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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시, 그리고 사물의 부재

고형렬 이정록 최승호의 시집들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이 있음. bj0611@hanmail.net

 

 

 

1. ‘젊은 시’의 외부

 

지난 몇년, 젊은 시의 미학적 전위성에 문단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시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한단계 상승했다. 시적 문법과 상상력의 변화,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유로 요약되는 젊은 시의 실험성은 새삼 문학의 시대성을 설명해주는 풍요로운 틀을 마련했다. 특히 현실적인 균열을 서정적 동일성으로 봉합하지 않고, 그 균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전혀 다른 시적 문법이 주류를 이룬 것은 무시할 수 없는 2000년대 시의 성과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젊은’이라는 비평적 호명을 생물학적인 잣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젊은 시’의 외부를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문학적 연속성이 세대적 경계에 의해 단절로 경험되게 만들고, 한 시대의 문학적 공과를 특정 세대(중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시는 ‘젊은 시’와 ‘젊은 시가 아닌 시’로 양분되는 듯하고, 이 새로운 분류법에 따라 ‘중견’이라는 단어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암묵적 평가가 90년대 중반 이후 시의 주류적 흐름이던 생태학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의 일종임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는 종종 한사람의 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언어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 집단적 망각을 배경으로 세사람의 중견시인들이 최근 출간한 시집을 읽는다.

 

 

2. 변신, 사물이 언어가 되는

 

고형렬(高炯烈)의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2010)는 ‘장미’가 ‘책’이 되는 거짓말 같은 변신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의 첫 구절은 이렇다. “침대에서 어둠과 빛으로 뒤척인 우울의 날/붉은 장미가 몸을 뒤집고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다”(「장미가 책이」). 이 변신이 가리키는 것은 ‘사물’이 ‘언어’가 되는 불가역적 변화, 즉 그 사물의 부재와 죽음이다. 사물이 부재할 때만 언어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이 변신술의 원리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갑자기 찾아왔던 것”(「장미가 책이」)이라는 불가항력적 진술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사건으로서의 변신. 이 변신의 알리바이는 변신 그 자체다. “빨간 향기의 장미”라는 물질적 대상이 ‘책’이라는 활자로 바뀌는 이 변신은 ‘시’의 메타포다. 다만, 이것이 인간에 의한 사물의 언어적 전용(轉用)이 아니라 전적으로 장미 “자신의 변신”임을 잊지 말자. 변신은 초월적 원인을 갖지 않는다. 거기에는 시인의 몫도 없다. 그래서 푸른미선나무는 “자신의 미선나무지 나의 미선나무는 되지 않는다”(「푸른미선나무의 시」)라는 진술이 가능하다. 시인의 몫이 없다는 것은 이 변신이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의 원리로는 해명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언어로의) 변신은, 시(詩)가 그러하듯이, 시인의 ‘낙망’ 속에서, “기다림도 없는 빛과 어둠 속에서” 불현듯 도착하는 수취인 불명의 사건이 된다.

사물의 죽음이 언어의 탄생을 가져오고, ‘언어’가 사건의 모든 것을 표현(기록)할 수 있다면 언어 때문에 절망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신’은, 시인은 물론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시작(詩作)은 언어를 넘어서는 사건의 효과를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딜레마와의 대면에서 시작된다. 가령 「광합성에 대한 긍정의 시」를 보자.

 

빛을 모아들이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동전만한 잎사귀의 멍들, 그곳에 각자의 원을 그려대는 것

이 동작의, 복습의 유희성

화법을 배워라 누군가 말했지, 장기를 둘 땐 장기를 말하지 않는다

사랑할 땐 사랑이란 말 절대 하지 마

「광합성에 대한 긍정의 시」 부분

 

‘광합성’은 변신의 비유이다. 그런데 ‘광합성’은 “장기를 둘 땐 장기를 말하지 않는다/사랑할 땐 사랑이란 말 절대 하지 마”처럼 언어외적인 사건이다. 빛을 모아들이는 잎사귀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변신-광합성은 “다른/꿈이 되어 다른 몸이 되고 다른 마음이 되면서/다른 시간 속”으로 넘어가는, “다른 계절 속에서 음, 그리고 또 노래가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다른’으로 거듭나는 이 변신에는 주체라는 고정점이 없고, 변신의 인과를 설명할 마땅한 논리도 없다. 이 논리의 부재 앞에서 시인은 “어떻게 문장을 이어가야 할지 나도 몰라”처럼 ‘언어’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시인은 다만 이런 불가항력적인 ‘사랑-변신-광합성’이 ‘나’를 취하게 만드는 ‘이명’과 ‘소란’이라고 진술할 수 있을 뿐인데, 불교의 윤회관념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생성/변신은 불변의 존재나 일자의 원리가 아니라 변신과 변화를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드러난다. ‘변신’은 “천년을 묻는 광케이블 피복 속 황금빛 유리섬유”(「광케이블의 기적의 시」)의 속도로 시인을 관통한다. 고형렬의 시에서 ‘변신’은 이처럼 ‘언어’의 문제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문제다.

고형렬의 문장들은 문법적 질서의 해체를 수반하지 않으면서도 절반쯤은 비문(非文)처럼 읽힌다. 비문의 언어들, 시적 사유의 비약, 뒤섞인 목소리들의 병치가 연출하는 반(反)문법·반(反)언어의 적대주의는 그의 시를 ‘소통’과는 다른 층위에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그의 시들은 “불완전한 문장”(「어느날은 투명유리창의 이것만이」)이거나, “까닭을 표하지 않고 끊어버린”(「손톱 깎는 한 동물의 아침」) 선문답과 유사하며, “형상할 수 없는, 뜻밖의 언어 부재”(「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에 직면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가 ‘소통’을 목표로 하는 언어가 아니며, 그 때문에 ‘소통’이라는 외적 강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화권이탈지역’(「통화권이탈지역」)은 바로 이러한 ‘통화=소통’으로부터의 탈주를 뜻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시=소통’이라는 지배적 관념을 부정하는가? 그것은 ‘소통’에의 강제가 ‘내부’와 ‘감각’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너무 쉬운 소통은 내부를 잃고 말기에/희미한 감각조차 조금씩 지워냈죠”(「꼭 말해야만 하나요?」). 하여, 시인은 ‘통화권이탈지역’에서 세상과 단절된 ‘잎들의 무늬’를 읽고, ‘결락된 감각’을 찾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고형렬은 시/시인의 존재의 근거가 자신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바, 시가 ‘소통’을 염두에 두고 발화될 때 그것은 ‘내부’와의 관계를 상실하고 ‘외부’라는 기능적·실용적 세계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상 그가 말하는 ‘내부’와 ‘감각’은 언어가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이거니와, 만일 시가 일상적 의미를 통해서 ‘외부’에 ‘내부’와 ‘감각’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글쓰기라면 그것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시에서 ‘언어’가 공리성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가 세상을 뒤바꾼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대담 「고형렬 시인과의 만남」, 『열린시학』 2006년 가을호 43면).

시가 ‘소통’의 외부라는 것, 문학의 가치란 결국 ‘언어’에 있다는 태도는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상식적인 정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시를 뜯어고치기는 나를 뜯어고치기보다 어렵다 (…) 나의 앞에 수많은 생이 기다린다 해도 미완의/그 한 편의 시만 못했다”(「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 “언어의 꿈을 꾸는 저 기형의 한 남자 (…) 시가 도달할 수 없는 핏빛 절망의 벽”(「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에서처럼 낙관적이기보다는 비관적이며, 언어에 대한 근대적 의식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형상할 수 없는, 뜻밖의 언어 부재”(「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라든가 “나는…… 날개의 나는, 찢어지고 절망한다, 이 불완전한 문장을 지울 수만 있다면”(「어느날은 투명유리창의 이것만이」) 같은 진술이 추가되면 비관적인 느낌은 한층 강해진다.

그는 결국 시란 언어의 문제이며, 시인에게 언어의 가치는 삶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언어는 “시가 도달할 수 없는 핏빛 절망의 벽” 앞에서 좌절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불가능한 경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꿈’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는 시인이 언어의 (불)가능성으로 찢긴 존재이며, 가능성 속에서 불가능성에 직면하고,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포착해야 하는 모순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언어에 대한 이 관념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불리문자(不離文字)를 아우르는 불교의 언어적 초월, 다시 말해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면서, 그렇다고 언어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깨달음의 경지다.

 

정치와 시는 언제나 맞은편에서 미래의 이곳을 본다

나는 순간, 이 나라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아졌다

고 말하고, 사진기를 어루만진다

매일 별을 보는 비정치적 천체물리학자가 아니지만

매일 말을 쓰러뜨리는 비천문학적 정치인도 아니지만

쉿, 조용 카메라를 별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

아비는 어둠에서, 걸레가 된 시간을 주워담는다

—「서서 별을 사진찍다」 부분

 

나는 가끔 이 남양주시 메인도로를 통과했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런 문장은 맞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이 안되는 문장을 계속 만들려고 한다

나는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

결코 모른다는 생각, 나는 이 이상한 생각에 막힌다

어느 시민도 이 모름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오늘 정오의 햇살의 남양주시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남양주시의 햇살의 정오를 밀치고 장님의

남양주시가 되려 한다 마른 햇살의 남양주시 정오!

생각만 해도 개체의 죽음과 삶을 훌쩍 뛰어넘는 듯

시청 앞에 국화, 눈구름 냉기 알알한 늦가을

슬픔과 기다림의 감정이 삭은 남양주시의 가을 정오

하지만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

자신이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르고 통과하고 있다

나와 말은 절망 속에서 햇살을 잡고 의문을 시작한다

—「비정치적 남양주시」 부분

 

이 시집에는 ‘정치’라는 시어가 포함된 두편의 시가 실려 있다. 「서서 별을 사진찍다」와 「비정치적 남양주시」가 그것이다. 전자에서 ‘정치’는 ‘시’의 대척점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정치’와 ‘시’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과 달리 비천문학적인 정치인은 “매일 말을 쓰러뜨리는” 존재다. 한편 「비정치적 남양주시」는 ‘안되는 문장’에 관한 시처럼 읽힌다. 도대체 ‘안되는 문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양주시는 모른다”처럼 비문 아닌 비문으로 구성된 언어의 세계이다. 그것은 문법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비문이지만, 문법의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문이 아니기도 하다. 비문이란 문법의 법적 가치를 인정할 때에만 가능한 말이 아닌가.

이런 불가사의한 언어론은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라면 여기에서 존재와 무라는 존재 물음(무는 존재자가 아님에도 존재자처럼 쓰이기 때문이다)을 끄집어내겠지만, 시인은 ‘언어의 남양주시’라는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 문장은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결코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를 거쳐, “남양주시를 방문한 나를 모르는 장님의 남양주시”로 변주된다. 관습적인 언어 사용, 그러니까 문법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남양주시는 모른다”라는 문장은 결코 ‘안되는 문장’이 아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문법이라는 법적 차원이 아닌, 언어와 세계라는 층위에서 이 문장을 곱씹는다. 이러한 언어의 아포리아는 마치 ‘내게는 없는 게 있어’라는 상투적 문장이 제기하는 철학적 물음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 시에 ‘비정치적 남양주시’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매일 말을 쓰러뜨리는 비천문학적 정치인”이라는 진술의 진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비정치적 남양주시」에서 ‘남양주시’라는 언어가 ‘비정치적’인 까닭은 그것이 ‘말’을 쓰러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형렬의 시에서 한 단어의 정치성은 그것이 말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이것은 결국 시(언어)의 정치성이 곧 언어의 비정치성과 등치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시의 정치성과 언어의 비정치성은 사실상 동의어인 셈이다.

 

 

3. 관계의 형식들

 

이정록(李楨錄)의 첫 시집에는 「서시」라는 시가 등장한다. “마을이 가까울수록/나무는 흠집이 많다.//내 몸이 너무 성하다.”(「서시」) 사람을 ‘나무’에 빗대어 표현한 이 짧은 시는 ‘마을’, 즉 세계와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한 인간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다. ‘거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회복을 열망한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거리의 발견 이후 이정록의 시는 집요하게 ‘관계’를 시화(詩化)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다섯번째 시집 『의자』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발화하는 삶에 대한 통찰(“사는 게 별거냐/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의자」))은 ‘관계’에 관한 사유가 ‘의자’라는 시적 상관물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의자’는 결국, 삶이란 타인이 쉴 수 있도록 서로 의자가 되어주는 관계라는 시적 인식이 발견해낸 형상이다.

최근 시집 『정말』(창비 2010)에서 ‘관계’의 사유는 가족에서 마을로, 남루한 삶 전체로 확장되는 면모를 보이는데, 이 확장의 극단에는 ‘생명’이라는 문턱이 자리하고 있다. 이정록의 시가 ‘인간적 삶의 진실’과 ‘생태학적 세계인식’이라는 비평행적 차원을 넘나드는 감각을 드러내는 것은 ‘관계’의 범위가 인간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정록의 시는 흔히 입담, 풍자, 해학의 세계라고 평가되지만, 실제로 그 세계의 근저에는 유머와 해학 못지않은 비감(悲感)이 흐르고, 동시에 생명이 다양한 형식으로 관계맺고 있다는 아날로지(analogy)의 비전이 전제되어 있다. 옥따비오 빠스는 아날로지를 개별성이 총체성을 꿈꾸고, 차별성이 통일성을 지향하는 은유라고 정의했다. 아이러니가 세계를 파편성으로 인식하는 태도라면, 아날로지는 세계를 통일성으로 인식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흔히 낭만주의자들이 ‘리듬-으로서의-세계’라는 관념으로 표현한 것처럼, 우주와 인간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전인 아날로지는 “생각되기보다는 느껴지는 것이며, 느껴지기보다는 ‘들리는’ 것”(옥따비오 빠스 『흙의 자식들 외』)으로서의 시적 리듬을 강조하고, 나아가 우주의 모든 것들이 운율과 리듬의 방식으로 서로 조응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우주적 상응의 비전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시집 『정말』이 ‘나’의 외부를 향해 다양한 관계의 형식으로 감각의 촉수를 내밀고 있는 이끌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음은 사실이다.

가령 시집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풍경을 보자. 이 풍경은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붉은 마침표」)처럼 동쪽 바닷가의 해송들과 서해의 소나무들이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치고 있는 형상이 전부다. 이러한 발상은 이 시의 2연에서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잇는 것으로 변주되는데, 이는 ‘하늘’이라는 결과물이 가리키듯이 세계란 만물이 다른 것들을 향하는 ‘굽음’과 ‘휨’으로 충만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에 대한 만물의 이끌림, 그것은 「반달편지함」에서 “그대 돌우물”이 “내 가슴 쪽”으로 기우는 것으로 변주된다.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 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추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하늘 주소까지

—「도깨비기둥」 부분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옆걸음」 부분

 

두 개체의 대등한 만남, 혹은 그 만남으로 인해서 둘이 ‘하나’가 되는 융합적인 사건, 이것이 사랑에 관한 일반적 관념이다. 사랑이란 두 강줄기가 합수(合水)되는 것, 또는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하나’가 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사랑에 관한 이런 전통적인 이해의 저편에, 사랑이란 일자의 법칙을 초과하는 ‘둘’이 되는 사건이라는, 즉 만남을 통해서 하나가 아닌 둘에 대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자리한다. 이 경우,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는 사건이고, 사랑의 주체들은 ‘둘’로써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사랑이 관계 자체를 없애버리는 절대성의 세계라면, ‘둘’의 사랑은 비-관계의 형식을 고안해냄으로써 사랑을 미지의 다자(多者)를 향해 개방한다.

그렇다면 이정록의 시에서 ‘사랑’이라는 관계는 둘 가운데 어느 쪽일까? 「도깨비기둥」에서 시간은 ‘만남’이라는 사건을 기준으로 양분된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사랑은 강물이 합쳐지듯이 ‘하나’로서의 사랑이었으나, “당신을 만난 뒤”의 사랑은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처럼 ‘쏠림’과 ‘함께함’으로 가시화된다. 이것들은 ‘굽음’과 ‘휨’의 또다른 양상이며,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둘’로써 존재하는 사랑의 관념에 가깝다. ‘쏠림’이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향해 다가서는 것이지만, 그 다가섬은 무한수렴이라는 수학적 관념처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가섬이 무한수렴이라는 문턱을 넘어 ‘하나’가 될 때, 그리하여 ‘둘’의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때, ‘쏠림’으로서의 관계 또한 사라지게 된다. 「옆걸음」은 이 ‘쏠림’으로서의 관계를 ‘측근’이라는 시어로 바꿔놓은 일종의 변주곡이다. 새 두마리가 전깃줄 위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들의 사랑은 밀고당기는 것, 그러니까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옆걸음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시인은 ‘측근’이라는 결코 달갑지 않은 단어에서 ‘사랑’이라는 만남/관계의 사건을 끄집어내고, 동시에 ‘마주봄’으로서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다가섬으로써 완성되는 평행적 관계를 발견한다. 이정록의 시는 이처럼 다양하게 가시화되는 관계성의 형식을 탐구한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 아닌가/내 왼어깨엔 끈이란 끈/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불주사」), “둥근 우주의 숨길이 그리하여 한 끈으로 이어진다”(「울음의 진화」), “인연이란 게 다 코가 꿰인 울음보인 것을”(「콧물의 힘」)에서처럼 ‘끈’의 형상 또한 관계의 평행성을 의미하는 시적 장치의 일종이다.

이정록 시에서 ‘관계’는 ‘하나’의 단면인 동시에 ‘첫번째’ 단면이다. 다양한 단면들로 구성된 그의 시세계에서 모든 단면의 가치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특히, 단면의 다양성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관계’의 그물망으로 이해하는 시선과, 글쓰기를 삶에 대한 성찰이나 확장의 일종으로 밀고나가려는 문학적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글쓰는 이가/펜혹으로 세상을 두드리듯, 소는/멍에터에 묻힌 어린 주름살의 힘으로/대지 위에 초록 주름을 잡는다”(「멍에」)라고 말할 때, 얼어붙은 강가에 뿌리내린 ‘갈대’(「갈대」)에서 ‘마른 붓’의 형상을 발견할 때, 그것들은 비유라는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개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문제는, 이 개방이 이야기체의 산문시, 즉 유기적인 방식의 진술로 일관되어 자연에 대한 익숙한 표상을 반복하거나 그것의 재생산으로 흘러가버린다는 데 있다. 현대시의 산문성은 구어적 문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진술의 불가능성에서 가시화하며, 자연에 대한 감각의 확장 또한 기성의 감각을 배반할 수 있을 때에만 적절한 시적 효과를 생산할 수 있다. 이는 ‘시’와 ‘삶’의 (불)연속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비롯되며, 또한 그 (불)연속성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실감의 폭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굳이 미학적 쇄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감각의 개방은 우리의 자동화된 인지방식을 뒤흔드는 스타일에 대한 고민 없이는 성취되기 어려울 것이며, 기존의 공식화된 표상들을 해체하지 않는 한 새로운 감각 또한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4. 심연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승호(崔勝鎬)의 시어들은 ‘존재’를 향해 뻗은 언어의 길이다. 세계와 사물에서 사용가치를 모두 제거해버린, 사용가치나 교환가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이름붙일 수는 없지만 알몸과 맨얼굴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긍정하는 그 존재를 향한, 사유를 넘어선 사유, 그것이 그의 언어들이 도달하려는 불립문자의 세계다. 최승호의 시는 문명의 추악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문명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생태학적 상상력과 선(禪)적 언어로 직조된 그의 시들은 한편으로는 문명의 현실을 비판하고 ‘존재’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며, 또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 안에서 알몸으로서의 자연적 상태를 발견하려는 사유의 궤적을 드러낸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뿔 2010)에서 ‘존재’를 향한 최승호의 시적 여정은 두 궤적이 교차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사물과 생명을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근대의 왜곡된 가치체계를 해체하려는 문명비판의 비전이 하나의 계열이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동반하는 글쓰기에 대한 메타시가 또 하나의 계열이다. 이것은 ‘존재’의 회복이 시적 언어로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유의 흔적이고, 글쓰기라는 비실용적 행위가 유용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문학적 관념의 소산이다. 존재의 가치하락 과정과 달리 그것의 회복은 현실에 대한 부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최승호의 시에서 문명비판은 ‘존재’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호의 시에서 문명비판은 어떤 방식으로 가시화될까? 먼저, 『북극 얼굴이 녹을 때』에 등장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주목하자. 최승호의 시에서 현대인은 종종 비(非)인간으로 형상화된다. 대도시의 밤을 질주하는 “고독한 기관사”(「먼지흡입열차」)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인어” “검정과부거미” “낙타들” “병든 흡혈귀들” “외눈알 거인들” “물귀신”처럼 동물이나 비인으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동물의 형상은 현대인의 습성이나 행동에서 유추된 “버리려 해도 잘 버려지지 않는/기이한 이미지들”(「황량한 해안의 하룻밤」)이고, 흡혈귀, 거인, 물귀신 같은 비인들은 문명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음울한 삶에 대한 비유다.

최승호의 시에서 ‘존재’ 상실은 인간만의 비극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질병이다. 하여, 그의 시에서는 ‘동물’ 또한 문명에 의해 매개되거나 생명력을 잃은 사물로 등장한다. 가령 「늠름한 왕게」에서 “온몸이 붉고 붉은 왕게”는 시장으로 팔려와 결국 ‘찜솥’ 안에서 먹을거리로 대상화되고, 「펼쳐진 늑대」에서 몽골의 늑대는 “울란바토르 백화점 진열대 위에/네 다리를 펼치고 넙죽 엎드려” 있는 가죽으로 묘사된다. 「늙은 도마뱀의 발걸음」에서 늙은 도마뱀은 “약국 앞에서의 더러운 최후”라는 아이러니로 가시화되고, 「벙어리 개」에서 애완견은 성대가 제거된 상태로 살아가며, 「물뱀」에서 ‘물뱀’은 로드킬(road kill)로 인해 “덤프트럭에서 떨어진 끈 한 토막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제 대도시의 고양이들은 쥐를 잡지 않는다. 대신 쓰레기 자루를 기웃거리는 뚱뚱한 큰 쥐들처럼 변해버렸다. 나는 그 고양이들을 쓰레기고양이, 아니면 큰쥐고양이라고 부르고 싶다.

 

쓰레기고양이는 쓰레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쓰레기는 풍성하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모자란 적이 없다. 쓰레기로 임신하는 고양이, 새끼들에게 쓰레기 국물 출렁이는 젖통을 빨게 하는, 쓰레기고양이는 구청 청소부들의 골칫거리다. 자루를 찢어놓고 마구 터져 나온 쓰레기들을 골목 여기저기 흩어놓는 것이다. 치워도 치워도 자꾸 나타나는 쓰레기, 쓰레기는 반복된다. 요일이 반복되고 낮과 밤이 반복된다. 그리고 쓰레기를 뒤적거리던 세월 속에서 늙어버린 고양이가 마침내 큰 쥐처럼 죽는 것이다.

쓰레기고양이는 죽어서 너절한 쓰레기가 된다. 내면에 보석 하나 없었던 고양이, 사랑 받지 못하고 배고픔과 눈치 속에서 보낸 서러운 생애, 그래도 배부르게 쓰레기를 먹고 게으르게 누워서 따스한 햇살 속에 낮잠을 자는 행복의 순간들이 더러 있었지.

—「쓰레기고양이」 전문

 

이딸로 깔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등장하는 도시 레오니아가 비극적으로 예시하듯, 오늘날 쓰레기는 현대가 봉합해놓은 강력한 유령의 기호이다. 현대의 예술이 숭고한 미와 쓰레기, 성스러운 공간과 배설의 공간 사이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힌 것처럼,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현대적 씨스템에 의해 작동하는 도시적 삶은 쓰레기와 상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대의 위기관리 씨스템에 의해, 혹은 날로 증가하는 기술의 화려함에 의해 임시적으로 입막음되어 있을 뿐이다. 낮의 햇빛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그 유령들은 도시의 하루가 끝나는 자정 무렵이면 어김없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에 포획된 도시는 신성한 상품의 자리가 실상은 쓰레기의 장소였음을, 그리하여 도시 자체가 거대한 쓰레기장이었다는 비밀을 폭로한다. 최승호가 도시와 여성의 관계를 맨홀과 인어의 관계로, 도시와 현대인의 관계를 사막과 낙타의 관계로, 마침내 현대를 “물질들의 사막”(「멕시코로 가는 버스」)으로, 현대인을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낙타들”(「취한 밤」)로 묘사하는 장면에도 이러한 인식은 개입되어 있다. 물질이 넘쳐나는 도시는 최승호의 시에서 점차 사막으로 변해가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낙타로 바꿔버리는 흑마술을 상연한다.

그렇지만 「쓰레기고양이」에서 현대의 비극이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쓰레기로 연명한다거나, 도심 곳곳에서 목격되는 고양이들이 “쓰레기 국물 출렁이는 젖통”으로 새끼를 키운다는 충격적 이미지에만 새겨져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다. 이 시에서 현대라는 비극의 정점은 바로 ‘고양이’ 자체가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다. 더이상 쥐를 잡지 않는 쓰레기고양이는 연을 거듭하면서 점차 쓰레기로 인식된다. 가령 2연의 “치워도 치워도 자꾸 나타나는 쓰레기, 쓰레기는 반복된다”라는 진술에서 반복의 대상은 쓰레기이면서 동시에 쓰레기고양이이며, 3연에서 쓰레기고양이는 사후에 “너절한 쓰레기”가 된다. 이 변신은 ‘존재’ 상실을, 아니 ‘존재’ 자체가 쓰레기로 취급되는 현실을 지시한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를 떠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교각은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다. 이것은 시집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어느 날 시(詩)는/내 늙은 가죽을/허물처럼 벗어던질 것이다”(「여름」)라는 진술에서도 암시되고 있거니와, 언어-표현에 대한 긴장감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최승호의 시들은 여느 생태시들과 구별된다. 이 진술에서 ‘내 늙은 가죽을 허물처럼 벗어던지는’ 주체가 ‘시’임에 주의하자. 시인은 언어-표현이라는 사건 안에서의 주체는 글을 쓰는 행위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시’라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시 쓰기가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갱신이나 확장, 아니 자기극복의 과정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칸나」는 시에 관한 이런 관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다.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현무암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 그 붉은 꽃을 본 후로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도 쓰려고 애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글이 이렇게 갑자기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붉은 칸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날, 무슨 일인지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는 칸나를 보고 있었다. 시커먼 화산재들이 치솟고 뜨거운 용암들이 흘러넘치는 한라산 밑에서 나는 꽃 붉은 칸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굳어버린 불의 돌, 현무암, 그 거무스름한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의 붉은 꽃, 오늘도 칸나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는 칸나에 대해 더 잘 쓸 수도 있겠지.

—「칸나」 전문

 

이 시는 ‘칸나’라는 대상에 관한 시가 아니라 ‘칸나’가 결코 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시다. 이 시의 화자는 ‘고백’의 주체이지 세계를 자신의 내면으로 불러들이는 마술적 힘의 소유자가 아니다. 최승호의 시편들은 자아의 특권적 지위를 강화하기보다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기능한다. 편의상 ‘칸나’를 둘러싼 고백적 진술을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1연),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2연),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3연), “다음에는 칸나에 대해 더 잘 쓸 수도 있겠지”(4연)라는 네 문장으로 요약해보자. 1연에서 ‘싶었다’는 ‘칸나’를 시적 대상으로 포착하려는 시인의 욕망을 뜻하지만, 진술의 핵심은 이 욕망이 완성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2연에서 ‘싶었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뜻하는데,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처럼 시인은 ‘존재’로서의 칸나가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언어도단)에 있어서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물론, 이 ‘언어’란 ‘시’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소통의 기호로서의 언어를 가리킨다. 최승호에게 ‘시’는 ‘언어’ 너머의 ‘언어’이고, 언어도단의 상태를 횡단하는 선문답과 같은 도약의 언어다. ‘칸나’에 대해 쓰겠다는, 즉 언어를 통해 ‘칸나’를 대상화하려는 시인의 욕망은 언어도단과 불립문자 앞에서 반복적으로 미끄러진다. 어떤 언어도 ‘칸나’의 존재에 도달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4연에서 ‘다음에는’이라는 미봉책을 제시한다. 김소월의 ‘먼 훗날’이 그러하듯이, 이 ‘다음에는’은 사실 ‘언어’로써 ‘칸나’의 ‘존재’에 다가갈 수 없다는 불가능을 뜻한다.

이처럼 최승호의 시에서 자아(주체)의 위상은 특권적이라기보다는 회의적이다. 이 ‘회의’는 데까르뜨적 주체를 낳은 ‘이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을 “나는 나를 지겹도록 의심했고 의심하는 나를 역겹도록 불신해 온 사람”(「라일락」)이라고 소개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새’ 등의 제목을 통해 자신이 사물-대상에 이름(정체성)을 부여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님을 고백한다. 그에게 시 쓰기는 이름을 부여하는 언어적 규정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다가서는 행위이며, ‘존재’의 층위에서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침묵의 분할」에서 이 언어의 불가능성은 ‘침묵’으로 표현된다. “밖이 없는 침묵이 관통하는 안이 없는 침묵”. 최승호에게 시란 불립문자 앞에서 침묵의 인질이 되는 행위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불립문자 앞의 바보,/침묵의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검은 잉크병」).

 

 

5. 언어, 삶, 미학

 

지난 세기, 시를 동일한 소재(사건)로부터 다수의 변이체들을 산출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시가 일상어에 가해진 변형이며, 시적 스타일의 차별성이란 언어에 대한 의식의 차이와 문장의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정의에는 시(언어)가 사물의 부재와 관계한다는 생각이 생략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시의 언어는 세계나 사물을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나아가 언어가 그것들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일상어가 ‘언어는 사물을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곳에서, 시는 ‘언어는 의미의 세계로 환원되지 않는 매혹적인 힘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한다. 시적 언어는 대상과의 관계가 아닌, 언어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언어이면서 언어가 아닌 것으로서의 시. 아니, 언어이면서 언어를 넘어서야 하는 언어로서의 시. 이것이 시인에게는 ‘언어’가 곧 트라우마(trauma)인 이유다.

중견 시인들의 언어가 시적 긴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떠돌고 있다. 그러나 고형렬 이정록 최승호의 신작 시집은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지나칠 정도로 강렬하고, 언어를 매개로 시에 관한 사유를 펼쳐나가는 고투가 분명하게 감지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시가 치열하게 대결하는 ‘언어’를 모두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무엇과 이웃관계를 형성하고 있느냐에 따라 ‘언어’의 함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형렬에게 언어는 삶의 저편에 속한다. 그는 시가 현실에 지나치게 근접하면 시인이 ‘내부’를 잃게 되며, 그 상실이 필연적으로 언어를 한낱 소통의 도구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고형렬의 시에서 언어는 ‘삶’과 경쟁한다. 이러한 경쟁이 시어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는 유용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언어를 ‘시와 정치’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조금 지나치다. 다만 그는 ‘시는 언어다’라는 문학적 신념을 극단까지 밀고나갈 따름이다. 이 경우 시는 삶도 미학도 아니고, 오직 언어의 문제가 된다. 반면 이정록의 시에서 ‘삶’과 경쟁하는 언어라는 발상을 도출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데, 그의 시에서 언어의 자양분은 삶으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이다. 언어와 삶의 이러한 근친성은 일상적 미학이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낳지만, 삶의 충만한 상태에서 발화되는 서술성이 때로 시적 긴장을 잃어 이야기에 그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언어와 삶의 거리, 그것은 고형렬의 시에서는 지나치게 멀고, 이정록의 시에서는 지나치게 가깝다. 최승호의 시에서 이 거리의 적정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미학’의 몫이다. 그는 언어를 사유하되 미학을 포기하지 않고, ‘삶’에 시선을 두되 철저하게 미학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고형렬과 이정록의 시에서 언어가 삶의 관계항이라면, 최승호의 시에서 언어는 미학의 관계항이다. 고형렬이나 이정록의 언어는 미학의 바깥에 있고, 최승호의 언어는 미학의 내부에 있다. ‘언어’와 ‘삶’의 관계, 또는 ‘미학’의 안과 밖. 이 물음들이 바로 ‘시와 정치’라는 최근의 논의가 묻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 삶, 미학이라는 세 항을 중심으로 이들의 시론을 재구성한다면, 그것은 곧 ‘시와 정치’라는 물음에 대한 세개의 응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