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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철문 張喆文
1966년 전북 장수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서쪽』 『산벚나무의 저녁』 등이 있음. damsan@hanmail.net
8월의 식사
SBS 8시 뉴스
살모사도 밥을 먹느라고 벼포기 사이에서 뜸부기 둥지로 머리를 내민다. 내가 머리를 숙여 밥숟가락을 입 안에 밀어넣듯이 그 역시 일곱 개의 알록달록한 뜸부기 알을 향해 입을 벌린다. 숟가락 없는 그의 식사가 둥글다. 머리가 푸른 지구처럼 둥글다. 8월의 깊숙한 내장이 말복의 무논을 통째로 삼켰다. 내장이 밥을 삼키는지 밥이 내장을 삼키는지 축 늘어져서 꾸먹꾸먹 엎드려 있다. 어미 뜸부기가 이제 곧 벼포기를 헤치고 달려와서 대가리를 쪼더라도 들판을 덜퍽 삼켰으니 들판이 저를 다 삭일 때까지 움쩍할 수 없다. 8월의 들판이 빵그랗게 배가 불러서 푸른 눈알을 뒤룩거리고, 하늘은 흰 구름 몇점 데리고 텅텅 푸르다. 뚝딱!
잡문(雜文)—화증(火症)과 시와 부침개에 대한 명상
아우는 어머니와 불화하면서 전세 얻어 나갈 돈도 없고
처남은 세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고,
아내와 티격거리다
보지 않는 TV쪽으로 얼굴만 두고 누웠다가
끙,
옷가지를 꿰어 입고
365일 24시 서일싸우나에나 가서
홧김에 등목하듯
히노끼탕으로 냉탕으로 온탕으로 냉탕으로 한증탕으로 냉탕으로
풍덩풍덩
새벽 1시가 다 되어 들어오다가
우편함에서 시집 다섯 권을 꺼냈다
어제는 소설 한 권과 초대장 한 장, 광고전단 두 장
그제는 어린이책 두 권과 잡지 한 권, 시집 두 권, 동문회보, 사보, 세금계산서, 관리비통지서, 카드영수증 두 장을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엘리베이터 속에서,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기 전에 봉투를 뜯어낸
시집들을 들고 들어섰을 때
아내는 불을 켜놓은 채 잠들어 있다
(아내도 나도
지나간 싸움은 묻지 않는다
아물 수 없는 상처는 건드리면 덧날 뿐)
거실과 주방과 안방의 불을
사감인 듯 꺼주고
작은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시집을 뒤적인다
누군가 만져주기를 기다리는 상처들이
갈피마다
상한 끈끈이주걱처럼 앉아 있다
허구렁 같은 상처들을 저마다 만져줄 수 없어서
다섯 권의 시집을 장작더미처럼 쌓아놓고
엉겁결에 지켜주기로 한, 주인 오지 않는 수화물처럼 내려다본다
상처의 굴비들,
혹은
흉터의 야적장
도무지 눈 밖으로만 밀려나는 것들은 차라리 어둠에나 던져주자고
베란다로 나갔으나
거리에는 귀때기 새파란 삐끼 같은 네온들만 어둠을 파먹고 있다
GS25, 빵 미엘, 동도휘트니스, 농축산물전시장, WAL☆MART, 동양트레벨, 미래한의원, 칼국수 전골전문, Dining Bar, Family Mart, 영재어학원
빌딩 사이로 달아나는 도로에나
눈을 주다가
도시 밖에도
대기권 밖 위성 곁에도 터 잡지 못했을 그 많은 어둠에나
마음을 주다가
다섯 권의 시집을 다시 쥐고 들어와서
퇴고될 수 없이 얼크러진 원고처럼 던져놓는다
형광등 불빛과 코팅된 표지가 눈이 부셔서
등을 바닥에 붙이고
목을 꺾어 머리통만 벽에 기대고 누웠는데,
해 바뀌고 새로 들여온 책장에
봉투만 벗겨진 채 던져진 책들이 저마다 눈알을 뒤룩거린다
(새해 들어 달 반을 나는
밥벌이책과,
아이의 그림책만 읽었다)
작파하듯
불을 끄고 누웠는데,
그 어둠속에서
어둠이 눈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한밤의 둠벙 밑인 듯 묘한 어지럼증과 함께
내내 비워진 채로 오줌통 옆에 살던
통배추 서너 바지게는 너끈히 들어갈 할머니의 그 일없던
항아리 한 채가 떠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알 수 없던 어둠의 싸늘한 바람에나 머리를 박고
누군가 덧나지 않게 만져주기를 기다리는 저 상처들의,
흉터들의 갈피를 탈탈 털어서
켜켜이 쟁여서
그 항아리의
어둠의
세월만큼
(말하자면, 한 우주가 블랙홀로 한번 들어가서
화이트홀로 터져나올
세월만큼)
군둥내 나는 김치로나 익혀서
꺼내 먹었으면
한 서른 해 과부로 늙었던 할머니의 아랫도리만큼이나
푹푹 곰삭혀서
구질구질한 봄비 오는 날에나 꺼내서
아내와 아이와
부침개나 부쳐 먹었으면
근동의 약속 없는 지인들을 죄다 불러서
소주나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장난스레 드는 것이어서
헐수할수없이 끈 불 다시 켜고 참 이런 시시껄렁한 시나 써보는 것인데,
이 구절쯤에 이르러서는
또 누구에게 이런 시답잖은 시가 배달되어서
자정 넘은 터미널의 주인 없는 짐짝처럼 내려다보일 일이
무서워져서 그만
에라,
이쯤에서 입막음!
그런 비 오는 날이 행여 오거든
택수야, 무슨 강연이나 헐수할수없는 시상식이나 잡문 같은 것은 그냥 작파하고 건너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