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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세계를 아는 힘, 동아시아공동체의 길

 

 

테라시마 지쯔로오 寺島實郞

미쯔이물산 전략연구소 회장, (재)일본총합연구소 회장, 타마대학 학장. 저서로 『세계를 아는 힘』 등이 있다.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국학연구원장, 사학과 교수, 본지 편집주간.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다.

 

 

백영서-테라시마

테라시마문고(寺島文庫) 4층 회의실│사진 ⓒ田中みどり

 

테라시마 지쯔로오는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일본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영향력있는 대표 지식인이다. 작년 여름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후 하또야마(鳩山) 총리의 “오랜 벗으로 외교정책의 브레인”(아사히신문, 2009.12.8)이라 해서 언론의 총아가 되었다. 또한 올해 1월에 출간된 그의 저서 『세계를 아는 힘』(世界を知る力)은 석달 만에 13쇄를 찍고 15만부(3월말 현재)를 돌파한 베스트쎌러다.

그는 산(産)·관(官)·학(學)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영역을 갖고 있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1947년 홋까이도오에서 출생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종합상사 미쯔이물산에 입사한 이래 워싱턴사무소장 등 오랜 기간 미국 지사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미쯔이물산의 전략연구소 회장이자 재단법인 일본총합연구소 회장으로서 공공정책 분석활동을 하는 가운데 타마대학(多摩大學) 학장직도 맡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현해 시사문제에 대해 발언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내 주변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가 시야 넓은 지식인으로서 미국을 잘 알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일본의 오래된 비판적 잡지 『세까이(世界)』의 편집장 오까모또 아쯔시(岡本厚)는 그의 주장이 학자나 언론인이 아니라 비즈니스 경험에 근거한 실물감각에서 나온 것이란 데서 강점을 찾을 수 있다고 귀띔한다. 미국 중국 등에 정통한 그의 입장은 『세까이』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세까이』 지면에서 원로 정치학자 사까모또 요시까즈(坂本義和, 본지 2009년 겨울호에 소개)와는 다른 입장에 서지만 그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이룩한 일본의 민주당이 새로운 한일관계의 길을 열어 동아시아 평화와 공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을지, 창비 독자와 함께 점검해보기 위해 테라시마 지쯔로오와의 대담을 마련했다. 사전에 일본어로 작성된 질문서를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토오꾜오에서 일본어로 대담이 진행되었다.(백영서)

 

 

‘한일병합’ 100년을 돌아보는 복잡한 생각

 

백영서 테라시마 선생은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국가로서 ‘열강의 일익을 담당하는 일등국’의 꿈을 좇아 아시아에서 패도(覇道)를 추구한 근대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서, 당시 세계사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자각하고 아시아의 시선을 마음속에서 공명하는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사를 아시아 속에서 총괄할 필요성을 제기한 선생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저 역시 ‘시간과의 경쟁’에 쫓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근대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서 ‘이중의 주변의 시각’을 갖자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아사히신문 2010.3.19 칼럼). ‘한일병합’ 100주년인 2010년을 맞아 지난 100년 일본역사에 대한 견해를 한국 독자들에게 간단히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이 대담을 시작하고 싶네요.

 

테라시마 보내주신 질문서에도 그러한 문제의식이 넘쳐 감명받았습니다만,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이 얼마나 한국의 문화·문명에 영향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유라시아대륙의 문명·문화를 전해주는 회랑 같은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사건이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전개되어왔던 것이고요, 대단히 복잡한 생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특히 올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인데요, 저는 일본근대사에 대해서 어떤 의미의 엄격한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는 식이 아니라 대단히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일본근대사를 돌아보는 입장입니다. 일본근대사는 이중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만든 말인데, ‘아시아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의 ‘친아(親亞)’라는 입장과, ‘아시아를 침략한다’는 ‘침아(侵亞)’1의 이중구조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중구조야말로 골치아픈 테마이자, 일본근대사를 깊이 성찰하는 시선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885년에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탈아론(脫亞論)」을 썼습니다. 거기서 후꾸자와는 구주(歐洲)를 모방하여 국가의 진로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후꾸자와가 「탈아론」을 쓴 그해에 타루이 토오끼찌(樽井藤吉)는 『대동합방론(大同合邦論)』을 썼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시아주의’의 전형적인 책으로, 아시아와 연대하여 요즘 말하는 ‘아시아공동체’라는 것을 만들어 구미(歐美)에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후꾸자와와 타루이가 제시한 이 두 문제의식이 새끼줄 엮이듯, 바이오리듬처럼 교차해 나온 것이 일본이 아시아와 관계맺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미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안 좋은 상황에 빠지면 일본은 돌연 아시아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대동아공영권 같은 것을 주장하고 일본을 리더로 한 아시아의 결속이라는 입장으로 아시아에 회귀했지요. 그런데 전쟁에 지고 1964년 토오꾜오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코오사까 마사따까(高坂正堯)가 「해양국가 일본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썼는데요, 여기서 그는 일본이 복잡한 아시아와의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세계 7대양을 차지하여 이른바 통상국가, 해양국가로 나아가는 노선을 취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후판 ‘탈아론’이라고 봅니다.

 

백영서 탈아와 아시아주의의 바이오리듬적 교차, 아시아주의가 바이오리듬처럼 되살아나는 바로 그러한 역학에서 일본이 살아왔다는 설명은 마치 일본근대사 강의를 듣는 것 같네요.(웃음) 이제는 바로 한일병합 얘기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테라시마 그럼, 한일병합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그때 일본의 판단에 대단히 중요한 충격을 준 것이 실은 미국의 움직임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898년에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푸에르토리코를 영유(領有)하고 필리핀을 거의 영유하는 형태로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컨대 뒤늦은 식민지제국 미국이 아시아에 출현한 것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의 타이밍이 일치했다는 사실이 20세기 미일관계의 비극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한일병합에 대한 일본의 동기부여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 실은 미국의 ‘하와이 병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괴로운 이야기이지요. 조사해보니 흥미롭게도 당시 일본 지도부의 인식 속에는 미국이 하와이에서 행한 일이 한일병합의 밑그림이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1998년 미국은 과거 쿠데타를 일으키고 하와이 왕정을 전복시킨 일에 대해서 상하 양원이 사죄 결의를 했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 사죄 결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성실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요컨대 한일병합의 복잡함이라는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의 세계사 조류를 볼 때, 한국은 실로 불행하게도 그 지정학적 역학이 충돌하는 곳이 되었던 거지요. 여기서 자극적인 얘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가령 제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의 일본의 정치 리더였다면, 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하고 아시아로 진출하고 하와이를 병합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일본은 아시아와 동등한 시선에서 연대해간다는 구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심히 어렵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요. 즉 민족의 에너지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분출하고 불타오를 때, 가령 히비야(日比谷) 폭동사건2 등이 일어나는 가운데, 과연 국민의 고양된 의식을 억누르면서 한일병합을 피하고 한국의 자립을 도모하며 한국과 연대해서 아시아에서 안정된 힘을 배양해간다는 구상을 펼칠 수 있는 견식있는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백영서 한일병합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실로 불행한 역학구도에서 이뤄졌다는 말씀의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것은 특히 한국인의 역사이해와는 거리가 상당합니다. 한국인이 아닌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도 그런 대외팽창의 길을 걷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주장한 흐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러일전쟁 무렵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 즉 소국주의(小國主義) 논의가 있었지요. 대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 대외팽창이 일본에 손해라고 지적한 이 흐름은 이후 자유민권운동이나 타이쇼오(大正)민주주의의 형태로 지속되어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수파의 주장이었고 ‘미발(未發)의 계기(契機)’였지요. 그러나 이런 흐름까지 염두에 두고 일본근대사를 성찰적으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역사문제는 오늘날 일본이 아시아로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지요. 실제 현실에서 한일간 역사인식의 차이는 양국관계의 커다란 쟁점으로 남아 있잖아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미국의 하와이 병합 사죄 결의처럼 한일간 역사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사죄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에 그렇게 된다면 매우 뜻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연대해서 새로운 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3 양국의 역사인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할지 기대가 됩니다. 또한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 담화’ 즉 최초로 일본정부의 총리(무라야마 토미이찌村山富市)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을 넘어서는, 한층 높은 차원의 선언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한국에서는 민주당과 일본정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칠 때 본격적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과 일본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만,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테라시마 솔직히 말해서 민주당정권이 100년을 맞아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본측이 책임을 져야 할 사건이 100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역사인식의 문제에 대해 더 길게 얘기할 수 없어 아쉬웠다. 현재 일본에서는 이와 관련해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역사이해를 넘어선다면서, 뒤늦게 제국주의 경쟁에 참여한 일본이 처음부터 침략의 의도를 품었던 것이 아니라 조숙한 제국주의국가로 전환해온 복잡한 굴절과정을 겪었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런데 긴 시간대에서 돌아봤을 때 한국병합이 과연 일본의 ‘국익’에 보탬이 되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일병합이 없었더라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급기야는 태평양전쟁과 패전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병합을 보는 시각은 일본사를 돌아보는 데 관건적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하또야마 담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양국에서 커지는 것 아닌가. ‘사죄’나 ‘담화’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사안이자 미래사에 대한 의지를 담은 것이기에 더욱더 중요하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정권교체 후 아시아를 중시하는 민주당정권에서 역사문제가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초등학교 교과서의 ‘독도’ 기술 문제나 행정쇄신상(行政刷新相)의 ‘식민지의 필연성’ 발언으로 한국에서는 실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해졌다. 이런 현상이 연립정권의 한계나 관료제 문제가 표출된 탓인지 모르겠으나, 재일동포와 관련되어 외국인 참정권 문제나 쿄오또(京都)의 민족학교에 대한 재특회(在特會)의 공격4에서 드러난 시민사회의 새로운 움직임-누구는 그것을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운동’의 단서가 될 가능성으로 본다-과 겹쳐볼 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전에 보낸 질문지에는 이와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

 

역사인식 문제에 이은 두번째의 주제는 그의 독특한 발상인 ‘친미입아(親美入亞)’와 동아시아공동체였다. 일본이 미국을 중시할 것인가 아시아를 중시할 것인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진행해야 할 방향이라는 그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 크다. 현재 민주당정부의 외교노선 또한 적어도 표면적인 수사로는 일단 이 방향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일관계와 관련해 그는 오래전부터 미국에 대한 “과잉의존·과잉기대의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로 높여가야” 한다든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자리를 자립자존의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핵심으로 주일미군기지 문제를 “메이지시기의 일본의 비원(悲願)이었던 조약개정에 비할 만한 ‘정기(正氣)와 자존(自尊)의 회귀(回歸)’”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실제로 민주당정부가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면서 현재 오끼나와의 주일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들고 나오자, 일본은 커다란 여론분열에 처하게 되었다. 미일 군사동맹에 변화를 제기하는 논의에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일본의 현실이다. 이런 반대여론에 대해 그는 “미디어를 포함한 일본 인텔리의 표정에 뿌리깊이 존재하는 ‘노예의 얼굴’”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미일관계는 경제에서는 협조관계를 심화하고(미일자유무역협정), 안전보장에서는 미일의 군사협력관계의 유지를 전제하면서도 ‘주일미군기지 없는 안보’ 및 대외 ‘비핵경무장 경제국가(非核輕武裝經濟國家)’의 기축을 지키는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 다음, 그가 말하는 ‘입아’에서 아시아는 다분히 중국을 의식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무역구조를 분석하여 “일본이 대미무역으로 밥을 먹는 것은 이제 옛말. 이미 대중화권을 중핵으로 하는 아시아와의 무역으로 밥을 먹는 시대에 들어서 있다”고 하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중시하자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미·중 트라이앵글’을 내세운다.

 

백영서 선생의 ‘친미입아’라는 발상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한국에서도 아시아 국가전략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선생의 책을 읽고 이 아이디어를 발견했을 때, 정말 신선하고 또한 의미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개는 ‘친미’와 ‘입아’를 양자택일적으로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발상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본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가령 한창 논쟁중인 오끼나와 미군기지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테라시마 제가 ‘친미입아’를 계속 말해온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냉전기에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기반으로 전후의 안정적인 시기를 거쳐, 부흥과 성장이라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실현해왔습니다. 이 점은 정확히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냉전이 끝날 때까지의 메커니즘으로서 미일안보조약 등이 유효하게 기능했던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지 20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된 지금, 점차 냉전 후의 아시아에 관한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고 할까요, 미국에 과잉 의존하거나 기대하는 틀로부터 탈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반미나 혐미(嫌美)가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지면서도, 한편 아시아에서 새로운 전개를 해나가기 위해서 아시아와 중층적 관계를 맺는 것이 이제부터 일본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아시아는 크게 둘로 나뉘지요. 그런데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그리고 한·중과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 있는 ASEAN사무국에 다녀왔는데, 반둥회의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것 위에서 구체적인 단계를 밟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중국이나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선생께서 말씀하신 미묘한 공기의 차이, 불신의 감정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한일관계, 중일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서로 인적 자원을 교환하더라도 말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서로 뭘 어떻게 해도 풀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작년 11월에 뻬이징대학에 가서 강연을 했을 때도 앞서 물으신 사죄와 비슷한 질문이 하여튼 나오기 마련이더군요.

 

백영서 그것이 한국과 중국 민중의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테라시마 음, 감정이군요. 그들이 일본에 대해 아직도 뿌리깊은 불신감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어요. 가령 저는 미일안보에 관해서 미국이 일본에서 기지를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지역협정을 개정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일본은 주체적 자립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저의 주장을 듣고 있던 학생으로부터 재미있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병뚜껑론’입니다만, 일본에서 미국이 기지를 정리하고 떠나버리면 실은 중국이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를 억누르는 병뚜껑으로서 미군이 유효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떠나면 막상 중국이 가장 불안하게 된다는 거지요.

 

백영서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요.

 

테라시마 음, 한국에서도 그렇군요. 그 배경에는 중국의 경우 난징(南京)학살이라든가 종군위안부에 대한 분노가 있겠지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실로 절실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아닌 과거 일본이 인접국들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던 점에 대해 깊은 슬픔을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그 얘기냐 하는 느낌 역시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현실문제로서 상호불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호불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정하고 어떻게 관계를 진전시켜갈 것인지를 생각해야지, 그저 상호불신을 없애자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해결이 어렵습니다. 가령 대개의 일본인은 중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강대해지는 것에 대단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중국 또한 틀림없이 일본이 군국주의 같은 것을 부활시키면 곤란하다는 게 본심일 겁니다. 한국인들도 일본에 대해서 깊은 경계심과 불신감을 틀림없이 품고 있을 겁니다. 일본인 중에서도 한국이 작년부터 분발하여 V자형 경제회복을 하고 힘을 키우고 있는 것에 민감해져 있는 사람도 있고,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력프로젝트에서 한국과 경쟁해서 패한 일을 두고 굴절된 내셔널리즘 같은 일종의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호불신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상호불신은 없다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불신을 전제로 하면서도 전진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것을 ‘단계적 접근법’이라고 말합니다. 친미입아로 이어지는 얘기입니다만, 오늘날 한중일의 사이에서 동아시아공동체 같은, 겉만 그럴싸한 말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EU같은 공동체가 내일이라도 생길지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개 미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뿌리깊은 상호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잘 생각해볼 것이 유럽의 EU도 그 출발점은 상호불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억누를 수 없는 상호불신이 거꾸로 에너지가 되어 EU라는 것에 단계적으로 가까워져갔습니다. 그러한 의혹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같은 것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그것이 단계적으로 축적되어 지금은 27개국 체제가 되었고,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유로화라는 공통의 통화까지, 물론 참가하지 않은 나라들도 아직 있지만, 단계적으로 생겨났던 것입니다.

동아시아공동체도 비전과 과장, 그리고 겉만 그럴싸한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역사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고 증오마저 품고 있는 사람도 있겠죠. 세대가 바뀌고 일본도 전후(戰後) 태생이 전인구의 80%를 넘었어요. 전후라는 시대가 65년이나 지난 현재에는 상호불신은 있지만 이제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대학끼리의 교류를 심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협정도 있겠고, 금융 연대, 환경·에너지 문제에서의 연대, FTA적인 접근 등입니다.

 

백영서 기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중국위협론도 상당히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 우익은 이 점을 아주 강조하면서 민주당정권에게 친미냐 친중이냐고 선택하라고 압박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에 비해 선생은 중국 본토만이 아닌 대중화권이란 네트워크에 착목해서, 중화민족이 각각의 역할을 잘 분담하는 형태로 대중화권을 형성한다는 씨나리오를 실행한다면 중국이 다른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실행할 수 없었던 번영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대중화권이란 네트워크가 정치안보, 경제, 문화의 세 수준에서 서로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강대하고 중앙집중적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추동력으로 삼아 작동된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그 네트워크가 제도화된다면 연방제(federation)나 국가연합(confederation) 같은 느슨한 결합체여야 하지 그렇지 않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중국위협론과 관련하여, 중국의 규모가 일본이나 한국보다 크다는 점을 고려한 속에서 선생의 중국관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테라시마 중국이 너무나 강대해지면, 거꾸로 한일의 연대가 중요하게 될 것이고, ASEAN을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해지겠죠. ASEAN은 분명 중국의 남하, 즉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환영하는 동시에 경계하고 있는 측면이 있어요. 물론 인도의 존재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ASEAN+3, 6(3: 한중일, 6: 한중일+호주, 뉴질랜드, 인도)으로 갈 것인지 하는 논의가 있습니다만, 저는 거꾸로 아시아 네트워크의 틀 안에서 단계적으로 중국의 강대화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연대는 중요하죠. 한중일이 함께 하는 회의에서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만, 한중일의 역학이 미묘한 형태로 기능하고 있을 때, 중일이라는 두 국가 사이보다 한중일의 역학이 이제부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에게도 플러스가 됩니다.

냉전시대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인식틀이었습니다. 동과 서가 각을 세우고 음모가 반복되어 일어나듯 했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네트워크로 세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국도 자신을 위주로 해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네크워크를 어떻게 ‘완만하게’ 만들어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완만한 네크워크형의 전략·기획력이 너무도 중요해졌습니다. 일본도 한국이나 중국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바람직한 형태로 힘을 합쳐갈 씨나리오가 중요해졌습니다. 저 자가 나의 적인지 아군인지 가르는 이분법이 아니라 그때그때 국면에서 ‘온화하고 부드럽게’ 자신의 전략 안에서 크게 플러스가 되어줄 존재로 상대를 바꿔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친미입아’인데 한국과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이제까지 동맹국으로서 관계를 맺어왔으니까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먼로주의’(Monroe Doctrine)라고 합니다만, 즉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미국에 아시아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관여시킬 역할이 필요하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가 말하는 ‘친미입아’를 구체화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하나가 동아시아공동체다. 또 그것은 하또야마정권의 우애(友愛)외교 사상과도 통한다. 그가 앞의 대화에서 한중일의 협력관계에서 한국의 역할과 한일의 협력을 특히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쓴 글이나 대화 중에서 받은 인상은 그의 ‘일·미·중 트라이앵글’ 구도 안에서는 한반도 역할이 소홀히 다뤄진다는 것이다. 한국 또는 남북한이 일·미·중보다 작다고 해서 소홀히 다루면, 친미입아도 일·미·중 트라이앵글도 잘 유지될 수 없고, 동아시아 평화도 도래할 수 없다고 본다. 일·미·중 트라이앵글론이 한반도가 분단상태로 중국과 미국의 영향 아래 각각 놓여 있는 것을 방치하는, 그래서 일·미·중 삼자의 세력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일본의 번영을 지켜나가려는 사고틀로 보일 위험이 없지 않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좀더 명확한 입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 질문을 계속했다.

 

 

동아시아 평화구상과 한반도의 역할

 

백영서 그렇다면 한·중·일의 네트워크와 북한과의 관계, 한반도 분단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테라시마 타이완과 중국 간 문제, 한국과 북한 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신중해야 하며, 뒤에서 조용히 지지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역할의식의 비대증에 걸려 있습니다. 일본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책임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일이니, 주변국으로서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통합의 발목을 잡는 것도 안되지요. 또한 이상한 역할을 일본이 하려고 들어서도 안될 것이고, 그것이 일본의 바텀라인(bottomline)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든 조용히 한반도가 민족의 자립과 통합을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타이완 문제도 그렇습니다. 타이완 문제에 관한 불간섭, 즉 과거 일본의 영토였던 시대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일본은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미묘한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바텀라인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이완 독립을 일본이 지지할 리도 없지만 그러한 말을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예지(叡智)로 해결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타이완과 중국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단절돼 있지 않으며, 그레이터 차이나(Greater China, 大中華地區)라는 이념 안에서 대단한 연대를 서로 심화해가고 있습니다. 북한과 한국 사이에도 우리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예민한 일을 언급해서는 안되며 신중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북한과 한국의 문제는 미·중문제입니다. 즉 미·중문제의 역학이 바뀌면, 한반도 문제도 바뀔 것이라고 봅니다.

 

백영서 북한과 한국의 문제가 미·중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주민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테라시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미·중문제로 여겨서는 안되죠.

 

백영서 물론이지요. 그것은 민족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생이 말한 어떤 형태나 단계의 동아시아공동체이든 그것으로 가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분단 해결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한반도에서의 국가연합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어요. 이것은 2000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 제2항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즉 사실상의 국가연합을 말하는 겁니다. 이 구상을 남북한이 통일을 향한 ‘중간단계’이자 현재의 위태로운 과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장치로서 실현하자고 강조하는 것이지요. 이같은 국가연합 구상, 즉 느슨하고 개방적인 복합국가 형태를 선택할 때 그것이 동아시아 협력체제 형성에 매우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은 분명합니다. 대만이나 티베트, 신장 문제에서나 오끼나와에 한층 더 충실한 자치권을 갖게 하는 등의 창의적인 방안을 촉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반도의 통일 이전에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인데, 낮은 단계의 연방제나 국가연합이라는 완만한 결합체의 창조에 대해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테라시마 그것은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지혜일지 모르겠네요. 한반도의 문제를 한반도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해가는 방법론으로서 그러한 사고방식이 생겨나는 게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 어느 쪽의 체제가 붕괴하는 것보다는 서로 지혜를 모아서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앙드레 슈미드(A. Schumid)에 따르면 북한은 냉전고아 같은 존재로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폐쇄된 지역이 되고 말아서 세계로 열린 듯하면서 열리지 않는 곳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냉전고아 같은 그들에게 냉전은 종결되었고, 세계가 바뀌어 그 어떤 국가도 이러한 글로벌한 경제 안에서 고립되어 있어서는 피폐해질 것이라는, 그러한 점을 단계적으로 이해시켜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이 익으면 떨어지듯이 저 비틀어진 체제의 국민 안에서 저절로 세계가 보인다면 자연히 새로운 방향감각이 생겨나리라 생각합니다.

 

백영서 선생은 이전에 강상중(姜尙中) 교수와의 대담에서 북한이 경제력으로 보면 일본에서 가장 작은 시마네(島根)현이나 톳또리(鳥取)현에도 훨씬 못 미치지만 “ ‘약자의 공갈’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데, 실은 터무니없고 보잘것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 “동아시아의 목에 걸린 가시”라고도 했어요. 그래서 그 가시를 빼기 위해서는 매우 노련한 전략이나 비전이 요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반도 문제를 미·중의 교섭에만 맡기고 일본은 나중에 돈만 내게 되는 것에 비판적이었습니다.5 그런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의 문제, 특히 북한문제나 통일문제에 관해 지금의 민주당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령 납치문제로 인해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데요.

 

테라시마 코이즈미 전 수상의 방북 이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주체적으로 한반도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한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듯한 역사적인 국면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제임스 켈리가 평양에 가서 핵문제를 끄집어내고 북한을 핵무장하려는 국가라고 규정하면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악의 축’론을 전개하지요. 거기다 일본은 납치문제가 국민감정을 거슬러서, 납치와 핵 사이에 끼어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문제가 왜 미·중문제인지가 이와 연결되는데, 중국도 당장은 한반도가 둘로 분단되어 있는 편이 낫다, 혹은 현상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6자회담을 맡고, 북한을 존속시키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북한이라는 국가가 존속되고 있는 것은 중국이 북한에 식량과 에너지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핀을 빼면 북한은 자연붕괴할 정도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한편 미국도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면서도 중국의 인식을 분명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한반도 통일에는 시간을 투자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핵문제로 추궁하거나 이른바 간디가 말한 ‘분단통치’, 이것은 구미열강의 상투적인 수단인데, 분단시켜놓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쓴다든지 하면서요. 문제는 그 상태를 넘어서는 인식을 당사자들이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마찬가지의 말을 일본에도 할 수 있지요. 제가 한일 양국이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후에 양국 모두 미국을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런 노선을 취했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20년이나 지난 지금, 자신의 머리로 사고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받기 시작했습니다. 후뗀마(普天間) 미군기지 문제도 미국의 억지력이 일본을 안정시키고 보호해주고 있다는 논의가 고정관념처럼 반복되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 3월 5일 NPT발효 40주년 성명에서 언급되었듯이 오바마 정권은 핵의 억제력이라는 논리가 냉전시대의 유물, 즉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는데, 일본은 거기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사고를 보통의 상식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는 세계관에서도 탈피해야 합니다. 미국 군사력의 억제력이 일본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있다는 냉전시대의 인식에서 한발 나아가 아시아의 상호이해와 협조관계 안에서 동아시아의 안정과 안전을 구축해간다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신변을 보호해줄 보디가드가 있으므로 나는 안심이라는 논리를 계속 주장하게 되지요. 본래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 안에 있다는 상황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디가드 없이 인근 사람들과 이해와 협조, 신뢰관계를 쌓으면서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한반도, 중국, 일본도 그러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게임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바텀라인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안정을 지키는 데 구미의 보디가드를 고용해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식의 역학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금부터 아시아인이 갖춰야 할 건전한 공통인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백영서 그렇다면 구체적인 정책과 관련해 질문드리겠습니다. 두가지인데, 하나는 분단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민주당의 새로운 정책은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민주당이 미군기지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입니다. 하또야마 총리가 작년 선거때, 논란이 되고 있는 오끼나와의 후뗀마 기지를 국외로 이전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오끼나와현 밖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지요. 아마도 오바마 정권은 부시 정권과 다를 거란 기대도 있고 해서 나온 공약 같은데, 집권 후 기지이전을 둘러싸고 미국정부는 물론이고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는 등 논란이 가열되자 5월말까지 해결안을 제시하겠다고 스스로 시한을 설정했지만 참으로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지요.6

 

테라시마 민주당이 그 질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중심축이 있는 정책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민주당이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예컨대 북한문제에 대해서 제어가 먹히고 있고, 이 정책에는 이 정책으로 맞선다는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기지이전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도 그 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고, 또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후뗀마 기지가 토꾸노시마(德之島)든 어디든 안착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기다리는 시간 동안 퍼즐 조각을 어딘가에 끼워맞춘다는 식이 아니라 일본내 미군기지의 존재방식이나 미일안보의 존재방식 자체에 대해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할 문제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뗀마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지요. 일본의 미디어나 민중이 이제까지처럼 기지 이전지가 어디론가 결정되어 논쟁이 매듭지어지는 것을 보고 잘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정책론의 차원에서 제대로 확립하겠다고 각오하지 않는 한 이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5월말까지 미국도 찬성하고 오끼나와 주민들도 납득이 가는 씨나리오를 고안하겠다니 어림도 없습니다.

지금 후뗀마 문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요. 2004년 8월에 오끼나와의 코꾸사이대학(國際大學) 교내에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안에 기지가 있는 것은 위험하니 옮겨야 한다는 것으로 기지이전 논의가 부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사고를 일으킨 미국이 기지가 어디로 이전하든 그 안전성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느새 미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졌고, 일본이 이전지를 찾아준다면 옮겨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상하게 전개된 겁니다. 문제의 핵심이 엇나가고 말았던 거지요.

역사가 지금 민주당정권에 요구하는 것은 후뗀마 기지가 토꾸노시마든 어디든 이전하면 그만이라는 답변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미군기지의 존재방식 그 자체를 묻는 것입니다. 일본과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1993년에 독일내 미군기지를 하나하나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각각의 기지사용 목적을 짚으면서 주권을 회복해갔습니다. 일본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의 일본은 자민당 단독정권인 미야자와(宮澤) 내각이 붕괴하고 나서 합종연횡의 단명 정권만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잃었던 거지요. 독일의 방식을 취하지 않은 채 21세기를 맞이해버린 거지요. 그러다 9·11테러가 발발했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미군재편론에 가로막히고 말았던 거지요. 일본과 한국의 미군기지는 이미 극동의 안전을 위해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목적으로 한 기지로서 미국의 전략 속에 구성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기 위한 기지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사례가 증명하듯이 그것은 아시아, 한중일의 역학에 있어서는 의미가 없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반미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와 반대이기 때문에 미국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의식이 아주 중요합니다.

 

백영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또야마 정권의 불안정성이 점차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인지요?

 

테라시마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불안정성도 높아질 것이며 정권이 유지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역사의식이란 하나의 정권이 붕괴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본질적으로 바꿔가야 하는가를 아는 겁니다. 실은 기지이전 과정을 통해서 일본인도 조금씩 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디에 가더라도 반대에 부딪쳐 후뗀마에서 움직이지 않게 될 때, 일본인 스스로 자기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이 이상하다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후뗀마 기지의 해병대는 60기의 헬리콥터를 운행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지금 조종사가 없는 상태입니다. 모두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버렸지요. 그런 기지를 일본의 안전을 위해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문이 들지 않을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즉 역사는 속일 수 없으며, 그 흐름은 점차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또야마정권이 5월까지 정체에 빠지고 곤경에 처할 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현대의 ‘조약개정’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중일이 커뮤니케이션을 심화시키면서 평화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북한문제도 포함해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각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중국이 방패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발상에서 탈피하여, 제대로 된 자립적 사고를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도 큰형님에 기대는 구조에서 탈피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간다는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없다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지로 동아시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그러한 게임으로 바꿔가는 역사관을 구축해야 합니다.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知의 가능성

 

백영서 지금 선생의 말씀과 저의 생각에 대해서 말하자면 구체적인 정책보다 ‘사상의 힘’이나 ‘세계를 아는 힘’이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하또야마 총리와 친하다든가 영향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테라시마 친구입니다.(웃음)

 

백영서 하또야마 총리와의 관계에 관해서 듣고 싶은 것과, 또 한가지는 선생에게는 정책이나 비즈니스 전문가뿐 아니라 사상가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선생은 현재 타마대학의 학장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신데, 선생의 저서를 읽고 특히 ‘세계를 아는 힘이 곧 전체 지(知)’라는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근대서양에서 온 지(知)의 체계·학문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와 관련해, 그 입장은 한국 지식인들의 논의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테라시마 선생이 쓰신 ‘근대초극론’에 관한 글7을 잘 읽었습니다. 타케우찌 요시미(竹內好)에 대한 언급을 비롯해 선생의 관점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문제의식으로서 근대초극론에 저도 큰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격세유전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요컨대 ‘전체 지’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백영서 제가 강조한 것은 아카데미 제도만이 아니라 제도 바깥의 문제이지요.

 

테라시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는 정책학을 연구하고 기업에서 경영전략론을 전개해온 사람입니다만 그 근저, 즉 자신의 방법론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과 철학 안에는 서양근대의 사회과학이 있습니다. 그렇게 정치학이나 사회학 등에서 단련한 지(知)와, 예컨대 내가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쿠우까이(空海, 9세기 일본 헤이안시대의 고승)나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 현대의 불교연구자)의 지 사이에서, 즉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 긴장감을 갖고 그 전체감(全體感) 속에서 아시아를 이해하고 인식을 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사회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일본인으로서, 아시아인으로서, 동서고금의 문화가 흘러든 섬으로서 그 전체감 안에서 이 나라의 진로를 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 자신의 흥미로부터 나온 키워드가 ‘전체 지’였지요. 세계에 대해서 시야를 넓히면 넓힐수록 전후 65년이라는 기간이 일본에 대단히 특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천년에 걸친 일본과 유라시아대륙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기간에 일본은 지극히 특수한 영향력을 받았고, 특수한 사고방식이 생겨났습니다. 일본의 근대라는 기간도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기간의 특수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넘어서는 일, 그런 점에 우리는 분기(奮起)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대초극론은 전쟁의 미학,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던 면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아시아의 연대 사상·철학으로서 근대초극론이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영서 저는 기본적으로 선생의 ‘전체 지’라는 발상을 지지합니다. 또한 지의 체계를 어떻게 제도 내에서 실현할지 대학교수로서도 흥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것인데, 선생은 다양한 일을 해오시면서 그 안에서 갈등이나 충돌 같은 것은 없었는지요?

 

테라시마 그보다 오히려 씨너지효과가 있었지요.(웃음) 교육이라는 장르와 산업이라는 장르, 제가 해온 것끼리 서로 스파크를 일으켰다고나 할까요. 저는 아직 미쯔이물산의 전략연구소를 이끌고 있고, 공공정책기구의 싱크탱크에도 관여하고 있어요. 그 삼각형 안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씨너지효과를 얻고 있지요. 일본에서는 드물다고 하지만, 미국 등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아요. 학자들 중에서도 산업계와 아카데미즘, 그리고 정책론의 트라이앵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영서 마지막으로, 일본의 전후를 생각할 때, 가령 하또야마 총리가 약속한 기한인 5월 안으로 후뗀마 기지 이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임하면 민주당의 전망이 바뀐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까요?

 

테라시마 민주당에는 원래 합종연횡과 같이 과거 사회당의 사회주의자그룹에서 온 사람도 있고, 오자와 이찌로오(小澤一郞)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민당의 우파 같은 사람도 있어요. 선거 목적으로 만들어진 뒤죽박죽 집단입니다. 그 안에서 하또야마는 조부의 시대부터 DNA를 이어받아 일단 리버럴 보수라는 위치에 있지요. 그 자신이 강한 정치적 철학을 지닌 리더십의 보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백영서 하또야마의 ‘약한 리더십’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요.

 

테라시마 그렇죠.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우 같다는 말을 합니다만, 민주당의 역학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칸 나오또(菅直人)처럼 시민운동에서 출발한 인물이 중심이 될지, 그렇지 않으면 마쯔시따세이께이주꾸(松下政經塾)8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중심이 될지, 앞으로 여러가지 굴곡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정치 전체를 볼 때, 하또야마 개인은 별개로 하고, 리버럴 보수사상을 축으로 삼은 정책론을 지닌 정당이 향후 정계개편을 포함해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의 입장이 리버럴 보수니까요. 리버럴 보수란 외교적으로는 인접국과의 외교를 중시하고 미국과의 협조를 기축으로 하면서 ‘친미입아’를 도모하는 입장이지요. 우파 내셔널리스트도 아니면서 과거 사회주의자그룹도 아닌 지점에서 외교를 굳건히 하고, 국내적으로는 일종의 새로운 경제주의를 주장하고 일본의 산업창생(産業蒼生)에 역점을 둔 정책론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러한 방향을 중심으로 삼은 정치그룹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일본은 안정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또야마정권은 그러한 커다란 서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백영서 그렇군요. 한국을 돌아볼 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대는 일본 민주당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그와 사뭇 다르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말하자면 시차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마지막으로 『창작과비평』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테라시마 대화를 시작할 때 역사인식 문제로 토론이 대단히 뜨거웠던 것처럼 우리들은 마음의 응어리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대극점에 서서 역사를 개척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가슴속에 용기와 각오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즉 냉전의 틀 안에서 버둥대던 시기로부터 주체적으로 아시아에 우호와 연대의 틀을 만들어갈 각오와 용기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 틀 안에서 힘을 합치는 데는 상당한 배짱이 필요합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죠. 한국사람이 일본의 문제점을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고, 역사의식 안에서 그러한 것을 이미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특히 젊은세대는 저보다 윗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동방신기’를 쫓아다니는 분위기가 있고, 거꾸로 일본문화에 대해서 공감하는 한국의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일본인이 과거 한국에 대해 가졌던 허위의식이랄까 차별의식 같은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없어요. 저보다 윗세대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오히려 문제지, 젊은세대는 한국에 애정과 존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 가능성을 느끼지요.

 

백영서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거의 책임이 아니라 미래의 책임 말이지요.

 

테라시마 예, 바로 그것입니다.

 

백영서 그럼, 이것으로 대화를 마치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 감사드립니다.

 

대화를 마쳤지만 미진한 느낌은 남아 있었다. 분(分) 단위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는 그의 비서의 말처럼 워낙 일정이 많은 그와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현안인 주일미군 문제를 비롯한 주요 과제에 대해 그의 생각의 일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유익했다.

독립국인 일본에 외국군대가 65년간이나 장기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매년 그 주둔경비의 7할에 달하는 약 6천억엔을 일본이 부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낸다. 더욱이 지금은 1997년 하시모또정권 때 이뤄진 미일가이드라인 개정으로 미일동맹의 본래의 목적이 변질되어버린 상태 아닌가. 미일안보의 대상을 극동으로 정한 ‘극동조항’이 바뀌어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으면 적용범위를 세계 속으로 넓힐 수 있도록 확대 해석됨으로써 일본은 미국의 전세계 전쟁에 한층 더 깊게 가담하게 된 상태다.

대화 도중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테라시마가 구상하는 미군기지 문제의 해법은, 첫째 미군기지의 관리권을 미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바꾸고, 둘째 미일안보조약 자체도 재검토하여 동아시아에 군사적 공백을 만들지 않는 것을 전제로 주일미군기지 하나하나의 사용목적을 검토하고,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규모를 반으로 삭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식의 현실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 오바마정권조차 ‘핵 없는 세계’를 말하기 시작한 이때야말로 일본이 단지 ‘핵우산’에 몸을 맡기는 자세를 벗어나 ‘핵 없는 세계’에 이르는 길을 구상해야 할 국면이라고 그는 판단한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은 동맹국 일본을 기축으로 삼던 시대에서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상대적 게임으로 그 본질이 변했다. 이런 정세에 대응하여 미국의 ‘힘에 의한 정의’나 미국적 가치의 ‘더블 스탠다드’를 비판하는 한편, 일본도 미국적 가치를 추종만 할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확립하고 비핵 평화주의란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비핵국의 선두에서 핵폐기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을 제안한다.

이같은 주장은 미군기지와 북핵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전략이 새로운 내치(內治)전략 없이는 실현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내정문제와 관련해 대화가 깊이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는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때마침 민주당정부도 ‘시멘트에서 인간으로’란 슬로건을 내세우고 개혁중에 있어, 그가 말하는 ‘그린 뉴딜’ 구상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이제까지 익숙해져온 대규모 집중형 문명체계에서 분산형 네트워크 사회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그 가능성이 크다고 낙관한다. 그 근거로 일본의 ‘물건 만들기’ 집착과 기술에의 경애(敬愛), 즉 일본의 기술과 산업력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와 관련해 일본의 소국주의 유산을 다시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여기서 한국의 발전전략으로서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긴장 속에서 ‘중위국가’를 제안한 창비의 구상도 참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무엇보다 그에게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 특히 분단체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서는 그의 구상이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강조해두고 싶다.

대화가 이뤄진 장소인, 그의 활동의 집결점 테라시마문고(寺島文庫)가 바로 야스꾸니(靖國)신사의 근처인 것이 내게는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의 사유와 실천의 창조적 거점인 그곳에서 일본근대사의 모순을 돌파하고 동아시아 연대의 활력이 솟아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 이 대화는 2010년 4월 20일 토오꾜오에서 일본어로 진행되었으며, 연세대 국문과 박사과정 전설영씨가 녹취된 내용을 일본어로 옮겼고, 동국대 박광현 교수가 한글 번역을 담당했다. 문장의 최종 책임은 백영서를 비롯한 창비 편집진에 있다.

 

 

  1. ‘친아(親亞)’와 ‘침아(侵亞)’는 일본어로 똑같이 ‘신아(しんあ)’로 발음한다-옮긴이.
  2. 러일전쟁 후 전쟁배상금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1905년 9월 5일 토오꾜오 히비야공원의 집회를 계기로 폭동으로 번진 사건-옮긴이.
  3. 대담이 끝난 뒤인 5월 10일 한일 지식인 214명은 한일병합조약이 ‘불의부당’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병합조약에 대한 일본정부의 진전된 입장 표명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전문이 본지의 이번호 ‘논단과 현장’에 수록되어 있다-편집자.
  4.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이 2009년 12월과 2010년 1월 쿄오또 조선 제1초급학교에 들이닥쳐 폭언을 하며 교사와 학생들을 위협한 사건-옮긴이.
  5. 『시대와의 대화: 테라시마 지쯔로오 대담집(時代との對話:寺島實郞對談集)』, ぎょうせい 2010, 60~61면.
  6. 이 대화를 마친 후인 5월 4일 하또야마 총리는 오끼나와를 방문해 후뗀마 기지의 오끼나와현 밖으로의 이전 공약을 사실상 철회하고 사과했다-편집자.
  7.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일본어판. 웹페이지 주소는 http://jp.changbi.com
  8. 일본의 차세대 리더를 양성, 제2의 메이지유신을 일으키겠다는 목적으로 1979년 마쯔시따전기의 창업자가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교육기관-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