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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석원 張錫原
1969년 충북 청주 출생.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가 있음.
ultravox@freechal.com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천원 한 장을 구걸하는 남자
떠오른 돌멩이 같은 비둘기들
처음 와본 곳 같다
어떤 명령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움푹 패어 있다
한움큼 뽑혀나간 듯하다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니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모든 것을 삼킨다
배스킨 라빈스, 일요신문, 비보이, 달라이라마, KTX, 해양수산부, 아메리카 인디언, 결혼반지, 모더니즘, 야전교범, 북악터널, 아도르노, 우리은행, 하이힐, 가창오리, 동호대교, 불심검문, 사발면, 개인택시, 콘돔, 멕시코만류, 리더스 다이제스트, 콩코스, 옥수수, 무디 블루스, 서정주, 채털리 부인, 청약통장, 롯데리아, 문화상품권, 수유리, 벡스, 갤러리아, 코닥필름, 화계사, 동아운수, 잉여가치, 넥타이, 야간순찰, 라이터, 고르끼, 남대문, 글러브, 안기부, 비정규직 철폐, 유모차, 스타벅스, 막스 베버, 프리즘, 민노총, 반시대적 고찰……
그리고 어느 금요일 저녁의 거리를 걸어갈 사람들
코스닥지수가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밤의 날씨와 모 베터 블루스가 이어진다
비는 반드시 내리리라
아케이드, 초콜릿 케이크, 로가디스 그린과 함께
양파가 걸어가고 달걀이 넘어지고
오븐은 에메랄드처럼 반짝인다
가자 가자 더 멀리 가자
이곳은 유리수와 인테그럴의 땅 수확 없는 땅
애팔래치아 에너미 스테이트 그리고 할인점
세시의 점원들은 정력을 주체할 수 없지
여자들은 수녀처럼 눈이 퀭하지
참을 수 없어 맷돌을 돌리네 빠르게 달궈지네
나는 국자 행주 주걱, 부엌의 주인
나는 씽크대 구석의 양은냄비
모래알로 지은 한 공기 밥이 낯설다네
가자 속보로 가자 나는 하나, 둘, 셋…
이것이며 저것 그리고 여드레째의 시곗바늘
나는 고래 수염이나 봉걸레 자루
입술에서 미끄러져 갈증으로 귀의하는 물방울
슬퍼질 때까지 멈출 수 없는 미싱
움직이자 조금만 움직이자 점원 아가씨 웃을 때까지
삼나무 숲으로 들국화 핀 화단으로
나는 왔다가 간다 왔다가는 가고 왔다가는 간다
카트처럼 화장실로 밀려간다
양파와 함께 달걀과 함께 그리고 퐁퐁과 함께
셔터 뒤의 고요 속으로 도스또옙스끼처럼 스며든다
식탁과 도마와 칼과 더불어
믹서와 더불어 이것과 저것이 되어 나는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