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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석영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예담 2009

이덕형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산책자 2009

이율배반은 어떻게 작가를 만드는가

 

 

이장욱 李章旭

시인, 소설가   wook6297@hanmail.net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I. Berlin)은 위인들을 두 유형으로 나눈 적이 있다. 하나의 크고 유일한 가치에 기투(企投)하는 고슴도치 유형과, 이질적이고 다층적인 가치를 선호하는 여우 유형이 그것이다. 고슴도치 유형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씨스템”에 연루시킨다. 말하자면 보편원리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는 셈이다. 여우 유형은 그와 달리 다원적 분산과 이종접합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들은 변치 않는 하나의 비전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벌린은 고슴도치 유형으로 플라톤, 헤겔, 도스또옙스끼 등을, 여우 유형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괴테 등을 언급하고 있다.

벌린이 도스또옙스끼를 전형적인 고슴도치 유형으로 드는 것은 이해가 간다. 도스또옙스끼는 확실히 인간과 이성의 한계를 극화(劇化)하고, 여기에 신성(神性)이라는 비전을 대질시키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 흥미로운 것은 똘스또이의 경우다. 벌린에 따르면, 똘스또이는 “본래 여우였지만 스스로는 고슴도치라고 믿은”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특히 똘스또이의 역사관에 적용할 때 그렇다. 역사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역사가나 철학자 들에 대항해서, 똘스또이는 세계의 구체적 다양성을 복원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을 썼다는 얘기다. 벌린에 따르면, 똘스또이에게 세계는 일관된 비전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사건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비록 똘스또이 스스로는 독자적인 ‘민중적 그리스도론’으로 세계를 해석했다고 믿었지만 말이다.

물론 벌린의 유형론은 흥미로운 만큼 위험한 구분이다. 모든 이분법이 그렇듯이 유형적 분류는 대상의 복합성을 희생해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도스또옙스끼와 똘스또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대문호’들은 고슴도치냐 여우냐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내적 모순과 갈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을 규정하는 건 오히려, 구체적 삶과 비전 사이의 간극(똘스또이), 이율배반적 의식의 연쇄(도스또옙스끼) 같은 특징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모순과 이율배반 자체가 그들을 19세기를 대표하는 영혼으로 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최근 발간된 두권의 책은 이런 맥락에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하다. 석영중의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와 이덕형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그것이다. 앞의 책은 똘스또이의 주저 『안나 까레니나』를 중심 소재로 삼아 똘스또이의 삶과 사유를 조명하고 있고, 뒤의 책은 도스또옙스끼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를 뻬쩨르부르끄라는 도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에 겹쳐 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두 책의 지은이들이 대문호들의 모순과 이율배반적 의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똘스또이 쪽의 자기모순은 명백해 보인다. 무저항주의 등 우리가 똘스또이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구체적 실천강령, 즉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채식, 시골살이,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생활의 중단, 예술의 박멸 등”(석영중 278~79면)은 기실 그와 정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똘스또이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똘스또이는 탁월한 예술가였으나 예술을 혐오했으며, 야스나야 뽈랴나의 지주이자 귀족이었지만 지주와 귀족이라는 신분을 혐오했다. 그뿐인가. 스스로는 90여권의 책을 썼으나 인간의 언어를 불신했으며, 결혼을 했으나 결혼제도를 극구 부정했다. 방탕하다고 할 만한 성을 누려서 무려 열셋이나 되는 자녀와 확인되지 않은 수의 사생아를 두었으나 육체적 금욕을 중요한 미덕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참회록』를 쓰던 50세 이후의 저 유명한 ‘회심’ 탓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 석영중이 지적하듯이, 말년의 이 ‘회심’은 이미 이전의 작품들에서 예비된 것이었다. 우리가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갑작스런 변모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똘스또이의 내면에서 자기모순의 형태로 잠재해온 것의 결과인 셈이다. 똘스또이의 내적 갈등은 다음과 같은 저자의 문장에서 정점에 달한다. “한 인간 안에 그토록 섬세한 예술과 그토록 지겨운 설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인류 보편에 대한 그토록 거룩한 사랑과 특정 대상에 대한 그토록 매서운 독설이 공존한다는 것이 놀랍고, 그토록 거대한 지성과 그토록 불가사의한 미련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실용적인 사람이 그토록 실천 불가능한 것들에 관해 그토록 끈질기게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284면) 저자는 똘스또이라는 대문호를 관습적인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서 조명한다. 물론 이는 똘스또이의 작품뿐 아니라 일기와 사적인 기록들까지를 속속들이 파헤친 노고의 산물이다.

그 결과 똘스또이라는 ‘신화’가 해체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자기모순의 내부로 들어가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노작가의 근본주의적 노력에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올바른 삶의 방법을 모색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해답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12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똘스또이는 하나의 신화가 된 셈이다.

이율배반의 영혼이라면 도스또옙스끼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스또옙스끼적 정신분석은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으로 똘똘 뭉친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무엇보다도 도스또옙스끼 자신이기도 했다. 도스또옙스끼의 인물들은 “자기모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본성이 범할 수 있는 모든 모순과 부정을 기꺼이 수락하고 있다.” 도스또옙스끼에게는 “‘자기동일성’조차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양가성을 내포하고”(이덕형 256면) 있는 것이다.

이덕형의 책이 겨냥하는 것은 이 모순들이 뻬쩨르부르끄라는 도시공간의 이율배반적 존재론과 만나는 지점이다. 뻬쩨르부르끄는 18세기초 뾰뜨르 대제가 유럽 모델을 본따 인위적으로 건설한 근대도시다. “이 ‘성 베드로의 도시’는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이 유럽의 모더니티와 착종된 결과”인 것이다. 이는 요즘 말로 “하이브리드적인 이종접합의 스핑크스 도시”(11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뻬쩨르부르끄를 ‘저개발의 모더니즘’으로 규정한 것은 마샬 버먼(M. Berman)이었지만, 저자는 버먼의 선형적(線形的) 관점을 “그로테스크한 이종접합의 모더니티”(18면)로 수정하는 셈이다.

도스또옙스끼는 뻬쩨르부르끄라는 도시공간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21면)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낀 사람이었다.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환등기 등에 의해 재현된 가공의 이미지) 개념이 근대도시 빠리를 설명하는 틀이었다면,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주변부였던 뻬쩨르부르끄에서 더 극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 이 도시는 “죽은 자들의 뼈 위에 세워진 바로크 도시의 화려한 연극무대”(113면)이며, 도스또옙스끼는 그 연극무대 위의 정신과 의사이면서 그 스스로가 환자였던 셈이다. 그러니 바흐찐(M. Bakhtin)이 발견했던 도스또옙스끼적 다성악(polyphony)이란 무엇인 것일까? 그것은 이 “근대의 모순적 다면성의 산물이며, ‘모순의 공존과 상호작용’은 도스또옙스끼의 근본적인 예술적 시각”(257면)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도스또옙스끼는 낭만주의자들처럼 모순을 ‘정신’의 문제로 귀결시키지 않았으며, 헤겔처럼 변증법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순이란 이 사회와 인간의 ‘물질적’ 상태에 연관되는 것이다.

이 두권의 책은 여러모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러시아문학 연구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학자들의 인문적 에쎄이라는 점. 석영중은 다수의 정교한 학술서 외에 이미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 같은 에쎄이를 펴낸 바 있는데, 똘스또이를 다룬 이번 책은 특히 문체나 서술 차원에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서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또 이덕형은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2001), 『이콘과 아방가르드』(2008) 등의 주저 외에도 『검은 사각형』(2004) 같은 형이상학적 장편소설을 상재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과 신성이 만나고 괴리되는 지점에 대한 인문적 탐색이 그의 일관된 관심사이다.

여기 소개한 두권의 책에는 깊고 유려한 인문주의자들의 시선이 스며 있다. 덕분에 우리는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의 작가적 삶을 아카데미즘의 메마른 이론틀을 거치지 않고 만날 수 있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대문호’라는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숨을 쉬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는 흔히 “빛과 어둠”(슈테판 츠바이크) 혹은 “육체의 심연과 영혼의 심연”(메레쥐꼽스끼)으로 대비될 만큼 이질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공히 제 삶이 직면한 모순과 이율배반 앞에서 정직했던 작가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