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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17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꼬뮌의 조건

버추얼리즘의 문학을 앓기

 

 

윤인로 尹仁魯

1978년 경북 영천 출생. 동아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inro@naver.com

 
 

1. 어떤 문체: 존재의 올과 결, 그 착잡함

 

김현의 일기, 비평가의 자의식. 그가 일기라는 은밀하고도 사적인 삶의 기록양식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허락한다면 이 글을 그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시작했으면 한다. 그의 일기는 독서일기다. 들통나길 은근히 바라면서 쓴 통념적인 일상의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글에 대한 글이다. 언어에 대한 언어, 곧 메타-언어적인 것으로서의 글쓰기. 대체 그렇지 않은 글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일기라는 가장 내밀한 영역마저 타자의 글에 의한 감염과 물듦을 통해서야, 타자의 언어의 삼투를 통해서야 비로소 씌어질 수 있다는 자각은 막상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런 사정은 그의 타자론으로 가만히 이끌리게끔 한다. 눈앞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던 김현은 이렇게 적었다.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1

공포와 경이는 한 타자의 엉킨 양면이다. 그런 엉킴 없는 매끄럽고 동일적인 타자에게 생동은 없다. 거꾸로 말해, 모순적인 것의 엉킴이 타자를 생동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 어떤 합리적 소통으로도 늘 변모하는 타자의 저 엉킴을 온전히 조정할 수는 없다는 자각. 그런 조정이 때때로 타자의 생동함을 옥죄고 급기야 타자의 파괴로까지 이어지는 길일 수 있다는 회의. 그것은 그때까지의 김현을 떠받치고 있던 기왕의 근거와 토대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곧 지성의 순수성을 통해 갈등을 조율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으로부터 말년의 김현이 감행한 ‘자발적 망명’(싸이드) 혹은 자기-탈구축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 물음을 조금은 더 무거운 것으로 느낄 때, 그의 독서일기는 타자에의 감각에 뿌리내리고서 타자의 시간을 견뎌내려 한다는 점에서 삶의 어떤 태도의 모색이며, 그런 모색의 조건에 대한 몰두로 읽힐 수 있다. 어쩌면 그런 견딤이야말로 사람의 일과 사회의 내면에 대한 그의 비평적 질감을 가늠케 하는 시선 하나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자와의 접속과 탈주를 통해 탈근대적 자본의 포획운동에 응전하려는, 이른바 ‘다중-되기’ ‘꼬뮌들의 네트워크’ 등 한국 꼬뮌주의의 문학론과 존재론에 대해 말하려는 이 글이 말년의 김현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 일기에 그의 존재론적 입장을 지탱하는 어떤 고통이 착잡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버추얼리즘’(virtualism)의 전복적 운동으로 펼쳐지는 꼬뮌주의의 기쁨과 우정에다 존재-사건의 고통과 비극을 맞세워보려 한다. 그 둘의 관계는 한쪽은 이기고 다른 쪽은 지는 관계, 곧 싸움시켜 결판내는 관계가 아니라 섬세한 맞세움을 통해 ‘사이-공간’의 구성에 함께 참여하는 관계다. 때로 그 맞세움은 거센 충돌로 드러나기도 할 것이고, 때로 두 입장 사이에서의 어떤 진동으로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 입장으로 빨려들지 않고, 그 곁에서, 입장들의 교착과 결렬을 섬세하게 듣는 귀를 가졌으면 한다.

듣는 귀, 촘촘한 귀, 중재하는 귀. 잠시 입을 닫고는 온통 듣기. 그런 듣기가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관습화된 매너이거나 겸손을 가장한 냉소일 수는 없다. “듣기는 화자의 몸을 깨우고, 그 정신을 섭동케 하고, 그 무의식을 해방시켜서 자기 ‘아닌’ 자기, 자기보다 ‘큰’ 자기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한다”2는 문장은 듣기의 의미에 관해 고요히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김현의 한 대목을 들어볼 수는 없을까. 박몽구(朴朦救)의 『십자가의 꿈』(풀빛 1986)에 대한 일기의 한 대목을 거듭 읽으면 그의 문체의 뿌리를 가만히 어루만질 수 있다. “권력/진실의 대립을 보여주는 「꿈 71」 같은 시들이 더 깊고 깊이있게 다뤄져야 하고, 묵비권, 고문, 배신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과연 그곳에는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만 있었는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곳에 진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떠나…… 답답하고 답답하다.”(21면, 1986.3.18)

“과연 그곳에는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만 있었는가?”라는 문장에서 ‘그곳’은 감옥이다. 이 물음은 민주화투쟁으로 옥살이했던 이들 모두가 과연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깐깐한 추궁일 것이다. 김현은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자리가 민주화투쟁의 이면적 진실이 거하는 곳일 수 있다고 썼다. 투쟁에 나섰다가 징역 살고 나와서는 그 사실을 입신출세의 도구와 근거로 삼는 이들은 분명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문제를 떠나…… 답답하고 답답하다”라는 문장은 문제로부터의 이탈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로의 더 깊은 침잠이다. 그들은 과연 의로운가라는 물음의 카테고리를 벗어남으로써 그 문제가 부분적인 데 그치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부분적인 문제를 싸안으며 넘어가는 ‘전체’를 지향한다. 그것은 일단 문제의 조건들을 간파하고 비평하려는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에 기초해 있다. 그러면서 합리적 분석의 논리가 막다른 벽에 부딪혀 멈춰선 지점에서 “…… 답답하고 답답하다” 같은 감성적 수사로 논리 너머의 영역을 엿보려 한다. 그럴 때 그의 수사는 수사 이상으로, 속류적인 인상비평이나 내면의 일방적인 토로가 아니라 논리 너머에 다다르려는 의지적 직관으로 변모한다. 논리의 한계선 끝에 가만히 멈춰선 자리. 김현의 직관이 깃드는 곳이 바로 거기다. 그가 말하는 “울림”이나 “안타깝다” “끔직스럽다” 같은 말들이 비평적 술어로 거듭나는 과정이 그와 같다. 그는 그렇게 논리와 논리 너머의 ‘사이’를, 두 대립적 세계관의 질감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

그의 진동. 그것은 사람과 사건과 사회 속에서 어떤 흐리고 불투명한 사태를 감각하려는 삶의 방법이며 태도다. 달리 말해, 그것은 착잡(錯雜)함에의 이끌림이다. 곧 존재-사건의 올과 결이 서로 말려들고 뒤엉키는 사태에 대한 이끌림. 그것은 그러나 짙게 양면적이어서 곤혹스럽다. 그런 착잡함에서의 이끌림이 양면적인 까닭은, 그것이 극단들의 사이에 자처하게끔 하는 동력이기에 편향을 거절하는 중도적 감각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대결과 야합을 합리적 개인의 지성을 통해 매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이 지닌 보수성의 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그의 ‘공감의 비평’은 모순적인 것들이 어긋난 채로 공존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일 수 있다. 세계관적 기초로서의 자유주의와 그의 비평이 오차 없이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비판적(정치적) 입장은 그것대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하되 그 입장 너머를 생각하려 할 때는, 그의 비평에 들어 있는 저 존재론적 엉킴의 곤혹스런 사태를 어떤 식으로든 ‘재정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 재정의야말로 김현에 대한 ‘빠’의 매혹과 맹목을, ‘까’의 열정과 비약을 동시에 넘어서는 길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물으며 시작하자. 그렇다면 저 곤혹스런 엉킴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이란 어디에 있는가. 물음이 잘못되었다. 돌파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길을 잃으며 더디게 걷는 행려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비극적이다. 그렇게 허덕이며 헤매는 길 위에서 이 글은 말년의 김현이라는 문체/주체의 흔들리되 편향되지 않는 긴장된 균형을 다시 정의하려 한다. 극단들의 사이를 구성하고 간극을 헤매면서 그 틈(闖)에서 트임〔開〕과 짜임〔界〕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려 한다. 동시에, 혹은 끝내, 그런 가능성의 타진이 어떻게 파열되고 멈춰서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2. 버추얼리티의 전복적 운동, 그 안팎

 

오늘 당대의 자본이 주도하는 삶의 기획과 새로운 지배의 경향을 예민하게 체감하는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논리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늘 붕괴하고 있다는 인식과 신념을 담금질함으로써 그들은 자본주의적 삶과 그 체계를 넘어서려는 몇몇 개념을 고안했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사회적 공장’(네그리)은 그 한 예다. 공장과 공장 아닌 곳의 경계가 허물어진, 그래서 사회체계 자체가 팽창하는 생산과 소비의 단일한 폐쇄회로로 변한 자본의 독무대, 매끈한 영토. 그 사회적 공장 속에서 삶과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고쳐 묻자면, 그 속에서 ‘전복’은 가능한가. 전복에 대해 말하고 쓸 때 그 말과 글은 자꾸만 수사가 되려 한다. 수사가 될 때 말과 글은 인플레이션되고, 비판의 대상이던 사회체계 속에 안락하게 들어앉아 괴물이 된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야 한다. 수사가 되지 않고 저 물음에 답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음을 앓는 것 아닐까. 존재-사건의 뒤엉킨 올과 결, 그 착잡함에 조금씩 열려가는 눈을 통해 물음을 앓을 수는 없겠는가. 그런 앓기가 저 전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는 어떤 자리가 되어줄 수는 없겠는가. 여기서는 우선 오늘날 자본의 존재방식이 ‘가상실효적 포섭양식’(virtual subsumption)으로 전변하는 사정에 대해 풀어쓰려 한다. 전복을 말하는 낮은 목소리는 맨 나중이 될 것이다.

바코드(bar code) 혹은 QR코드(Quick Response code). 그 흑백의 기호를 통해 소비행위에 관한 모든 정보가 기업으로 흘러간다. 기업은 나에게 댓가를 주지 않고도 나의 소비정보를 생산을 위한 자료로 활용한다. ‘사회적 공장’에서 소비는 곧바로 생산에의 참여인 것이다(주민등록증이나 정책홍보 등 국가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 또한 저 코드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사회적 공장의 기계화와 자동화는 그렇게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착취와 소외가 일어난다. 저 코드가 가상적이고 비물질적인 정보의 형태를 띠면서도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이같은 변화의 추이와 경향을 중시하는 자율주의자 조정환(曺貞煥)은 사회적 공장에서 확대재생산되는 잉여가치를 ‘가상실효적 잉여가치’라고 개념화했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삶의 전면적 포섭상태인 ‘삶노동’이 만들어낸 가치다. 가상실효적 잉여가치로써 축적하는 사회체계란 무엇보다 자본의 시선으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공리화된 주체’의 생산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주물처럼 찍혀나온 주체의 그런 위상을 가리키는 말이 ‘사회화된 노동자’다. 이미 일상어가 된 유비쿼터스(Ubiquitous), 와이브로(Wireless Broadband) 등 극소전자기술을 이용해 공장과 공장 아닌 곳, 노동시간과 여가시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 자본은 장소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가치체계를 자신의 매끈한 평면 안으로 포획한다. 이제 잉여가치는 경계를 넘어 흐르면서 비장소적이고 확산적인 것이 된다. 지식, 교육, 연구, 창작, 방송, 정보, 통신, 금융, 보험, 연예, 의료, 관광 등 삶의 비물질적 양태가 죄다 포획되고, 자본의 부단한 생장을 북돋우는 단일한 가치로 자리매겨진다. 조정환은 이 모든 과정을 응축해 쓴다. “모든 개인들이 통상적인 생산의 현장에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자신들을 연결접속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접합접속함으로써 그것을 공리화하는 사회체에 결합되어 있는 한, (…) 삶의 모든 과정들에서 그들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이제 사회적 노동자가 가상실효적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3

조정환은 탈근대적 자본의 운동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그런 해석만으로 멈출 수 없는데,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에 전면적으로 포획된 삶을 뜻하는 ‘삶노동’이라는 개념이 자본의 일방적 우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자본의 힘 안에서 그 힘을 규정짓고 궁극에는 그 힘을 넘어서는 ‘활력’(puissance)의 역동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말한다. 가상실효적(virtual) 극소전자기술에 의해 삶은 자본에 전면적으로 포획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술기반은 언제 어디서든 전복적인 힘들에 접속하고 연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 자본은 인간의 삶에 의존해서만 유지되므로 근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역량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 조정환에게 저 낡고 닳은 ‘삶’이라는 단어는 칼자루를 잡은 채로 자본의 멱살을 틀어쥔, 잠재적(virtual)으로 늘 이미 정치적인 행위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게 늘 이미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삶을 가리키는 말이 ‘삶정치’(bio-politics)이다. 그것은 삶을 깡그리 포획하는 자본의 ‘권력’(pouvoir)에 맞선다.

 

능란하지 못한 글을 따라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이미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버추얼(virtual)이라는 단어 때문에 말이다. 버추얼이 가상실효적 포섭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 그것은 지배의 새로운 경향을 가리킨다. 반대로 버추얼이 잠재적 활력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가상실효적 지배를 돌파하는 꼬뮌적인 힘을 뜻한다. 조정환에게 버추얼은 동시적 작용이자 효과다. 잠재적 활력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은 가상실효적 지배로 자신의 운동방식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렇게 변화된 자본의 운동이 꼬뮌적 활력을 지속적으로 길러내는 토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이 그 내적 논리에 의해 언제 어디서든 붕괴되고 있다는 신념은 그런 버추얼의 동시적 작용에 근거한다. 조정환의 비평작업은 새롭게 변화한 자본의 가상실효적 지배가 ‘다중’(multitude)이 지닌 잠재적 활력의 직접적인 현현을 통해 무너지는 과정 혹은 징후에 대한 느낌의 논리화다. 조정환에게 ‘활력’의 문제설정은 꼬뮌의 실현에 대한 강인한 집념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오늘날의 문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 사정에 대해 풀어쓴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버추얼리즘’의 의미와 목표를 따져 읽음으로써 그것이 때때로 절대적 척도로 변하는 지점들에 대해 거듭 묻고 고민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은 미적 재현(representation)의 과정과 정치적 대의(representation) 체계에 반대한다. “리얼리즘은 실재의 자기표현이기보다 실재를 ‘객관현실’로 대상화하면서 그것의 재현을 꾀하는 ‘매개적’ 활동이었다. 리얼리즘이 국가, 민족, 당, 조합, 단체 등 권력기관 혹은 권력체와의 ‘관계’를 필요로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버추얼리즘은 이러한 매개를 떠나서 존재의 직접적으로 영원한 지평을 드러낼 가능성을 열어놓는다.”4 조정환에게 리얼리즘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해서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적 재현의 과정에 은폐되어 있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위계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대의제도라는 것이 대의(代議)에 늘 실패함으로써 권력을 증식시키는 구조에 다름아니라는 지적이다. 그의 버추얼리즘은 미적 재현과 정치적 대의가 같은 뿌리의 다른 가지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게 재현/대의를 거절한다는 점에서 버추얼리즘은 ‘전(前) 매개적’이거나 ‘반(反) 매개적’이다. 조정환이 버추얼리즘에 대해 “매개 이전의 것” 곧 “존재의 직접적으로 영원한 지평을 드러낼 가능성” 혹은 “존재론적 영원성 내부에서 작동하는 힘들, 경향들”이라고 말할 때, 그는 버추얼리즘의 구체적인 형상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가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에서 벌떼의 일어남과 붐빔으로 개념화한 ‘봉기(蜂起)’로서의 촛불집회가 그것이다. 그에게 촛불은 존재의 직접적 자기현현으로, 모든 위계와 매개를 거절함으로써 존재의 영원성을 새롭게 구성해가는 잠재적 힘으로, ‘활력’의 거센 분출로, 꼬뮌의 구성적 계기이자 동력으로 이해되었다. 조정환은 활력에 기초한 꼬뮌의 영원한 구성을 통해 가상실효적 지배의 권력 안에서, 그 권력에 대항하며, 그 권력을 넘어서려 한다.

존재-사건의 직접적이고도 영원한 지평을 열어주는 잠재적 활력으로서의 버추얼리즘. 임화(林和)와 김남천(金南天)을 실천의지의 부족과 몰주체적 객관주의로 비판했던 『노동해방문학론』(노동문학사 1990)의 저자이자 노동자당 건설의 전위였던 조정환에게 그런 버추얼리즘으로의 이행은 타자와의 교섭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변혁의 과정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다른 이들의 글을 읽고 쓴 독후감과 여러 논쟁에 개입한 글을 묶은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갈무리 2003)은 타자와의 뒤섞임을 통한 자기변혁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자연스레 김현의 독서일기와 조정환의 독후감을 견주어보게끔 이끈다. 그렇게 이끌리고 있는 이 순간, 이제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은 더이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거듭된 반문과 골똘한 고민의 대상이 된다.

말년의 김현이 존재의 올과 결을 들으려 했음은 앞서 썼던 것과 같다. 김현의 ‘듣기’에 비해 조정환의 독후감은 ‘말’한다, 군림한다. 버추얼리즘이 척도가 되어 타자의 글을 호령할 때, 곳곳에서 타자의 언어들은 가지치기 당하고 수그러든다. “유물론적·실천적 입장의 부재” “관념성” “수동성의 사고” “복고적 사고” “낡고 협소한” 등의 단어로는 타자의 글에 섬세히 응답하지 못할뿐더러, 타자의 글을 추동하는 긴장을 없애고 그 생동함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마저 느슨해지고 평면화된다. 입장의 선명함은 얻었으되, 그 선명함은 긴장어린 모순의 가능성 및 그 조건에 대한 탐구의 계기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얼핏 곁가지 텍스트로 여겨질 수도 있을 독후감의 질감에 대한 이런 비판은 실상 조정환의 몸통이라 할 버추얼리즘의 전복적 운동 전체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무게를 갖는 것일 수 있다. 이 글은 버추얼리즘의 전복적 힘에 대한 ‘집념’이 존재-사건의 착잡함에 대한 ‘듣기’ 위에 올라타고 군림하는 사태를 주시한다. 그러면서 버추얼리즘의 ‘전복적 운동’과 존재의 올과 결이 지닌 ‘역사성’, 그 둘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맺어야 하는가에 몰두한다. 이제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이 문학의 외투를 걸치고 걸어나올 것이다. 뒤틀어지고 어긋난 채로 결합되어 있는 부정합적(不整合的) 존재-사건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하나가 버추얼리즘의 문학에 맞세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 맞세움을 통해 어떤 곤혹스런 ‘사이-공간’이 구성되려 하고 있다.

 

 

3. 척도의 자리에서 물의 자리로, 진동의 자리로

 

재현/대의/대표의 위계적이고 매개적인 속성을 거부하는 자리에서 늘 열리고 있는 존재의 직접적이고도 영원한 지평. 조정환에게 그런 지평을 열어가는 잠재적으로 충만한 활력은 다중이 구성해갈 꼬뮌의 운동에너지이자 존재론적 토대다. 그의 버추얼리즘은 자본의 새로운 지배양식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인식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런 새로운 지배양식이 그 자신을 붕괴시키고야 말 꼬뮌적 활력을 길러낼 수밖에 없는 사정을 더욱 가속화하려는 실천적 의지이기도 하다. 그에게 인식과 실천은 그렇게 정확히 결합해 있다. 조정환에게 문학이란 그런 결합의 어긋남을 막고 오차를 없애기 위한 오래된 아교다. 그런 조정환에게 귀기울일 수는 없을까. 그럼으로써, 그 아닌 그, 그보다 큰 그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그를 섬세하게 그려볼 수는 없을까.

박영근(朴永根)의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2002)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변혁의 물결을 열띠게 헤쳐나온 한 시인의 길잃음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시집은 그런 길잃음에 뒤따르는 깊은 어둠과 검은 절망을 주조음으로 연주된다. 그렇다고 그 어둠이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어둠의 연주 안에는 어둠에 기댄 채 환해지는 빛의 음률 또한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어둠과 빛의 교직은 분명 간단명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조정환은 단언한다. 저 어둠과 절망에 대해, 그리고 그 어둠에 기대어 빛나는 빛에 대해.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이라는 입장에 서서 그는 박영근의 절망에 대해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5이라고 썼다. 대의체계에서 자라났던 민중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 대표와 매개를 거부하는 존재의 직접적 현현으로서의 다중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 이 두 사태를 박영근의 시가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두고 그렇게 비판했다. 박영근은 버추얼리즘의 전복적 에너지로 현현하고 있는 다중을 자각하지 못하고 시효말소된 민중 속으로 추락함으로써 과거의 민중 안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 어둠에 기댄 빛에 대해서도 조정환은 단언한다. “강한 버추얼리즘을 드러낸다”(321면)고. 조정환은 박영근의 이미지들에서, 예컨대 바람과 침묵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흰 빛), 뻘 속 깊은 곳에서 숨 쉬며 살이 오르는 백합조개(물때), 비구름 속에서 떠오르는 형체 없는 달(), 그리고 시집 이곳저곳에 흥건하게 젖어들어 있는 꽃망울들에서 버추얼리즘의 전복적 힘을, 다중의 눈부신 활력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정환은 박영근의 시가 아직은 그것에 미달이라고 여기며 곧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미달과 도달. 그것은 버추얼리즘이 ‘척도의 자리’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말이다. 그러므로 물어야 한다. 과연 그렇게 단언해도 좋은가, 척도의 자리를 감싸안는 다른 자리를 구상해볼 수는 없겠는가. 이렇게 물었으니 텍스트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바람이 있다면 텍스트와의 대면을 넘어가는 텍스트로의 침잠이겠는데, 그것에 대해 확언하기란 매번 그리 쉽지가 않다.

 

박영근의 길잃음에 관해,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6는 그의 존재론적 고통과 방황에 관해 거듭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삶, 그 골과 마루 사이의 모든 고통을 통째로 짐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한편의 시를 어루만질 수는 있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녹슨 철조망에/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어떤 오월의 고통의/맨얼굴”(「꽃들」 전문). 이 시는 그의 고통의 뿌리다. 녹슨 철조망을 넘어 꽃이 비로소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행갈이가 멈춰지고 연이 구분됨으로써 리듬이 일단락됨과 동시에 다시 시작될 때, 그래서 1연의 이미지가 갈무리되고 2연의 의미가 시 전체의 의미의 정점을 향해 출발할 때, 그 빛나는 꽃의 자리가 ‘어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 꽃이 ‘5월’이라는 것,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통과하지 못한 그 5월의 고통이라는 것, 날것 그대로의 고통의 맨얼굴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행려병의 뿌리, 고통의 심연으로서의 꽃. 그것이 박영근의 꽃이다.

이에 대해 조정환은 철조망을 넘어 피는 것은 꽃들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발생적 민중들은 현실적 사건들을 통해 주어진 경계들, 철조망을 타고 넘는다”(325면)고 적었다. 박영근의 꽃에 들어찬 존재론적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은 한에서, 조정환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했을 뿐, 박영근의 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고, 말하고, 믿는 것은 발생적 민중, 곧 다중이다. 다중은 공통적인 것(common)의 생산과 소통(communication)을 통해 꼬뮌(commune)을 구성해가는 특이한 사람들의 총체다. 그들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com’으로 연대의 그물을 짜면서 조정환의 말처럼 “타고 넘는다.” 그래, 타고 넘는다. 그러나 박영근은 타고 넘지 않는다, 못한다. 끝끝내 통과할 수 없는 그는 경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저 꽃덩어리/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불붙듯 피어나/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그거/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저 꽃이 불편하다」 전문). 박영근의 자리가 경계 위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이만큼 오롯이 드러내는 시도 없다. 눈앞에 꽃이 덩어리째 피어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그 꽃을 보고 있지만 이내 고개 돌린다. 불의 이미지가 일깨우는 정열적인 에너지로 피어난 꽃은 제 온몸을 펼쳐놓고 있다. 그는 꽃의 정열에 놀라 헐떡이면서도 이내 냉담하게 굳어진 시체가 된다. 꽃을 부르고는 발길질한다. 침을 뱉다가는 후미진 곳에서 홀로 흐느낀다. 보는 것과 고개 돌리는 것, 헐떡임과 굳어짐, 부름과 발길질, 침뱉음과 흐느낌. 꽃을 대하는 그의 내면과 행위는 그렇게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부정합적이고 동시적인 과정 속에서 ‘진동’한다. 그런 진동 혹은 떨림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온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성이 이미 언제나 다른 하나의 고유성에 의해 삼투되고 감염되어 있음에 대한 깊은 사려에 이어진 것일 수 있다. 보는 것, 헐떡임, 부름, 흐느낌과 고개 돌림, 굳어짐, 발길질, 침뱉음은 옳고 그름 또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의해 물드는 관계다. 이는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와 누군가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등가적이고 동시적임을 일깨운다. 박영근은 ‘홀로’와 ‘함께’의 경계에서, 그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진동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다. 길을 잃음과 동시에 자기 속에 사는 정체 모를 누군가를 발견함으로써(“아, 내 안에/누가 살고 있는가” 「모를 일」) 자신마저 잃었기 때문이다. 그의 진동은 우정이 아니라 아픔이다.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조건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때로 그런 밤에 스스로 꽝꽝 얼어터져/새하얗게 일어설 얼음의 빛덩어리 (…) 중늙은 사내 하나 어둠에 묻혀가는 강둑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오늘밤도 오래 잠들지 못할 게다”(「물결」). 그는 스스로가 얼어터지고 깨지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는 존재다. 더러 누군가는 부서지는 고통을 견딤으로써 ‘실제로 서는 것’과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설 수 있음을 ‘아는 것’은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을 섞지 않는 나의, 의 속임수”(「고개를 숙인다」)라는 성찰의 한 대목이 있어, 외려 걱정을 덜고 의심을 거두게 된다. 그는 얼음이 하얀 빛을 뿜으며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스스로 얼어터질 때뿐인 것처럼, 자기해체의 고통을 통해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다. “나는 내 안의 세계가 격심한 혼란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돌아보건대, 나에게 시 쓰는 일이란 그런 해체의 또다른 과정이었거나, 어떤 치유가 아니었던지.”(「시인의 말」) 얼음이 터짐으로써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하나의 역설이듯, 자기의 붕괴와 해체를 통해 치유되는 것 또한 역설적 과정이다. 그렇게 역설은 때때로 고통의 바탕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로부터 떨어져나온 저 중늙은이가 그의 안에서, 그 어둠속에서 그를 보고 있다. 그 자신도 그런 중늙은이를 뜬눈으로 바라본다. 박영근의 밤이 불면의 시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그는 그 밤샘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니 어디에 가닿아야 하는 것인지를 고뇌하며 견딘다. 고통을 고뇌로 버텨내려 한다. 도저하다.

“물 위로 꽃 한 송이 피어난다//나 오래 물의 자리에 내려앉고 싶었다//더 깊이 가라앉아//꽃의 뿌리에 닿도록//아픈 몸이여, 흘러라//나 있던 본디 자리로”(「물의 자리」 전문). 그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싶어한다. 그 침잠에의 바람은 꽃의 뿌리에 가닿으려는 열망에 이어진 것이다. 그에게 꽃은 고통이므로 꽃의 뿌리는 고통의 근저다. 그곳으로 아픈 몸이 흐른다. 그곳이 그의 본디 자리, “물의 자리”다. 꽃은 심연에서의 앓음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수면 위로 피어오른다. 박영근의 꽃은 ‘타고 넘어’ 피지 않는다. ‘척도의 자리’에 앉은 버추얼리즘은 ‘물의 자리’로 흐르는 저 고통에 사려깊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잠재적 활력이라는 존재론적 토대와 실천적 변혁운동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하게 결합될 수 있다는 조정환의 확고한 신념이 박영근의 고통을 알고서도 모른 척하도록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 물음은 난처하다.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은 박영근의 시편과 살을 섞으면서 새롭게 전개될 수 있는 계기 하나를 품게 된다. 그것의 검증과 재구성이 중요한 것은 박영근의 고통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가라는 위의 물음을 앓기 위해서다. 조정환은 쓴다. “박영근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the real)을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의 긴장 속에서 탐구할 필요성을 새기게 해준다.”(324면) 꽃이 피는 것은 꽃망울에 잠재해 있던 능력의 발현이고 그래서 꽃은 이미 늘 피어나고 있다고 매끈하게 말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조정환은 박영근의 시를 통해 자각했다. 꽃망울에 들어 있는 잠재적 능력은 햇빛, 바람, 땅, 손길 등 뜻밖으로 실패하거나 좌초될 수 있는 여지들로 넘치는 현실적인 것들과의 긴장 속에서 발현된다.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이 품게 된 새로운 계기란, 바로 그런 긴장어린 교섭의 과정이야말로 꽃망울에 들어 있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the real)’일 것이라는 자각을 말한다. 심연으로 가라앉으려는 고통스런 열망을 통해 그런 실재를 증언하려 했던 박영근에 기대어 조정환은 실재라는 것이 긴장 속에서 참을성있게 탐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환이 말하는 팽팽한 긴장으로서의 실재적인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한 문장으로 수렴되고 만다. “역사의 이행을 잠재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부단한 비상(飛翔), 재구성 혹은 발생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324면). 실재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탐구되지 않고 잠재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끊임없는 ‘비상’으로 이해될 때 실재적인 것의 긴장은 이완되고, 끝내 풀어헤쳐진다. 조정환은 역사의 이행을 그렇게 비상하는 잠재적 활력에 기대어 확신한다. 그의 비상은 박영근의 침잠과는 반대다. 조정환이 박영근의 시에서 느끼는 섬세한 떨림과 긴장, 예민한 아픔 또한 이미 저 비상으로서의 이행과정 속에 못박힌 채로 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박영근의 긴장은 긴장이 아니라 긴장의 해소이며, 떨림은 떨림이 아니라 떨림의 결박이며, 예민은 둔감이고, 섬세는 투박이며, 아픔은 기쁨이다. 박영근의 그 모든 것이 역사의 “기쁜 이행”(328면) 속으로 환수되고 있다.

문제는 기쁜 잠재성(virtuality)이 아니라 아픈 실재성(reality)이다. 경계를 타고 넘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위에 걸쳐진 고통인 것이다. 전지구화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기 이전에 언제나 이미 삶이라고 말하는 조정환은 ‘인류인-되기’ 혹은 ‘꼬뮌들의 네트워크’로의 이행을 신뢰하지만 그것들이 역사의 ‘기쁜 이행’에 수렴되는 것인 한, 삶의 ‘실재’의 모습일 수는 없다. ‘물의 자리’로 “더 무겁게 뿌리 내리는 돌들”(「나에게 묻는다」), 역사의 기쁜 이행과 비상에 흡인되지 않고 가라앉고 있는 무게들. 그렇게 끝끝내 가라앉아 고통의 뿌리를 치유하려는 침잠하는 행려. 타고 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 걸쳐진 채로 고통의 심연을 앓는 그 행려야말로 실재에 육박해가는 삶의 의지적 모습이 아닐까.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긴장어린 틈새에서 진동하고 있는, 고통을 앓는 감각적 능력으로서의 행려병/실재성. 조정환은 ‘타고 넘는다’. 박영근은 침잠하면서 ‘진동’한다. 진동하고 있던 김현은 이제 ‘운다’. 그 나이든 울음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 남았다.

 

 

4. 황혼을 빚는 비극적 장인들

 

김현의 평론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전망」(1990)의 부제는 ‘꽃을 보는 두개의 시선’이다. 그는 최하림(崔夏林)의 꽃과 임동확(林東確)의 꽃, 그 두 꽃 사이에서 고통스레 흔들린다. 최하림의 「심연으로」에 나오는 ‘말’은 있는 힘을 다해 외쳐진 말이며 그런 외침이 터져나오는 자리를 드러내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말한다/처음의 그대가 꿈꾸었던/무지개 같은 말로, 나중엔/검은 재의 말로//그러나 말들은 심연으로 심연으로/돌처럼 갈앉는다.”7 최하림에게 ‘말’은 무지개처럼 선연하고 희망찬 것이었다가, 다음엔 탈색된 검은 잿더미였고, 이제 심연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는 돌들이다. 그도 또한 ‘5월’의 고통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연이 만들어졌다. 외침은 매번 그렇게 심연에서 터져나온다. 심연이 외침의 자리다.

김현은 최하림의 피비린내 나는 꽃이 “끔찍한 꽃”이며, “이 끔찍함이 이 시의 기본 동력 중 하나이다”8라고 적었다. 그 끔찍스러움이야말로 ‘5월’의 심연이다. 김현은 묻는다. 그 고통으로서의 심연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 물음에 시인은 “이제 나는 가야 한다 가서/나의 떨린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아무 말도 말아야 한다”(「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고 답한다. 김현은 침묵으로서의 응답이 무응답이 아니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상처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이어 더디게 읽어야 할 문장 하나가 뒤따른다. “그 질문은 고통스럽다.”(301면) 조정환의 버추얼리즘이 박영근의 침잠을 두고 했던 두번의 단언과 김현의 착잡한 한 문장은 그 질감을 완연히 달리하고 있다.

임동확은 아름다운 계절에 나서 애틋하게 져버린 ‘5월’의 꽃들과 뜨겁게 입맞추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다짐 곁에 선 김현의 생각. “최하림의 꽃은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고통의 꽃이다. 그것에 반하여 임동확의 꽃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바람의 꽃이다.” 김현은 두 시인의 두 꽃을 각기 고통과 전망, 침잠과 열정, 침묵과 외침으로 해석한다. 그는 묻고, 운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울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바라보고, 웃는 대신 운다. 오십의 나이에 울음은 가슴 아프다.”(307면) 말년의 김현은 웃는 대신 울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대신 정지하고 앓고 견딘다. 내가 생각하는 울음 울기 혹은 물음 앓기란, 고통과 전망으로 서로 대립하는 저 두 꽃의 눈부심을 가장 멀리까지 비치게 함으로써, 달리 말해 두 꽃의 정치적·미학적 잠재력의 최대치를 열어보임으로써 두 꽃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영역을 그려가게끔 하는 어떤 존재론적 자리를 구성하려는 의지이다. 그것은 동시에, 두 꽃의 잠재성이 죄다 발현될수록 각각의 잠재성의 최대치는 다른 하나의 이질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런 과정 없는 잠재성이란 언제나 불구일 수밖에 없음을, 두 꽃의 잠재성의 조건이란 이미 늘 그렇게 삼투되고 감염되고 있는 착잡한 장(場)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지이기도 하다. 그런 한에서, 김현의 저 울음은 존재의 삼투와 물듦의 고통스런 장을 빚어내는(design) 장인의 의지적 힘으로 고양될 수 있어야 한다.

김현은 그의 독서일기에서 해체란 대상에 대한 해체와 그런 해체를 위해 동원된 논리적 어휘의 해체를 통해, 곧 해체되는 것과 해체하는 것을 동시에 해체하는 이중의 해체라고 말한다. 이어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 이중의 해체는 때로 애매모호한 상태, 논리화되지 못하는 상태에 갇히기, 아니 그런 상태로 열리기 때문이다. (…) 괴로운 해체.”(167면, 1988.8.8)라고 해체의 의미에 몰두함으로써 그 괴로움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해체란 때때로 애매함과 모호함의 사태 속에서, 논리의 창으로는 뚫리지 않는 어떤 유동적이고 탄력적인 사태 속에서 ‘갇힌 채로 열리는 방법’이라는 것. 상황의 심층에 서려 있는 괴롭고도 곤혹스런 모순성을 생각의 거처로 삼는다는 점에서 김현은 ‘비극적 인간’(까뮈)이다. 반항과 반항의 한계, 자유와 통제라는 힘의 갈등 속에서 찢기면서도 삶과 사회의 모순성과 애매성이야말로 찢어진 상처가 치유되는 자리임을 인지하는 이가 ‘비극적 인간’이다. “인간은 모순 속의 동물이다. 나가야 한다는 욕망은 나갈 수 없다는 현실과 엉켜 있다. 확실한 것은 그러니까 욕망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며, 있음 그 자체이다. (…) 말없이 저기-있음만이 삶에선 확실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몫은 비극’이다.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며, 있는 것은 오늘뿐이기 때문이다.”(115면) 김현이라는 비극적 인간에게 확실한 것들. 하나, 저기 그렇게 있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둘, “바뀌지 않는 것은 탐색이라는 행위뿐”인데 아쉽게도 그런 탐색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 셋, 죽음의 탐구란 거꾸로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인데, 그 의미는 수미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만들어지면서 파괴되는 그런 어떤 것”(336면)이라는 것. 의미는 저 이중의 해체, 괴로운 해체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무너져내린다. 삶의 애매성 속에 본원적으로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 인간이 갇힘을 통해 열리어나가는 역설적 과정. 그것이 존재의 고통을 견디는 자가 살아내는 삶의 ‘실재’일 것이다. 견딤이 견고한 밑바닥을 만들 것이다.

삶의 애매성을 탐구하는 자의 생생한 표정을, 그 비극적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한 대목이 있다. 김현의 독서일기에서 출발한 이 글을 그의 짧은 독후감 하나로 끝맺었으면 한다. 그가 보기에 김윤식(金允植)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한길사 1986)는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의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합리주의, 논리, 근대화, 서구 제국주의, 일본 제국의 세계가 낮의 세계다. 믿음의 집단, 비합리, 심정, 비논리의 세계가 밤의 세계다. 이광수에게 있어 낮의 세계는 밤의 세계를 늘 압도하고 있다는 김윤식의 확고한 생각을 김현은 비판한다. “낮의 세계에도 밤의 세계의 요소가 있으며, 밤의 세계에도 낮의 세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야, 균형이 잡힐 것 같다. 낮과 밤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말하자면, 새벽과 황혼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 그 세계 중의 어느 것이 이기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차라리 그 세계가 어떻게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259면) 낮과 밤은 둘다 중요하다. 하지만 낮과 밤이 삶의 ‘실재’를 일깨우는 진짜 중요한 순간은 ‘새벽’과 ‘황혼’에 의해 감싸일 때다. 새벽이란, 황혼이란 무엇인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둘의 경계이며, 경계의 번짐이다. 낮과 밤이라는 두 세계가 서로를 물들이는 시간이다. 대립하는 두 세계의 잠재성을 최대한 열면서 동시에 두 세계로 하여금 각자의 울타리를 서로 돌보며 그리도록 하는 시간. 두 세계의 잠재성이란 늘 그렇게 삼투와 감염의 고통스런 장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감각하도록 요청하는 시간. 그런 고통의 감각 속에서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증세가 덧나는 상처”9와도 같은 존재로 아프게 생동한다. 그것이 이광수의 삶과 그의 시대의 어떤 ‘실재’(the real)다. 그러므로 다시, 문제는 기쁨의 ‘잠재성’이 아니라 고통의 ‘실재성’이다. 꼬뮌의 조건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 재정의한 저 울음을 다시 듣는다. 그 울음 속으로 꼬뮌의 존재론이 거듭 들려온다. 다중과 장인, 비상과 침잠, 이행과 진동, 기쁨과 비극 사이에서, 그 맞섬 사이에서 나도 운다. 울며 감싼다,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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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2, 165면(1988.7.14 일기). 이하 면수와 날짜만 표기.
  2.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211면.
  3. 조정환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48면.
  4. 조정환 『카이로스의 문학』, 갈무리 2006, 213면.
  5. 조정환 외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갈무리 2007, 324면. 이하 면수만 표기.
  6. 박영근 「行旅」, 『저 꽃이 불편하다』, 창작과비평사 2002, 25면. 이하 시제목만 표기.
  7. 최하림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56면. 이하 시제목만 표기.
  8. 『김현문학전집 7』, 문학과지성사 1990, 299면. 이하 면수만 표기.
  9. 김현 엮음 『李光洙』, 문학과지성사 1977,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