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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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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1964년 경기 용인 출생. 2003년 『문학동네』로 등단. 장편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있음. chun_kwan@hanmail.net

 

 

 

봄, 사자(死者)의 서(書)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죽음의 시간이구나! 비로소 육신을 벗어던진 영혼은 바람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무엇이든 생전 마음에 와닿는 일 드물었으나 이제 자유로운 영혼은 활짝 열린 하늘처럼 모든 것을 품어 안는다. 아무것도 부딪치는 법 없고, 아무것도 거스르는 일 없이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은 창세(創世)의 모습 그대로 넉넉하구나. 수십억년 거듭되어왔으나 한번도 궤도를 벗어난 적 없던 태양은 황도(黃道)를 따라 운행하다 동쪽 하늘을 모두 태워버릴 듯 세차게 타오르며 어둠속에 느른하게 잠들었던 만물을 하나씩 일으켜 세운다.

 

사내는 잔디밭에 누워 있다. 벗어던진 구두 한짝은 발치에 나뒹굴고 이슬에 젖은 회색 양복은 잔뜩 구겨진 채 여기저기 짙은 풀물이 들어 있다. 밤새 까뭇하게 자라난 수염은 턱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깡마른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인가? 무방비로 벌어진 입가엔 아직 토사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밤새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찡그린 눈가엔 눈물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공원 너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시끄러워지면서 공원에 내리쬐는 햇볕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간다.

꿈틀, 소나무 아래 죽은 듯 누워 있던 사내가 추위를 느끼는지 부르르 몸을 떨며 목을 잔뜩 움츠린다. 입에선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도 새어나온다. 이때 붉게 물든 동쪽 하늘에 불쑥, 불덩어리 하나 솟아오르면 구름의 꿈을 품은 안개가 바닥을 차고 서서히 비상하기 시작한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날카로운 햇빛은 사내의 눈꺼풀을 꿰뚫듯 내리쬔다. 악몽이라도 꾸었을까? 잠결에도 한사코 팔을 들어 해를 가리던 사내는 어느 순간 신음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여기가 어디지? 생경한 녹색의 풍경에 맞닥뜨린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하지만 곧 의식이 되돌아오자 잊고 있던 현실이 찾아온다. 짧은 망각 뒤에 더 억센 힘으로 옥죄어오는, 아무리 힘주어 밀어내봐야 단 일밀리미터도 도망칠 수 없는! 매일 되풀이되는 절망과 무기력 앞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머리를 감싸쥔다. 그것은 연극배우의 상투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누군가에게 밤새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토할 수 있다면 모두 토해내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간밤의 어느 골목, 어느 가로등 밑에서인지 여러번 질펀하게 토한 끝이라 더이상 보여줄 게 없다. 몇번의 헛구역질 끝에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간주나무 위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참새들을 노려본다. 그래서 새들이 잠시 울음을 멈추었을까? 아니면 사내의 절망적인 눈길을 피해 달아났을까? 봄볕이 내리비치는 공원은 생명의 조화로 가득 차 있지만 새들은 결코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비웃듯 나뭇가지를 옮겨가며 더욱 시끄럽게 지저귄다.

짹짹!

 

사내는 발치에 나뒹굴던 구두를 겨우 꿰어 신고 비척비척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검은색 레깅스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산책로를 따라 뛰어간다. 짧은 다리로 어기적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매우 희극적이지만 그는 웃지 않는다. 고통을 웃음으로 대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공원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간밤에 어쩌다 공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잔디밭에서 잠들었는지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하지만 숙취로 흐리멍덩해진 머릿속에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다시 위장이 뒤틀린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구역감을 애써 참느라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다. 그는 연분홍 철쭉이 만발한 산책로를 따라 걷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는다. 하지만 손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당황한 그는 양복에 달린 모든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던 일회용 라이터만 손에 잡힐 뿐이다.

 

빨리 공원을 빠져나가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하다. 수십년간 영혼을 사로잡힌, 숱한 슬픔과 바꾸어낸, 씁쓸하고 치명적인!

새들은 더욱 요란하게 지저귀고 사내는 일어설 생각도 않은 채 벤치에 기대앉아 라이터만 찰칵거린다. 그의 눈길은 산책로를 따라 운동하는 사람들의 뒤를 무심하게 뒤쫓다 방금 물감을 짜낸 듯 선명한 연분홍 철쭉에 잠시 머문다. 봄날, 생명의 약동으로 소란스런 공원은 시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눈엔 왠지 잡지광고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게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은? 술에 찌든 몸과 담배 한갑 없는 빈 호주머니? 사내는 어디서든 푹신한 이불을 덮고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난 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깔끔하게 면도도 하고 싶다. 그런 다음 설렁탕도 한그릇 먹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는 여전히 라이터를 찰칵거린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내는 자신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때,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단단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그의 앞을 지나쳐 달려간다. 절망과 관능이 뒤섞인, 찬연한 봄날이다.

 

잠시 후, 그는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지만 공원은 그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초췌한 몰골에 구겨진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시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봄 햇살이 그의 지친 등에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이윽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그의 축축한 머리를 스쳐간다. 속이 가라앉으며 몸도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고 그는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른다.

어어!

당황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놓친다. 내 라이터! 황급히 손을 뻗어보지만 라이터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그의 몸은 소나무 꼭대기를 지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현기증이 난 그는 질끈 눈을 감았지만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민들레 꽃씨처럼 가벼워진 느낌이다. 두려움이 조금 가시자 그는 눈을 뜨고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처럼 공원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조감도인 듯 공원의 색채는 선명하고 산책로를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작아진다. 그는 문득 메슥거리던 속이 편해지고 지끈거리던 두통도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도, 푹 자고 싶다는 바람도, 따뜻한 목욕물과 설렁탕……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늘을 나는 동안 낮게 떠 있는 뭉게구름이 시야를 가리며 눈 아래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그는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아무런 감각도, 아무런 욕망도 없는 거지?

 

*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어설픈 듯 조심스러운 소리는 끊길 듯 이어지며 사내의 잠 속으로 날아든다. 아마도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요즘 들어 사내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낮에 거실 쏘파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내는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다. 점점 더 야위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늘 시멘트벽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서로 대화가 끊긴 지도 오래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그의 집엔 커다란 균열이 생겼지만 그는 그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다. 틈새는 컴컴한 어둠에 잠겨 있고 그 안에선 피에 굶주린 악령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내는 그 틈새가 점점 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가족을 모두 집어삼키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거실 쏘파에 누워 잠든 봄날 오후, 희미하게 들려오는 딸애의 피아노 소리는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세상을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아빠?

누군가 사내의 어깨를 흔든다. 눈을 뜨니 교복을 입은 딸애가 가방을 메고 천사처럼 서 있다. 잠결에도 그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어, 학원 가니?

응. 근데 우리 이사가?

누가……그래?

엄마가.

그래. 아마 그럴 거야.

사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얼버무린다. 집을 내놓은 건 지난주의 일이다. 알량한 스물네평 아파트 한칸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어디로?

아직 몰라.

나 전학가기 싫은데……

딸애는 입을 삐죽 내민다. 아이의 교복치마는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나 있다. 치마를 짧게 입는 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그런데 치마를 꼭 그렇게 짧게 입어야 되니?

난 짧은 것도 아냐. 딴 애들은 더 짧아.

그래도 아직 쌀쌀한데 감기 걸리려고……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무심코 담배를 찾다 자신이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따 데리러 올 거야?

그럴게.

알았어. 그럼 이따 봐, 아빠.

딸애가 통통거리며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자, 사내는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딸애는 아직 집안에 생긴 균열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틈새를 감출 수 있을까? 잠결에도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그는 빈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에 빠져든다.

 

*

 

축축한 물비린내가 코에 감겨든다. 사내는 눈을 뜬다. 물안개에 뒤덮인 저수지가 눈앞에 고요히 펼쳐져 있고 하늘엔 거짓말처럼 커다란 달이 둥실 떠 있다. 지금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중음(中陰)의 시간은 제멋대로 흐른다. 나중 된 것이 먼저 오고 먼저 온 것이 나중 되는 궤설의 시간이다. 의식은 여전히 또렷하지만 몸은 춥고 마음은 쓸쓸하다. 그는 둥근 달이 떠 있는 저수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 여전히 빈손이다.

그런데 물 위에서 빛나는 저 작은 물체는 뭐지? 물 가까이 고개를 내밀어보니 야광찌 한개가 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발치엔 낚싯대가 하나 놓여 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낚시터에 와 있음을 깨닫고는 헛헛한 웃음을 짓는다.

 

낚시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결혼한 지 십년째 되던 해부터였다. 동행도 없이 언제나 혼자였다. 물고기를 잡는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집을 떠나 물가에 홀로 앉아 어둠속에서 빛나는 야광찌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좋았다. 축축한 밤의 공기와 그 속에서 피우는 담배 맛도 좋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앉아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기분도 근사했고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와 그 아래에서 마시는 소주 한잔의 맛도 좋았다. 난파된 배에 실려 한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기분, 기나긴 항해 끝에 찾아온, 고요하고 묵직한, 밑바닥의 평화……

 

저수지 가장자리엔 드문드문 연꽃이 피어 있다. 진흙탕이 너무 깊어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썩어 악취를 풍기는 그의 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흰 연꽃은 달빛 아래 눈부시다. 구천을 떠돌던 영혼은 이제 눈물 나는 속계를 떠나 마침내 정토(淨土)에 들어선 것인가?

깜박, 야광찌가 순식간에 물속에 잠겨 사라진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낚싯대를 잡아챈다. 타이밍이 나쁘지 않다. 낚싯줄 저편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생명의 신호! 절박하게 퍼덕이며 탈출의 몸부림으로 꿈틀댄다. 하지만 사내는 서두르지 않는다. 날카로운 미늘은 이미 녀석의 주둥이에 단단히 박혔을 것이다. 그는 낚싯대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기슭으로 조금씩 끌어낸다. 푸드득! 드디어 물고기가 몸체를 드러낸다. 팔뚝만한 황금빛 잉어다. 사내는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마침내 잉어를 손으로 잡아 올린다. 씨알이 꽤 굵다. 잉어의 몸통은 매끄럽고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다. 사내는 배가 고프지만 잉어를 먹을 생각은 없다.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은 잉어회를 먹고 배탈이 나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데…… 사내는 뻐끔거리는 잉어의 작은 입을 들여다본다.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사실일까?

푸드득, 어느 순간 손에 있던 잉어가 몸을 뒤채자 생경한 이물감에 놀라 사내는 잉어를 손에서 놓친다. 잉어는 물속을 헤엄쳐 쏜살같이 사라진다. 그는 저수지에 허탈한 빈손을 담가 비린내를 씻어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크게 일렁인다. 커다란 연잎과 저수지 가장자리에 핀 부들이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뒷산에선 나뭇잎 서걱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여기는 분노한 신들의 바르도(bardo, 중음)인가? 불꽃에 싸인 채 피를 마시는 악령들의 들끓는 소리가 사내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거센 바람과 함께 갑자기 천지간을 분간할 수 없이 저수지 일대가 어둠에 잠긴다.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입엔 재갈이 물려진 듯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싼다.

잠시 후, 가까스로 시야가 밝아지며 사내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닫는다. 다름아닌 저수지, 깊은 물속이다. 수초가 물결에 일렁이고 작은 물고기들이 그를 피해 달아난다. 물속은 어둡지만 시야는 더욱 넓어져 하늘에 떠 있는 이지러진 달과 저수지 바닥에서 노니는 남생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잉어로 다시 태어난 건가? 그는 자신의 몸을 보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아뿔싸! 이건 악몽이다. 황망한 기분에 이리저리 몸을 뒤채자 흙탕물이 일어나 눈앞을 가린다. 그는 미친 듯 빠르게 헤엄쳐 순식간에 기슭에 다다른다. 밤새껏 울어대던 개구리들이 난데없는 소란에 놀라 펄쩍, 뭍으로 달아난다. 하지만 그는 저수지를 벗어날 수 없다. 눈앞이 캄캄하다. 좁은 저수지 안에서 어떻게 평생을 견뎌야 할지! 재수없으면 자신보다 더 큰 물고기의 한끼 식사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재수없으면 주말 낚시꾼의 한순간 즐거움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염마(閻魔)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나를 잉어로 환생케 했는지, 이유라도 묻고 싶다. 그러니 저승의 강을 지키는 뱃사공 카론이여! 나를 건네줄 배는 어디 있느냐?

사내는 목 놓아 울어보지만 가슴만 먹먹해질 뿐 작은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

 

으아!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하지만 여전히 등골이 서늘하다.

왜 그래?

옆에 누운 아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묻는다.

악몽을 꿨어.

무슨 꿈?

내가 잉어로 변해서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꿈.

쳇. 그렇게도 낚시 좋아하더니…… 그래, 물고기 된 기분이 어땠어?

어둡고 무서웠어. 답답하고……

사내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침대에 기대 양손으로 무릎을 감싼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나도 물고기처럼 내 멋대로 한번 돌아다녀봤으면 좋겠다.

아내는 건성으로 응대하며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는데 어디가 아픈지 입으로 끙 하며 신음소리를 낸다. 그녀의 단단했던 뼈에도 이제 조금씩 구멍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잠시 후, 그녀는 흐벅진 엉덩이를 허옇게 드러낸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든다. 어둠속에서 그는 여전히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쥐고 있다.

생각해보면 물고기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속은 자유롭고 편안하며 변화가 없다. 매연을 맡아가며 지상에서 아옹다옹 살기보다 못할 것도 없다.

물속을 투과한 달빛은 검은 진흙으로 뒤덮인 저수지 밑바닥을 내리비추고, 사내의 눈앞엔 검푸른 수초가 어른거린다.

 

*

 

빵빵!

등 뒤에서 경적이 울린다. 사내는 퍼뜩 눈을 뜬다. 자동차가 멈춰서 있는 동안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앞 차의 꽁무니가 십여미터쯤 앞으로 달아나 있다. 사내는 허겁지겁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차들은 더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일제히 브레이크등을 밝히며 정지한다. 모든 아침이 그렇듯 도로는 어느새 주차장으로 변하지만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동차들은 갓 부화한 바퀴벌레들처럼 꾸역꾸역 기어나오고 있다. 그는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도시로 밀려드는 자동차 행렬에서 늘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자기 몸무게의 스무배가 넘는 쇳덩어리를 힘겹게 끌고 가는, 정체도 모르는 공포에 영혼을 빼앗긴, 좀비들의 거대한 행렬!

사내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담배를 찾는다. 하지만 담뱃갑은 텅 비어 있다. 젠장! 그는 빈 담뱃갑을 구겨 뒷좌석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글러브박스를 뒤져보지만 결국 차 안에 한개비의 담배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입안은 깔깔하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갑갑한 마음에 그는 차창을 내리며 힐끗, 옆 차선을 돌아본다. 한 남자가 음울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기대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지친 눈빛에선 아무런 열정도, 아무런 희망도 읽을 수가 없다. 길가에 조성된 화단엔 핑크색 써피니어가 요란하게 피어 있지만 운전자들은 아무도 화단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차들은 아예 도로에 붙박인 듯 움직일 기미가 없고 라디오에선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너 때문에 많이도 울었어

너 때문에 많이도 웃었어

너 때문에 사랑을 믿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모두 다 잃었어

정말 답답답해 갑갑갑해 막막막해

너 없는 세상이

내 말을 씹어놓고 자존심 짓밟아놓고

내 맘을 찢어놓고 왜 나를 떠나가

 

소녀들은 악을 쓰며 노골적인 가사를 내뱉는다. 그 나이에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막막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사내는 이제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사랑을 믿지도 않는다. 꿈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다. 그저 세상살이에 씹히고 짓밟히고 찢겼을 뿐이다. 댄스곡이 끝나고 조용한 발라드가 흘러나오자 심장박동이 점차 느려진다. 창밖에서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하고 막막한 봄날 아침, 밀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다시 눈을 뜨자 거짓말처럼 도로가 뻥 뚫려 있다. 사내는 언제나 부서져라 힘차게 밟고 싶었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부앙! 거친 엔진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간다. 그러고 보니 도로엔 단 한대의 자동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도시를 빠져나온 듯 아파트나 빌딩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눈 깜박할 사이에 속도계는 시속 200km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속도감도 느끼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도 멈추고 귓가엔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자동차는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고 있지만 마치 성간우주(星間宇宙)를 유영하듯 지면에선 아무런 저항도 없다. 그러는 동안, 정말 답답답하고 갑갑갑했던 그의 마음은 어느새 뜨거운 오븐 안의 버터처럼 부드럽게 녹아 있다.

마약에 취한 듯, 그는 나른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본다. 쏜살같이 달리는 차 안에서도 길가의 모든 풍경과 움직임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꽃을 찾아 화단 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꿀벌들의 날갯짓과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풀의 흔들림, 도로변에 서 있는 표지판의 글씨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대로 어디론가, 내히 이러 바라래 가듯이, 한없이 흘러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너른 바다에 이르러 둥실둥실 떠다닐 수 있다면, 거대한 참치는 아니더라도, 등 푸른 고등어가 아니더라도, 겨우 멸치라도 되어, 이왕이면 씨알이라도 굵은 멸치가 되어, 단 하루라도 마음껏 헤엄쳐 다닐 수 있다면! 그렇게 망망대해 헤엄치다 지쳐, 얼굴 검게 그을린 어부의 질긴 그물에 걸려, 어기영차, 어부들 그물 터는 소리에 내장과 함께 가슴에 맺힌 한 모두 털려, 끓는 소금물에 후줄근한 육신 깨끗하게 삶아져, 무자비한 햇볕에 은빛 비늘 반짝이며, 그렇게 한 며칠 바짝 말려져, 고소한 기름에 달달 볶여,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이리저리 뒤채이다, 한 젓가락 밥반찬이 되어, 한 아이의 앙증맞은 어금니에 아작아작 씹혀, 그렇게 누군가의 뼈가 되었으면, 그렇게 누군가의 손톱이 되고 머리카락이 되었으면!

사내는 이제 운전대에서 아예 손을 놓은 채 담배연기처럼 뭉실뭉실 떠가는 붉은 구름을 올려다본다. 어느덧 지평선 저 멀리엔 노을이 지고 사위는 더없이 고요하다.

그런데 이 차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지? 오리시스의 심판대?

 

*

 

사내의 영혼은 아직 중유(中有)를 떠돌고 있다. 술 취한 뒷골목, 왁자한 선술집에서 그는 다시 깨어난다.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벌겋게 취한 얼굴들이 보인다. 좀비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비굴한 미소와 주눅든 표정은 저 멀리 집어던진 채 그들은 매운 음식과 독한 술로 잠시 빼앗긴 영혼을 되찾아온다.

이날은 누군가 해고통지를 받은 날이다. 동료들은 불운이 자기를 비껴간 데 대한 안도감을 애써 감추며 해고된 직원의 어깨를 두드린다.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하지만 그들은 잘될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고된 남자는 아마도 보험회사나 건강보조식품, 또는 연료절감제를 판매하는 회사에 다시 취직할 것이다. 그리고 옛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굴욕감을 애써 감춘 채 구매나 가입을 부탁할 것이다. 한두번이야 도와줄 수 있지만 그들의 우정은 거기까지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한번 거치고 나면 그는 더이상 갈 곳이 없다. 결국 찜질방이나 경마장, 공원 등지를 배회하며 빠르게 몰락해갈 것이다.

사내는 취한 눈으로 술집 안을 둘러본다. 업무가 끝난 뒤에 일과처럼 늘 찾던 장소지만 그의 눈엔 이제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진다. 카운터에서 돈을 받는 여주인의 얼굴도 낯설고 동료들의 얼굴도 낯설다. 회사를 십년 넘게 다니는 동안 언제나 아슬아슬한 기분이었고 언제나 일탈을 꿈꿨지만 한번도 대열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그리고 뭐가 잘못된 건지 알고 싶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는 답답답하고 막막막한 기분에 소주잔을 든다.

사내는 단숨에 잔을 비운 후, 고개를 든다. 뜻밖에도 맞은편 의자엔 낯선 중늙은이가 한명 앉아 있다. 한눈에도 행색이 추레해 보이는 남자는 공사장 인부들이 쓰는 작업모를 눌러쓰고 있다.

누구지? 사내는 취한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은 남자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다. 오래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동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동료들뿐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모두 사라져 텅 빈 술집엔 그와 아버지, 둘만이 남았다. 아버지는 담담한 미소를 띤 채 편안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생전에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술 한번 마신 적이 없었는데,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아버지 앞에 놓인 잔에 공손히 술을 따른다. 아버지는 말없이 술잔을 받아 단숨에 입에 털어넣은 후, 안주도 집지 않고 담배만 한모금 길게 빨아 연기를 내뱉는다. 사내의 눈길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앞에 놓인 담뱃갑에 머물자 아버지는 선선히 담배를 한개비 꺼내 그에게 건넨다.

아니, 괜찮습니다.

사내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사양한다.

괜찮아, 이녀석아.

저, 괜찮다니까요.

사내는 다시 사양을 하지만 아버지는 손을 물리지 않는다.

글쎄, 괜찮다니까.

두 사람은 서로 괜찮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인다. 생전에 엄격하기 그지없던 아버지지만 이 순간은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사내는 끝내 아버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받아든다. 담배를 건네는 아버지의 손엔 굵은 마디가 툭툭 튀어나왔고 검지 하나는 반 넘게 잘려나가 한마디만 겨우 남아 있다. 일하던 중에 사고를 당한 검지 끝은 손톱도 없이 뭉툭하게 아물어 이제는 다시 굳은살이 박였다. 사내는 아버지의 손가락을 볼 때마다 민망한 기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는 자신의 희고 멀쩡한 손이 미안해 재빨리 담배를 받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불을 붙인다. 담배연기가 폐에 가득 들어차자 가슴이 뻐근해진다.

 

부자는 텅 빈 술집에 단둘이 남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다. 아들은 자꾸 아버지를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아버지는 기나긴 세월의 고통과 회한이 아로새겨진 주름 깊은 눈으로 아들을 건너다본다. 그는 아버지에게 뭔가 묻고 싶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자꾸만 목이 메고 가슴이 갑갑해온다. 생각 같아선 아버지 앞에 엎디어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지만 그도 이젠 머리가 희끗해져가는 나이다. 아무 데서나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도 별 말 없이 조용히 소주잔을 비워낸다.

아버지……

이윽고 담배를 피우던 그가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불러본다.

왜?

아버지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어떠세요?

뭐가, 이놈아?

그냥요.

그는 자꾸만 목이 멘다.

그냥 뭐?

그냥…… 지낼 만하시냐고요.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아들인 후,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린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애써 누르며 흐느끼는 애절한 울음이다. 환청인가? 사내는 눈을 뜬다. 넓은 방안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서너명씩 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상 위엔 먹다 남은 홍어회와 눌린 돼지머리, 소주병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사내는 무거운 공기 중에 떠다니는 희미한 향냄새를 감지한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왔다 술을 마시고 바닥에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밤늦은 시간인 듯 한무리의 문상객이 자리를 뜨자 겨우 예닐곱명만이 남아 자리를 지킨다.

근데 왜 이렇게 춥지? 사내는 오슬오슬한 한기를 느끼며 자신의 상 앞에 놓인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다. 뱃속이 금세 뜨뜻해지며 한기가 조금 가신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는 사람이 없는지 접객실 안을 둘러보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대학동창을 한명 발견한다.

저 친구도 이젠 맛이 갔구먼. 머리가 다 빠진 후줄근한 꼬락서니 하고는……

사내는 동창을 향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하지만 동창은 사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가려다 분향실 입구에 상복을 입고 서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어라,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내는 비척거리며 분향실 쪽으로 걸어간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아내의 얼굴은 간염환자처럼 노랗게 질려 있고 눈꺼풀은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힘겨운 표정이다. 사내는 아내를 향해 다가가다 문득 분향실 안을 들여다본다. 자석에 끌리듯 향냄새 가득한 분향실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국화꽃 앞, 죽은이의 영정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사내의 동공이 크게 열린다. 그리고 등허리가 쭈뼛하는 섬뜩한 전율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다. 영정 속의 사진은 바로 사내 자신의 얼굴이다.

 

이때, 한무리의 문상객이 분향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의 동료들이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때 자신의 부하직원이던 사내가 향을 피우기를 기다려 다같이 절을 한다. 한번, 두번,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반절…… 사내는 직원들 앞으로 다가가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엄청난 혼란에 빠진 그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일행이 몰려나가자 향내 자욱한 분향실 안엔 사내와 그의 영정만 남는다. 오래된 사진인 듯 영정 속의 사내는 아직 머리카락이 빳빳하고 눈동자가 또렷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의 환영일 뿐 그의 영혼이 돌아갈 수 있는 육신이 아니다. 사내는 문득, 분향실 옆 쪽방에서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을 발견한다.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지쳐 잠든 딸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다. 내 생의 증거, 나의 피, 나의 카르마여! 나는 차마 팔을 들어 그대를 안을 수 없구나.

사내는 마침내 한없는 비탄을 견디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온다. 사람들 곁을 스쳐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는다. 그는 좁고 어두운 지하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사내의 영혼은 슬픔과 분노에 미쳐 날뛴다. 끝없는 공허와 허기를 견디지 못해 미친 듯이 거리를 이리저리 내달린다. 그가 다니던 회사 앞 버스정류장과 일과가 끝난 뒤에 자주 들렀던 술집 골목, 아내와 함께 걸었던 고궁의 너른 마당을 질주한다. 마치 쥐약을 삼킨 개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을 아무 데고 내던진다. 빌딩 벽에 부딪치고 버스를 향해 돌진한다. 강시(屍)가 된 몸뚱이가 산산조각나기를 바라면서, 육신이 바퀴 밑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를 가로지르지만 이미 육신에서 놓여난 영혼은 아무런 흔적도, 아무런 고통도 없다.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했던가? 빌딩들 사이에서 왜소하게 울부짖는 사내의 혼백은 부서지지 않고 더욱 단단하게 뭉쳐져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난다.

 

*

 

어느 기차역 대합실 안, 사내는 의자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대합실 의자 여기저기엔 노숙자들이 흩어져 잠들어 있다. 한 노숙자가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지만 사내의 의식은 이미 화면을 떠나 있다. 텔레비전 속엔 아무런 슬픔이 없다. 젊음과 시한 육체, 액션히어로와 해피엔딩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사내가 중유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 텔레비전에서 뉴스화면이 비친다. 술에 취한 채 공원에서 잠들었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한 취객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화면은 공원의 풍경을 비추고 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을씨년스런 산책로와 누런 잔디밭…… 어딘가 눈에 익은 장면이다. 마이크를 든 젊은 여기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동사한 오십대 남자는 삼년 전 실직한 이후 가족과 떨어져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해오던 중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면접시험 보듯 또박또박, 전한다. 사내는 화면에 나오는 산책로 옆 벤치에 시선이 멈춘다. 벤치 아래엔 일회용 라이터가 하나 떨어져 있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합실을 걸어나온다. 그가 의자를 비우자 노숙자 한명이 재빨리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머리가 희끗한 사내 또래의 남자다. 잠시 의아한 듯 돌아보자 노숙자는 꺼질 듯 희미한 눈동자로 사내를 건너다본다. 한없이 슬프고 공허한 눈빛이다. 사내가 밖으로 걸어나오자 역사 불빛에 만들어진 그의 구부정한 그림자가 광장을 길게 가로지른다.

 

사내의 영혼은 이제 구만리장천을 날고 있다. 크고 억센 날개가 그의 깡마른 몸뚱이를 움켜쥐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흙에서 흙으로,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명부(冥府)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사내는 화석연료로 환하게 밝혀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거대한 빌딩 숲과 아파트 단지, 그 사이로 난 도로를 내려다본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도로는 또다른 도시를 향해 끝도 없이 길게 뻗어 있다. 사내는 서서히 지상으로 강하하며, 모래알처럼 뱃속을 가득 채운 슬픔과 고통스런 스, 끝없는 허기와 막막한 어둠을 이불 삼아 잠든 도시를 내려다본다. 여기는 또다른 삼악도(三惡道), 억센 날개와 단단한 비늘 없이 알몸으로 건너야 하는 거대한 스틱스의 강물이다. 사내는 자신이 처음 떠났던 공원, 포근한 잔디밭에 내려앉는다.

 

사위는 아직 어둠에 잠긴 채다. 사내는 잔디밭에 엎어져 잠든 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발치엔 구두가 한짝 벗어져 나뒹굴고 주름진 눈가엔 눈물자국이 허옇게 남아 있다. 물끄러미 죽은 남자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자신이 이미 명부로 떠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곤 암담한 슬픔이 목에 가득 차오른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언덕 저편에 커다란 들개 한마리가 나타나 이편을 건너다본다. 비루먹은 듯 듬성듬성 털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몰골이 잔디밭에 엎어져 죽은 남자를 닮았다. 들개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데 퀭한 눈이 플래시 불빛처럼 어둠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인다.

공원에 왜 난데없이 들개가 나타난 거지? 들개는 동이 터올 때까지 나무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하다 사위가 붉게 물들어 사물의 윤곽이 뚜렷해질 즈음 하늘을 향해 크게 한번 울부짖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사내는 들개가 어슬렁거리던 언덕을 바라본다. 저것은 저승을 지키는 사나운 개 케르베루스인가? 아니면 죽은 남자의 가엾은 영혼인가?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여기는 꽃도 피지 않는 오랑캐 땅이더냐? 불어오는 찬바람에 누런 잔디는 힘없이 흔들리고 쓸쓸한 공원 어디에서도 생명의 기운을 찾을 수 없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진리의 몸, 그 불가사의하고 무한한 빛은 이렇게 새벽안개 속에서 쓸쓸히 스러지는구나. 흙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물은 불 속으로 가라앉고 불은 공기 속으로 가라앉고 공기는 의식 속으로 가라앉는 죽음의 시간이다.

사내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흉노의 땅에 끌려간 왕소군의 슬픔이 이와 같을까, 절절한 슬픔은 하늘에 닿고 어느 순간 울고 있는 사내의 목덜미에 선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때 아닌 함박눈이 아카시아 꽃잎처럼 난분분, 바람에 날려온다. 사내는 울음을 멈추고 때늦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솜처럼 부드러운 눈은 하염없이 내려와 소나무 아래 죽어 잠든 사내의 육신을 이불처럼 하얗게 덮어준다.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없는 빛의 길에서 붓다들과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여, 나를 인도하소서. 옴 마니 밧메 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