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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꽃이 되는 어둠, 그곳에 달이 있다

구효서 소설집 『저녁이 아름다운 집』

 

 

황도경 黃桃慶

문학평론가. 평론집 『유랑자의 달』 『환각』 등이 있음. agada320@hanmail.net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다.‘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말도 있다. 죽음, 상실, 이별은 그렇게‘말’을 빼앗기고, 무수한 사연을 침묵 속에 묻는다. 죽음이란 주어의 자리에 설 수 없는, 영원히 타자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며, 이별이란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묻어 침묵으로 가는 경험이다. 구효서(具孝書)의 『저녁이 아름다운 집』(랜덤하우스코리아 2009)은 그런 죽음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작가는 전작들에서 죽음을 삶에 내재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한 부분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이 작품집에 오면 이러한 사유가‘죽음을 살리기’위한 혹은‘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서술상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죽음은 우리 곁에 살아 꿈틀대는 것으로 자리하고, 이별은 아린 상처를 넘어 수다한 사연을 불러오는 마술이 된다. 요컨대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이별과 어둠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과 햇빛과 꽃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둠을 뚫고 “5월의 햇살을 읏샤, 밀치며”(「승경」) 세상으로 나오는 신비로운 이야기들.

표제작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작품집 전체의 주제라 할 만한 죽음의 문제에 작가가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무덤’‘묘지’‘산소’‘뫼’라는 단어의 사전적 설명이 제시되면서 시작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처음부터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남편과 남편을 보내고 홀로 남은 아내라는 소설 외연의 이야기가 환기하는 어두운 이미지와 달리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죽음과 연관된 단어들의 나열은‘국어사전 찾기’라는 씨나리오 작가인 주인공의 오래된 습관과 연관되어 기술되면서‘죽음’이라는 어두운 무게에서 벗어난다. 게다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죽음은 남편의 센 머리카락을 뽑아주고 귀를 파주는 아내의 모습, 횡성에 산 땅 앞에 자리한 산소 이장 문제로 나누는 부부의 대화, 약을 챙겨 먹었는지 묻는 아내의 말 등 일상적인 풍경 속에 조용히,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이런 상황이나 서술방식 자체가 죽음이란 시끄럽고 비장하게 다가오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는 한 부분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산소를 껴안고 살 작정이에요?”라고 묻던 아내가 작품의 말미에서 “죽음이야 늘 도처에 있는 건데 마당 한 곁에 좀 있은들 어때요”라며 산소를 그냥 두게 하는 것은,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변화다. 죽음을 단지‘이야기’로서가 아니라‘이야기하기’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구효서 소설을 빛나게 한다.

이 소설집에서 죽음을 삶 속에 끌어안아‘살리는’또 하나의 방법은 그것에 목소리를 주는 것이다. 「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의 전반부는 죽은 피아노 강사의 목소리로 서술되면서 사자(死者)를 전면에 드러내고, 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뒷부분에서도 말하는 이는 대부분 끝에 가면 죽은 것으로 드러나는 도현스님과 여자다. 말을 잃어버린 남자를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사자들의 풍경. 산 자는 침묵하고 죽은 자들이 오히려 말을 하고 있으니, 이는 죽은 자의 시선으로 산 자를 바라보는, 다시 말해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사실 이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야기 끝에서 이 사실을 암시하는 아낙들의 대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아서, 아낙들이 죽은 여자의 존재를 느끼며 소름끼쳐 하는 마지막 대목은 스릴러 영화의 반전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영가인가 보구만. 우리만 오르내리는 길이 아녀”라는 아낙의 대사처럼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같은 세계를‘살고’있다.

그런가 하면 「명두」는 죽은 굴참나무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나는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서두에서부터 죽은 것의‘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이 나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명두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을 삼킨‘걸어다니는 사자’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녀를 보면 사람들은 “죽음이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것”같다며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였다고 하니, 명두집은 그야말로‘살아있는 죽음’그 자체였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죽음이란 삶 저편에 자리한 것도, 두려워하며 도망쳐야 할 대상도 아니다. 명두집의 말처럼 “도망치거나 잊지 말고 그놈과 평생 함께 살아야”하는 것이다.‘죽은 나무의 말하기’는 그 자체로 이런 죽음의‘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저녁이 아름다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죽음을 끌어안은 삶’이라는 주제를 소설쓰기의 과정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이같은 다양한 실험이다. 죽은 이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운 서술이나 씨나리오 형식의 차용(「저녁이 아름다운 집」), 지능이 모자라거나 미성숙한 인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서술(「TV, 겹쳐」 「막내고모」) 등은 이별, 상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영주누나는 영웅적인 투쟁가로서가 아니라 바보 같고 상처 많은 한 인간으로, 그리고 죽은 후 바다에 뿌려지길 바랐지만 그 소망도 좌절되어 시댁 선산에 묻힌 가부장 사회 속 한 여성으로 그려진다(「TV, 겹쳐」). 그런가 하면 항상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게 애틋한 엄마와 고모의 이상한 관계나‘사는 게 끔찍해서’비명이 나올 것 같다는 엄마의 쓸쓸한 삶도 이들을 바라보는 어린 아들의 시선을 통과하면서 생생하고 발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막내고모」). 그것은 어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며, 이를 통해 구효서 소설에서 어둠은 빛을 만들어낸다.

「사자월」은 그런 어둠의 의미를 실연의 이야기에 담아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며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옮겨온다. 애인과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남이섬은 빛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제‘나’는‘그 사람과 정반대의 방향’인 할머니 집으로 간다. 할머니 집은 어둡고 불도 들어오지 않으며, 할머니는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요컨대 할머니는 이제부터 내가 감당하고 견뎌야 할 어둠이다. 그 어둠 앞에, 그녀는 통역해주는 엄마도 없이 혼자 선다. 어둠 한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둔 후 그녀는 그 어둠도 “아주 캄캄하지는 않”음을, “어두워서야 비로소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어둠은 별이 되고 꽃이 된다는 것, 처녀 때 양잿물을 마셨던 실연의 대선배인 할머니가 어둠을 비추는 달이 되었듯 이제는 그녀 자신이 달이 되고 꽃이 되어야 한다는 것. 어둠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이‘달-할머니’의 전언은 이별과 상실과 죽음의 경험으로 이어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찾고자 하는,‘즈문 강에 세월 여일하게 떠 있는 달의 이치’(「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이기도 하다. 그러니 작가는 소설 속 엄마의 말을 빌려 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아”(「사자월」). 어쩌면 이는 구효서 소설을 통해 뒤늦게‘달’을 발견한 우리 모두의 말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