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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문제성과 현재성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국문학. 주요 논문으로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등이 있음. pilsotm@inha.ac.kr

 

 

1. 들어가며

 

『창작과비평』(이하 『창비』)2000년대 이후 문학론을 선도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분단체제론’ ‘동아시아론’ ‘87년체제론’ 등 위세높은 ‘창비담론’ 속에서 명실상부한 창비의 문학담론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 원인이 『창비』에 있는지 ‘문학’ 자체에 있는지를 가늠할 식견이 내게는 없다. 즉 이것은 『창비』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주도적인 문학론을 창출했다는 뜻과는 무관하다. 『창비』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문학론의 약화가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는 말이다. 국외자의 이러한 인상이 사실이라면, ‘민족문학’의 거점이던 『창비』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탐문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선을 백낙청(白樂晴)에게로 먼저 돌리게 된다. 지난 시절 『창비』를 대표하는 민족문학론을 정립한 당사자이면서 분단체제론이라는 대표적 창비담론의 창안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체제론을 제안한 이후로 『창비』의 독자적 문학론이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보자면 문학론 약화의 일차적 이유가 백낙청에게 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백낙청의 행적은 『창비』의 긴 시간대에 거의 대부분 걸쳐 있으므로 『창비』의 문제에 백낙청을 우회하여 접근하기는 어렵다. 근자에 들어 백낙청 스스로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문학비평의 현장에 개입하는 사정을 감안할 때 백낙청을 통해 창비』 문학론의 현주소를 더 적실하게 가늠할 수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창비』 나름의 문학론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90년대 한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란을 주도한 곳이 『창비』였다. 이른바 근대성 담론과 결부되어 자못 진지하고 열의에 찬 문학론들이 개진되었다. 그러다가 리얼리즘/모더니즘의 해소론이 제기되고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의 시정을 촉구하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비』 또한 새로운 문학론의 정립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창작되는 작품의 양상들이 기존 『창비』의 문학론에 그다지 우호적인 방향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창비』의 문학론 자체가 분명한 경향성을 드러내지 못한 듯하다. 비교적 현재까지 이러한 양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며 백낙청의 문학론을 다시금 살필 것이다. 다만 그 특성과 변모의 과정이 함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민족문학론에 대한 개괄적 논의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2. 특이한 ‘문학주의’—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의 문학론

 

‘민족문학’은 분명 60~70년대 민족운동의 산물이다. 민족사학(史學)이나 민족경제론 등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견인한 주요 동력이었다. 그렇지만 그 근본에서 보자면 민족문학론은 여타의 민족운동과 구별되는 특이한 자리에 놓인다. 민족경제론이 자주적 자립경제를 지향하고 민족사학이 자주성이 실현되는 시대를 추구할 때, 여기엔 도래할 미래를 예비하는 현재의 기획이 작용한다. 반면 민족문학론은 ‘민족적인 것=문학적인 것’에 근거한다. 민족사학이나 민족경제론에서 확인되는 ‘선진(先進)을 따라잡기 혹은 추월하기’의 염원이 민족문학론에서는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전반적 양상이 후진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 속에 이미 ‘민족문학’의 범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용운의 문학적 성취가 카프카나 까뮈보다 선진적이라는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1 민족문학은 현재를 바꾸어 새로운 미래를 만듦으로써 획득된다기보다,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데서 등장한다. 민족사학이나 민족경제론과 달리 민족문학론은 늘 현재적 작업이어야 한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문학은 그 도정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 그 자체가 민족적 선진성과 세계적 동시대성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며, 그러한 문학의 이름이 ‘민족문학’일 뿐이다.2

민족문학은 민족의 다양한 활동영역 중 하나지만, 우리 민족이 자주성의 실현을 감당할 만한 자격을 이미 갖추었음을 보증하는 역할도 한다. 민족문학을 통해 민족적 현실에 내재하는 선・후진적 다양성의 측면들을 잘 분별하는 인식능력도 구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는 데도 필요하지만 과제를 달성한 이후에도 필요한 자질이다. 따라서 민족문학의 창조성은 처하는 순간마다 실현되어야 한다. 민족문학이 다른 더 고상한 무엇에 복무하는 수단일 수 없고, 다른 사안의 급박성 탓에 유예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민족문학을 단순히 ‘민족의’ 문학으로 치환할 수는 없다. 민족문학이 ‘민족’에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민족문학의 ‘문학(적 창조성)’이 민족(적 현실)을 규제할 수도 있다. 훗날 백낙청 스스로가 자신이 “꽤 완고한 문학주의자”3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렇게 볼 때 민족문학의 ‘문학’은 민족이라는 제약을 넘어서기도 한다. 민족적 활동 및 현실의 일부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간 다양한 민족문학론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정답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비판하면서4 백낙청 자신의 민족문학론은 정답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도 이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결국 ‘민족문학’이 ‘민족’과 ‘문학’ 어느 한쪽으로 귀착되지 않는 긴장을 내포한 개념으로 이해하게끔 만든다. ‘민족문학’이 논쟁적 개념이고 따라서 한시적으로 유효한 개념이라는 말은,5 ‘민족문학’ 자체의 용도 폐기 여부보다는 ‘민족’과 ‘문학’ 사이의 긴장어린 관계설정 방식을 재정립하는 작업을 뜻한다. 분단체제론의 전개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듯이, 민족문학론의 ‘민족’은 “발전을 내포한 연속성”을 띠면서 분단체제론으로 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은 “한민족과 한반도 주민”으로 함의가 바뀌었다. 민족문학론의 사회(?)담론으로의 전환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겠지만6 ‘민족’(분단체제론)과 헤어진 ‘문학’의 자리는 아직 모호하다.

민족문학의 한 측면(‘민족’)이 분단체제론으로 전화되었다면, 민족문학 이후의 문학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 되어야 마땅하다. 애초에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이 향하는 것은 “‘민족’ 개념이기보다 전지구적 현실인식이요 이에 따른 국지적 행동의 필요성”이고,7 “한민족과 한반도 주민들의 경우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중간항의 비중이 결정적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분단체제론은 “세계체제, 분단체제, 남한 또는 북한의 체제”라는 세가지 다른 차원을 내포한 것이며, 남북의 주민과 정부의 작용까지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다원고차방정식”에 가깝다.8 그러므로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 또한 다원고차성에 조응하는 문학이어야 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세가지 차원의 체제가 작용하고 그에 조응하여 다양한 문제와 노선이 존재할 수 있다.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주장할 당시 백낙청은 ‘계급담론’ ‘생태계(환경)문제’ ‘여성운동’ 등을 거론했고, 이후에 다시 생태계 보존, 성차별 철폐, 전지구 차원의 빈곤 해소, 자본주의의 반문학성에의 저항 등을 통해 문학담론의 다원화 현상을 지적했다.9 여기에다 성적 소수자, 디아스포라, 이주노동자 등을 추가할 수 있고 거기에 다시 적잖은 항목을 덧붙여도 무방해 보인다. 앞으로 더 늘어나기 십상인 문제항목들 앞에서 백낙청이 주장하는 바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연대의 필요성이었다.

다원화된 담론이 분단체제의 제약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분단체제론이 그 모두를 통합할 수는 없다. 백낙청도 애당초 분단체제극복운동이 다른 여타의 운동을 지도하는 상위노선이라거나 다른 운동을 하나의 노선으로 통합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분단체제에서 분단극복(민족문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인식하기는 해도, 다른 문제의 상대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규모와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운동‘들’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체제극복운동’이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다양한 운동‘들’이 수렴(혹은 상승)되어 작용하는 장(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분단체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체계적으로 답해주는 ‘총정리’식 설명은 1장에건 다른 어디에건 없다는 점도 미리 밝혀야겠다. 역량이 있고없음을 떠나, 그런 식의 ‘정답찾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을 펼치는 의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단체제 문제에 국한된 일도 아니지만, 분단극복의 정답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식 자체가 이미 분단체제에 의해 적잖이 왜곡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탐구와 자기쇄신의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사업의 관건이라 믿는다.10

 

분단체제론도 정답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오히려 “정답찾기”의 병폐가 발전적으로 해소되는 방향에 분단체제론이 자리한다. 분단체제론이 정답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남한사회’로 분석의 단위를 고정시키지 않고 ‘세계체제・분단체제・남한’의 층위를 분별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세계체제를 기본단위로 이해하되 세계체제 및 그 안의 수많은 하위체제들 중 어떤 것을 일차적 대상으로 삼을지를 그때그때 새로 결정해야 한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중간항으로서 ‘한반도 중심’ 시각의 긴요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11 따라서 분단체제극복운동이란 명확한 실체적 노선을 지시한다기보다 “그때그때 새로 결정해야 하는 통찰”에 근거한 운동이다.

분단체제론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사 및 민족경제 등과 민족문학이 맺는 독특한 관계방식과 유사하다. 우리 민족이 민족적 과제를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민족문학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능력을 갖춘 민족적 주체 형성을 가능하게끔 하는 장이 민족문학이기도 했다. 민족문학의 선진성이란 곧 “민족문학의 성립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자기인식과 자기분열극복의 작업”12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문학이 수행하는 민족적 과제란 늘 현재 속에서 달성되어야 하는바, 그래야만 ‘모든’ 민족적 과제가 달성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을 ‘민족’이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단체제론은 민족문학론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기는 해도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의 문학론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규범적 의미에서 민족문학이 하나의 동질적 문학인 반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은 다양한 문학‘들’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론에서 ‘민족’의 함의가 ‘한민족 및 한반도 주민’으로 변모했듯이, 분단체제를 규정하는 복합적 층위로 인해 문학은 문학‘들’로 다원화될 수밖에 없다. 분단극복이 분단체제극복이 아니라는 언명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각각의 운동‘들’과 문학‘들’은 나름의 시간표를 독자적으로 작성하고 있으므로 통일적 동일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 새로 결정해야 하는 통찰”에 따라 상대적 비중과 우선성이 판가름날 뿐이다.13 ‘민족문학’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유효할 때도 있고 ‘민중’이라거나 ‘근대극복’이라는 접두어 없이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한 경우도 있다는 백낙청의 설명14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분단체제론의 문학론이 문학‘들’을 용인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15 ‘문학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이란 문학‘들’이 공존하는 상황을 가감없는 문학적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문학에 대한 물음을 다시금 벼리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분단체제극복문학’이라는 별개의 장르를 설정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또 하나의 섣부른 정답을 공급하는 행위”16와는 기본적으로 무관하다. 민족문학론-분단체제론의 맥락에서 이 물음은 리얼리즘의 문제를 비껴가기 어렵다. ‘문학’이 ‘민족’과 발전적으로 헤어졌다고 할 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관건적 문제가 리얼리즘인바, 리얼리즘이란 어느 한 민족의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 담론이기 때문이다.17

 

 

3. ‘균형감각’—리얼리즘의 다른 이름

 

이제껏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에서는 두가지 측면이 부각되었다. 하나는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구분된 리얼리즘론 내에서 다시 스스로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동안 백낙청이 전개해온 리얼리즘론이란 이 둘을 과제로 삼는 것이었다.18 그렇지만 이러한 사정에 대한 백낙청의 자기 진술은 다소 복잡하다. 이에 따르면 자신은 루카치 같은 ‘리얼리즘 주창자’가 아니다.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홀히하는 문학에서의 원만한 현실인식과 현실대응”을 환기하기 위해 원용한 논쟁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주창하기보다 리얼리즘을 화두로 붙들고 궁굴리다가 때로는 놓아버리는” 입장에 가깝다.19

‘리얼리즘’이란 것도 백낙청에게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버릴 수도 있는 ‘방편’이다. 리얼리즘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뜻이겠다. 다만, 리얼리즘이 방편이라면 여기엔 리얼리즘을 통해 환기하고자 했던, 리얼리즘은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일이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핵심에 다가가는 첩경으로 보인다.20

2004년 배수아(裵琇亞)의 작품을 두고 벌어진 논란 속에서 백낙청의 소설독법에 대해 김영찬(金永贊)이 비평하면서, “인물과 사건의 객관적인 ‘재현’” ‘서사의 발굴’ “‘경험적 사실’의 구체성” 등을 근거로 백낙청의 비평이 ‘리얼리즘적 독법’에 붙들려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 “백낙청이 설정인용자 그 ‘소설적’이라는 기준도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규범의 영역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다”21라는 결론적 진술을 보태어 읽으면 그 취지가 더 분명해진다. 그런데 김영찬의 이러한 평가는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 이는 백낙청 스스로 답변 형식의 평론에서 ‘재현’이 중요한 참조점의 하나이기는 해도 예술성의 핵심으로 설정하지 않는다고 밝힌 대목이나, “신진 평론가들이 리얼리즘론에 대한 투박한 논의를 태연하게 내놓”는다고 말한 대목22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우리는 작품의 진리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진실과의 그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요구에 부닥친다. 이는 곧 ‘리얼리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앞서 우리는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라는 루카치의 표현이 작품의 본질에 대한 해명으로는 미흡한 바 있다고 보았지만, 본질에 충실한 작품의 한 특징으로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 빠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학의 진실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구현한다면 의당 전자를 포용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과학과 대등하면서 상반되는 진리—실제로는 비과학적인 비진리—밖에 안되고 말 것이다.23

 

이 부분만으로도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재현에의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재현=반영론의 입장은 재현대상=현실의 선차성을 회피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일종의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용문에서 확인되듯이 이것은 또한 ‘과학과 문학(예술)’의 관계론이기도 하고, 진리관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있고없음・맞고틀림’의 차원에서 정립되는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진리관을 향한 비판적 대응이었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은 근대적 과학의 성취와 의의를 부정하지도 않고 그 절대적 우위성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포용하는 자리에 문학(예술)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의 진실’보다 한층 높은 층위에 있는 ‘예술(문학)의 진리’가 딱히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통해 구현되는 진리’를 검토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결과는 “곤혹스러움”이다.

 

어쨌든 우리의 곤혹스러움은 무슨 물건을 찾아내듯 물음에의 정답을 발견함으로써 가셔질 게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물음 자체를 좀더 제대로 수행하는 길을 찾음으로써 곤혹이 문득 평안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 즉 한편으로 그것은 근원적인 진리를 인식의 정확성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물으며 걸어야 할 ‘길’로—인간이 멋대로 만드는 통로도 아니지만 동시에 ‘길을 닦는’ 인간의 실천과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는 ‘도(道)’로— 파악해온 우리의 동양적 전통에 합치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 최고의 예술에서 우리가 얻는 기쁨이 단순히 ‘심미적’ 쾌락이라거나 개인적인 감동이 아니고 바로 ‘진리’를 깨닫고 ‘도’에 이르는 순간과도 견줄 바 있는 것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24

 

그렇다면 분명 놀라운 일이겠으나 나로서는 백낙청이 말한 의미에서 “우리의 동양적 전통”이라는 게 있다는 데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예술의 진리’는 정답 찾기에 골몰하기보다는 물음을 던지며 나아가는 과정 자체라고 일단 이해한다면, 이를 두고 문학 바깥에서 미리 설정된 정답을 문학을 통해 확인하거나 관철시키려는 ‘정답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이며, “자신의 주장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태도”25라 비난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정답이 없이 물음을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물음에 부응하는 답안이 없다면 그 길의 적정성 혹은 진리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극단적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에 경도되지 않고서도 가능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추측건대 ‘진리는 ~이다’라는 정답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결국 ‘진리의 드러남’ 혹은 ‘진리를 이룩함’을 기다리거나 예비하는 ‘태도’에 대한 언급이 언명 가능한 최대치일 것이다. 그 다음의 단계란 기실 신비체험과 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진리를 탐구하면서 종국에는 물음 자체를 닦아가는 길이라는 비유에 이른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의 공격으로부터 리얼리즘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예술에의 근원적 물음’ 혹은 ‘시의 경지’가 무엇인지 먼저 묻고 그런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소설에서의 전형성 및 재현 문제를 제기하는지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26도 같은 취지일 것이다. “진정한 창작의 순간에는 구극(究極)의 종교적 경지와 다름없는 깨달음을 작품 속에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 지닌 일종의 신통력”이며 “예술에서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진술27에서는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란 전통적 수양론과 유사해 보이거니와, 다만 그 핵심이 되는 ‘본체론’은 없는 수양론28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수양론이라면 수양의 과정을 거쳐 획득되는 ‘덕성(德性)’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와 이어지려면, 이 덕성이 리얼리즘론과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백낙청은 60년대에 시민문학론을 제안할 때부터 레이먼드 윌리엄스(R. Williams)의 입을 빌려 리얼리즘의 본질적 요건으로 그러한 덕성을 제시한 바 있다. 그 요지는 “리얼리즘의 본질을 사회와 인간을 보는 어떤 ‘원숙한 관점’과 이에 수반되는 ‘균형’으로 파악”29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태도가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실사구시・지공무사가 먼저이며 ‘재현’은 그에 따라오는 성과임을 거리낌없이 인정하는 리얼리즘”30과 이어지는 것이라면, 창조성이든 지공무사의 당파성이든 그 요체는 기본적으로 ‘균형감각’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은 못 속인다. …

거의 모든 다른 매체는 속일 수가 있다. (…) 시나 드라마에서는 무언가 마당을 좀 너무 깨끗이 쓸어버리고, 인간의 말씀이 좀 너무 멋대로 날아다니게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항상 수코양이가 한마리 있어서 말씀의 흰 비둘기가 조심을 안하면 비둘기를 덮쳐버린다. 그리고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는 바나나 껍질이 있고, 울안 어딘가에 변소가 있다는 사실도 누구나 안다. 이 모든 것들이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31

 

그렇다면 이 인용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은 왜 (장편)소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답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소설은 못 속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설의 ‘무자기성(無自欺性)’으로 인해 소설의 마당은 너저분하기 마련이다. 이 너저분함이 결과적으로 균형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균형은 무자기 혹은 지공무사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이렇게 오다보니,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진리관에서 정당화 문제는 결국 수양론으로 귀착되는 듯하다. 달리 말하면 인식론적 문제가 윤리(도덕)학에 근거해 판가름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물론 인식론과 윤리학의 분리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 리얼리즘론의 핵심적 전언이겠지만, 위 인용문처럼 리얼리즘론의 무자기성에 입각하면 ‘수코양이, 바나나 껍질, 변소’를 포함한 마당이라서 말씀의 흰 비둘기가 마음대로 날아다니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70~80년대를 거치며 성장한 민중운동 혹은 민중문학론에 근거하여 민족문학론이 민중문학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할 때의 상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낙청은 ‘각성된 노동자의 눈’으로 씌어진 ‘본격적인 장편문학’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것은 “단순히 ‘노동문학’의 부재를 뜻한다기보다 차원 높은 민중운동의 결여에 따른 본격적인 장편문학의 부재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대 역사의 총체적 진실을 요구하는 장편소설”의 부재는 문학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민중 역량의 한계인바, 본격적인 장편소설의 출현은 “광범위한 국민대중에 의한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방향과 궤를 같이할 것이라는 인식의 산물이었다.32 또 한편으로 민중적 민족문학의 세계관 혹은 미학적 견해의 정립을 강조하는 김지하(金芝河)의 입론에 맞서 구체적인 노동현실의 인식에서 출발하는 역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본격적 장편소설을 가능하게 하는 ‘정석’이기 때문이다.

지공무사든 균형감각이든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수양과 덕성이 실질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결과적으로 현실의 리얼리티는 내가 보거나 아는 바를 초과해서 존재한다(단순히 양적 비교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곡은 늘 현실을 축소하므로)는 사실의 수락인 듯하다. 로런스의 비유를 통해 강조되었듯이, 리얼리즘 소설의 창조성을 통해 구현된 ‘현실’은 내가 보고 또 아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창조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정답주의’를 거부하는 리얼리즘론이라면 ‘진리값’은 그때그때 내재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지33 시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아울러 그 ‘진리값’도 결국은 창조적 현실인식을 거쳐 획득되는 ‘균형감(각)’ 자체에 있지 달리 다른 곳에 자리할 리도 만무하다.

 

 

4. ‘그러니 너무 멀리, 마구 가지는 말자’—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현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버려도 남는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기저엔 이러한 ‘균형감’이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균형감은 기실 민족문학론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바다. 가령 민족문학론의 경우라면 “자기 민족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식민지통치에 영합하는 세력을 식별하며 비판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스스로의 심령 속에서 봉건정신과 매판의식을 가려내고 이겨내는 고도의 지적・정서적 단련이 요구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분단체제론에서는 세가지 차원의 규정력이 빚어내는 복잡성을 잘 분별하는 한편 “의식 자체가 이미 분단체제에 의해 적잖이 왜곡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탐구와 자기쇄신의 수행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드러난다. 아울러 같은 맥락에서 리얼리즘 문학론에서는 앞서 보았듯이 현실의 객관적 인식 혹은 재현에 치우치지 않는 지공무사의 창조성이 강조된다.34

요컨대 엄정한 현실인식은 그것대로 소중히 추구해야 하는 한편 그러한 인식주체의 ‘자기인식’이 그에 못지않게 필수적이라는 것이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요체다. 이로 인해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은 인식론적 편향에서 멀어짐으로써 ‘정답주의’로의 경사도 막을 수 있게 된다. 동시에 현실로부터 주체의 (무)의식 내부로 퇴각함으로써 야기되는 주관의 자의성과 폐쇄성도 부정한다. 달리 말해 현실인식과 자기인식이 상호작용함으로써 형성되는 그 중간 영역 어딘가에, 그것도 늘 유동하는 상태에 있는 그 어딘가에 ‘진리’가 출현할 뿐이다. 따라서 형이상학화의 유혹에도 맞설 수 있게 된다.

최근 몇년간 백낙청이 문학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기본시각도 리얼리즘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다만 분단체제론 이후의 문학론은 문학‘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된다는 점에서 세심한 눈길이 필요하다. 백낙청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분하지 않는 관행에 맥빠져하는 가장 큰 이유는35 ‘리얼리즘에 대한 코드화된 인식’이 자신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오해로 귀결되는 데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그러한 코드화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리얼리즘/모더니즘’이라는 예의 이분법을 재생산하는 한편 그 대립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또다른 대립구도 속에서 해소해버리는 데 대한 불만도 있을 수 있다.

백낙청은 이분법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모더니즘적 소설에 주목한 듯하다. 자신의 비평에 대한 김명인(金明仁)의 비판을 두고, 오히려 김명인의 비평이 ‘창비 고유의 독법’에 어울린다고 한 언급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김명인・김영찬과 주고받은 그 논의에서 소설적 기법과 문학적 장치에 대한 섬세하고 자상한 분석들이 오고갔지만 무엇보다 백낙청이 배수아를 두고 “진성(眞性) 모더니스트”라고 평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작가적 체질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온몸을 던진 탐구로서의 모더니즘 소설”이라는 뜻으로, 단순한 기법이나 장치의 동원이 아니라 체질적 생리적 모더니스트라는 평가이겠다.36

이쯤 되면 현재의 한국문학에서 모더니즘이란 이미 삶의 일상 속에서 자생력을 구비한 채 생장하고 있다는 인정이다. 모더니즘이 생리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영역까지도 분단체제가 포괄하는 것이라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으로부터 모더니즘 문학을 배제하는 시각이야말로 현실을 외면한 관념론일 뿐이다. 분단체제론의 문학론이 문학‘들’을 용인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성 모더니스트라고 할 때 백낙청의 평가가 향하는 지점은, 타인이나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삶(작품)을 밀고가는 작가(화자)의 성격이라 판단된다. 속된 말로 ‘그렇게 생겨먹었으므로 그렇게 살 뿐’이라는 태도이다. 하지만 이 태도가 자칫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쿨한’ 자연스러움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시선조차 없는 곳으로 그 작가-화자의 삶을 이끌어갈 개연성 또한 적지 않다. 작가 자신을 놓고 보면 그러한 시선의 유무에 따라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일 수 있다. 그러니 잘 가되, 너무 가버려서는 안된다.

배수아의 작품에 대해 백낙청이 “화자든 저자든 무엇인가에 갇혀 있는 건 분명하다”고 진단할 때 지적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더니즘 자체를 극복하라는 충고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말은, 그러한 뿌리의 규명 과정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했음에도 ‘생긴 대로 살아감’이 지속할 만한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해하는 편이 온당하다. ‘뿌리’에 대한 주문 자체가 리얼리즘적 요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서로 이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공존하는 문학‘들’이라면 다른 문학‘들’ 각각이 서로에게 그 가치와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갇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상식적 요구이다. 이 상식은 최소한의 균형감각에서 나온다. 백낙청이 여전히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리얼리즘/모더니즘’ 혹은 ‘근대/탈근대’의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입각해서는 이러한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균형감’을 포착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분법적 왜곡에 제약당하지 않을 때, ‘원만함’37이라는 말을 통해 문학의 정치성 논의에 개입하는 그 균형감각을 다시금 목도하게 된다. 백낙청은 난해한 언어실험에 정진하는 시인들을 선승(禪僧)이나 특공대에 비견한다. 언어실험에 매진하는 문학이란 통상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모더니즘과 친화성이 깊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험성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백낙청은 문학에서의 선승과 특공대가 꼭 필요한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분단체제론의 문학‘들’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자율성을 신화화하는 소위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도 아니며 “삶/정치의 내부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잉여’ 혹은 ‘불순물’이 바로 문학의 가치”라는 이장욱(李章旭)의 주장은 리얼리즘의 균형감각과는 거리가 있고, 전위운동의 적잖은 사례들은 “원만한 공부의 실패”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장욱의 설명처럼 “‘폐허’에 내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시인이 “‘타락’을 스스로에게 용인하”고, 이러한 타락을 통해 “‘시’를 발생시키기 위한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라면, 그때의 ‘시’는 “삶과 예술의 관련성이 극도로 일치했던” 장소에서 탄생한다는 뜻이다. 다소 복잡하고 열정이 아로새겨진 설명이지만, 나로서는 ‘삶/정치와 문학의 일치’라는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자리에서 진정한 시가 생겨난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시적인 것=혁명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명제와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백낙청은 이장욱이 참조하고 랑씨에르(J. Rancire)와 진은영(陳恩英)이 제시하는 예술(체제)론이 근대의 시간 속에서 비교적 현재에 가까운 ‘현대성’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제삼는다. 이러한 편향은 균형감에 기반을 둔 원만한 공부와 사업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의 의의는 단순히 닮음의 중시가 아니라 닮음의 기능을 규정하던 구조의 파괴에 있다는 랑씨에르의 주장에 대해서, 백낙청은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예술에서 사실적 재현이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된 점에 대한 인식은 미흡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리얼리즘 논의를 제대로 되새기고 천착할 때” “근대예술의 전개과정에 대해 훨씬 원만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제안이기도 하다.38역시, 마구 가거나 너무 가서는 잘 갈 수가 없다.

이장욱이 김수영(金洙暎)의 입을 빌려 ‘온몸’에 조응하는 시적 경향들이 경합하는 자리를 설정할 때 그곳에 정지용과 신경림 등의 성취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제안도 백낙청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여기엔 모더니즘 시의 난해성과 전위성에 대한 백낙청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특히 T.S.엘리엇의 ‘감수성의 분열’ 논의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시각이다. 백낙청에 따르면, ‘감수성의 분열’은 영시의 역사에 대한 획시기적 성격을 띠는 한편, 셰익스피어 등의 성취가 근대 장편소설의 성과로 계승된다는 인식을 마련해주며 나아가 근대 장편소설의 독법이 현대시 해석에까지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다.39

이것은 리얼리즘의 성취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재해석일 터인데, 특히 엘리엇의 시작 작업과 관련하여 ‘감수성의 분열’은 “‘사고와 감정의 통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당대의 ‘일상언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나가지 않는 시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 점을 환기하는 이유는, 최근 첨단의 언어실험을 감행하는 시인들의 작업을 대할 때 “대중에 대한 불신과 때로는 경멸마저 포함하는 일종의 엘리뜨주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 ‘미학적-감성적 예술체제’에 대한 배타적 지지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는 짐작 때문이다. 반면에 백낙청이 ‘감수성의 분열’ 논의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란, “셰익스피어인용자 대중성과 여기에 반드시 따르는 단순성, 그리고 이 단순성을 통속에서 건져주는 대국적 현실이해와 민중문화에 바탕한 낙천성—이런 것들이 현대시인의 목표로서도 훨씬 강조될 것”이라는 점이었다.40

이러한 시각은 예의 ‘이중과제론’과도 만난다. 혁명적이리만치 전위적인 모더니즘이 강렬한 ‘암시와 열기’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달성했는지 의문이며 훨씬 무력하게 소비문화에 흡수되어버린 반면, 차라리 덜 전위적인 작가들이 한결 원숙한 성취를 보였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것은 랑씨에르가 말한 ‘치안’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치안’의 고민이 없는 ‘정치’에의 지나친 경사란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우려는, 이중과제론적 시각이 적용된 결과다.41

한창 문학의 정치성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떤 생산적 성과를 낳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들이 의지하는 이론적 편향이나 미학적 자율성 논란 자체의 연원을 감안할 때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생산적 자산으로 원용되는 장면을 목도하기는 어려워 보이며, 거기에 난해한 언어실험으로 점철되는 시단의 양상을 포개어보면 더 그럴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시의 경우 주로 김수영이 논리적・역사적 거점으로 부각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근래 진행되는 이런 논란에 대해서 얼마간의 위화감을 떨치기 어렵다.

이장욱이 제시한 사례들도 그렇고 특히 김수영이 그러한데, 그때의 시는 혹은 문학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새삼스럽다. 창작의 자유가 바로 언론의 자유를 환기하거나 나아가 동일시될 수 있는 시대에 김수영이 살았던 것이다. 약간의 과장법이 허용된다면 시인이 곧장 헌법 차원의 문제와 대면하는 시대였다. 그만큼 척박했고 그만큼 낙후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문학이 대단한 것일 수 있었다. 김수영이 “시인인용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 프런티어’」)라는 언사를 자신있게 천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99%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고 100%의 자유만 자유라고 믿으며 세상을 향해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그 불가능을 가능한 만큼이라도 현실화하는 과제는 누구 몫인가. 그건 시인이 알 바 아니라면서 어쩌면 그조차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문학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반면에 미학적・예술적 자율성과 정치성을 지금 이렇게 토론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한다는 것이 헌법적 수준에 이르는 것은 고사하고 시 혹은 문학의 허울을 벗어나야만 작가의 소리가 세상에 겨우 들릴 수 있다는 문학의 왜소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인터넷 등 다른 매체들의 현실적 사안이 된 지 오래고, 따라서 시(문학)가 경합하면서 공존하는 매체환경 등에 대한 면밀한 반성이 없다면 김수영과 겹쳐보면서 진행되는 문학의 정치성 논의에는 불가피하게 어떤 기만이 작용하기 쉬워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객관적 현실의 엄중함을 존중하는 사실주의적 기율을 소홀히하지 않으면서 그 인식과정에 대한 자기인식이 함께 작용하는 ‘리얼리즘의 균형감각’인지도 모른다. 만약 이 균형감각이 수용된다면, 미학적 자율성을 출발로 삼는 문제설정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시가 혹은 문학이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시대가 김수영의 시대로부터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변모되어온 결과인지 물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문학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구 현대예술의 사례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심지어 김수영이 대신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치안’과 ‘정치’를 상호배제적 관계로 쉽게 구분할 수 없다는 반문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이것일 듯하다.

 

 

5. 나가며

 

지금껏 리얼리즘론을 중심으로 백낙청의 문학론에 대해 살폈다. 나로서는 직접적인 논평 없이 일단 그의 논의를 잘 듣고자 했다. 주마간산식 요령부득의 읽기였지만, 적잖은 곡절 속에서도 백낙청이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온 것은 충분히 감지되었다. 그 일관성에 대해 솔직히 ‘질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백낙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완고한 문학주의자였고, 그 문학주의는 정답주의를 시종일관 경계해왔다. 애당초 백낙청에게 문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 문학주의자는 문학이 그럴 만큼 대단한 것임을 스스로가 증명해왔다. 그렇게 문학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늘날에도 문학이 여전히 대단한 게 맞다면, 거기에 백낙청이 기여한 몫이 지대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문학은 대단한 것이기에, 문학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으니 문학이 거기에 복무해야 한다는 ‘정답주의’에 맞섰고, 또 한편으로 문학을 위한 문학이니 하면서 별로 대단치 않은 수준으로 문학을 하강시키는 경향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문학이 대단하다고 일관되게 믿어오다보면, 의미의 전도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즉 대단하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라는 믿음의 전도 같은 것이다. 나에게는 분단체제론이 그 자체로 민족문학론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문학론으로 이해된다. 분단제체론이 백낙청의 문학론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리얼리즘론이 내포되어야 한다.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변혁적 중도주의’가 분단체제론의 리얼리즘론으로 파악된다. 분단체제론의 문학론이란 실질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이 대단한 것이라는 신념이 백낙청의 문학론도 대단한 것이 되게 했지만, 정작 문학이 대단해졌는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달리 남은 문제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른바 백낙청이 강조하는 ‘지혜’의 문제다. 백낙청은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보며 ‘지혜의 시대’를 천명하기도 했다. 여기서 ‘지혜’란 근대과학적 지식이 대표하는 근대적 지식의 성격과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용어인데, 지혜의 시대란 과학(적 지식)을 외면하고서는 지혜를 획득할 수 없는 시대라는 점에서 과학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란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삶에 유용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조절하고 제약하는 능력이면서, 또 과학적 지식을 생성하는 역사적・문화적 기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보자면, 백낙청에게는 일관된 사유방식이 존재하는 듯하다. 일단 그것은 가시적 형태나 실체적 규정을 부여할 때 초래되는 고착화의 위험을 거부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내가 ‘균형감각’이라고 부른 것이 따지고 보면 ‘지혜’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지혜는 어디에 있고 그것이 지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내 짐작으로는 그 지혜가 ‘마음’속에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수양론과 덕성론을 통해 그렇게 추론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 ‘마음’이 자기 마음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 그 ‘진리값’은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것일까. 정답주의는 아니므로, 결국 정합론적 균형상태가 그 진리값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단체제론의 문학‘들’처럼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 동일화되지 않는 이질적 존재(군)가 공존하므로, 각 존재의 마음이 지혜의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하는 저울추들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마음에만 있어서는 안되고 ‘제도=지혜’이기도 해야 할 듯하다.

서로 다른 저울추로 균형을 만드는 ‘마음’은 각기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일 테고 그러한 가치들이 사실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세계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제도적 표현으로서의 입헌민주제를 배제하기 어렵다. 백낙청 리얼리즘의 균형감이 지금 이 시점에서 문학의 정치성을 다루는 방식은 제도(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 ‘치안’과 ‘정치’의 안이한 구분을 우려하는 이중과제론적 시각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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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낙청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Ⅰ』, 창작과비평사 1978, 134~36면. 이하 백낙청의 글은 필자 이름을 생략한다.
  2. 이 글에서 민족문학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다. 필자 나름의 기본 인식만 보이도록 한다.
  3. 백낙청・황종연 대담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백낙청회화록 5』, 창비 2007, 239면.
  4.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19면.
  5.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125면; 「서장: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21~22면;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같은 책 191~92면 등.
  6. 졸고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 52권 4호, 63~65면; 「통일운동과 문학」,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129~30면 참조.
  7.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193면.
  8.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8~26면.
  9.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36~52면;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193면.
  10. 『흔들리는 분단체제』, 8~9면.
  11. 「민족문학론・분단체제론・근대극복론」, 『흔들리는 분단체제』, 123~24면.
  12.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135면.
  13. ‘통찰’이든 ‘비중과 우선성’이든 사람들 사이에 공유 가능한 ‘정답’이 있는지, 아니면 다양한 ‘정답들’이 공존하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이 점에 비추어보자면 백낙청이 ‘정답주의’를 거부하는 입장과 앞서 말한 ‘다원고차방정식’의 비유는 상충되는 바 있다. 아무리 ‘다원고차’일지라도 모름지기 ‘방정식’이라면 해(답)가 있기 마련이다. 내 생각에 방정식보다는 ‘함수’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다만 함수라면 일정한 원리성을 함의하게 되는데 이 문제는 내 수준으로는 감당 불능이다. 글의 말미에 정치원리와 연관지어 몇마디 첨언하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14. 「서장: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 20면.
  15. 결과적으로 ‘근대(성)의 경험’들을 용인하는 입장이 된다.
  16.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40면.
  17.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194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359면 등.
  18.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성격에 관해서는 김영희 「진리와 이중과제」; 김명환 「리얼리즘, 인간해방과 진리구현의 역사적 싸움」, 설준규・김명환 엮음 『지구화시대의 영문학』, 창비 2004 참조.
  19.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246~47면.
  20. 이하의 내용은 2010년 11월 간행 예정인 졸고 “On national literature and the division system,” Inter-Asia Cultural Studies 11(4)의 ‘truth and ethics of realism’을 재정리한 것이다.
  21. 김영찬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275, 281면.
  22.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창작과비평』 2004년 겨울호 262, 268면(『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에 수록).
  23. 「작품・실천・진리」, 『민족문학의 새 단계』, 337면.
  24. 「작품・실천・진리」, 374면.
  25. 손정수 「진정 물어야 했던 것」,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317면.
  26.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 90~91면.
  27. 「민족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맞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Ⅱ』, 창작과비평사 1985, 73~74면.
  28. ‘존재론 없는 윤리학’이 더 방불한지도 모르겠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문학론으로서의 위상을 초과하여 ‘정신’ 혹은 ‘태도’를 지향하는 성격이 뚜렷하다는 지적은, 대개 비판적 논거로서 몇차례 제기되었다(진정석, 황종연 등).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정답(영원한 진리)이 없다고 전제한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거나 옳은지 탐구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적 근대성론이든 모더니즘 옹호론이든, ‘정답의 없음’과 ‘정답의 탐구’라는 이 두 난제의 통합을 근본적 과제로 삼지 않는다는 게 백낙청의 기본인식으로 보인다. 백낙청이 부분적 타당성만 인정하는 궁극적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29. 「시민문학론」,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Ⅰ』, 25면. “이러한 업적에 수반되는 균형이야말로 아마도 그 업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 18세기 이래 소설의 발달사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원숙한 입장에 이르기 위한 탐험이었〔다〕.”
  30.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91면.
  31.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창간호(1996), 295면.
  32.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의 새 단계』, 37~38면.
  33. ‘내재적’이란 곧 ‘정합론적’이라는 말이다. 다만 그 차원이 개인인지 사회인지에 따라 이해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34.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135면; 『흔들리는 분단체제』, 9면;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91면 등.
  35.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20면.
  36.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260~61면.
  37.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22~29면.
  38.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27~31면.
  39. 「현대 영시에 대한 주체적 접근의 한 시도」,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 솔 1996 참조.
  40. 「현대 영시에 대한 주체적 접근의 한 시도」, 146면;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32~33면; 「모더니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Ⅱ』, 419면.
  41.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30, 36~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