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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김영희 金伶熙
1977년 경기 성남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yhorizon@naver.com
사과와 예수
쎄잔, 뉴턴, 백설공주, 윌리엄 텔(「견습생 마법사」). 이들 이름 속에서 당신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그것은 다름아닌 ‘사과’다.1 그렇다면 아담, 헤롯, 요한(「Summer Snow」). 이들 이름 속에서 당신이 단일하게 연상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다. ‘사과의 역사책’에 기입된 대문자 역사와 ‘예수의 활약상’에 복무한 엘리뜨의 영혼은 사실 역사 속에서 무수한 개인을 마이너리티로 소외시켰다. 그 불우한 개인을 소수자라고, 그들의 “잘린 머리”(「Summer Snow」)와 “더듬거리는 혀”(「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와 “긴 손가락”(「긴 손가락의 詩」)과 “갈라진 목소리”(「앤솔러지」)로 씌어진 시들을 ‘소수자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빈 사과 궤짝을 타고” 대문자 역사로부터 도주를 감행하는 자다. 행여 상징계의 공포가 그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시인은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견습생 마법사」)라고 도도히 발언한다.
남근의 권위가 지배하는 사과의 역사는 엘리뜨의 시선으로 세계를 코드화했다. 그 코드화된 영토에서 예수는 백인, 남성, 어른의 역할모델로 활약했고 그 기준에 배치되는 유색인, 여성, 아이는 소수자로 전락했다. 상징계의 권위는 그렇게 탄생했고 견고해졌다. 이를 또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연원한 영원한 진리마저 의심한다. 진은영(陳恩英)이 “진리는 낡아빠진, 그리고 감각적인 힘을 상실한 은유들”(「Summer Snow」)이라고 니체를 인용할 때, 이것은 일종의 시론(詩論)처럼 읽힌다. ‘사과의 역사책’과 ‘예수의 상징계’를 버리고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가 그 속에 있다. 낡은 이성적 진리의 세계를 전복하여 살아있는 감각적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 일찍이 시인이 「긴 손가락의 詩」에서 강조한 바는 이것이다. 몸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수목(樹木)형 체제를 외부로부터 분열시키는 하위요소다. ‘머리’가 아닌 ‘손가락’의 비교우위는 이성적 사유보다 감각적 운동을 중시하는 시인의 고유한 감성론이다.
진은영의 시가 미학적으로 새로운 것은 그녀의 낯선 언어가 우리의 상투적인 감각체계에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불일치하는(dissensus) 이미지, 사물의 아우라는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진은영의 시가 정치적으로 새로운 것은 그녀의 문학적 발명이 자본주의의 낡은 분배형태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현실과 접속하는 언어들, 붕괴된 세계를 증언하는 알레고리적 기호들은 다수자의 권력과 자본의 의미망에 포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녀의 시에는 사과의 역사책과 예수의 상징계에 기입되기를 거부하는 ‘이미지’와 ‘메씨지’가 공존한다. ‘미적 언어의 기만’으로서의 감성론, ‘재현론’으로서의 정치학을 넘어 그녀가 발명중인 시의 ‘다른 미래’는 어떤 것인가? 그녀의 시에 펼쳐진 새로운 감성론과 정치학의 지도가 궁금하다. 그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앤솔러지」).
감성론 1. 이미지의 비(非)문법
각각 시집의 표제작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과 「우리는 매일매일」에는 시에 대한 흥미로운 메타적 발언이 숨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의 이름 뒤에 새겨진 ‘주소 불명’과 ‘열쇠 잃음’이라는 각인(刻印)이다. 그녀의 시는 시어의 ‘지시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그녀의 시에는 주소를 지우고, 열쇠를 방기하는 방식으로 애써 정형(定型)의 의미화를 거부한 흔적이 역력하다. 의미의 가독성을 경계하고 특정한 메씨지를 지닌 언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소 불명’의 편지와 ‘열쇠 잃은’ 흑단상자가 도모하는 시적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불일치하는 이미지’와 그들이 수행하는 ‘이미지의 비문법’이라는 설명을 마련해볼 수 있다.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어쩌자고」 전문
겹겹의 타로 카드, 달리아 꽃잎들, 버찌나무 위의 가을이 그려내는 ‘정경들’. 벽에 부딪히는 문, 부서지는 전구들, 파란 새의 울음이 들려주는 ‘소리들’. 사과파이 시럽의 뜨거움, 젖은 빨래의 축축함, 태운 재의 부드러움이 전달하는 ‘감촉들’. 이미지들이 서로 접속되면서 시가 완성된다.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이며, 이들 단속적인 이미지 기표들을 한점에 묶어줄 만한 매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그렇게 미끄러진다. 이들 불일치하는 이미지의 고유한 배치가 한편의 브리꼴라주(bricolage)로 전시된다. 우리의 감각이 기꺼이 그 접속 과정에 동참한다. 감각의 수용능력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시의 비밀은 감각의 브리꼴라주 속에 있었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들 이미지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처절함’이 있다. 어쩌자고 내가 “널 사랑하는지”,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심장에 정확히 꽂힌 칼/콸콸 쏟아지며 거즈를 적시는 피처럼”(「詩」) 전적으로 ‘나’를 물들이지만, 정작 ‘나’는 어쩌자고 이런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이 그렇고, 시가 그렇다. 그것은 ‘나’의 “심장에 정확히 꽂힌 칼”이며 그 날카로움에 ‘나’의 심장은 마비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칼은 “알 수 없는 곳에서”(「詩」) 주소 불명의 편지로 날아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필연적이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 가혹한 것이다. 우리가 “겹겹이 펼쳐지는” 감각의 브리꼴라주를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보기는 어렵지만, 그 불화(不和)하는 이미지들은 때론 이리도 절실한 메씨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미지의 배열 속에서 불현듯 드러나는 의미를 송신한다. “감각의 숫자들”(「Modification」)은 가끔씩 이렇게, ‘사랑’과 ‘시’에 관한 치명적인 의미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아름답다」 부분
‘A가 아름답다면 B와 같다’는 가정법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B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관건은 ‘B와 같다’는 직유가 생산해내는 ‘아름다움’에 우리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우선 “반짝이는” 직유의 문법으로 우리의 “눈빛을 잡아끄는” 독립적인 이미지, 그들이 환기하는 아름다움에 손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어떤 미학적 알리바이가 존재한다. “죽은 여자”, 그 여자의 “자라나는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실 이들 각각은 어딘가 이질적인 조합이며, 이 아름다움에는 모종의 ‘기괴함’(uncanny)이 숨어 있다. 우기의 사바나에서 녹아내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에서도,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어떤 몽환적이고 섬뜩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 시의 아름다움을 ‘낯설고도 친밀한’ 미(美), 그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우리에게 다정하고 ‘친밀한’ 것으로 인식되던 대상에게서 불편하고 ‘낯선’ 관념을 산출한다. 그것은 친밀한 것을 낯선 것으로 교란시켜 궁극적으로 대상에 대한 기성의 관념을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진은영은 아름다움에 대한 ‘종래(從來)의’ 은유에 저항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첨단(尖端)의’ 비유법을 구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사유 혹은 사물에 새로운 간극을 만든다. 그로 인해 아름다움을 지시하는 사물과 사유의 고유한 세계는 타격을 입는다. 이 시가 진은영 시의 미학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믿는 것은 첫째, 의미작용을 의식하지 않는 그 자체로 선명하고 독립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아름답다’는 추상적 어휘가 지니는 의미는 각각의 이미지가 현상하는 구체적인 사물성에 전적으로 압도당한다. 둘째, 습관화된 의미체계를 교란하는 ‘이미지의 비문법’ 때문이다. 비유의 새로움은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불편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선명해지는 ‘이미지’와 모호해지는 ‘메씨지’. 이처럼 진은영 시의 이미지의 존재양태는 기존의 시적 에토스(ethos)에서 자유롭다. 그녀의 시는 의미의 문법을 교란시켜 이미지의 비문법을 창조한다. 여기서 텍스트의 가독성은 필수요소가 아니다. 단일한 의미에 감금되지 않는 “의미보다 넓은 말”(「나에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성론 2. 사물의 아우라
이쯤에서 진은영 시의 ‘서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흔히 서정이란 시인의 감성에 의해 이끌리는 법이다. 시인의 고유한 감성으로 세계는 ‘해석’되며, 이는 때론 1인칭의 나르씨씨즘으로 때론 개인의 희·비극으로 시 속에 펼쳐진다. 그런데 진은영의 시에서 개인의 감성과 해석의 자리는 ‘상점의 어둠 같은 것’‘철쭉의 몽상 같은 것’에 의해 점점 소멸된다. 이를테면 시인의 감성은 화자의 발화에 의해 ‘증언’되는 것이 아니라, “철쭉의 어지러운 몽상이 있는 창문 같은 것들”(1부 題詞)에 의해 ‘환기’된다. ‘것(들)’이 환기하는 감성이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종국에는 시의 의미를 생산한다. 이는 대상에 시인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스스로가 풍기는 기운이 시인의 감성을 ‘발현’하게 하는 방식이다. 시인의 자의식은 최소한이고, ‘것(들)’의 감성이 전면화된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멜랑콜리아」 전문
이 시에 일정한 해석을 부여할 때,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자문에는 제법 흥미로운 문제의식이 있다. 바로 ‘아우라’라는 말이 그렇다. 이 시를 일련의 의미 단위로 조합하여 시에서 단일한 주제를 산출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뿐더러 어리석다. 이 시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아우라’로 완성되는데, 그것은 마치 ‘지시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진은영에게 “시”란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로 정의되지 않았던가? 「멜랑콜리아」의 서정적인 아우라는 사물의 배치가 환기하는 감성, 그것을 전달하는 말의 아름다움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사물의 감성이란 구체적으로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전시하는, ‘모래사막에 그려진 물고기’가 환기하는 감성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녹기 시작할 때, 사막을 지나는 바람이 스르르 물고기 그림을 지워줄 때, 그리고 이것들이 고스란히 ‘나’라고 불려질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감성이다. 이때 뜨거움과 차가움, 모래사막과 물고기의 조합은 ‘summer snow’처럼 이질적이며, 이렇게 탄생한 아이스크림과 물고기의 형상은 위태롭고 신비롭다. 사물들의 분위기, 미적인 언어가 생산하는 아찔하고 선명한 색감,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감에 이끌리고, 아득하고 몽환적인 기운에 도취된다면 그것이 곧 우리들의 “멜랑콜리아”이다. 이는 해석 이전에 완성되는, 혹은 해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니까 의미가 아니라 사물의 감성, 말의 미학이 아우라의 주인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녹기 시작하여 사막을 지나는 바람에 의해 지워지는 ‘나’의 운명은 곧 “한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소멸」)는 ‘시’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들은 모두 ‘소멸’을 공동의 운명으로 한다. 이 순간, 그리고 지우는 주체로서의 ‘그’와 그려지고 지워지는 대상으로서의 ‘나’를 시인과 텍스트의 관계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같은 해석의 자의식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건, 말의 아름다움이 의미보다 넓기 때문이며 사물의 감성이 의미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의지와 독자의 주관에 복속되지 않는 말과 사물이 여기, 멜랑꼴리아의 주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녀에게서 훔쳐온 것은/모두에게 어울린다/사물들은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다/부푼 보리씨가 자라고/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칼날처럼 일찍 일어나/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눈의 여왕」 전문
눈의 여왕인 그녀에게서 “하얀 곰가죽”을 훔쳐왔다. 눈 온 뒤의 아침 풍경이 불화(不和) 없이 아름답다. 화자는 그 어울림을 증명하는 하나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보리씨에서 트럭으로, 우체통에서 집들로, 자동차에서 폐타이어로 서서히 이동한다. 이때 화자의 자의식은 최소화되고 시선의 ‘이동’이 전면화된다. 사물들은 화자의 의식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의 사물성을 온전히 보존한 채 거기에 있다. 사물들이 덮어쓴 하얀 곰가죽은 물론 ‘눈’의 은유이겠으나 시를 지지하는 비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보리씨를 부풀어 보이도록 하는, ‘보리씨’와 그 위에 쌓인 ‘눈’ 사이의 환유적 인접성이다. ‘청소용 트럭/빨간 우체통’과 그들을 덮은 ‘눈’의 관계가, ‘자동차/폐타이어’와 그들을 멈추고 구르게 하는 ‘눈’의 관계가 또한 그렇다. 여기에 눈 속에 묻힌 집들이 마치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눈 위를 구르는 폐타이어가 “애인의 유두”처럼 보일 때, 「눈의 여왕」은 시각적 공간감으로 충만하다.
화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사물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시선으로 기능할 때, 이 시선은 마치 카메라의 눈과 같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폭설의 감촉을 ‘눈으로 만지면서’ 화자의 시선은 “칼날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장면화한다.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 아침 풍경을 풀샷으로 화면에 담고, 롱테이크로 서서히 사물과 사물을 이어준다. 인상적인 장면은 특별히 클로즈업한다. ‘흰’ 세계에 ‘빨간’ 우체통과 ‘검정’ 폐타이어와 ‘자줏빛’ 살덩이가 차례로 자신의 공간을 차지할 때, 장면은 완성된다. 사물은 화자의 자의식에 포섭되거나 통합되지 않고 자신의 사물성을 온전히 지켜낸다.
물론 시 속에는 화자의 자의식이 노출되는 한 순간이 있다.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라는 표현이 그렇다. 이는 사람들을 달콤한 잠으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분주하게 깨우는 존재이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칼날처럼 위태롭다. 자줏빛 살덩이의 실체를 의미화하는 단서는 적어도 시 속에는 없어 보이나, 이 살덩이의 정체를 ‘자본의 육체’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 육체에 우리의 노동이 저당 잡히는 순간 살해자의 살덩이는 점점 더 비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이 시를 아름답게 말하는 방법은 아니라고 믿는다. 시의 아름다움을 지휘하는 것은 사물들을 이어주는 화자의 자의식이 아니라, 그 선적인 이동을 충만한 시각적 공간감으로 이미지화하는 ‘눈(의 여왕)’ 자체이다. 의미의 문법을 교란하는 ‘이미지의 비문법’, 의미가 아니라 ‘사물의 아우라’로 완성되는 아름다움이 진은영의 시가 우리에게 타전하는 새로운 감성론이다.
정치학 1. 화염병이 유리 튜울립이 되는 접속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키는”(「나에게」) 시에 관심이 있다. 그녀가 “마지막 시”라고 이름 붙인, ‘미학적으로 낡은’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시는 어떤 것일까? 흥미롭게도, 우리는 하이네(H. Heine)의 시편에 등장하는 ‘하프 켜는 소녀’의 노래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진은영은 이 소녀가 들려주는 “진실된 감정과 잘못된 음조”의 노래에서 엉뚱하게도 80년대의 민중시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2 잘못된 음조로 부르는, 미학적으로 새롭지 않은 노래. 하지만 진실된 감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마지막 시’로 간직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진은영의 고유한 감성론을 살펴보았고, 그녀가 타전하는 미적 언어가 ‘이미’‘미학적으로’‘새로운’ 것임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미학적 새로움만으로 시의 새로움의 영토는 온전히 개시(開始)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시가 ‘충분히’ 새로워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진실된 감정’에 관한 것이며, 이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텍스트들 간의 결합, 즉 “화염병”이 “유리 튜울립”이 되는 접속을 통해 구현된다.
저는 한없이 망설이면서 그것이 무척 소액의 지원이었다는 사실과 아마도 구약처럼 먼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가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면 제 목소리와, 회색 털 빠진 개의 간절한 눈빛으로 고리지어져 흔들리는 녹슨 사슬 소리를 혼동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사실상 저로 말씀드리자면 금화 따위에는…… 저녁마다 뜰 앞의 작은 돌들을 뒤집어 축축한 달의 뒤편을 어루만지는 저로서는…… 신시집과…… 빈의 끝없이 이어지는 니힐한 골목들만이 저의 텅 빈 심장 속에…… 그러나 선생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아내와 딸아이가 하나 있고……
-「친애하는 비트겐슈타인 선생께」 부분
전기적 사실을 고려해보면, 릴케는 로댕 작업실에서 비서로 일했고,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금전적 후원을 받았다. 이를테면 이것은 젊은 예술가 릴케의 생활고에 관한 이야기다. 저녁 무렵 릴케는 비트겐슈타인 재단 사무원에게서 후원 대상 작가로 물망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러나 과거 한 독지가로부터 후원받은 내력이 문제가 될까봐 밤늦도록 고민하다 이렇게 편지를 쓴다. 과거에 지원받은 금액은 “무척 소액”이었으며, 그건 ‘무척 오래전’(“구약처럼 먼 시대”)의 일이고, 지금 릴케에게 “금화 천 크로네”는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없는 망설임 끝에 후원 내력을 고백하는 시인의 흔들리는 목소리와 간절한 눈빛에서, 이미 예술가의 생활고가 드러난다. 급기야 시인의 목소리가 “털 빠진 개”의 “녹슨 사슬 소리”와 겹쳐지면, 황금의 외양과 “사슬”의 속성을 지닌 자본의 권력 앞에서 예술가의 예술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이 밝혀진다.
로댕 씨의 작업장은 지르던 비명을 완성하지 못한 석고상들이 놓여 있는 ‘예술’의 공간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장화 냄새가 진동하는 ‘현실’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릴케는 한밤에 뜰에 놓인 돌들을 뒤집어 “축축한 달의 뒤편을 어루만지는” 몽상의 시인이며 동시에 아내와 딸아이가 하나 있는 근심 많은 가장이다. 예술과 현실이 “소음처럼 뒤섞이는” 이들의 결합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릴케와 진은영의 사연이 겹쳐진다. ‘신시집’과 ‘니힐리즘’을 가슴에 품고, 불면의 밤을 종이에 토해내는 “야간 노동자”(「야간 노동자」). 그녀는 금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녀의 발화를 말줄임표 속에 가둔다. “시(詩) 한편에 삼만원”, “시집 한권에 삼천원”(함민복 「긍정적인 밥」) 하던 십년 전보다 지금이 좋아졌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시가 “모든 사람의 혀에 익숙한 맛”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생활고는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릴케의 일화에 중첩된 진은영의 사연은 황금 사슬에 효과적으로 안착하지 못한 예술가의 궁핍을 감성적으로 그려낸다.
출구든 입구든/주황색 초벌칠이 가장 아름다운 철문들
날아오는 돌멩이들 속에서/피어나던 빨간 유리 튜울립
상처 난 이마 밟고 가던/꿈의 부드러운 발꿈치
기억한다
불타는 얼굴을 묻기 위해 달려갔던/투명한 두 개의 빙산, 너의 가슴/눈보라와 박하향기가 휘몰아치던 곳
-「청춘 3」 전문
“자주 뒤돌아”보게 되는 ‘청춘’ 그곳에는 철문들이 있고, 돌멩이들이 있으며, 상처난 이마들이 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돌멩이들이 날아가고, 그 가운데 유리 불꽃〔火焰甁〕이 타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것 같다. 시 전체가 이질적인 것들을 선명하게 묶어주는 대립적인 이미지들로 환하다. “주황색 초벌칠”과 철문이, “빨간 유리 튜울립”과 돌멩이가, “꿈의 부드러운 발꿈치”와 상처난 이마가 서로를 ‘눈으로 만지며’ 다정하게 결합했다. 쇠창살이 ‘아름다웠다’고, 군홧발이 ‘부드러웠다’고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 시대가 이렇게 복구되기도 한다. 시대를 정치권력의 분배방식에 따라 대립적으로 나누고, 그중 소수자를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그 시절은 충분히 의미있게 복원된다. 가시적인 의미의 언어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감각의 언어로 은밀하게 ‘지각’되도록.
물론 「청춘 3」이라는 텍스트를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대립적 이미지들이 전시하는, 비참과 환희의 기록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시련의 “눈보라”와 청량한 “박하향기”가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곳, 청춘에 대한 노스탤지어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청춘 3」은 시대에 대한 ‘우리의’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청춘에 대한 ‘개인의’ 노스탤지어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이들 이질적 해석의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놓는 것이 진은영 시의 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들은 예술과 현실의, 문학과 사회의 지속적인 접합을 의식하며 읽을 때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청춘 3」에서 “기계와 자유”(「나의 친구」)만큼이나 이질적인 문학과 정치가 능란하게 결합하는 방식의 일단(一段)을 본다. 시인은 우리에게 현실을 재현하고 정치를 선언하는 종래의 방식이 아니라 이들을 이미지로 직조하여 몸으로 지각하게 하는 새로운 정치학을 제안하는 것이다. 시가 충분히 새로워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정치, 그 정치를 자신만의 감각적 언어와 감성론으로 포섭하려는 진은영에게서 더이상 “잘못된 음조”의 노래, “미학적으로 낡은” 정치를 언급할 수는 없다.
정치학 2.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
예를 들어, 시인이 70년대‘生’이라고 쓰지 않고 70년대‘産’이라고 썼을 때(「70년대産」), 이것은 인간성을 상품성으로 가치평가하는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현실의 비극적 전망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치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감각을 온전히 개방하여 세계의 비참을 증언하고, 타인의 고통을 위무하는 것이다. 시인의 몸이 현실의 상처를 기입하는 감각을 자처할 때, 문학의 정치는 시작된다. 진은영에게 시인이란 “가난한 이의 감자와 사과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리는”(「나의 친구」)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 보이지 않는 무게를 ‘감지’(感知)하는 데 바로 시인의 정치가 있다.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등이 깜박인다, 칼은 녹슬었고
(…)
장미 성운에서 온 것들이 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하얀 재를 한움큼 쥐어본다
유리창 밖 풍경은 거대한 얼음 창고 안에 갇혀 있다/눈보라 속 나무들이 공중에 냉동고기처럼 검게 달려 있고/유리창에 입김을 불어가며 그녀는 바라본다/붉은 눈송이들이 녹아 흐르며/피범벅된 송아지 같은,/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세계를.
미리 갈아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길고 부드러운 혀로 떨고 있는 어린것을 핥아주는 일.
-「정육점 여주인」 부분
유리창을 접경(接境)으로 정육점의 안과 밖의 세계가 펼쳐진다. 정육점 안은 “냉기로 달아오르는” 쇠락한 공간이다. 형광등은 깜박이고 칼은 녹슬었으며, 이곳 여주인에게 커다란 칼로 고기를 내리치는 일이란, 다만 ‘기억’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녀가 유리창 너머로 냉동고기를 바라볼 때,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은 정육점 안이 아니라 정육점 밖을 향하고 있다. 눈보라 속의 육중하고 검푸른 나무들은 냉동고의 공중에 매달린 냉동고기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냉기로 가득한 정육점에서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가며” 바라보는 유리창 밖, “거대한 얼음 창고” 같은 세계에 관한 것이다. 한결같이 붉은 눈발 날리는 그곳,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불구의 세계를 살아내는 개인은 “피범벅된 송아지”처럼 연약하다. 정육점 냉동고의 붉은 불빛처럼 이 거대한 얼음 창고 또한 피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유리창을 경계로 펼쳐지는 정육점의 안과 밖은 붉은 불빛-핏빛과, 한기(寒氣)와, 쇠락한 풍경을 공유하는 동일한 공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얼음 창고”에 갇힌 세계에서 요청되는 시인의 윤리란 “겨울의 탯줄”을 끊어 유리창을 개방하고, 눈이 그친 하늘을 개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떨고 있는 어린것을 핥아주는” 일이다. 시인에게는 떨고 있는 대상을 향하는 “길고 부드러운 혀”가 필요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어린것을 핥아주는 시인의 행위가 유방에서 출산으로 이어지는 풍부한 모성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인데, 부드러운 유방의 질감과 길고 부드러운 혀의 감촉은 이제 막 탄생한 “피범벅된 송아지”의 연약함을 어루만진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세계로부터의 월경(越境)은 이처럼 풍부한 모성 감각에 의해 이끌린다. 그 감각에 의해 냉동고기의 단단함은 유방-혀의 부드러움 속으로 녹아든다.
진은영 시에서 타인은 자주 약자의 형상으로 드러나며, 시인의 윤리는 타인을 위무하는 행위로 수행(遂行)된다. 그녀에게 시는 “암매장된 부랑자의 흰 뼈를 어루만지며/흐르는 젖은 노래”(「추락」)이며, 이를 위해 그녀는 바닥까지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그 젖은 노래는 우리에게 늙은 쎄일즈맨의, 노숙자의, 청소부의 불면(不眠)을(「새벽 세시」) 증언한다. 그녀는 시란 곧 ‘타인을 위해 노래함’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에게도 아들은 있어. 사귀던 여자는 초콜릿시럽이 잔뜩 발린 거대한 아이스크림을 낳았다. 오! 내 아들 그가 열정적으로 포옹했을 때 녹아버린, 온몸에 찐득거리며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것, (…) 덜덜거리는 보일러 소리에 그녀는 옛 애인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게다가 밀레나는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하므로. 오전에는 두번째 아이를 지우고 미역국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아직도 그녀는 행복해. 네번째 애인은 선반공, 손가락이 여덟개나 남아 있고. 그녀는 배를 깔고 새우깡을 먹다, 따스한 보일러통 옆에서 잠이 든다. 아주 사실적으로 침을 흘리며.
-「카프카의 연인」 부분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가래침으로 덮인 꽃들을 배경으로, 지금 카프카의 밤은 악몽과 비명으로 어둡다. 꿈속에서나마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곳’으로의 도망을 시도해보았으나, 광포한 현실과 개인의 분열증은 그의 소망을 악몽으로 바꾼다. 꿈에서도 그의 원망(願望)은 충족되지 않는다. 카프카의 옛 연인인 밀레나는 오늘 “두번째” 아이를 지웠고 지금, 그녀는 행복하다. 선반공인 “네번째 애인”의 “여덟개나 남아 있는” 손가락이, “따스한 보일러통”의 “덜덜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행복을 증언한다. 시인의 시선은 “새벽까지 빛나던 몇개의 눈알들”이 되어 도시 공장 노동자의 밤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 시선을 통해 오전에 아이를 지운 밀레나가 배를 깔고 누워 새우깡을 먹는 모습이, 보일러통 옆에서 침을 흘리며 잠든 모습이, 그녀의 피로함과 비루함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밀레나의 사실적으로 흘리는 침 사이에서 동시에 새어나오는 슬픔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면, 무심한 듯 담담한 듯 흘러가는 밀레나의 시간 속에 숨겨진 환멸과 피로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아프게 감각할 수 있다면, 이 순간, 시는 곧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거기,」)가 된다. 또한 문학이 감당하는 정치는 카프카와 밀레나가 송신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기계들이 피 흘리며 돌아가는 도시(「燃霧 도시」)와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Quo Vadis?」)을 발언하는 실증(實證)이 될 것이다.
시인의 ‘눈’(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증언하는)과 ‘혀’(떨고 있는 어린것을 핥아주는)와 ‘손’(부랑자의 흰 뼈를 어루만지는)이 현실의 상처를 기입하고 위무하는 감각을 자처할 때, 이 감각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한미FTA와 쇠고기 협정을 비판하고(「문학적인 삶」) 여수 출입국보호소 노동자의 사망에 분노하는(「Quo Vadis?」) 양심을 갖출 때,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의 연대를 상상하는(「러브 어페어」)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로서의 문학의 정치는 수행된다.
지금-여기, 시가 씌어지는 이유
진은영이 ‘사과의 역사책’과 ‘예수의 상징계’를 버리고, 대문자의 역사와 엘리뜨의 시선을 거부한 채 ‘머리’의 사유가 아닌 ‘손가락’의 감각에 의지하여 발명중인 시의 ‘다른 미래’를 감성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새로움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니 이제 시인이 “대답해 보아/나는 누구의 연인인가?”(「방랑자」)라고 스스로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준비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흰 셔츠 윗주머니에/버찌를 가득 넣고/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 우리의 사계절/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우리는 매일매일」 부분
바그다드로 가서/푸른 장미/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학살당한 손들이 치는/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러브 어페어」 부분
감성론에 대해서. 겁나는 속도와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시한 시들만 토해”내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는 시인에 대해서 가끔은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대학 시절」)의 감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한점을. 이것은 ‘어설픈’ 자본주의적 감성으로 매일매일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시인의 시절을, 느닷없이 침입하는 선명한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정치학에 대해서. 미국-멕시코 FTA 이후 급증한 실업의 고통 속에서 미국의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어느 멕시코 청년과 폭격소리 끊이지 않는 바그다드에서 전세계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박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불가능한 정치적 현실을 가능한 시적 가상으로 빚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열렬하다. “학살당한 손들”의 연대에 의해 시는 소수자들이 주관하는 사랑과 우정의 판타지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들 문장에서 어느새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다. 말의 미학과 이미지의 조합으로 현실의 단면을 감성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그렇고, 감각적 알레고리의 세계로써 시대의 폐허를 감지하고 어루만지는 방식이 그렇다. 지시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타인을 위해 노래함의 영광. 시인은 이것이 “고통과 비명의 자유로운 확산과 교역”(「문학적인 삶」) 속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러브 어페어」)라고 말한다.
진은영에게 시의 유토피아란 아마도 감성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서로를 투신하여 ‘미적으로’ 결합하는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감성과 난해한 문법으로 무장하는 젊은 시인들의 지형 안에서 그 상상의 영역은 지극히 빈곤해 보이며, 때문에 그녀의 곤경과 고투는 충분히 격렬한 것이 된다. 그녀가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나에게」)를 스스로에게 주문할 때, 영구 진행인 실패의 운명이란 얼마나 격렬한 것인가. 진은영의 시가 “예쁜 여자, 통일성, 넓은 길이나 거짓말과 같은 것들”(「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이 있는 “이전 詩들”의 영토를 넘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나의 친구」) 전적으로 아름답게 결합하는 “이번 詩”의 지도를 그리고자 할 때, 그녀의 문학적 발명이 지금,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그녀의 시를 사랑하는 얼마나 다행한 이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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