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분단체제론과 한일 시민사회

백낙청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읽고

 

 

기미야 다다시 木宮正史

토오꾜오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 저서로 『박정희정부의 선택: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 『韓國: 民主化と經濟發展のダイナミズム』 등이 있음.

 

 

1. 분단체제론에 대하여

 

백낙청(白樂晴)의‘분단체제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떤 귀결을 초래하거나 어떤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기보다는 한반도가 처한 분단이라는 상황과 관련된 여러 현상을 총괄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각 현상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실제 분단체제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그것은 ~이다’라는 명확한 형태의 정의를 저자 자신도 내놓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이론은 기존의 관점, 예를 들어 통일지상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시각, 한국 내부의 민중혁명에 집착하는 민중적·계급적 시각, 한국의 선진화의 진전을 통한 북한 흡수통일, 분단고착화를 용인하는 입장 등과의 차이를 명확히한 후,1 분단체제 자체의 역학이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힘을 만들어낸다는 다이내미즘(dynamism)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학자들과도 지적 교류를 할 기회가 많은데,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그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평자는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매력을 느낀다. 그 까닭은 한반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연구자로서 남북 분단이 한국사회를, 그리고 북한사회를 얼마나 강력하게 규정해왔는지 절감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도 여전히 규정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분단체제론은 한국 및 한반도의 특수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세계적인 외연을 갖는 개념이다. 저자는 한반도 분석을 독일, 베트남, 예멘의 분단 및 통일과 비교하여 그 차이와 동일성을 뚜렷하게 드러냄으로써 한반도 분단과정의 특징과 통일의 조건에 관한 논의의 설득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2

평자가 한국·한반도 연구를 지향하게 된 계기는 냉전체제 및 남북한 분단체제라는 강력한 제약조건 아래에서, 게다가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군사독재정권’아래에서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달성하여 아시아 신흥공업경제(NIEs)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당시 주목을 받고 있던 월러스틴(I. Wallerstein)의‘세계체제론’에 입각하여 분석해보고자 했는데, 그후 평자는 한국·한반도 지역연구에 점차 전념함에 따라 세계체제론이라는 시각 자체는 점점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처한 글로벌한 냉전체제 및 급격한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두가지 요인, 그리고 이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세계체제의 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는 지적 자극으로 가득찬 작업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를 한국 및 한반도에 초점을 맞춰 전개하고자 하는 목표를 잊은 적은 없다.3 그런 까닭에 저자가 제시한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의 분단이나 통일을 기존 논의와 다른 차원에서, 게다가 대국중심이 아니라 한반도라는‘주변부로부터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자에게는 항상 의식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4 분단체제론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좁은 의미의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분단체제 자체의 역학이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역학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정책론이나 운동론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동태적인‘생명력을 가진’개념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분단체제론이 제시한 논점 및 그것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2. 대북인식과 대북정책

 

첫째로, 대북인식과 이와 관련한 대북정책에 대해서 살펴보자. 저자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에 대해 과도하게 관용적인” 대북 유화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북한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논할 때, 북한의 대응 여하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일관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는 안이한 낙관론을 저자는 배제한다5(147~48면).

평자는 한·미·일을 관통하는 대북 강경론이 공유하는 전제에 강경한 압력행사가 북한의 굴복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낙관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자세는 북한 스스로가 과거를‘뉘우치고’핵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북한에 대한 이익 공여가 가능함을 제시함으로써 북한을‘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북한의‘선의’를 기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북 강경론이 북한의‘선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로 보이지만, 한·미·일의 대북 강경론자의 논리 속에는 언제나 이런‘낙관론’을 엿볼 수 있다.

이런‘낙관론’과 저자의 분단체제론은 전혀 다르다. 북한 정치지도자의 의도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선택을 불가피하게 하는 분단체제의 구조 자체를 문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정일 자신도 분단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자 중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분단체제를 구성하는 다른 행위자의 선택에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127면). 어떤 특정한 행위자의 선택에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핵과 관계정상화를 둘러싼 북미간 상호불신이 분단체제의 구조로부터 귀결되는 것이며, 이런 구조 자체를 변혁하는 일 없이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저자는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분단체제의 구조변혁을 위해 저자는 한국 시민사회를 한국정부와 구별된 독립 행위자로 설정하여 그 역할에 기대를 건다(138~39면).

북한의 선택은 특이한 체제, 특이한 지도자에 의한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성요소로서 형성되는 분단체제에 의해 제약됨을 저자는 전제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던져야 한다. 핵개발이라는 선택을 허용하고 촉진하는 체제의 구조적 조건을 어떻게 제거해갈 것인가? 혹은 이런 체제 자체를 어떻게 변혁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 위해 한국 정부나 시민사회가 짊어져야 할 역할은 충분히 많지 않은가? 따라서 아무리 북한이‘통미봉남(通美封南)’전략을 통해 핵문제는 북미간의 문제이지 남북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워도,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과민 반응하여 핵개발 문제의 해결을 남북 화해협력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게 된다(50면).

핵문제와 관련한‘통미봉남’전략에 대한 한국사회의 조바심이 북미관계의 틀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틀 안에서도 북핵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이명박정부의‘비핵·개방·3000’구상을 탄생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 스스로가 미국의 핵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또 한일 양국이 미국의‘핵우산’아래에서‘보호되고’있다고 하더라도, 북한 핵의 위협에 관해 핵보유국인 미국과 그렇지 않은 한일 양국 사이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북핵문제를 북한의 주장대로 북미관계의 틀에 맡겨두어야 한다고는 평자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을 남북한 사이의 의제로 삼자는 이명박정권의 자세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핵포기를 전제로 삼아 북한으로 하여금 개방정책을 선택하게 도와주겠다는 오만한 자세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핵이 어떤 의미에서 한국에 위협이 되는지를 북한에 명백하게 제시하고, 왜 그것이 남북 사이의 문제여야 하는지를 남북협의의 장에서 의제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북한에 대해 철저한 현실주의적 입장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북핵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편에서 과소평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을 선택하게 한 분단체제의 여러 요인을 가능한 한 제거한 위에서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 듯하다. 특히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정치적 의사를 표명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을 포함한 핵문제에 어떻게 대처해갈 것인지 더욱 명확한 고찰과 실천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3. 시민참여형 통일과 변혁적 중도주의에 관하여

 

둘째로, 분단체제론의 특징은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분단체제의 관련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그후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되었고, 이런 민주화된 정치체제하에서 북방정책 및 대북 포용정책이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견해가 한반도 안팎에서 일반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의 정치체제가 분단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이며, 한국의 민주주의도 분단체제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에 따라 남북 화해협력에서 상당 정도의 합의가 형성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이명박정권으로의 정권교체에 의해 대북 포용정책이 재검토됨으로써 한국내 정치에서의‘남남갈등’이 격렬해졌다는 것이다(76면).

단 평자가 볼 때 대북정책에 관해 한국의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왜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한국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사고되어야 하는가? 바꿔 말하자면 대북정책을 둘러싼 대립이 한국내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는 것은, 한국의 국가 및 사회의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평자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답할까? 저자는 한국의 국내정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대북정책을 둘러싼 대립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틀림없다.‘통일지상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시각’과 스스로의 시각을 구별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는 확인되는 바다. 통일을 위해서는 국내 대립은 덮어두고 대동단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억압이나 차별이 분단체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며, 이를 자각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분단체제의 변혁으로 이어진다는 입장인 셈이다(20~24면). 저자에게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지만, 이는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할 민주화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후에 민주화운동이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양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저자의 입장을 증명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를 계기로 한‘87년체제’가 남북분단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53년체제’의 한 국면이었다는 평가(165면)는 흥미롭다. 또한 저자는 “한국 내부의 민중혁명에 집착하는 민중적·계급적 시각”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분열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사상을‘중도’로 자리매김함으로써 현재진행형인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타협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55면).

이러한 전제 위에서 저자가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변혁적 중도주의’라고 자리매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이명박정권 등장 이후, 세계 금융공황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세계화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을 육성함으로써‘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자세가 강화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한국 국내정치의‘진보에서 보수로’라는 변동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는‘앞서 나간 한국’이‘뒤처진 북한’을 흡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남북의 동질화나 균형적 발전보다는 북한을 흡수하기 위한 선진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한국 내부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어떤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는 가장 현실성있는 씨나리오이며 평자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가능성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며, 나아가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현재 싸우고 있는 최대의 논적은 한국내의 이런 사고 경향이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이런 사고 경향과 싸우고자 하는가? 단순한 정치투쟁이 아님은 물론이다. 저자는 그러한‘흡수통일’이라는 발상 자체가, 그리고 그것이 수반하는 남북한 사회의 예상 가능한 변화가 분단체제의 변혁에 기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북통일하에서 분단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통일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분단체제의 극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분단체제의 극복은 통일의 달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분단체제가 초래한 남북한 각각의 억압이나 차별 등 비민주적 체제를 시정하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변혁적’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91~92면).

저자는 이런 과제를 짊어지는 주체로 국가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한국 시민사회에 좀더 많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6자회담 이외의 일곱번째 행위자로서, 또한 남북관계에서의 양 정부 이외의 세번째 행위자로서 각각 위치짓는다(139면). 정부에만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발상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단체제의 제약을 받으면서 형성된 탓에 시민사회의 건전한 발전이 억압되어왔기 때문에 거꾸로 시민사회야말로 분단체제의 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바다. 물론 한국사회에는 분단체제의 수혜자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저자의 자신감에는 독재체제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이룩했고 경제위기를 극복해온 한국사회의 힘에 대한 신뢰가 있다. 평자는 일본의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일본 시민사회에 대해 이런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 시민사회에 거기까지의 신뢰를 보내기는 주저되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동아시아라는, 국가의 이익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장에서 우선 국가간의 이해조정을 평화롭게 이뤄내야 하며, 그런 국가간의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평자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너무나‘보수적’인 것일까?

 

 

4. 일본에 대한 메씨지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이 책의 메씨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평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납치문제로 인한 일본사회의 대북인식이다. 한국사회 이상으로 일본사회에서는‘북한〓악당’이미지가 정착해버렸다. 마치 냉전시대 최절정기의 한국을 방불케 하는 느낌마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2차대전 중의 일본사회의 일단면마저 추체험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만큼 납치문제는 충격이 강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랍자 가족의 깊은 슬픔이 그런 범죄를 저지른 북한체제의 붕괴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대북 강경론과 직결되고, 그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강경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정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식으로 자기완결적 논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그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현상황이다. 바꿔 말하자면 납치문제를 강조하면 할수록 문제해결에서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 것이다.

평자는 이런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특정 행위자에게만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을 둘러싼 구조, 즉 분단체제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속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6 한국에서 일본인 납치문제에 관심이 적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꾸로 일본사회에서 남북분단이나 그것에서 비롯한 남북 이산가족 문제에 관해서는 더 관심이 낮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분단체제하에서 자유로운 상호교류가 거의 막힌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분단체제는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까지 포함한, 적어도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성립한 것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납치문제의 해결도 분단체제 극복의 일환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전망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일 양국간의 교류는 국가 차원뿐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 특히 1990년 이후 괄목할 만한 활발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한일 시민사회의 교류를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충실한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런‘재산’을 어떻게 유효하게 활용해갈 것인가? 분단체제론은 이런 매력적인 지적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번역: 김항

 

 

__

  1. 白樂晴 「日本語版への序文」, 『朝鮮半島の平和と統一: 分斷體制の解體期にあたって』(靑柳純一譯), 岩波書店 2008, xviii~xx면.
  2. 백낙청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63~65면. 이하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면수만 표기함.
  3. 이러한 연구성과의 일부는 졸저 『박정희정부의 선택: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후마니타스 2008)를 참조 바람.
  4. 저자 자신이‘주변부의 시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한반도적 시각’을 강조하는 것은, 평자의‘주변부의 시점’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5.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정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데 대해 저자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6. 저자는 일본 잡지 『세까이(世界)』와의 인터뷰에서 납치문제에 관해, 한편에서는 “이런 사건을 눈앞에 두고 일본사회가 충격을 받아 분노하는 것을 우리 한국인들도 깊게 이해하며, 피해자의 슬픔을 동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납치문제에 직면한 일본사회의 대응이 9·11테러 이후의 미국사회의 대응과 유사함을 지적한 후, 인간적인 공감을 얻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나아가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제재를 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문제해결에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 것 아닌가 우려를 나타나기도 한다(白樂晴, 앞의 책 2008, 26~29면). 평자는 납치문제에 관한 저자의 이런 견해에 전면적으로 동의한다. 단 납치문제와 관련해 강경론 일변도의 주장에는 정부가 주도해 이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소박한” 내셔널리즘이나 “권선징악” 감정 등으로 지탱되는 정서적인 일본 시민사회가 그런 주장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나 시민운동의 역할에 기대를 품는 저자와 달리, 대북정책에 관해서는 합리적인 국익의 관점에 기초한 국가의 논리가 문제해결을 위해 좀더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도 평자는 저자와 견해를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