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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황정은 김사과 박민규의 사랑이야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요긴한 물음들
이 글은 소설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를 문학의 새로움과 관련지어 살펴보려는 것이다. 지난호 『창작과비평』 특집1 및 그간의 문학과 정치 논의를 참조하되 특히 소설의 정치성 논의의 요긴한 대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논의는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2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시인이 시가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를 곡진하게 묻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를 두고 “모든 것은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로부터 시작”3되었다는 평이 나왔지만, 재등장한 시인은 그 ‘시작’의 연원을 ‘딴사람’들에게, 촛불항쟁과 용산시위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 문인들, 나아가 4·19혁명을 전후하여 시와 정치에 관해 고뇌한 김수영(金洙暎) 시인에게 돌리고 있다(15~18면 참조). 요컨대, 문학과 정치 논의의 ‘배후’에는 촛불항쟁과 용산시위가 있었고, 이런 정치집회에 참여하거나 항의성명(가령 ‘작가선언 69’)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을 되묻는 문인들이 있었다. 문학논의가 모처럼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시민/문인들의 광장에 나오자 그간 소원한 사이로 여겨졌던 문학과 정치는 서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이임이 분명해진 것이다.4
이 논의의 시작에는 이처럼 촛불항쟁의 힘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진은영(陳恩英)이 랑씨에르(J. Rancire)의 예술론을 원용하여 우리 시대 문학적 고민의 정곡을 찌른 것이 주효했다. 특히 논의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된 것은 시란 어떻게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서 ‘정치’(la politique)와 ‘치안’(la police)의 구분—통상적인 의미와는 달리, 제도권 정치와 기타의 현실정치는 ‘치안’이고 기성의 ‘감각적인 것의 배분’을 바꾸는 일이 ‘정치’—이 중요한데, 사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양자의 불가분한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인지 모른다. 백낙청(白樂晴)은 랑씨에르의 입론을 호의적으로 평하면서도 “‘치안’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정치’에의 관심이란 무관심과 무책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5 특히 “제3세계라든가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 치안의 영역이 극히 불안정하며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같은글 37면)는 것을 덧붙인다. 사실 ‘정치’와 ‘치안’은 ‘변증법적’인 관계인데,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는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사정이 판이하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정치’와 ‘치안’에 대한 이런 변증법적이고 주체적인 인식은 소설의 정치성을 논할 때 더욱 유념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정치성 논의는 리얼리즘 문제와도 직결된다. 지난호 『창비』 특집에서 정홍수(鄭弘樹)가 “소설의 발생과 전개에 힘들게 기입되고 뿌리내린 리얼리즘의 지향”(33면)을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정치성 논의를 실답게 하려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별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홍수도 “‘사실주의’의 협애한 시야”와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거치며 그것의 극복까지 지향하게 된 보다 창조적인 ‘리얼리즘 문학’”(32면)을 대비시킨다. 그의 글은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 각각의 예술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섬세한 읽기가 돋보이는데, 서두에서 거론한 ‘리얼리즘의 지향’과 이런 구분법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기왕에 ‘치안’과 ‘정치’의 구분이 중요하게 거론되었으니 이와 관련지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차이를 짚어보면 이렇다. 맑스주의 문예론의 전통에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뜻하는 사실주의(자연주의)는 독자적으로는 ‘치안’의 경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사실주의는 단지 ‘현실’로 주어지는 (랑씨에르의 표현법에 따르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리얼리즘은 환경과 인물의 ‘전형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실’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치안’의 경계를 넘어 ‘정치’의 영역에 개입할 가능성이 열린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즉 ‘감지 가능한 모든 것’ 가운데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보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6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이 이런 뚜렷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까닭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사실주의의 과학적·실증적 인식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진실을 탐구하는 데 요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안’과 ‘정치’의 관계와 유사한 이유로 그 요긴함의 정도는 ‘제3세계라든가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 세계체제의 중심부보다 한결 더 크다.7
이쯤해서 진은영의 고뇌가 시작된 지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시를 포함하여) 2000년대에 ‘집단적으로’ 출현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의 시들의 불확실한 미래가 있다. 그는 그 불확실성 앞에서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새로운 정치시’를 쓰기 위한 실험이 어떻게 하면 ‘미적 언어의 기만’에 빠지지 않고 참다운 성취로 이어질지 진지하게 묻는다. 그같은 진지한 문제의식과 자세로 2000년대에 출현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의 소설들의 정치성을 물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소설의 정치성을 문학의 새로움과 관련하여 묻는 일도 포함된다. 새로운 감각과 어법을 실험하는 소설 가운데서 진정한 새것에 값하는 작품을 가려내는 비평작업이 중요해진다. 문학에서 진정 새로운 것의 싹을 찾는 작업은 도래하는 공동체와 새로운 존재에 대한 물음과 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물음은 흔히 전통적인 소설로 다뤄지는 작품들 가운데서 그런 새로움의 싹이 구현될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움의 문제를 소설의 정치성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고민하려면 우리가 현재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도래할 공동체는 어떠하며 그 공동체의 주체는 어떠한 존재일까를 물을 수밖에 없다.
어떤 시대, 어떤 존재인가
지난호 『창비』 특집에서 권희철(權熙哲)은 우리 시대의 성격을 중요하게 거론하면서 대략 두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하나는 촛불항쟁과 관련해서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사회에 팽배한 냉소주의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따로 떼놓고 보면 둘 다 정당한 물음인데, 전자를 염두에 두고 후자를 논하는 순간 묘하게도 뭔가 전도된 느낌을 준다.
문학이 정치와 분열되어 있으며 그 분열상태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반성은 오히려 문학 외부에 정치적 활기가 있으리라는 소망을 사실판단인 양 착각하게 만들고 이런 착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문학이 참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간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점은, 질식해가는 정치에 문학이 새로운 문제제기의 산소를 주입할 권리가 있으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냉소주의의 시대에 ‘문학과 정치’를 논할 때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52면)
“질식해가는 정치에 문학이 새로운 문제제기의 산소를 주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일단 비평가로서의 책임의식과 패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런 문학적 과제를 도출하는 근거가 되는 시대성에 대한 판단이 맞는지 의문이다. 여러 달에 걸쳐 수백만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촛불항쟁에도 불구하고 “문학 외부에 정치적 활기가 있으리라는 소망”이 ‘착각’이라고 단정(‘사실판단’)하는 근거를 되묻고 싶은 것이다. ‘냉소주의의 시대’라는 말 외에는 어떤 실마리도 찾기 힘들다. 사실 권희철의 ‘냉소주의 시대’ 규정은 황정은과 편혜영의 소설들에 대한 그의 작품 분석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편 정홍수의 경우는 “신자유주의의 한국 점령을 실질적인 수준에서 완수한 구제금융사태 이후 우리 모두는 경제적 동물의 불안을 경쟁적으로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34면)고 언급하지만 이런 시대인식이 작품 분석에 특별한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IMF사태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라든지 ‘경제적 동물의 불안’ 같은 묘사에서 이른바 97년체제론, 그리고 그것의 문화적 판본이라 할 김홍중(金洪中)의 ‘포스트-진정성 체제’론/‘속물주의 시대’론8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우리 시대에 속물주의와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특히 97년 이후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된 것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97년 IMF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삶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97년체제론은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촛불항쟁이 경이로운 것은 바로 수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시위의 공간을 창출하면서 그들의 일상 깊숙이 스며든 냉소주의와 속물주의를 일거에 걷어냈다는 점이다. 이로써 그런 경향들을 깨끗이 극복했다는 것이 아니다. 냉소주의나 속물주의가 우리 삶과 사회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들에 대처하는 ‘마음의 기제’, 즉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 역시 만만찮게 함양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실 시민들은 촛불항쟁,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시위, 용산시위를 거쳐, 현재의 천안함사태와 6·2지방선거의 국면에 이르기까지 이명박정부와 일진일퇴를 거듭해왔는데, 김홍중 식의 ‘마음의 레짐’으로 표현하자면 속물주의(냉소주의)의 일방적인 지배라기보다 속물주의(냉소주의)와 87년 이래 전수되고 몸에 밴 사심없고 활달한 시민의식 간의 팽팽한 공방으로 보인다.9
시야를 한반도 전체로 넓혀보면, 분단체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역시 97년체제론이나 속물주의(냉소주의) 시대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남북의 당국자들이 주도한 사건이었고 남한에서는 이를 ‘냉소적’으로 보는 보수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이 남북관계의 이 획기적 진전에 진심어린 성원을 보내며 동참한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여러 분야의 남북간 화해 흐름이 차단되고 역주행이 거듭되면서 현재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런 위기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6·15시대를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각별히할 필요가 있다.10
이렇게 보면 속물주의(냉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윤리적인 삶’을 상정하기보다 속물주의(냉소주의) 경향에 대항하여 사심없이 행동하는 시민의식을 지켜내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도래하는 공동체의 싹으로서 새로운 존재를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학과 정치 논의 과정에서 ‘새로운 존재’로 제시되거나 암시된 것 가운데 고려할 만한 것은 대략 두가지 유형 혹은 방식이다. 하나는 진은영이 제시한 ‘딴사람-되기’의 방식이다. 그 방식은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감각적인 것의 분배」, 84면)는 자신의 결론에 부합되게 삶과 정치와 문학이 동시에 실험을 시작하는 방식이다.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딴사람-되기를. 시인의 자리를 지게꾼의 자리와 뒤섞고 문학의 자리와 정치의 자리를 뒤섞음으로써 감각적인 것들의 완강한 경계를 넘어가는 시와 시인이 동시에 ‘시작’된다.” 이때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했듯이 이러한 ‘되기’(devenir)는 유비나 모방 혹은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게꾼이라는 타자를 만나는 새로운 만남의 방식 속에서 시인은 기존의 분배방식에서 특수한 영역으로 할당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지게꾼도 시인도 아닌 동시에 지게꾼이며 시인인 새로운 존재가 된다”(28면). 이 ‘딴사람-되기’는 그러므로 타자와의 합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낡은 자아를 허물고 자기와 타자의 ‘사이’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존재의 또 하나의 방식은 권희철이 촛불항쟁 참여자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암시된다. 그는 중국 천안문시위자들에 대한 아감벤의 논평을 ‘패러디’해 촛불시위자들을 묘사한다. 가령 “촛불로 밝혀진 광화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의 공동체였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어진 집단이나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관리하거나 규율할 수 없고, 바로 그 점에서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었다. 이 독특성의 공동체, 혹은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새로운 주인공이다.”(53면)11 이런 식의 패러디 사용이 적절한지 의문이지만, 여기서 따질 문제는 권희철이 촛불시위자들의 특징적인 면모로 제시한 것이 어떤 새로운 존재를 암시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촛불시위자들의 진면목에 대한 정당한 서술인가 하는 점이다.
인용문의 ‘독특성의 공동체’는 아감벤이 ‘도래하는 정치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제시하는 ‘whatever singularity’12에 해당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whatever’는 영어로는 ‘뭐든 상관없다는’ 뜻이지만 이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 ‘quodlibet’는 정반대의 뜻이라는 것이다. 가령 “‘Quodlibet ens’(whatever entity)는 “무엇이라도 상관없는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항상 중요한 존재”이다.”13 그리고 “‘whatever singularity’에서 “문제의 ‘whatever’는 어떤 공통적인 특성(예컨대 좌파라는 것, 프랑스사람이라는 것, 무슬림이라는 것 같은 개념)에 관해서 무관심하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점에서 독자성과 관련된다.”(같은면) 이 설명을 고려하면 ‘whatever’는 여기서 어떤 정체성을 초월해 있다거나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관이 있되 그런 구분법에 귀속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므로 불교의 ‘여여(如如)한’의 뜻에 가깝다.14 아감벤의 이런 여여한 ‘독자성’(singularity) 개념은 무엇이 ‘될 잠재성’(potentiality to be)보다 ‘되지 않을 잠재성’(potentiality not to be)을 중시하는 그의 잠재성 개념과 맞물려 있다.15 아감벤이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을 사랑과 관련지어 논하는 대목도 주목을 요한다. 가령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런저런 특성(금발이라는 것, 키가 작다는 것, 다정하다는 것, 절름발이라는 것)을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특성들을 무시하고 밋밋한 일반성(보편적 사랑)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2면). 즉 사랑하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속성들을 모두 가진 그 상태의 연인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촛불항쟁 참여자들의 행동방식에 ‘여여한 독자성’이라 할 만한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합창할 때도 그것이 말도 안되는 ‘치안’의 혼란을 겨냥하고 당국자들의 논리의 핵심을 친 것이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법적 지위’를 구태여 부정하고 더 고상한 어떤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고 그냥 그 국민됨의 자리를 당당히 누렸는데 사실 그 점이 대단히 신선하고 사랑스러웠다. 여성이자 유모차를 끄는 엄마이자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구태여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누림으로써 존재의 어떤 개방성을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개념은 촛불시위자들 사이에서 문득 구현되는 무엇의 일면이라면 모를까,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제시하기는 힘들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촛불시위자들의 모습이 87년 민주항쟁 때에 비해서 실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아감벤이 제시한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에는 아직 미달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구사의 폐허(아우슈비츠) 속에서 태동한 이 개념 자체에 서구중심적 편향이 스며 있는가의 문제다. 사실 이 개념이 현실정치(‘치안’)에서 사용될 때는 우리의 처지와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16
아감벤과 들뢰즈는 모두 ‘독자성/단독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지향성은 서로 반대인 듯하다. ‘딴사람-되기’를 시도하면서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탈주하려는 들뢰즈의 단독자와는 대조적으로 아감벤의 단독자는 ‘딴사람 되지 않기’의 잠재성을 수행하면서 온갖 근대적 정체성에 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고자 한다. 필자가 도래하는 공동체의 새 존재방식으로 제시되거나 암시된 두 개념을 주목한 것은 어느 한쪽 입장을 지지하려는 것은 아니며 그럴 만큼 철학적인 조예가 깊지도 않다. 다만 문학의 새로움과 관련지어 소설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정치’와 ‘치안’, 사실주의와 리얼리즘, 시대구분의 문제와 더불어 이 개념들이 얼마나 요긴할 수 있는가도 함께 검토할 만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질문과 검토의 방향은 쌍방향이어야 마땅한데, 이들의 새로운 존재개념을 활용하여 우리의 문학작품을 읽는 동시에 역으로 우리의 문학작품을 통해 이 개념들에 문제점은 없는지를 검토하는 비평작업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사랑이야기들
황정은(黃貞殷)의 『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는 소설의 정치성 논의에서 우선적으로 거론할 만큼 중요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권희철의 논의가 초점을 제대로 맞춘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지적했듯 ‘냉소주의’가 문제라는 시대인식의 탓이 큰데, 용산참사와 철거민 문제를 다룬 황정은의 인상적인 르뽀(「입을 먹는 입」, 『문학동네2009년 겨울호)가 그런 인식을 굳혀주는 데 한몫한 것 같다. 가령 권희철은 그 르뽀의 한 대목을 인용한 후 진정 무서운 것은 “법과 경찰의 권력보다 냉소주의 자체가 아니겠느냐”고(53면) 작가의 의도를 풀이한다. 그 르뽀의 논지에 관한 한 권희철의 판단이 틀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百의 그림자』는 이런 냉소주의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품이 아니다. 또한 “황정은은 여기서 그림자에 잠식되어 삶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 ‘입을 먹는 입’에 삼켜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55면) 평하는 것은 이 소설에 내장된 정치성을 주제적인 차원으로 좁히는 격이다.
이 소설의 정치성은 무엇보다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야기, 나아가 그림자가 일어선 경험을 공유하는 여러 등장인물 간의 ‘윤리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무심한 듯 타자를 배려하고 언어에 스며든 폭력의 뉘앙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그 가혹한 폭력과 부당한 불행을 겪고도 ‘원한 감정’(resentment)에 매이지 않는 이 존재들이 어디서 출현했는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속물주의와는 판이한 이들의 삶의 방식이 ‘윤리적’임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윤리적인 삶’이 하나의 이상주의적 소망성취에 불과한지 아니면 도래하는 공동체의 실제 싹인지를 묻는 일이다. 김홍중은 “스노비즘이 현실태라면 윤리적 삶은 언제나, 영원히, 가능태로 머문다. 가능태에 비추어 현실태를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판은 내재적이어야 한다. 윤리적 삶은 하나의 소실점이다. 도달되지 않는다”(83면)라고 주장하지만, 여기 이미 ‘도달된’ 윤리적 삶이 구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쉽지 않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소설의 언어에, 그 언어로 짜여진 이야기에, 이야기의 방식과 그 방식이 갖는 특유의 호흡과 리듬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 황정은 소설언어의 남다른 점은 군더더기가 없을뿐더러 메씨지 전달은 정확하게 하되 최소화하고 언어 자체의 미묘한 울림과 뉘앙스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언어는 시의 언어를 닮아 있다. 가령 은교와 무재가 주고받는 대화는 연인들끼리 실제로 사용했을 법한 일상적 언어이면서 어딘지 선문답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가령 이런 대목이 그렇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39면)
서술자 은교의 직장(전자상가)과 연애 이야기, 그림자가 일어선 사람들 각각의 불행한 내력들이 뒤섞이면서 소설서사의 사실성이 꽤 풍성해지지만 그 질감은 종래의 사실주의적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가령 무재가 소년이었을 때 빚을 왕창 진 아버지가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죽는 이야기, 유곤의 아버지가 건축현장에서 일하다가 타워크레인의 추에 깔려 죽는 이야기, 유곤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야기,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차라리 그림자를 따라가려다가 실패한 여씨 아저씨 이야기, 아내와 자식들을 미국의 사립학교에 유학시켜 기러기아빠 신세가 된 여씨 아저씨의 친구인 공장장의 이야기도 그렇다. 무엇보다 사람에게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초자연적 현상이 마치 시에서의 ‘객관적 상관물’처럼 작동하면서 경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구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지 싶다. 황정은의 사실성은 사실주의를 초과하여 소설언어 구조의 깊숙한 곳과 연결되어 있다.
그림자 분리현상은 현실의 삶에 좌절하고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상태를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적 장치이지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 아니다.17 사람이 자신의 분리된 그림자를 따라간다든지 분리된 그림자가 사람의 등에 올라탄다든지 식탁에 버젓이 앉아 있다든지 하는 설정은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불행의 여러 양상에 그 섬뜩하고 불길한 시적 이미지의 차원을 부가한다. 동시에 소설서사 전체에 삶(빛)과 죽음(어둠)의 리듬을 불어넣을 수 있을뿐더러, 이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긴 말 필요 없이 그들과 그림자의 관계를 통해, 그림자의 세분화된 농담과 형상을 통해 섬세하게 표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가마’ ‘차마’ ‘(어)차피’ 같은 말의 다중적인 뉘앙스와 주술적 효과라든지 ‘슬럼’과 같은 말에 스며 있는 은밀한 권력관계를 예리하게 끄집어내는 빼어난 언어적 감수성과 구사력은 언어와 대상의 일치라든지 현실의 자명성에 대한 믿음을 그때그때 깨뜨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포스트모던’한 소설가들과 달리 언어와 현실의 자명성을 깨는 것이 문학이 할 일의 전부인 양 자명성의 해체작업에 탐닉하지는 않는데, 이 점이 이 작가의 또 하나의 미덕이다.
황정은이 이런 비범한 소설언어로 들려주는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둘의 관계, 그것도 가장 내밀한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도래하는 공동체의 시원적인 관계에 어떤 분위기와 리듬이 주조를 이룰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은교와 무재 사이에는 사려깊은 배려와 따뜻한 애정, 그리고 담담한 듯 섬세한 유희가 기조를 이룰 뿐 폭력을 불러낼 수 있는 어떤 힘과 의지의 작용도 배제된다. 은교와 무재뿐 아니라 ‘오무사’ 할아버지와 여씨 아저씨 같은 입주자들도 타인을 깊이 배려하는 인물들로서, 소위 신자유주의적 경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소설 속에서 은교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존재감이 생생히 전달되면서 이런 희유한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림자에 잠식될까봐 걱정이지만 가난에 찌들지도 불행에 뒤틀리지도 돈의 가치에 휘둘리지도 않는 사람들, 상대방과 자신의 처지,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순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국가폭력은 물론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도 삶과 언어 속에 스미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서로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고 노래를 불러주고 이야기를 해주는 연인들—이들은 마치 참혹한 폭력과 부당한 불행을 겪으며 삶의 경지에 도달했고, 지금도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알리는 그림자의 그늘 아래서 수행하는 사람들 같다. 이들이야말로 아감벤이 ‘있는 그대로의 단독자’라고 이름붙인 존재에 가까운 게 아닐까. 그들에게 ‘딴사람-되기’를 상상해본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에 완료했다는 느낌을 준다.
황정은의 이 소설은 언어적 혁신의 면에서도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창비 2010)에 비견될 만한 성취이거니와(작품해설 「새처럼 꿈처럼 존재의 숲을 가다」 참조), 그 언어를 통해 도래하는 공동체의 새로운 존재의 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새로운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단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느끼게 해주며, 그런만큼 ‘정치적’이라고 부를 법하다. 이런 뚜렷한 성취를 보여준 작품에 한가지 흠을 잡자면 등장인물이나 그들의 관계가 너무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악함과 영악함, 너저분함과 더러움, 인정욕구와 허위의식, 권력과 부에 대한 욕구, 관능성 등이 거의 소거되었거나 아니면 모두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상당히 동질성을 띠고 이질적인 것들과의 대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이질적 요소들 간의 교호작용이 이뤄지면서 문득 복합적인 현실이 드러나는 소설적 진실의 차원에는 못 미치는 듯하다.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지만 여기서 다른 사랑이야기도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속물들의 세상에서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남녀가 만나서 전혀 속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기로 하고 그런 존재방식의 사랑을 끝까지 밀고나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는 이런 감당하기 힘든 주제를 다룬다. 이 주제는 황정은의 소설 못지않게 윤리적인 충동이 강한 것이다. 속물주의가 팽배한 현실의 기성체제와 단절을 선언하고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를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실패한 소설가인 주인공 ‘나’는 한달 동안 무작정 걸어다니다가 한 순수한 화가-남자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하고 일종의 반속물주의 예술가 ‘꼬뮌’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고립된 공동체의 일차적 문제는 이를 구성하는 남녀가 엄밀히 말하면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령 서울 한복판의 휘황찬란한 마천루를 보는 두 사람의 감각적 반응은 완전히 다르다.
—생각해봐. 도대체 누가 저런 데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저 빌딩들을 봐. 어때 보여?
—음.
풀은 생각했다.
—나라면 저런 주황색 조명은 촌스러워서 안 쓸 것 같은데.
—난 말이야. 저렇게 관념적인 물질을 본 적이 없어. 저건 욕망이라는 관념 그 자체야. 갖고 싶다, 갖고 싶은 마음 그것 자체. 그렇잖아? 그게 아님 저게 뭐겠어? 그게 아니면 저 괴상한 물건이 도대체 뭐겠냐고, 날 갖고 싶지? 날 사고 싶지? 이런 데서 살고 싶지? 그렇게 외치고 있잖아. 이건 내 귀에만 들리는 거야? 나는 저게 갖고 싶으니까? 근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146면)
서울의 빌딩들을 욕망이라는 관념의 순수한 결정체로 보는 ‘나’는 얼핏 보면 모든 것이 사유화되고 물신화되는 속물주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풀과 달리 스스로 그런 속물주의의 일원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부정하고자 한다. ‘나’는 특이하게도 ‘사랑’과 ‘책임’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놓고 풀로 하여금 일체의 생업을 중단하게 한다. “우리는 끝내 안정된 삶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원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그건 풀이 취직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취직을 한다면 그건 우리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뜻이고, 그건 풀이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가장 살아 있다는 걸 뜻했다.”(158면)
‘나’와 풀의 이런 무대책의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나’가 부자인 엄마와 동생에게 빌붙어서 경제를 해결하고 다른 한편 풀은 그림을 그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영위된다. 그러나 풀의 그림이 평가를 받고 김권이라는 타자가 둘만의 공동체에 개입하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풀과 김권이 가까워질수록 소외감과 시기심을 느낀 ‘나’는 알코올중독에 빠져들다가 마침내 풀의 소중한 그림을 파괴하고 만다. 이렇게 반속물주의 예술가들의 공동체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속물주의와 순수함 사이에 중간항을 배제하고 사랑과 책임을 배타적으로 설정할 때부터 이 연인들의 공동체를 유지할 전망은 없었고 오로지 파괴의 길만이 남았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속물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려 하지만 이 막강한 물질과 마음의 체제를 ‘실제적으로’ 극복할 가능성을 어디서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연인들의 공동체가 무너지기까지의 필연적인 과정, 상대와 자기를 가리지 않고 파괴하고자 하는 강렬한 ‘죽음 충동’은 김사과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매력과 심리적 호소력을 지니지만 예술적으로 볼 때는 감당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나’와 풀이 다시 만날 즈음에 풀은 속물주의 세계에 완전히 항복한 상태인데 그를 살려두면 앞서의 투쟁과 비판의 의미는 씁쓸한 웃음거리가 되고 그를 죽인다면 두 남녀간의 사랑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김사과가 말미에서 갑자기 환상적인 수법으로 전환하여 풀의 마지막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이런 딜레마와 관계가 있다. 또한 ‘나’와 ‘풀’ 각각이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을 그냥 받아들이는 ‘딴사람 되지 않기’와 둘 사이를 좁혀가려는 ‘딴사람-되기’의 시도도 모두 부족한 것이 그들의 사랑의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지 못한 원인이랄 수 있다.
박민규(朴玟奎)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는 ‘너무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여자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곤혹스러운 물음에서 출발한다. 우리 시대의 모든 가치와 감성이 외모지상주의로 수렴된다는 것, 그로 인해 못생긴 여자는 때로는 괴물보다 더 끔찍하고 때로는 투명인간보다 더 불가시적인 쓸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물음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그런 여자가 사랑을 하는 것은 괴물로 비춰진 감각적 형상의 윤곽을 해체하여 본래대로 돌려놓는 것이다. 가령 상대의 말에 침묵으로 대응하거나 ‘아니, 아니에요’라는 말밖에 못하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장문의 연애편지를 쓰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발화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섬세하게 다뤄진다. 이것은 정확히 랑씨에르적 의미의 ‘정치적’인 작업이자 아감벤적인 의미의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을 성취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랑이야기가 현실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낭만적인 판타지가 되면 이 정치적인 작업은 그 순간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 외모지상주의 시대에서 소외된 여자를 위로하는 또 하나의 문화상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민규의 사랑이야기가 도전하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에 동반되는 낭만적 분위기를 버리지 않은 채 환상적 통속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아슬아슬한 길이다. 이 소설은 외모지상주의 세계의 중심인 백화점 지하주차장—“거대한 백화점의 맹장(盲腸)”(102면)—을 소설의 ‘장소’로 설정함으로써, 그리고 백화점 지하주차장의 관리와 안내라는 비정규직 남녀들의 일상을 생생한 사실주의로 그려냄으로써 그후의 모든 미학적 정치적 작업의 바탕을 마련한다. 이런 사실적인 바탕 위에서 잘생긴 청년과 못생긴 여자가 서로를 발견하고 마침내 애절한 사랑을 꽃피우는 과정이 박민규 특유의 변신술의 화법과 곰살맞은 언어로 절묘하게 포착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온갖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이 외모지상주의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뿐더러 그 한가운데를 통과해서 두 남녀가 존재론적으로 점점 가까워지면서 말투가 달라지고 발화가 가능해지는 과정이 압권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딴사람-되기’의 과정과 자신의 콤플렉스/편견을 극복하고 자긍심/겸손함을 회복하는 ‘딴사람 되지 않기’의 과정이 동시진행형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꽤나 설득력 있다.
하지만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고 외딴 설경 아래 첫키스를 나누고 돌아오는 밤에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2년간 의식불명상태에 빠지고 수년간의 재활치료를 받게 되는데, 이런 전개가 소설의 극적인 재미를 높이기 위한 장치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제부터 본격화될 둘의 관계를 유예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확인된 후에 연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책임이기도 하다면 그 공동체를 함께 설계하고 꾸려나가는 일은 사랑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이 다루는 특별한 사랑에서는 그 어려움이 배가될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의 사랑이야기는 실로 용감한 예술적 시도이며 그 성과도 만만찮다고 본다.
이상 주목할 만한 세편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의 정치성을 짚어보았다. 작품을 논할 때 ‘치안’과 ‘정치’의 변증법적인 관계라든지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차이와 각별한 관계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우리가 흔히 가장 비정치적 영역으로 여기기 쉬운 남녀관계와 사랑이야기야말로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은 어느정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세편의 소설에서 ‘딴사람-되기’와 ‘딴사람 되지 않기’라는 존재의 두 과정 혹은 방식을 비교적 주의깊게 점검해본 것은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추적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아감벤의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이 촛불시위자들에게서 그리고 황정은 소설의 등장인물에게서 출현했을 가능성을 헤아려보기도 했는데, 향후 좀더 논의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가 소설의 정치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수작이지만, 김사과와 박민규의 주목할 만한 사랑이야기와 함께 놓고 비교할 때 세 소설의 정치적 성격도 분명해진다. 세편의 소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들뢰즈의 ‘딴사람-되기’와 아감벤의 ‘딴사람 되지 않기’(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의 존재방식이 상호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딴사람-되기’와 ‘딴사람 되지 않기’는 둘이 아닌 하나의 수행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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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특집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에는 진은영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에 대하여」, 정홍수 「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유희석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의 근대소설」이 실렸다. 앞으로 이 글들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밝힌다.↩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70면.↩
- 시(문학)와 정치의 만남을 꺼려하거나 불편해하는 평자들도 적지 않지만, 이런 평자들의 부정적 반응조차 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평자들 각각에 대한 적절한 논평으로는 신형철, 앞의 글 370~77면 참조, 2000년대 문학의 흐름에서 보면 시와 정치 논의는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지연된—촛불항쟁 덕분에 발본적이 된—대응의 측면이 있다.↩
-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6~37면. 이에 대해 신형철과 진은영은 각각 공감하는 반응을 보인다. 신형철, 앞의 글 377면 및 진은영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에 대하여」, 26면 참조. 진은영은 이 글에서 김수영의 문학적 사유가 랑씨에르의 미학적 정치성의 예술론을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문학적 자율성이란 문학적 타율성과 떼어놓을 수 없고 ‘치안’에 대한 고민이 ‘정치’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치열했음을 강조한다.↩
- 백낙청은 맑스주의의 전통과도 다르게 ‘전형성’이나 ‘재현’보다 ‘시의 경지’를 더 핵심적인 것으로 보며 ‘시’(문학)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수행하면서 어떤 경계도 두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치안’과 ‘정치’의 경계에도 매이지 않을 듯하다. ‘시의 경지’와 관련된 리얼리즘 논의는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참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256~59면 참조.↩
-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21면 및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33면 참조.↩
- 김홍중의 ‘포스트-진정성 체제’론은 97년체제론의 사회과학적 인식을 공유하는 한편 이 체제 사람들의 특징적인 태도와 심성의 변화까지 망라하는 풍부한 문화적 서술을 제공하기에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입장에서는 어떻게 촛불항쟁이 일어났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 시대구분론의 골자는 이렇다. “87년 민주화대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진정성의 에토스는 90년대를 거쳐 1997년의 IMF체제의 성립 이후에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삶의 태도, 즉 한편으로는 동물적(미국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속물적(일본적)인 에토스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붕괴된 듯이 보인다.”(『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6면)↩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97년체제론의 문제의식을 자기의 일부로 통합시킨—우리 삶의 토대가 87년 민주항쟁에 닿아 있되 97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와 시민들 간의 갈등이 본격화된다는—87년체제론이 좀더 설득력있어 보인다. 김종엽은 “혹자는 87년체제의 종언을 말한다. 그런 주장의 우파적 판본으로는 선진화론이 있고, 좌파적 판본으로는 신자유주의체제론, 97년체제론, 신평등연합론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입장들에 서면 우리가 목도한 촛불항쟁은 매우 설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김종엽 「촛불항쟁과 87년체제」, 『87년체제론』, 창비 2009, 127면.↩
- 현재의 국면은 87년체제의 후반기(남한의 시간표)와 남북관계의 위기가 고조되는 6·15시대 후반기(한반도 차원의 시간표)가 겹쳐 해체기의 분단체제가 위태로운 국면을 맞이한 듯하다. 이런 위기국면을 헤쳐나가는 돌파구는 좀더 착실하고 포괄적인 민주주의를 성취해내고 시민참여형 남북연합을 건설하는 데서 열릴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로는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참조.↩
- G. Agamben, Means Without End: Notes on Politics, tr. Vincenzo Binetti and Cesare Casarino, University of Minesota 2000, 89면. 국역본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100~101면 참조.↩
- 이 개념의 적절한 역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국역본에서는 ‘임의의 독특성’이라고 옮겼는데, 용어의 뜻을 살리지 못한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 정도로 풀어서 옮기는 것도 한 방법인데, 문맥에 따라서는 ‘독자성’보다 ‘단독자’가 더 적절한 경우도 있겠다.↩
- G. Agamben, The Coming Community, tr. Michael Hardt, University of Minesota 2007, 1면. “도래하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다”(The COMING being is whatever being)로 시작되는 첫째장 ‘Whatever’ 두루 참조. 앞으로 이 텍스트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 “whatever는 정확히 특수도 보편도 아니요 개별성도 일반성도 아닌 것을 지칭”(같은 책의 역자 노트 1, 106면)하므로 서구 형이상학의 오랜 이분법들을 넘어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 G. Agamben, 앞의 글 35~39면 및 Potentialities: Collected Essays in Philosophy, tr.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243~71면 참조.↩
- 아감벤은 ‘스펙터클의 사회’(society of spectacle)를 국가의 최종형태로 보고 그런 사회에서 여여한 단독자들이 대거 출현한다고 주장하면서, “도래하는 정치는 더이상 새롭거나 낡은 사회적 주체들이 국가를 정복하거나 통제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의 투쟁, 즉 있는 그대로의 단독자들과 국가기구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분리가 될 것”(Agamben, Means Without End 88면. 국역본 『목적 없는 수단』 99면. 번역은 필자)이라고 예측한다. 최종형태의 국가기구와 여여한 단독자들 간의 분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판다르거니와 촛불항쟁 참여자들의 태도는 국가기구를 해체하라거나 그것과 갈라서겠다기보다 오히려 국가기구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 이 소설에 대한 깊이있는 작품해설에서 신형철은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백의 그림자』, 173면)고 지적하는데, ‘비윤리적’이라는 표현은 과도하지만 전체적으로 타당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