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이일영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창비 2009
진보, 한반도 상공으로 날아오르다
김석현 金錫鉉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연구위원 skim@stepi.re.kr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이하 『한반도경제』)는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그 역사성과 공간성이 방대해 초보연구자가 ‘서평’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따라서 개략적으로 책을 소개하고, 주제와 관련해 한명의 독자로서 궁금한 점을 제기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반도경제』가 답하고 있는 바와 그렇지 못한 바를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한반도경제’라는 큰 주제하에 묶인 이 책은 저자 이일영(李日榮)이 오랫동안 동아시아, 남북한경제, 농업 등에 대해 연구해온 결과물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서문에서 밝히듯 저자는 1997년에 ‘동아시아-한반도연구회’의 설립에 동참했고, 이 모임은 지금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로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경제학자와 달리 저자는 오래전부터 정치적 또는 지리적 개념이 강하게 느껴지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학제적 탐구를 해왔다. 『한반도경제』는 그러한 10여년에 걸친 문제의식들을 모아 중간 매듭을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의 성과를 가늠케 한다.
이 책은 ‘한반도경제론의 구상과 전략’‘한국의 경제모델의 모색’‘한반도 경제통합과 북한경제’라는 큰 줄기로 구성된다. 각 제목이 말해주듯, 저자는 ‘한반도경제’의 정의와 비전을 소개하고, 그 각론으로서 ‘한국의 경제’와 ‘북한의 경제’를 서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만 보면 그 둘을 묶은 집합개념으로 한반도경제가 제시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고 범위와 구성은 훨씬 넓고 심층적이다. 저자가 이 개념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바는 한반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동아시아-남한-북한 그리고 그보다 작은 지역이 모두 긴밀하게 엮여 있다는 것이다. 종래의 ‘한국경제’ 같은 전형적인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공간적, 지리적, 정치적 개념이 작은 구성부분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제외되는 탓에 경제학의 단일학문의 개념만이 남기 쉽다.
여기서 『한반도경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첫째 ‘한반도경제’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 유사할 수 있는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 쓰이는 ‘한국경제’ 대신에 사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이다. 그에 대한 답이 책의 전체 내용일 수 있으니, 다음처럼 좀더 세분화해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둘째, 한반도경제는 갑자기 불쑥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그 역사적 맥락이 있는가? 셋째, 한반도경제가 동아시아-남한-북한 그리고 보다 작은 지역이라는 다차원적인 개념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포착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할 때 그 필연성은 어느 정도인가? 즉 원론적으로 모든 대상은 상호작용이 있을 텐데, 원론 수준의 상호작용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 넷째, 한반도경제는 다분히 학문적 정합성 차원의 대상설정은 아닌 듯한데 (‘새로운 진보의 대안’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그 개념에서 도달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인가? 다섯째, 그 실천은 어떤 면에서 진보이며, 또 어떠한 면에서 기존의 진보와 차별되는 대안인가? 마지막으로, 한반도경제는 고유명사를 벗어나 보편명사로 자리할 수 있는가? 즉 그만큼 그 문제의식이 대중에게 승인될 수 있는가?
첫째, 한반도경제의 차별성에 대해. 저자는 아직 한반도경제가 심도있게 닦여 있는 개념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그 지향을 “남북한 각각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합하며 세계와 공존하는 새로운 체제”(6면)로 제시한다. 부연하면 “국민국가와 그 아래의 지역, 민족국가, 그리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지역’까지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 공동체”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둘째, 한반도경제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저자는 “더이상 민족국가의 건설이 우리의 지상목표가 될 수 없다”(6면), “그간의 일국주의적·계급주의적 전망은 현실에 부적합”(37면)하다고 적고 있다.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추해본다면, 저자는 박현채(朴玄埰)로 대변되는 민족경제론과 서구 좌파이념에 의해 규정되어온 기존 진보이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한반도경제의 내적 필연성에 대해. 첫째 질문인 한반도경제의 차별성이 저자의 지향이 강조된 것이라면, 내적 필연성은 지향과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사물의 운동역학에 대한 것이다. 저자가 거시적/미시적 통합경제의 지향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반면에, 그러한 통합이 가능할 것임을 보여주는 운동역학에 근접한 단서들은 여러 지면에 흩어져 있다. 먼저 저자는 동아시아 정치구도의 변화에서 단서를 찾는다: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세계화에 따라 분단체제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상위체제는 해소되었다. 또 남한에서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북한에서는 제한적이지만 시장화가 진전되는 등 남북한 각각에서 분단체제와 조응하기 어려운 변화를 겪고 있다”(21면). 또한 경제와 기술의 변화는 일국적 범위를 넘어서게 함을 시사한다: “세계화와 기술진보는 국가가 초국가기구와 국가 내의 광역적인 지역기구에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하거나 분산하게 만들었다”(29면). 이러한 단서들에서, 저자가 남북한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유기적인 씨스템으로 진화하는 운동과정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씨스템적 진화 자체가 저자의 지향을 필연적인 것으로 뒷받침하는 운동역학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저자 역시,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범세계적인 조절양식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83면)며 운동의 향방이 미궁임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단서는 있되 필연성을 입증하지는 못해, 아직은 저자의 동아시아의 공동체 질서 모색은 실천담론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넷째, 한반도경제의 실천성에 대해. 한반도경제는 저자의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의 통합명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거시적 실천 프로그램이 언급되었지만, 그밖에도 저자는 정부-기업의 이분법 대신에 ‘하이브리드 조직’을 비롯해 농업의 혁신, 동북아 차원의 농업협력(191면), 북한의 이행프로그램(제9장)과 남북협력(남북 FTA 포함, 224면) 같은 다양하고 풍부한 미시적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기존의 진보와의 차별성에 대해. 이 책에서 기존의 진보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기존의 진보가 개방성이 결여되었으며 또한 목적론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바탕에서 저자는 진보를 새롭게 해석한다. “인간과 사회는, 끊임없이 새롭게 변하는 세계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실험, 즉 작용과 반작용을 포함하는 적응을 통해 냉혹하고 무자비한 경로를 피해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진보’를 ‘진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60면)
여섯째, 한반도경제의 보편성에 대해. 한반도경제는 그 운동역학이 아직 명료하지 않고 실천의제의 성격이 강해서, 이 의제가 보편성을 획득할지는 향후 이론적인 보완 여부 그리고 의제 형성을 둘러싼 담론형성 과정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저자 역시 그런 점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모든 이론은 미성숙함에서 출발하여 발전하는데, 발전의 각 단계를 넘어서려면 엄격한 공식화와 경험적 검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설명력과 예측력의 부족으로 중도 탈락하는 비공식 이론(informal theory)이 부지기수이며, 한반도경제론도 이제 출발선에 서 있는 정도라고 하겠다.”(37면) 앞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답하지 못한 것 그리고 저자가 명시적으로 ‘출발선’으로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것 등이 모두 저자와 그 취지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저자는 과감하게 기존의 ‘진보’의 입장 또는 해석과 결별했다. 그러나 기존의 진보가 지향했을 따뜻한 ‘공동체’를 염원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범위를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국가적 차원에서도 공동체가 온전할 것임을 예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진보에 대한 저자의 입장 그리고 그의 실천 프로그램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지향하는 큰 스케일의 공동체는 상상 자체가 금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우리에게 주어진 정언명령 같은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