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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성일 영화평론집 『필사의 탐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영화의 시대’ 이후 영화 읽기의 교본
김봉석 金奉奭
영화평론가, 『브뤼트』 편집장 lotusid@naver.com
1990년대 후반부터 10여년간, 한국은 영화의 시대였다. 1995년 영화사 백두대간에서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개봉하며 예술영화 붐을 주도했고, 영화전문지(라고 불러야 할) 월간 『키노』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영화주간지 『씨네21』이 창간되었으며, 1998년에는 강제규의 「쉬리」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쌍스가 열렸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영화광 감독의 새롭고 기발한 영화가 대중을 사로잡는 동시에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소설가 이창동은 「초록 물고기」(1997)를 만들어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시와 소설 대신 장안의 화제인 영화로 대화의 물꼬를 텄고, 문자의 시대는 가고 영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섣부른 선언까지 여기저기 등장할 정도였다. 물론 21세기에도 문자는 사라지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터넷에 수많은 글, 정보, 콘텐츠가 범람하면서 더욱더 ‘글’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아전인수격으로 말한다면, 결국 영화를 읽기 위해서는 ‘글’로 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토록 영화가 찬란했던 시절,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키노』를 읽었다. 『로드쇼』와 『키노』를 창간했던 편집장이자 영화평론가 정성일(鄭聖一)은, 영화에 대한 전혀 새로운 지식을 안겨주는 동시에 영화를 읽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키노를 탐독했던 독자라면, 크건작건 정성일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고, 21세기에도 탁월한 영화평론가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다만 영화잡지와 『한겨레』 등 몇몇 매체를 제외하면 저널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글은 일간지에 실리기에는 너무 현학적이고 난삽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장황해지고 치밀한 분석 이상으로 수사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역으로 ‘영화’의 완만하지만 거대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젠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이하 『언젠가』, 39~40면) 시대이고 영화관이 스펙터클을 즐기는 일종의 테마파크로 변하는 환경에서 정성일의 비평은 여전히 유효하면서도 점점 중심에서 비껴나고 있다.
정성일은 영화에 대해, 여전히 아낌없는 애정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심한다. “제멋대로가 되어버린 현대예술의 난폭함. 난처한 노이즈들. 기괴한 설치물. 문법적 오류로 가득찬 소설. 이러한 현대예술에 영화가 합류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시 한번 대상을 상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필사의 탐독』 29면) 그런데 정성일은 여기서, 그다운 선택을 한다. 자신과, 정체가 모호한 ‘씨네필’을 한편으로 놓고, 타자와 구획을 짓는 것이다. “당신이 지성을 포기한 장소에서 우리들의 지성이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당신이 상상력을 버린 시간에 우리들의 상상력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필사의 탐독』 27면)
물론 이해는 간다. 숱한 평론가들의 영화 읽기는 점점 집요한 분석에 몰두하면서 통찰력은 증발해버리고, 영화는 자기복제와 순환의 고리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정성일의 그런 수법은, 자신만의 성채를 높고 튼튼하게 쌓는 엘리뜨주의의 혐의를 짙게 풍긴다. 앙드레 바쟁의 말을 인용한 “영화가 점점 더 빈곤해지는 것은 그것을 만든 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자들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언젠가』 75면) 같은 진단을 생각한다면, 영화평론이 점점 대중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평론의 몰락을 지성과 상상력을 포기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쉬운 동시에 자신을 고결한 희생자이자 순교자로 떠받드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 모순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를 다룬 『필사의 탐독』 그리고 해외작품과 영화에 대한 태도 등을 다룬 『언젠가』는 우리 시대 ‘영화 읽기’의 교본과도 같은 책이다. 무엇보다 비평이 단순한 해부학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면, 정성일의 비평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에 근거한다.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 방법이다.”(『언젠가』 55면) 또한 그 세상은,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이곳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화를 끊임없이 현실로 되돌려주고, 그것이 제기한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어낸 사회를 향해 질문하고, 그것이 그러해야 할 필연적 역사의 과정 안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언젠가』 98~99면)
영화의 시대가 지나갔음에도 정성일의 영화평론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이 책으로 한정한다면) 철저한 물질성 때문이다. 정성일은 영화감독과 비평가인 장 뤽 고다르와 앙드레 바쟁만이 아니라 질 들뢰즈, 슬라보예 지젝, 발터 벤야민,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수많은 철학자와 사회학자 들을 인용하는 것은 물론, 치밀하고 정교하게 영화의 구조와 쇼트를 분석하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철저한 애정을 증명한다. “상상력을 동원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해야 한다”(『언젠가』 42면)는 태도에 의거하여. 정성일은 영화를 신화화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영화가 일종의 환영임을 적시하고 있다. 롤랑 바르뜨의 “영화적 이미지,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속임수, 그러니까 미끼이다”(『언젠가』 127면)라는 말을 인용하고, “모든 영화는 항상 거짓말이다”(『언젠가』 99면)라고 자백하고, “문학이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집을 털어간 도둑들의 집안이 보여주는 호화찬란함이 아니라, 원래의 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세상 그 자체”(언젠가 126면)라고 영화를 닮아가려는 문학에 충고한다.
보고, 쓰고, 만드는 세가지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정성일의 태도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오의 「오차즈께의 맛」을 분석한 「왜 쇼트를 나누는가」 같은 글은 정성일의 통찰력, 단지 분석이 아니라 영화의 표면 깊숙이 파고드는 시선과 애정을 한껏 맛볼 수 있는 평론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선택”(『언젠가』 253면)이고 “그 선택의 결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이며, 그 영화의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그 선택의 순간을 이해하고 혹은 비판하는 것이다”(『언젠가』 253면)라고 거침없이 말할 때, 기꺼이 박수를 치며 공감하게 된다.
『언젠가』는 ‘자선집’이 아니라 편집자와 만화가 정우열이, 그동안 정성일이 쓴 글 중에서 고른 것이다. 유추해서 말한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탁월하고 예리했던 글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가 때로 독선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글도 생산해냈던 것을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다. 사실 저널에 쓰인, 당대의 시공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글을 무조건 묶어내는 것은 나태의 발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성일은 독자의 시선으로 엮은 선집을 첫 영화평론집으로 등재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나온 국내의 영화평론집 중에서 당연히 앞머리에 놓여야 할 가치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