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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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陳恩英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 있음. dicht1@hanmail.net

 

 

 

문학적인 삶

 

 

별들은 죽는다. 짐승들은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홀로 남아 있다.

—W. H. 오든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오랫동안 어느 작가도

괴테처럼 걸작을 쓰지는 못했으니까,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할 위대한 한 페이지를.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도축용 갈고리를 흔들며 바닥을 채색하는 붉은 간(肝)과

놋쇠빛깔의 거꾸로 된 물음표에 매달려

말라가는 단어들 사이에서.

 

베르테르의 슬픔에 비견할 성과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그럴지도 몰라. 한 사람의 젊은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나무도마 위의 칼자국처럼 갈라진 농부의 이마

비릿하게 항구의 푸른 젖가슴에서 발려나간

어부의 차가운 돛대, 슬픔의 살찐 넓적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달콤한 폭력이 또다시 필요할지도!

 

관료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노래는 폐허와 부패의 미끌거리는 창자를 입에 문 채

갈까마귀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법이라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또는

고통과 비명의 자유로운 확산과 교역을 위해?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폐병쟁이 시인을 위해 흰 알약의 값을 올리고

아직도 발자끄처럼 건강한 소설가에게는

어미소를 먹인 얼룩소를 먹이도록!

 

그의 잠든 이웃에게는 아름다운 나라의 산업폐기물이

트로이의 목마처럼 입성하는 도시와

햄릿에서처럼

독극물이 고요한 한낮의 귓속으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선물하라.

 

당신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이런 결단들은

종이봉지에서 포도송이를 꺼낼 때처럼

조심스럽거나 부스럭거려서는 안된다.

 

소리 없이

비닐봉지를 휙 가르고 떨어지는 나이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쌘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