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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통일신라론’을 다시 말한다
김흥규의 비판에 대한 반론
윤선태 尹善泰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저서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신라의 발견』(공저) 『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공저) 등이 있음. yoonst@dongguk.edu
만일 카이싸르에 대한 나의 생각과 몸젠의 생각이 다르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틀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역사적 사고는 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이지 몸젠의 과거에 대한 것은 아니다. 몸젠과 나는 많은 것을 같이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같은 과거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이며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대변자인 이상 우리는 각기 다른 과거를 갖는다.
-R. G. 콜링우드
1. 글을 시작하며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에 김흥규(金興圭)라는 분이 당신 논문이 그릇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고, 전근대의 유산과 기억을 하찮게 여겨, 비평하기에도 과분하다는 논평을 실었다며 읽어보라고 했다.
비판의 강도가 무척 센 걸 보니 김흥규 교수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자료를 찾았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급히 구해 읽어보았다. 좋은 비평은 상대방의 주장이 자기와 달라도, 그 내용을 정확하게 소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흥규는 자신의 생각만이 이성이고 선이었다. 학술비평이라고 하기엔 그의 글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첫째로 그는 오늘날 국사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통용되는‘통일신라론’이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비평을 위해 내가 글에서 쓰지도 않은 말을 작위적으로 지어냈다. 셋째로 그는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모른다. 이로 인해 자신이 전근대 한국의 역사학 전통과 담론 유산을 높이 평가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전근대의 역사가들을 얼마나 심하게 이용하고 모욕했는지를 모른다.
후술하겠지만 김흥규는 김부식(金富軾)에서 안정복(安鼎福)에 이르는 전통시대 여러 역사가의 사상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왜곡했다. 아니 심지어 역사학 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한다. 김부식이나 안정복은 연대기와 자신의 사론(史論)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썼는데도, “그에게는 이 많은 자료들이 왜 보이지 않은 것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실수나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가한 비평의 내용과 강도로 볼 때, 그는 확신에 차 있다. 나는 그의 강자연(强者然)하는 계몽주의적 태도가 나의 주장을 자기식대로 이해했던 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완벽히 구성하기 위해 나의 핵심적 논거들을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관심이 있으나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읽으면,‘이 부류의 글들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거야’라며 딱 넘어가기 쉽게 글을 매만졌다.
김흥규는 나의 논문에 대한 비평을 통해 “근간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황에 대한 범례적 문제제기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에게 과분한 것이 이 말이란 걸 그는 모른다. 그는 나의 글을 식민지근대성론자들을 비판할 수 있는 약한 고리로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약한 건 맞지만, 고리는 아니다. 그들은 나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 나의 글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오마주’에 불과하다. 나 정도의 상징적 논거도 넘지 못할 기초체력으로 어떻게 범례를 세운단 말인가!
2. ‘통일신라론’에 대한 이해
김흥규는 나의 글이 무리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는데 그중에서 주목할 두가지 점은‘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미와 삼국통일 시점의 설정문제라고 하면서 나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김흥규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 377면).
①‘통일신라’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은 “하야시가 발명한 것이며, 『조선사』는 그 최초의 역사서”다. 신라 때의‘일통삼한’의식이 조선후기의 신라정통론으로 채택되고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신라통일론)은 분명히 다르다.
②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들이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 이후를‘신라기’로 독립시킨 체제에서 “분명히 신라통일의 의의를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야시의 견해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전근대의 신라통일론과 다르면서 민족주의 사학의 내용과 같다.(각주14: 윤선태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 역사학의 성립」, 황종연 엮음 『신라의 발견』, 동국대출판부 2008, 58~59면)
그러면서 김흥규는 “위의 두 입론은 우선 서로 충돌한다. ①의 주장은 하야시의 『초오센시(朝鮮史)』 이전에‘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담론이 없었다는 것인 데 비해, ②의 주장은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이 있었으나 통일 시점에 대한 인식에서 하야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①의 입론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개념을 삽입했다. 일통삼한론(a)과 신라통일론(c) 사이에 신라정통론(b)을 끼워넣고, b와 c가 다르니 a와 c도 같지 않다는 논법이다”라며 혹평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글은 완전 모순덩어리다.
그러나 위 ①의 입론은 “고전문학도”다운 김흥규의 조작이다. 따옴표 있는 문장은 나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그 주어인‘통일신라’<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은>에서 < >부분은 김흥규가 창작하여 삽입한 것이다. 왜 남의 글을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가?
내가 문제제기한‘통일신라(신라통일)’라는 담론은 현재의 국사교과서와 일반 개설서에서 통용되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담론이다. 이들 책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시점이 아니라, 나당전쟁을 거쳐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완성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국사교과서는‘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신라의 삼국통일’을 목차로도 분리시켰고,‘신라의 삼국통일’항목에 나당전쟁의 승리과정을 묘사하면서, “금강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 평양에 있는 안동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내가 문제제기한‘통일신라’라는 담론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만이 아니라 <나당전쟁까지도 시야에 넣어 삼국통일의 완성을 묘사하려는 역사가의 상상(想像)>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신라론이 언제부터 생성되었는가를 추적하여, 이 담론이 하야시에 의해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김흥규는 이러한 통일신라론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으로 대체하여, 결국 ①과 ②가 충돌하게 만들었다.
내가 글을 너무 난해하게 써서 그가 착각했던 것일까? 내 잘못인가? 분명 아니다. 후술하지만 그의 글 자체에 증거가 많다. 오늘날의‘통일신라론’에 대한 나의 정의는 내 글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앞서 그가 내 글을 간추렸던 인용문에도 보인다. ②에 “하야시의 견해는‘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전근대의 신라통일론과 다르다”고 김흥규도 명확히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①의 주어로 하면 ①과 ②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한편 내 글은 전근대의 신라통일론, 예를 들어 일통삼한론(a)이나 신라정통론(b)은 오늘날의 신라통일론(c)과 다르며, 오늘날의 신라통일론은 하야시에 의해 최초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을 간단히 도해하면 (a≒b)≠c이다. 즉 a, b어느 쪽도 c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흥규가 말한 것처럼 “일통삼한론(a)과 신라통일론(c) 사이에 신라정통론(b)을 끼워넣고, b와 c가 다르니 a와 c도 같지 않다는 논법”을 펼칠 필요가 전혀 없다. b와 관계없이 a와 c는 서로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김흥규는 내가 문제제기한 통일신라론을 하필이면 왜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으로 대체했을까? 그 답은 의외로 쉽다. 김흥규 자신이‘통일신라론’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으로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라시대의‘일통삼한론’이후 전근대 한국의 역사학 전통과 유산을 통해 이미 통일신라(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의 관념이 만들어졌는데, 어찌 하야시 같은 식민사관의 첨병이 그런 담론을 발명했다고 헛소리를 하느냐고 비분강개한 것이다. 이런 확신에 찬 그의 선입관이 내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 제일(第一) 원인이었다.
그런데 김흥규와 같은 주장이 나올 거라고 나는 내 글에서 이미 예상해놓았다. 그가 간추린 ①을 보라. “신라 때의‘일통삼한’의식이 조선후기의 신라정통론으로 채택되고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신라통일론)은 분명히 다르다”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더욱이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이 신라시대의 일통삼한론에서 비롯되었지만, 또 그것이 조선시대에 신라정통론으로 발전했지만, 그러한 신라통일론은 오늘날의 신라통일론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내가 이미 명확히 말한 대목이다. 만약 내가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이해했었다면, 나는 이번 논문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김흥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가 나의 글을 간추린 위의 ②에 그 증거가 보인다.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서 신라통일의 의의를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고맙게도 소개해주었다. 또 그가 쓴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이란 어휘도 어둠을 밝히는 등대다.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은 전근대에도 신라가 통일했다는 관념이 있었다는 내 주장을 그가 추상화시킨 용어다. 나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사용했어도 무방하다…), 김흥규 자신이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다.
논평자의 역할은 상대방의 주장을 정확하게 소개해주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을 제대로 보여주기는커녕 왜 자기의 생각을 나의 글에 덧씌워 나의 글을 엉터리로 만들려 하는가! 통일신라론에 대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김흥규는 내가 설정한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을 소개하고, 그와는 다른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면서 논평을 시작해야 했었다. 그렇게 했으면 나의 주장도 드러나고 독자가 김흥규의 비평을 감검(勘檢)할 여유도 생기지 않았겠는가!
3. 전근대의 역사서와 나당전쟁
하야시가 나당전쟁을 시야에 넣은 신라의 통일과정을 최초로 발명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김흥규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378~81면).
하야시는 약간의 군사적 충돌 이상의 “전쟁”을 언급한 바 없으며, 따라서 신라의 승리라는 것도 거론되지 않았다. (…) 하야시는 신라·당 사이의 치열한 전쟁과 신라의 승리 및 당 세력의 축출을 의도적으로 서술에서 배제했고, 그 귀결 시점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 『삼국사기』 등의 전통적 사서들과 비교해볼 때 하야시는 오히려 전후(戰後) 처리에 관한 양국 사이의 갈등과 이로 인한 7년간의 본격적 전쟁을 소규모 군사충돌인 것처럼 희석시켰을 따름이다. (…) 그〔윤선태〕가 하야시의 새로운 담론이라고 강조한 “신라가 점차 백제의 땅을 취하여 차지하고, 또 고구려의 반란하는 무리들(叛衆)을 받아들였다”는 대목은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기사의 일부이며, 같은 책 「김유신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대목은 조선시대의 많은 역사서에 거듭 수록되었다. “조공·책봉의 사대질서” 속에 불가능하던 것을 하야시가 새롭게 포착했다고 윤선태가 단언한 내용이 사실은 전근대 한국 역사서들의 공통 유산이었던 것이다.
장황하게 인용했지만, 간단히 요약된다. 김흥규는 하야시의 글에 보이는 나당전쟁 이야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미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고, 심지어 그것보다 소략하며 신라의 승리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당전쟁을 시야에 넣은 통일신라론은 『삼국사기』 이래 전근대 한국 역사서들의 공통 유산인데, 윤선태가 하야시가 발명했다고 허튼 소리를 했다는 주장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역사학개론서 몇권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농담으로도 할 수 없다. 김흥규는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전혀 모른다. 그에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을 꼭 권하고 싶다. 키스의 추억도 남녀는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콜링우드(R. G. Collingwood)가 앞서 말했지만 우리는 같은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 또한 각기 다른 과거를 갖는다. 그래서 과거 그 자체의 지식은 역사가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하야시는 과거(『삼국사기』의 기사)를 자신의 연구에 이지적으로 반영했다. 그건 『삼국사기』의 과거가 아니라 하야시 자신의 현재적 과거다. 이런 뜻에서 과거는 현재의 한 국면이며 기능이다.
김흥규도 앞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하야시는 신라·당 사이의 치열한 전쟁과 신라의 승리 및 당 세력의 축출을 의도적으로 서술에서 배제했고, 그 귀결 시점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처리했다”고. 그런 하야시의 현재적 과거를 주목하기 바란다.
앞서 비록 내 주장을 김흥규의 생각과 뭉뚱그렸지만, 부디 “전근대 한국 역사서들”만이라도 “공통의 유산”으로 묶지 말고, 『삼국사기』의 나당전쟁과 『동국통감』의 나당전쟁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의 나당전쟁과 하야시의 나당전쟁 기술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연속하는 것 같지만 동일한 것 같지만, 역사의‘균열’은 없는지 냉정히 바라보시길 바란다. 그런 걸 다 본 뒤에 균열은 없다 선언하시라.
그렇다면 윤선태는 지난 논문에서 왜 그런 걸 안 보였는가 묻고 싶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인 이야기라 지난 논문에는 내가‘간단히(그래도 핵심은 말했다…)’이 문제를 처리했다. 그랬더니, 김흥규는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일반적 견해를 투사한 착시 내지‘읽어넣기’로 보인다”며 사학계를 모독했다. 자신의 학문간 통섭 능력이 부족한 것은 반성도 하지 않고, 사학계의 일반화 추상화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데 내가 거기에 기대어 슬쩍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위에 내가 인용한 내용을 나열해놓았다.
그러나 사실은 김흥규가 오히려 자신이 『삼국사기』를 보고 “7세기말의 상황과 삼한통일 담론”이라고 상상(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독창적 상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에 대한 학습을 거쳐 상상)했던 것을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또 조선시대의 역사가들도, 똑같이 상상했던 것으로 전가하고, 그들 뒤에 숨어버리는 착시효과를 노렸다. 이건 단순히 그가 나에게 가한 언사를 되돌려주려는 말장난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객관적 증거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나당전쟁 기사를 통해 조선시대 역사가도, 또 오늘날의 우리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발명’이라고 한 것을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으로 김흥규 역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삼국사기』를 보고 상상했다고 해서, 『삼국사기』의 찬자(撰者)나 『삼국사기』의 기사를 그대로 수록한 『동사강목』의 찬자가 나와 똑같이 상상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특수한 국면에서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김부식과 안정복과 김흥규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며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김부식도 안정복도‘일통삼한’‘신라통일’이라는 어휘를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의의를 분명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조공·책봉의 사대질서에 함몰된 유학자였기 때문에 나당의 대립까지도 시야에 넣어,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한 증거는 정말 많다.
김유신은 상국(上國, 당)과 협력하여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빛나는 업적과 명성을 남기고 자기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 인용문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와 있는 저자 김부식의 사론(史論)이다. 조선 성종대에 완성된 『동국통감』에는 이 사론이 김유신이 죽은 문무왕 13년 즉 나당전쟁이 한참이던 시점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보라! 『삼국사기』도 『동국통감』도 나당전쟁의 기사를 상세히 연대기로 나열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안중에도 없고 “당과 협력”속에서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국통감』은 고구려가 멸망한 문무왕 8년(668) 이후부터‘신라통일’이며, 이때부터‘신라기’로 독립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문무왕 19년(679) 궁궐을 성대히 보수한 것에 대한 『동국통감』의 사론은 전근대의 역사가들이 나당전쟁의 기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동국통감』의 찬자들이 나당전쟁 기사를 왜 그렇게 상세히 재수록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준다.
문무왕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통합해서 하나로 만든 것은 대저 태종이 널리 땅을 개척한 계략과 김유신이 찬조한 힘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당나라 조정에서 장수를 명하고 군사를 보내어 귀순자는 도와주고, 반역자는 토벌했던 공로가 또한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통일된 뒤에는 자만하여 사치하려는 마음이 갑자기 생겨났으며, 고구려의 반란하는 무리들(叛衆)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百濟故地)을 점거하면서 감히 천병(天兵, 당나라 군사)에 항거하여, 덕을 배반하고 순리를 범하다가 대방(大邦, 당)의 원수가 되어 폄삭(貶削)을 당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뉘우쳐 사과하려는 기색이 없이 교만한 생각만을 더욱 길러서 궁실을 높이고 원유(園囿)를 확대했다. (…) 비록 능히 태종의 남은 공렬(功烈)을 승습(承襲)하여 강역을 회복하였으나, 끝내 편안하도록 돕는 계책이 자손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난적이 서로 잇달아서 신라의 왕업이 날로 쇠하여졌다. 〔문무〕왕이 능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 나태하고 교만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東國通鑑』 卷9, 文武王 19年 臣等按)
『동국통감』의 찬자들은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중(叛衆)을 끌어들이고, 백제고지를 차지해 당과 전쟁을 벌인 사실을 천자의 덕을 배반하고 순리를 범한 참람된 행동의 본보기로 남긴 것이다. 귀순자로서의 태종 무열왕과 배반자로서의 문무왕을 포폄(褒貶)하고, 당에 귀순해 반역자(백제·고구려)를 토벌할 수 있었던‘통일’과 당에 항거해 교만해져 나당전쟁으로 쇠락해간‘통일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
앞서 김흥규는 나당전쟁의 승리를 삼국통일의 완성으로 보는 담론이 전근대 역사서들의 공통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조선의 역사가들은 문무왕이 통일 이후 고구려의 잔당을 끌어들여 당에 항거했기 때문에 태종의 통일의 공훈마저도 망치게 되었다고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과거라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것. 그게 바로 역사다.
정말 김흥규는 이런 명확한 객관적인 사론이 있는데도, 고구려의 반란하는 무리들이 『삼국사기』 문무왕 몇년 기사에 나온다느니, 나당전쟁에 승리하면서 신라통일이 완성되었다는 담론이 “전근대 한국 역사서들의 공통 유산”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관련 증거가 더 있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전통시대 역사학의 유산과 담론을 하찮게 여겼다는 김흥규의 의식과 그 내면이다. 전통시대 역사가들이 나당전쟁을 시야에 넣어 삼국통일의 완성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 그들을 배려하지 않고 하찮게 여긴 것인가? 그럼 이제 위 사론들을 통해 그들이 나당전쟁을 신라의 통일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망친 배덕(背德)한 행동으로 바라본 것이 분명해졌는데, 이제 김흥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앞으로 전통시대 역사학의 유산을 하찮게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나당전쟁을 시야에 넣어 삼국통일의 완성을 상상하지 않은 것은 전통시대 역사가들의 한계도 잘못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적 관점에서 정말 놀랄 만한 역사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글의 서두에서 김흥규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현재적 관점에서 김부식부터 안정복에 이르는 전통시대 역사가들을 이용하고 모욕했다고 표현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으로 하야시가 나당전쟁을 시야에 넣은 통일신라론을 최초로 발명했다는 말도 그를 훌륭한 역사가로 칭찬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김흥규의 의식에는 그것을 꼭‘우리’가 먼저 상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첨병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에게는‘수용능력’을‘창조’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진화론의 안타까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국을 지역화하고, 그것을 식민지와 동격으로 놓으려는,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라는 모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나당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했다는‘통일신라’의 표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자명한 것이어서 그것의 역사적 기원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친숙한‘통일신라’의 표상은, 다시 말하건대, 근대의 발명품이다.
오늘날 통용되는‘통일신라’라는 담론은 백제·고구려의 멸망에서 기점을 잡는 전통시대의 일통삼한론 또는 신라정통론이 아니라, 나당전쟁을 거쳐 당 세력을 축출한 676년을 핵심적 기점으로 삼는 신라통일론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인식은 하야시의 『조선사(朝鮮史)』(1892)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를 번역하여 광무개혁기 때 국사교과서 편찬에 활용했던 현채(玄采) 등을 통해 조선에 수용되었다.
하야시는 『조선사』 권2 제3편 상고사의 목차에‘제5장 백제·고구려의 멸망’과‘제8장 신라의 통일’을 별도로 설정했다. 이러한 목차로도 알 수 있지만, 그는‘백제·고구려의 멸망’과‘신라의 통일’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하야시는 신라의 통일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그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고구려 남쪽 국경까지 주군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통일의 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야시가 애초 나·당의 대립을 강조하는 신라통일론을 구상한 것은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일본의‘아시아연대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과의 대립과 전쟁을 거쳐 신라의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하야시의 통일신라론에는 청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당시 일본 지식인의 굴절된 희구(希求)가 담겨 있다.
끝으로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김흥규의 비평에는 내가 감사드려야 할 좋은 지적도 있다. 내 글에는 김택영(金澤榮)의 『동사집략(東史輯略)』이 하야시의 『조선사』를 역술한 것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이다. 내 글에서의 취지는 김택영의 임나일본부관(任那日本府觀)이 하야시의 『조선사』를 통해 수용되었음을 강조한 것이지만, 김택영이 하야시의 통일신라론도 수용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어 큰 문제가 있다. 나의 잘못이 분명하다.
그러나 김흥규가 이러한 나의 잘못을 하야시의 신라통일론을 받아들였던 개화기의 교과서가 마치‘3건’이나 되는 것처럼, 수적(數的)으로 부풀려 보이게 하려고 작위적으로 과장한 것이라고 비평한 대목을 읽고는 그가 정말 내 글을 읽었는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내 글에서 김택영의 『동사집략』은 하야시가 아니라 현채를 위해 등장시킨 역사서다. 기존에 김택영을 근대역사학의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김택영과 현채의 『조선사』 수용방식을 대비하여, 김택영에게는 현채와 달리 근대적 역사인식이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내가 만약 하야시의 신라통일론을 수용한 개화기 교과서의 수적 부풀리기를 시도하려고 했다면, 『초등대한역사』(1908)나 안종화(安鍾和)의 『초등본국역사』(1909)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담론의 발명이나 수용은 양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라는 표상 창출은 당시 한국인의 지적·상상적 능력이 전면적으로 동원된 작업이었을 뿐 아니라, 후대 대한민국의 정치실험과 문화건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업이었다. 특히 해방 이후 손진태(孫晉泰)에 의해‘통일신라’라는 조어가 탄생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소비했던 70~80년대에 대해서는 후고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김흥규 교수의 따끔한 충고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