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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소설가 특집

 

5001

김성중 金成重

1975년 서울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hippieshow@naver.com

 

 

 

허공의 아이들

 

 

소녀는 포치에 앉아 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듯 허공에 두 발을 엇갈려 젓고 있다. 진지하고 골똘한 얼굴로, 다섯살부터 쭉 지어온 표정 그대로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는 중이다. 오후 햇살이 소녀의 눈동자에 부딪쳐 불투명한 음영을 만들어낸다.

소녀의 어머니는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했고 그 책에 나오는 포치 때문에 이 집을 샀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낮고 기다란 계단을 올라가면 지붕이 딸린 현관이 나오는 서양식 포치는 그녀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베고니아 화분으로 이곳을 장식한 후 고리버들 의자도 하나 놓아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손의 일부처럼 이어진 뜨개바늘을 움직여 레이스 덮개들을 떠냈다.

지금 소녀는 혼자다. 밤늦게 돌아오던 소녀의 아버지도, 뜨개질을 하던 어머니도 남아 있지 않은 빈 집에서 조용히 소멸을 기다리는 중이다.

발아래의 땅은 크고작은 구덩이들로 가득하다. 틈새에서 검은 유혹이 흘러나와 공중에 드리운 소녀의 발목을 휘감는다. 소녀는 가장 깊어 보이는 틈새를 바라보았다. 그 속으로 뛰어들면 단단한 대지와 사라진 사람들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는 난간을 꼭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배트를 휘둘러 200개의 스윙을 채웠다. 야구부 전체가 사라졌지만 소년은 매일 7km의 로드워크를 하고 폐타이어에 배트를 휘둘렀다. 운동을 거르면 몸이 무겁기도 했지만 달리 시간을 보낼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실하지만 기량이 늘지 않는 후보선수, 그게 소년이었다. 코치의 칭찬에는 안쓰러움이 묻어났지만 소년은 자신의 키가 10cm만 더 크면 주전 외야수가 될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소년은 자전거의 스탠드를 발로 차 옆으로 붙였다.

집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소년은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전부터 금이 가 있던 집이 허공에 떠오르면서 창문과 벽 사이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틈새가 벌어졌다. 평생 남의 집을 지어주느라 떠돌던 아버지는 정작 자신의 집은 돌보지 않았다. 상관없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집이 비어 있으니까. 소년은 단순하게 생활했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되도록 의문을 품지 않으려 했다.

다세대주택과 빌라로 이루어진 골목을 누비는 사이 소년은 수십개도 넘는 구덩이를 지나쳤다. 나무가 뽑힌 자리에는 커다란 혹이 강제로 떨어져나간 것처럼 움푹 팬 구덩이가 생겼다. 주변 흙이 무너져내리느라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소요가 거리 전체에 가득 차 있다. 구덩이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네 블록을 지나자 똑같은 집이 연달아 들어선 타운하우스 단지가 나왔다. 소년은 이런 곳으로 옮겨 살면 어떨까 생각하며 속도를 늦췄다. 움직이는 생물만 없을 뿐 단지는 고스란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여섯째 집 앞을 지날 때 소년은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피아노 소리, 분명 피아노 소리였다. 서툰 연주였지만 지난 두달 내내 자신의 말소리 외에 별다른 소리를 듣지 못한 그에게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소년은 한쪽 발을 페달에 걸친 채 연주가 끝날 때까지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대로 가버릴까 싶었지만 다른 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전거에서 내린 소년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소녀가 건반을 건드린 것은 적막을 혼자 견디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울리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긴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제 또래의 남자아이일 줄은 몰랐다.

—누, 누구세요?

소녀는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지만 꾀죄죄한 유니폼을 입은 방문객도 그에 못지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정말 사람이 있네.

두 사람 사이에 경계심이 눅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소녀가 열다섯 동갑내기라는 것과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소년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 여자아이와 말을 섞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

소녀는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소년의 말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야.

—잘은 모르겠는데 뭐가 뭔지 알아도 별 소용은 없을 것 같아.

—그치만 궁금해하지도 않는 건 뭐랄까, 무책임하잖아.

아이들은 시선을 돌려 허공에 떠 있는 열두채의 타운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단지 1m쯤 떠올랐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대화는 재앙의 수순을 헤아려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녀는 나무가 한꺼번에 뽑혀가던 새벽,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낯선 소리가 들려 나가봤더니 머리 위로 흙이 우수수 떨어졌어. 그날 날아가는 새들을 본 게 마지막이야. 동물이 다 사라졌잖아.

—응.

—집에 들어오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처음엔 몰랐어. 왜 그런지.

집으로 들어간 소녀는 반복적인 일상의 리듬이 미묘하게 흐트러진 것을 알아차렸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밖으로 나왔는데 평소와 달리 네개의 계단이 아닌 다섯개의 계단을,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는 허공의 계단을 내려온 것을 깨달았다. 집이 떠 있어요! 소녀가 집과 땅 사이에 한뼘쯤 난 틈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부모님을 불렀다. 평소에도 존재감이 적은 아버지는 그날따라 모습이 희미해 보였다. 즉각 눈치 채지 못했지만 소녀의 부모는 점점 투명해지는 중이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는 목소리밖에 남지 않았어. 어머니는 사라지고 옷만 허공에 있는데 이런 말이 들려오는 거야.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어.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느닷없이 고아가 되어버린 충격이 아직 소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소년이 화제를 돌렸다.

—같이 나가볼래? 먹을 것도 찾아보고.

—당분간 먹을 건 있어. 게다가 나도 곧…… 그렇게 될 텐데 뭘.

소녀는 부모의 소멸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거기에는 병도, 사고도, 살인도 없었다. 수증기가 햇빛에 닿아 사라지듯 증발해버렸을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라는 말을 힘주어 발음해놓고 냉랭한 얼굴이 되었다.

 

소녀가 소년의 집에 온 것은 일주일 뒤의 일이다. 소년의 집은 언덕 위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방 두개,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로 된 크지 않은 집이다. 벽에는 정말로 커다란 금이 가 있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소년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코 푼 휴지를 어지러이 날리고, 소년이 덮고 자는 이불 위로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다 다른 틈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바람이 좁은 틈을 통과할 때 내는 독특한 소리들, 휘파람이나 울음소리 같은 것들 때문에 집은 늘 들썩들썩하고 시끄러웠다. 마치 이 근방의 바람이 모조리 소년의 집에 들러붙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소년은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니며 발에 차이는 물건을 한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소녀가 집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옳았다. 땀냄새 나는 티셔츠가 널브러져 있고 라면국물이 얼룩진 신문지가 놓인 집안은 무척 남루해 보일 것이다.

소녀는 당돌한 시선으로 구석구석을 눈뒤짐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햇반 위에 곰팡이가 핀 식빵이 눈에 들어왔다. 곰팡이는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러니까 저 밋밋하게 생긴 녀석이랑 나랑 곰팡이랑, 이렇게 남았단 말이지? 속으로 곱씹어본 소녀는 제 말에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부은 눈에 두꺼운 입술을 가진 소년은 다소 둔해 보이는 인상이다.

—너는 겁 안나?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네가 앉아 있는 거기, 벤치프레스.

—응.

—나 그거 하루에 200개씩 해. 그러니까, 전에는 그랬다는 거지.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무슨 소리야?

—체력이라도 달리지 않으려고 개인훈련을 하는 거야. 3학년에도 주전이 되지 못하면 고등학교 가서는 야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세상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

소년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스포츠백에 글러브와 배트를 챙겼다.

—짐이 그게 다야?

—응. 필요한 건 마트에서 가져오지 뭐.

 

옆집으로 옮겨온 후에도 소년은 여전히 오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소녀는 2층 침실에서 잠이 덜 깬 눈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했다. 두 아이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했지만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했다. 시간이 지나자 함께 밥을 먹거나 마트에 다녀오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대형마트는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었다. 예전 같으면 에어컨이 작동해 더위를 식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품의 무덤으로 변해버린 마트 안에는 눅눅한 어둠뿐이었다.

소년은 헤드램프를 꺼내 머리에 쓰고 소녀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갱도에 들어간 광부처럼 열주(列柱)를 이룬 상품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양말과 티셔츠, 유통기한이 넉넉한 가공식품과 공구쎄트 같은 것들로 금세 카트를 채웠다. 소녀는 물티슈와 과일통조림을 담고 소년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재빨리 생리대와 속옷을 밀어넣었다.

마트의 끝자락에는 어마어마한 부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보라색으로 변한 생선과 검게 변한 냉동육이 곰팡이 외투를 입고 있다. 물큰하게 녹아내린 과일은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곤충마저 사라진 탓에 부패의 풍경은 무척 고요했다.

밖으로 나오자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늘에 앉았다.

—건배라도 할래?

소녀는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삿뽀로, 칼스버그, 호가든, 그밖에 종류별로 집어온 맥주를 꺼내 주르륵 늘어놓았다. 성적 좋은 모범생으로 살아온 날들에 의미가 사라졌듯 지금의 이 유치한 치기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 한번도 어머니가 선택해주지 않는 상태에 놓인 적이 없었어. 소녀는 자신의 진정한 문제를 깨달은 사람처럼 쓴웃음을 짓고 모든 캔을 따서 한모금씩 마셔보았다. 각기 다른 맥주지만 맛은 하나였다. 미지근한 맥주의 맛.

망설이던 소년도 맥주 캔 하나를 골라 들이켰다. 소녀가 풋 웃었다. 웃느라 눈 밑 보조개가 팼다. 소년은 소녀의 미소에 위축됐고, 소녀가 자기보다 키가 크다는 사실에도 기가 죽었다. 어쨌건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소녀는 날마다 허공의 키를 쟀다. 줄자의 끝에 아버지의 서재에서 집어온 문진을 매달아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120cm, 135cm, 156cm. 소녀는 어부가 그물을 걷는 것처럼 아침마다 줄자를 감아올리고 길이를 확인했다. 허공은 소녀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한동안 소녀는 같은 옷을 두번 입지 않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새 옷 입은 모습을 봐줄 사람이라고는 자기보다 키 작은 소년뿐이었으므로 금세 싫증이 났다. 어둡고 텅 빈 상점을 순례하는 일도 시들해졌다. 특히 쇼윈도우의 마네킹과 마주치는 건 사라진 사람들의 유령을 보는 것 같아 섬뜩했다. 소녀는 새로운 일상에 적응했지만 그럼에도 왜 자신과 소년만 남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소년은 갑작스럽게 우울해지는 소녀를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 캐치볼을 가르쳐주고 금전등록기에서 지폐를 한다발 꺼내와 포커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의 가짜 돈처럼 의미가 사라진 진짜 돈을 수북이 쌓아놓고 치는 포커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소년이 벌인 유희 중 가장 재미있는 일은 예전에 살던 집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더운 공기가 상승하듯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른 집은 이제 박스 두개를 쌓아야 올라갈 수 있었다. 소년은 주유소에서 가져온 가솔린을 집안에 마구 뿌린 후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자 구르다시피 뛰어내려와 소녀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허공에서 불타는 집은 근사한 구경거리였다. 불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처럼 틈새로 마구 비어져나와 붉은 혀를 드러내고, 연기를 뿜어내고, 유리창을 깨뜨렸다. 이 집에서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어. 소년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전에 살던 집들과 태어난 집까지 찾아내 모조리 불 지르고 싶었다. 소녀도 파괴할 무엇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방화에 가담했다. 골목의 집들을 닥치는 대로 태우는 동안에는 땅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종일 불을 지르고 다닌 아이들은 허기를 느꼈다. 소년은 파란 꽃이 그려진 법랑 냄비에 라면을 가득 끓여 소녀와 함께 먹었다. 식사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먹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음식을 숭배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세상은 점점 부서지고 있지만 열다섯짜리의 식욕은 여전히 왕성했다.

 

두 사람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물은 2m 이상 떠올랐으며 길은 조금만 헛디뎌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추락할 함정에 불과했다. 전에는 훌쩍 뛰어넘었던 작은 구덩이도 이제는 빙 돌아가야 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거리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변하면서 외출은 모험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돌아다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목적 없이 걸어다니다 지치면 아무 곳에나 기어올라가 낮잠을 잤다. 작은 호텔을 발견한 두 사람은 깨끗한 리넨 시트가 깔린 침대를 골라 쓰러지듯 누웠다.

밖에는 여전히 지진이 나는 것처럼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년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소년이 곁에 있으면 소녀도 잠을 잘 잔다. 하지만 악몽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소녀의 악몽은 늘 똑같다. 땅의 구덩이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와 자신이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이다. 꿈속에 너무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소녀는 ‘씨드’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냥 ‘손’이라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그 손에 목이 졸릴 것처럼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녀의 실수였다. 이름이 생기자 씨드는 왕성한 생명력을 부여받고 인격과 버릇까지 갖춘 채 꿈속에서 살아갔다. 씨드는 침실 벽과 창문 사이로, 욕실의 갈라진 타일 사이로 손톱 없는 손가락을 넣어 틈을 벌렸다. 소녀가 잠든 동안 씨드는 꼼꼼하게 세상을 부수고 있었다. 꿈속에서 씨드는 이 세상을 거두고 다른 세상을 건축하려는 신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 소녀가 서둘러 소년을 깨웠다.

—넌 그런 생각 안해봤어? 사라진 사람들이 다른 세상 어딘가에 옮겨 심기는 중인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창세기인 셈이지. 우린 선택된 걸까, 아님 누락된 걸까?

소년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웅얼거렸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사라진 건 잘됐다고 생각해. 시체를 치울 필요가 없잖아.

—사람들이 죽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어쩌면 정반대로 우리 둘만 투명해진 것인지도 몰라. 다른 사람은 다 그대로인데 말야. 그 편이 훨씬 말이 되잖아.

—확실한 건 하나야. 죽으면 끝이라는 거.

소년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만 소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구덩이에 돌을 던져봤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 언젠가 저 구덩이들이 땅을 죄다 집어삼킬 거야.

소녀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간헐적으로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끈처럼 가느다란 공포가 소녀의 목을 조였다. 소녀는 귀를 막고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씨트러스, 싸이프러스, 미노타우로스…… 이즈음 소녀는 되는대로 단어를 읊조리는 버릇이 붙어 있었다. 어떤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다는 듯이. 땅의 몰락에 대항하는 소녀의 음성이 소년의 꿈속으로 스며들었다. 씨트러스, 싸이프러스, 미노타우로스……

 

소년과 소녀는 두가닥의 로프와 각목을 엮어 줄사다리를 만들었다. 전에 쓰던 사다리가 짧아지자 아예 길이를 연장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든 것이다. 허공은 이제 줄자로 잴 수 없을 만큼 자라났고, 아이들은 제 키의 세배쯤 되는 공중에서 내려와야만 땅을 밟을 수 있다.

먼저 내려간 소년이 기다리는 동안 소녀는 출렁거리는 사다리에 발을 디뎠다. 소녀는 얇은 얼음판을 건드리듯 땅에 두어번 발을 굴러보고서야 줄사다리에서 손을 놓았다. 소년과 나란히 걸으면서 소녀는 문득 놀랐다.

—이젠 나보다 키가 크네.

—요새 허리랑 다리가 너무 아파. 이거 봐.

소년의 종아리에는 갑자기 자라느라 살이 튼 흔적이, 성장의 채찍이 여러개 나 있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른스러워졌다. 살아남으려면 빨리 철들어야 했다. 소녀는 먼 곳으로 떠나는 이민자처럼 끊임없이 목록을 작성하고, 불필요한 세간을 내다버리고, 생존의 필수품을 한번 더 선별해 가지런히 쌓았다. 안방은 천장까지 생수병으로 채워졌고 1층 주방과 거실은 통조림 창고처럼 변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소년은 아예 소녀의 집으로 옮겨와 함께 지냈다. 거센 빗줄기에 토사가 빠르게 씻겨나가자 막연한 불안이 또렷한 형상으로 변했다. 아이들은 땅에 남아 있는 것과 허공에서 살아가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점점 높이 떠오르는 허공을 택한다면 머지않아 완전히 고립되는 날이 올 것이다. 반대로 딛고 있는 땅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지상은 너무 위험했다. 그 모든 경우보다 빨리, 몸이 투명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가올 날들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했다. 늪처럼 변해버린 지상에 내려가본 이후 집에 남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는 데는 쉽게 합의를 봤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입장이 달랐다.

—생각해봐. 뭐 하러 마트에서 물건을 나르는 수고를 하느냔 말야. 그냥 거기서 살면 간단하잖아.

—마트는 냄새가 너무 심해. 그리고 사람 사는 곳도 아니잖아.

—곧 아무데도 못 가는 날이 올 거야. 그러면 여기 있는 물건들로 버틸 수 있겠어?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가자.

—혹시 알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지.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것처럼 느닷없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말란 법도 없잖아.

소년은 소녀의 터무니없는 희망에 말문이 막혔다. 희망을 버리면 다 괜찮아진다. 하루하루 살아가다 어느날 툭, 필라멘트가 끊어지듯 죽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솔직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낯선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내 방에 있었으면 좋겠어.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 두 사람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소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방점을 찍고 있고, 소년은 살아갈 날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기 공간에 애착이 남다른 소녀와 달리 소년에게는 먹을 것도 충분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일 수도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소녀의 곁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소녀를 떠나 더 오래 삶을 붙들 것인지를 두고 소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비가 그치면 난 나가겠어.

소년이 마지막 말을 내려놓자 세찬 빗소리가 두 사람의 침묵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빗방울이 약해졌다. 여전히 안개비가 뿌렸지만 소년은 미리 챙겨둔 가방을 메고 몇주 만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더는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장마에 갇혀 있는 동안 허공이 20m 이상 불쑥 자라난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바로 아래의 땅은 흙탕물이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로 변해 있었다. 사다리의 길이를 억지로 늘여본들 황토색 급류를 피할 도리가 없다. 소년은 같은 높이로 떠오른 옆집으로 계속 이동해 폭포를 피해 내려갈 방법이 없는지 궁리해보았다. 하지만 타운하우스의 집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고 바로 옆집조차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건물들은 길과 대지를 잃어버리고도 멀쩡하게 제 모습을 유지했는데, 그 때문에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허공의 금빛 무덤들. 소녀는 타운하우스의 다른 집들을 이렇게 불렀다.

소년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갇혀버린 게 분해서 발을 구르고 벽을 마구 쳤다. 단단한 근육들이 소멸에 맞서 싸우겠다는 듯이, 적어도 이 부당함에 대해 화를 내기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팽팽히 불거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맞서 싸울 적이 없기 때문에 소년의 근육과 분노는 무용지물이었다.

먹장구름 위로 조각보 같은 파란 하늘이 선뜻 비쳤다. 그 순간 소년의 분노는 세상의 유일한 분노였고, 소녀의 무기력한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자신과 소년을 묶어주는 단 하나의 끈이 오지 않을 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염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자주 다퉜다. 소녀는 물을 아끼지 않는 소년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고, 소년은 소녀의 공상에 비아냥을 숨기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며 격렬하게 싸울 때도 있는데 그러다보면 아까운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집안에 갇혀 더위를 견디는 날이 이어지자 두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되는 민감한 부분을 알아서 피해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서로를 외면할 도리가 없으므로 가급적 빨리 화해하는 편이 나았다.

소년은 달력과 시계를 모두 버렸다. 지루한 시간과 나날이 줄어가는 통조림의 비례를 헤아려보는 대신, 달력과 시계를 버림으로써 초조함의 독기를 빼버린 것이다. 소녀는 완성된 천 피스짜리 직소퍼즐의 올록볼록한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백 피스는 강아지 그림, 오백 피스는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천 피스는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었다. 소녀는 절반가량 퍼즐이 완성되면 도로 흐트러뜨리고 다른 쪽 절반을 맞추기 위해 조각을 뒤적거렸다.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는데도 소년의 키는 계속 자라났다. 재앙이 시작된 이래 소년의 키는 8cm가 넘게 컸다. 멸망 직전의 세계에서도 소년의 성장판은 닫히지 않았고 소녀는 매달 달거리를 했다. 성장은 그들에게 통조림의 계산법을 요구했고, 유희의 수준과 정도까지 간섭했다. 그래봐야 소년에겐 힘들여 노동할 곳이 없고 소녀에겐 아이를 낳을 세계가 없는데 말이다. 소녀는 한가지 커다란 물음을, 반쯤 저버린 신에게 물어야 했다.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보면 대지는 끓어넘치는 진흙수프처럼 보였다. 거대한 구덩이는 한복판에 검은 눈알을 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로 뻥 뚫린 그 눈알이 어쩌면 우주와 이어져 있는지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맹렬한 햇빛이 가시고 바람이 선선해지자 소년은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팔굽혀펴기 120회, 윗몸 일으키기 80회 등 나름대로 계획을 짜서 몸을 움직였다. 소녀는 소년이 물구나무를 설 때가 가장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헐렁한 티셔츠가 흘러내려 마른 몸과 갈비뼈가 드러날 때마다 소녀는 어떤 긴장을, 거의 성적인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초가을의 날씨를 누리기 위해 포치에 앉아 바깥풍경을 바라볼 때였다. 문득 흠가지 않은 푸른 대륙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 봐, 바다야!

—미치겠네. 대체 집이 얼마나 떠올랐길래……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소년은 오랜만에 보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가 지면서 수평선 끝에는 오렌지와 핑크색이 섞인 구름이 리본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끝장나는 세계뿐이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꼭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네.

소녀는 반쯤 투명해진 어머니와 함께 포치에 앉아 비행기를 바라보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최후의 희망을 안고 무너지는 땅과 하늘 사이를 날아가며 필사적으로 도피중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단단한 땅을 발견했을까? 아니면 어느 고도에 이르러 투명해지는 소멸을 맞이했을까? 어느새 비행기는 사라지고 하늘에는 긴 비행운만 남아 있었다. 소녀는 희망과 절망의 무늬들이 파란 하늘 속으로 완전히 흩어져버릴 때까지 포치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소녀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꺼내 읽었다. 거기에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상류층 처녀들, 플란넬 양복, 깨진 꿈의 파편이 숨쉬고 있었다. 소녀는 가질 수 없는 감정에 굶주려 지나간 시대들, 1920년대의 낭만을 빌려 공포를 밀어냈다. 풍요가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소녀는 무릎에 책을 내려놓은 채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우수에 젖었다.

 

추위가 시작되자 소년은 물건들이 더 많아 보이도록 옮겨놓는 일에 몰두했다.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쌓은 통조림을 엇갈려 배치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묘하게 쌓아도 식량이 줄어드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넓어진 거실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요 며칠 그들은 운무에 갇혀 있었다. 젖은 휴지를 켜켜이 쌓아놓은 것 같은 구름 아래 또다른 구름층이 빠르게 흘러갔다.

마침내 구름 위로 지붕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며칠 후에는 탁 터진 목화솜 같은 구름 속을 절반 이상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소년은 큰 소리로 소녀를 불러 이 모습을 감상하도록 했다. 그들은 하얀 구름이 만들어놓은 새로운 대지를, 그 위에 포근히 자리 잡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꼭 천국 같아.

소녀가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말라붙은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구름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그 일이 시작됐다. 소녀는 초경을 하던 날처럼 온몸이 다른 리듬으로 재배열되는 것을 느꼈다. 소매를 걷고 햇빛에 팔을 비춰보면 솜털 끝부분이 흐릿해진 것이 보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살갗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여전히 자극에 반응하는 몸과 점차 사라지는 몸 사이에 갇힌 소녀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 외로웠다.

투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소녀는 주방의 잡동사니를 치우고, 식탁 위에 삼천 피스짜리 퍼즐을 꺼내놓았다. 증기를 내뿜는 구식기차 곁에서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낙천적인 그림이었다. 소녀는 해를 등지고 앉아 조금씩 사라지는 몸뚱이 대신 퍼즐조각을 채웠다.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볼 때마다 소년은 가슴이 먹먹했지만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소녀의 모습은 자신의 미래이기도 했다.

소녀는 아주 잠깐, 남자아이와 알몸으로 잠든 자신을 노려보는 부모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부모는 지상에 머물던 전생의 기억 같았다. 허공에는 금기로 시작되는 어떤 윤리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오래전부터 죄의식 없이 서로를 만질 수 있었다.

—너를 좋아해.

어느 밤에 소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옅어진 육체만큼이나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고, 달이 뜨고, 주변에 소음이라고는 없이 고요했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였다. 너를 좋아해. 소녀는 분명히 해두겠다는 듯이 한번 더 똑바로 말했다. 소년은 기쁨에 사로잡혔지만 즉시 겁에 질렸다. 이 고백이 남아 있을 그에게 지옥을, 소녀가 없는 세계에서 소멸을 맞기까지 그리움의 지옥을 불러일으킬 주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눈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동공이 희미하게 비쳐보였다. 몸속으로 들어간 민달팽이의 뿔처럼. 소년은 두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소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아파?

—아프진 않아. 그냥 모든 감각에 두툼한 솜이 들어찬 것 같아. 너도 뿌옇게 보이고 네 목소리도 물속에서 듣는 것 같아. 언젠가 이 솜이 가득 차면……

소녀의 얼굴 윤곽이 조금 흔들렸다. 소년은 소녀가 우는 대신 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눈 밑 보조개가 패고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웃음.

—내가 잠들면 꼭 깨워줘.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싶어.

소녀의 마지막 희망은 소멸의 순간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잠든 사이에 사라지는 최후는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꾸벅꾸벅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소녀를 찾았다. 불면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추위가 심해졌기 때문에 소년은 걸칠 수 있는 모든 옷을 껴입었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모자를 두개 겹쳐 썼다. 거의 목소리로만 남은 소녀는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벼운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선반 위에 사탕이 좀 남았을 거야. 과일 생각이 날 때 먹도록 해.

소녀는 초록색과 노란색과 빨간색 사탕을 차례로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초록색은 청포도맛이야. 노란색은 파인애플맛이고 빨간색은 사과맛이고, 흰색은…… 흰색은 생각이 나질 않네.

소년은 대꾸가 없었다. 여러날 동안 소년은 혹독한 추위와 혼곤해지는 의식, 곧 혼자가 될 거라는 공포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긴장이 느슨해진 사이에 잠이 그들의 작별을 삼켰다. 코가 막혔는지 입으로 내는 숨소리가 거칠어서 소년의 잠은 아주 탐욕스럽게 보였다. 소년은 진지하게, 불면으로 구겨진 피로의 주름을 펴고 있었다.

 

밤과 낮이 한번 더 바뀐 후에야 소년은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생기가 솟구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기억이 되돌아와 현재의 비극을 상기시켰다.

식탁 위에는 완성된 삼천 피스짜리 퍼즐이 놓여 있었다.

소년은 퍼즐이 소녀의 주검이라도 되는 양 건드리지 못했다. 옆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대신 통조림 네개를 꺼내 한꺼번에 먹었다. 스팸을 먹고, 황도를 먹고, 번데기를 먹고, 콘쌜러드를 먹었다. 빈 깡통은 유격수에게 송구할 때처럼 힘껏 던져버렸다. 커다란 호를 그리며 날아간 통조림통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은 통조림통처럼 공중에 몸을 던져버릴까 생각해봤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위를 올려다볼 때와 마찬가지로 아득한 허공뿐이었다. 구덩이마다 검은 눈알이 박혀 있어. 소녀는 틈새의 가장 깊은 부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속으로 빠진다면 끝없이 추락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추락밖에 없는 삶. 아찔한 속도 속에서 어른이 되고 주름살이 생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에야 소년은 퍼즐을 들고 포치로 나왔다. 그리고 소녀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한 팔을 난간에 걸친 채 허공에 발을 드리웠다. 소년은 퍼즐판을 거꾸로 들고 털어보았지만 뜻밖에도 퍼즐조각은 완강하게 맞물려 있었다. 그래서 장갑을 벗고 한가운데 박힌 조각 하나를 빼냈다. 기차의 중간 부분이었다.

소년은 잿빛 공중에 퍼즐조각을 하나하나 뿌렸다. 마지막에는 퍼즐판마저 버렸다. 이제 소년에게는 맨 처음 빼낸 조각만 남았다. 어떤 그림도 될 수 없는 딱 하나 남은 조각. 그게 자신이었다.

먹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소년은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봤다.

놀라운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말라버린 뿌리의 숲. 지상에서 사라진 식물들이 떠 있는 곳이었다. 거꾸로 된 꽃다발처럼 풍성한 뿌리뭉치가 있는가 하면, 몇가닥 되지 않는 잔뿌리도 있었다. 좀더 올라가자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소년은 이 풍경을 소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온세상의 부품이 공중에 떠 있어. 낱낱의 부품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는 중인 거야. 소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무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소녀는 어떤 말을 들려줄까?

소년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바싹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볼 생각이었다. 양철로 된 양동이를 찾아낸 소년은 그 안에 나뭇가지와 종이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연기는 매웠지만 그마저도 반가웠다. 온기가 집안을 데우자 자기보다 한뼘 이상 작아진 소녀를 안고 있던 어느 오후가 떠올랐다. 길과 대지 없이 떠 있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확고한 믿음이 목소리가 되어 소년의 내부에 울려퍼졌다. 소녀는 사라지고 너는 혼자가 될 거야. 마침내 예감의 순간이 이렇게 도래한 것이다.

소년은 기억에 사로잡힌 채 조금 울었다. 그러자 모든 틈이 맞물리고, 길이 떠오르고, 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딘가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나는 거의 다 왔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는 사라지고, 소년도 사라지고, 이 순간의 기억도 소멸될 것이다. 과일 사탕의 맛, 책 속의 사람들, 허공의 금빛 무덤, 씨트러스, 싸이프러스, 혹은 미노타우로스라는 발음, 옅게 부풀어오른 소녀의 가슴과 애처로운 배…… 그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소년은 허공의 거리에 매달린 기억의 왕국이었다.

어디선가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몇달 만에 부쩍 자란 소년이 전부터 들어오던 소리였다.

뼈가 자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