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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정록 시집 『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

낙관적인 어조의 힘

 

 

김기택 金基澤

시인 needleeye@kornet.net

 

 

단감나무인 걸 누가 모르는가

가지에 단감을 매달아놓았다

—「어린 나무의 발등」 부분

 

단감이 달린 자기를 쳐다보아달라고 떼쓰는 어린 나무의 표정, 자기가 단감나무인 걸 못 알아볼까봐 열심히 단감을 매달고 있는 나무의 지독한 순진성이 웃음을 유발한다. 이 단감나무는 “잘려나간 발가락에/새끼줄 양말을 동이고/비닐 덧신을 신은”채 추운 날 묘목시장에 나와 어서 팔려서 땅에 뿌리내리기를 기다리는 어린 나무이다. 이 나무의 표정에는 “한두살짜리의 어깨가/서른이나 마흔살의 짐을 지고 있는”소년 가장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한 어린아이의 두려움과 방어적인 고집이 보이는 듯하다. 단감나무에 단감이 달렸다는 너무나 뻔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진술하는 어조에는 어린 나무의 순진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낙관적으로 전환시키는 이정록(李楨錄)의 시적 방법이 드러나 있다.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은 어린 단감나무와 같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떨어진 슬픈 대상과 그것을 보는 익살스러운 어조가 부딪쳐서 오는 울림에 있다. 그러나 그 어조에는 상투적인 밝음이나 따뜻함이 없다. 그의 어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식에서 나온다. 이런 어조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현실의 상황이 긍정적으로 바뀌거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대상을 압박하고 괴롭힌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그러한 대상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바꾸게 한다. 그 시선은 대상으로 하여금 어둡고 좁은 시야를 벗어나 부정적인 것을 여유있게 포용하는 넓은 품을 허용한다. 즉 대상으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놀이로 바꿔놓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 할아버지의 죽음과 사람들의 문상을 그리고 있는 「목련나무엔 빈방이 많다」에서, 화자는 할아버지 혼자 살아 쓸쓸하던 집이 죽은 후에야 북적대는 걸 보고 “저렇게 食口가 많았던가”라고 빈정대며 할아버지의 외로운 삶을 부각시키다가, 갑자기

 

     빈방 잇슴

보이라 절절 끄름

 

이라고 씌어진, 아직도 대문에 붙어 있는 빛바랜 달력 한장을 보여준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맞춤법이 서툰 이 문구는 혼자 사는 외로움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보려고 애쓴 할아버지의 순진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 어린애 떼쓰는 것 같은 어조는 뿌리가 뭉툭하게 잘린 채 추운 묘목시장에 나와 단감을 열심히 매달고 있는 어린 나무를 상기시킨다. 할아버지의 글은 명랑하지만 안쓰럽고 낙관적이지만 슬픔이 배어 있다. 그러나 이 안쓰러운 명랑성, 슬픈 낙관성 때문에 문상하는 분위기는 엉뚱하게 밝아진다. 그래서 외로운 죽음의 풍경은 개구쟁이의 짓궂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런 어조 때문에 곡소리는 “목련나무의 빈방”에서 들리게 되며, “목련꽃 이파리들”이 문상하게 된다. 「꽃물 고치」에서는 이 놀이가 더 짓궂어진다. 남이 가꾼 봉숭아꽃으로 꽃물을 들이고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을 자랑하는 팔순 할머니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순진성을 환기시키는데, 이것이 할머니를 “막 부화한/팔순의 나비”로, 총각인 화자를 “수컷”으로 변화시킨다. 화자는 할머니에게서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을 보지만, 이 죽음의 이미지는 “봉숭아꽃 으깨어 목 축”임으로써 신생의 이미지와 묘하게 어울린다.

이정록의 시는 장난기가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대상들을 보면서 항상 낙관적인 여유가 개입할 틈을 노린다. 이것이 때로는 시에 웃음과 여유가 넘치는데도 장난기를 발동시켜 더 많은 웃음을 만들려다가 종종 긴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뒷짐」에서는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손, 그로 인해 일에 놓여나지 못하는 손을 바라보다가 적시에 그 틈을 급습하여, “짐 꾸리던 손이/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는 아주 단순한 동작을 잡아채고야 만다. 몸이 쉬는 자세이자 마음이 한가로워지는 자세인 뒷짐을 늙고 고단한 자의 삶에 개입시킨다. 단순히 두 손만 등 뒤로 옮겨놓았을 뿐인데, 그 순간, 욕망의 눈으로 보면 할 수 있는 일이나 쓸모가 별로 없는 등이 신기하게도 “허공 한 채”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으로 변형된다. 바로 그때, 그 욕심 많던 거친 손 위에도 “무한천공의 주춧돌”이 올라앉는다. 그리고 시인의 의지대로 시는 낙관적인 분위기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의자」 부분

 

‘의자’라는 상징물에는 이정록의 독특한 어조가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몸을 가진 모든 유기체들에게 필연적인 삶의 고통을 바라보는 그의 방식이다. 의자는 어머니의 허리 아픔과 같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겪은 자의 내면에서 제련되어 나온 고통의 산물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이 곧 보리(菩提)’임을 상기시킨다. 보리는 번뇌에 시달리는 자가 부처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의 번뇌를 바로 볼 때 획득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를 보리로 전환시키는 체험적인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의자도 삶의 고통의 변형체이다. 거기에는 낙관적인 어조의 힘과 함께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명쾌하게 단순화해서 보는 시인의 지혜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