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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피가 아니라 장미의 붉은색을 노래하리라
2009년 12월, 팔레스타인 문학기행
김남일 金南一
소설가.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등이 있음. bayon@dreamwiz.com
- 필자는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민간 문화교류 모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으로 행사 참석차 보름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한국에 다녀간 바 있는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 소설가 아다니아 쉬블리를 비롯해 많은 현지 작가들을 만나 향후의 교류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아울러 알 까단 문화쎈터에서 한국의 현대문학을 소개하는 소략한 발표 기회도 가졌다.
밤길을 쏜살같이 달려온 승합차가 속도를 조금씩 줄여나간다. 칼란디아 체크포인트. 카키색 군복들 사이로 어둠보다 더 까만 총신이 보인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자기증명해야 하는 땅.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다. 1980년의 봄, 숨쉴 때마다 비릿한 피냄새가 묻어나는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한 청년이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긴다. 이방의 시인은 만날 수 없는 연인에게 노래를 바쳤고, 청년은 그 노래를 들으며 남도의 붉은 대지를 떠올렸다.1 그리고…… 콘크리트 장벽의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찻길을 막는다. 어둠 속에서 도시가 나타난다. 비계를 올리는 건물들이 쑥쑥 눈에 들어온다. 라말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 차는 30년 세월을 건너뛰어 현실로 진입한다.
라말라-모멸을 견디는 법
겨울에 가려면 무엇무엇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라말라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가 뼛속을 파고든다. 딱히 추운 건 아닌데도 몸이 견디지 못한다. 튼튼한 동료들이 예루살렘으로 떠난 날, 나는 침대를 식은땀으로 적신다. 시인 자카리아가 전화를 했다. 당장 달려올 태세다. 괜찮다고 했다. 소설가 아다니아도 안부를 물었다. 괜찮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다. 불과 몇달 전 해발 6천미터 가까이 되는 히말라야 촐라체 패스까지 타넘은 내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팔레스타인에 머무는 동안 내내 그렇게.
라말라에서 가장 번화한 알 마나라 광장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사자 조형물들이 서 있다. 라말라에 있는 동안 스무번은 봤는데, 솔직히 예술성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죽했으면 건축학과 대학생들이 창피하다고 철거를 요구했을까. 하지만 라말라에 사는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말처럼, 2000년 제2차 인티파다(봉기) 후 그 사자상은 예술성과 상관없이 존재의 이유를 얻는다. 당시 전투기 공습에 이어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들어온 이스라엘 병사들은, 기껏해야 돌멩이밖에 던지지 못하는 예비 피다이(전사)들이 백수의 왕 사자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탁월한 저격수인 그들은 내기를 걸었을 테고, 결국 네마리 사자는 하나같이 꼬리를 잃고 말았다. 이제 라말라 시민들은 꼬리 없는 사자들을 볼 때마다 모멸을 느끼겠지만, 모멸이야말로 살아남아야 할, 그래서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맞이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라말라에는 훌륭한 문화쎈터들이 몇개 있다. 1996년 문을 연 알 싸카키니 쎈터도 그중 하나로서, 유서 깊은 아랍의 도시 가옥을 개조해 사용한다. 20세기초 근대적 문화운동의 주역 칼릴 싸카키니의 유지(遺志)를 받든 그곳은 봉쇄된 서안지구의 문화적 상징으로 짧은 기간에 자리잡았다. 거기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지식인 두 사람, 마흐무드 다르위시와 에드워드 싸이드가 귀환 후 각기 최초의 강연을 했다. 특히 다르위시는 라말라에 머물 때 그곳의 2층 방 하나를 집필실로 사용했다. 2002년 4월 13일 오전 10시 50분, 두대의 탱크와 네대의 APC(병력수송용 장갑차)를 앞세운 이스라엘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2층 철문을 폭파시켰다. 모든 유리창이 박살나고, 다르위시의 집필실도 초토화되었다. 그 방이 시인의 집필실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다르위시의 시를 한편도 읽은 적 없다 하더라도! 그곳은 또한 두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주제 싸라마구와 월레 쏘잉카)가 국제작가단의 일원으로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르위시는 환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구제불능의 병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희망이라는 병통입니다. 해방과 독립에 대한 희망. 우리가 영웅도 아니고 희생자도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희망. 아이들이 안전하게 학교에 가는 희망. 임신부가 군인들의 체크포인트 앞에서 사산아를 낳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살아있는 아이를 낳는 희망.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붉은색의 아름다움을 보는 희망. 이 땅이 사랑과 평화의 땅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는 희망.”
이스라엘 병사들은 다르위시의 이 모든 ‘희망’ 위에 씹고 있던 호박씨를 내뱉었고, 컴퓨터, 휴대폰, 책들과 3700셰켈(미화로 약 825달러)의 돈을 훔쳐갔다. 그들은 집필실에 오줌까지 눈 다음 돌아갔다. 나어린 병사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 망명에서 돌아온 다르위시가 시를 낭송했다. 문화쎈터 안팎에서 수천명 청중이 숨죽인 채, 떨리는 가슴으로, 지금은 곁에 없는 ‘팔레스타인의 연인’을 애타게 그렸으리라.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생의 한때’일 수 있는지! 비난이 일자, 이스라엘 방위군의 공보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파괴주의와 약탈을 비난합니다. 아울러 증거를 발견하면 그런 짓을 한 병사들에게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입니다.”
유대인 정착민이 학교 마당에서 놀고 있던 팔레스타인 소녀를 총으로 쐈다. 법원은 살인자에게 과실치사 이외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살인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방청석에서는 노래와 춤이 터져나왔다. 군 순찰대가 역시 학교 마당에 있던 소년들에게 사격했다. 다섯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으므로, 단지 깜짝 놀라게 할 의도였으므로, 기소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스라엘에서 ‘좌파’로 분류된다는 한 장군은 자기 부하들이 울면서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폭력에 맞서 어쩔 수 없이. 인도주의자의 고뇌가 묻어나는 그의 증언은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방영되었다. 그 무렵, 총에 맞은 팔레스타인인의 텅 빈 동공 바깥으로는 뇌의 일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2
거듭 말하지만, 모멸을 견디는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군은 영원히 여기에 머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3
에드워드 싸이드는 2003년에 사망했다. 이듬해, 라말라 국립음악원(1997년 창단)은 에드워드 싸이드 국립음악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팔레스타인이 낳은 위대한 탈식민주의 지식인이자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급 피아노 연주자를 기렸다. 자서전 제목(Out of Place)처럼, 그는 평생 ‘장소’에 대해 고민하고 투쟁했다. 그의 이름과 성 ‘에드워드’와 ‘싸이드’ 사이, 미국 시민권과 팔레스타인 신분증 사이, 그의 종교 기독교와 아랍의 종교 이슬람 사이, 학문과 음악 사이, 이론과 실천 사이, 점령과 추방과 망명 사이 그 어디쯤에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가 놓일 것이지만, 저자는 죽은 뒤 확고부동한 정체성을 확보했다.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2007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의 시선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출판에 맞춰, 그리고 전주에서 열린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 고은 시인은 시선집에 부쳐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이다”라고 했다. 2008년, 다르위시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비행기에 실려 요르단으로 운구되었고, 다시 육로로 체크포인트를 거쳐 라말라에 도착했다. 국장에 해당하는 장례식이 치러진 후, 그는 문화궁전 옆 언덕에 묻혔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네 종류의 추모 우표를 발행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다르위시를 만나게 된다. 상점 쇼윈도우에서, 여염집 2층 베란다 화분 옆에서, 달력 속에서, 그리고 아마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가슴속에서. 베들레헴 시가를 가로지르는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나블루스의 젊은이들
나블루스는 라말라에서 북쪽으로 두시간 거리에 있다. 가는 길에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농촌을 볼 수 있는데, 낮은 구릉 곳곳에 올리브나무 과수원들이 펼쳐진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법도 한데, 실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논의 끝에 우리는 난민촌 방문을 포기하고, 그저 아랍의 옛 성곽도시를 보러 온 관광객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런 우리에게 그들이 먼저 다가온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이거 먹으라고, 그 음식점 내가 아니까 데려다준다고…… 도시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우리는 완벽하게 긴장을 푼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틈만 나면 주저앉았다. 걱정하는 동료들 등 뒤로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가 보인다. 처음에는 무슨 전쟁영화 광고인 줄 알았던 그것들이 바로 ‘순교자’들의 포스터였다. 라말라에서는 잘라존 난민촌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었는데, 나블루스에서는 골목마다 죄 그런 포스터들이다. 간혹 앳된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나블루스는 한국에도 다녀간 소설가 싸하르 칼리파의 고향이다. 그녀 역시 점령하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투쟁을 소재로 삼는다. 동시에 그녀는 『유산』(아시아 2009) 『가시선인장』(한국외대출판부 2005) 등에서 가부장적인 아랍사회의 여성들이 당하는 이중의 고통을 당당하게 드러낸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한국에 왔을 때 일이다. 한 신문에 기사와 함께 그녀의 사진이 자못 큼지막하게 실렸다. 표정이 밝지 않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사진에 찍힌 심각한 표정의 자기 얼굴을 가리킨다.
“어디나 그래요. 이게 바로 스테레오타입이죠.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다른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그녀 몰래 정중히 부탁했다. 덕분에 이튿날 신문에는 목젖이 드러날 정도로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실렸다.
나중에 확인한 바이지만, 나블루스의 발라타 난민촌은 피다이들의 요람이자 근거지다. 당연히 이스라엘군의 감시 또한 삼엄하다. 대낮에 피다이들은 난민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골목을 다닐 때조차 재빠르고 은밀하게 행동한다. 인티파다와 더불어 성장한 젊은 피다이들은 감옥 아니면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걸 잘 안다. 문득 그들의 평균수명을 떠올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실제로 순교를 자원하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18세에서 24세다. 속이 좋지 않아 어느 빵집 앞에 앉아 쉬는데, 청년들이 휴대폰을 자랑스럽게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나는 쓰린 배를 움켜쥔 채 억지로 웃어 보인다. 그들의 건강한 웃음이 자꾸 고마웠다.
하이파, 팔레스타인 문학의 정수
가만히 읊기만 해도 가슴 뛰는 이름이 있다. 마치 토니오 크뢰거에게 잉게보르크 홀름이 그랬듯이. 내게 하이파가 그렇다.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도시. ‘바다의 신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도시. 그 하이파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국가건설 과정이 팔레스타인인의 희생을 댓가로 한 것임을 늘 상기시켜온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저서 『팔레스타인 현대사』(후마니타스 2009)에서 하이파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 혹은 공존에 관한 의미있는 사례로 거론한다. 1920년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던 하이파에서는 유대인, 기독교도,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했으며, 적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계급적 연대 혹은 민족적·비민족적 협력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 사실, 하이파에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나크바(대재앙)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거나 못한 팔레스타인인들도 상당수 살고 있다. 일부는 좌파 유대인들과 손잡고 공산당을 결성해 직접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65년 소련의 반이스라엘 노선을 둘러싸고 분열이 격화되자 친팔레스타인계는 별도의 조직 라카(히브리어 Rakah)를 구성한다. 소련은 라카만을 공식적인 공산당으로 인정한다. 라카는 1965년 선거에서 3석을 얻는 등 이스라엘 의회에 꾸준히 진출했다. 1977년에는 다른 좌파와 아랍계 민족 정파를 흡수해서 쟈브하(아랍어 Jabha) 혹은 하다쉬(히브리어 Hadash), 즉 ‘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을 결성, 오늘에 이른다.
우리를 초청한 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쨌든 서안이나 가자하고 또 달라서, 말하자면 적의 영토에서 사는 거잖아요. 힘들지 않나요?”
지인은 금세 눈치채고 대답했다.
“왜 아니겠어요? 그래도 여기는 하이파니까.”
공존을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특수성과 더불어, 나는 하이파를 특히 팔레스타인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위대한 시인과 작가들의 도시로 기억한다. 2007년 다르위시는 40년 만에 하이파를 공식 방문한다. 1961년부터 1970년 모스끄바로 떠날 때까지 하이파에 머물렀던 그는 공산당원으로서 기관지 『알 이티하트』(‘연합’이라는 뜻)의 기자로 일했다. 그 기간, 그는 비상계엄법에 따라 다섯차례 체포됐으며 수시로 가택연금 조치를 당했다.
돌아온 다르위시를 보러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다르위시가 직접 낭송하는 시를 숨죽이며 들었다.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앞둔 학생들도 먼 길을 달려왔다.
“마지막 시를 읽을 때,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내 어머니의 빵을 갈망하며」) 말이에요, 떠나간 아들 때문에 울고 또 울다가 끝내 시력을 잃은 어머니께 바치는 시…… 저도 그만 울고 말았어요.”
“그분은 우리의 정신이고 영혼이에요. 그분의 시에는 우리의 눈물이 담겨 있거든요.”4
다르위시는 비공식적이지만 1997년에도 잠깐 하이파에 다녀갔다.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이밀 하비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1967년 이른바 6일전쟁 이후 『6부작 6일간』을 발표한 바 있는 하비비는 1974년 장편 풍자소설 『싸이드 아브 나흐스 알 무타샤일의 실종에 얽힌 괴이한 사건들』(영역본 제목은 ‘비관낙관주의자(pessoptimist) 싸이드의 비밀스러운 일생’)을 발표한다. 그 작품은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아랍 산문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신분증을 갖고 살아가게 된 팔레스타인인의 정체성에 대한 뼈저린 탐구다. 점령지에서 풍자는 그 자체가 강력한 저항의 육체다.
그리고 가싼 카나파니가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설 「불볕 속의 사람들」과 「하이파에 돌아와서」(『불볕 속의 사람들』, 창비 1996)의 작가. 하이파 해안에서 건너다보이는 땅 악카에서 태어난 그는 팔레스타인 문학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저항의 서사를 완성한 작가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대변인으로도 활약했다.
중편 「하이파에 돌아와서」는 1948년 나크바가 출발점이다. 주인공 싸이드 부부는 혼란의 와중에서 갓난아이 칼둔을 잃어버린다. 20년 후, 이른바 6일전쟁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실향민들에게 딱 하루 하이파 방문을 허락한다. 주인공 부부도 라말라를 떠나 하이파에 돌아오는데, 갈멜산(카르말산) 아래 아랍인 지구 알 할리싸 거리의 옛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랍인 칼둔이 아니라 이스라엘 병사로 성장한 도우브였다. 싸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의 첫 전투는 칼리드라는 이름의 피다이와의 전투가 될지도 모르겠군. 칼리드는 내 아들일세.”
1972년 카나파니는 망명지 베이루트에서 조카와 함께 차를 타려다 부비트랩이 터져 사망한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싸드의 소행이었다.
6등급 낙인
2009년 1월 가자에서 다시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지만, 해가 가기 전 12월의 서안지구는 겉으로는 꽤 평온했다. 예컨대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는 헤브론에서 단 한명이 살해당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우리는 출국을 준비하며 성지 순례자들로서 서안지구에는 근처도 가지 않았노라며 서로 입을 맞추었다. 물론 사진이라든지 팔레스타인 깃발 같은 게 그려진 물건들은 예루살렘까지 가서 미리 우편으로 보냈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첫 관문을 쉽게 통과했다. 3등급 비표를 붙여준다. 싱겁네 하며 가려는데 웬걸, 다시 붙잡는다. 본격적인 검색은 그때부터다. 가방을 연다. 하필이면 아랍어로 쓴 자카리아의 동화책이 나온다. 공안요원이 책을 펼치자 하필이면 전투기가 팔레스타인 깃발을 단 집에 폭탄을 퍼붓는 그림이 나온다. 눈앞이 캄캄하다. 이게 뭔가. 보면 모르냐, 동화책이다. 어디서 났느냐. 샀다. 뭐 하러 샀느냐. 나는 출판업자다. 작년에는 이스라엘 동화책도 펴냈다. 어디서 샀는가. 예루살렘에서. 라이어! 동료들도 마찬가지. 팔레스타인에 들어갔다 나온 흔적들이나 하다못해 친팔레스타인계 인종임을 증명하는 선물들만 우수수 쏟아진다.
도대체 우리가 무얼 대비했지? 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 지금부터 나는 영어를 모른다. 결국 별도의 공안분실까지 끌려갔다. 아주 짜증스러운 검색과 눈초리. 어떤 여자 동료는 속옷까지 들어 보여야 했다고 한다. 비행기 이륙시간이 다가오지만 놔주지 않는다. 마음대로 하시라. 작가로서 나는 차라리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다니아, 이제 네 말을 이해할 것 같아. 제발, 오늘밤 꿈만큼은 내가 겪은 이 현실보다 아름답기를!
거의 두시간 만에 풀려났다. 그새 내 가방에는 6등급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마 두번 다시 오지 말라는 뜻이겠지. 허겁지겁 게이트를 찾아가는데, 우리말로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려온다. 한 무리 중년 여성들이다. 꿈에 그리던 성서의 땅 순례를 마쳤다는 자부심과 보람이 그득한 표정들! 그러나 그 표정 어디에서도 팔레스타인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한 하늘 아래 서로 다른 땅을 다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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