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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평론집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등이 있음. kclim@skhu.ac.kr

 

 

청춘을 향한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

신경숙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3245『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2010, 이하 네티즌들의 약칭 『어나벨』로 표기)를 읽고 나니 몇가지 느낌이 연쇄적으로 파고들었다. 아마도 『엄마를 부탁해』의 엄청난 반응이 채 사그라지기 전에 연재가 시작되고 뒤이어 곧바로 책으로 출간되어서일까, 비교적 가볍게 쓴 작품일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예단과 달랐다. 『어나벨』은 『엄마를 부탁해』와 함께 작가가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차례로 탄생시킨 이란성쌍둥이 같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청춘’이라는 식상하기 쉬운 소재에 남다른 소설적 육체와 창조적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야말로 신경숙(申京淑)의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그야말로 작가답게 삶을 산다는, 마치 이 작품을 위해서 어떤 소소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품 속에 들어앉아 있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을 보면 이제 작가의 일상 하나하나, 시선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작품을 키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하여 뭔가 진국의 외곬이 다다르기 시작한, 고집스러운 장인적 몰입이 눈에 잡혔다. 일반적인 대중성과 예술성 차원이 아니라 이 작가만의 어떤 장악력, 독특한 사유의 세계와 미학을 생각하게 했다.

사실 신경숙 소설을 따라읽어온 사람이라면 낯익은 구석이 있다. 상처와 관계, 부재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실존적 경향이나 등장인물의 형상, 서술방식 등에서 『깊은 슬픔』 『기차는 일곱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등과 쉽사리 한몸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어나벨』은 한결 성숙한 지점에 이르렀다.

이 책은 확실히 문학적 수완이 돋보이는 신경숙 미학의 한 성채다. 작품의 모든 언어는 그만의 문체로 직조되었고, 이야기는 미학적으로 구조화되었다. 정윤과 명서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이들에게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 단과 미루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구체적 전개과정은 복잡하다. 정윤과 명서와 단, 명서와 정윤과 미루 사이에 형성된 미묘한 삼각관계에서부터 분신자살한 언니의 영혼에 붙들린 미루의 고독한 죽음, 군대에서 총기사고로 의문사한 단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정윤과 명서의 엇갈림 등.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또 윤교수의 삶이 멀리서 감싸고 있다. 구조 자체가 윤교수의 강의(크리스토프의 교훈)에서 시작해 그의 유언(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들 네 청춘이 밟아가는 행로인 것이다.

얼핏 보면 소설인지 수필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듯하지만 소설의 서사를 바탕으로 취하면서 여러 글쓰기를 정교한 퍼즐조각처럼 짜맞춤하고 있다. 정윤을 화자로 삼은 서사를 줄기로 삼되 각 장의 끝에 명서의 ‘갈색노트’를 병치함으로써 시점의 쌍방화, 보완화를 꾀한 것도 특징적이지만, 부분부분 각 장면에서 구사되는 서술방식과 그 효과가 다채롭다.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섬세하고 예민한, 그러면서도 눈에 선하게 잡히는 이미지 묘사는 강한 상징성과 함께 이번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시간을 세워놓고 묘사하는 듯한 영상적 기교가 돋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영상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깊숙한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니 그런 언어의 맛이야말로 이제 신경숙 문체의 한 특성이다. 작가는 사실 등장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위나 말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이 이월하도록 표현함으로써 독자를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정윤에게 들려준, 자살한 언니를 뒤쫓아가던 미루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듯 마치 누군가가 나지막이 읊어주는 것 같다.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조차 유체이탈한 듯이 스스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알맞은 거리감과 울림이 작품 안에 가득하다.

이런 미학적 활력으로 작가는 소설 속 젊은이들의 삶을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조형한다. 시위와 분신, 실종사건, 의문사 등 1980년대 사회정치적 상황을 강력히 환기하는 극적 모티브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공허와 고독, 무엇보다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젊음이라는 일반적인 실존적 정황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아마도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이런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이들이 정신적・심리적 난쟁이가 되기를 거부하며 벌이는 공감의 공동체에 있으며, 그럼에도 또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성을 연민으로 끌어안는 데 있지 않을까.

대체로 이들 청춘은 모두 열에 들뜬 모습이다. 그것은 곧 존재의 불안 속에서 내부에 어떤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체가 침입한 균과 싸울 때 나타나는 증상처럼 심리적 또는 정신적인 전투를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미래 언니의 분신, 거식증으로 인한 미루의 죽음, 단의 의문사 등 작품을 꿰뚫는 일련의 죽음들은 비극의식을 강렬히 환기한다. 그런데 이 비극의식이란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존경을 내포한 시대적 장례(葬禮)이자 미학적 장례(莊禮)다. 우리는 희열보다 슬픔을 더 잘 느끼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보는 작가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 역시 더욱 커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대개의 소설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데 비해, 신경숙은 확실히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하나의 멜로디를 지향하고 있음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누구도 자기 자신이 자신의 존재나 기쁨의 원인 자체일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이 서로 관계하며, 서로를 통과한다고 말한다.

『어나벨』은 자신의 문학이 특정한 관형어로 규범화되는 것을 싫어한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청춘소설, 연애소설, 성장소설’로 규정함으로써 그 의도를 드러낸 소설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방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앙드레 지드나 헤쎄, 일본작가들을 거론하며 그에 맞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있는 청춘소설’을 쓰고자 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동안의 작가를 생각해보면 다소 뜻밖이다. 『어나벨』은 그래서 불가피하게 비교의 운명을 띨 수밖에 없고, 아마도 동시대성을 생각하면 무라까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가 대표적인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상실의 시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만큼 닮은 점들이 없지 않다. 사회적 배경이 유사한 과거시대를 상정한 점이나, 고독과 공허에 빠진 청춘들의 삶과 정체성을 다루는 대체적인 내용에서나, 주요 등장인물의 자폐적 성향이나, 무엇보다 죽음이 하나의 중심 모티브인 점에 그렇다.

그러나 두 작품은 확실히 길이 다르다. 『상실의 시대』가 청춘소설 하면 연상되는 청춘군상만의 좌충우돌 모험기라면, 『어나벨』은 네명의 청춘이 중심인물이지만 그들 못지않게 윤교수나 고양이 에밀리 등이 중요한 존재다. 윤교수의 존재는 어느 면으로나 각별하다. 그는 직선적인 진화의 시간관을 거부하고 순환론에 가까운 혹은 전통을 중시하며 시간의 누적과 지혜를 생각하는 작가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젊은이들만의 반항과 일탈, 모험이 아니라 지혜로운 어른과 함께 세상을 공유하고자 하는, 또 청춘 속에서 그 이전의 소년(소녀)도 바라보는, 그런 시간의 공간성・역사성을 중시한다. 등장인물들과 닮기도 하고 공간성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고양이 에밀리의 묘사도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상실의 시대』가 ‘죽음과 스’라면 『어나벨』은 ‘죽음과 애정’이다. 『어나벨』이 동적이요 충동적이고 폭발적인 ‘애(愛)’보다는, 정적이며 없는 것처럼 있는 ‘정(情)’의 관계를 지향하고 있음은 확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상실의 시대』가 대단히 현대적인 것으로 시대적 보편성을 얻었다면 『어나벨』은 확실히 고전적인 것, 윤리적인 것으로 시대적 보편성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애(愛)와 정(情)의 넘나듦과 폭발력이야말로 청춘이 갖는 시간성의 본질이라면 아무래도 『어나벨』은 한편으로 치우친 듯하다. 시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맥놀이도 그러하다. 사회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얽히고설킴이 좋았던 『외딴방』에 비해 『어나벨』은 감성적인 것이 압도한다.

어쨌든 낯익은 청춘소설을 거부하며 이렇게 대중적인, 어떤 의미에서 통속적이기조차 한 요소에 품격을 부여해, 적극적으로 우리말의 무늬를 새기고자 하는 교양소설의 면모에서, 그리고 그의 연이은 문학적 성취를 생각하면 바야흐로 신경숙의 진경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