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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금진 崔金眞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simasian@hanmail.net
아파트가 운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아파트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석회암 지대
밤이면 저수지에선 말조개들이 울었다
거품을 물고 물 표면에 거꾸로 매달려 이리저리 떠다녔다
시멘트가루 잔뜩 눌어붙은 익사자의 살가죽을 벗겨 먹으며
우렁이들은 저수지에서 토실토실 여물었다
동굴에서 나온 박쥐들이 몰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오래 살았다
오래 사니까 검은 머리가 돋는다며 생선가시 같은 이빨을 보이던
노파는 자주 뒷산 동굴 구멍으로 들어갔다
농약을 먹은 개들이 논둑을 뛰어다녔고
아이들은 움푹움푹 발이 빠지면서도
밭둑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땅속을 쉽게 들락거렸다
동네는 석회암 지대여서
집 밑에는 커다란 땅구멍이 서너개씩은 미로처럼 나 있었다
누군가 잃어버린 운동화는 십리 밖 하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우물 속에는 늙은 메기가 살았는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 누이들은
얼굴 시커먼 청년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
분지를 덮고 있는 동그란 하늘에 이따금 꽃이 피기도 했는데
그건 상여가 뒷산을 오르는 거였다
마을의 한가운데엔 구멍 숭숭한 묘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쪽을 향해 잔뜩 허리 조아리는 대문을 내고 살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화악, 확, 땅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