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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눌와 2010

한국미술사의 큰 줄기를 잡아내다

 

 

조인수 趙仁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insoocho@karts.ac.kr

 

 

80271980년대에 유홍준(兪弘濬)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인사동의 화랑이나 신촌의 문화마당 등에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입담과 희귀한 슬라이드 자료에 매혹되었던 것을. 게다가 그가 다루는 주제는 고대부터 근현대의 미술은 물론 당시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민중미술까지 폭넓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수적이고 신중한 학계와 대비되어 비판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재야 미술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문화유적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기록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밀리언쎌러가 되면서 그는 대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90년대 초에 나온 이 책은 88올림픽 이후 서서히 생겨난 마이카 붐과 함께 늘어나는 여가시간을 품위있게 즐기려는 풍조와 맞물려 대박을 터뜨렸다. 오죽하면 강진이나 경주를 답사하는 사람들마다 손에는 이 책을 들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유홍준은 대학교수가 되어 강단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게 되었고, 북한의 문화유적까지 답사를 다녀오고, 마침내는 이 나라 문화재 정책을 총괄하는 문화재청장에까지 올랐다.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그것도 중심 한가운데로 진입한 것이었다. 이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시시각각 언론매체에서 찬사와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행보는 마치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출처(出處)처럼 나아가서 행하는 일과 물러나 지키는 것 사이의 어려움을 보는 듯했다.

여하튼 그가 바쁘고 피곤한 공직에서 물러나 학자의 서재로 돌아온 지 일년 반 만에 들고 나온 것이 한국미술사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 이 책이다. 제목도 강의라고 붙이고 밑줄을 쳐가면서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쏘파에서 편안하게 읽는 책이라고 강조한다. 이전 답사기처럼 집집마다 하나씩 사두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분야사 연구를 저공비행이라 빗대고 자신은 위험한 고공비행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역시 한국미술사 입문서에 목말라하는 독자대중을 위한 써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미술사 연구는 1970년대 이래로 괄목할 발전을 이루어 요즈음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대학원 지원율에 있어서는 최고 호황을 누리는 분야가 되었다. 하지만 학문이 심화되다 보니 개설서보다는 한국회화사, 한국도자사, 한국불교조각사 같은 분류사가 주로 출판되었다. 일반인은 쉽게 접근하기 힘들 뿐 아니라, 분야가 다른 미술사 전공자조차도 읽기에 버거운 세분화된 연구서들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용기를 내어 40년 만에 과감하게 새로운 통사(通史)를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학자들은 논문을 써대느라 제대로 연구할 시간이 없다. 어떻게 연구도 하지 않고 논문을 쓰느냐고 의아해하겠지만, 인정받는 학술지에 정해진 편수의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연구를 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말하는 것이다. 첨예한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고 비판적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결여된 천편일률적인 연구가 쌓여가는 형편이다. 한국미술사의 경우에도 점점 더 작은 사실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써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면에서 거시적 관점으로 전체를 포괄하는 유홍준의 새 책은 환영할 만하다.

한국미술사강의는 전체 세권으로 계획되었고 이번에 나온 1권에서 가장 복잡한 고대미술을 정리했다. 앞으로 나올 2권에서는 그간 크게 부각되지 못했던 통일신라와 고려의 미술이, 3권에서는 저자의 전공인 조선의 미술이 다루어질 예정이다. 선사와 삼국, 발해를 다룬 1권만 살펴보자면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점이 눈길을 끈다. 전해지는 미술작품이 희소한 여건에서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새로운 유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적극적으로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저자는 고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인류학적 해석을 참조하여 이를 미술사와 잘 연관시켰다. 성실한 학자적 노력이 돋보인다.

문헌기록과 미술품이 비교적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삼국시대의 미술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세나라 미술의 각기 다른 성격을 뚜렷하게 정의했다. 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이 그것이다. 도기, 금속장신구, 와당, 서예 등을 사례로 들어 세나라의 예술적 취향을 구별했다. 엄밀히 따지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거친 구분이지만 입문서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조명을 덜 받았던 백제미술을 균형있게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부드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백제미를 되살린 것이다. 이 과정에는 근간에 다시 세상에 빛을 본 백제금동대항로, 왕흥사 사리기 등이 한몫을 했다.

이전의 답사기가 유적과 유물에 대하여 공간적으로 섭렵했다면, 이번 한국미술사 강의는 작품을 시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전체 구성에서 보자면 기존에는 서구의 미술사를 기준으로 삼아 시대배경, 건축, 회화, 조각, 공예의 순서로 서술하는 것이 대세였지만 저자는 이를 과감하게 탈피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대순서를 따르고 있지만, 국가 구분에 집착하지 않고 분야의 배열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치 한 학기 강의를 흥미롭게 구성하듯이 시대와 주제를 적절히 배열했다. 미술의 사회적 배경을 깊이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며, 지하의 고분미술에서 지상의 불교미술로 큰 흐름을 잡아낸 것도 효과적이다.

미술사 저술의 성패는 시각자료의 적절한 활용에 있다. 이 책은 본문만 368면인데 도판은 340점이 넘으니 거의 한 페이지에 도판이 하나씩 등장한다. 저자는 최상의 도판을 구해서 사용했음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지금까지 나온 다른 개설서에 비해 사진들은 우수한 편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도판이 너무 작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물에 검은 바탕을 깔거나 그림자 효과를 더한 것이 많아 아쉽다. 좀더 세련되게 디자인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한편 저자가 이전에 펴낸 한국미술사 관련 책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논평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이번에는 13명에 달하는 각계 전문가의 엄밀한 교정을 거쳤다. 사실 논문이나 책을 출판하기 전에 주변 동학들에게 미리 검토를 받는 것은 오류를 정정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데도 어쩐 일인지 우리 학계에선 드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철저한 검증을 거친 다음에 독자에게 선보이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끝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변화추세와 관련해 짚어볼 점이 있다. 한국미술의 특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현재는 탈민족, 다문화로 변동하는 중이다. 이제 위대하고 불변하는 한국미를 내세우는 것은 촌스러운 풍조가 되었다. 교류와 교섭, 혼성과 다양성이 화두이며, ‘과거는 낯선 나라와도 같다’는 비판적인 역사관도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미술사와 세계미술사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미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중요한 것이다. 과연 이 책이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감지했는지는 본격적인 서평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나올 나머지 두 책에서도 한국미술사를 흥미롭게 그리고 올바르게 강의해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