그래? 그런 게 나 혼자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혼자라니! 저 앞을 보게. 지금 우리들과 함께한 저들을 보게. 그간 그들의 눈에서 보지 못했나? 오늘밤 자네가 나와 함께했듯, 저들 중 또 누군가 자네와 함께하리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자네 기력이 다하는 날, 그 누군가가 또 모두를 견인해주리라는 걸. 또 누군가. 또 누군가. 그렇게 세상 모든 꿈들이 명맥을 이어가는 게 아니겠나. 지금 내가 자네에게 가듯, 자네 또한, 그리고 결국 모두가 그렇게 영원 속에 메아리치는 게 아니겠나.”

하. 그 꿈, 너무 고상한데. 자네치고는.

“그러게…… 물려받은 거라 하지 않았나. 이제 본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뿐일세.”

입에서 작게, 탄식이 터진다.

다들 하나같이…… 이러니저러니, 부담되는군그래.

 

고맙네.

 

어, 뭐라고 했나?

하지만 친구는 아무 대답도 없다. 힘차게 대지를 가르던 기차는 어느덧 잿빛으로 화석화되어 있다. 곳곳에 칠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붉게 부식된 속살이 듬성듬성 쓰리게 드러난다. 기우듬하게 틀어진 굴뚝은 더이상 아무것도 내뿜지 않는다. 고고히 바닷바람만 맞을 뿐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쓴웃음이 나온다.

너무 무책임한데.

친구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없다.

좋아. 받아주지.

멀리서 승객들이 나를 부른다. 손을 흔들고 입을 모아 외치고 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친구에게서 객실차가 분리된다.

 

그리고 칙칙폭폭. 밤을 달린다.

 

한때, 화가가 되다 만 친구를 한명 알았다.

학창시절 친구였다. 친구는 오랜 시간 화가를 꿈꿨다.

 

손과 발에 바퀴가 쥐여진다. 견고한 지지대가 그들 사이를 잇는다.

 

평생, 친구에게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꿈은, 다른 모든 꿈과 함께 고스란히, 내 안에 박동하고 있다.

 

추레한 가죽 위로 철옹성처럼 강판이 결박된다.

 

되다 만 화가란 건, 그러니까 굉장히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묻곤 했다.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요?

친구와 마찬가지로, 한때 나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멀거니 상대의 두 눈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되묻지 않을까.

그곳에 복작복작, 뭐가 보이느냐고.

 

칙칙폭폭.

 

모두, 달리고 있지 않느냐고.

그 속의 나, 그리고 당신 또한, 달리고 있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