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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한명숙 재판 또는 5만달러라는 ‘맥거핀’

 

 

조광희 趙光熙

1967년 서울 출생. 민변 사무차장과 여러 영화사의 고문변호사로 일했고, 현재 영화제작사 ‘봄’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최근 한명숙 전 총리 재판의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hehasnoid@gmail.com

 

 

세상이 진실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법은 정치의 또다른 몸짓에 지나지 않는 시대에 선친은 왜 내게 법률가가 될 것을 권유했을까. 그는 아마도 삶이 비루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법률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내는 법률가의 삶 또한 비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은 잘 몰랐을 것이다. 나는 왜 사소한 반항의 몸짓을 보이다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말대로 법률가가 되었는가. 많은 청춘이 그렇듯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았다고 한들 그것을 선택한 결과가 쓰라린 것이 될 경우에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7년째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나는 이 직업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늘 어색하다.

나는 이 직업이 환경미화원이나 의사, 장례지도사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정리하거나 고치는 일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창조하지 않는 일이 그다지 재미있을 리 없다. 만일 이런 일을 그 자체로 즐거워한다면 남다른 취향을 가진 것이리라. 이런 일은 대개 댓가 때문에 하거나 소명 때문에 한다. 환경미화원이 거리를 깨끗하게 하면 길을 걷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의사가 병을 고치면 환자들이 웃음을 찾으며, 장례지도사가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켜주면 망자가 평안을 얻는다.

그러나 변호사의 경우에는 간단하지 않다. 변호사에게는 의뢰인이 있고, 의뢰인의 상대방이 있다. 의뢰인이 옳지 않은 한, 변호사가 하는 일이 세상에 반드시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변호사는 언제나 가치의 문제에 직면한다. 가치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상어라고나 할까. 그런데 늘 가치를 고민하면서 일하는 것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며, 가치를 도외시하다가는 어느 순간 악마를 대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직업은 번듯해 보이지만 제대로 된 신사숙녀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남자화장실에 ‘신사용’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도 되나’ 생각하곤 한다. 아마도 언제까지나 이 직업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사는 것이 다 그렇다. 살다보면 모든 회의를 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인 것 같은 순간을 맞을 때가 있으리라.

 

*

 

이제 1심 재판이 끝났을 뿐이고, 검찰은 또다른 건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에 대해 변호인이 너무 왈가왈부하는 것은 자제하는 게 맞겠다. 게다가 이미 언론과 열성적인 블로거들에 의해 생중계하듯 보도된 이 재판의 전말에 관해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것은 자칫 진부할 따름이다. 깜짝 놀랄 만한 속사정을 말하지 않는 한, 재판 참가자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는 지루함에 대해 용서받지도 못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만한 사정을 내가 전혀 모른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런 사정들은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세월이 흘러 이 재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을 때 어정쩡한 술자리의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서 그런 사연들을 꺼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중 어떤 사연은 육체의 종착역일 뿐 아니라 사연의 안식처이기도 한 무덤까지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숨쉴 틈도 없이 한달여 사이에 진행된 1심 재판을 마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만을 느슨하게 말하고자 한다.

법률적으로만 보면 이 사건은 무척 단순하다. ‘전직 국무총리가 2006년 12월 20일 총리공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전 대한통운 사장 곽영욱씨로부터 5만달러의 뇌물을 받았는가, 아니면 받지 않았는가.’ 엄격한 의미에서 그 진실을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피고인(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조금 결례인 듯하나, 인품이 고매한 분이니만큼 이해해주리라 믿는다)과 곽영욱씨뿐이다.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들도, 곽영욱씨의 부인도 알지 못한다. 검사도, 변호인도, 판사도 진실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느 한편을 지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물론 곽영욱씨가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많은 사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당사자도 아닌 내가 한점 의문도 없이 진실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오만이다. 내가 자신할 수 있는 최대치는 모든 정황과 증거를 종합해볼 때 곽영욱씨가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 이런 빈약한 증거를 가지고 사람을 처벌해달라고 기소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고인이 변론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까지다.

나는 기자들에게서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이 피고인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말을 두어차례 전해들었다. 기자들에게는 그것이 인상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검사들이 기자들에게 자신들도 유죄의 확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변호인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죄를 증명해야 하는 검사들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검사들은 이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했다는 위치로 인해 유죄를 확신해야 한다는 역할을 부여받았고, 그것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나는 검사들이 언론에 또는 검찰수뇌부에 자신들의 확신을 표현했음에도 실제로는 확신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냉철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사들이 과연 그렇게 냉철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추측한다. 아마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검사들이 유죄의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확신하고 있다면, 검사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 사고력의 결핍을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증거로 자신이 직접 보지도 않은 일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한 확신은 논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본래 검사들에게 부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 사건에서는 검사들의 논리적인 사고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나아가, 논리적인 사고력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단지 검사들뿐일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이 사건의 핵심은 피고인과 곽영욱씨 중 누가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는가를 가려내는 것인가. 이 사건이 재판을 통해 해결하게 되어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건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곽영욱씨의 말을 믿으려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피고인의 말을 믿으려 하는가. 왜 검사들과 권력자들과 보수적인 매체들은 곽영욱씨의 말을 믿고 싶어하고, 왜 변호인들과 권력을 잃은 사람들과 진보적인 매체들은 피고인의 말을 믿고 싶어하는가. 어떻게 정치적 입장이 순수한 사실을 판단하는 토대가 될 수 있는가. 심지어 이 사건의 사정에 대해 매체를 통해서만 전해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피고인이 유죄라거나 또는 무죄라거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가. 이 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았을지언정, 직접 재판을 지켜보지도 않은 검찰수뇌부가 무죄판결을 비난하며 피고인이 유죄라고 단언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확신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확신한다는 것 또는 확신하는 척한다는 것’이 이 사건의 비밀이라면 비밀이다. 그리고 이 사건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이 땅에서 뻔한 연속극처럼 되풀이되는 수많은 사건들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너무나 공공연하게 행해지기에 어느 누구도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누구나 그것이 비밀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실제로 비밀로 기능한다.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해주어도 그들은 계속해서 확신을 멈추지 않는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이상한 증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러한 증상으로부터 어떠한 역설적인 만족을 얻기에 이 증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증명되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증명된 것을 불신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증명을 시도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그래서 피고인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단순히 소송전략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재판에서 진실을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한다. 권력자는 권력자대로, 검사들은 검사들대로, 관객들은 관객들대로 각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그들의 욕망을 좌절시킨다면 그들은 주저없이 거짓을 택한다. 그들은 판결이 자신을 행복하지 않게 한다면 그 판결을 미워할 것이고, 판결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심지어 판사를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확신을 무너뜨리는 진실보다는 자신의 확신을 보듬어주는 거짓을 원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법률적으로는 판결의 이름으로 종결시킬 수 있으나, 심리적으로는 욕망의 구조로 인해 끝내 마무리될 수 없다. 피고인이 무죄로 확정되면 유죄라 확신하는 사람들은 피고인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 것이고, 유죄로 확정되면 무죄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의함에 울부짖을 것이다.

판결이 진실을 결정하는 기능을 완수할 수 없는 가공할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법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런 사회에서 법정은 욕망의 전선이 된다. 그 전선에서 승리는 진실의 대체물이 될 뿐 아니라 유일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밝혀주는 판결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승리를 고대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각자의 확신을 생산하고 확인하고 퍼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큰 권력과 여러 작은 권력들이 서로 뒤엉킨 모습은 어느 신화 속 뱀의 무리를 생각나게 한다. 뱀 한마리가 다른 뱀의 꼬리를 물고, 꼬리가 물린 뱀은 다시 또다른 뱀의 꼬리를 문다. 처음의 뱀도 꼬리 물린 다른 뱀에 의해 꼬리가 물림으로써 뱀들은 마침내 커다란 원이 되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물론 나 또한 그 뱀의 일원일 것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 원형의 춤을 그칠 수 있을까.

‘전직 총리가 5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보도된다. 사람들은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다. 조금 지나면, 그 돈이 어디에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보도된다. 사람들은 과연 돈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며칠이 지나면 왜 돈을 주었는지가 보도된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럴 수가. 얼마 뒤 검찰은 전직 총리를 소환하지만 출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검찰은 체포영장을 집행한다. 사람들은 흥분한다. 과연 다 털어놓을까. 그런데 전직 총리는 아무 말도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누가 이길까 너무 궁금하다. 갑자기 증인이 법정에서 말을 바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재판 상황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얼마후 전직 총리는 무죄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실망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감격한다. 만일 1심 재판의 결론이 사실이라면 5만달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 모든 소란의 정체는 무엇인가. 만일 피고인이 결백하다면 ‘총리공관에서 주고받았다는 5만달러’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면서 오로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든 소동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만들기 위해 가정된 것이 아닌가.

맥거핀(MacGuffin)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의 줄거리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끌려가게 만든다. 그런데 끝에 가면 그 자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 사건의 5만달러가 히치콕 감독이 즐겨 썼다는 맥거핀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관객들은 오슨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을 보면서, 주인공이 죽기 전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인 ‘로즈버드’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그의 인생역정을 따라간다. 그렇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시쳇말로 낚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맥거핀이 이끌어가는 영화를 보며 즐기는 자는 누구이고, 그로 인해 흥행수입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나 알다시피 이 사건은 법률적 외피 아래 정치적 속살이 숨어 있다. 피고인을 겨냥한 정치적 욕망이 작동하는 한, 아무런 실체가 없어도 언제든지 피고인을 향한 사건은 발화할 수 있다. 몇가닥 소문만으로도, 인생의 궁지에 몰린 어떤 사람의 몇마디만으로도 사건은 폭발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헛소문이자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놀아난 것인가. 검찰이 무죄판결을 예감하자마자 바로 시작했다가 여론에 밀려 중단된 이른바 9억원에 대한 새로운 수사는 이 사건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제보지만 제보가 아니며, 우연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욕망과 권력은 사건을 생산한다. 9억원은 또다른 5만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맥거핀은 언제든지 영화를 진행시키기 위해 가정될 수 있다. 그래서 재판에 부쳐진 5만달러는 수사과정에서 10만달러가 되기도 했고, 3만달러가 되기도 했다. 액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돈이 아니라 골프채라는 물건일 수도 있고, 물건이 아니라 휴가차 떠난 여행일 수도 있다. 그 모두가 맥거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이 영화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끝나고 5만달러도, 골프채도, 9억원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흥미롭게 영화를 보았고, 누군가는 그 흥행의 성과를 챙겼다.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다. 혐의가 있는데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그렇다면 묻고 싶다. 만일 누군가 지금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의자에 돈을 두고 왔다고 말한다고 해서 사건이 되는가. 어떤 사건은 절대로 시작되지 않고 어떤 사건은 집요하게 시작된다면, 사건을 작동시키는 것은 ‘혐의’인가 아니면 ‘맥거핀’인가. 피고인을 겨냥한 영화들은 그가 결백하다는 결론을 통해서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영화를 상영할 필요가 있는 한 5만달러든 9억원이든 다른 무엇이든 또다른 맥거핀이 등장해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변호인들은 어떻게 접근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재판장이 법정에서 이미 정답을 말한 바 있다. 가장 정치적인 사건을 가장 법률적으로. 백승헌 변호사의 탁월한 전략과 지휘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다한 변호인들은 철저히 법률적인 방법만이 이 난마처럼 얽힌 상황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호인들은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과 메커니즘에 대해 무수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처럼 법률적으로 수술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재판장은 뒤엉킨 고르기우스의 매듭을 ‘공판중심주의’라는 가장 법률적인 칼로 잘라냈다.

피고인을 처음 만나 지난 4월 9일 무죄를 선고받을 때까지 넉달은 그동안의 내 변호사 생활에서 가장 바쁜 시기였다. 영화도 보지 못했고, 책도 거의 읽지 못했다. 유일하게 읽은 것은 에인 랜드(Ayn Rand)의 소설 『마천루』(The Fountainhead)였다.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읽은 이 책의 주인공 로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축에 관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 건축가다. 그와 달리 매우 현실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출세한 건축가가 된 로크의 친구는 난관에 봉착한 어느날 그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로크, 무엇이든지 요구해. 내 영혼이라도 팔겠어……”

 

이때 로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바로 자네가 알아둬야 할 거야. 영혼을 파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야. 그건 모든 사람이 평생 동안 매일같이 하는 짓이잖아. 만일 내가 자네보고 영혼을 지키라고 요구한다면, 왜 그게 훨씬 어려운 일인지 알겠나?”

 

나는 연일 이어지는 재판에 지친 채로 집에 들어와 세수를 하다가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물에 젖은 얼굴은 세파에 시들어가고 있다. 나는 로크가 한 말을 떠올리며 그 얼굴을 관찰한다. 그 얼굴은 ‘평생 동안 매일같이 영혼을 파는 무리’에 속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그 얼굴은 세상의 가치에 맞춰 자신의 영혼을 재단하지는 않았지만, 짐짓 자유로운 척하면서도 낙오와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얼굴, 그래서 세상과 타협해온 어느 중년의 얼굴이 아닐까. 나는 아마도 변호사라는 직업을 매일같이 영혼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가치와 이념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협잡과 현실적인 이해타산 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목적을 관철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변호사라는 직업에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있다. 그러한 특성이 나로 하여금 이 직업에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심리기제를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끊임없이 변명을 하며 자신의 직업을 비껴가고자 했던 나는 ‘내다 팔 영혼도 없는 자’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이 직업의 모순적인 성격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만나는 모든 사건에서 ‘겉에 드러난 법’과 ‘안에 숨겨진 가치’사이의 긴장을 발견하며, 최선의 방안을 추구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모든 직업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끊임없이 영혼을 팔 것을 요구받는다. 판사와 검사도 마찬가지다. 가장 고매한 예술가마저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시대는 더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내놓으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한다. 우리 모두는 영혼을 조금씩 뜯어서 시장과 권력에 던져주고 그 댓가로 일용할 양식과 지위를 쌓아가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이 딜레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은둔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참된 은자(隱者)는 도시 속에 숨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글 같은 도시에 남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게 던져진 고차방정식을 모든 선의와 지혜와 노력을 다해 풀어가는 것뿐이다. 설사 그 방정식을 끝내 못 풀고 쓰러지더라도 그것을 위해 흘린 피와 땀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은 아주 드물게 어떤 계기 속에서, 되고 싶었지만 한번도 되지 못했던 최선의 자기에 이르기도 한다. 이 재판은 내게 그런 기회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