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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출생.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루디
알래스카의 팍스 하이웨이(parks highway)를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차를 모는 일이 때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캔트웰에서 아침을 먹고, 굳이 페어뱅크스까지 차를 몰고간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뭘 봤지 보그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우박만 실컷 맞았다네, 가슴을 치며 답할 것이다. 산과 산... 강... 길... 나무... 하늘... 지긋지긋한 눈앞의 산이 디날리인지 맥킨리인지도 이젠 관심 밖이었다. 두어시간 전부터 그랬다. 그나마 아침을 먹으며 본 컬링1 경기가 떠올라... 더 정확하게는 캐나다팀의 서드를 보던 낸시 코웰을 떠올리며 나는 차를 몰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스톤을 밀던 그녀의 엉덩이를 못 봤다면, 다시 캔트웰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타임 투 잇에서 토스트를 먹는 동안에도 내겐 두가지 생각이 전부였다. 딱 내 타입인 낸시 코웰의 엉덩이, 그리고 빨리 앵커리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그래,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험피스에서 연어요리만 맛보고 일찌감치 뉴욕으로 돌아가는 거야! 곧바로 운전이라는 미친 짓을 재개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다시 이어지던 산과 산... 나무... 길...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나무 사이의 도로를 마치 스윕2을 하듯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내 차는 낸시가 떠민 스톤만큼이나 느린 속도로 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다. 로라 호수를 끼고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이어졌으므로, 대략 반 마일 전부터도 사람이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번이고 나는 찢어지게 하품을 하던 중이었고, 차라리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느슨한 자세로 선 남자의 손에... 라이플이 들려 있는 것도 보았다. 그저 사냥을 나온 사람이겠거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배경의 산이며 나무... 알래스카의 분위기에 나는 너무 오래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탕.
사내가 총을 겨눈 것은 한순간이었다. 총성을 들으며 브레이크를 밟은 것도, 총을 맞은 것은 아닌데 총을 맞은 듯 정신이 나간 것도 한순간이었다. 총구는 분명 차를 향해 있었고, 이제 그것은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냥모자를 눌러 쓴 백발의 남자였다. 놀랍도록 무표정한 얼굴과 까만 조약돌 같은 두 눈을 마주한 순간, 허벅지 왼쪽이 축축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줌이었다. 총구의 끝이 좌우로 움직였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이 내려,라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시동을 끄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나는 차에서 내려섰다. 한여름의 도로인데도 마치 눈길인 듯 미끄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다리에 힘을 주며 나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제발,이란 말은 할 수 있었는데 살려달라는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주위의 풍경이 놀랍도록 참신하고 거룩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레, 그랬다.
쌌나?
라고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고개보다는 턱을 덜덜 끄덕이는 기분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말이지 떨어진 턱뼈와, 임플란트 시술을 잘 마친 가지런한 어금니들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뭐야? 그가 물었다. 보... 보그먼. 미하...엘 보그먼. 어금니가 없는 인간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독일놈이군, 하고 사내는 침을 뱉었다. 아니 미국인이오, 말을 했지만 새겨듣지도 않는 눈치였다. 스페어 있지? 가래를 끓이며 사내가 물었다. 아, 예라고 답하자 뭉친 가래를 뱉으며 놈이 말했다. 갈아! 그제서야 폭삭 주저앉은 오른쪽 앞바퀴를 볼 수 있었다. 떨어진 턱뼈며 어금니가 보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쟈키를 받치고 나는 타이어를 갈기 시작했다. 그사이 놈은 유유히 담배를 피우거나 툭, 총구를 내 뒤통수에 갖다대고는 했다. 제발 한대의 차라도 지나가길 빌면서 나는 열심히 나사를 돌렸다. 끝났어? 놈이 물었다. 아, 아직입니다. 가래 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놈은 작업을 재촉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기색이었다. 에스키모와 탱고를 어쩌고3 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짧은 노래였다. 작업도 곧 끝이 났지만 차는 한대도 오지 않았다. 끝...났습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삐딱허니 담배를 문 채 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제야 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운전석에서 봤을 때보다 키가 컸고, 누구도 몽따주를 그릴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얼굴이었다. 놈은 내 주위를 한바퀴 돌았고, 바지 뒤춤에서 내 휴대폰을 뽑아 멀리 던져버렸다.
똥은 안 마려워? 놈이 물었다.
예? 축축한 바지를 입고 선 채 나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똥 말이야 똥. 몰라?
아... 괜찮습니다.
여기서 싸고 가. 가다가 징징대지 말고.
정말 괜찮습니다. 어젯밤에도 많이 눴구요(내가 왜 이따위 소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미리 싸라니까.
안 나옵니다. 진짭니다.
고집불통이구만 진짜(그러면서 놈이 총을 들이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한참을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총성과... 갑자기 쏟아지는 피를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가솔린이라도 끼얹은 듯 갑자기 귀 언저리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오 마이 갓. 귀가 만져지지 않았다. 40년 넘게 그 자리에 붙어 있던 귀가... 왼쪽 귀가... 스페어도 없는 내 귀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나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우스꽝스런 동물의 울음 같은 것이 흐느적 내 입에서 흘러내렸다. 쉭, 쉭 그런 소리가 새어나오기도 했다. 어찌나 길고 끈적한 울음인지, 자랄 대로 자란 촌충(寸蟲) 한마리가 입에서 기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오열이 멈출 때까지 놈은 가래나 끓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서 싸. 총구가 가리킨 곳은 등 뒤의 자그마한 잡목 아래였다. 나는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어기적어기적, 두 발짝 거리의 잡목 앞으로 걸어가 축축한 바지를 내리고 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곧바로 똥이 쏟아졌고, 굉장한 양이었다.
하여간에, 하고 지저분한 천조각을 던져주며 놈이 말했다. 거짓말이 습관이라니까! 천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고, 여기저기 누런 기름때가 번져 있었다. 천의 양끝을 잘 접어, 어쨌거나 깨끗해 보이는 쪽으로 나는 천천히 뒤를 닦았다. 그리고 혹시나... 귀를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침착해라 보그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상하게 들려왔다. 한쪽 귀가 사라진 이 순간에도... 들려온 것이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난 후에야,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작은 위스키병을 꺼낸 놈이 귀가 떨어져나간 그 자리에 소변이라도 보듯 위스키를 붓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도 술이라면 질색이었다.
왜 일을 어렵게 만들지? 놈이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울면서 내가 물었다.
봐, 뱃속에 전부 똥이었잖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늘 그 소리지, 하며 놈이 가래를 뱉었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옷이나 입어, 똥구멍 냄새 지독해. 울며, 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바지를 끌어올렸다. 앵커리지에서 구입한 A&F4의 지퍼를 올리는 순간, 멍하니... 지퍼에 새겨진 무스5의 음각을 바라보던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왜, 도대체 왜...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순간을 맞기 위해 예일을 졸업했단 말인가. 경제학을 전공하고... 꼬박꼬박 세금을 납부했단 말인가. 동물보호협회에... 또 뉴욕 경제인연합이 주최한 모피 반대 캠페인에 내가 낸 기부금이 얼마였던가... 지혜를 짜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총만 뺏을 수 있다면, 총을... 하는데 목과 어깨 사이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뭐 해, 말뚝 설 거야? 놈의 손아귀였다. 뉴욕의 증권가에선 100년을 근무한다 해도 접하지 못할 악력이었다.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고... 놈이 손을 풀었을 땐 이미 쇄골에 금이 간 느낌이었다. 오른팔을 들 수도 없었다. 쉭, 쉭 소리가 또다시 새어나왔다. 귀가 떨어져나갈 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안일한 새끼, 하고 뭉친 가래를 뱉으며 놈이 말했다. 원하는 게 뭘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저 쿡, 쿡 등을 떠미는 총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운전석에 앉아야 했다. 놈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고, 유유히 뒷자리에 라이플을 내던지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하, 하고 놈이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곁눈질로 나는 놈의 눈치를 살폈다. 또래로 보이긴 했지만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저 눈동자... 초점이 없고, 이상하리만치 반짝이는 두 눈에서 나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또다시 한숨을 쉬며 놈이 말했다.
갈 길이 멀다는 거 알지?
어디로 말입니까?
일을... 또 어렵게 만드네, 놈이 권총을 들이밀었다.
아, 알 것 같습니다.
알면서... 왜 그래?
관자놀이를 누르던 총구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래서 시동을 걸어야 했다. 침착하자 보그먼... 머리를 써! 보그먼...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끝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 미치도록 쇼팽이 듣고 싶었다. 이 미친놈에게서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녁이 가까워진 알래스카의 산들이 더없이 음산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알래스카는 어떠세요? 머릴 식히기엔 그만인데. 제시카 씸슨... 돌아가면 당장 그 개년을 해고할 생각이다. 아니, 이성을 찾자 보그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달렸는데도 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반쯤 창을 내리고 놈은 끝없이 가래를 끓이거나, 뱉거나 했다. 그리고 담배, 또 담배... 에스키모와는 어쩌고 하는, 노래... 에스키모와는 탱고를 추지 말라고. 워찌 싸우스 캐롤라이나의 여인이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와 춤을 춘다는겨? 노우~ 절대 안되지라! 차라리 베네수엘라의 뱃사공이랑 춤추는 게 낫지, 에스키모와 탱고춤은 노! 노! 노우~ 망할놈의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도 놈은 끝없이 가래를 끓여댔다. 미칠 것만 같았다. 상한 우유에 콘플레이크를 잔뜩 부어 마시면 겨우 흉내라도 낼 법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뚝 노래가 멈추었다. 놈은 가래를 끓이지도 않았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눈치였다.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웠는지 모른다. 딱딱 어금니를 부딪으며 나도 모르게 돈은,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돈? 하고 놈이 물었다.
예, 돈!
돈 많아?
뉴욕서 작은 금융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부사장입니다.
필요 없는데.
필요 없어도 드리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로 총구를 갖다대며 놈이 말했다.
너 이 새끼... 날 상대로 이자놀이 하려는 거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 나는 울먹였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원하시는 게 뭔지... 그저 여행을 왔을 뿐입니다. 봄에 이혼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어요. 머릴 좀 식혀야 했고...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실은 불행한 인간입니다. 제발... 부디... 어깨가 다시 아파왔다. 덜덜 턱을 떨 때마다 어깨도 함께 힘없이 덜렁이는 느낌이었다. 알아 알아, 그 얘긴 그만해... 짜증을 내며 놈이 말했다. 뭘 안단 말인가. 도대체 뭘... 허탈과 공포가 함께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귀가, 아니 귀가 있던 자리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끔거렸다. 총구를 거두며 놈이 물었다. 두려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사실을 얘기했다. 두렵습니다.
그사이 마주오는 한대의 트럭을 보았지만 아무런 요청도 할 수 없었다. 고함을 치건 어쩌건 옆자리의 총보다 빠른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멀어져가는 트럭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한 악취가 허벅지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줌이 마르는 냄새였다. 정신을 차리자 보그먼, 벌처럼 눈을 쏘아대는 지린내 속에서 나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궁리도 해보았다. 그럴듯한 영화에선 갑자기 핸들을 꺾는다거나 브레이크를...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옆자리의 총에 비해 구원은 멀리... 정말이지 뉴욕 쯤에나... 저 자유의 여신상 아래에나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글귀를 새겨놓았나?
고단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이여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군중들이여
내게로 오라6
엠마 라자루스의 시를 나는 떠올렸다. 왜 구원은 고난에 빠진 이를 찾아와주지 않는 것인가. 왜 모두에게 직접, 제발로 걸어오기만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우선 놈의 의도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 도대체, 왜? 그리고 갈 길이 멀다니...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두렵겠지, 하고 놈이 중얼거렸다. 세상을 끌고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거 알아? 뭉친 가래를 퉤, 앞유리에 뱉으며 놈이 말했다. 두렵긴 나도 마찬가지란 거... 그래도 함께 가주겠다는 거야. 암, 이자놀이를 당해주면서도 말이지. 미친놈, 하고 나는 울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이 뭔지 아나? 놈이 물었다.
모릅니다.
구구단을 외는 거지. 해본 적 있나?
없습니다.
이런 이런, 그걸 해본 적 없다니. 자, 내가 먼저 물어줄게. 3×4?
...12(이건 또 뭐란 말인가).
굿, 이젠 나한테 물어봐. 얼마든지 물어보라구, 퉤!
2×3?
6(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무시하지 말고 좀 어려운 걸 물어봐.
죄송합니다. 6×7?
42. 또, 또 얼마든지!
9×8?
78. 계속 해보라구, 얼마든지 말이야.
7×9?
57. 또, 또 덤벼보라구.
8×8?
72. 또, 그게 다야?
12×8?
음... 106!
와우, 하고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흐흐, 하고 놈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어때 두려움이 가시지 않나? 놈이 물었다.
간뎅이가 붓는 기분인걸요. 평생 한번도 쓴 적 없는 말투로 나는 맞장구를 쳤다.
놈이 낄낄거렸다.
따라 웃었다. 여러모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으니까, 하고 놈이 말했다.
보조개가 들어가네?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보았다. 놈의 웃음을... 어찌나 해맑게 웃는지 짜다 만 여드름이며 보이스카우트 뱃지가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눈꼬리의 주름이란! 두려움이 가시니까 얼마나 좋아, 안 그래? 놈이 물었다. 예, 쓴웃음을 짓긴 했으나 실은 두려움에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뭐 하는 놈일까. 그리고 왜, 정말이지 왜! 머리를 써 보그먼... 나는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악을 좀 틀까요? 내가 물었다. 좋지, 기분이 좋아진 목소리로 놈이 답했다.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쉽게, 가장 선명히 잡힌 채널에서 죠지 벤슨이 흘러나왔다. 노래를 들으며, 한시간은 더
길을 달렸을 것이다. 여전히 가래를 뱉긴 했지만 놈은 제법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었다. 몇마디 농을 건네오기도 했다. 열심히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니, 실은 눈물이 날 만큼이나 그 농담이 반가웠다. 말하자면 ‘일’이, 놈이 말하는 그놈의 일이 비교적 쉽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조금씩 나도 안정을 찾고 있었다. 아니, 이쪽으로! 길을 안내하는 놈의 음성도 한결 부드러운 것이었다. 왼손을 핸들에 얹은 채 나는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아는 가장 재밌는 얘기들을, 또 내가 아는 가장 음란한 얘기들을... 솔깃, 하는 놈의 반응을 살펴가며 또 머릿속으론 끝임없이 탈출의 씨나리오를 그려보고 있었다. 머리를 써 보그먼!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라디오에선 다이안 슈어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가물가물 2마일 정도 앞에 서 있는 작은 주유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하고 놈이 물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모릅니다.
뭐? 하고 놈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을 하란 말이야, 생각을 좀!
별안간 놈이 아픈 어깨를 총으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아악, 비명을 지른 것도 한순간이었다.
쫌!
쫌!
쫌!
쫌!
세번째 이후로는 쉭 쉭,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핸들에 얼굴을 묻고 나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발에도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서히 미끄러지는 차에 앉아 나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고개 들어 새끼야. 총구를 갖다대며 놈이 말했다. 들 수 없었다. 끝까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만. 철컥, 소리가 남은 한쪽 귀를 관통해 지나갔다. 젖먹던 힘을 다 짜내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겨우 핸들에 손을 얹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가 아는 건 오직 한가지였다. 그 망할 놈의 ‘일’을 어렵게 만들어선 안된다는 것.
그 얼굴을... 지옥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놈은 빤히 나를 노려보았고... 울고 있었다.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해, 하고 놈이 말했다. 니가 생각을 안하니까... 생각이라곤 요만큼도 안하니까... 사람이 불안해 살 수가 없잖아 새끼야,라고도 했다. 정말로 분해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주여, 하고 나는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겠습니다,라고도 했다. 죽은 후에도 이 기억이 남아 있다면, 지옥의 어떤 악마라도 만만해보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어쩌면 악마의 얼굴도 실은 매우 평범한 것일지 모른다고 경련을 일으키며 나는 생각했다. 늘 그 소리... 괴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놈은 가래를 뱉었다. 앞유리가 아니라 내 얼굴을 향해서였다. 많은 양의 가래는 아니었지만 황산이 떨어진 듯 영혼이 아파왔다. 잘못했습니다. 가래를 닦으며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니가 하는 말은 전부 변명이란 걸 알아둬, 개새끼! 한번 더 가래를 뱉으며 놈은 말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나는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의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느리고 자욱하게 담배를 피워문 채 놈도 말없이 전방을 응시할 뿐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에이미와 이니드. 두 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에이미가 여섯살, 이니드가 네살이던 시절도 생각이 났다. 작은 풀장이 딸린 정원과... 튜브를 밀어주고 물장난을 치던 기억도 떠올랐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때였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낯선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쇼팽이 듣고 싶었다. 담배를 문 채
느닷없이 놈은 지진7 얘기를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어렸을 때 큰 지진을 겪었는데 자신은 그 속에서 살아남은 아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톱이 있다면 스스로 팔을 잘라내고 싶을 만큼 어깨가 아팠기 때문이며, 구원을 받았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 따위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도 않았다. 놈은 완벽하게 미쳤다. 어차피 내 목숨은 노력과도, 또 놈의 기분과도 무관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필요한 건 오로지 ‘운’이란 생각을 나는 굳히고 있었다.
구원을 받아본 적 있나? 놈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나를 <신의 아기>라 불렀지.
………
선택받은 고통을 아나? 다시 놈이 물었다.
모릅니다.
알게 될 거야. 신은 나를 선택하고... 나는 너를 선택했으니까.
미친놈, 하고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다시 생각해봐,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뭔지.
물이나... 물 한잔만 마시면 좋겠습니다.
물이라... 제법 비슷하군. 맞아, 우리에겐 기름이 필요해.
그러니까 놈은... 기름을 넣자는 얘길 한 것이었다. 눈물이 났다. 피보다 진하고 끈적한 눈물이었다. 기름 때문에... 고작 기름 때문에 한쪽 팔을 잃어야 했다니. 감각이 사라진 오른팔을 나는 만져보았다. 징그럽고 물컹한 실리콘 의수(義手)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하고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인간에겐 의학이 있다... 뼈가 가루가 났어도 방법이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라진 귀도 어떻게든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겐 돈이 있다고,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 한다 보그먼, 아버지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귀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저기 보이지? 퉤. 가래를 뱉으며 놈이 말했다. 콩알만한 주유소 간판을 바라보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 놈이 중얼거렸다. 더없이 낮은 목소리였지만 턱없이 선명한 목소리였다. 왜 자꾸 우는 거지? 다 큰 놈이 말이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모르겠습니다,라고 나는 답했다.
내려.
20년은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이런 후불제 주유소8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이런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도... 저런 미친놈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놈을 위해 주유를 해야겠지, 그리고 최대한... 요금계산소의 직원에게 내 몰골을 보이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외침이나 신호는 위험하다,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내 처지를 알리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유리 너머로 얼핏 두명의 직원이 보였는데 그중 하나는 TV에 열중해 있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반(Regular), 고급(Plus), 최고급(Super). 적어도 눈앞의 세가지 목록보다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고민이었나를 깨닫게 된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안녕들 하신가, 하는 느낌으로 계산소에 들어서는 놈을 보았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시작된 학살을 보아야 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놈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가슴과 머리, 가슴과 머리를 쏘았고 다시 한발씩을 쓰러진 이들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왜, 도대체 왜?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나도 함께 죽었다는 느낌이었고... 내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나도 누군가를 죽인 듯한 기분이었다.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오히려 한참 뒤의 일이었다. 유유히 걸어나온 놈이 얼어붙은 내 손에서 주유기를 빼앗아 기름을 넣기 시작했다. 가득 기름이 차고... 기름이 줄줄 흘러넘치는데도 놈은 주유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제야 비명이 튀어나왔다. 놈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손엔 권총을, 한손엔 주유기를 든 채 그저 말없이 주유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가솔린이 질펀한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한동안 비명을 질러댔다. 병든 젖소의 울음 같았던 그 소리는 점차 젖소의 방귀 같은 것으로 변해만 갔다.
부츠 뒷굽이 잠길 정도로 기름을 흘려댄 후에야 놈은 미친지랄발광 같은 망할놈의 주유를 중단했다. 그사이 나는 정신이 나간 인간처럼 요금계산소의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맙소사, 스물셋? 스물다섯? 정도의 청년이었다. 또다른 한 사람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피범벅이었다). 두툼한 몸집과 팔뚝의 털을 통해 다만 그보다는 나이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 주여... 나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왜? 울분을 터뜨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뭐 해? 하고 놈이 총을 까딱, 했다. 다시 덜덜, 턱을 떨며 나는 놈 앞으로 걸어갔다. 모자라지 않을까? 진지한 얼굴로 놈이 말했다. 추, 충분합니다. 두세번 고개를 갸웃거린 놈이 휙, 주유마개를 던져주었다. 지옥의 문을 틀어막는 심정으로 나는 흐느끼며 마개를 돌리고 또 돌렸다. 기름값이 있는데... 돈으로 사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들이 새어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놈은 또 한번 머리를 갸웃, 했다.
대체 뭔 소리야?
기름은 늘 이런 식으로 얻어 온 건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찔러대는 지린내와 가래 끓는 소리...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나는 알래스카의 하늘을 저주했다. 오래전 놈을 집어삼키지 않은 대지를 증오했고, 스스로의 운명을 원망했다. 한자루의 총에 모든 걸 잃어야 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무심함을 개탄했다. 지금 이곳은 어디일까, 그리고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말없이 흐르는 강을 끼고 말없이 차는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눈앞엔 오로지 캄캄한 산이 보일 뿐이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산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턱없이 작고 희미한 인간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리 크지 않은, 시골의 사설 드러그스토어였다. 여전히 옆에서 권총을 들이댄 채 악마가 속삭였다. 아 참, 너 말이야...
물이 필요하댔지?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외쳤다. 필요하다 했잖아? 가래를 끓이며 놈이 말했다. 오, 제발... 정말 필요 없습니다! 눈물을 등에 업은 콧물이 흘러내렸다. 난처한걸, 하고 놈이 말했다. 왜 자꾸... 사람을 인정머리 없는 놈으로 만들려 그래? 인정머리가 넘치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놈은 이미 탄창을 갈고 있었다. 철컥. 다시금 총구가 내 이마를 노려보았다. 널찍한 주차장의 한켠에 나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아니, 미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가 사오겠습니다. 1분이면 됩니다... 아니, 30초면... 머리를 조아리며 나는 흐느꼈다. 일을 또 어렵게 만든다, 중얼거리며 놈은 여벌의 탄창까지 주머니에 담고 있었다. 내려! 놈이 말했다. 시동을 끄는 그 순간, 영혼의 시동도 함께 꺼지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나를 앞장세웠다. 들어가! 놈의 목소릴 듣긴 했지만, 유리문 앞에서 한걸음도 발을 뗄 수 없었다. 진열대 근처를 서성이는 대여섯명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계산대엔 법 없이도 살아갈 얼굴의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고, 그녀와 얘길 나누는 두 사람의 노파를 볼 수 있었다. 안경을 고쳐쓰는 등이 굽은 영감... 수염이 덥수룩한 퉁퉁한 사내... 그리고 맙소사,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나는 도저히 그 평화로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없었다. 쿡, 놈의 총구가 등을 떠밀었다. 오, 제발... 이제 그만... 고개를 저으며 나는 오열했다. 그 순간 수염을 기른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귀가 없는, 핏자국이 선명한 내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를 볼 수 있었다. 놈의 발길질이 허리에 느껴진 것도, 그래서 엎어지듯 문을 열고 들어선 것도 모두가 한순간의 일이었다. 도망쳐요! 나는 울부짖었다.
아무도 도망갈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저항할 힘이 없었다. 울리는 총성과 분수처럼 솟구치던 피... 아이의 손을 놓치며 허망하게 쓰러지던 젊은 여인...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이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놈에게서 등을 돌린 채, 그리고 다시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도 총을 맞은 건 아닐까... 줄줄 신발을 적시는 오줌이 실은 피가 아닐까, 감았던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뚜벅뚜벅 놈이 걸어다니는 소리... 무언가 부르르 떨리는 소리... 다시 총소리... 그리고 곧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악마의 총 앞에서 인간은 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정말이지 커다란 쥐처럼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툭툭, 놈이 총구로 뒤통수를 두드렸다. 품속에 가둔 아이의 숨소리를 느끼며 나는 안간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자, 물! 하고 내미는 놈의 손에는 작은 생수통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비켜, 하고 놈이 말했다. 오 주여, 내 입에선 통곡이 쏟아졌다. 아이를 감싸안은 채 나는 놈에게 호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입니다. 제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라구요! 담배를 꺼내 문 놈의 눈에는 어떤 동요도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놈의 부츠가 아작난 어깨 위를 해머처럼 내려찍었다. 찢어질 정도로 입이 벌어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뒹굴었고, 하필이면 놈의 부츠에 얼굴을 문지르며 고통을 참아야 했다. 철컥, 탄창을 교체하는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마치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구원... 하고, 나는 기도를 하듯 중얼거렸다. 왼팔로 놈의 다리를 껴안은 채 울며, 흐느끼며 소리쳤다. 당신도 말했지 않습니까? 지진도... 무너진 건물도 아기만큼은 살려줬다고... 제발... 그러니 제발... 놈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고, 구원?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의... 아기 말입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나는 이 찢여죽여도 시원치 않을 ‘신의 아기’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시체 옆에서 인간의 아기는 가게가 떠나갈 듯 울고 있었다.
다시 나를 앞세우고
웬일인지 놈은 가게를 그냥 나왔다. 땀과 피... 눈물과 콧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나는 생수를 들이켰다. 걸어갈수록 아이의 울음소리도 천천히 작아져갔다. 너 때문이야. 어둠속에서 놈이 말했다. 반문을 하기도 싫었고 반박을 할 이유도 없었다. 물을 그렇게 처먹으니 맨날 오줌을 싸지... 다 큰 놈이 말이야. 다 큰 놈을 앞에 두고 미친놈이 중얼거렸다. 마시고 또 마시고... 싸고 싸고, 또 싸대고.... 누군가가 내 왼손의 생수통과 놈의 피스톨을 바꿔치기해준다면, 나는 놈의 심장에 총알을 박고 시신에 오줌을 갈길 것이다. 벌린 입 속에... 가래가 가득한 그 입 속에 한가득...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 놈의 눈알을 뽑아...
이상할 정도로 두려움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결국, 어차피 놈은 나를 죽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스키모와는 탱고를 추지 마세요~ 망할놈의 노래를 또다시 들으며 나는 거의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 주인을 잃은 차들을 지나... 지옥의 렌트카가 되어버린 어둠속의 차를 향해 나는 한발 한발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차라리 베네수엘라의 뱃사공과...에서 갑자기 노래가 멈추었다. 불길한 기운이, 이젠 어느정도 예감이 가능해진 그 기운이 뒤통수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래 쏴라,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떨리지도 않았고, 더는 목숨을 구걸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하고 놈은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에스키모가... 아니었잖아.
총성은 울리지 않고, 대신 가게를 향해 달려가는 놈의 발소릴 들을 수 있었다. 오, 주여! 변심한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어떤 마무릴 지으려는지를 한순간에 알 수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 보그먼! 어둠속에서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 하고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나에 관한 한 놈은 실수를 한 셈이었다. 이를 악물고 나는 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있는 힘을 다해 시동을 걸었다. 그대로 차를 몰아 달아났다면, 내 삶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뒷자리에 팽개쳐진 라이플을 발견한 것은 또 어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총성이 들렸다.
액셀을 밟지 않고 라이플을 집어든 이유는 아마도 그, 총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아이야. 울음을 삼키면서 나는 라이플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여러발의 탄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놈이 걸어오고 있었다. 캄캄한 차 안에서 나는 라이플을 장전했다. 총신을 허벅지에 얹고 체중을 실은 오른팔로 눌러 고정시켰다. 혹 몰라 싸이드 기어를 축으로 삼아 반동도 줄여줄 심산이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받은 만큼 돌려줘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자는 어쩌구요 아버지. 어둠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문 앞에서 놈은 가래를 한번 끓였고 퉤, 걸죽한 덩어리를 뱉고 나서는 찰칵, 문을 열었다. 손들어 새끼야, 내가 말했다.
실내등이 켜진 탓에 놈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두어번 깜박이더니 놈은 말없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총은 언제 버릴래? 종종 직원들에게 쓰는 농담투로 나는 놈을 놀리듯 다그쳤다.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놈이 밑으로 총을 떨구었다. 발은... 놀면서 월급 받으려고? 내 어깨를 밟았던 부츠 뒷굽이 툭, 떨어진 총을 뒤쪽으로 밀어 찼다. 이름은? 하고 내가 물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놈이 루디...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굳은 의지를 손가락에 반영시켰다. 잘 가라 씹새끼야.
탕.
망가진 오른팔 때문인지 총알은 놈의 배를 관통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리고 놈의 몸이 움찔했다. 쓰러지진 않았으나 놈은 자신의 배를 내려보며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뭐, 잘된 일인지도 모르다 생각하며 나는 다시 놈의 심장을 겨누었다. 아파? 하고 나는 물었다. 놈은 천천히 나를 노려보았고 씩,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말해봐 새끼야, 하고 나는 외쳤다. 저 사람들을 왜 죽였어? 죄도 없는 아이를... 왜 죽인 거냐구?
약하니까...
늘 그래왔잖아?
놈은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씹새끼! 나는 부드럽게 방아쇠를 당겼고 이번엔 정확히 놈의 심장을 명중시켰다. 퍼덕, 한발짝 물러서며 놈은 경련을 일으켰다. 시커먼 피가 솟구쳤다. 어, 어... 하며 놈은 한동안 비틀거렸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미친 새끼, 하며 다시 한발을 쏘았다. 한움큼, 살점이 떨어져버린 허벅지를 볼 수 있었다. 또 한발은 빗나가고... 또 한발은 다시 놈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쉭 쉭, 이상한 소리 같은 것이 놈의 입에서도 가래처럼 새어나왔다. 그래도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한번 몸을 휘청하더니 총을 집으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 미친... 하고 나는 미친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두어 발은 빗나가고 두어 발은 적중했지만... 어딜 맞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 잠깐 경련을 일으켰을 뿐, 놈은 허릴 굽혀... 피(血)며... 창자 같은... 그런 걸 조금 쏟으며... 막... 흘려가면서... 총을 집어들었다. 찰칵, 새 탄창을 꺼내... 갈기도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찰칵 이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플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나는 알래스카를 뒤흔들 정도의 길고 긴 비명을 질렀다.
†
나는 살아 있다.
아니, 놈이 나를 죽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겠지. 놈은 힘겹게 조수석에 올라탔고, 초라해진 라이플을 빼앗아 다시 뒷자리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몇번, 더는 가래라 부르기도 뭣한 가래를 뱉은 게 전부였다. 눈을 뜨고 죽은 짐승처럼 나는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앉은 채, 살아 있었다. 그리고 놈도... 살아 있었다. 실컷 가래인지 피고름인지를 뱉고 나서는 큭, 하고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왜 그래 갑자기? 하고 어둠속에서 놈이 물었다.
보안관 놀이를 다 하고 말이야...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권총을 쥐고는 있었지만 겨누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제 가야지, 하고 놈이 말했다. 그 어떤 생각도 말도 없이 나는 시동을 걸었다. 끝없는 어둠... 어둠과 길...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눈앞의 어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운전이 그렇게 계속되었다. 산길을 이미 한시간쯤 접어든 차 속에서 놈이 말했다. 음악... 좀 틀지? 죽은 척하다 깨어난 짐승처럼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러브 미 텐더9가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오래오래 사랑해주세요.
마음 깊숙히 날 간직해줘요.
내가 머물 곳 바로 그곳이기에
그래서 우린 헤어지지 않습니다.
내 모든 꿈이 이뤄졌어요.
내 사랑, 내가 사랑하는 당신
그래서 영원히 사랑합니다.
루디... 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말라붙은 침 때문에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놈은 뭐라 대꾸도 하지 않았다. 피와 가래... 침과 오줌이 말라가는 냄새로 그야말로 차 안은 지옥의 하수구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오래... 악마들이 싼 똥이 모이고 썩어, 액셀을 밟는 발목을 적시며 물처럼 흐르는 기분이었다. 뉴저지의 집도... 뉴욕의 사무실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그래,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이봐, 루디... 하고 침으로 입술을 적시며 다시 물었다.
넌... 뭐냐?
알잖아? 하고 놈이 말했다. 그외의 단어가 따르지 않는, 그게 전부인 대답이었다. 뭐가... 뭘 안다는 건데? 부스럭, 조끼를 뒤적이던 놈이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발신음이 울리는 전화기가 오른쪽 귀에 바짝 다가왔다. 뭐지? 그리고 이럴 수가! 전화를 받은 것은 제시카였다. 휴가중에 웬일이세요. 설마 돌아오신 건 아니겠죠? 몇마디 대화를 나누면서도 도무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시, 자네가 어쩐 일인가? 회사로 전활 주셔놓고 어쩐 일이라뇨? 정리할 게 있어 혼자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거예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자네 루디란 남자를 아나? 알래스카를 추천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제시카였다.
루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아무렴,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제시카도 누구 못잖은 야망을 품었던 여자였다. 지금 내가 루디와 함께 있네, 하고 나는 복선을 깔아보았다. 루디는 자넬 안다는데? 성까지 알려주시면 찾아나 볼게요. 그러니까 루디... 하고 나는 놈을 쳐다보았다. 워터스... 루디 워터스라고 놈이 히죽이며 말했다. 루디 워터스라네. 멀리서 찾지 말고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좀 알아봐줘. 찾았어요, 하는 목소리가 돌아온 것은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루디 워터스. 1991년 3월부터 12년간 근무했어요.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모르실 거예요. 용역으로 일하던 청소부였으니까.
생김새는 어떤가?
뭐랄까... 평범해요.
루디가 혹시 해고 같은 걸 당했나?
아뇨, 자기 발로...
전화기를 끈 것은 놈이었다. 도리어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청소부를 괴롭힌 적도 없고... 청소부와 마주칠 직위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심장에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청소부를 고용한 적이 없다. 그런 인간이 있다는 얘기조차 듣지 못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나?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물어보았다. 눈앞의 길은 점점 어둡고, 좁고, 가팔라지고 있었다.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놈이 어둠속에서 중얼거렸다.
월급을 줬지.
넌... 정말 뭐냐? 차를 멈추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알면서... 같은 대답을 또 놈은 반복했다. 그리고 지그시, 총구로 관자놀이를 누르기 시작했다. 밟아... 갈 길이 멀다는 거 알잖아? 미친놈... 하고 나도 어둠속에서 중얼거렸다. 살기 위해 다시 액셀을 밟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머리가 터지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어두운 산길을 나는 오르고 또 올라야 했다. 부드러운 길은 아니었지만
오래오래, 영원히 달려야만 할 것 같은 길이었다. 이제 라디오도 잡히지 않았다. 얼마를 더 달렸는지도,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생각의 실마리도 결국 헝클어지는 것이어서 내가 알고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나는 지금 루디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실은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한 건물에 머물렀던 루디는 인간이었지만, 지금 내 곁에 앉은 루디는...
모르겠다, 갑자기 희박해진 공기를 느끼며 나는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계속... 가야지. 삐져나온 창자를 만지작거리며 놈이 말했다. 오줌이 말라붙은 허벅지며... 불알이나 그런 쪽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악취는 이제 차 안의 모든 걸 집어삼켰고, 이대로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잖아? 하고 놈이 말했다. 끝까지 갈 수밖에. 미친 새끼, 하고 나는 침을 뱉었다. 길의 오른쪽은 깎아지를 듯한 벼랑이었다. 겨울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나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며 나는 말했다.
그래, 교회를 다닌다고 온동네에 떠벌렸었지.
이유가 뭔가? 정말이지 이유가 뭐냐고.
누군들... 뾰족한 이유가 있겠는가?
씹새끼!
나는 그저... 하고 놈은 말했다. 너희를 평등하게 미워할 뿐이야.
왜... 왜 내가! 나는 울부짖었다.
너도 평등하게 우릴 괴롭혀왔으니까, 놈이 말했다.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길의 끝은 경사진 절벽이었다. 갑자기 환해진 하늘이 아니었다면 진입금지를 알리는 팻말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탁 트인 절벽의 끝에서 나는 차를 세웠다. 오로라였다. 푸르스름한... 초록의 거대한 섬광이 이곳이 얼마나 높고 가파른 곳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달려, 하고 놈이 말했다. 눈앞의 장관을 뻔히 보고서도 액셀을 밟을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다. 더는... 못 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달려! 총으로 어깰 내려찍으며 놈이 외쳤다. 이제 더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죽여,라고 나는 말했다. 달려, 놈이 한번 더 소리쳤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탕.
뜨겁고 단단한 것이 내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 휘청, 목이 심하게 뒤로 꺾였으나... 나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마에 뚫린 작은 구멍을... 나는 말없이 만져보았다. 뒤통수엔 차마 손을 댈 자신이 없었다. 콸콸, 가까이서 나는 그 소리를 한쪽 귀만으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으니까.
달려, 하고 놈이 다시 속삭였다.
쉽게 끝낼 ‘일’을... 왜 질질 끌고 지랄이었어? 내가 물었다.
끝이... 안 나니까, 하고 놈이 말했다.
또 우린
러닝메이트니까...라고도 놈은 말했다. 머릿속이 어떻게 되었으므로 다른 복잡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것도 여전히 한가지뿐이었다. 나는 루디와 함께라는 것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함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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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링(curling): 빙상에서 평면으로 된 돌(컬링스톤)을 빗자루 형태의 솔(브룸)로 미끄러지게 해 득점을 겨루는 경기. 한팀은 네명이며 두 조로 나누어 진행한다.↩
- 스윕(sweep): 컬링에서 스톤의 진로를 쓸고 닦는 동작.↩
- 알마 코건(Alma Cogan)의 노래 「에스키모와 탱고를 추지 마세요」(Never Do A Tango With An Eskimo)↩
- 미국의 의류메이커(Abercrombie & Fitch)↩
- 북미산 큰 사슴(moose)↩
- 자유의 여신상 주춧돌에 새겨져 있는 詩 「새로운 거상」(The New Colossus)의 일부.↩
- 1964년 일어난 알래스카 대지진을 말하는 것이다. 진도 9.2의 강진이었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Good Friday)에 일어났기 때문에 굿 프라이데이 지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미 역사에 기록된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
- 미국의 주유소는 대부분 쎌프 씨스템이며, 먼저 자신이 주유할 주유량을 말하고 요금을 계산하는 선불제이다.↩
- 1956년作 영화
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동명의 주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