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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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수 朴熙秀

1986년생.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yupscp@gmail.com

 

 

 

마리

한 소녀의 기록

 

 

네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마리, 사람들은 널 사랑하지 않는단다. 그건 네 성격이나 외모, 다른 결점 때문도 아니야. 마리, 사람들은 널 싫어하는 게 아니야. 다만 사랑하지 않을 뿐이지. 그러니 그만 무리해도 괜찮단다.

 

에이미 슈틸하프턴 부인이

러크나우의 마리에게

 

러크나우

18571

 

언제나 당신과

 

1856년 1월 7일-데일스베리에서 에이미 슈틸하프턴이 보낸 편지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런던에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수업도 잘 진행중입니다. 유진은 전혀 염려하실 바 없고 폴, 마리, 아이작 모두 학습태도가 성실합니다. 봄학기가 시작될 때쯤 유진은 기숙사로 보내고 나머지 아이들은 런던항에서 캘커타행 배편을 통해 인도로 돌려보낼 계획입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1857년 3월 9일

밤하늘의 별들이 확산 직전의 팽창력으로 휘어지고

폭죽처럼 야자나무가 터져나가는 이 밤,

 

안녕, 평안한가요.

데일스베리에서 당신은 즐겁게 잠들고 있나요, 시트의 평온한 냄새를 맡으며. 암캐처럼. 끈질긴 후력(嗅力)으로. 밤 깊어 벽지 위에 쇠창살의 문양이 떠오르는 이런 감상적인 시간이 되면 나는 소녀다운 예민함으로 예민한 곳에서 당신의 두 손가락 사이를 끈끈하게 빛내던 은실을 꺼내들어요. 깊이 찌르다 곧 물결처럼 녹아 휩쓸리던, 단검, 아, 조수간만의 차. 그것들은 더러운 흔적을 갯벌 위에 가득히 남기고 껍질이 짓밟힌 게들의 울음소리로 달이 혈조(血潮)를 띠게 만들었어요-이렇게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이 개년아, 처음 네가 나를 타락시킨 밤, 네년의 질긴 탯줄 같은 인중, 들끓는 피의 흐름, 썩은 숨결

 

달콤한 약속, 파고드는 손가락, 귓가에서 울리던 먼 고동소리

 

혈관이 터져나갈 때까지.

 

3월 17일

우린 그때 들판을 보고 돌아온 길이었어요. 식민지 태생인 내게 낯설었던 차가운 물. 당신은 신선한 추위였죠. 맑은 노래의 향. 런던보다 잎사귀들 사이에 숨쉬는 서리의 세밀한 싹들이 날 더 행복하게 했어요. 키스. 그날 먹었던 오트밀죽은 따뜻했어요.

 

이곳의 일상, 없어요. 후카를 흔들지 않으면 방은 찜통으로 변할 거예요. 흔들어도 찜통이니까. 오빠들의 눈빛은 잘못 걷어찬 쇠처럼 차갑다. 미친 듯이 더운데 그런 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식사시간. 우리는 다들 고개를 처박고 있다. 알아요? 아버지는 우리를, 완전히…… 알아요? 우린 기계처럼 처먹어요. 손. 입. 찢. 씹. 빨. 토하고, 토하고, 토하고……. 더운 나라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창밖의 원숭이들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고, 저 유혹을 단지(斷指)하여 내 구멍들을 막아놓고파. 나는 흘러가는 자, 당신은 하수도 밑 인력(引力).

 

3월 19일

도서관에 숨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인 것 같아, 마리.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 이제부터는 전혀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하인들에게 인사하고 가정교사의 과제도 즐겁게 해치울 거야. 미소는 마이다스의 손이 되어 만지는 것들을 반짝반짝 먹을 수 없게 만들 거야. 마리, 이렇게 쉬운 거였잖아. 너는 너를 지켜.

늙은 책들이 콜록거리면서 웃고 있잖아. 광기로

 

3월 25일

저번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하나님은 누구나 용서한다고 했어요. 나는 당신 같은 씨발년도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면 개좆도 쓸 데가 없겠구나, 속으로 담담하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신앙심이 아주 흔들린 것은 아니니 오해 안 부탁드려요. 당신, 가슴이 울컥하고 피로 물들 때면 독송자의 목소리, 아, 따스한 연기, 철로 위를 쏜살같이 날아가는 여객선. 그래요. 나는 당신을 광속으로 일흔번씩 용서해요.

 

완전히 멍청한 년이 되어서 태양과 내기를 한 적도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저 해는 오늘밤 지지 않을 거야. 졌고, 졌고, 또 졌어요. 만신창이로 어느날 말을 조금 바꾸자 이후로는 늘 승리했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신다면 해가 질 거야. 밤만 되면 부푼 마음, 소녀답게 대가리를 벽에 꽝꽝 찧으며,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왜, 어둠만

 

달도 별도 아니야.

캄캄하게 말라가는 배설물이야.

 

4월 3일

하이에나들은 “나는 밤의 왕이다, 밤의 왕이다”라 운다고 아야가 가르쳐줬어요. 실제로 내 방 침실에서도 하늘에 촛불이 꺼지면 그 소리가 울려와요. 여우가 우는 밤에 당신은 멀리 떨어진 방에서 나를 그 목소리로 불렀지. 널빤지 삐걱이고, 온몸 뒤틀리고……. 당신이 가르쳐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법이 지니는 침엽수적 가치. 몸속 깊은 곳, 수십만의 바늘을 단 전나무들이 한번에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당신의 흰 어깨, 검은 숲 위 밤별 쏟아질 때, 새끼손가락의 약속하는 형상을 만들며 별자리가 밀고들어올 때……. 아, 별이 죽는 밤, 행위가 끝난 뒤 당신은 내 다리 사이가 뱉어낸 어두운 거품을 묘한 경멸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4월 8일

마른 강둑이 보여. 내가 드러나고 있어. 아야, 내게 자장가를 불러줘. 담장 안에서 깨어나 담장 안에서 잠드는 삶. 어항 속의 영국인들은 입과 항문을 왕복할 뿐. 아야, 네 모국어로 노래를, 네 고향의 향신료를 미풍에 실어보내줘. 내겐 없는 고향.

 

흔들흔들 아가야

잠들거라                                  쉬이, 아가

울긋불긋 앵무새                     잠들렴, 아가

침낭 속의 힌디어                    서섹스 산 암말

흔들흔들 아가야                     회색빛 다정한 암말이

                                             깨면 너를 기다린단다

 

쉬이, 아가Hush, baby.

엄마.

 

4월 10일

겨울방학이 끝나고 마침내 영국을 떠나 캘커타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때 당신은 다른 아이들과만 이야기했고 내게는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어. 좋았지. 그건 우리가 은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마차 예약을 하러 가는 블룸 부인, 응접실의 신사들, 담배연기, 매캐한 웃음. 잘못된 소문이 사람들을 홀리기 마련이라고 당신은 그랬지. 내 두 눈 속에서 당신의 흰 손등이 백열(白熱)하며 떠오르고 있던 걸 당신은 알까.

 

마침내 배에 올랐는데 당신은 태연한 표정이었어. 다급했지. 단둘이 있는 곳에서, “에이미, 내게 편지해줄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요.”-선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어. 내 눈가를 닦아주며 에이미, 당신은, 내게… 모든 게 지나간다고 그랬어.

 

배가 항구를 지난다. 명암 속에서 풍경이 안구 위를 회전한다. 물결은 끝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태어난다, 죽어든다. 해 지고, 내 안구 속으로 급속하게 쏟아지는 어둠의 새로운 눈.

 

당해년 1월 5일-데일스베리에서 에이미 슈틸하프턴이 보낸 편지

신년에 맞게 도착하도록 엽서를 띄우려 했는데, 제때 도달할지 모르겠군요. 댁에 은총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하시는 사업이 번창한다는 소식은 이곳에도 잘 알려져 있답니다. 아이들도 잘 지내고 있겠지요? 아이작이 수학을 싫어한다면 에이미 선생님이 그러면 못 쓴다고 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다음번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추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주제넘게 말씀드리자면 사춘기 때 아이들은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해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낸다든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럴 때일수록 너무 엄하게 다스리지 마시고 유능한 교육자의 손에 맡겨 다시 선량한 본성이 회복되게 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니 너무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5월 1일

더이상은 채찍으로 맞지 않을 거야. 공관 밖으로 뛰쳐나가. 쫓아오는 경비병, 더 빨리! 날 놓친다. 인도인들의 거리. 검은 창(槍), 검은 창을 빌려줘. 쏟아지는 온갖 향료, 그들의 더러운 체취, 아, 행복하다. 나 울부짖는다, 뱀 파는 상인들, 호기심어린 눈빛, 그들은 눈동자같은 저울로 내 비늘을 훑었지. 이교도가 된 기쁨!

 

별들은 꽝꽝거리며 터지고 죽은 피가 가득히 공관의 벽을 타고 오른다. 나는 흥분한다 영국인들아, 너희는 짓밟혀 죽으리라 악을 써… 사람들의 의아한 얼굴.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세포이 병사들이 온다. 거칠게 끌려가. 밤에 아버지에게, 철썩, 싸대기. 마찰의 명예. 좋아. 고통은 당신이니까. 아, …잠시라도 당신과 더 있고 싶어. 말이 마차를 물어뜯는 광경을 일기장에서 보며 내 부은 두 눈이 전등이 되기를 기다렸어.

 

5월 10일

밤을 지새우며 연꽃 위의 뱀을 기다리는 자.

 

5월 12일

에이미, 당신도 누워요. 그래요, 거기. 시트가 조금 더럽죠. 당신이 시트니까요. 나를 감싸요. …깬다. 무릎 주변 헝클어진 리넨, 전갈이 기어간 바늘땀 자국, 땀, 손으로 움켜쥐어… 에이미, 손톱이 길었잖아요. 숙녀답지 못하다고 그러셨잖아요. 당신이라면 찔러도 좋아요. 다쳐도

특별대우 받는다고 생각 마. 벽이 내 대가리를 후려쳐. 알아? 난 추처럼 얻어맞아. 지금 이 방안은 네 방광처럼 진동해. 그리고 난 네 더러운 오줌을 뿜어내고, …아, 에이미, 나 싯누렇게 엉엉 울 때 네가 꺾은 울 밖의 라일락은 다른 소녀 품에 안겨 그애는 하얀 미소로 피어나고 하늘엔 재잘재잘 낄낄거리는 별들, 넌 그년의 더러운 손을 거머리처럼 빨아대. 불보다 격렬히, 썩은 치즈보다 향기롭게, …만족해? 그게 다야? 어떻게 눈금에 줄자가 없어? 에이미, 에이미, 에이미!

…에이미, 이러지 않기로 우리 약속했잖아요. 왜 자꾸 배에서 자라나요. …깬다. 어두워진 하늘, 날은 전혀 서늘하지 않다. 희끈한 살덩어리들이 물텅거리며 침대 밑에 펼쳐져 있다. 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침대 뒤로 물러난다. 부푸는 살이 나를 덮쳐… 에이미! …깬다. 손이 덜덜 떨려, 에이미. 이건 내 손이 아니라 당신의 손이야. 당신이 아플 것 같애. 걱정돼. 나를 아껴줘. 거기, 그렇게, 그래. 응. 아니. 아니라. 요강에

 

5월 23일-대피령 발효일

……에이미, 로렌스 경이 민간 거주자들을 공관 내로 후퇴시키고 있어요. 아버지의 붉게 튀어나온 목젖 호레이스! 짐을 가져와. 네놈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기 전에. 세포이 연대가 호레이스! 메루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바닥에선 개미들이 빗자루로 몰려든다. 차라리… 아냐, 독 안에 든 쥐야. 나리, 더러운 인도놈들이 모두 도망가버렸는데요. 저희도 최대한 빨리 하고 있습 호레이스, 지옥으로 보내버릴 거야, 이곳의 모든 짐이 당장 옮겨지지 않으면, 그런 건 가져갈 수 없어요. 아가씨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뭘 하세요. 죽어, 다. 와! 마차가 저렇게 달리면 쓰러질 텐데, 웃겨! 봐! 경기해? 우리들은 모두… 모두… 어리석지. 차라리 죽으라고 그래. 천한 것. 아냐 아냐, 겁먹지 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영국인들아, 너희는 짓밟혀 죽으리라. 바닥이 파이는 굉음, 보니 박살난 상자. 무너진 쥐구멍같은. 끝. 아냐, 그렇지 않아. 마리, 엄마의 유품, 절대로 잊지 마. 응. 챙겨. 응. 어서. 멍청한 년아, 빨리! 그만, 그만 사무엘, 너희 빌어먹을 종놈들의 손에 맹세코

 

7월 2일-부관 전투일지

지휘관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공관 동쪽 방어선에 일시적 차질. 캘커타로부터 지원군 도착 시점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인도인 시종들이 이탈하고 있다.

지독한 더위 때문에 노약자와 부녀자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번지고 있다.

 

7월 7일

번쩍 흔들리며 떨어지는 돌. 비명을 지르는 부인들. 무너진 기둥에 짓밟힌 아이가 울부짖는다. 귀 뜨거워. 어둠을 가볍게 쥐어본다. 귓불서 떨어지는 땀.

대응사격. 철이 터져나가는 소리. 피. 제라늄.

불 너머 그늘이 이글거린다. 떨며 묵주를 꺼내들고 중얼거리는 노부인. 얼굴을 훔치니 더께가 콜록거린다. 어지러운 반사광. 깨진 외벽, 뜨거워, 눈부셔, 어떤 면에서는, 깊어…… 푸드득거리는 눈꺼풀

수줍게 당신이 웃네요.

좋아요. 그네를 타요, 우리는. 천천히 등을 미는 강물,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며…… 늘 제 가슴속에 계셨군요, 내가 달아나려던 그대. 이토록 가까이…… 그때 읽었던 동화를 기억해요? 네, 심지가 짧아질수록 당신이 환하게 떠올라요.

노래가 들려요. 이 노래는 뭘까. 처음 듣는, 근데 꼭 예전에 들었던 것 같아. 그리운 소독약을 더 가져와 부족해 당장 노래, 천천히, 노가 뱃전서 물에 풀어지듯, 차에 부어진 설탕처럼, 천천히 귓속 호수에 물이 고이듯… 빨리 어서

 

7월 14일

이마를 서늘하니 휘적휘적 적시는 식은땀 속

나른해지고 또 속이 맑아진 때끈한 눈망울 속

 

아, 그대. 거기 계셨군요. 높은 데 띄워올린 엉겅퀴와 합(合)하시는 분, 언제나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군요. 환한 입술, 불타는 치아. 내 죄많은 얼굴을 이리 씹으시려…… 네, 네, 교작(交嚼)하세요. 건반처럼 맞물려, 부드러이 녹아 우리 하나 되도록. 아, 간곡한 구취, 끓는 혀, 차가운 침, 배면의 어둠으로, 천천히, 아슬아슬히, 거의, 느끼듯이…… 환희의 마리아여! 두 눈에 납을 부은 마리아여!

 

쉬이,

아가.

흔들흔들 아가야.

이제 자자.

 

엄마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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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크나우는 당시 동인도회사의 직할통치령이었다. 1857년 인도 독립항쟁시 세포이 연대가 포함된 인도연합군에 포위되어 6개월간 고립되었으며 이후 동인도회사의 지원군에 의해 포위에서 풀려났다. 이 공성전에서 양측 모두 상당한 사상자가 있었다. 마리는 러크나우 태생으로 형제들과 1855년 겨울부터 1856년 봄까지 영국 데일스베리의 에이미 슈틸하프턴에게 위탁되어 교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