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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복지국가는 진보의 대안인가

이태수・김연명・안병진・이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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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균

 

이일영 (사회) 이번 좌담은 복지국가론을 주제로 마련했습니다. 기획취지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62지방선거 후 정치적인 계기가 새롭게 마련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속에서 복지에 대한 수요가 재인식된 점입니다. 정치발전이나 진보논쟁의 진전을 위해서도 복지국가 담론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창비에서는 진보담론을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시키고 현실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 좌담을 통해서 국가전략과 정치프로그램으로서의 복지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복지국가라는 것이 향후에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잘 정착될 수 있을지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토론을 위해 세분의 전문가들을 모셨습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태수 선생님,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활동해오신 김연명 선생님, 그리고 이 주제가 독자들에게는 다소 전문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 정치적 맥락을 폭넓게 짚어주실 안병진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비전문가 입장에서 좀 무식한 질문을 드리거나 시비를 거는 악당 역할을 해야 할 듯한데,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좋겠습니다.(웃음) 우선 자기소개를 겸해 최근의 복지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얘기하는 것으로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제를 정하면서 처음 떠올린 것이 요즘 복지담론의 정책화에 주력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활동이었는데, 이태수 교수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시죠.

 

李兌洙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저서로사회복지전달체계의 개편과 민관협력 등이 있음.

李兌洙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저서로사회복지전달체계의 개편과 민관협력 등이 있음.

이태수 제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창립하는 과정에 참여를 했지만, 최근에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이름으로 좀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요. 저는 경제학으로 학위를 마치고 국내 사회경제문제를 천착하다 복지분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김영삼정부 시절 공무원과 민간 종사자들을 위한 정부교육기관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지금까지 복지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죠. 많은 분들이 제게 왜 경제학을 했는데 복지분야에서 가르치고 있느냐고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아직도 우리 사회가 복지학이나 복지정책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단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후 김대중정부 시절부터 현실의 복지제도 기획과 입안, 실행에 참여했는데, 참여정부 때는 보건복지부 산하의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장으로서 사회복지 인력을 교육하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일도 했습니다. 복지국가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제대로 빨리 확립될 수 있을 것이냐를 고민하며 시민사회활동을 해왔죠. 그런데 현정부 들어서는 정책에 관여 또는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서울복지시민연대 같은 곳들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중입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우리 사회에서 복지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주도적이라고 평가받는데요, 앞으로 이러한 싱크탱크가 많이 생기고 또 운동도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金淵明 중앙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서로사회투자와 한국 사회정책의 미래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복지(공저) 등이 있음.

金淵明 중앙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서로사회투자와 한국 사회정책의 미래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복지(공저) 등이 있음.

김연명 저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습니다. 80년대 중반 대학원에 진학했을 당시는 사회구성체논쟁이 한창이었고, 사회복지라는 것 자체가 소위 대표적 ‘개량주의’였죠. 개량주의적 학문을 한다는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웃음) 실제로 진보진영에서 복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그룹이 없었어요. 진보적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하신 분들이 복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창비 같은 잡지에서 복지국가를 주제로 좌담이 열리는 걸 보니 격세지감도 드네요. 어쨌든 진보개혁 쪽 분들이 복지 연구를 백안시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좀더 일찍 발전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적 사회과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이 복지국가, 사회복지를 열심히 연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유럽에서 복지국가 같은 거시적 주제는 경제학, 정치학의 영역입니다. 담론구조가 워낙 방대하니까요. 예컨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연금입니다. 앞으로 금융시장, 가족의 삶 등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텐데, 경제학이나 정치학, 사회학 쪽에서 연금제도와 관련해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렇게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제도분석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로 담론 중심의 추상적인 얘기에 매몰되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안병진 저는 정치학자로서 전공이 대통령제다 보니까 연금이나 의료보험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좀 곤혹스럽네요. 게다가 하필이면 가장 시장주의적인 복지정책을 취하는 미국에서 유학을 했거든요.(웃음) 제가 미국에 머물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의료보험 개혁을 하다가 대실패를 했지요.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조금씩 진전시켜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욕시 같은 경우는 저소득층 어린이보험을 마련했는데, 그 덕분에 저희 가족도 적지않은 혜택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정부라면 큰 담론을 통해 큰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작더라도 의미있는 성과들을 하나하나 축적하고 시민들이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과거 참여정부를 다소 과하게 비판했던 것, 특히 ‘2030플랜’에 대해 냉소적인 편이었던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진보개혁진영의 과거와 미래를 볼 때, 우리에게 미국 복지의 사례도 시사점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태수 미국에 계시면서 그렇게 감동하셨으면 뭐, 스웨덴 이런 데서 공부하시거나……

 

안병진 그랬으면 귀국하자마자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가입했겠죠.(웃음)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등이 있음.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등이 있음.

이일영 우리의 학문이나 운동, 정치가 거대담론과 이념논쟁으로 흐르는 풍토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산업문제를 중심으로 전공을 해서 비교적 덜한 편이었고 반성도 빨랐다고 자평합니다(웃음).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바로 스물여덟개 국가들이 체제전환을 하는데, 실제로 그 전환과정이 거시적인 체제이행의 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매우 지루하고 점진적이고 복잡한 과정이 있었고, 지금도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지요. 경제학 쪽에서도 큰 흐름에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문제를 보는 방법론을 재검토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행 또는 보완이 없이는 현실문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됐죠. 그것이 경제학의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좀 뒤늦게 좇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우리가 대단히 격렬한 사회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화제를 바꿔보면, 우리가 복지라는 더 구체적인 문제로 내려오게 된 데는 지난 62일의 지방선거가 큰 계기였죠. 사상 최초로 지방권력의 이동이 일어났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는데, 그 원인을 따져보면 하나는 MB정부에 대한 반감을 들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무상급식 문제로 대표되는, 국민에게 내재된 복지 수요가 표면화되었다는 의견도 있겠습니다. 이명박정부는 ‘복지정책이 없는 정부’라는 시각도 있으니 우선은 이 문제를 짚어보고 이어서 무상급식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국사회, 복지에 눈을 떴나

 

安秉鎭 경희사이버대 교수, 정치학. 저서로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등이 있음.

安秉鎭 경희사이버대 교수, 정치학. 저서로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등이 있음.

안병진 두가지 이슈 중에서 하나는 자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빵의 문제지요. 이 자유와 빵의 문제에 관해 국민의 인식이 높아진 게 아닌가 합니다. 자유의 문제라는 것은,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국가가 연예인마저 관리・규제하려 드는 다분히 봉건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겠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의 심화, 중산층의 약화에서 비롯됐는데, 어떤 분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실제 중산층은 줄어드는 현상을 지적하더군요. 그게 맞는다면 사회적인 불안의식 속에서 자유와 빵이라는 두가지 문제가 함께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태수 저도 이번 지방선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선거혁명이라는 표현도 있었지요.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품고 있던 역동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또 이명박 대통령을 500만표 차이로 당선시켰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지방권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죠. 적어도 영남과 비호남을 제외하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예요. 여기에는 안병진 선생 말씀대로 자유와 빵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명박정부의 혁혁한 공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그런데 복지, 보편적 복지, 무상급식 같은 것들이 그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느냐 하는 문제가 남지요. 어떻게 보면 반MB정서가 지배적이었고, 복지는 하나의 슬로건 정도일 뿐 복지 때문에 야권을 선택한 건 아니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계기로 복지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무의식의 각인이랄까, 복지에 대한 발견이 내적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당을 인정하거나 가능성을 높이 사는 편이 아닌데, 어쨌든 이네들이 ‘보편적 복지’까지 내걸었다는 점을 복지주체세력이 좀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복지에 대해 계속 책임지고 가게끔 만들 것이냐 하는 전략을 세워야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신뢰하기 어려운 정치집단들이 복지를 내걸고 선거에서 표를 구했기 때문에, 국민의 눈에는 진보개혁진영에서 복지를 추구하는 쪽과 한묶음이 돼버린 거죠. 복지를 내세웠던 정치인들의 실패가 자칫하면 진보적 복지진영의 실패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현실정치권과 진보적 복지주체세력이 당분간 협력관계를 맺고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일영 그런데 복지주체세력이라고 하면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건가요?

 

이태수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겠는데, 이번에 복지문제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겠지요. 대개 진보를 표방하시는 분들은 복지문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이념적 근거나 고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복지세력=진보진영’이라는 등식은 너무 포괄적이겠지만, 운동적 차원에서 복지를 핵심영역으로 삼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같은 단체, 복지를 내세우는 지식인, 싱크탱크 등이 핵심이 되지 않을까 해요.

 

김연명 이번 지방선거가 한국사회의 미래와 관련해서 중요한 포인트를 던져주었다고 보는데요, 바로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이슈가 그것입니다. 상당수 사람들에게 IMF 외환위기 전까지는 대학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하면 삶이 보장되는 것이었는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는 그런 믿음이 깨지고 삶이 예측가능하지 않게 된 겁니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지, 집을 장만할 수 있을지, 나이들어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된 거죠. 사회가 이렇게 불안해지고 삶의 안정성이 낮아져서는 안되겠다는 잠재적 의식이 깔려 있었던 거죠. 물론 무상급식이 정치적 의제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죠. 김상곤 교육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잠복해 있던 기대와 요구가 정치의 힘을 빌려 의제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수 특히 김문수 지사의 공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김연명 이유야 어떻든 일단 정치적인 의제로 형성됐고,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상급식 외에 다른 여러 불안요인들, 의료문제나 노후문제도 첨예해질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잘 해결해내는 집단이 향후 투표시장(voting market)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우파에서는 정권을 한번 잃은 다음에, 엉성한 ‘선진화담론’이란 게 있었고 그게 그들에게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했어요. 좌파에서는 민주화 이후에 어디로 가야 하느냐에 관한 담론이 없었거든요. 복지국가론이 그 공백을 메워주고 있고, 무상급식이 그중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무상급식이 이슈화된 까닭

 

안병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무상급식이라는 이슈가 왜 그토록 부각됐는가 하는 점이죠. 선거과정에서 김문수 도지사나 일부 시의원들이 아이들 점심값에 무신경한 태도를 보인 것을 돌아보면, 무엇을 정치화할 것인가에서 핵심은 진보든 보수든 소수 특권층을 대변하느냐 다수 보편계층을 대변하느냐거든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대립구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실패하는 진보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상급식, 무상교육의 구체적인 모델에 동의하든 안하든 이 이슈 자체가 시민들 사이에서 ‘강부자・고소영’ 정부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부각됐다는 점이 중요하겠습니다. 또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 문제가 중산층의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기 쉬웠다는 점도 있고요.

 

이태수 사실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 서구 여러 나라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계급을 뛰어넘는 연대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고 해당되는 인구계층 전체가 거의 다 찬성하기 때문에 상당히 광범한 연대를 형성했고, 보편적 복지제도가 성공하는 데 크게 작용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보편적 복지를 내세워서 기대감을 높여놨다가 나중에 실행되지 않았을 때는 부메랑효과로 그 정치집단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복지정책이 실현되려면 객관적 필요성과 정치집단에 의한 주관적 선택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복지에 대한 객관적 필요성은 커져왔지만 그동안 이것을 정치적으로 선택하고 실현하는 주체들이 미약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객관적 필요성이라는 것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지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최대의 아이러니는, 정치적 프리즘은 분명히 복지친화적인데 막상 집권하고 보니까 성장과 세계화, 무한경쟁시대를 맞은 국가의 생존 측면에서 과중한 과제를 떠안아야 했다는 점이겠죠. 그러다보니 복지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에 훨씬 무게중심을 둔 겁니다.

물론 이 점은 이명박정부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명박정부는 사실 성장하겠다고 작심하고 집권했는데, 그후 극심한 양극화에 의해 복지나 분배 면에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객관적 필요성이 커졌지요. 그러다보니 지금 국정이 계속 흔들리고 있는 거죠. 성장을 해보려다가 되지도 않고 먹히지도 않으니까 서민경제, 능동적 복지 같은 걸 건드리지요.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거기에 뿌리박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해낼 수 없죠. 이렇게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민주정권 10년과 이명박정부 2년 반에서 목격했다 하겠습니다.

 

안병진 전선을 전체적으로 확대해야죠. 의료, 교육, 다 확대돼야 합니다. 무상급식운동은 하나의 신화처럼 남아 있어요. 어, 이거 성공했네, 하고 말 뿐 치밀한 논의가 없어요. 예를 들어 무상급식에 대해 중산층이 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였는가, 중산층 내부는 어떻게 다양한 반응을 보였는가를 생생히 분석할 필요가 있지요. 그리고 세대와 지역 별로도 미묘하게 다른 특징들을 포착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김상곤 교육감이 제기했을 당시와 그 이후 유권자 태도가 어떤 변동을 보였는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PNC 리포트의 정찬원씨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4대강 낭비 이슈가 없었다면 과연 무상급식이 그토록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지적하더군요. 이런 점들은 무상급식이라는 보편주의적 아젠다에 시민들이 공감하니 이제 사민주의적 아젠다를 본격적으로 제기해나가자는 것이 치밀하지 못한 정치전략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일영 무상급식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점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앞으로도 보건, 의료 같은 여러 이슈들을 망라한 복지국가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봅니다. 무상급식이 성공적으로 의제화되었지만 향후에는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다른 데서는 난감한 일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이걸 중앙정부가 할 것이냐? 중앙정부가 손대서 한칼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학교, 시민사회, 학부모 등이 관계되는 거버넌스의 문제가 등장하게 될 겁니다. 당장 전국적으로 하려면 대충 잡아봐도 2조원 정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2조원 정도면 할 만한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 2조원으로 무엇을 먼저 하느냐의 선택 문제가 뒤따를 것이고, 세금과 재정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의제를 전면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고 복지국가 패러다임으로 가져가기 시작하면 십수조 또는 수십조, 결국 이명박정부의 토건사업에 필적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그랬을 때 이것을 어떻게 정치의제화 하느냐, 좀전에 나온 ‘투표시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번 무상급식의 이슈화를 거치면서 복지를 잘 모르는 정치인들도 복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부류의 복지와 복지주체세력의 복지가 분명한 차별점을 보여야 할 텐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지담론이 확산되고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는 단계에 이르면 보수에서 말하는 복지와 진보에서 말하는 복지에 어떤 준별점이 있을까요.

 

 

진보의 복지, 보수의 복지는 어떻게 다를까

 

이태수 복지에는 다양한 유형과 접근방법이 있고, 지금 박근혜씨도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 건설이었으니 자기도 그러겠다고 하지요. 서구에서도 우파가 복지를 부정하거나 크게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보에서 말하는 복지국가와 보수에서 말하는 복지국가는 다르다고 봅니다. 한 사회의 경제구조에서 시장의 위치를 어떻게 둘 것이냐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보수 측에서는 시장을 90% 이상까지 주된 것으로 놓고 나머지 10% 정도에서 복지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요. 복지를 시행하는 원리도 시혜적이고 시장에서 자립능력이 없는 층에 초점을 맞춰요. 이것을 양적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진보 측에서는, 직관적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의 기능이 51% 정도만 유효하다고 보는 것 아닌가 합니다. 시장이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49%를 넘어 50% 이상이 된다고 보면 결국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라 할까요. 어떻든 시장실패를 시장외적 기제가 과감하고 전면적으로 보완해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양적 접근이 아니라 질적 접근이 필요한 거죠. 거기에 인권이나 사회권 같은 것이 철학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요. 이명박정부나 박근혜씨가 이야기하는 복지는 어디까지나 양적 접근에 머물러 있습니다. 진보 측이 질적 접근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경제・노동・산업의 모든 영역에 걸쳐 어떻게 과감하고 실효성있게 선보이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연명 이 문제를 진보가 집권하면 복지를 잘할 수 있느냐, 보수는 왜 못하느냐 하는 질문으로 바꿔봅시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 복지국가를 만든 쪽은 보수주의자들이었죠. 노동운동세력이나 진보주의자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제도가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의도라면서 열심히 반대하다가, 2차대전을 전후해서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뀌거든요. 우리나라도 복지제도의 초기 쎄팅은 박정희정부가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지국가라는 건,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양쪽이 동기나 취지는 달라도 모두 복지에 대해 내세울 지분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최근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일면서 진보와 보수가 보이는 차이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진보는 가능하면 보편주의적으로 계층이나 계급,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주려는 입장이 강합니다. 보수는 그러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가능하면 욕구가 가장 큰 사람들, 즉 빈곤층한테 몰아주는 게 효율적인 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추가하면, 보수는 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 하고, 진보는 국가를 통해 제공되는 복지제도가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것 이상이 되도록 한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보수주의적 복지와 진보주의적 복지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명백히 갈린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명박정부는 복지에 대해서 무엇을 할까요? 민주정부와 비교해보면 거의 아무것도 안하는 수준입니다. 무관심, 무대응, 거의 이런 수준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도 있어요. 지금 경제부처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너무 나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말로는 ‘친서민’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보금자리주택’ 외에는 뭐가 없잖습니까? 그럼 박근혜씨는 어떤 복지를 가지고 나올 거냐, 이 문제는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어서 가늠하기 힘든데,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씨 측의 복지를 비판하는 어떤 분이, 그래봐야 온정주의적이고 시혜적인 데 그치겠지 하고 비아냥대던데, 저는 이런 식의 접근은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경제구조가 워낙 삶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쪽으로 가고 있어서, 보수지만 꼭 보수주의적 복지를 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진보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씨 쪽에서 소위 이명박라인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려면 보편주의적 복지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진보개혁세력에서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어떤 유형의 복지를 할지 구체적이고 정밀한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지문제에서 헤게모니를 뺏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일영 그러면 보수 쪽에서 상당히 진전된 복지국가전략을 들고 나왔을 경우, 진보세력이 그들과의 연합도 불사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김연명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가능한 문제인데……

 

이태수 보수에서도 할 수 있는 최소치와 최대치가 있고 진보에서도 최소치와 최대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양자 사이에 중첩지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라 해서 진보의 최소치도 따라오지 못한다, 이런 건 아니죠. 게다가 한국정치의 역동성을 보면 순간적으로는 이념에 뿌리를 두지 않고 포퓰리즘적으로 갈 수 있는 면도 얼마든지 있고, 또 그만큼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려는 탄력적 사고가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끝내 만날 수 없는 지점은 분명히 있지요. 박근혜씨가 과연 자기 지지기반인 보수주의자들의 정부에 대한 생각, 즉 작은 정부, 작은 재정, 적은 세금 같은 것들을 돌파할 수 있을까요? 기본적인 기반과 철학이 달라서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보면 결과적으로는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가능성이 많지요. 이명박정부도 말로는 한다고 했던 게 많았는데도 못하는 이유가, 정부의 역할과 재정 부문에서 부합되는 정책을 펼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일영 그런데 아까 이명박정부가 복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다음 정부는 누가 됐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정, 예산, 세금 같은 것들은 공통적으로 부닥치는 제약조건인데, 어떻게 보면 보수정부가 그런 문제를 훨씬 잘 돌파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념적인 제약도 없잖습니까. 국가 역할을 늘리겠다는 얘기가 진보 쪽에서 나오면 사회주의, 빨갱이, 친북 딱지가 붙을 가능성이 있지만, 보수정부는 국가의 강화, 사회의 유지라고 말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보수가 여태껏 자기 소임을 안해서 그런데, 제대로 된 보수라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최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당연합니다. 복지국가를 전략적 목표로 설정하고 나면 결국은 누가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는데, 국민들이 이 대목에서 진보세력을 더 유능하다고 인정해줄까요?

 

 

진보개혁세력은 실력을 갖추고 있나

 

안병진 제가 몇년 전부터 박근혜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왔는데, 진보 쪽 일부의 반응은 그런 ‘수첩공주’(정책의 빈약함을 비꼬는 별명)한테 왜 과도한 위상을 부여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수첩공주’가 아니라는 게 지금 드러났죠. 저는 박근혜가 상황에 따라서는 한국의 닉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지와 평화, 이 두가지로 한국판 닉슨이 될 수 있는 정세가 무르익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리버럴들은 무능력하다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후 ‘보수 포퓰리즘’ 시대가 올 거라고 예고했던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떼르미도르 반동 같은 것이죠. 이명박은 어떻게 보면 ‘백만장자 포퓰리즘’ 같은 겁니다. 진짜 위험한 보수는 바로 비스마르크 같은, 박근혜 같은 보수 포퓰리즘이죠.

아시다시피 조정자본주의(coordinated capitalism)를 이야기하면서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보수로서 한계는 있지만요. 이후에 박근혜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할 것이냐에 따라 진보개혁진영이 균열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2012년 대선 때가 될지 집권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닉슨 때가 그랬고, 실제로 닉슨은 그걸 정치전략으로 써먹었지요. 한국에서도 그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정책적 연합을 하고, 어떤 것은 한계를 지적해야죠. 그런데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에는 아마추어적이고 조야한 당파주의가 뿌리깊게 있어서 일단 경쟁자가 얘기하는 건 무조건 부정하고 봅니다. 그러다 그것에 결국 자기 발목을 붙잡히게 되죠. 그보다는 보수세력 스스로 그 한계를 폭로하게끔 하는 다차원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이태수 저는 길게 보면 모두 발전의 도상이라고 봐요. 특히 진보개혁진영이 아직 복지에 대해 자기정체성이나 확실한 기반이 없다는 것이 위험하긴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시장외적 기제의 비중에 대해 10%니 49%니,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만, 지금 진보진영은 한 30% 정도로 하려다가 과연 될까 싶어서 주저하고 있어요. 노무현정부의 한계도, 복지를 하긴 해야겠는데 재정도 없고 특별히 플랜도 마땅치 않다보니 만날 로드맵만 짜고 또 짜고, 경제관료가 돈 없다 그러면 조금만 해보자고 달래는 식으로 하다가 실패한 거예요. 이제 보수 쪽에서 30%를 하겠다고 하면, 드디어 49, 50, 51%까지도 갈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세력과 진보개혁세력을 등치하는 사고를 극복해야 합니다. 민주화세력 내에는 사실 진보적 가치에 동조하지 않거나 한 집단으로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섞여 있죠. 우리는 지금껏 민주화를 단지 정치적 민주화로만 여기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 다같이 진보개혁세력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회민주화나 경제민주화에서 어떤 입장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 점에서 민주화세력 내에서도 다시 보수와 진보가 갈립니다. 제가 정의하는 사회민주화는 2차적 분배나 재분배, 즉 생활, 문화, 교육 이런 영역에서 인권과 평등, 연대와 정의 같은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란 1차적 생산과정에서의 민주적 가치 실현 문제고요.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민주화와 경제민주화 과정에 제대로 된 정책을 펴본 적도 없고, 그러면서 서로 입장을 확인하고 동류관계를 검증한 적도 없지요.

보수진영에서 복지를 하겠다며 치고들어올 때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에 대한 입장이 더 확연히 드러나면서 재편될 겁니다. 따라서 복지만 얘기하면 연합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식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고 봅니다. 보수에서 복지를 하겠다고 해서 집권했는데 제대로 안됐을 때 훨씬 더 확실하게 진보 쪽으로 국민적 신뢰가 기울고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일영 복지는 누가 하든 확대해야겠지요. 그런데 하고 싶다고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수든 진보든 제약조건 안에서 움직이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누가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제도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조세기반을 저항 없이 갖춰가는 것도 불가결할 텐데, 그 점에서 진보개혁세력의 실력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복지정책을 잘 운영하는 나라들 보면 정책과학, 계량과학의 수준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참여정부에서도 경험했지만 진보적인 재정학자라든지 조세학자가 거의 없거든요.

 

김연명 다음 정권에 진보가 들어서건 보수가 들어서건 복지국가로 향하는 길은 대단히 험난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명박정부에서 워낙 국가채무를 늘려놔서 재정 제약이 극심한 편이죠. 벌써 토지주택공사(LH) 부채가 118조원이니 정부재정의 1/3을 넘었거든요. 둘째로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할 때 사민주의형, 유럽대륙형, 영미형의 세 갈래가 있습니다. 저는 그외에 남미형이 더 있다고 봅니다. 남미는 우리처럼 복지국가 궤도에 진입했다가 미끄러졌어요.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서 있는 자들을 위한 복지는 잘돼 있는데 없는 자들을 위한 복지는 형편없죠. 이걸 ‘분리된 복지국가’(divided welfare state)라고 합니다. 우리 산업구조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양극화되면서 대기업 관련 종사자들은 모든 걸 다 받는 반면에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못 받죠. 이 구조가 복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요. 대기업 다니면 기업복지를 비롯해 온갖 혜택을 받지만,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다니면 거의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국가의 복지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노동시장구조 자체가 평준화, 균등화되지 않으면 그것을 복지제도로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복지제도는 2차분배이기 때문에, 1차분배에서 어느정도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메울 수가 없어요. 그걸 복지제도로 메우게 되면 포퓰리즘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말 그대로 그냥 쏟아붓는 겁니다.

하지만 노동시장과 산업구조의 양극화가 예전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복지제도는 대개 노동시장이 완전고용상태이고 대부분의 국민이 정규고용직인 것을 전제로 짜여 있어서 현실과 안 맞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보편적 복지가 될 수 없어요. 우리가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는 한, 외국의 경험을 아무리 찾아봐야 답이 없어요. 이런 유형의 복지국가는 유럽에 없어요. 그쪽이야 비정규직도 다 보호해주니까 복지에서 소외되지 않거든요.

 

 

증세부담과 재정압박을 돌파할 묘안은?

 

이태수 그러나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지요. 재정 제약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증세하자는 데 쉽게 동의할 국민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조세부담율이 낮다는 거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서 세금에 대해서라면 진절머리를 내는 국민정서가 있지만 객관적인 세금부담 수준은 낮은 상태입니다. 특히 기업에 대해서는 여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법인세뿐 아니라 기업 부담의 여러 세금이 서구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실증들이 있습니다. 물론 기업이 해외로 이전하거나 경제활력을 위축시킬 거라고 우려할 수 있겠지만, 어느정도는 돌파할 여지가 있다고 봐요. 그리고 부유층의 담세(擔稅) 여력은 굉장히 크지요. 소득세만 해도 8800만원 이상 계층의 구간은 세율을 차등화하지 않는 상황이 몇십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이런 층을 대상으로 충분히 올릴 수 있고 국민정서에도 합치할 거라고 봅니다.

지난 5월 한겨레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부자증세는 대환영이라고 나왔습니다. 물론 종부세 같은 경우에는 반대했지만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을 통해서 복지를 경험하게 하는 것, 보편적 복지에 의해서 내가 혜택을 보니까 좋더라는 체험이 세금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갈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세금을 일거에 5%포인트씩 일률적으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적절하겠지만, 전략적으로 시작한다면 그 증세분으로 비정규직이나 보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또는 ‘복지폭탄’을 제한적인 영역에 투하하면 거기서 국민에게 승인받는 부분이 생길 것이고 재정적인 한계도 좀 풀릴 겁니다. 단기적으로 쉽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고도의 전략과 여론관리 내지 통치술이 수반돼야겠죠. 그렇게 재정문제를 풀어내면서 우리 복지구조를 개혁한다면 사회민주화에서 경제민주화까지 가는 거죠. 경제민주화로 바로 가기에는 저항이 너무 강합니다. 평등의식, 공정성, 사회연대감 이런 것들이 아직 부족하기에 반발이 심한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복지제도로써 국민의 인식과 기본철학을 조정하거나 순응적인 기반을 닦아놓으면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일영 저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복지경험, 나아가 복지폭탄까지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자칫 남미형으로 갈 위험을 키우는 조치가 될 수 있고 실패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큰 이야기를 해보죠. 경제민주화가 어려우니까 복지폭탄으로 그 길을 닦는다, 이런 말씀이신데, 좀 거칠게 단순화하면 ‘선(先)복지 후(後)경제민주화’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현실에 맞느냐 하는 겁니다. 복지는 쉽고 경제민주화는 어렵고 그렇습니까? 저는 복지도 어려운 문제고 민주주의도 어려운 문제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뿌리를 같이하는 문제입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왜곡된 국가주의가 형성되었고 거기에서 이익을 취하는 세력이 있죠. 남북한 간에, 그리고 남북한 내부에 형성된 격렬한 대립과 증오의 기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복지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복지를 왜곡시키는 근원이나 구조를 봐야합니다.

다음으로 좀 구체적으로 법인세나 소득세를 올리는 문제를 보죠. 아까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도 나왔지만, 경제활동인구를 2000만명쯤 된다고 보면 그중에서 정규직이 한 700만~800만명인데 이들한테 소득세의 세원(稅源)이 집중돼 있습니다. 법인세 거두는 것도 어차피 정규직이 관련된 기업부문이 주요 대상입니다. 이들에게 전체 사회의 복지재원을 전담하라는, 심지어 복지폭탄을 뿌리는 데 몸바쳐 희생하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1200만~1300만명은 좋아할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한국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경쟁지향적이며, 사회복지에 의해 먹고사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연명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스웨덴 복지모델의 특징을 재원의 부담과 혜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일해요. 영미형 복지국가의 특징은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나뉘어 있어요. 내가 내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거예요, 주로 하층민이죠. 그러니까 그런 사회에서는 복지제도에 대한 반발도 크고, 복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낙인감을 주고, 납세자들이 세금반란(tax revolt)을 일으킵니다.

사실 복지국가의 기본은 조세국가입니다. 세금체계가 원활하게 안 돌아가면 복지국가가 지탱되지 못하거든요. 저한테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뭘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세금구조부터 다 뜯어고치겠다고 하겠습니다. 몇년이 걸리더라도요. 세금 내는 사람은 계속 내기만 하고 받는 사람도 떳떳하지 못해요. 그런 식의 복지씨스템은 연대성도 없고 그걸로 연대를 달성할 수도 없지요. 정치 균열이 나타나서 표도 안 모이고 연합도 안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가능하면 모두가 내고 모두가 받는 복지전략을 취해야 정치적 연대가 형성됩니다. 이게 바로 보편주의적 복지의 핵심입니다. 지금 진보개혁진영에서 복지국가론을 얘기하지만 세금부담을 어떻게 하고 무슨 수로 정치적 연대를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는 게 문제입니다. 진보신당만이 목적세 형식으로 사회복지세를 도입하자고 하는데, 이 방식은 세금을 내는 사람과 복지수혜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영 이건 산업구조나 노동시장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보통 신자유주의를 말하면서 IMF 이후라고들 얘기하는데 사실 소득분배가 급격히 악화된 것은 90년대 초예요. 소득분배 악화는 산업구조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과거에는 자동차산업 같은 포드주의적 구조가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단 말이죠. 대기업이 노동을 다 끌어안아서 내부노동시장을 만드는 식이 아니라 노동을 외부로 내보냅니다. 케인즈정책도 조세제도 기반하에서 국가에 어느정도 힘이 있었을 때 작동했던 거죠. 그런데 생산공정의 결합과 분리가 매우 용이한 산업구조로 변하면서 다국적기업이 많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노동시장도 예전 방식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졌죠. 불가역적일 겁니다.

그러면 결국 국가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새로운 복지국가 패러다임이라면, 복지를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사실 최초의 사회보험은 비스마르크가 만들었고, 나찌 같은 경우도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복지제도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게 진보개혁진영이 추구해야 할 모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이 갔던 국가사회주의의 길, 러시아가 갔던 스딸린적인 길이 상당히 닮아 있어요. 그 점에서 이태수 선생이 진보의 복지패러다임은 국가가 49%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분명 국가가 맡아야 할 영역이 있죠. 예를 들면 보험 운영은 중앙정부가 해야지요. 기본적으로 금융시장과 관련된 문제고 규제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써비스의 경우는 경쟁원리를 이용할 필요가 있어요. 공적 부조에서도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가 핵심 아닙니까? 저는 보육이나 요양이나 급식 같은 것들을 공무원들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급식도 학교직영이 좋을 수도, 때에 따라서는 아웃쏘싱이 좋을 수도 있어요. 무조건 직영급식이 우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주도의 복지와 민간주도의 복지

 

김연명 그런데 그게 주요한 형태가 될 가능성은 한국사회에서 전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보육써비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보육은 몇가지 형태가 있어요. 국가나 구청에서 국공립어린이집 지어서 하는 것, 민간인이 하는 민간어린이집, 대기업에서 어린이집 체인 만들어서 시장에서 하는 것, 학부모들끼리 모여서 몇백만원씩 내고 육아공동체, 즉 협동조합 만드는 것 등이죠. 이 가운데 보육학자들에 따르면 써비스 품질은 공동체적 양식이 제일 낫습니다. 그런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전문직, 돈 있는 사람, 박식한 사람이에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상황을 보면 그래요. 외국의 경우도, 그런 공동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복지공급을 하는 경우가 있긴 있지만, 주요한 형태가 된 사례는 없고, 그게 국가복지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없습니다.

 

이태수 국가와 민간의 역할 문제에서는 재원의 차원과 집행의 차원이 있어요. 먼저 재원 차원에서는 당연히 공공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하지만, 그것을 민간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한다면 공공재로서의 복지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집행의 단계에서 꼭 공무원이 해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무원이 할 수도 있고, 완전히 시장논리에 따를 수도 있고, 중간형태로서 위탁을 하는 경우도 있죠. 민간업자가 전문성을 가지고 하되 그것을 공공이 관리・조정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국가가 직접 하는 경우는 애당초 없었고, 민간위탁 경우가 많았어요. 시장영역도 사실 별로 없었죠. 최근 들어서 영리 쪽이 장기요양이나 보육에 상당히 들어왔거나 들어오는 중인데, 분명 공공이 직접 운영하는 것이 품질이나 표준적인 가이드라인을 지키고, 영리 쪽의 폭리나 횡포를 제어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큽니다. 지금까지는 이게 너무 없었기 때문에 실현주체 면에서 공공이 더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 복지 쪽의 주장이지요.

또 그래야만 민간위탁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 실력도 전문성도 없는데 그냥 위탁만 해놓고 알아서 하겠지 했기 때문에 지금 민간위탁에서 효율성이 안 살고 있거든요. 공공이 직접 운영하는 것과 민간위탁을 포함해서 60, 70% 정도로 하고, 나머지를 선별된 영리 쪽에 허용하는 식의 적절한 포트폴리오가 필요합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서 공공이 하면 안된다, 시장으로 가자는 것이 지금 정부와 보수세력의 생각이지요.

 

안병진 미국의 경우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무상급식은 미국에서도 프리런치(free lunch)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2015년까지 미국 전역에서 정책적으로 집행하겠다고 했어요. 중앙정부가 재원을 마련해 지원하고, 엄정한 평가기관을 갖추고 그것을 유지해가면서 각각의 주정부가 NGO, 다양한 사회적기업들과 파트너를 이뤄서 창조적인 방식으로 해나갑니다. 그러면서 이후 지원이 재배치되고요. 우리나라도 초보적인 형태로 이제 되고 있다 싶어요. 기본적인 방향은 이제 국공립만이 아니라 다양한 경쟁을 통해서 더 창조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도 이제 그 궤도로 올라선 것이고, 그 점에서 지금 진보개혁진영의 이론적・실천적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김연명 이 문제는 좀 풀어서 얘기해볼게요. 아까 얘기한 보육써비스를 봅시다. 우리나라 보육시설 4만개 중에서 국공립은 채 5%가 안돼요. 아이들 비율로 따지면 10%쯤 됩니다. 병원은 대략 3만개가 넘는데, 국공립은 10%쯤 됩니다. 노인요양시설이나 노인전문병원 중 공공시설이 몇개인지는 정부가 통계 발표조차 안합니다. 나머지는 다 민간공급자예요. 우리나라는 복지공급을 이미 영리집단들이 다 장악해버린 겁니다.

노무현정부 때 진보개혁진영에서 계속 국공립보육시설과 국공립병원을 확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전체 어린이집 중에서 국공립보육시설 30%, 전체 병원 중에서 국공립병원 30%, 이렇게 하자고 했어요. 진보진영에서 이슈를 내걸어서 노무현정부 때 그것이 공약으로 들어갔어요. 욕심 같으면 국공립 50, 60%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진보 쪽이 요구한 30%도 달성하지 못했어요. 재정이 모자라서요. 기획예산처가 돈을 안 줍니다. 그럼 국공립보육시설을 몇퍼센트로 확대할 거냐? 물론 100%로 확대하자는 건 아니에요. 최소한 시장이 합리적으로 돌아가도록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자는 거예요. 30%를 장악하면 70%를 견제할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아무튼 지금처럼 공공부문 5, 10%로는 민간부문에 대한 통제가 안되기 때문에 늘려야 한다는 것이죠. 통제가 안된다는 건 무슨 의미냐면, 의료보험의 표준진료수가를 결정하는데, 민간의료시설의 압력 때문에, 때로는 그들에 대한 눈치보기를 하느라 얼마가 드는지 알 수가 없어요. 자료를 안 줘서 표준단가 산출도 못합니다. 국공립병원도 자료접근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상황에서 우선은 국공립보육시설을 30% 정도로 늘려서 시장을 견제할 힘을 기르도록 해야죠. 그럼 나머지 70%를 어떻게 규제할 거냐, 이것이 지금 복지국가를 얘기하는 데 있어서 핵심입니다.

 

이일영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규제하느냐가 문제잖아요? 공공부문이 하면 그냥 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연명 공공을 30%까지 끌어올리자는 얘기는 이런 겁니다. 시장 쪽에서 과도하게 영리추구를 해서, 예를 들어 정부에서 표준보육단가를 12개월 미만의 영세아(零歲兒) 1인당 한달에 72만원(08년 기준)으로 정해서 그 이상 받지 못하게 했는데, 공급자 대다수인 민간어린이집이 담합해서 10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들쑤시면 통제가 안되다는 거죠.

 

이일영 그런 담합은 불공정거래행위지요. 처벌해야 합니다.

 

김연명 그럴 수가 없어요, 민간부문 파워가 너무 세서. 복지부장관도 의료보험수가 조정을 못하고, 의료정책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의사협회 가서 도장 찍어야 가능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보육도 마찬가지로 민간영리부문이 너무 커져서 어린이집 함부로 못 건드립니다.

 

안병진 제가 오바마 의료보험 개혁안에 아쉽지만 동의한 이유가 바로 그 점입니다. 공공과 민간을 어느정도 경쟁시켜서 민간의 행위를 제한하는 게 핵심이잖아요.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미국처럼 후진적인 의보씨스템에서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한국에서는 더 중요한 계기가 될 거고요. 쟁점을 약간 달리해보면 아까 얘기된 조세개혁 같은 것들은 리버럴 수준에서 해야 하는 과제잖아요?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잡든, 앞으로 정부의 핵심과제는 공정한 시장질서 수립을 비롯한 리버럴한 개혁일 거예요.

그런데 요즘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왜 자꾸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커지느냐며 우려하는데요, 현실로 들어가면 바로 그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인의 분식회계만으로도 25년형을 받는 미국과 달리 그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가 되는 것이나, 대기업에 솜방망이 처벌을 일삼는 공정거래위의 현실 같은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과제를 진보개혁세력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바로잡는 동시에 더 진전된 과제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균형감각일 겁니다. 자유주의적 과제에 대해 지나치게 거부감을 느끼는 건 복잡한 현실에 뿌리내린 진보의 태도가 아닙니다.

 

김연명 조세국가는 근대국가의 기초예요. 그건 이념과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걸 거치지 않으면, 근대국가를 넘어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국가형태나 시장자본주의 질서를 말 그대로 자본주의답게 하는 것, 이것은 이념과 상관없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라고 생각해요. 그건 우파정부가 들어서서 하는 게 당연하지만, 좌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장문제로 돌아오면, 90%가 민간공급자일 때 가격을 어떻게 통제할 거냐? 정부가 민간업자를 규제할 방법은 가격규제 또는 진입규제인데, 진입규제는 이미 다 풀었어요. 왜냐하면 복지욕구는 팽창하는데 국가가 다 부담할 수 없으니까 민간업자를 불러들여서 복지사업을 하게 했거든요. 그럼 이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가격규제예요. 보육료를 얼마로 할지, 의료수가를 얼마나 책정할지. 그런데 안 먹혀요. 방금 말했지만 한달에 영세아 1인당 72만원만 받으라고 정부가 지침을 내려도, 정직하게 운영하면 이윤이 안 남고, 그걸로 만족 못하면 뒷구멍으로 다른 걸 받아요. 특기적성교육이니 영어캠프니 해서 100만원을 받아요. 그걸 정부가 잡아내야 하는데 눈감아요. 72만원으로는 안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의료수가 정하는 것도, 정부가 계속 통제해왔지만 민간병원들은 의료보험이 안되는 의료행위를 키우면서 영리추구를 해왔습니다. 정부가 확실히 규제를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일영 그런데 경제원론에 의하면 가격은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완전경쟁이나 완전정보 같은 조건을—

 

김연명 맞습니다. 간단해요, 완전경쟁시장으로 만들면 되죠. 경쟁을 통해서 일종의 내부질서를 만들어가는 거죠. 그럼으로써 가격도 안 오르게끔, 완전경쟁시장으로 복지써비스 공급구조를 개편해야 돼요. 보육써비스나 의료써비스나 진보개혁진영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 중 핵심이 민간보험회사들이 파는 보험상품이에요. 다들 개인연금이니 암보험을 들잖아요. 이쪽이 말만 시장이지 탐욕에 물든 보험회사들이 상품 팔 때 제대로 설명도 안하고, 리스크에 노출되면 온갖 핑계를 대서 안 주는 경우가 다반사죠. 이런 보험상품이나 병원, 노인요양시설, 어린이집, 이런 쪽은 해답이 없어요. 국가가 들어가서 해결할 수가 없어요. 워낙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이런 쪽은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봐요.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국공립보육시설 다 지을 돈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시장경쟁에 대해서 진보 쪽에서 유연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폐해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태수 완전경쟁의 조건을 실현한다는 건 뭐죠?

 

김연명 써비스의 품질을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끔 국가에서 평가해서 공표하고, 완전정보 환경을 만드는 거죠. 흔히 정보의 비대칭성을 없앤다는 말이죠. 저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을 만들 수 있느냐? 이론적으로는 만들 수 있죠. 공정거래위원회가 확실히 칼자루를 쥐면 돼요. 그런데 다 비슷비슷한 인사들을 앉혀놓으면 안되죠. 그런 것까지 진보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로만 복지국가 해서는 택도 없는 얘기라는 거죠.

 

이일영 저는 그런 게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태수 경제원론에 해당하는 말씀인데, 우리 생활에 굉장히 긴요한 것, 어쩔 수 없이 항상 써야 하는 재화나 써비스는 완전경쟁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육이나 의료도 마찬가지죠. 게다가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도 있고요. 사회복지에는 이런 독특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경쟁만으로 무마되리라고 보는 것은 안이한 생각입니다. 경쟁논리를 그냥 믿었다가는 상당히 큰 폐해가 돌아오죠. 공공재 성격이 강한 이러한 사회복지영역에서는 아까 얘기했던 30% 정도의 국공립 수준이 일종의 기준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기준자로서의 국공립이 실패하는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전문적이고 탄력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병진 결국 시장혁신을 위한 공공성의 활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때 진보개혁진영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에 집착한 나머지 보수와 차별화되는 우리만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보이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차별화가 안된다 하더라도 그걸 인정하고 현실에서 무엇이 작동 가능한가를 보면서 다른 내용으로 승부를 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복지주체세력은 어떻게 형성되나

 

이일영 이태수 선생께서는 사회복지 쪽은 시장실패가 광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공공이 해야 된다는 말씀이시죠. 여기서 공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좀더 다양한 제도형식까지 포함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복지학자들은 공공의 주체를 국가로 특정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위계적인 조직인데, 경제체제론에서 보자면 명령적 방식이죠. 자원을 명령적으로 배분하는 겁니다. 달리 얘기하면 수직적 거래인 거고요. 시장에서는 수평적인 거래를 하죠. 시장에서 수평적인 거래를 안하고 담합을 했다거나 정치인을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면 그것은 시장의 거래질서를 위반하는 거고요. 수직적 거래 역시 잘 작동되지 않으면 국가사회주의에서 만연했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주제로 돌아오면, 시장실패뿐 아니라 정부실패의 문제도 광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양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감시하고 규제하느냐도 중요하잖아요. 저는 그게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공공이냐 시장이냐, 국가냐 개인이냐의 문제라기보다, 국가나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그것이 진보와 보수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 아닐까요? 아까 공동체를 통한 복지가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고 주된 흐름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셨지만, 양이 적더라도 누군가는 그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정부에서도 누군가 들어가야 되고 시장에서도 누군가 들어가서 모니터를 해야 되잖아요. 시장적 요소도 가져오고 공공적 요소도 가져와서 혼합적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김연명 그걸 복지다원주의라고 부르거든요. 복지의 공급주체가 국가, 기업, 가족, 교회, 공동체, 다 있는데요, 유럽에서는 복지다원주의가 국가책임을 조금씩 시민사회 영역으로 돌리는 데 이용됐습니다. 유럽은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워낙 국가 부분이 크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반대거든요. 국가 부분은 쥐꼬리고 나머지는 다 자기가 알아서 먹고사는 씨스템이에요. 국가 부분을 더 끌어와야지 오히려 축소시키는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는 지금 상황에서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태수 국가, 민간, 공동체, 가족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짜느냐에 관해서는, 국가 역할을 확대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도 서구의 폐해를 줄일 수 있는 다채로운 원리를 보조적으로 끼워넣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복지도 역시 다양하게 여러가지로 시도할 수 있다거나, 서구의 경험을 잘못 이해해서 우리 현실에서도 보조적인 수단이 더 강화되고 주된 흐름이 되리라고 보는 것은 나중에 문제를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연명 지금 한국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는 두가지 전선이 있어요. 하나는 공공부분의 역할을 키우는 겁니다. 공공부분의 비율이 너무 작아서, 비합리적인 시장에 밀리면서 전체적인 사회적 비용이 매우 커지고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의료비입니다. 의료비 팽창 속도가 우리나라만큼 빠른 경우가 역사상 없었어요. 십년만 지나면 미국 꼴이 날지 모릅니다.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않아요. 최소한의 장치로서 국가복지를 확대하는 전선이 첫째고, 비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시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둘째 전선입니다. 진보진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첫째 전선 얘기만 하는데, 큰 오산이라고 봅니다. 둘째 전선이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해요. 합리적인 시장메커니즘이 작동되게끔 하는 것, 이것도 굉장히 세밀하고 정교한 전략 없이는 못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거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담이 나중에 복지비용으로 다 되돌아올 거고, 보수 쪽에 공격의 빌미를 줄 소지가 높아질 겁니다.

 

이일영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두개의 전선을 담당할 주체를 어디서 키우느냐는 거죠. 아까 그게 복지주체세력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부분이 그냥 ‘진보개혁진영’이라기보다는 재구성돼야 한다는 거죠. 그것을 ‘복지주체세력’이라 해야 할지 ‘민주세력’이라 해야 할지 명명하는 것은 별개로 하고요.

 

김연명 공공부문의 역할 증대를 통한 복지제도의 확충과 시장의 합리화라는 방향을 현재 정치지형에서 누가 반대하겠어요?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이 반대할까요? 진보세력이 단결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복지 배분에 있어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문제는 이해관계가 갈릴 수 있지만요. 서로 내가 헤게모니를 잡아야겠다는 욕심만 안 부리면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안병진 그 점에서 저는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보거든요. 자유주의 좌파인 거죠. 그중에서 좀더 좌파적 색깔을 내느냐 좀더 시장적인 색깔을 내느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이죠. 새로운 정치세력 재편의 계기는 열렸는데 문제는 각 정당들이 아직 많은 부분에서 19세기적이라는 겁니다. 민주당 같은 경우는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 자기들의 과제인데 전혀 이해를 못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많은 이들은 비합리적인 시장이 얼마나 우리 사회를 옥죄는지 인식하고 있지 못해요. 어떤 이들은 당장이라도 사민주의국가를 이룰 것처럼 이야기하고, 혹은 정반대로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경향마저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태에서 지금 당장 통합해봐야 치고받고 싸울 뿐입니다. 요즘 얘기가 다 통합으로 가 있는데, 저는 사실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통합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당의 제도와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면서 통합할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일영 논의를 모아보자면, 사회경제적 조건 개선이나 복지증대 방안에서 진보개혁진영이 근본적으로 분열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면 그것은 진보 내부의 후진적인 정치적 이해관계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시는 것 맞습니까?

 

이태수 그렇게 보면 너무 낙관적인 것 같네요.(웃음) 그런 측면이 분명 있지만 지금 정치인들 중에서는 아직도 복지를 우선적 정치의제로서 수용할 만한 식견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민주당 내에도 복지에 대해서는 성숙한 철학과 이념, 비전을 갖춘 사람들이 드물죠. 사실 진보정당에서도 의제로서는 주장했지만 복지국가 패러다임에 대해 확실한 정치적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나 싶습니다. 현실정치권에서는 아직 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것 같고, 시민사회 내지는 지식인계층에 큰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흔히 민주화세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복지주체세력으로 전환시킬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70, 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 민주화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있고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일상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민주화과정이 정치적 독재를 걷어내는 것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진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거기에 대해 복지씨스템이 상당히 풍부한 해답을 지니고 있어요. 따라서 ‘민주화세력’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이제 ‘복지세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계층을 광범위하게 만들어내면 이것이 다른 나라에는 없었던 경로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의 민주화과정에서 얻었던 주체와 역량을 복지국가 구축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거죠.

 

이일영 글쎄요, 여태까지 민주화라는 슬로건이 갖는 역사성이나 사회적・경제적 기반들이 있고, 또 그것들이 달성되지 못한 측면들도 있습니다. 복지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문제도 있고요. 복지문제도 노동시장이나 산업구조의 문제가 다 중첩돼서 나타나고 국가와 시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지역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고요. 무상급식 공약에 대한 반응에서도 느끼지만, 이것이 교육문제와 연결됐을 때 큰 폭발력을 갖는 것이지, 만약 복지문제로만 독립적으로 제기됐다면 그렇게 이슈화되지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까 나온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에서 오는 격분이 이번 선거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지요. 기존의 정치적 민주화의 경로에서 복지 경로 쪽으로 갈아탄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오히려 문제영역을 축소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태수 복지세력이라고 해서 복지제도만 하려는 건 아니고, 거기에 걸맞은 산업, 노동, 경제, 교육 등이 모두 정합적으로 결합해 있는 복지국가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런 넓은 의미의 세력을 뜻하지요. 적어도 큰 틀에 있어서 복지국가 패러다임을 만들고 그 아래 다양한 분야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대해 동의하는 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학계나 정치계, 시민사회에서도 모일 수 있도록 큰 판을 그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모였다고 해서 그네들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복지국가 패러다임이 실현된다고 하기는 난망하다 싶습니다.

 

이일영 정치세력화하려면 정체성도 중요한 사항인데, 이름 붙이기도 중요한 일 같아요.

 

김연명 그럼 ‘민주복지세력’ 이러면 되잖아요?(웃음)

 

이일영 복지세력에 이태수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다 포괄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평화문제도 있고 특히나 동아시아에서는 국가간의 네트워크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남북간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고요. 우리가 만들어낸 복지모델이 인접지역들에 적용 가능한 것이냐 하는 점도 검토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고 또 그것을 토대로 정치세력도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거부할 수 없는 목표인데,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어떤 전략과 정책을 가지고 추진하는가 하는 거죠. 국가를 강화시켜서 그렇게 가자고 하는 것은 단순논리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반도경제’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자는 겁니다.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는,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국가, 국가단위 아래의 지역, 국가를 가로지르고 넘어서는 지역, 시장과 기업의 중간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조직 등입니다. 귀에 잘 들어오는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국가, 지역, 사회경제조직의 세 바퀴로 굴러가는 ‘세발자전거’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차원의 복지모델

 

이태수 복지국가가 한반도에서 갖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복지는 군비증강과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는 것과 복지의 발전은 선후관계를 떠나 마치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습니다. 복지 쪽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평화를 포함할 여지가 있지요. 한반도 평화공존과 복지국가 건설은 서로 동반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우리가 독재 없는 민주국가라는 것으로만 자부심을 가질 때는 지났고, 남한이 정말 살기 좋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 될 겁니다. 남북관계에서도 그런 점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도 복지국가라는 것이 한반도에 주는 의미는 뚜렷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연명 제가 몇년 전부터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하고 교류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비유럽권에서 복지국가라는 타이틀이 있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국제학회에서 한국이 복지국가의 궤도에 올랐다고 우리까지 끼워줍니다. 이건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2차대전 이후에 후진국에서 복지국가에 진입한 나라가 없어요. 아마 한국이 역사상 최초의 사례가 될 것 같고, 우리보다 조금 뒤처져서 대만 정도가 따라오는 상황이에요. 진보정권 10년간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의료보험 통합이나 기초생활보장법 같은 근대적인 제도를 수립해놓은 것은 제도적으로는 꽤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욕을 많이 먹지만, 박정희나 전두환 때 만들어놓은 산재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복지제도의 틀도 있어요.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주의자들이 복지의 틀을 갖춰놨거든요.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선진국 아닌 나라에서 유일하게 복지국가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평가해야겠지요.

또 하나는 요새 아시아경제공동체, 복지공동체 얘기를 많이 합니다. 이건 유럽공동체 경험에서 나오는 건데요, 유럽공동체가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1, 2차대전 겪으면서 하도 자기들끼리 싸우니까 이것 좀 막자고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동아시아도 과거에도 많이 싸웠고 일본 때문에 난리를 겪었잖아요. 그래서 한・중・일을 묶고 더 넓게는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경제문화공동체를 유럽공동체 비슷하게 만들자는 얘기가 오갑니다. 워낙 산업발전 수준에 격차가 커서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세계 GDP 2, 3위를 달리는 중국, 일본에 낀 우리나라가 그들과 같이 경제공동체로 묶인다는 게, 유럽에서라면 스위스 정도에 해당될 텐데, 이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살 수 있는 구조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철저하게 민족국가 단위로 그냥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지내는 게 나은 건지는 따져봐야 합니다만, 일본 측에서 아시아공동체, 경제공동체를 계속 주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먼 얘기지만 경제공동체가 되면 노동조건이나 복지수급 조건들의 차이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지공동체까지 진전될 것입니다.

 

이일영 지역공동체 관련해서는 국가 역할이 중요하죠, 공식기구니까요. 그런데 동아시아의 상황이 매우 비대칭적이라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 같아요. 일본과 중국은 거대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냥 신뢰하고 따라야 할 모델도 아닙니다. 더구나 북한에 대해서는 실패한 국가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죠. 지금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 곧 시장의 연결과 통합이죠. 이것은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 뒤처져 있습니다만, 결국 그런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복지 요소가 얼마나 포함되느냐가 동아시아통합의 질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각 국가별로 복지모델을 만들고 이를 수렴시키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것은 좀 추상적인 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국가 차원에서는 복지협력 프로젝트를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경제협력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서 복지협력의 과제를 개발해야 합니다. 지역 차원의 복지협력은 이보다 훨씬 더 쉽고 또 중요합니다. 지역간 교류는 이미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요. 복지 쪽에서 생각해보면, 지자체나 민간단체가 북한과 인도적 교류를 하는데 있어 사회써비스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역공동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국가간의 단순 합계로서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겁니다. 지역이라는 것이 국가를 배제하지 않지만, 국가와는 또다른 차원에서의 단위입니다. 지역들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데는 시민사회나 공동체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요. 이렇게 국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양한 지역이 만들어져야 통합의 질이 높아지고 그것이 실제적인 복지를 담보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안병진 그 점에서 저는 문화의식 형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지정책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공동체인지 인식하는 것이죠. 복지의 진정한 핵심은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라는 거잖아요? 그러한 세계시민적 덕성, 아시아시민적 덕성을 어떻게 형성해갈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복지를 사고하고 관련된 NGO들 사이의 연대를 기획할 때라고 봅니다.

 

이일영 예,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됐네요. 마무리하면서 짧게 한 말씀씩 덧붙여주시죠.

 

김연명 어차피 결실은 정치권에서 맺어지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복지에 대해 일단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가지고 있던 선입견도 많이 버리고요. 우리에겐 새로운 의제 아닙니까? 이런 문제도 있을 수 있어요. 국민연금기금이 특정 기업의 주식을 사가지고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어 연금관리공단이 삼성 주식 10%를 갖고 있는데 삼성 주주총회가 열린다, 가서 오너를 바꿀지 결정해야 하는데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느냐 마느냐. 이런 문제를 정치권에서 토론해서 원칙을 만들어야 해요, 하나하나에 대해서. 국민연금공단이 2009년만 해도 총 494회의 주주총회에 참석해 총 2003건의 상정안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했습니다. 이 중에는 재벌기업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재벌개혁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정치권에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못 봤어요. 지금처럼 말로만 복지국가 해서는 안되고, 새로운 의제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열심히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이태수 복지라는 것이 아직은 돈 있으면 하는 것, 하면 좋은 것, 그러나 지금은 여건이 안되어서 할 수 없는 것, 이런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요. 복지는 일상의 구체적인 밑바닥 현실에서부터 우리 사회 거시적 구조까지, 나아가 국가의 성격까지 바꿔낼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더 정교한 마스터플랜을 짜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실행전략 등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지식인들의 몫을 너무 크게 그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방아쇠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적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안병진 지금은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이냐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대격돌을 하는 상황이고, 시장의 합리화와 공공성의 확대는 함께 추진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파든 좌파든 이 점에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요.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고 그것이 비단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게 아니라 자기 이익에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각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각성이 지식인적이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날 한국시민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습니다. 집단지성의 방식으로 되어야 하고, 그 집단지성의 거대한 운동들이 확대된다면 정당도 바꿔낼 수 있는 압박의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올해, 내년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일영 복지라는 것은 상태인 동시에 지향해야 할 목표이자 과정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서 여러가지가 갖춰져야 하는데, 성장과 분배, 재정문제, 이런 것들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요.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방안이 근본적으로 폭넓게 검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복지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요소 중에 산업구조에서 발생하는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민주주의 문제는 지역격차·교육격차와 중첩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런 과제들을 복지국가라는 틀에 가두지 말고 근본적으로 함께 검토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동아시아나 남북한 차원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복지를 국가 역할의 확대로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시장확대가 불가피한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환경조건에 맞는 새로운 복지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2010728일, 서교동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