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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성장소설 대 청소년소설 논쟁에 부쳐
풍문 속의 ‘청소년문학’
조은숙 趙銀淑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문학’은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놓이든 그것에 저항한다. 본격, 순수, 참여, 민족, 여성, 생태…… 그 어떤 숭고한 가치를 가진 말들이 한정하려 하더라도 문학은 언제나 그러한 의도로부터 빠져나가거나 변성되어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막 도착한‘청소년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에 격려와 찬사뿐 아니라 우려와 의혹이 섞여드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청소년문학을 둘러싸고‘청소년’을 잊어버려야 진정한 청소년문학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의 전언들이 쏟아져나오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문학은 언제 어디에나 편재(遍在)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문학이라는 분할의 장이 새삼스럽게 요청되고, 청소년들의 삶과 경험, 욕망과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청소년문학은 여러 풍문과 엇갈리는 견해 속에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담론적 실천의 전략지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문학’은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신조어이며, 범주와 용례가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는 생성중인 개념이다. 때문에 초기의 논의는 청소년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최근에는 어휘풀이 수준에 붙들려 있던 개념상의 혼란을 어느정도 벗어나, 청소년문학 나름의 맥락을 짚어가며 갈피를 잡아가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즉 지난해까지만 해도 청소년문학에 대한 언급이 “완득아, 청소년문학이 뭐냐?”(중앙일보 2008.4.3)처럼 개념을 묻는 질문형으로 제기되었다면, 최근에는 “청소년문학, 몸집만 크고 완성도는 부족”(한국일보 2009.8.31) “청소년을 위한 문학은 없다”(허병식, 『오늘의 문예비평』 2009년 봄호) 등 적극적으로 진단하고 평가하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특히 문학비평에서는 과거에 비해 공격적인 자세로 청소년문학이 성장소설 같은 기존의 장르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고 따져묻기도 한다. “우리 문학의 전통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성장소설’과 얼마나 다른 것이냐”를 증명할 수 있을 때,‘청소년문학’이라는 별도의 호칭이 존립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강유정 「장르로서의 청소년소설」, 『세계의문학』 2009년 가을호), 지금의 청소년소설에는 “교양적 완성도 사회화로 이끄는 성장도 없고, 세상과 대결하는 내면이 아니라 서둘러 갈등을 봉합하고 종결시키는 서사가 존재할 뿐”이라고 비판한다(허병식 「청소년을 위한 문학은 없다」, 앞의 책). 이같은 비평들은 청소년문학 고유의 장르 미학을 묻는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청소년문학이 기존의 성장소설류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도리어 가볍고 미숙해 보이기까지 하는데도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만을, 더 근본적으로는 청소년문학 자체의 존립 이유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래된 물건을 레떼르만 바꾸어 신상품인 양 진열해놓는 기만적인 상술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의혹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들은 도리어 청소년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한정적이고 일방적인가를 드러내준다고도 할 수 있다. 청소년문학에 대한 질문이 축어적 개념풀이 수준에서 형식미학적인 층위로 옮겨가는 단계에서 청소년소설과 성장소설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문제는 청소년소설의 자질들이 기존 성장소설의‘전통’이라는 맥락 속에서는 대개 “미달의 양식”(허병식)이거나‘타락’의 버전으로 읽히기 쉽다는 점이다. 이때 성장서사의 텍스트 규범은 대개 독일 교양소설의 정전들이 제공하는 것들이며, 한국문학에서의 전통이란 일반문학 속의 몇몇 성장소설의 계보들, 예컨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은희경의 『새의 선물』, 신경숙의 『외딴 방』 등에 붙들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문학사적 전통의 목록에는 아동청소년 독자와의 소통을 지향했던 구체적인 실천들, 이를테면 소년소설이나 학원소설 등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았던 대중적 명랑소설 등을‘본격문학’의 장에 포함하지 않으려는 보수성이 문단에서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성장소설만을 문학사에 남게 했으며, 그것이 청소년소설이라고 하면 성장소설만을 떠올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오세란 「청소년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아닌 것」, 『창비어린이』 2009년 봄호).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에 한정되지 않으며, 성장의 코드가 청소년소설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확인된 바다. 청소년문학은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독자’의 특수성 측면에서만 그 실체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작품의 창작, 유통, 수용의 차원에서 계속 해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수준에서 청소년문학에 대한 논의가 성장소설과의 비교를 벗어나서 전개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청소년문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려령 장편 『완득이』(창비 2008)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기도 하고, 현재 청소년소설을 표방하며 창작되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성장플롯의 패턴화 경향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장소설의 규범을 기준삼아 비교하는 관점에서는 청소년문학의 다양성들이 미리부터 차단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최근의 비평들은 청소년문학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 즉 독자와의 소통의 문제를 비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이다. 즉 청소년소설이 적극적으로 환기하는‘독자’의 문제에 대한 질문은 괄호친 채, 청소년소설로 분류되지 않는 소설들(예컨대 김사과의 『미나』 등)이 오히려 “10대의 모습을 훨씬 더 사실적”(강유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동문서답으로 응대하는 것이다. 혹자는 청소년소설의 부상이 오랫동안 내향적인 웅얼거림에 갇힌 채 독자와의 소통에 무력해져버린 문학에 새로운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의 융성과 발전에 힘입어 한국문학이 한층 다채로운 양상으로 진전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김상욱 「전복적 상상력으로서의 청소년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여름호). 그러나 일반문학의 장과 청소년문학의 장이 서로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며 현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그러한 바람이 실현되는 것은 요원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