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연수

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등이 있음. larvatus@netian.com

 

 

 

장편연재 4 (마지막회)

바다 쪽으로 세 걸음

 

 

19

 

“술에 취한 일본 무사들에게 그 칼을 자랑할 생각인가요?”

“사무라이들 앞에서 칼을 자랑할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아. 잘 알잖아.”

“당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천성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건 멍청함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멍청함과는 완전히 다른, 천성의 문제. 초희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조선인 키리시딴이었을 테고, 그가 읽은 건 나가사끼의 쎄미나리오 시절에 우리가 인쇄한 판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 조선인에게 맹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일본에서 예수를 믿게 된 다른 조선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초희 역시 그 교리강독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겠지.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내게 단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건 오직 여자들에 대한 욕정의 발로였으리라. 어쨌든 그 이야기에서 허망한 약속만 믿고 전갈을 태워 강을 건너가던 개구리는 침에 찔려 죽는다. 자신은 죄없이 선량하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니, 거기까지는 우화랄 것도 없다. 우화는 자기 역시 죽을 줄 알면서도 전갈이 독침으로 개구리를 찌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강을 건너가고 싶다면 그 누구도 믿지 말고 혼자서 건너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오래된 우화.

“걱정하지 마. 내 천성은 온유해. 늘 죽은 자들에게는 친절했거든. 술을 마시다가 부음을 전해들은 것뿐이야. 일본에 사시던 형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네.”

“당신에게 형님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일본에. 어떻게 돌아가신 건가요? 형님이라면 아직 돌아가실 나이는 아닌데.”

“사흘 동안 불에 탔다네. 그래서 완전히 숯이 된 줄 알았는데 다시 그 불에서 나와 세 걸음을 걸어갔다고 하네. 바다 쪽으로. 이따가 뭐, 제사라도 지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뭐 기도 같은 것이라도?”

“뭐라도 좋아요. 아무래도 괜찮아요.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어요.”

“밥… 밥… 밥… 밥을 지어야만 할 것 같은데. 일단은 저 일본 손님들을 재우고 나서.”

밥이라고 말하는 순간, 어떤 쾨쾨한 냄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종류의 냄새는 도대체 내 속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볕이 잘 들지 않던 어두운 그 방의 냄새. 다음날 아침이 됐을 때, 내 몸에서는 열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형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형은 눈을 뜬 채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귀뺨으로 흘러내렸다. 그건 성모님이 한 말 때문에 나온 눈물이었다. 내가 전갈이라면 형은 개구리 같은 사람이랄까. 형의 유일한 장점(과유불급이니 한 인간의 장점은 언제나 단점과 통해 있었다)은 허망한 말들을 쉽게 신뢰한다는 점이었다. 빗물처럼 귓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꿈결의 말이든, 화강암을 파낸 듯 한자 한자 무겁게 적어간 경전의 준엄한 구절이든 형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성모님의 말은 형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고나 할까. 그때까지도 형은 역모의 누명을 씌워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고 마르내의 그 집으로 돌아가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병으로 죽지 않으리라는 것은 희소식이었으나,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가게 되리라는 건 그 모든 희망을 저녁구름처럼 흩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늦든 빠르든 언제나 형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지나칠 정도로 그 운명에 맞서고 난 뒤에야 겨우.

형에 비하면 나는 사람의 말 같은 건 쉽게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몸 바깥의 어떤 거대한 실체, 예를 들어 교리나 역사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건 혀로 맛볼 수 있는 맛과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는 물체와 코로 느낄 수 있는 냄새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감각의 원천들. 그러므로 그 죽음의 방에서 기어나가 밥을 짓고 그 설익은 밥을 손으로 누르고 또 뭉쳐서, 마다하는 형의 입에 부득불 넣어준 사람은 나였다. 겨울,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은 고드름을 만질 때보다 더 차가웠고, 설익은 밥은 모래보다 더 까칠하게 씹혔다. 하지만 형은 애써 그 밥을 맛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압도적인 슬픔을 맛보고 있었다.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이제는 원래 형의 내부에 존재했던 것인지 어딘가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막대한 슬픔. 사람은 아프면 죽고, 슬프면 죽고, 괴로우면 죽고, 늙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형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외롭고 무서워졌다. 나는 처마 밑에서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곽의원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슬픔을 앗아갔으니 원망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니 적어도 나는 슬퍼서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나날이 형의 몸은 가을나무처럼 앙상하게 말라갔다.

며칠이 지나자, 형은 차가운 물을 한사발 들이켜더니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핼쑥했으나 형의 몸은 적당히 식어 있었다.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돌림병으로 귀신들이나 사는 곳이 된 그 마을을 떠나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형은 구덩이를 파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에 쓰려고 구덩이를 파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형은 죽은 자가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악취 나는 이불을 친친 감고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형은 신중하게 구덩이를 팔 장소를 골랐다. 얼마나 신중했느냐면 마땅한 자리를 고르는 데만 이틀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마치 나라를 세울 땅을 고르던 고구려의 주몽처럼 말이다. 집집마다 광을 뒤져 마른장작과 괭이를 찾아 짊어지고 형이 마침내 선택한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형은 활을 무척 잘 쏘았다던 옛 아이 고주몽에 대한 얘기를 내게 들려줬다. 형에게는 일부러 살을 빼면서 남몰래 기른 명마도 없었고 엄수(淹水)를 함께 건너갈 세 동무도 없었다. 대신에 형에게는 매끼 뜨거운 밥을 해주는 동생이 있었고, 또 괭잇날이 무뎌질 때까지 얼어붙은 땅을 파고 또 팔 수 있는, 거의 미치광이의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끈기가 있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죽이려던 적들을 피해 졸본까지 도망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의 나이가 열두살이라고 했던가? 그때 구덩이를 파던 형의 나이는 겨우 열살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놀랍다. 여기 말라카, 검은 살갗의 아이들처럼 뙤약볕도 마다하지 않고 종일 장난치고 놀면서 친구들과 울고 웃는 일 말고 열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보면 열살이었을 때, 우리는 어른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일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그 새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때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가르쳐줄 것이다. 부리가 검고 온몸이 까만 새들.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동안 여러차례 눈이 내렸는지, 또 그 눈송이들이 녹아내리는 일 없이 모두 착하게 쌓여가기만 했는지 오래전에 내린 눈 위에 다시 새로운 눈이 차곡차곡 떨어져 들판이 온통 하沍다. 그 새하얀 들판 위에 주근깨처럼 까마귀들이 앉아서 우리를 쳐다봤다. 열살 정도의 어린이들이라면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는지 우리가 걸어가는데도 그저 몇걸음 위치만 옮길 뿐, 날아갈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짊어지고 온 장작을 탑처럼 쌓은 뒤, 놋그릇에 담아온 불씨를 가운데 넣고 불을 피우는 광경을 까마귀들은 물끄러미 지켜봤다. 꺼질 듯 말 듯, 붙을 듯 말 듯, 우리가 번갈아 후후 입김을 불어대자 불씨가 간신히 나무에 옮겨 붙었다. 형이 불붙은 장작을 들고 흔들어대자 몇마리가 까악까악 소리를 내면서 날아갔다. 이윽고 다른 까마귀들도 두서없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날아가지 않고 계속 우리를 지켜보는 녀석도 있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구나. 같은 까마귀지만 주몽의 새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형이 말했다. 나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웃었다. 내 평생 그처럼 우스운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는 듯이. 그 말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형이 다시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주몽의 새는 어떤데?”

“태양에 사는, 다리가 셋인 새지. 몇백년에 한번씩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은 뒤에 다시 젊은 새로 태어나.”

그 말을 하는 형의 표정에 나는 정말 희망을 품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말했다.

“그럼, 형, 구덩이는 파지 말자. 차라리 여기다 나라를 세우자. 난 포기할 테니, 형이 임금님 해. 주몽처럼. 찾아보면, 이 근처에 다리 세개인 까마귀도 어디 있을 거야. 내가 잡아올게.”

내 의견에 대한 형의 대답은 돌멩이였다. 형은 날아가지 않고 들판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던 마지막 까마귀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 까마귀는 날개를 펄럭이더니, 나는 새를 어떻게 돌로 맞히겠느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바라보다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형이 거듭 채근하는 바람에 나 역시 까마귀에게 돌을 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졌는데, 내가 던진 돌은 까마귀를 맞혔다. 다리가 꺾이는가 싶더니 날개를 펄럭이며 그 새는 날카롭게 울어댔다. 화가 난 까마귀가 갑자기 우리를 공격할까봐 겁이 났지만, 그 새는 날아가지도, 우리를 향해 달려들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은 그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 나도 따라서 침을 뱉었다. 우스운 이야기, 그러니까 오합지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때 나는 그게 진짜 우스운 이야기였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진짜 우스운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였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나? 보지 못한 눈들이 잔뜩 쌓였네.”

형이 몇번 땅을 찍었더니 괭이 끝에서 얼음 같은 게 하얗게 튀었다.

“달이 다시 차올랐으니까 한 보름 정도.”

“그새 눈이 몇번이나 내린 모양이네. 층층이, 내린 날짜가 다른 눈들이야.”

“응. 요 며칠 처마에서 눈 내리는 거 몇번 지켜봤어. 난 형이 그냥 죽는 줄 알았어.”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눈을 파보던 형이 내 쪽을 돌아봤다.

“난 안 죽어. 우리 안 죽는다고 그때 그 부인이 말했잖아.”

“그럼 구덩이는 나중에 파자.”

“파고 싶어서 파는 게 아니야.”

“파고 싶어서 파는 게 아니면? 누가 파라고 해?”

“응. 아버지가. 밤마다 아버지를 봤어.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극락에 계셔. 극락에서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사이가 안 좋다니 걱정이야. 내게 구덩이를 파라고 말한 건 아버지야.”

나는 형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매일 밤 형의 곁에서 잠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꿈에 나온 아버지가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에 왈(曰), 범동알자(凡同挖者)는 덕업상권(德業相勸)이라’고, 즉 ‘남전 여씨의 향약에 가로되, 모두 같이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덕행과 학업을 서로 권면한다’라고 읊조리기까지 했다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구름 한점 없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명절에 식구들과 함께 친척집에 놀러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들 가는데 나 혼자 마르내 그 큰 집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시선을 돌려 형을 바라봤다. 더러운 이불을 친친 감고 선 형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형. 그럼 파자.”

그날부터 당장 우리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형이 괭이로 뒤집은 흙을 내가 삽으로 떠냈다. 그러는 동안, 내 입에서는 ‘남전여씨향약에 왈,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는 노랫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노래하는 걸 들은 형은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나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었으랴. 사나흘 뒤에 우리가 어떻게 되든 그 순간 형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너무나 기뻤다. 우리가 일하는 걸 더 바라보기가 지루했던지 계속 앉아 있던 까마귀가 마침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그 발이 혹시 세개가 아닐까 싶어서 나는 날아가는 까마귀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삼족오(三足烏)일 리는 없었다. 대신에 그냥 까만색인 줄 알았던 까마귀의 몸통은 깊숙한 곳에 보랏빛을 품은 검은색이었다. 얼마간 구덩이를 파고 있으려니까 그 까마귀가 날아갔던 다른 까마귀들을 데리고 와 다시 우리 주위에 새카맣게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형도 까마귀떼를 쫓지 않았다. 우리는 까마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덩이를 파내려갔다.

그렇게 이틀 동안 꼬박 땅을 파고 나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구덩이는 우리 두 형제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고도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밤에 나는 형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혼자서 일어나 어두운 길을 걸어서 우리가 파낸 구덩이까지 찾아갔다. 그나마 보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나는 까마귀들도 없는 들판에서 낮 동안 우리가 파낸 흙으로 구덩이를 다시 메웠다. 스스로 죽을 구덩이를 파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밤에 혼자서 그 구덩이를 메우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내 목덜미를 챌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도 나는 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나절 분량의 흙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 덜덜덜 떨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고개를 들고 달만 쳐다봤다. 달로 날아가서 그 하얀 달의 얼굴에 눈동자를 두개 그려놓는다면, 밤길도 무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눈이 달려 있어서 항상 달이 어둠속의 우리를 지켜본다면.

그 다음날, 다행히도 형은 구덩이가 다시 흙으로 메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날 나는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최대한 천천히 일했건만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자 다시 두 사람은 충분히 눕고도 남을 만큼 구덩이를 팔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나를 향해 뭔가 얘기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 밤에는 구름이 많아 달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달빛이 있거나 말거나 나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며 구덩이까지 찾아갔다. 그날 나는 구덩이를 흙으로 다 메울 작정이었다. 일단 흙무더기를 찾아낸 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으로 더듬더듬 구덩이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그만 나는 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떨어지면서 왼손으로 바닥을 잘못 짚었더니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끙끙대며 몸을 돌린 뒤, 한참 누워 있었다. 그렇게 있자니 구덩이의 둘레를 따라 둥글게 잘린 하늘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달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어젯밤에도 네가 흙으로 메웠구나.”

심장이 뱃속으로 똑 떨어지는 줄 알았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서 쳐다보니 그건 형이었다. 나는 덕행과 학업을 서로 권면하기 싫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날 천하의 불효자로 여긴대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하자마자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형 같은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살아남아서 반드시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다. 삼도천을 건너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형이라고도 말했다. 요컨대 나는 죽기 싫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게 뭔가? 이게 다 무슨 짓인가? 내 웃음소리에 화답하듯이 멀리 앞산에서도 여러명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돌림병으로 죽은 해골들이 턱이 빠진 채 웃는 소리였겠지. 형은 그쪽을 한번 바라본 뒤에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형이 말했다.

“네가 뭘 오해하는 모양인데, 이건 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묻을 구덩이야.”

 

 

20

 

여기까지가 우스운 이야기의 전말이다. 부모님을 여읜 열살과 일곱살 형제가 담가(擔架)에 시체를 싣고 구덩이를 향해 걸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보다 더 우스운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도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가서 구경할 것 같다. 그때 나는 그게 흙이든 시체든, 어쨌든 그 구덩이를 메울 수만 있다면 우리가 거기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일을 했지만, 형은 나보다 더 오묘한 의도로 그 일을 했다. 도대체 왜 우리와 아무 상관없이 죽은 시체들을 우리가 땅에 묻어줘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형은 마음의 눈으로 먼 미래의 몸들을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형의 행동은 늘 기상천외였고 그 동기를 물어보면 더 황당무계한 경우가 많아서, 내가 자꾸 물어보는 게 귀찮아서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건 아닐까 가끔 의심이 들기까지 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열병으로 쓰러져 있는 동안, 형은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갔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병으로 생사를 넘나들 때 나도 경험한 것이니까(하지만 두 눈으로 봤다고 해서 나는 그걸 모두 믿거나 말로 떠들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 둘만 남은 뒤로 언제나 마음껏 미치는 사람은 형이었고, 나는 항상 현실적인 문제만 생각해야 했다) 담대하게 듣고 넘겼지만, 그다음의 이야기는 그냥 듣고 있기가 좀 민망했다. 꿈에서 형은 지금까지 지나간 모든 시간과 아직 세상에 오지 않은 모든 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간 뒤(그러니까 삼족오라면 수만번 불고기가 됐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의 몸, 우리에게 허락된 수만개의 육신이 모두 불에 타버린 뒤의 몸, 그러니까 고통과 병 없이 완전무결한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봤다고 했다. 오직 사랑으로만 충만한 몸. 형의 이야기에서 가장 귀가 솔깃했던 건 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더이상 스스로에게 수치심이 없어 옷을 입지 않은 채 벌거벗고 산다는 부분이었다.

“여자들도?”

“당연하지. 극락에서는 더이상 분별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 곳이 극락일 줄이야. 솔잎노인이나 아버지가 극락의 풍속을 얼마나 한탄하면서 사실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여자의 몸에 대한 호기심으로 끓어넘치는 소년 완은 마땅히 극락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봐야 현실은 시궁창 같은 곳이고, 나는 시체가 든 담가를 구덩이까지 나르는 일곱살 신세였다. 그 사람들은 죽어서 다들 벌거벗고 사는 멋진 곳을 향해서 출발했는지 몰라도 이 세상에 살 때의 흉한 꼴이며 악취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형은 불쌍하게 죽은 그 사람들을 땅에 묻는 선행을 하면 극락에 가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라면 극락에 조금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그따위 악취는 두번 다시 맡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땐 잘 몰랐지만, 살아보니 한 남자의 인생에서 벌거벗은 여자의 몸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더라. 나는 대부분의 여자들이(어머니와 할머니가 벌거벗은 채 서로 싸우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분별있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안 그래도 동구 밖의 움막 속에 있던 시체 다섯구는 반라 상태였다. 그중 네구는 머리를 땋은 열살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겨울이라 부패되지 않은 탓에 금방이라도 시체들이 벌떡 일어날 것 같았지만, 광목을 둘둘 감아서 담가로 옮길 때 만져보면 잘 구운 숯처럼 물기가 빠져 사지가 뻣뻣했다. 대부분 뜨거운 열병에 시달리다가 말라죽었기 때문이었다.

세구째의 시체를 옮기다가 늘 내가 의식하던 거대한 눈동자는 기실 다른 사람의 것임을 깨닫게 됐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마을 뒷산 언덕배기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한쪽은 덩치가 산만한데다 턱에 수염을 기르고 있어 잿빛 승복과 염주와 목탁만 아니라면 산적이라고 해도 무방했고, 다른 쪽은 인광처럼 반짝이는 파리한 얼굴빛에 마른 손가락을 움직이는 자태가 고와 누가 봐도 반할 만한 젊은 여자였다. 젊은 여자는 몰라도 산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쪽은 돌림병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이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너희들은 이미 그 병을 앓았니?”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큰아이는 꼭 문병온 문수보살을 대하는 유마 같구나. (뭐야? 그건 자신이 문수보살쯤이라도 된다는 얘기잖아!) 세상의 병을 앓고 있네. 너희들은 시체가 무섭지도 않으냐?”

“우린 죽지 않는다고 했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를 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유마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겠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 스님이 너희의 운세를 들려주마. 오늘밤에는 동이 틀 때까지 눈을 붙이지 않는 게 좋겠구나. 이런 시대에 아이로 태어나서 죽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걸 보니 너희는 꼭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걸음 뒤에 서 있던 파리한 얼굴의 여자가 우리에게 물었다.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부적을 만들어줄까?”

형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부적이 없어도 벌어질 일은 어차피 벌어지게 돼 있다고. 가소로운 생각이다.”

“필요없다. 대신에 유마라는 사람이 문병온 문수보살을 어떻게 대했는지 말해봐라.”

솔잎노인에게서 배운 대로 상대가 중이니까 형은 하대했다. 산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쪽은 싫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형을 쳐다봤다.

“문수보살이 이렇게 물었지. 거사시여, 그대의 집이 이렇게 텅 비어 있는데 가족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자 유마가 답했다. 문수보살이시여, 불국토는 원래 텅 비어 있습니다. 뭐, 그런 이야기다.”

“도대체 왜 텅 비어 있다는 말이냐?”

“원래 비어 있는 것이니 비어 있다는 소리다.”

“원래 비어 있는 것이라면 어찌 그게 비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원래 있던 것이어야 비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도대체 왜 텅 비어 있다는 말이냐?”

그가 뭐라고 대답해도 형의 꿋꿋한 하대는 계속됐다. 우리가 동구 밖의 움막 속에 든 시체들을 옮겨서 구덩이에 파묻은 그 다음날 새벽, 그 아이들이 찾아왔다. 처음에 나는 자기들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버린 것에 화가 난 귀신들이 우리도 데려가려고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네명이었으니까 구덩이 속에 파묻힌 아이들이 차가운 흙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고 해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귀신이라면 우리의 손을 묶을 리도, 또 씩씩거리며 내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토할 정도로 힘들어할 리도 없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오줌을 싸고 말았다. 바지로 뜨거운 오줌이 줄줄 흘러내리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다가 나는 정신을 잃었다.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더니만…… 글쎄, 그 시체들이 글을 읽거나 문자를 새길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도 헛수고였다. 그러므로 그게 내 유언이라면 유언이랄까.

그게 유언이라면 내 첫번째 유언이겠다. 유언에도 첫번째가 있고 두번째가 있느냐고 시비 걸 사람도 있겠으나, 이건 삼수갑산을 넘어가는 인생도 아니고 나처럼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다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 흔들어 깨워 정신을 차려보니 거긴 (제기랄!) 도화분(桃花粉) 냄새가 가득한 절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에는 저고리를 차려입은 여자애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벌거벗고 있었다면, 드디어 마르내의 효자 완이 죽어서 극락에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극락이라기에는 다들 표정들이 어두웠다. 여자애들 앞에는 얼굴이 검고 눈이 큰 남자가 채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형보다 한 서너살 정도 많아 보였는데, 그 얼굴이 어딘지 그림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거기는 법왕사(法王寺)란 절로 겨울 동안 아흐내패(九川牌)에서 기예를 펼칠 삐리들을 교육시키는 근거지였다. 아흐내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접시를 돌리고 땅재주도 넘으며 또 줄타기도 하는 연희집단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양반들의 허가가 떨어지면 자정 가까운 깊은 밤, 횃불 아래에서 연희를 펼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서리가 내리면 뿔뿔이 흩어져 겨울을 넘겼다. 하지만 대부분이 고아인 삐리들은 갈 곳이 없는데다가 기술을 더 익혀야 했으므로 꼭두쇠와 함께 법왕사에서 지냈다.

우리가 납치됐을 때는 곰뱅이쇠인 작숭이가 상좌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아가 되어 유랑하다가 살판에 뛰어들게 됐건, 곡식 몇섬에 팔려가 외줄을 타게 됐건 연희패에 들어가 막 기예를 익히게 된 소년들을 그쪽에서는 삐리라고 불렀다. 어느 패거리에 속하든 삐리들에게 꼭두쇠 다음으로 힘이 센 곰뱅이쇠의 별명이 작숭이라고 말하면 다들 그 인간의 치골을 절구에 빻아 마실 정도로 치를 떨 게 분명했다. 연희패 사이에서 작숭이는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은어였으니까. 처음 아흐내패에 들어가게 되면 삐리들은 그에게서 작숭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래서 별명이 된 것이다. 빨아라 잉. 뭘요? 뭐긴 뭐여, 작숭이제. 뽁이 달렸으까이. 그래서 나이 어린 삐리들까지 대놓고 작숭이라고 부르는데도 그 인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돼지상에다 모착한 몸집이라 산등성이까지 끌고 가서 발로 걷어차면 들판까지는 족히 굴러갈 만하게 생긴 꼴인데다 수치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작숭이니 계집애들이 있는 앞에서 우리에게 여자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사실 오줌으로 아랫도리가 다 젖어버린 나는 작숭이가 입던 옷이라도 좋으니 갈아입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허생원의 집에서 황급히 도망치면서 상민의 옷으로 변복한 뒤로는 옷을 벗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한달 남짓 유랑하는 사이에 우리 옷은 걸레로 쓰지 못할 정도로 더러워졌다. 그러나 문자깨나 배운 사람이라서 그런지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계집애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란 말이냐?”

연희패들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다고는 하나, 그런 상황에서 형의 하대는 참 꿋꿋하고도 꿋꿋했다.

“시방 니 저울(눈)로는 이 아그들이 여자동(여자)으로 뵈냐?”

작숭이의 지시를 받은 삐리들이 달려드는데도 완강하게 버티던 형은 결국 삐리들 앞에 앉아 있던 벅구잽이 두란에게 채질을 매섭게 당한 뒤에야 여자옷을 입게 됐다. 두란은 아흐내패의 꼭두쇠인 석뫼가 여진의 땅에 들어갔을 때 데려온 아이라고들 했다. 눈빛이 형형해서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고 여겼는데, 석뫼가 사람 보는 눈은 남달랐는지 두란은 한번 들은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외워버리는 비상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두란을 봤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이국적인 생김새에 비해서 조선말을 너무나 잘했기 때문이었다. 두란은 불과 여섯달 만에 조선땅을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조선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석뫼는 재능이 많은 두란을 무척이나 아꼈다. 몇번만 들으면 불경을 욀 줄 아는 아이니 굳은살만 두세번 잡히면 천치의 자식이라도 두들길 수 있는 채질보다는 중으로 키워서 굿판에 내보내는 편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석뫼에게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숨겨진 재능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다. 그러니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우리 형제에게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겠지. 맞다. 석뫼는 그날 저녁에 우리가 납치당할 액운을 만나리라고 예언했던, 그 산적이라고 여겨도 무방한 중이었다. 다른쪽은 석뫼의 암동모, 그러니까 (오, 주여 용서하소서) 아내랄까, 뭐 그런 존재인 얼른쇠 영노였다. 석뫼는 돈을 받고 돌림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처리할 때, 우리 형제를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는 건 이제 어엿한 돈벌이 수단으로 발전한 셈이었다.) 하긴 관아에서는 열명 이상의 사람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을 소개(疏開)하고 집들을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돌림병에 대처하고 있었으니까 그즈음에는 두고 온 시체를 장사지내지 못해서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를 만날 때 석뫼와 영노는 비나리를 하러 여주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그들의 실질적인 목적은 고사상에 올려놓는 푼돈이나 챙기는 것보다 더 원대했다. 그들은 대개 지나가던 중을 가장해서 미리 수집한 정보로 점을 치면서 지주의 안주인들에게 환심을 사며 접근해, 다가올 액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경험한 대로 예언한 액운을 실제로 만드는 것)으로 혼을 빼놓은 뒤, 그녀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다음에 무대 뒤편에서 석뫼가 줄만 당기면 마나님들은 석뫼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왜 석뫼보다 더 잔인한 인간을 만나지 못했겠는가. 잔인한 것으로 치자면 사흘에 걸쳐서 사람을 서서히 불태워 죽이는 박해자들이 더하면 더했다. 하지만 그들도 석뫼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박해자들에게는 사교(邪敎)로부터 바꾸후(幕府)를 지킨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석뫼에게는 욕정을 채우겠다고 밤마다 삐리들에게 달려드는 작숭이만큼의 당위성도 찾을 수 없었는데도 부잣집 마나님을 겁탈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에 서슴없었다. 돈 때문이라고 해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본원적인 죄책감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을 석뫼는 버젓이 했다. 그것도 『유마경』이나 『화엄경』 따위를 중얼대며 말이다. 석뫼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 증오심뿐이었다. 양반들을 향한 증오심. 조선의 전쟁은 그 이듬해 봄, 칠백여척의 일본배가 동래 앞바다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제비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던 그해 이월에서 삼월 사이, 병에 걸려 죽거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삐리들의 빈자리를 채울 요량으로 줄타기나 땅재주를 가르치려는 작숭이와 두란에게 번번이 하대하며 맞선 형은 채질을 당한 뒤 반죽음의 상태로 광에 갇히곤 했다. 일년 만에 다시 봄은 찾아왔고, 산과 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꽃이 피었건만, 우리 형제는 일년 전 마르내의 규와 완이 아니었다. 여자옷을 입히고 도화분을 바르니 그야말로 뭇사내들에게 월장(越牆)을 강요하는 미색이라는 칭찬을 들은 나는 늘 여장하고 다니는 영노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다른 삐리들은 감히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지도 못하는 얼른 기술을 그에게서 배웠다. 얼른이라는 건 말과 행동으로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조차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요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른꾼이 되면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 더 생긴다고들 했다. 본격적으로 기예를 배운 지 한달 만에 나는 석뫼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칼로 내 배를 찌르는 기술을 선보였다. 창자 깊숙한 곳까지 칼날을 넣었다가 다시 빼내도 내 배에는 상처는커녕 피 한방울 보이지 않았다. 영노는 모든 게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 칼날이 들어가면 내 창자가 끊어지고 핏줄이 터진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그때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칼날을 빼내는 순간, 내 몸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내 표정과 동작에서 다 드러난다고 영노는 말했다. 사람들은 내 표정과 동작에 속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영노는 말했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칼로 배를 찌를 때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 영노는 밤마다 품고 잘 정도로 나를 아꼈다. 그게 어쩌면 두란을 늘 곁에 두는 석뫼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내가 그를 거의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야 알게 됐다. 그즈음, 내가 영노에게 가장 배우고 싶었던 얼른은 벽을 뚫고 지나가는 기술이었다. 밤이면 영노의 이불에서 몰래 빠져나와 광 앞에 서서 나는 내가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과거에도 똑같았고 미래에도 똑같은, 그러므로 기억도 없고 감정도 없는 사물들은 내 표정과 동작에 절대로 속지 않았다. 광의 벽은 내가 들어갈 만큼 틈을 벌려주지도, 마음이 약해서 단숨에 무너져내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힘껏, 내 몸을 벽에다 밀어붙였다. 그해 봄이 시작되고 또 겨울나무들이 꽃나무들로 바뀌고, 거기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봉수대의 불빛을 찾고 또 찾고, 그럼에도 그저 보이는 것은 어두운 하늘에서 더 어두워진 하늘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던 밤들 사이사이 형과 나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벽 바깥에서, 그리고 형은 벽 안쪽에서.

 

 

21

 

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남자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다. 뽀르뚜갈에서 신기료장수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호르헤가 만약 장남이어서 그의 형처럼 가업을 물려받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귀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왼손으로 그 고린내 나는 발을 잡고 치수를 재고 있을 호르헤를 상상하면 즐겁기 그지없다. 그런 꼴로 살아갔다면 말할 때마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코 옆의 팔자수염은 비천함의 상징이었을 테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 비열한 성품은 마을 사람들의 질시의 대상이 됐을 것이니 그 신발가게는 몇해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서는 먹고살 방법이 없어 희망봉을 돌아가는 검은 배에 올라타고 거친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호르헤의 그 속내를 알기 힘들게 생겨먹은 외모나 위기의 순간에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빠른 판단력은 더없이 남자다운 것으로 칭송받았다.

전쟁과 같은 고난이 어떤 남자들을 위대한 사기꾼으로 만든다는 건 석뫼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랑하며 매춘으로 살아가는 걸립패 사당의 아들로 근본도 모른 채 길에서 비천하게 태어난 석뫼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여주의 한 지주댁 자제를 독살한 혐의로 관아에 쫓기는 신세였다. 부잣집 마나님들 앞에서 석뫼가 떠들어댄 예언이 모두 들어맞기까지 남모르게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이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영노는 그간 석뫼가 자신의 예언을 실현시켜 부인들을 꼭두각시로 삼기 위해 극약을 먹여서 죽인 아이들의 수만 해도 다섯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는 법왕사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에 일년 연희 계획을 작성하던 작숭이의 의견을 좇아, 작년엔 관서로 올라갔다가 가을에 뜻하지 않은 한해(寒害)로 고생했으니 이번에는 영남으로 내려가자며 사람을 보내 머물 곳 등을 알아보는 등 희망에 부풀어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관기의 몸종에게서 관원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사실을 미리 전해들은 석뫼는 두란과 영노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고, 덕분에 형과 나도 그들과 함께 법왕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장 운수가 나빴던 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아침까지 한 삐리를 끼고 자다가 관원들에게 석뫼로 오인 받아 육모방망이에 머리가 깨진 작숭이였다. 이로써 아흐내패는 완전히 흩어지고 말았다.

막 가열이 되어 일년 동안 관서의 낯선 고을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얼른을 선보이는 일에 큰 재미를 느끼던 나는 아흐내패의 해산이 너무나 아쉬웠다. 한가지 기예를 완전히 익혀 놀이판에서 재주를 부릴 자격을 갖추는 가열이 되면 원칙상 더이상 여장을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여전히 나는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무표정한 얼굴로 얼른판에 올랐다. 사람들은 얼른 재주를 큰 멍석 위에서 펼치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진짜 재주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이뤄졌다. 자시가 넘은 깊은 밤, 수많은 감정이 명멸하는 얼굴로 손에서 꽃을 피우고 새를 날리다가 사람들이 완전히 내 표정과 동작에 빠져들었다는 확신이 들면 하얀 재를 허공으로 날려 죽은 자들의 환영을 불러냈는데, 어느 지방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든 그 순간에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가난과 노동과 불행에 지친 농부들과 하인들이 만들어내는, 그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야릇한 탄성을 듣는 게 나는 그렇게 좋았다. 그들은 내가 피운 연기에서 저마다 보고 싶은, 죽은 이의 얼굴을 봤다. 그러므로 그 탄성은 누구든 이제 더이상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나는 그 탄성에 위로를 받았다.

내가 횃불 불빛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리는 검은 얼굴들이 자아내는 탄성에 위로를 받았다면, 형은 두란이 가르쳐준 염불을 외는 것으로 그 힘들었던 시절을 넘기고 있었다. 어떤 매질로도 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작숭이와 두란은 상것들처럼(꿋꿋하게 그들에게 하대하며 형이 반복한 말들이 이제는 그들에게도 먹혀든 것이다) 땅재주를 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머리를 깎고 북수가 되는 건 어떻겠느냐고 형을 설득했다.

“지금 나더러 부모도, 형제도 모르는 중이 되라는 말이냐?”

형이 말했다.

“네게는 원래 부모도 없었고 형제도 없었다. 원래 부모와 형제가 없었다면, 너도 없는 것인데 네가 어떻게 중이 되겠는가.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인생들에겐 성가신 것이니 머리를 깎으라는 얘기고, 밥값은 해야 하니까 북이라도 두들기라는 소리지.”

두란이 말했다.

“좋다. 그럼 나도 여간 성가시지 않으니 머리는 깎겠다.”

한참 만에 형이 말했다. 숫돌에 잘 간 칼로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낸 뒤에 형은 곧바로 북채를 잡았다. 자존심 강하던 형이 머리를 깎고 북채를 쥐게 된 건 우리 형제의 사연을 알게 된 두란이 광으로 찾아가 형에게 마치 바람의 노래처럼 덧없는, 하지만 그때의 형에게는 더없이 중요했던, 화엄경의 구절들을 들려줬기 때문이었다. 두란은 말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조선인에게 살육당했다. 나 역시 두 눈을 불로 지지고 창자를 꺼내 잘라내는 고통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때 이렇게 나는 들었다. 두란이 말한 구절은 문수보살이 마음의 본성은 하나인데 왜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부분이었다. 그 물음에 각수보살은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것은 자성(自性)을 갖지 아니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다 해도 체득할 수 없다는 것, 마치 큰 불은 타올라 잠시도 쉬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불꽃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모든 건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눈과 귀와 혀와 몸과 마음 등은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괴로움도 받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런 말들이 형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각자 나름대로, 나는 얼른 기술을 통해 모두에게는 저마다 고통이 하나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형은 화엄경의 문장을 들으며 실재하는 고통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표정과 동작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또 어둠 속에서 북을 치면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일년을 보냈다.

하지만 석뫼가 관원들에게 쫓기면서 그 완전히 새로운 일년도 모두 끝나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석뫼를 따라 작숭이가 미리 수소문해둔 전라도 장수군 수분원(水分院) 근방의 한 폐사에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식량을 구하러 원까지 내려갔던 영노가 우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노가 저잣거리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 배 수백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또 공작을 선물하려고 온 것일까?”라고 내가 말했지만, 선물을 전하러 왔다면 배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원에게 쫓긴 이후로 부쩍 수척해진 석뫼는 새로운 소식을 더 듣기 위해서 영노를 원으로 내려보낸 뒤, 내게 하루에 세번씩 원에 다녀와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말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풍문의 내용보다는 영노를 보러갈 수 있다는 사실에 산길을 뛰어다녔다. 영노가 잠시 빌려 든 여염집의 셋방에서 나는 영노의 품에 안겨 풍문들을 들었다. 내 귀의 솜털들을 간질이던 영노의 속삭임 속에서 부산과 동래는 이틀 만에 피바다가 됐으며, 백성들에게는 그토록 용맹스럽던 장수와 강하던 군사들을 단숨에 무찌른 건 일본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대한 소문이었으며, 세 길로 나눠 곧장 서울을 향해 가는 일본군의 모양은 꼭 생쥐를 잡으러 빈집 마루를 달려가는 고양이와 같았다. 영노의 품에 안겨 있다가 달려가는 산길의 바람은 더없이 시원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은 석뫼에게 나는 제비새끼처럼 재잘재잘 풍문을 들려줬다. 내게는 그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죽음과 공포와 고통이 남의 일일 뿐이었다. 아니, 각 고을에 그런 풍문을 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병든 유마의 말을 비틀자면, 우리는 원래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고통받지 않았다면 전쟁으로 새로운 고통이 생겼겠지만.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이 전하는 새로운 고통은 우리가 전혀 느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전쟁으로 운명이 바뀐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느냐마는, 그중에서도 석뫼의 변신은 정말 놀라웠다. 천하의 잡놈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배덕자였던 석뫼는 내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어쩌면 반민(叛民)의 어투로 각색한 이야기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상민인 것처럼 변복하고 피난민들 틈에 끼어 성을 빠져나가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봉변을 당한 부사(府使)의 이야기나 일본군이 점령지를 다스릴 사람들을 뽑으면서 승려들도 포함시켰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듣던 중 그처럼 반가운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다가 임금이 비를 맞으며 몽진 길에 오르고 조정이 떠난 도성의 백성들이 경복궁과 장예원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형과 동시에 “의금부와 형조는?”(“당연히 잿더미가 됐습니다요.”) 하고 되물으면서부터 안색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더니 백성들이 개성에 이른 임금의 가마를 막아섰다거나 근왕병을 모집하려고 강원도와 함경도에 간 두 왕자가 백성들에게 생포돼 일본군에 넘겨졌다는 풍문에 이르러서는 내가 기대했던 반응과는 정반대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더니 방안에 틀어박혀 사흘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던 날 아침에 수염이 덥수룩한 몰골로 문을 열고 나오더니 형을 찾았다. 형이 들어가자 석뫼는 전시 조정의 영의정이라도 되는 양 그 전쟁의 판도에 대해서 뭐라고 한참 설명한 뒤에 인근 사찰에 돌릴 통문을 하나 쓸 테니 형에게 그걸 받아적으라고 말했다. (형이 자신은 통문을 작성할 만큼 문장을 깊이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더니 석뫼는 “너는 홍문관 전한典翰이었던 허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더냐?”라고 말해서 형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석뫼가 불러주는 대로 형이 쓴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저 적병이 이미 서울로 향했으니 머리를 깎고 기도를 한다고 한들 대저 신민(臣民) 된 자로서 어떻게 마음을 갖겠는가.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우리가 이 나라에 나서 먹고 쉬고 놀면서 여러해 동안 지나온 것은 털끝만한 것이라도 모두가 임금의 덕이니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 있으면 잠자고 먹는 것이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물며 난리를 치른 곳은 부모가 모두 죽었고 처자가 포로로 잡혀가고 온 집이 불에 타버려서 대대로 내려오던 생업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니, 천지간에 원수(“아저씨 역시 불시에 아들을 잃은 한 집안의 원수잖아요.”)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으랴?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만일 미리 막지 못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아니야, 미쳤어. 저 인간은 완전히 미쳤어.”)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힘을 다하여 보복하려 하는데, 알지 못하거니와 여러 스님들은 그 또한 생각이 어떠한가?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담력이 있고 활을 쏠 줄 알고 재주와 용맹이 있는 자는 이달 이십오일에 남원 선원사에 모여서 큰일을 의논해 정했으면 천만다행이겠다. 글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건 자기에게 스스로 하는 말인가?”)은 이 글을 보지 못할까 걱정되니 조심성있게 보통 하는 말로 통문의 대략을 속히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면 반드시 충신 의사가 손바닥에 침을 뱉고 일어설 것이다. 통곡하고 통곡하다가 통곡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승병도대장 규산사문 삼봉 삼가 쓰다

 

방에서 나온 형이 통문의 내용을 읽는 동안, 풍문을 들은 석뫼가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절로 돌아온 영노와 남의 나라의 전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두란과 아버지를 죽인 임금이 기러기처럼 북쪽으로 쫓겨간다는 사실에 신이 났던 나는 석뫼의 불운에 애통하고 애통할 따름이었다.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분연히 일어서는 충신 의사가 되겠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흐내패 꼭두쇠 석뫼가. 한평생 사기와 살인과 겁탈을 일삼다가 마침내 관원에 붙잡혀 죽을 때가 다 되자 드디어 미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떠들어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은 승병도대장(僧兵都大將) 삼봉, 승병좌장(僧兵左將) 영노, 선봉장 두란, 초모유사(招募有司) 허규, 왕래모획(往來謀劃) 허완(아니, 아니, 아니! 누구 마음대로! 대장도 아니고!) 따위의, 승병대의 직책과 이름을 줄줄 읊었다. 그때 글을 읽던 형의 얼굴에 깃든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운데도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암흑 속에서 한올 실마리처럼 미약한 빛, 하지만 결국 그를 다시 환한 세상으로 인도할 더없이 중요한 빛을 본 사람 같았다. 그게 어떤 빛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색이 초모유사와 왕래모획이 되어 인근의 절에 통문을 돌릴 때 듣게 됐다.

“꼭두쇠는 전쟁으로 한몫 챙기려는 모양이지.”

내가 말했다. 복사꽃이 핀 산을 올라가고 있어서 꼭 아버지를 만날 것 같았다.

“영노가 그렇게 말하더냐?”

형의 말에는 경멸 같은 게 덤으로 끼어 있었다.

“아니. 영노하고는 상관없어. 나한테도 머리는 있다고.”

나는 답례로 성난 목소리를 끼워줬다.

“꼭두쇠는 지난 사흘 동안 나라를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하더라.”

“핫핫핫. 낮에 자니까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이겠지. 저런 인간까지 걱정하는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당장 망하는 게 나을 거야.”

“영노는 꼭두쇠를 미워하는구나.”

“영노하고는 상관없다구!”

나는 소리를 지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형이 쫓아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형이 뒤에서 소리쳤다.

“마르내 우리 집은 연못이 됐다고 하더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도 멈췄다. 태양의 운행도 멈췄다. 시간도 멈췄다.

 

이윽고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어?”

“내가 광에 갇혀 있던 시절에 석뫼가 안성장에 갔다가 서울사람에게 역적으로 취죄당하다 죽은 홍문관 전한 허아무개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대. 그랬더니 도주한 역적의 자식들이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임금이 그 집을 무너뜨리고 땅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래.”

“우리가 역적의 자식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형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네가 영노에게 말했겠지. 내가 광에 갇혀 있는 동안, 그 녀석의 품안에 있으면서.”

 

다시 시간이 잠시 멈췄다가 흘렀다.

“아니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넌 이미 아버지의 원수에게도 ‘왕후장상에 영유종호’라고 배웠다고 말한 적도 있으니까. 다시 그리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우리집은 연못이 됐어.”

“내가 개구리도 아니고, 연못이 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구! 형은 갇혀 있기만 했잖아. 나야 어떻게 되든!”

내가 소리치고는 뛰어갔다. 연못이 그때의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연못이 있었다면, 나는 당장 거기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22

 

승병대를 조직할 것이라는 말에 중들이 보인 반응(“왜병이 문자 쓰는 놈들만 골라서 죽이니 이젠 종이 만들어내라고 할 놈들 없어서 중 팔자가 개 팔자 됐네”라거나 “우리 애들은 남해에 축성하러 간 지가 벌써 삼년이 넘었는데, 고기맛을 봤는지 여태 감감무소식이야” 같은 시큰둥한 반응들)에서 우리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시피 그간 양반들에게 시달렸던 중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애당초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중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면 시큰둥할수록 형의 새로운 면모는 점점 더 빛을 발했다. 형은 말로써 다른 사람들의 심장박동을 조절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든 감정을 원하는 대로 꺼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뱃속 깊이 들어오는 칼날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형은 말들이 실현되는 미래를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형이 무엇을 펼쳐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들은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긴 해도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 마음은 이미 형의 말에 넘어갔어도 몸만은 쉬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 자들도 통문 아래에 적힌 ‘승병도대장 규산사문 삼봉’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뜻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당일이 되자 남원 선원사에는 저마다 잡히는 대로 창이나 몽둥이나 쇠스랑이나 목탁이나 목어를 든 중과 농민과 천민 삼백명이 모여서 일제히 “길삼봉! 길삼봉!”을 연호하고 있었다.

“네가 재주가 많아 사람들은 많이 끌어모았구나. 저 정도라면 크게 한판 벌일 만하긴 한데…… 그런데 왜 자꾸 길삼봉이라고 외치는 거지? 나는 길씨가 아닌데? 이름도 삼봉이 아니고.”

명색이 승병도대장 삼봉이 그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며 그 많은 사람을 끌어모은 초모유사 허규에게 물었다.

“이름이야 석뫼니까 제가 통문을 쓰면서 삼봉으로 고친 것인데, 거기다가 왜 길이라는 성을 붙여서 길삼봉이라고 하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다들 저리 애타게 길삼봉을 외치는데, 이참에 그냥 길씨라고 하시죠. 어차피 길에서 태어나 아버지 성도 모른다면서요.”

“그럼……, 그럴까?”

안 그랬으면 퍽 좋았을 텐데. 그때 석뫼는 길삼봉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형도, 나도, 석뫼 주위에 있던 그 누구도 길삼봉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길삼봉이 역모사건에 연루된, 신통력을 지닌 고승대덕으로 남쪽 지방에서는 그 이름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린 ‘길삼봉!’을 연호하는 사람 삼백명이 모인 곳 가까이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석뫼에게 신통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석뫼는 본래 아흐내패의 버나잽이로 얼른 기술은 하나도 몰랐지만(그 기술은 후계자 한사람 외에는 절대로 전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당시 조선에서 제일가는 얼른꾼이었다. 사람들이 신통력을 지닌 고승대덕 길삼봉 대접을 하기 시작하자,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챈 석뫼는 재빨리 길삼봉으로 환골탈태했다. 아흐내패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데다가 부잣집 마나님들을 기망(欺罔)해서 돈 토해내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일에는 도가 튼 사람이니 이미 자신을 길삼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입 속에 든 제 혓바닥을 돌리는 일보다 더 쉬웠다.

석뫼의 얼른 기술이 가장 큰 빛을 발한 건 우리가 함양 지방으로 이동할 무렵이었다. 그때 새로 합류한 중 하나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조총 한자루를 석뫼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 조총을 바치기 전에 그 중은 다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총알을 하나 발사해 조총의 위력을 보여줬다. 총소리가 나자 그전까지 몽둥이나 목탁 따위를 들고 서서 총알이 보이느니 마느니 떠들어대던 승병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석뫼는 그 조총을 가져와 밤새 이리 마지고 저리 만지며 화약은 어떻게 넣고 총알은 어떻게 발사되는지 살펴보더니 “이제야 조총의 시종(始終)을 알겠네”라며 우리에게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음날, 석뫼는 선봉장 두란에게 승병대를 한곳에 모으라고 말했다. 전날 조총의 위력을 본 사람들 중에서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밤새 승병대를 빠져나가 모인 사람들은 혼자서 떠도느니 무리의 힘에 기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백여명 정도였다. 그들 앞에서 석뫼는 이 현상세계의 본질은 본래 공(空)이라는 설법을 한참 떠들어대는 것으로 남은 백여명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그 설법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끝날 듯 끝날 듯 지루하게 끝나지 않던 설법이 마침내 끝났을 때, 중들은 처음으로 석뫼가 소문 속의 길삼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누가 들어도 그의 설법은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말만 막히면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라며 울분을 삼키고,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을 것 같으면 자기만 믿으면 죽지 않는다고 떠들어댔으니까. 바로 그때, 석뫼가 조총을 들고 선 선봉대장 두란에게 소리쳤다.

“그 조총으로 나를 쏘아라.”

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 두란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그 조총으로 나를 쏘란 말이다.”

“쏘면 죽을 텐데……”

두란이 중얼거렸다. 다른 살 길을 찾아보려고 일어서던 중들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 총알로 본래 비어 있는 허공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여보란 말이다!”

“다 좋은데, 저는 쏠 줄을 몰라요.”

두란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중들이 전날 그 조총을 석뫼에게 바친 사람을 찾아내 앞으로 밀어냈다. 그 사람은 석뫼에게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멈칫멈칫 조총을 들었다. 그는 조총으로 석뫼를 한번 겨눴다가 자신은 도저히 쏘지 못하겠다며 총을 내렸다. 하지만 석뫼가 재차 소리를 지르자(“네놈들이 어찌 구름을 쏘아 죽이겠느냐?” 혹은 “네놈들이 어찌 바람을 쏘아 죽이겠느냐?” 등 기본적인 문형을 응용한 말들), 그는 끔찍한 꼴을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듯이 사람들 쪽으로 한번 고개를 돌린 뒤, 조총에 화약을 쟁여넣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석뫼를 겨눈 뒤 방아쇠를 당겼고 화승이 화약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총소리가 났다. 석뫼는 총알이 아니라 그 소리에 튕겨 날아가는 것처럼 뒤로 자빠졌다. 총알에 맞아서 죽지 않는다면, 돌바닥에 머리가 깨져 죽을 판이었다. 모두들 그 끔찍한 광경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조총을 든 사람이 총구로 화약을 다져넣고 총알을 넣는 걸 봤으니 총알이 날아가 석뫼의 몸에 박히는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석뫼가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제일 먼저 영노가 눈물을 쏟으며 쓰러진 석뫼에게 달려갔다. 우리는 물론 멀찌감치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석뫼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죽은 석뫼를 보고 한참 웅성거리는가 싶을 때, 석뫼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석뫼가 가슴팍을 풀어헤치니 가슴에 붙은 부적이 나왔다. 부적의 한가운데는 점 모양으로 타들어갔는데, 조총에서 나온 총알은 바로 거기에 박혀 있었다. 석뫼는 그 부적을 방탄부적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승병대에 들어오기를 자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저 나눠주었고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려는 지주들에게는 곡식을 받고 팔았다. 곧 중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석뫼가 이끄는 승병대에 들어가기를 간청했고, 부대의 이름은 길삼봉승병대에서 길삼봉의병대로 바뀌었다. 석뫼의 이름도 승병도대장 길삼봉에서 백두백의호국의병대장군 길삼봉으로 바뀌었다. 길삼봉의병대는 수백차례에 걸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그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그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고승대덕으로 신통력을 지닌 길삼봉의 부하들에게는 일본의 조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부적이 하나씩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길삼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실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석뫼가 사람들 앞에서 조총을 맞아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을 보여주고 난 뒤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풍문 속에서 말이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전투를 치를 때까지 길삼봉의병대가 한 일이라고는 조정과 연락이 끊어진 고을에 들어가 창고의 비축미를 털어서 배가 터지도록 나눠먹고도 모자라 지주들에게 방탄부적을 강매해 곡식과 가축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싸우다가 죽는 병사보다 배가 터져서 죽는 병사가 더 많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집을 잃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모여들어 길삼봉의병대는 그 숫자가 삼천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그해 시월, 길삼봉의병대는 초유사(招諭使)가 보낸 파발을 통해 일본군이 곧 진주를 공격한다는 첩보가 있으니 경상우도의 모든 의병대는 진주성으로 모이라는 통지를 받고 진주로 향했다. 형은 예로부터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면 역적의 아들일지라도 복권된 사례가 적지 않다며 진주성 전투가 조정에서 보낸 초유사가 보는 앞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게 귀띔했다. 복권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형은 마르내 옛 집터로 돌아가 연못을 메우고 다시 집을 짓는 일이라고 내게 말했다.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더니 이제는 또 땅을 메워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형이 웃었다.

“범동알자는 덕업상권이라는 말은 내가 만든 말이다. 원래는 ‘범동약자(凡同約者)’라고 해야만 옳지.”

“뭐라고? 글 좀 안다고 나를 속였던 거야?”

나는 형이 말하면 다 사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형의 말들을 모두 믿는다. 그게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숯덩어리가 된 형이 바다 쪽으로 세 걸음을 걸어갔다면, 그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진주 부근에 이르렀을 때, 멀리 조선 관군의 깃발이 보였다. 의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길목을 지키고 선 관군들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의병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까지도 나는 마르내로 돌아가 다시 집을 짓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 집은 높고도 넓을 것이며, 고개를 내밀면 그 어떤 어두운 밤에도 하나의 봉수대 불빛이 눈에 들어올 것이었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는 다시 글을 배우고 책을 읽을 것이었다. 그때 관군이 지키고 선 동산 쪽에서 호응하는 환호성 대신에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까마귀떼가 하늘을 가득 메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