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톰 플레이트 『어느 언론인의 고백』, 에버리치홀딩스 2009
언론인의 눈으로 본 저널리즘의 빛과 그늘
김재중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hermes@kyunghyang.com
한국과 미국의 언론사는 뉴스 제작 메커니즘, 인력충원 및 운용 씨스템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일선 취재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고참기자가 논설실로 자리를 옮겨 사설과 칼럼을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미국에선 보도부문과 논평부문 사이의 경계가 뚜렷해 인력충원이 별개로 이뤄진다는 것도 큰 차이다. 『어느 언론인의 고백』(Confessions of an American Media Man, 김혜영 옮김)의 저자 톰 플레이트(Tom Plate)는 논평쪽에서 주로 일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크고 작은 인쇄매체에서 논설위원과 편집장으로 근무했으며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논설실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정의파 기자의 흥미진진한 취재기 같은 것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보다는 미국 주류언론계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와 치열한 경쟁, 갈등과 격무에 시달리는 언론인들의 삶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국어사전이 언론을‘매체를 통해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한 것을 주목하라. 보도와 논평은 언론의 양대 활동영역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언론은 정확하고 빠른 보도와 예리한 논평을 통해 더 큰 영향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더구나 이 책은 미국 언론계의 논평가들이 사설이나 칼럼을 쓰기 위해 현장기자 못지않게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미국의 1970~90년대 언론계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현대 한국의 언론계에 대입해도 시의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언론계 격언 중에 “정치부 기자는‘말’로 먹고 살고, 사회부 기자는‘현장’으로 먹고 살고, 경제부 기자는‘숫자’로 먹고 산다”는 게 있다. 정치 기사는 정치인의 말 한마디가, 사회 기사는 사건현장이, 경제 기사는 각종 수치가 중요한 취재대상이라는 것이다. 정치 영역을 주로 담당했던 플레이트는 현역시절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김영삼, 김대중, 코이즈미 준이찌로오, 리 콴유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최고위급 정치지도자들을 단독 인터뷰한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뉴스 메이커들은 언론을 적당히 이용한다. “정치인들은 뜨기 위해서 언론에 절박하게 의존한다. 언론 역시 주목받는 기사를 쓰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절박하게 의존한다”(333면). 그렇다고 뉴스 메이커에 대한 접근권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는 매체는 대체로 기피하는 게 인지상정이며, 곤란한 처지에 있을 때는 어느 매체하고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접근권과 보도는 함께 간다. 인터뷰를 딸 수 없다면 좋은 인터뷰 기사를 쓰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21면)
저자가 영향력있는 인사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내부자와의 인맥을 동원하기도 하고,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근해 대화를 나누면서‘워딩’을 뽑아내는 기지를 발휘하는 모습은 한국 언론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현직 대통령 또는 총리의 경우 인터뷰의 주제와 방향을 두고 비서진들과 사전에 씨나리오를 짜는 것은 당연하다.
기자 치고 이런저런 무용담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 정치부에 근무하던 2년 전 나는 여당 의원들이 국회 귀빈식당에 모여 남북관계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이런 모임은‘오프닝’만 언론에 공개하고 이내 비공개로 전환하는 것이 보통이다. 널따란 식당 뒤편엔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이곳에서 종업원들이 음식을 준비했다. 이런 구조를 알고 있었던 나는 조용히 병풍 뒤로 숨었고 관계자에게 들켜‘조용히’쫓겨나기 전까지 오간 대화를 고스란히 수첩에 적었다. 정부·여당의 향후 남북관계 구상의 일단을 짐작게 하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아침 기사를 본 타사 기자들은 물론 회의에 참석했던 의원들조차 “도대체 누구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받았느냐” “기사에 쓰지 않은 내용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차마 “병풍 뒤에 숨어서 직접 들었다”고 실토하진 못했지만 그때 느꼈던 우쭐함이란! 물론 쓰라림을 느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탈이긴 하지만……
그런데 저자의 강조점은 이런 테크닉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특히 열린 마음을 강조한다. 일종의‘내재적 접근법’이다. 그는 아시아쪽 정치지도자들을 많이 인터뷰했고 지금은 UCLA교수이자 프리랜스 칼럼니스트로서 아시아·태평양의 국제관계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시절 리 콴유 수상을 현지에서 인터뷰해 이를 바탕으로 싱가포르에 대한 칼럼을 썼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 칼럼은 리 콴유를 권위주의적이고 반미적인 인물로, 태형(笞刑)이 이뤄지는 싱가포르를 감옥의 분위기로만 그리던 서구 언론의 논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편집장은 “싱가포르는 끔찍한 곳인데 너무 너그럽게 썼다”고 지적하지만, 그는 “거기 가본 적 있느냐”란 말로써 자신의‘공정한’시각을 밀어붙였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이념적 편견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미국 주류언론계에서 플레이트 같은 인물은 흔치 않다.
백인 엘리뜨 남성인 저자는 소수자에 대한 미국 언론 내부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고백’했다. 그는 그 유명한 주간지 『타임』에서 여러명의 편집장 가운데 한명으로 일했는데 지독한 성차별과 관료주의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일테면 매주 써야 할 기사 목록의 건더기는 모두 남자 기자들이 차지하고 여기자들에겐 찌꺼기만 돌아갔다. 그는 이런 관행을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타임』에서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려는 시도는 미국 헌법을 다시 쓰는 것처럼 어려웠다”(261면). 플레이트는 결국 자신이 데리고 있던 유능한 신참 여기자 한명을 『뉴욕타임스』에 소개하는데 그가 바로 『뉴욕타임스』의 간판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명인 모린 다우드(Maureen Dowd)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그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서 일할 때도 비슷했다. 저자는 이곳의 논설실장을 그만두고 나올 때 여성을 후임으로 추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저자가 맺음말에 정리해놓은‘오늘날 저널리즘의 10대 죄악’은 독자의 눈길을 끌 만하다. 배금주의, 무식함, 위선, 당파성, 의견과 사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 잘난 척, 특종에 대한 과도한 열광, 프라이버시 침해 등이다. 언론의 상업성과 당파성 문제는 한국에서도 항상 거론돼왔던 부분이다. 특히 “(저널리스트들의) 지적 자존심이 결핍됐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에 의해 굴러가게 된다는 뜻이다”(420면)라는 지적은 한국 언론의 거목 리영희(李泳禧)가 후배 기자들을 향해 늘상 말하는 가르침을 연상시킨다.‘그 잘났다는 미국 기자들도 한국 기자들처럼 무식하다는 소릴 듣는구나’하는 생각에 묘한 동류의식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자위가 부끄러움을 가려주지는 못한다.
회고록 성격의 이 책은 저자가 대학생 시절 인턴으로 시작해 점점 큰 언론사로, 점점 더 높은 자리로 이동한 행로를 따르고 있다. 그는‘거대 언론사의 필진 또는 고위직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한 학생들의 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궁금증이 언론계 지망생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언론인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 현재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언론계의 속살을 엿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유용한 책이다.
아쉬운 점은 번역과 교정 상태다. 눈에 띄는 오탈자는 제쳐두더라도 원저자의 위트 있는 문장들이 상당히 어색하게 번역됐다. 치명적인 것은 오역이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보자면, 저자는 영국과 미국 언론계의 빈번한 교류를 묘사하면서‘trans-Atlantic journalism’(184면)이라고 썼는데‘대서양 저쪽의 저널리즘’이라고 번역됐다.‘대서양을 오가는’혹은‘대서양을 가로지르는’정도로 옮겼어야 한다고 본다. “데이비드는 내가 안드레아가 사랑했던 뉴욕을 포기하고 그녀가 싫어했던 로스앤젤레스로 오게 한 장본인이었다”(389면)라는 문장 역시 교정과정에서 빨간줄이 그어졌어야 한다. 어색하기만 한 이 문장은 “데이비드는 나로 하여금 안드레아가 사랑했던…”으로 하면 좋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