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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이클 쌘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2010
우리는 정의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나
금태섭 琴泰燮
변호사 kts@lawkh.com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볼티모어 빈민가에서 가난한 흑인 씽글맘의 아이로 자라 존스홉킨스대학을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옥스포드로 간 웨스 무어(Wes Moore)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자신의 작은 성공 스토리가 『볼티모어 썬』지에 실린 날,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웨스 무어라는 젊은이가 무장 강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바로 그 지면에서 보고 충격에 빠진다.
흔치 않은 이름을 공유한 두 젊은이의 운명은 전혀 다르게 풀린다. 한명의 웨스 무어는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의 기회를 포착해 백악관 인턴을 거쳐 오바마가 대통령후보 지명을 수락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한다. 또 한명의 웨스 무어는 보석상을 털다가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매일 두시간의 운동시간을 제외하고는 종일 독방에 감금된 생활을 할 운명에 놓인다.
성공한 쪽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두 사람은 몇년에 걸쳐 친교를 나누게 되는데 자신들이 너무나 비슷한 환경—똑같은 취향의 홀어머니, 어린시절의 형편없는 성적과 무단결석, 그리고 빈민가에서 자라는 모든 청소년에게 찾아오는 범죄의 유혹—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성공한 웨스 무어는 이 만남을 토대로 『또 한명의 웨스 무어』(The Other Wes Moore)라는 책을 쓴다. 주위의 관심과 각고의 노력이 차이를 만든다는 스토리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할까.
어느 사회에나 있는 빈곤층의 자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치러야 하고 그중 일부만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면 과연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는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성공한 쪽인 웨스 무어의 어머니는 가진 돈을 긁어모으고 친척에게 도움을 받아 아들을 백인 부유층의 자녀가 다니는 사립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막상 어울리지 않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들은 그곳에 마음을 붙일 수 없다. 매일 동네에서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은 그런 학교를 다닐 처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백인 학교는 어때?” 하고 냉소적으로 묻는 친구들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부정의(不正義) 그 자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생각해볼 때, 만일 우리가 사회의 자원을 마음대로 배정할 수 있다면, 이 어머니를 지원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처사일까? 그것보다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공립학교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올바른 일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가용한 자원으로 공립학교에 대한 지원이 의미있는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모한 투자를 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사회는 공정해야 하고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옳은’ 것이 어떤 것인지 결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쌘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이창신 옮김)는 이 질문에 답변을 해보려는 하나의 시도다.
책은 정의를 바라보는 세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첫째는 공리주의적 관점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라고 본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이 공리주의는 정당성의 원칙을 계산의 문제로 환원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둘째는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에는 자유의지를 절대시하는 입장과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즉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세계에서가 아니라 능력이나 환경의 차이가 없는 가상적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선택을 존중하는 입장이 있다. 『정의론』으로 유명한 롤즈(J. Rawls)의 견해이기도 하다. 저자 쌘델은 세번째의 입장, 즉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중시하는 공동선의 입장에 동조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시각은 인간행위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는 난점이 있다고 한다. 도덕적, 종교적 신념 등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정의관(正義觀)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쌘델의 견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낙태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대체로 산모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적 이유나 도덕적 근거에서 여성 개인의 선택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는 사람들도 일단 출생한 어린아이를 부모가 살해해도 좋다고 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낙태 찬성론자들은 은연중에 태아는 인간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셈이다. 따라서 낙태는 선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결국 태아를 인간으로 볼 것인지 여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데, 이 단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도덕적・종교적 가치판단이 개입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입장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의 열광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는 각각 이 책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우선 진보 쪽에서는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쌘델의 입장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거나 적어도 성급한 일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해묵은 ‘국론통일’ 주장이 다시 튀어나오고, 동성 커플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고 게이가 되면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는 신문광고가 버젓이 실리는 상황에서 정치가 도덕적・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은 극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 쪽은 이와 좀 다른 차원의 얘기를 하는데, 저자가 주창하는 ‘공동체의 가치’가 원래 보수의 것이지만 진보성향의 인사들이 이 책과 관련된 토론회에 나가거나 서평을 써서 마치 정의에 관한 논의가 진보의 전유물인 양 인식되고 있다는 불평이다. 정의라는 좌파의 프레임에 정부가 말려든다는 경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진영논리를 떠나서 내용이 그리 쉽지 않은 이 책이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어떤 것이 정당한지에 관해 정말 자유롭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는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금기를 의식하지 않고 양보 없는 설전을 주고받는 상황이 허락된 일이 있는가. 이 책을 찾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특정한 형태의 정의(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혹은 가치중시적인 것이든)라기보다 정의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사회가 아직 정의라는 기본적인 쟁점을 둘러싼 난상토론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우리 사회의 웨스 무어와 그 부모들도 어떤 길이 옳은지 따져볼 기회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