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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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李炫承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가 있음. tuplos@naver.com

 

 

 

암전

 

 

전기가 나가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어올린 채

붕괴의 조짐을 감지한 갱부처럼 숨을 멈추고

동공이 활짝 열린 눈을 껌벅이면서

조심스럽게 저녁의 식탁을 빠져나온다

 

탄부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싣고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우리는 밤으로부터, 정전으로부터

악취 나는 강물조차도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물에 찍혀 반짝이는 바람의 발자국들

 

미껠란젤로는 돌 속에서

피에 젖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빛이 다시 엄습할 때

캄캄한 돌 속을 다녀온 사람처럼 우리는 눈을 감는다

 

전화 받는 사람의 얼굴에는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와 표정이 새겨진다

우리는 동작을 멈추고

듣기 위해서 눈을 감고

보기 위해서 입을 다문 채

 

 

 

「농담」을 위한 삽화

 

 

1. 진지함의 미덕

누군가가 묻는다

-그런데 당신은 왜 늘 그렇게 진지한 겁니까?

다른 누군가가 대답한다

—그게, 다른 걸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2. 비관적인 속도

비관주의자들은 갈파한다

죽음이야말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전망을 좋아하지 않고

당대를 과도기로 보는 발전주의를 혐오한다

어느날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게 된 스티브 블래스처럼

우리는 다만 최선을 다해 무너져가고 있을 뿐이다

 

3. 음모론

피격 받고 후송된 레이건이 응급실 담당의에게 건넸던 농담은

“당신은 공화당원입니까”였다

대통령의 건재함에는 비용과 당파성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레이건의 다음 농담은

“얼마면 되겠소”가 아니었을까

 

4. 라임라이트

목젖이 떨어져나가도록 웃다가 사래 걸릴 때

웃음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웃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비용이다

입맛 없이 우겨넣는 식사처럼 그것은 몸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