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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김승일 김상혁 이제니 이준규의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우울을 애도하다」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사건 이후
2000년대 한국시단에는 기존의 시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경향의 시들이 출현했다. 이에 비평계는 ‘미래파’(권혁웅), ‘다른 서정’(이장욱), ‘뉴웨이브’(신형철)란 명명을 통해 새로운 시들에 답하는 비평적 담론들을 선보인 바 있다. 그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기존의 비평적 언어들로는 명명 불가능한 새로운 시적 현상이 흡사 사건처럼 발생했다는 데는 입을 모았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적 경향을 긍정하는 저 담론들의 명명법과 가치평가에 의문을 표했을 뿐, 이질적 경향의 시들이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국 시단을 위해서는 꽤나 반길 만한 사태였다. 오랜만에 시단에 형성된, 비평들의 불화와 대립은 한국시의 주류에 대한 판단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한국 시의 주류가 위치하는 장소는 텅 빈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 한국 시의 주류란 무엇인가. 낯선 것으로 분류되는 시적 경향인가, 아니면 그것과 구분되던 전통적 서정시인가. 답을 하기가 애매할 것이다. 이 애매함은 여유의 다른 이름이며, 우리 시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증거다.
한국 시사에 등장한 저 ‘텅 빈 자리’는 여러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새로운 시적 경향을 형식화할 때 말해질 수 있는 것 또한 ‘텅 빈 자리’의 발견이기에 그렇다. 신형철(申亨澈)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아와 주체의 구분 논리를 빌려와, 새로운 시적 경향에서 발견되는 의미론적 공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새로운 세대의 많은 시들에는 ‘나’가 없다. 그들은 자명한 ‘나’를 지우면서 미지의 ‘나’를 찾아간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의 영역을 탐험한다.”1) 기존 세대의 시와 새로운 세대의 시를 성급하게 이분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의 시들이 ‘나’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좀더 뚜렷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권혁웅과 이장욱의 비평에서도 말해진 바 있듯, 새로운 경향의 시들은 하나의 목소리가 일관된 진술 속에 의미론적 소실점을 향해 내달리는 방법에서 벗어나 여러개의 목소리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현실의 움직임을 상대하며 때로는 모이고 또 때로는 더 분산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분명 새로운 세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들과의 관계에서 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 단절이 풍부한 감각적 사유를 도래시킬 가능성을 예감하게 했다. 다시 말해, 우리 시에 내재한 텅 빈 자리에서부터 다양한 주체들의 출현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후 5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시는 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그사이 우리 시에는 정말 다양한 주체들이 출현했을까.
죽음을 고하여 죽음을 완결하라
우리 시들 안에 텅 빈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것이 또한 각각의 시편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형식적 특징이라 할지라도, 이 현상을 곧바로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빈 자리란 늘 어느 한 주도적 힘에 의해 채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더구나 그 주도적 힘의 성격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젝(S. Žiek)이 여러 글에서 언급했듯 이상(理想)의 몰락은 종종 기이한 이상의 대체를 불러오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는 이 상황을 바로 수긍할 것이 아니라 좀더 회의해보야야 한다. 이 텅 빈 곳으로부터 진정 새롭고 다양한 주체가 형성되는가의 문제를 의심하고 조사해야 한다. 조사라고? 그렇다.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지닌 철학자 바디우(A. Badiou)가 철학의 한 역할을 사건에의 개입과 명명을 통해 사건의 진정한 새로움을 조사하는 일이라 한 바 있듯, 문학비평 또한 텍스트들에서 비롯된 유사 사건과 유사 주체들에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문학의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때로 철저한 사후조사를 실행해야 한다.
미래파 담론이 한창일 때 시의 형식적 변화로 언급된 바 중 하나가 장광설의 출현이었다. 권혁웅(權赫雄)은 이에 대해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의 시단이 다양한 발화들로 채워지기를 기대하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기대는 섣부른 것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한명의 시인이 한편의 시에서 여러 종류의 전언을 발설할 수 있다고 해서, 여러명의 시인이 각자의 시에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장이지는 「차이의 수사, 범용성의 수사」에서 젊은 시인들이 알레고리적으로 장황하게 발설하는 시들이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2) 이를 비평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기우로 치부하기엔 다소 걸리는 점이 있다. 실은 이 질문은 새로운 시적 경향의 출현과 관련된 담론들이 태동할 때쯤 이미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당시 진은영(陳恩英)은 새로운 경향의 시들이 전복적이라기보다 다소 빤한 문학적 수사를 지겹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 바 있다3). 개인적으로 저 의문에 대해 당시의 시단이 깊이 숙고하지 못한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얼마 전 박상수 시인은 최근에 등단한 한 시인의 작품이 지닌 매력과 한계에 대해 말하면서 진은영의 의문을 좀더 구체화했다.4)
다행히도(?), 어떤 시들은 이미 그것을 보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보는 시, 가령 김승일(金昇一)의 시가 그렇다. 거침없는 발설을 다양하게 늘어놓으며 기존의 제도와 관습적 사고에 충격을 가하는 듯한 이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그 독특함은 의외로 ‘지루함’에 있다. 시가 지루하다는 말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언어는 무척이나 활달한 어조를 띠며, 구어의 힘과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말하는 바 또한 꽤 재미있는 편이다. 그런데, 그의 시는 미묘한 시간차로 충격 이후의 허탈감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허탈감은 마치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자유 없음을 느끼는 자의 허무한 고백처럼 보인다.
오리보트 선착장에서 관리인 아저씨가 주의를 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돌아오기 힘드니까요.
아저씨,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사서 걱정을 하시는 거죠? 페달 밟는 일이 힘들다는 건 우리도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리는 최대한 멀리 갈 거야. 돌아오기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옛날에도 멀리 가봤거든요. 그때도 어떻게든 돌아왔어요.
(…)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오리는 한마리도 보이질 않고, 우리는 페달에서 두 발을 뗀 채 한강 위를 지루하게 떠다닌다. 보트를 반납하기까지는 아직 삼십분도 더 남았기에.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빌려 삼십분만 자려고 했던 것인데.
(…)
선착장에 도착하면…… 우리는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의 약속. 헤어지지 말자고 쫓아오는 새들 때문에 당신은 약속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이제 그만, 나 때문에 우는 건 그만두세요.
—「오리들이 사는 밤섬」 부분(『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관리인과 어린 화자의 대립구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의미지평을 연상시킨다. 관리인을 고루한 사회권력을 표상으로 또는 시단을 관리하는 비평가의 모습으로 읽을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다. 그들은 모두 주체의 가능성을 감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것의 한계를 설정하려 든다(물론 좋지 않은 비평은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체의 텅 빈 가능성을 자신에게 유리한 언어로 채우려는 경향은 사회권력이나 문학비평이나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여기에 또 한명의 관리자가 있다. 화자와 함께 오리배를 타고 나가 그에게 상식적인 슬픔과 죄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친구다. 이 친구는 모험에 동참은 하지만, 그 모험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욕망이 없어 보인다. 김승일은 자신의 맹목적 충동을 관리하려 드는 이 모든 시선을 배반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목소리에서 개별성이나 특이성을 제거하려고 드는 관리체계에 대한 저항이나 반항의 태도를 감지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저항과 반항에는 미묘한 데가 있다.
시의 도입부에 보이는 의기양양함과 달리 곧이어 누설되는 지루함(“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오리는 한마리도 보이질 않고, 우리는 페달에서 두 발을 뗀 채 한강 위를 지루하게 떠다닌다”)에는 어딘가 징후적인 면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선착장에 도착하면…… 우리는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후반부의 구절도 그렇다. 반항 이후에 급격하게 찾아드는 피로, 그리고 반항의 끝이 결국 다시 체계 내적 공간을 환유하는 가정으로 회귀할 거라는 말은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저 지루함 속에는 반항을 시도하는 시들이 형식상으로는 반항의 의장(擬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상 이미 충분히 알려진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담겨 있는 듯하다. 또한 각자의 가정 운운하는 구절은, 미지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난 시가 아무런 발견도 없이 다시 안정적인 옛 토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다행히도 김승일의 시에서 반항은 두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리자적 성격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도덕과 규범에 관한 반항이 한겹이라면, 다른 한겹은 자신이 행한 반항에 대한 반항이다. 이 두번째 반항은 욕망의 재귀성(再歸性)에 대한 반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승일 시에서 표출되는 지루함은 자신의 반항적 언어에 대해 회의하는 자의 표정을 떠올린다. 설득력을 좀더 강화하기 위해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폭력성의 특이한 성격도 언급해보도록 하자. 김승일의 시에서 표출되는 폭력성은 현실 속에 자리한 허위와 권위를 까발리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동시에 시적 충격을 가하기 위한 무력한 전략처럼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시가 무력하다는 말이 아니다. 시의 무력을 말하는 시가 무력할 리 있겠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김승일이 폭력의 노출을 통해 발생시키는 충격은, 충격은 충격이되 별다른 내용이 없는 충격이고, 타인의 시선을 끌거나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한 충격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노골화함으로써 시인은 주체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보존하기 위한 문학의 저항이 내용 없는 의사(擬似) 저항에 불과한 것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문학의 왕국에 충실한 신민이 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향해 당신의 믿음은 죽은 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또다른 시를 보자.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 거의 학대 수준이었지. 처음 듣는 학대 이야기에 불현듯 삼총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도 맞았어. 우리도 학대를 당했다니까?
이것 참 굉장한 공감대로군. 유년 시절에 학대당한 경험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일까? 맞고 자란 우리들의 취향. 우리들의 사랑. 미친 부모를 만난 탓으로. 우리가 서로 닮은 것일까?
(…)
사실은 너를 이해한단다. 내가 더 학대받았으니까. 나는 골프채로 두들겨 맞고 알몸으로 집에서 쫓겨났거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그랬구나. 너도 알몸으로 쫓겨났구나. 여름에 쫓겨났니, 겨울에 쫓겨났니? 나는 겨울에 쫓겨났었어.
정말로 겨울에 쫓겨났었니? 아무리 친구의 부모라지만 정말로 너무한 부모들이군. 니가 우리 삼총사 중에 가장 많이 맞고 컸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
—「같은 과 친구들」 부분(『애지』 2010년 가을호)
이 시의 숨은 서사는 이렇다. 삼총사라 불리는 같은 과 친구들이 여행을 간다(아마도 이 친구들은 동시대에 시를 쓰는 비슷한 연배의 시인들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큰 기대를 안고 떠난 여행은 막상 닥치고 보니 심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얼굴이나 쳐다보며 이렇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토로하던 인물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시점은, 누군가 자신이 경험한 학대를 고백하면서부터다. 이 시에서 부모로 표상되는 어떤 권력의 끔찍한 학대에 초점을 맞추기란 쉽다. 하지만 그런 분석으로는 이 시의 결말을 감당하기 힘들다. 이 시에는 그 학대받은 경험을 말해야만 견딜 수 있는 지루함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결론이야말로 나에게는 시인의 진솔한 고백처럼 들린다. 두 편의 시를 통해 본 김승일의 시적 고백은 모두가 선정적으로 비슷한 반항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비평적 시선과 닿아 있다. 김승일은 우리 시가 확보했다고 믿는 텅 빈 자리가 과연 얼마나 새로운 말을 쏟아내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중이다. 누군가 주체의 텅 빈 자리를 통해 무언가가 출현한다고 낙관하며 기대할 때, 김승일은 그 흥을 곧바로 깨뜨린다. 대신 그 텅 빈 자리란 일종의 문학적 이상(특이성 또는 저항성)이 몰락하거나 공격당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폭로한다. 이는 허무주의적인 제스처일까. 아니, 허무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이는 묘하게도 문학의 가능성을 더 믿고 싶어하는 자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김승일의 고백이 나아가는 경로는 ‘왜 굳이 시를 써야만 하는가’를 납득시킬 만한 무엇을 찾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해답을 구했는지는 미지수다. 아마도 아직은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시인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전망은 밝은 편이다.
앞서서 사뿐사뿐 걸어야지 걷다가도 누가 부르면 웃으며 돌아봐야지 끌과 칼을 쥐셔요 나는 작업대 위에 놓아둔 발포석고처럼 순종합니다 꽃다발처럼, 나에게 수많은 머리통을 달아주어서 아름답지만 엄마는 내게 분무기를 겨눕니다 오늘은 또 사랑받는 머리 하나를 떼어 공중으로 던져요 태양의 정정함 때문에 눈을 가립니다 제일 좋은 건 스스로 다리를 자르고 기적을 믿는 나의 근황 아침마다 변기 속으로 털 많은 악몽을 눕니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생활의 배후마다 신이 있다고 말할 겁니다 깜깜함과 약한 것들에 대해 비슷한 기분이 생길 때까지 나는 내 아래를 쓰다듬어요 무엇을 내려다보는 일에서 연애를 배우며, 짐승의 등에다 밑을 닦으며 공포를 엉망으로 만드는 밤 낯선 이가 자꾸만 내 속에서 노크를 하네요
똑똑,
나오셔요?
—김상혁 「너를 내 아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김상혁(金祥赫) 시의 흥미로운 점은 ‘배후’다. 인용작의 “엄마”나 “신”이 그렇듯 그의 시에는 자주 배후에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들이 출현한다. 그 배후의 정체는 늘 불분명한데, 이는 그들이 나라는 한 개인으로서는 장악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나와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를 맺는 자들이다. 당연히 그들은 내 위에 군림하고, 그로 인해 나는 이 시의 묘사처럼 “부르면 웃으며 돌아”보고 “꽃다발처럼” “순종”한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아는 문학이란, ‘태양’으로 오랫동안 상징되어온 일종의 중심을 탈중심화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태양’ 같은 중심이 시에 출현할 때 독자가 기대하는 바는 그와의 격렬한 싸움이지 않던가. 하지만 흥미롭게도 김상혁의 시에서 저 중심과 갈등을 일으키고 맞설 자세를 취하는 ‘나’는 없다. 대신 ‘나’는 순종하거나 반항 같지도 않은 장난을 하거나 기적을 믿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겨우 해내는 일이란 “털 많은 악몽”을 배설하는 정도다. 요즘의 속된 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불어, 그런 나의 목소리로부터 감지되는 이 꺼림칙한 느낌은 무엇일까.
김상혁의 시에 등장하는 압도하는 중심과 그에 맞서는 화자의 수동성은 절대적 힘의 공포 앞에 선 주체의 무력함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김상혁의 시 속 화자가 보여주는 어딘가 맥이 빠진 말투는, 그가 직면한 공포를 말한다기보다 그것이 공포라기보다는 그저 완고한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며, 그 완고한 것과 심각하게 대립하지 않음으로써 “공포를 엉망으로 만”든다. 중심과 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깜깜함과 약한 것들에 대해 비슷한 기분”이 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김상혁 시의 독특함이 있다. 일종의 적극적 수동성이라고나 불릴 만한 이것은, 중심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것에 격렬히 대응하는 방식이 오히려 유사 중심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의 권력을 공고히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인식한 태도이다. 반대로 중심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그것에 희화화하는 태도로 대응할 때, 이 행위는 스스로를 중심이라 여기는 상대에게 그것의 죽음을 일러주는 한 전략이 될 수 있다. 화자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장난스러운 면모가 감지되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냥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웃으며 돌아봐야지”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것은 애도의 한 방식이다. 김상혁의 시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우리 시가 확보한 텅 빈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부활하려 드는 중심적 권력에 당신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일러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그렇게 공포 앞의 무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의 무기력을 말하며 공포를 분열시킨다.
김승일과 마찬가지로 김상혁의 시에는 우리 시에 내재한 ‘텅 빈 자리’라는 가능성을 보존하려는 특이한 전략과 에너지가 감지된다. 그것이 현실을 구성하는 언어에 잠식해 있는 권력을(좀더 정확히는 그것의 낡음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해체한다는 점을 볼 때, 어쩌면 이들의 목소리에서 한국 시의 새로운 풍자적 주체의 등장을 예감하는 일이 가능할 것도 같다.
반복하라,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김승일과 김상혁이 우리 시가 열어놓은 텅 빈 주체의 자리에 스며드는 언어들을 알레고리와 이미지를 통해 숙고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자리를 복원하기 위해 독특한 언어 사용을 보여주는 시인이 존재한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이제니 「페루」 부분(『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언어가 사물의 죽음을 이끈다거나 그것이 지시하려는 대상의 부재와 현존을 동시에 일으킨다는 말은 시 비평의 세계에서 꽤나 익숙한 것이다. 이제니의 질주하는 말에도 분명 저런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인용한 시에 쓰인 물음과 답변만 해도 그렇다. 시의 목소리가 “당신은 한국사람입니까”라는 물음에 주저하는 이유는 그것을 긍정할 때 ‘나’의 일정부분은 죽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람”이 ‘나’를 대체할 때 저 문자는 ‘나’라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살해한다. ‘나’는 “한국사람”이라는 말이 펼쳐놓는 상징세계의 안에도 있지만 그 바깥에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한다면 시의 중간에 돌연하게 등장하는 “히잉 히잉”이라는 의성어가 그리 느닷없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직접성을 살해당한 ‘나’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렇듯 자신에게 부여된 언어를 수락한다는 일은 확실히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광기어린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저 대목은 사물의 죽음과 대상의 부재를 일으키는 언어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방금 전 분석의 과정에서 무턱대고 “‘나’라는 존재의 풍요로움”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 풍요로움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존재의 풍요로움에 대한 증명은 ‘나’를 살해하는 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질적 흐름을 절합(articulation)하면서 겨우 의미화 작용을 하는 듯한 저 “히잉 히잉”이란 단어에 다시 주목해보자. 분절과 절합의 과정—“히잉 히잉”이란 단어 하나에도 분절과 접속의 과정이 있지만, 동시에 그 단어가 시의 문맥들 속에 배치되는 것 또한 하나의 분절과 접속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속에서 저 의성어는 풍부한 의미 맥락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존재의 울음을 연상시키던 그것이 동시에 태어나는 존재의 울음으로 거듭난다. 이 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바로 여기 있다. 언어란 단지 관련 대상의 부재와 현존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상징화 너머로 나아가기를 추동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고 발화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히잉 히잉”이란 말의 반복됨, 다시 말해 그것이 왜 두번 쓰였는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실제로 많은 시에서 이제니는 ‘두번’이라는 말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같은 구절을 두번 이상 반복한다). 이는 두번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첫번째 죽음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것이 언어의 그물에 포획됨으로써 살해되는 것을 뜻한다. 이때 언어는 가해자이고 사물 또는 존재는 피해자가 된다. 그런데 두번째 죽음에서는 상황이 역전된다. 피해자인 사물이 언어를 공격한다. 상징화를 거부하는 사물의 잔여가 영속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은 언어의 빈 곳을 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사물을 죽일 뿐 아니라 재탄생의 조건을 발생시킨다. 앞서 말한 상징작용이 상징화 너머로 더 나아간다는 표현의 숨은 뜻이 바로 여기 있다.5) 결국, 반복 가능성이란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인 셈이다. 다른 시에서 이제니는 “슬픔의 순간에도 운율만은 잊지 않았지”(「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라고 적은 적이 있는데, 이때 저 운율을 기계적 반복으로 획득한 음악성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며, 언어보다 큰 현실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제니는 운율을 통해 무구한 기억과 접속된 상태의 몸을 만들어 시 속의 시공간을 한층 더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라고 쓴다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한적한 한담의 한담 없는 밀물 속에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있다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라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피로와 파도와」 전문(같은 책)
이제니의 시가 지향하는 것은 “백지”이고 아직 쓰이지 않은 시다. 너무 과도하게 확정적인 진술인가. 그렇지 않다. 저처럼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이 자신의 시선을 은밀히 숨겨놓은 채로 시를 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그러한 시선과 모순을 일으키거나 또는 그것을 잊으려는 듯 문장 뒤로 물러서려는 언어와 싸운다. 그래서 이제니의 시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떠나고 싶었어요”(「독일 사탕 개미」)라는 말처럼, ‘탄생’ 또는 ‘기원’을 연상시키는 시간적 정황들이 직접적으로 자주 출현한다. 「피로와 파도와」 역시 시가 태어나는 순간을 시화한 시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순간에 자리한 단어가 ‘피로’와 ‘파도’일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살아 있기 마련이다(“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 저 심정은 이른바 대상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욕망의 움직임 자체를 욕망하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無)와 죽음 또는 타자라는 불안한 지대 위에 자신이 겨우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자는 욕망의 움직임에 기대어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려는 몸부림을 포기할 수 없다. 이제니는 그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바다”라는 말을 빌린 무한한 창조공간을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고 적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있다라고 쓴다”고 적는다. 조사 ‘라고’가 불러일으키는 예사롭지 않은 불안감, 아니나 다를까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심정”이 곧장 밀려온다. 시인은 무한한 영역이 있음을 겨우 감각할 뿐, 저 몸부림이 그것의 도달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란 항상 그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텅 빈 중심을 회전해야 하는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하지 못한 채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라고” 적을 수밖에 없다. 이 여정이 피로를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 끝없는 여정은 시 안에 두터운 세계를 보장한다. 여정으로부터 나의 몸이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맺을 가능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에서 무한한 생명력 내지 반복을 연상시키는 “파도”라는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와’라는 접속일 것이다(그러고 보니 우리가 제목에서 주의를 기울인 것은 ‘피로’와 ‘파도’일 뿐, 저 접속을 이루는 조사 ‘와’를 놓치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다. 이제니의 시는 관계들의 세계가 무한히 펼쳐지는 곳이다. 독자는 이 시들에서 무수한 이인칭의 명명을 듣는 경험을 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권혁웅이 이제니의 시편들에서 “다정”이란 감정을 읽어낸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제니의 시는 그렇게 형체가 없거나 희미한 존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앞서 이제니의 시가 ‘백지’와 ‘쓰이지 않은 시’를 욕망한다고 했던 말은, 결국 무(無)와 죽음이 노출된 곳을 수많은 생산적 관계맺음이 가능한 시원의 자리로 변화시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를 통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에 “오늘”과 “어제”의 시간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시간적 지표를 달고 있지 않지만 그로 인해 더 오랜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을 “눈물”과 “허기”, “그리움”과 “정적” 등이 거기 녹아들어 시간의 깊은 파고와 격랑이 창조되는 순간을 목격하지 않는가. 이제니는 그렇게 언어를 쓰고 또 씀으로써 말 속에 깃든 텅 빈 창조의 자리를 복원한다. 그 복원을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두터운 기억과 접속한 상태의 몸을 선사함은 물론, 명명으로써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여기에 어떤 주체의 이름이 가능할까. 반복으로써 시간의 선후관계를 무화시키는 것은 그 과정 속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파편들의 관계맺음을 통해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음악과 닮았으니, 음악적 주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여기 또 한명의 음악적 주체라고 불릴 만한 한 남자가 이제니와 흡사하게 어떤 말을 반복하며 바닷가를 서성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를 보자.
얼룩진 문학, 문학의 바람
그래, 예술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어찌 말하면 조금 세련되게, 질겅질겅 질겅질겅 얼룩 언덕을 내려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이 그야말로 우두커니 서서 해풍이 얼굴에 불어닥치는 것을 온통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바다의 냄새를 느끼면서 다시 얼룩, 하고 발음해보았다. 입안은 짠맛으로 가득했다. 바다의 얼룩, 이라고 발음한 후 이 바다의 얼룩이란 말을 그가 들었을까, 그가 이 바다의 얼룩이란 말을 들었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한점 얼룩이 될 수 있을 텐데, 라고 중얼거렸다. 그 얼룩은 얼룩 같은 생각을 하는 얼룩일 뿐이었다. 얼룩은 계속 얼룩 언덕을 내려가며 세계의 모든 도서관 서가에서 한꺼번에 쏟아진 책들의 얼룩처럼 얼룩의 앞을 걸어가는 얼룩들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 얼룩들은 서로 죽이고 있었고 서로 베끼고 있었다. 무한으로 확산하고 무한으로 수축하였다.
—이준규 「문」 부분(『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문학과지성사 2010)
이준규는 말의 반복을 통해 우리에게 잠들어 있던 어떤 느낌을 깨운다. 어떤 느낌인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그의 시에서 ‘나’와 ‘너’, 그리고 ‘그’라는 인칭의 혼돈이 발생하는 이유다)이고 또 인간의 언어가 비어 있다는 느낌(비문법적 표현들)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저 느낌을 자주 잊고 있다는 느낌(“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이”)이다. 종합하자면 이 세계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느낌은 예술과 문학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예술 또는 문학의 얼굴이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어댈 때, 이같은 모습에 문학의 이상에 관한 말들을 부여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준규는 그런 빈말을 반복하는 대신,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문학의 얼굴이란 결국 어떤 시선의 인준(認准)을 받은 얼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폭로한다. “그가 이 바다의 얼룩이란 말을 들었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한점 얼룩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중얼거림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나’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의 말을 들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저 목소리, 이것이 타자의 인준에 대한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폭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그 얼룩들은 서로 죽이고 있었고 서로 베끼고 있었다”는 말에는 문학이 생산하는 새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마저 들어 있다.
문학에 대한 허무한 인식과 불량기가 넘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 스스로의 언어를 얼룩으로 만들어 문학이 쌓아올린 성단(星團)을 얼룩지게 하려는 태도일까.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학의 가능성을 믿지 않으려는 자는 이 시의 목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다. 반면, 문학의 가능성을 믿으려는 자는 이 시의 목소리를 부정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자리란 저렇듯 긍정도 부정도 불가능한 곳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존재론적 위치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이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긍정하는 일은 문학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문학의 자리란 질겅거리며 끊임없이 움직이던 “입”이 문득 마주친 “해풍” 앞에서 “입”이 아닌 우두커니 선 “온몸”으로 거듭나는 순간, 다시 말해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자신의 움직임을 중단하고, 순간적으로 자신과 자신 아닌 것을 포함하는, 자신보다 커다란 다른 것이 되는 순간에 출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문학의 자리란 문학의 바람을 포함하는 자리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시에 내재한 텅 빈 자리로부터 더 새롭고 다양한 주체들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늘 시인과 시에게 더 큰 바람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어느 먼 곳으로부터 이곳으로, 곧 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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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202면.
2) 이 글에서 장이지는 2000년대 이후 알레고리를 통해 세계의 패악한 구조를 드러내는 시들이 많아졌다고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현상은 문제적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는 시들이 이미 드러나 있는 패악적 구조를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리토피아』 2010년 봄호)
3) 진은영의 말을 옮겨보면 이렇다. “‘과도하게’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스스로를 평가해보자면, 우린 다소 지겹다. 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몇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 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소통을 넘어서, 정동(affect)의 문학을 향하여」, 『문학 판』 2006년 겨울호.)
4) 박상수 「인간 동물」, 『현대문학』 2010년 9월호.
5) 이 논리는 맹정현의 글을 참조했다(맹정현 「프로이트로의 회귀」, 『리비돌로지』, 문학과지성사 2009, 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