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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초점

 

메타포 콰르텟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류신 柳信

문학평론가, 중앙대 독문과 교수. 평론집 『다성의 시학』 『수집가의 멜랑콜리』 등이 있음. pons@cau.ac.kr

 

 

3541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잇는 비유법을 은유라고 총칭한다면, 손택수(孫宅洙)의 세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은 네가지 개성있는 은유가 합주하는 사중주다. 그럼 손택수 시인의 지휘 아래 이 시집의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꽃과 감과 나무와 새가 함께 연주하는 메타포 콰르텟(metaphor quartette)을 감상해보자.

첫째, ‘꽃의 은유’는 사물들의 원초적 친화력을 예감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친근성을 회복하는 데 남다른 솜씨를 발휘한다. 시인에게 무덤가에 핀 민들레는 삶(지상)과 죽음(지하)의 간극을 채우는 단추로 재-현전된다.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꽃단추」). 이질적인 세계의 틈을 여미는 꽃의 촘촘한 리좀(rhizome)은 땅과 하늘을 망라하고(「구름농장에서」), 물과 불을 결합시키며(「수정동 물소리」), 쪼개진 모과 속 애벌레와 유산한 아내의 자궁 속 태아를 통섭한다(「모과」). 물론 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개체들의 은유적 연대는 서정성의 기본원리인 ‘세계의 자아화’와 ‘자아의 세계화’의 변증법적 교호를 통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몸 밖의 파문과 몸속의 파문이 부딪힐 때”(「松韻」)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을 도모하는 서정적 은유의 꽃이 만개한다. 한국 서정시의 적자다운 손택수의 시는 꽃의 은유가 상투적 비유의 차원을 넘어 미학적 갱신에 성공할 때 탄생한다. 요컨대 꽃의 은유는 서정적 진실을 탄주한다.

둘째, ‘홍시의 은유’는 어떤 말이 자신의 내부에 다른 의미가 거주할 수 있도록 타인에게 자리를 임대해주는 배려의 미덕으로 붉게 익어간다. 「은유」의 마지막 두 연은 ‘감의 은유’가 타자에 대한 정직한 짝사랑을 통해 발효됨을 보여준다. “사탕을 슬그머니 얹어놓고/시침을 뚝 떼고 앉아 있던 초등학교 때 내 짝 정이처럼/꼭 그처럼은,/담벼락 옆에 감나무 한 주 심어놓기로 한다//이것 좀 자시라 차마 말은 못하고 슬며시/담 넘어간 가지에 눈치껏 익어갈 홍시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시인에게 은유란 자아가 타자에게 자신을 투사했다가 다시 자신으로 귀환하는 자기 재점유과정 그 이상이다. 감은 자아가 일용할 양식이자 자아(원관념)가 타자(보조관념)에게 베푸는 뜻밖의 선물이다. 그렇다고 남의 입에 덥석 익은 감을 넣어주는 섣부른 직유는 피해야 한다. “슬며시” 타자의 영토로 월경(越境)한 의미(딱딱하고 떫은 풋감)가 시나브로 숙성해 새로운 의미(몰랑한 홍시)로 거듭나는 탈삽(脫澁)의 과정이 필요하다. 감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토대 위에 맺어진 개방된 은유의 열매다. 시인이 담 너머 불모의 도시에 거주하는 노숙자(「쓰레기왕」), 공사장 인부(「강철거미」) 장애인 행상(「스프링」)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기울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감은 낭만적 배려의 윤리학을 연주한다.

셋째, ‘나무의 은유’는 등가(A=B)의 욕망 안에 차이(AB)의 각성을 수태시킨다. 은유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인 차이의 망각, 즉 주체가 대상과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몰아의 상태에서 체득하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깨달음을 경계하는 곳에 손택수의 나무가 서 있다. 그에게 (서울의) 나무는 더이상 천상(현실)과 지상(이상)을 매개하는 형이상학적 은유도, 도시인의 피곤한 삶에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는 생태학적 은유도 아니다. 그에게 나무는 현실과 이상의 균열 속에서 상실감을 앓는 존재의 자기표현, 즉 치욕의 은유이다.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치욕으로 푸르다.”(「나무의 수사학 1」) 시인은 도시의 소란과 매연을 견디느라 나무가 감내했을 ‘초록의 고통’에서 척박한 도시에 안착하기 위해 고투하는 현대인의 신산고초를 읽어낸다. 그래서 시인은 뿌리로 하수도관을 뚫고 폐수를 빨아들여 연명하는 나무를 보고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를 더는 쓸 수가 없다”(「나무의 수사학 4」)고 토로한다.

시인이 아름다운 은유를 마음껏 구사할 수 없는 시대는 참담하다. 암울한 시대를 살고 간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많은 범죄행위에 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범죄가 되는/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후손들에게」) 부당하게 죽은 용산철거민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나는 꽃을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했다”(나무의 수사학 3)라고 고백하는 시인도 불행하다. 하지만 이토록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가 곧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부정한 세상의 타락을 묵인한 자의 도덕적 자괴감에서 미상불 시의 에토스가 발화되기 때문이다. “나무야 나의 시는 조금만 더 낡아야겠구나/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쳐가는 만년필 속/폐수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푸른 물고기가 있어”(「나무의 수사학 4」)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시의 혁신을 향한 고투가 새록새록 궐기할 수 있는 근거는 자본주의의 광포한 욕망의 한계를 인식하고 문명과 권력의 오만함을 반성하는 수오(羞惡)의 윤리학에 있다. 요컨대 나무의 은유의 주조음은 현대사회의 모순이 낳은 불편한 진실이다.

넷째, ‘새의 은유’에는 전통적인 은유가 추구하는 항일성의 항구에 정박하는 닻이 없다.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는 일탈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수백 킬로쯤 끌고 온 국경선을 강물에 풍덩 빠뜨리고/산정에서 끝난 도계를/노을 지는 지평선까지 끌고 가 잇기도 했을 테지/그런 선들이 악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끝없이 출렁이는, 새로 그려지는”(「새의 부족」) 부단히 경계를 지우며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는 새는 수동적인 은유를 해체하는 역동적인 은유의 은유이다. 따라서 새가 그리는 은유의 악보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관계는 (공시되지 않고) 잠복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회통은 (고착되지 않고) 표류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시집에서 새가 그린 구체적인 악보를 찾을 수 없다. 여기서 자명한 사실은 정중동(靜中動)의 은유학을 실천하는 새는 손택수 시학의 구심점이자 소실점이라는 사실이다. “골똘한 저,/한 점//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새」).

끝으로 이런 상상을 해본다. 꽃(고전주의적 서정성)과 감(낭만주의적 감수성)과 나무(사실주의적 도덕성)의 앙쌍블에 새(초현실주의적 실험성)의 연주가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춘다면, 손택수의 메타포 콰르텟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손택수가 작곡할 메타포를 위한 고전과 전위의 협(協)과 불협(不協)이 경청에 값하면 좋겠다. ‘하나의 울림’을 찾아 “은유의 눈보라/한가운데로”(파울 첼란 「하나의 울림」) 날아가는 새의 활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