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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특별기고

 

만물 혹은 만인

『만인보』를 마치면서

 

 

고은 高銀

시인. 대표작으로 연작시 『만인보』(전30권), 서사시 『백두산』(전7권), 시선집 『어느 바람』, 시집 『허공』 『남과 북』 『내일의 노래』 등이 있다.

 

 

이 미련의 삶에 웬만큼 머물고 있다. 만인보 25년의 천후(天候)에 감사한다. 두고 보자면 만인보(萬人譜)의 다른 이름은 만물보(萬物譜)일 것이다.

이렇게 느껴오는 바와 달리 한밤중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철모르는 행로를 돌이켜보자마자 차마 뜬 눈 감기도 감은 눈 뜨기도 무엇하다. 먼 길 날아가는 철새가 기류지에서 보내는 한동안의 날개 접힌 휴식이 곧 이어질 밤낮 가릴 수 없는 대양 상공 어디에도 없는 휴식을 다 내다보고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그동안의 종적을 그냥 곁눈질하고 말 노릇도 아니기는 아니다. 지나온 길 꼭 시베리아 오세아니아 사이 철샛길 같다.

어린시절 술꾼 할아버지가, 간하고 쓸개하고 아프니 서문 밖 의원한테 가서 그리 말하고 약 지어오너라 하던 그 택도 없는 자진(自診)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나 역시 그동안 목에 묶여 있던 사슬도 모르고 달밤을 짖어대다가 정작 그 사슬이 풀려서야 지난 25년의 세월네월을 뒤늦게 깨달음으로써, 내 심장이 내 대뇌 언저리보다 먼저 나서서 만취의 밤잠을 쫓아내어 두근반세근반 불면으로 먼동이 트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이 자주 머리에 앞서 내 손으로 보내는 신명의 전갈이 헐하디헐한 내 시의 날들을 쌓아올렸다 싶다. 울안의 개에게는 사슬이고 울 밖의 말에게는 길마였던가.

 

아버지는 할아버지 그대로 농부였다. 그것은 할머니 그대로 어머니가 농부의 아낙이었던 것하고 다를 까닭이 없다. 이십대 이전까지의 나도 농촌의 아이로 모 심고 김을 맸다. 새를 보고 소와 종송아지 풀을 뜯겼다. 농부에게는 다섯 바람 열의 비〔五風十雨〕가 간절히 빌어마지않는 하늘의 은혜였다. 닷새마다 바람 불어주고 열흘마다 비가 와주는 것은 해마다 그 은혜에 목마른 농부의 삶을 곧 하늘과 땅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천·지·인 삼재(三才)라 함은 이런 데서 저절로 생겨난 뜻일 터이다. 회의문자(會意文字)인 농(農) 자는 머리〔〕와 두 손〔臼〕과 별의 운행〔辰〕의 천지변화가 어우러지는 일을 나타내고 있다. 농부는 자신이 부쳐먹는 곳에서 재너머 다른 마을도 사돈마을인 양 거의 발걸음의 내외를 하는 일생으로 살기 십상이다. 하늘과 내통하건만 정작 지상에서는 이렇듯이 한곳의 뿌리이다. 농(農)은 정(定)이다.

그러므로 농업은 농사의 고착을 벗어나지 않으니 노자의 세상살이 그 무위대로 출입 없는 부자유를 자재(自在)로 삼는다. 별건곤이란 제 마을 밖이 아니리라.

아버지는 이른아침 새소리로 하루의 날씨를 짐작한다. 저녁나절 영락없이 아닌 비가 내렸다. 할머니의 허리가 덜 아프면 이튿날 푸른 하늘이 틀림없이 컸다. 우레 천둥에 앞서 쥐와 새들이 미리 숨는 이치나 사람의 이치나 하나도 어긋날 바 아니므로 자연부락이란 숫제 자연의 부락이기도 하다. 이런 두메에서 씨 뿌리면 일월성신과 비와 이슬 그리고 저녁 산내림 바람이 내려와 뿌리 씨앗을 싹틔워 어느새 출무성히 길러내는 곡식이 내남적없이 늠름했다. 그러므로 농사란 하늘의 농사라는 뜻으로 농자(農者)에 앞서 농(農)이 천하의 으뜸일 터.

오랜 산파(散播)농사와 달리 조선후기 이래의 이앙농사이므로 오늘날 기계영농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자연에 더 기우는 노릇이 삶의 전부였다. 근대는 아직 근대 이전이었다. 아마도 이런 조상 대대의 농업이 내 서사의 근원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만인보의 세월에도 무리없이 적용될 것이다. 시인생활 50여년을 부끄러움 무릅쓰고 고개 주억거려보건대 어디서 건너온 산업혁명의 공장작업 따위는 영 동떨어진 재래농경의 삶이었다면 거기 형식으로서의 근대시와 생태로서의 전근대가 서로 부대끼며 중신에미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눈도 코도 모르고 가시버시가 되고 마는 옛날 혼례하고 어슷비슷했다.

나는 고향의 논밭을 떠났으나 내 마음속의 논밭에서 변변치 못한 소출로 사는 이농(離農)으로서의 귀농(歸農)이라는 모순에 익숙하다. 온세상의 사대(四大) 지수화풍을 일상으로 사는 농업이야말로 내 삶의 원리였다. 저 1960년대 무작정 상경한 농투성이가 서울 변두리 다락집에서 밤낮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도시빈민의 생존에 급급하는 중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고향의 논밭 걱정이고 비가 너무 와도 고향의 가을걷이 걱정으로 상심하는 수작에 나도 끼어들지 않는 바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밤 무교동의 냉방 술집에서 흑맥주 2000CC짜리 술잔을 앞에 두고 문득 뜸북새 우는 무논이 취중에 떠오르는 것은 또 무엇이던가.

어린시절 방과후 집에 오자마자 책보를 풀어놓기가 무섭게 김매는 날 애벌두벌 김을 매는 데 힘을 보태고 쇠죽을 끓여야 하는 이른아침 애농부의 하루하루가 어느새 스무살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저 만주벌판에서 말 탄 독립군이 말의 배때기에도 붙었다가 꼬랑지에도 붙었다가 하며 일본군을 혼내주고 있다는 아득한 소문에 땀을 쥐는 머슴방과는 달리 식민지의 삶은 그 살아지는 나날에 부합하는 천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농업은 오늘에도 기억이 아니라 본성으로 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농업이 열매 따기와 달리 자연 이용이라는 문명임에 틀림없으나 자연의 일부를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므로 결국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행위 안에 속해 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내 시 쓰기도 이런 농업을 넘어서는 일이 아니다. 붓다가 자신을 ‘마음의 밭을 가는 자’라고 하거나, 어느 음악작품 「시인과 농부」가 말해주는 시농일치(詩農一致)는 작위적이지 않다. 적어도 시는 상품이나 공장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워낙 반시장적이다.

해방의 소년이었다. 분단의 청년이었다. 이런 시적 배경을 지나면서 다른 어떤 길도 갈 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한 무자각적인 시의 농부로 살 수밖에 없다. 굳이 시의 불가피성을 이런 농경생활 언저리의 그것만으로 애써 강조할 까닭은 없으나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늘 아래 땅 위의 삶을 노래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그것마저 숨길 까닭은 없다.

그래서 나는 소리친다. 인간은 땅이다! 이 온전치 못한 선언은 뒷날 어느 책장을 넘기다가 라틴어 homos(인간)가 humus(땅)와 어원이 같다는 것에서 인간이란 땅의 소행(所行)이고 땅의 능행(能行)인 바를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인보의 또다른 의미도 인간 또는 인간사의 대지이기를 바란다. 이는 주역의 어느 모퉁이에서 괘(卦)는 상황이고 효(爻)는 그 상황 속의 한 상황이라 할 때의 그것이기도 할 터이다. 더 나아가 땅이라는 유일성을 넘어 무궁한 우주 은하의 성운과 대기권의 풍운 그리고 지구 생명의 연원인 바다 속의 삼차원과 손잡은 우주학적 자연사학적 본능에도 부합할 터이다. 한 티끌이 시방(十方)을 다 품는다 함은 관념이 아니라 우선 농부의 오랜 심성이다. 씨를 뿌리는 동안 농부는 벌써 지리(地理)의 머리인 천문(天文)에도 절로 닿는 것이 아니겠는가.

1980년 여름 내가 육군교도소 특별사동 감방의 그 사고무친의 정치적 유폐를 견디는 동안, 일종의 ‘아이의 애도(哀悼)’와 같은 한계체험의 상태에서 생후 8개월의 아이가 다시 엄마 젖을 꽉 물듯이 가망 없는 구상을 하게 된 만인보의 소재들은 이농한 농부가 꿈속에서 봄 파종을 하는 농업의 환각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의식이기보다 무의식이고 의도나 계획이기보다 본능이었고 자생의 발화(發話)였다.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는 바가 그 암흑 속에서 내 인내의 시간이었다.

감방은 철창이 없는 한평 남짓한 밀실이었다. 백열구 40촉의 불빛이 꺼지면 그대로 사진현상의 암실인 셈이었다. 복도에서 굽어든 곳이어서 삼교대의 헌병 감시로 1일 3식의 급식 이외에는 어떤 소통도 없었다. 유신체제 종말과 신군부 출현 사이에 걸쳐 있는 대통령 암살자 김재규(金載圭)가 서대문구치소 사형대로 호송되기까지 줄곧 갇혀 있던 방이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그는 이 감방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며 사형집행에 앞서 마음을 다잡았고 새벽 네시 커피 한잔을 마신 몸으로 실려가 이 세상을 마쳤다. 그가 떠난 빈방에 내가 들어앉은 것이다.

몇번의 군법회의 검찰심문이나 재판을 위해 상피고인(相被告人) 문익환(文益煥)과 한 호송차에 실려가면서도 대화가 금지되었다. 이런 사정이므로 감방의 시간은 훨씬 더 주관적이었다. 길고 길었다. 만인보는 그 긴 시간 속에서 태어난 뜻밖의 훨훨 나는 나비떼였다. 그 나비들은 내 기억의 용량을 확대시켰으며 기억의 이면인 상상의 고도도 섶에 불 닿듯이 겁없이 높여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강박된 군대 분위기로는 생존 자체에 대한 위기감이 광주사태의 외부와 맞닿아서 몇개월 동안 누그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다면’ 이라든가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는 무척이나 강렬했다. 요컨대 만인보가 태내에서 갖추고 나온 생명력이 그곳에 있었다.

이와 함께 두어 가지의 구상도 잇따랐다. 행여나 이런 구상이 계획의 개념에 머문다면 그것은 시의 선천적 생성작용에 어긋날뿐더러 문학을 하나의 생존행위로 곡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냐 죽음이냐라는 경계에서 본다면 삶의 유한성은 어차피 선택의 여지 없는 자연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위(爲)와 무위(無爲)의 구별이 여기에서는 구차하다.

비인간적인 현실을 인간적인 현실로 만드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런 구상이나 계획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장소가 비인간적인 장소로 뒤바뀔 가능성에 대한 자위이기도 하다.

만인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명명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범속한 가제였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수많은 사람 하나하나에 시의 운명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죄명은 내란음모죄, 계엄법 위반, 계엄교사라는 셋이었다. 계엄교사라는 갈빗대 하나가 더해진 것은 그 당시 서울대 복학생이던 이해찬(李海瓚)에게 내가 영향을 주어 그를 끌어들인 탓이라 했다. 육군교도소에는 정치인 김대중(金大中)과 종교인 문익환, 학자 이문영(李文永) 등 다섯 사람이 각자의 방에 들어 있었다.

대법원 상고심과 감형 직후 대구교도소로 갔다. 그곳에선 나 하나를 특별격리하기 위해 제6동 12방의 사방을 다 비워두었다. 거기서 나는 국어사전 낱말 외우기를 시작했다. 영어와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하려다가 국어공부로 돌아섰던 것이다. 암기에 필요한 낱말 표시를 위해 12일간 단식을 한 뒤에야 담당교도관의 입석하에 인주로 단어를 표시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 공부는 흥겨웠다. 지난날 국어소사전을 한번 읽은 뒤 그 사전을 불태운 재를 몽땅 삼켰던 유치한 일도 떠올랐다.

하지만 국내외 구출운동에 힘입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감방에서 익힌 내 낱말은 마치 홍수에 가재도구가 떠내려간 것처럼 다 빠져나갔다. 그래서 사전의 표시낱말을 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만인보의 토대가 되었다.

1983년 나는 늦은 결혼으로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안성 생활을 시작했다. 2년 뒤엔가 나는 만인보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내 이상화(李相華)를 뒤돌아다보며 내 작업은 축제가 되고 있었다. 결혼은 무덤이 아니라 지진이었다. 저 지하 마그마가 솟아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 삶이 되었다. 그러므로 만인보 1, 2, 3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속 폭발이었다.

 

만인이 반드시 백의 백배, 천의 열배일 것은 없다. 만국이 일만개의 국가가 아닌 것처럼, 아라비안나이트 천일 밤의 천이 반드시 백의 열배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오직 수많은 삶의 초상에 대한 함의이기를 바란다. 80년대 민중의식이나 당파성의 숨찬 문화환경에서 내 의도는 거의 의도적인 열외에서 당대의 만인보가 아니라 그 언젠가의 만인보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 언젠가의 것도 다른 언젠가는 하나의 편견이 되고 마는 인간상의 자기한계를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했을지 모른다. 한계는 다른 한계를 불러들인다. 사람의 뒷모습 하나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지 않던가. 그래서 한 사람의 초상은 가능한 한 그 시대의 전형성 밖으로 튕겨져나가는 통시(通時)의 본능을 담고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만인보의 몇가지 사항을 손꼽아본다.

첫째,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 사람 하나를 형상화하는 일은 그 사람의 생애 전부를 담지 못할 경우 한편의 축도나 한편의 단면 묘사 이상의 지속적인 서술행위를 더해야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사람 하나라는 대상에 대한 시각도 한결같은 서술의 문법에 입각할 수 없다.

여기에다 사람 하나로 끝나는 작업이 아닌 무한연쇄으로서의 작업이 만인보의 요건이라면 30권의 완간은 만인보의 끝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30권은 세상과의 소박한 약속일뿐더러 그 뒤로 있게 될 만인보의 미래는 그리고 싶은 그림들과 노래하고 싶은 노래들이 나의 자동서술을 막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이후에도 널려 있을 현재와 지난 시대의 무궁무진한 소재들은 내 욕망의 부침과는 상관없는 기대를 날로 달구어내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써온 것은 제1단계일 뿐인지 모른다. 그만큼 만인보의 세계는 더 유보적이다.

둘째, 만인보는 대의를 내걸지 않았다. 이것의 기점인 1980년대에도 거대담론의 명제와 시대정신이라 할 명분도 한 시기와 한 상황 안에 서 있는 한 인간의 행위에 하나의 세부가 반영될 뿐 거기에다 인간의 당위성을 일부러 내걸지 않는다.

나는 시 속의 화자나 시 밖의 작자로서 몇개의 연대기를 경험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해방과 분단의 시대, 전쟁과 긴 휴전의 시대 그리고 건국 이래 거듭되는 독재시대와 독재 거부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한 생애 이상의 삶을 통해서 실로 많은 인간상의 분절(分節)을 만나고 있다. 따라서 사람 하나의 형상이란 내가 살아온 시대의 복안(複眼)에 인상된 시대의 얼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눈은 난시상태도 무릅써야 하므로 한갓진 외눈박이의 눈일 수 없다. 사람 하나하나를 한편의 벽화로 채우기보다 그것의 또다른 생태마저 지나칠 수 없는 여러 차원의 삶으로 그려내고자 한 것도 내 부푼 꿈이었다. 그러므로 작자는 나 하나만이 아니라 또다른 나라는 이중 삼중의 원작자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적 자아의 크기는 나와 타자의 친화적 합작으로 가능하다. 아니, 나란 타자에 의해 구원받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셋째, 나는 만인보 쓰기가 오랫동안 정착된 캐논이나 고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또다른 서사형식의 한 영역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고은의 만인보로 그치지 않고 국내외의 서사세계에서 보편적인 한 문학장르로서의 만인보가 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인간군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인간을 인종, 민족 안에 갇혀 있지 않게 할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나라 밖의 동료들에게도 만인보라는 장르를 권유함으로써 하나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펼쳐지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서사와 서정의 경계, 묘사와 서술의 그것, 시와 시 아닌 것의 그것을 허무는 모험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상의 몇가지 의의가 저절로 발생한 지난 25년간, 사람 하나하나를 일회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우유부단에 빠져 있기도 했다. 아마도 이 일에만 몰입했다면 1990년대 이전에 싱거운 듯 마쳤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끌어오는 동안 몇번인가 내팽개쳐둔 일이 도리어 이것에 대해 여러 층의 시각을 얻게 한 행운이 되었다.

지난날은 다른 일들로 거의 산꼭대기의 휴식 따위를 사절했다. 신명이나 흥은 임시적인 것이기보다 상습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글쓰기에 사로잡혀 있다가 풀밭 어디에 둔 만인보를 다시 찾아내서 손대는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70년대, 80년대의 사람들에게서 그 이후의 시점에서는 굳이 대상화할 의미가 사라지는 안타까움도 적지 않았다. 아니, 어떤 초상은 반드시 속편 없이는 안되는 경우에 해당되기도 한다.

만인보는 필연의 전시장이 아니다. 또한 의미의 호적부도 족보도 아니겠다. 만인보의 보(譜)는 이문구(李文求)의 어투로 본다면 씨족의 계보쯤에 어울릴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가곡이나 교향곡의 악보로 파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뜻하는 만인보는 우선 실내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야외의 무작위적인 지점의 서사이고 옛 국도와 지방도로를 오가는 삶의 행렬일 것이다. 시가 시학 및 시론 속에서 죽는 대신 산야와 강과 바다 저쪽 그리고 구름 속에서 정의되는 생명놀이인 것과 흡사하다면, 만인보라는 언어행위는 응당 어떤 규범도 염두에 두지 않는 땅 위의 글쓰기이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서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소에서 어떤 사람한테 내 지각을 들이대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불러대는 호명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모든 개별의 삶은 전체가 지시하는 삶이 아닌 삶의 고유성을 확보하게 된다. 만인보는 이렇듯 누구와 누구 사이의 상응행위이기도 하다. 꽃이 피어야 봄이다. 자(自)는 지(至)이다.

특히 만인보 중기라 할 2000년대 초에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눈이 있어야 했다. 마침 아날학파의 비정치적인 인식틀 말고도 내 눈은 두개의 대칭시각인 망원경과 현미경의 용도를 오가다가 그것마저 팽개칠 때도 있었다. 의식은 무의식의 주변에서 나날이 초라했다.

내 눈은 모태에서 나온 한참 뒤에야 뜬눈으로 자유로웠다. 그 육안이 때때로 하나의 휴면과 같은 심안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사람과 사람의 세상을 원근법 없이 바라보게 했다. 원근법이란 근대의 굴레인지 모른다. 그래서 독수리의 눈이 하는 조감(鳥瞰)의 역할에서 가능해지는 대국이나, 벌레의 눈으로 보는 충감(蟲瞰)으로 가능한 소국이 필요할 때에도 굳이 내 육안의 선행을 가로막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눈 이외에 설정되는 제3의 혜안이라는 것도 내 맹목적인 육안을 업신여길 수 없어야 했다. 사물의 문신은 사물을 떠난 비물질적인 힘으로 읽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삶의 실질이 아닐 것이다. 삶을 마을과 고을 그리고 한 나라라는 사회조직으로 파악하기보다 이에 앞선 자연부락으로서의 실재를 통해서 그 근원을 엿볼 수 있는 바가 어쩌면 만인보를 역사성보다 선사성으로 만들기도 하겠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적 존재의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사회 이후의 인간 삶이란 어차피 하나의 인류학적 문답의 연속이기도 하다.

새의 눈은 너무 높아서 인간을 상황이나 세계의 분자로 보기 십상이고 그것은 길가의 개미행렬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눈과 다를 바 없으리라. 인류사 150만년의 일부인 5000년 속의 인간군상을 하나하나의 삶으로 보는 독자적인 힘은 벌레의 눈일 것이다. 농업으로서의 인간서사란 이러한 자연의 육안과 인간의 육안이 동행함에 의해서 도리어 자연적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 수저를 하늘로 삼는 것, 집과 경작지를 조상의 성스러운 거처로 믿는 것들에 에워싸인 인간생명의 이야기가 거기에서 빚어진다.

만인보는 이런 자연철학적인 본성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일삼는다. 하지만 이해의 숙명은 하나의 실존을 관계의 산물로 만든다. 아니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온갖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역사행위의 궁극에 맞닿는 삶의 진행을 뜻하고 있을 것이다.

만인보에서의 표현의 단절들은 어떤 표현의 욕망으로도 한 인간의 전체상을 감당할 수 없음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한 인간의 생사 전부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다음날의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셰헤라자데의 지속과도 한통속인 지속이 요구된다. 한 인간의 제한된 시기나 특정한 행태를 그릴 때 다른 시기에 대한 해당사항도 배려되어 마땅하다. 그렇다면 한 인간에 대한 형상화는 한번으로 마칠 수 없다. 이런 사정에 따라 만인보 30권 이후의 유보된 공간 안에 채워져야 할 대상의 양은 무한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몇가지 작업 뒤의 어느날 내 손은 만인보 31권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말리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내 시쓰기는 거의 주술행위였다. 이것은 또다른 원시 범신론의 감응행위일지도 모른다. 만인보는 하나의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일지라도 끝내 여럿으로 펼쳐져가는 하나라는 의미에서 범신론적이다. 하나로부터 일체로 흩뿌려지는 천부의 권리야말로 만인보의 만인성이며 범신성이고 연역성이다.

 

1930년대 후기로부터 기억 속에 쌓이기 시작한 어린시절의 고향 혈친이나 이웃 삼이웃의 세상에서 시작한 만인보가 1950년대 전쟁시기의 격동이나 그 이후 4월혁명 전후, 그리고 1980년대 이래의 광주민중항쟁 등 여러 변동의 세월에 담긴 인간상의 자취를 거치는 동안 그들 각자의 중단된 삶의 상상적 연장이나 재생을 통해 삶이란 하루만의 단일성 이상의 복합서술이 요구됨을 깨닫게 마련이었다. 또한 역사 속의 군상들은 그것의 현재화를 통해서 현재의 삶으로 재생되어야 할 터였다. 요컨대 진혼이 아니라 진혼 이후이다.

만인보는 작자가 만난 대상으로부터 그려지는 것 말고 만나지 않는 대상의 세파에도 드나듦으로써 경계 없는 인간탐험이라는 모험을 무릅써야 했다. 몇천년 전의 고대 이전으로부터 미래가 잉태된 어제오늘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의 영역을 오가는 일이 만인보의 일이었다. 그것은 옛은 가고 이제는 온다〔古往今來〕란 그 시간의 옛과 이제에 걸쳐 오고 가는 삶들의 운행을 뜻하기에 더 알맞다.

나는 그동안 인간에의 오해를 이해로 잘못 알았을지 모른다. 또한 내가 안 인간에의 정의들이 독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 삶의 앞뒤에서도 각각의 모습이고 그것이 아무리 옷이 벗겨진 알몸일지라도 다 드러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다른 삶들과의 관련 속에서 반응하는 화학적인 행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 삶은 삶의 환경에 불과하다는 섣부른 결정론도 자주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인간은 그 사회의 원소로서만 있지 않고 그것이 다른 원소와 상황에 의한 사회화라는 또 하나의 생명작용을 이어갈 때 만인보의 작자는 이따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헤매기 십상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만인보의 결핍이란 한 인간의 전신상(全身像)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특정한 삶의 때와 다른 때를 진술할 때 다른 시기와 다른 삶의 변모에는 극명한 낙차가 있게 마련이다. 이 경우 최소한 세번 이상의 형상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초상화는 단 한번의 말뚝박기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자음과 모음이 그 자체로만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다 나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만인보의 언어들이 고향의 농경언어와 고향 이후의 근대어라는 문체의 괴리를 아울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1950년대 전쟁시기를 지나면서 이전의 언어들이 그 전근대성을 차츰 떨쳐버리는 경음과 파열음의 증가가 뚜렷해진다. 만인보의 작자로서의 언어적 모색은 당연히 만인보 주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내 글을 나 아닌 타자가 쓰는 것을 꿈꾼다. 이런 지향은 최근에 더 두드러지고 있다. 삶이란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진다는 깨달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다는 것에의 번뇌와 함께 나는 만인보 안의 명멸하는 시의 화자나 시 바깥의 작자는 그 이상의 존재인 어떤 타자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벌레가 판 나무구멍으로서의 필체가 나의 문체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이 나의 무의식에 의해서 해소될 때 그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언어는 반드시 백번 이상 담금질한 쇠〔百鍊金〕가 아니다. 이 점에서 상징주의의 시는 언어의 해방을 가로막는다. 언어는 어린아이로부터 완성되는 자연이다. 행여 만인보의 어느 행간에 이런 자연으로서의 삶의 말들이 불밝혀져 있다면 그것은 요행이다. 시는 율(律)로 그치지 않는다. 파율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는 삶과 삶 이상으로 흘러가는 행(行)이다. 이것은 모국어가 나에게 언제나 최초의 외국어라는 사실로 하여금 언어 신생아로서의 나 자신을 확인하는 일과도 맞아떨어진다.

사방 산하의 여섯 거처의 공간을 ‘宇’라 하고 옛과 오늘의 시간을 ‘宙’라고 할 때, 그 우주 안의 사람이 거기에 있음으로써 우주가 이루어지는 까닭이 만인보의 한 까닭이기도 하다. 나를 존속시키는 시공과 상관없는 또하나의 시공에서의 탄생, 즉 내세라는 삶의 자유 없이 내 시의 현세는 조금도 가능하지 않다. 만인보의 사람들이 한반도 안팎에서의 내 농업적인 글쓰기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주의 어떤 작용에 관련되기를 나는 바란다. 내 조상들의 망막 속에 내려왔던 저 깊고 푸른 밤의 별빛들이 나에게도 그대로 내려옴으로써 내 눈과 마음은 어느새 우주의 한 변방 무꾸리가 되기를 꿈꾼다. 아, 할아버지처럼 하늘과 친한 누가 있겠는가. 나는 그 할아버지의 손자여야 하지 않는가.

 

그동안의 세월 25년에는 서사시 『백두산』 전7권을 비롯한 시집 31권 등 70여권의 작업도 담겨 있거니와, 이것을 쓰다 말다 하는 동안 묵중한 관심을 이어준 창비의 벗들 가운데는 이미 일터를 마친 벗도 적지 않고 싱싱한 젊음을 바침으로써 어느덧 새치도 내보이는 나이배기가 된 벗들도 있을 만큼 그들의 오랜 정성을 공으로 받아먹은 내가 갚을 길 없는 덕택 속에 들어 있다. 본디 ‘창작과비평사’는 저 신군부 시절 강제 소멸로 문을 닫았다가 ‘창작사’라는 안타까운 절반짜리 이름으로 몰수된 살림을 다시 차렸던 고행을 거쳐왔다. 이제 제2의 창간이라 할 ‘창비’ 시대를 열어 명실 그대로 현대한국문학의 사명학(使命學)의 본거지가 되었다. 만인보를 비롯한 내 대부분의 작업은 이런 위엄있는 창비 총림(叢林)에 동참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저 1970년 이래의 숙명적인 우정이 퇴화되는 일 없이 오늘에 이른 것도 내 이단적인 체질에서는 실로 놀라운 바 있다. 그동안의 백낙청(白樂晴)의 민족문학과 그것의 외척인 세계문학에서의 주도적인 계발은 내 독선들을 자주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만인보 30권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이 어서 과거의 책이기를 바라며 이것이 어서 타인의 것이 되어 나로부터 동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어제의 나로서 내일의 나로 일관되기를 거부한다. 내일은 다른 나의 새로운 세상이고자 하는 것이 내 시의 행로이다. 변(變)은 불변(不變)으로 저물고 불변은 반드시 변으로 빛난다.

인간의 삶이 그 삶의 터전인 땅 자체로 총칭될 때 땅에 쓴 글씨라는 의미는 하늘의 의미마저 땅의 일로 깃들이게 마련이다. 당연히 만인보의 의미도 거기 있어야 한다. 어느덧 안의 노래가 밖의 노래로 나래쳐 가뭇가뭇 떠돌고 있다. 떠돌거라. 떠돌다가 어느 나라의 삶으로 태어나거라.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