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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성주 『황우석의 나라』, 바다출판사 2006
황우석 사건으로 본 과학과 민주주의
홍성욱 洪性旭
서울대 교수, 과학기술사 comenius@snu.ac.kr
이 책의 저자 이성주(李成柱)는 동아일보에서 의학을 담당했던 기자이다. 그가 황우석 사태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골격은 ‘작가의 말’에서 제시되는데, 그것은 “과학의 이론정립 구조와 정부의 정책추진 구조, 언론의 의사소통 구조가 동일한 구조, 즉 민주주의 씨스템을 통해 기능을 하는데, 황우석 사태는 이 씨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10면)는 것이다.
『황우석의 나라: 황우석 사건은 한국인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의 제1부 「황우석의 언론」에서 저자는 신문기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과학논문과 마찬가지로 기사도 다양한 검증과 비판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한국 언론의 현주소이다. 편집국장 1인체계, 연공서열주의, 신문기자의 과중한 업무, 수평적인 대화가 실종된 수직적 상명하복체계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다. 황우석 사태만 보아도, 내부의 수직적 위계가 강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황우석 지키기에 가장 열심이었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한국일보가 객관적인 기사를 많이 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제2부 「황우석의 과학」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현대과학의 한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면서, 줄기세포 연구가 곧 실용화되어 척수마비 같은 불치병 환자들이 금방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고 외치고 다닌 황우석 박사의 얘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은 줄기세포를 통한 환자의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면역 거부반응이나 이식세포의 체내 생존과정을 규명하는 것 같은 기초과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과학이 인간의 몸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시인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저자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중요한 메씨지이다.
제3부 「황우석의 나라」에서는 언론과 과학에서 보았던 문제점이 과학정책에도 그대로 드러남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과학정책은 과학의 기반을 놓았다고 할 수 있는 박정희(朴正熙)시대부터 “잘살기 위한 도구로써의 과학기술”정책이었다. 기술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였고, 과학은 그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러한 과학기술정책에서는 과학이 “사고이자 문화이며 사회씨스템”(226면)이라는 생각이 간과되었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과학이 “기술의 덫”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성, 의사소통과 토론으로서의 과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27면)
과학과 민주주의가 통한다는 생각은 미국의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학의 에토스를 규정하는 네가지 규범(보편주의·집합주의·무사무욕·조직적 회의주의)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규범과 무척 흡사하다는 인식하에, 과학이 민주주의사회에서만 발전할 수 있고 전체주의사회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머튼이 아닌 칼 포퍼(Karl Popper)를 여러차례 인용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퍼는 과학적 가설이나 이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반증가능성’을 ‘열린’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꼽았다. 포퍼는 반증가능성이 없는 맑스주의 같은 이론은 ‘닫힌’이론이며, 이러한 이론은 필연적으로 ‘닫힌’전체주의사회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포퍼에 근거해서 과학·언론·정책의 특성을 민주주의로 파악하는 해석에는 비판의 소지가 없지 않다. 포퍼의 과학관은 과학이 잘 반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인 토머스 쿤(Thomas Kuhn) 같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의 가설이나 이론을 반증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책의 2부에서 저자도 인정하듯이, 과학은 오류를 거르기 위해서 피어리뷰(peer review), 레퍼리(referee) 씨스템, 재현을 통한 테스트 같은 메커니즘을 구축해놓고 있지만, 이러한 씨스템이 항상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쿤의 해석에 따르면 정상과학 시기의 과학자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하는 연구에 몰두하며, 따라서 기존의 패러다임과 잘 맞지 않는 데이터를 발견한다 해도 이것 때문에 기존 이론을 파기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과학정책 결정의 과정을 포퍼식의 민주주의와 비교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포퍼의 민주주의론은 지식의 불완전성에 대한 철학에 근거해서,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주권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오류를 고치는가”라는 절차성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포퍼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서 “유토피아의 추구보다는 오류를 고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호응”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급박하게 제거해야 할 큰 해악을 선정하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 정책에서 급박하게 제거해야 할 해악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책방향인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창의성·문화·사회씨스템·소통으로서의 과학에 주목하고, 이를 우리 삶의 질과 연계하여 발전시키는 것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인’발상의 전환과 장기적인 비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기술학자들은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참여의 차원을 주입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증가능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참여민주주의’의 차원을 과학·언론·정책에 도입하는 것이 과학·언론·정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경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수의 우중(愚衆)이 여론을 지배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로 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