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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고 2003년 『창작과비평』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함.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가 있음. brokenname@empas.com
장편연재 4(마지막회)
두근두근 내 인생
어딜 가나 바람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초록을 자빠뜨린 주황. 주황을 넘어뜨린 빨강. 바람은 조금씩 여름의 색을 벗기며, 땅 밑의 심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쯤 되면 바람이 얼굴에 느껴지고 풍향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2계급 남실바람이었다. 0계급은 고요. 1계급은 실바람. 그 다음은 산들, 건들, 흔들…… 고요에서 왕바람까지 모두 열두 계급이 있다는 것 같은데…… 잡지를 보다 ‘풍향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말이 좋아 어딘가 적어둔 기억이 난다.
이곳 병원에도 가을이 왔다. 하늘을 양쪽에서 잡아당긴 듯 팽팽해진 공기가 가슴팍을 바쁘게 들락거렸다. 신의 입김이란 게 있다면 딱 이 정도 온도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차고 맑은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신의 폐활량에 맞춰 내 속 낱말카드도 조그맣게 흩날렸다. 이것은 눈〔雪〕. 저것은 빛. 저쪽에 나무. 발밑에 땅. 당신은 당신…… 하도 만져 귀가 닳고 사위어 어지러이 뒹구는 말들이었다.
볕이 좋을 땐 자판기 커피를 뽑아 벤치로 가 놀았다. 종이컵 주위로 퍼지는 향과 김이 그윽한데다, 그러고 있으면 어쩐지 어른이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커피는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입에 대지 않았다. 조금만 혀에 대도 심장이 쿵쾅대는 게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이 들려서였다. 심장내과 환자 중엔 겉보기엔 멀쩡해도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간호사 누나들이 ‘A형 캐릭터’라 부르는 신경과민 환자가 적지 않았다. 내 경우엔 ABR, 그러니까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병원 곳곳을 쏘다녔다. 하염없이 ‘안정’만 취하고 앉아 있다가는 정말이지 어느 순간 미치고 펄쩍 뛰는 ‘절대 불안정’ 상태가 될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많아진 게, 예전보다 더욱 피로를 느끼는 눈치였다. 날씨는 제법 선선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나무도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가지 끝이 각오와 오기로 탱탱한 게, 단단한 몸통에 수액 대신 ‘집중력’을 꽉 채워놓은 인상이었다. 바람이 불자, 나무 아래로 얼룩덜룩 해그림자가 너울댔다. 그쯤 되면 잔물결이 일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3계급 산들바람이었다. 바람은 함부로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며 시시각각 몸을 바꿔 딴 데로 달아났다. 혹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만 그 이름이고자 했다. 나는 내 숨 모양이 궁금해 허공에 대고 ‘하아’ 입김을 불어보았다. 그것은 현상액에 담긴 필름처럼 아스라이 형체를 드러낸 뒤 곧 사라졌다. 희고, 가볍고, 부질없는 게 나의 내계와 외계가 만나 짧은 인사를 한 뒤 헤어지는 모습 같았다. 혹은 추운 계절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영혼의 형상 같았다. 나는 가을의 그 풍격(風格)이 좋아 자꾸만 ‘하아’ ‘하아’ 날숨을 내뱉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 몇몇이 카디건을 걸친 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화단 앞 인공연못 주위론 잠자리떼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저쪽에선 웬 아저씨가 언성을 높이며 누군가와 통화중이었고, 상복을 입은 아주머니는 휴지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건너편 남자는 ‘대체 무얼 동의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목록이 가득한 종잇장을 든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딱 봐도 대체요법 외판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상황버섯이며 헛개나무, 자기 장판이 든 가방을 쥔 채 기웃거렸다. 어느 병원이고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모습은 단단한 벽 너머, 저 콘크리트 안에 있었다. 조금만 참으라는 부모 앞에서 ‘내가 얼마나 아픈지 엄마가 알아? 엄마가 아냐고?’ 고함치는 아이라든가, 눈 뜨면 다시 시작되는 고통에 잠을 자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 누렇게 뜬 얼굴로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택배처럼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는 할머니, 바나나우유, 체리주스, 복숭아에이드 빛깔의 소변들, 대변주머니, 간성혼수…… 그런 것이 건물 안에 있었다.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면 안되는 특별한 인종들처럼 옹기종기 의좋게 모여 있었다. 병 앞에서 사람들은 놀라고 긴장하고 화내고 부정하며 슬퍼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일상적으로 억눌린 채 병원 주위를 건조하게 맴돌았다. 다들 뭔가 반응하는 즉시, 그것이 진짜 사실이 되어버릴까 걱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나는 간호사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병원에서 오래 일했죠?”
“응.”
“그럼 환자들 볼 때마다 무슨 생각 해요?”
간호사 누나가 내 혈압 수치를 확인하며 답했다.
“아무 생각 안해.”
“………”
“그럴 시간이 없는걸.”
간호사 누나는 ‘그때그때 닥치는 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고 중얼댄 뒤, 뭔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는지 덧붙였다.
“그래도 분명히 깨달은 건 하나 있지.”
그녀가 결과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댔다.
“돈이 참 중요하구나 하는 거……”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졌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 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 너. 예쁜 단어였구나……’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 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바람이 나를 향해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절이라고…… 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 나는 오래전 ‘추파’를 ‘추파’라 부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상상하며 가만 웃었다.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 싶어 흐뭇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세상이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잠자리 한마리가 날아와 무릎 위에 앉았다. 숨죽인 채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여, 초점을 맞출 때는 왼쪽 눈을 아예 감아버리는 게 나았다. 한개의 눈을 가진 나와 만개의 눈을 가진 녀석이 서로 응시했다. 기이한 긴장감이 돌았다. 두 존재가 아닌, 두 시간이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수백만년 전의 시공과 현재가 대면하는 듯한. 실바람에 잠자리 날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비늘 위로 무지갯빛 기운이 자글대다 잠잠해졌다.
잠자리는 곧 사뿐 날아올라 벤치 끝 팔걸이에 앉았다. 두쌍의 투명한 날개에 새겨진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햇살 아래 빛났다. 그 속엔 녀석이 원시생물이었을 때부터 간직해온 정교한 수학체계가 깃들어 있을 터였다. 아마 우리 몸에도 같은 식(式)이 들어 있겠지…… 그러면 애초에 그 수(數)를 만든 존재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나를 만든 그분께선 어째서, 그리고 어디서 그 셈을 틀리셨을까……
바깥에 오래 있으니 근육이 위축됐다. 오른쪽 가슴 위로 중심정맥관이 호흡을 따라 가쁘게 오르내렸다. 잦은 주사에 혈관이 가늘어져, 입원 이래 줄곧 착용한 거였다. 나는 ‘조금만 더 있자’ 중얼대며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했다. 그러곤 머리 위로 두서없는 문장을 떠올렸다. 사실 이곳까지 굳이 산책을 나온 건, 그애에게 건넬 말을 궁리하기 위해서였다. 메일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답신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회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쓴다 해도 뭐라고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답장을 쓰지 못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까닭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 편지를 ‘잘 쓰려’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표가 나서는 안돼……’
나는 그애에게 때이른 ‘만족’을 주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안도한 뒤 자족해 돌아서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애가 바란 것 이상으로 그애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만족이 임계점을 넘으면 만족이 아니라 감탄이 되니까. ‘아!’ 하는 순간의 탄성이 만들어내는 반향을 타고, 그 반향이 일으키는 가을 물결을 타고, 누군가 내게 쓸려오길 바랐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쓴 형편없는 메모들이 떠올랐다. 힘이 잔뜩 들어간 게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내용이었다. 관념적이고 현학적인데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발견하고, 보는 즉시 ‘어우’ 손사래쳤던 글을 내가 쓰고 있었다. 그것도 문체가 제각각인 게 어떤 것은 도도한 초등학생이 쓴 산문 같고, 또 어떤 것은 인문대 복학생이 쓴 잡문 같았다. 이건 뭐 공작도 아니고, 수컷이 깃털 자랑하듯 구애하는 모양새라니. 가장 평범한 소년이 되어 가장 평범한 고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고 불편했다.
‘역시…… 연애를 글로 배워서 그런가?’
누군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일본어를 독학한 친구에게 ‘네 말 속엔 노인과 야꾸자와 여고생의 말투가 다 섞여 있다’고 촌평한 걸 듣고 깔깔댔었는데, 지금 내 모습이 딱 그거 같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내 안에 여러가지 욕망이 섞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그걸 다 빼고, 어떻게 나를 설명한단 말인가? 그래도 정말 괜찮단 말인가? 나처럼 괜찮은 아이가? 나는 수심에 잠겨 먼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수심이 마음에 든 나머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서하……”
사물의 이름을 처음 배우듯 발음하는 세 글자였다. 그러자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지는 눈덩이처럼 가슴속에 조용한 기척이 일었다. 고요라는 이름의 바람이 따로 있기나 한 듯. 적막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람의 열두 계급 중 0계급에 속한다는 ‘고요’라는 단어를 읊어보았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기척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0계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0계급이 무언가 하고 있었다.
‘일단 첫 문장을 써야 해. 첫 문장을…… 그런 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고 보자고.’
나는 허공에다 대고 ‘안녕’이란 말을 썼다 지웠다. ‘잘 지내니’ ‘반가워’라는 말도 쓱쓱 지웠다. 한 소년의 여든 먹은 폐와 심장, 혈관을 타고 바깥으로 흘러나온 한숨이 대기를 흐렸다. 나는 김 서린 창문에 대고 글씨를 쓰듯, 뿌옇게 변한 찰나의 공기 속에 그애 이름을 적어넣었다. 그러자 하늘 위로 생뚱맞은 문장이 영화자막처럼 돋아났다.
‘풍향계가 움직이기 시작……’
어디선가 삐걱 하고 낡은 풍판(風板)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활자를 한자 한자 따라 읽었다. 그러곤 그 문장이 흘러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나이 많은 플라타너스 한그루가 있었다. 수천장의 잎사귀를 나부끼며 풍요롭게.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로, 그 나무가 또 건너 나무에게로. 쉼 없이, 은근하게. 그러고 보면 봄 추파는 사람만 보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무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동시에 한손에 휴대전화를 든 채 걸어가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잠시 흠칫거리더니, 이내 놀란 기색을 감추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천천히 하나, 둘, 셋을 세었다. 내가 ‘다섯’이란 숫자를 힘주어 외치자, 손잡이가 돌아가듯 남자의 고개가 다시 한번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숙여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열까지 세고 고개를 들었을 때, 팔걸이에 앉아 있던 잠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
이따금 장씨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동네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고, 유일하게 그애 얘기를 알고 있는 분이라 그랬다. 특히 오만가지 생각에 머리가 헝클어질 때면, 장씨 할아버지의 대책 없고 명쾌한 한마디가 그리워지곤 했다.
입원 하루 전, 저녁 마실을 나섰다. 장씨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다. 현관 앞에서 할아버지 댁 불빛을 확인한 뒤 까치발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연 건 장씨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큰 장씨 할아버지였다. 나는 괜히 기가 죽어 조그맣게 말했다.
“저어, 혹시 안에 장씨 할아버지 계신가요?”
큰 장씨 할아버지가 까다로운 눈으로 나를 내려 보았다.
“덕수, 아픈데.”
속으로 ‘아! 할아버지 이름이 덕수였구나’ 하고 조금 놀랐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노인들은 이름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게 죄송했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큰 장씨 할아버지가 엄한 얼굴로 나를 굽어봤다.
“신경 쓰지 마라. 우리 나이엔 아픈 게 일이니까.”
어쩐지 내가 빨리 가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다행히 저쪽에서 장씨 할아버지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감기에 걸렸는지 코 근처가 빨갰다. 장씨 할아버지는 넓은 데를 놔두고 구태여 현관 기둥을 잡고 선 자기 아버지 팔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아빠, 나 안 아파!”
학교에 결석계를 내고도 놀고 싶어 안달하는 어린애 같은 말투였다. 장씨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엄청 반가워했다. 내가 텔레비전에 나온 뒤로 노인정에도 데려가고, 먼 데서도 손을 높이 들어 인사하는 게 연예인을 친구로 둔 사람인 양 굴었다.
“야, 너 웬일이야?”
“어, 인사드리러 왔어요. 저 내일 입원하거든요.”
“그래? 그런 건 단둘이 얘기해야지.”
“저기 편찮으시다고.”
“응? 괜찮아. 잠깐인데 뭘. 옷 입고 올게. 기다려.”
장씨 할아버지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나와 큰 장씨 할아버지 사이로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큰 장씨 할아버지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금방 올게요’ 변명했다.
우리는 동네 초입에 있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늙은 느티나무 아래 널따란 평상이 있는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기분좋게 앞장섰다. 집에만 있어 답답했는데, 구실이 생겨 신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마실 것을 사줬다. 탄산이 약간 들어간 오렌지맛 음료였다. 우리는 나란히 평상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병속에선 방울방울 기포가 올라오고, 저녁 어스름, 산동네에 내려앉은 파랑은 맑고 우아했다. 어디선가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또랑또랑한 목청으로 놀면서 구호를 외치고 시비를 가리고 함성을 지르는 게, 이 동네가 제대로 된 동네임을 알려주는 기운들이었다. 예로부터 톤이 높아 멀리 가는 까닭에, 집에서도 제 어미가 알아듣게끔 만들어진 소리들이었다.
“내일 가?”
“네.”
“그럼 언제 와?”
매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할아버지가 한번 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음, 다시 좋아지면요.”
“짐은 다 쌌고?”
“네.”
“잘됐구나.”
저쪽에서 오토바이 몇대가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지나갔다. 딱 봐도 폭주족인 게, 멀리서도 번쩍이는 불빛이 다 보일 정도였다. 장씨 할아버지가 바로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어우, 난 젊은애들이 싫어.”
나는 할아버지의 노골적인 반응에 방긋 웃었다.
“왜요?”
“짜증나잖아. 무식하지, 오만하지, 근데 또 자신만만하지…… 진짜 싫어.”
할아버지가 혐기동물을 대하듯 몸서리쳤다.
“저기 복덕방 송씨 할아버지는 다르게 말하던데요?”
장씨 할아버지가 질투의 눈빛을 내비치며 물었다.
“뭐라는데?”
“노인들은 늘 젊은이들이 멍청하다고 탄식하지만 그건 잘못된 거래요.”
“왜?”
“젊은이들이 칭송받아 마땅한 것은 몸뚱이, 그뿐이기 때문이래요.”
할아버지는 곰곰 생각하더니 이내 으하하하 웃었다.
“맞아! 맞는 말이네. 그 양반이 소싯적에 글씨깨나 썼다더니 같은 말도 나랑 다르게 하는구먼.”
할아버지가 빨대로 쪽— 경망스런 소리를 낸 뒤 한마디했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 같지 않니?”
그러고는 폭주족이 지나간 자리를 고개로 가리켰다.
“네.”
“근데 왜 저 지랄이라니?”
“그러게요. 멋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나는 쟤들이 왜 저러는지 알아.”
“왜 그런 건데요?”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죽는 게. 살아 있다고 재는 거지.”
“……?”
“자랑하는 거야, 벌벌 떨면서. 내가 좀 놀아봐서 알아.”
나는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지만, 무슨 얘긴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도 저러고 노셨어요?”
“어.”
“그럼 저 형들 욕하면 안되죠.”
“왜 안돼? 쟤들도 우리 욕하는데.”
“할아버지는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해야지. 우린 더 심심하잖아. 오토바이도 못 타고.”
“어휴.”
장씨 할아버지가 나긋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름아.”
“네?”
“넌 왜 네 또래 친구랑 안 노니?”
나는 내 사정을 빤히 아는 장씨 할아버지가 새삼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서운하고 서러워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게……”
“친구 없어?”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 목소릴 높였다.
“아니요. 많아요. 최근에도 친구 하자고 연락온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근데 그냥…… 수준 안 맞아서 싫어요. 유치해요.”
장씨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 흡족한 듯 으하하하 웃었다.
“그래?”
“네.”
“근데 어쩌냐, 지금 너 말하는 꼬락서니가 딱 네 나잇대 애들 같은데.”
“네?”
“유치하다구, 너. 열일곱살 같아.”
“그러는 할아버지는 왜 딴 할아버지랑 안 노는데요?”
할아버지가 태연하게 답했다.
“몰라서 물어? 수준 안 맞잖아! 그 영감탱이들.”
우리는 도란도란 담소를 나눴다. 평소보단 진지하고 깊은 얘기들이었다. 그 즈음, 내 성격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는 습관이 든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더 성급해지고 경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상대가 장씨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기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 갖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언제 할아버지라고 느꼈어요?”
“글쎄……”
장씨 할아버지가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게 말이지. 예전에는 나도 오륙십 먹은 양반들이 무지 나이 많은 이들처럼 느껴졌거든? 근데 막상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치들이 그렇게 늙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고.”
“그래요?”
“응.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하나도 안 늙은 거 같아.”
“아……”
“심지어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직도 자라고 있는 거 같다고 하는걸.”
“할아버지?”
“왜?”
“늙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뭐야 이 자식아?”
“저번에 작가 누나가 저한테 그렇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어물어물 대꾸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한 것 같아요.”
“별놈의 아가씨가 다 있구나.”
“그죠?”
“한마디 쏴주지 그랬냐.”
“뭐라고요?”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 하고.”
“하아, 괜찮다! 진짜 그럴걸!”
바람은 부드럽고,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간 골목은 조용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별을 한다고 찾아왔건만, 그 다음에는 막상 뭘 어찌할지 몰랐다.
“저기 할아버지?”
“왜?”
“사실 저 어떤 여자애한테 편지를 받았어요.”
순간 할아버지의 눈에서 광채가 났다.
“예쁘냐?”
나는 한숨을 쉬며 섭섭한 듯 웅얼거렸다.
“그게 중요해요?”
“야 인마, 당연하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평생 딱 두가지뿐이야. 10대 예쁜 여자, 20대 예쁜 여자, 30대 예쁜 여자, 40,50대도 예쁜 여자.”
장씨 할아버지가 일일이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했다.
“그럼 60대는요?”
할아버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고운 여자.”
나는 ‘아!’ 하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래서 예뻐?”
“몰라요. 나처럼 머리카락이 없대요.”
“음.”
“근데 걔가 저한테 노래를 보내줬어요. 그리고 행운을 빈대요.”
“음.”
“근데 할아버지. 제가 처음 걔 메일을 받고 기분이 어땠는지 아세요?”
“뭐, 좋았겠지. 춤이라도 췄냐?”
순간 꿈에 나온 트램펄린이 떠올라 뜨끔했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토할 것 같았어요.”
“에?”
“제가 혈압이 오를 때 심장이 막 가빠지고 어지럽고 그러다 미식거리면서 토할 것 같거든요. 길에서 소화전 붙들고 한참 꿇어앉아 있던 적도 있고. 근데 그때랑 비슷한 상태가 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한손을 턱에 괴었다.
“답장했어?”
“그게 또 귀찮기도 하고.”
“그렇지, 여자는 귀찮지.”
“근데 또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지, 여자는 궁금하지.”
“그런데 있죠, 그애 편지를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이미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새말을 배우고 싶다고. 그애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꾸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자 묵묵히 내 얘길 듣고 있던 장씨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야.”
“네?”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어린노무 시키가.”
할아버지가 덧붙였다.
“아름아, 내가 이 나이쯤 살아보니까 알게 된 게 있는데. 나도 소싯적에 아가씨들 만날 때는, 내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믿었거든?”
“네.”
“그런데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한참 가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까, 그게 다 여자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걸어온 거였더라.”
“………”
“그러니까 쓸데없이 지도 같은 거 그리느라 힘 빼지 마라. 그거 다 헛수고야.”
나는 지도라는 말을 속으로 매만지며 그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만큼,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또한 욕심일 수 있단 걸 깨달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척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고. 나는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자 할아버지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몇번 입술을 달싹이다 오랫동안 망설여온 얘기를 꺼냈다. 사실 집을 나설 때부터 운을 떼지 못해 계속 주저한 거였다.
“할아버지, 저 사실 부탁이 있어 왔어요.”
“응? 뭔데?”
“꼭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 얘기 안할 거예요.”
“뭔데 그래?”
“할아버지?”
“응?”
“……저 술 사주세요.”
할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곤 뭔가 갈등하는 듯하다,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끼! 이녀석!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나는 한번 더 진심으로 부탁했다.
“한번이면 돼요, 할아버지. 아주 조금만 마시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네?”
“안돼. 인마.”
“할아버지.”
“글쎄 안된다니까!”
그러고는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앞장서 걸어나갔다.
*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짧고 예의바르며 형식적인 답장이었다.
서하에게
보내준 편지, 그리고 음악 잘 받았어. 그리고 나를 산이라고 불러줘 고마워. 해발 140쎈티미터도 안되는,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산이지만 내 속에 어떤 꽃이 피는지 나도 잘 살펴볼게. 그럼 잘 지내. 안녕.
전송 단추를 누르기 전, 모니터 속 문장을 몇번이나 확인했다. 해야 할 말은 한 건지, 안해도 될 말을 쓴 건 아닌지 보고 또 봤다.
‘꽃에 관한 얘기는 뺄까?’
하지만 이미 아까운 문장을 많이 지운 뒤였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꽃이 피는 걸 <핀다>라고 안하고 <목숨을 터뜨린다>라고 했어. 근사하지?’라는 구절도 엄청 넣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구애, 명백한 노력처럼 보이는 표현은 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여지’ 같은 것은 남기고 싶었다. 들키기 위해 숨어 있는 ‘틀린 그림’처럼. 부정이 아닌 시치미가, 긍정이 아닌 너스레가, 들꽃처럼 곳곳에 심겨 있길 바랐다.
‘그런데 보통 10대 남자애들은 이런 때 어떤 문장을 쓸까?’
그냥 쿨하게 문자메씨지 한통 보내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래도 다 그러진 않을 거야. 소년들이 얼마나 겁이 많은데. 그리고 그애들은 딴 걸 할 수 있잖아? 책가방을 들어준다든가, 같은 학원에 등록한다든가, 밴드부에 든다든가, 여자애가 보는 앞에서 덩크슛을 한다든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거니까…… 나는 이걸 잘해야 해. 나는 전송 단추 위에 커서를 얹은 뒤 숨을 골랐다. 그러고 막 단추를 누르려는 순간, 갑자기 가슴속에 어두운 기운이 일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혹은 무얼 바라나 하며 울적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나, 둘, 셋……’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섯. 정확히 다섯을 세고 나면 다르게 보이던 세상과 그 속에서 마주친, 악의 없고 겁에 질린 얼굴들이 떠올랐다. 나는 태어나 자기 손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판 위에 얹어진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고, 쭈글쭈글하고, 보잘것없는 손이었다. 아울러 어떤 문장을 쓰기엔 어울리지 않는 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쓴 내용을 죄다 지우고 새 편지를 썼다.
이서하님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힘내라고 하지 않고, 기운내라 하지 않고, 행운을 빈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쪽도 건강하세요.
차분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속상하고 서운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누군가의 호의를 무시한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거면 됐다 싶었다. 침을 한번 삼킨 뒤 전송 단추를 눌렀다. 무거운 마음과 달리, 편지는 딸깍 소리를 내며 가볍게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자 이내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너무 무뚝뚝한 답장을 보낸 것은 아닐까? 그냥 그렇게, 딱 한번 주고받을 편지라면 좀더 친절해도 되지 않았을까?’
재빨리 ‘발송 취소’를 누르려 했지만 그애와 내가 가입한 포털싸이트의 주소가 달라 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발송이 완료되었습니다’란 문구를 바라봤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차라리 잘됐어.”
어쩌면 이쯤에서 끝난 것이 다행인지 몰랐다. 하마터면…… 그러니까, 음, 하마터면…… 귀찮아질 뻔했잖아?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여자애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성가시게 구는지 책에도 잘 나와 있잖아? 베르테르가 왜 자살했는데. 로미오는 또 왜 죽었는데. 메넬라오스는 심지어 전쟁까지 일으켰잖아? 헬레네 하나 때문에 왜 애꿎은 병사들이 죽어야 해. 그들이라고 뭐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겠어? 정념은 민폐야. 어디서든 항상 문제를 일으키지. 잘했어, 한아름. 네가 지금 무얼 했는지 알아? 너는 지금 너를 구한 거야. 온갖 이유를 갖다붙이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곤 그애와 더이상 연결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애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을 때, 나는 몹시 낙담하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에도 몇번이나 편지함을 뒤지고, 수신을 확인한 뒤의 일이었다.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방송을 보고 잠깐 감상에 빠진 거야. 그리고 지금은 그게 사라진 거지.’
나는 이 상황이 별거 아니며,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곤 ‘예전으로 돌아가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 예전이, 과연 그전과 같은 예전일까? 새삼 허락 없이 다가와 마음을 흔들어놓은 그애가 원망스러웠다. 솔직히 그애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시시한 연애편지 한통에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던 거다. 난생처음 겪은 그 보잘것없고 우스꽝스런 정념을 추스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얼마 뒤,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정말이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게 됐을 때, 그애에게서 두번째 편지가 왔다.
아름이에게
네가 보낸 편지를 백번은 읽어봤어. 그리고 그걸 한번 더 읽었을 때,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었어. ‘겁내고 있구나, 얘’ 하고 말이야. 미안. 멋대로 말해서.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편지를 쓸 때 용기가 필요했어. 네 연락처를 알려고 방송국에 세번이나 연락했다고.
방송을 보면서 나는 네가 무언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했어.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리지만, 난 알아. 네가 그것을 얼마나 힘들고 외롭게 뛰어넘었는지.
행운이란 말이 맘에 들었다니 기뻐. 미국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헤어질 때 종종 ‘Good bye’라 안하고 ‘Good luck’라 하잖아. 나는 그게 늘 근사해 보였어. 기운내라고 시키는 게 아니라 행운이 있기를 비는 인사.
괜찮다면 또 편지해도 될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듣고 싶은 말도. 아, 그리고 다음에는 너도 말 놓기!
그럼 한번 더 행운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뭔가 분명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도망치려 했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 신이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는 내게서 뭔가 빼앗아갈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선물인지 시험인지 확인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애에게 두번째 답신을 썼다.
서하에게
편지, 고마워. 내가 뛰어넘은 자릴, 네가 알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걸 헤아려준 마음은 잘 받을게. 그리고 나 겁먹지 않았어. 원래 겁 같은 거 잘 안 먹어. 심장이 나빠서.
네가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빨리 낫길 바랄게. 이건 진심이야. 그리고 괜찮다면 또 편지해도 돼. 그럼 안녕.
세번째 편지는 전보다 빨리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름에게
괜찮다면, 또 편지해도 돼. 이 부분을 읽고 한참 웃었어. 너 정말 새침한 아이구나? 지금은 괜찮지만 혹시 나중에 다른 여자아이를 만나게 됨 그렇게 얘기하면 안돼. 알았지? ^^
방송 보며 느낀 건데 넌 생각이 깊고 그걸 또 재미있게 표현하는 거 같아. 실은, 나 우리나라 10대 남자애들은 다 뇌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아니, 사실 20대도 그래. 오늘도 병원 까페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는데, 옆에 멀끔한 인상의 대학생 오빠 셋이서 잘 교육받은 말투로 완전 바보같은 대화를 하고 있더라. 그것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말이야. 하아.
그런데 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똑같이 되고 싶다.’ 똑같이 한심해지고, 똑같은 실수를 하고, 똑같은 착각을 하고 싶다. 그들과 똑같이 자랄 수만 있다면, 하고 말이야. 근데 아마 힘들 거야. 총명함을 숨기는 건 무지를 숨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 그치? 그리고 난 좀 많이 똑똑한 축에 드는 여자애니까. ^^;; 어쨌든 너의 글, 너의 말, 그리고 생각들이 특별하단 얘길 해주고 싶었어. 그럼 안녕.
“아름아 뭐 해?”
내가 사생활 비슷한 걸 가져보려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어머니가 이번에도 나타났다.
“벌써 다 씻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주춤거렸다.
“뭘 보는데 그렇게 웃어. 엄마도 좀 보자.”
“아! 아니에요. 별거 아녜요.”
“에이, 뭔데 그래? 뭔데 그리 예쁘게 웃어? 응?”
내가 필사적으로 노트북을 가리자, 어머니가 장난치듯 몸싸움을 시도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아이 참. 저리 가세요.”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흘겨보다가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아름이 다 컸구나?”
“예?”
“괜찮아, 엄마도 어렸을 때 그랬어. 아빠도 그랬고.”
어디서 ‘좋은 부모 되기, 사춘기편’이라도 읽고 왔나. 교양있는 말투를 가장하는 게 꼭 초짜 연극배우 같았다. 나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쉬었다.
“엄마.”
“응?”
“엄마는 야한 사진 볼 때 웃어요?”
우리는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중에는 한두줄짜리 단문도 있고,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할 만큼 긴 얘기도 있었다. 심할 때는 하루에 세 통의 메일이 오갔다. 내가 오전에 보내면 그애가 오후에 답신을 주고, 다시 내가 저녁 때 소식을 전하는 식이었다.
아름에게
가끔 나는 잠을 설쳐. 새벽에 깨어나는 것. 마뜩찮은 순간이지.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눈이 떠질 때, 어쩌면 너도 깨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그 큰 눈을 깜빡이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누그러져.
중3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무척 아껴주셨었어. 그래서 아이들이 떠들거나 숙제를 안해오면 항상 ‘이서하 좀 봐라’ 그러셨지. 아픈데도 얼마나 성실하고 의젓하냐 그런 뜻이셨지.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말이 참 듣기 싫어지더라. 친구들이 힘을 내는 건 좋아. 반성하고, 공부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도 좋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내가 왜 아파야 하나, 이해할 수 없었거든. 선생님은 나를 사랑하셨지만, 아마 다른 아이들을 더 사랑하셨나봐. 지금 하느님이 그러는 것처럼. 그럼 또 쓸게. 좋은 하루.
서하에게
한밤중, 나도 잠에서 깰 때가 있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는 못해. 옆 침대에 있는 아저씨 성격이 엄청 예민한데다, 그 건너편 할아버지 잠귀는 그보다 세배는 더 밝거든. 그럴 때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그건 불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니까. 불 없을 때 잘되는 일이기도 하고. 마치 옛날 사람들이 아이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오전엔 과학잡지를 읽었어. 거기 보니까 우주에서 사람이 터져 죽는 건, 외계의 힘이 내계의 힘보다 커서 그런 거라고 나와 있더라. 네게 이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대부분 아직 우리 바깥보다 힘이 센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오늘은 여기까지. 안녕.
아름에게
네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궁금해. 괜찮다면 나중에 보여주지 않을래?
서하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는 이야기야. 좋은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어. 거의 다 완성해가고 있는데, 요새 진도가 더뎌. 아마 끝부분이라 그런가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워. 잘해볼게.
아름에게
요 며칠 아빠랑 절에 있었어. 아빠가 요새 대체요법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근데 거기 스님이 나더러 도라지꽃같이 생겼다고 하더라.
내가 묵은 숙소 근처에 강이 하나 있어. 아주 센 물소리를 가진 강이지. 아빠 말로는 그걸 화이트 노이즈라고 한대. 백색소음. 사람 몸에 좋은 소리라나봐. 한밤중 문을 열면 그런 게 쏟아져나와. 그리고 내 바로 가까이서 무언가 그렇게 성실하고 활달하게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여.
나는 예전에 행복이란 단어를 쓰면 멍청해지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도 용기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는 그걸 가지려고 해. 하느님이 그걸 선뜻 내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그러기로 정했어. 그리고 내가 그걸 정말 갖게 되면 너에게도 조금 나눠줄게. 기대해. 안녕.
서하에게
날이 춥다. 히터를 종일 틀어놔도, 세상에 지구의 의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나봐. 그렇지만 추위 앞에선,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 같아 좋기도 해. 그래서 난 이 바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어느 때는 눈이 시려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래도 가끔은 추위에게 으름장을 놓아야 해. 그래, 나는 약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지, 하고.
새벽에 외롭게 깨지 말고 네가 숙면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걸 온몸으로 돕는 빛과 바람, 나무들의 지지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백색소음도. 안녕.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말하고, 그애가 답하고, 다시 그애가 말하면 내가 답하는. 한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 딱히 뭐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도, 그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평소에 장씨 할아버지가 나한테 왜 그렇게 ‘또래를 사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 상체를 기울여 뭔가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 하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져버렸다. 부모님은 밝아진 내 안색을 보고, 치료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라며 기뻐하셨다. 하지만 나는 편지질에 빠져 있느라, 엄마가 매일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단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종합비타민이라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엄마의 행동거지가 점점 둔해지고 안색도 나빠졌던 거다. 한날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 엄마한테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버지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 왜?”
“요즘 부쩍 푸석해 보이는 게 혹시 저 때문에 그런가 해서요.”
“응? 아니야. 니네 엄마 원래 피부 나빠. 그리고 네가 요새 통 말을 안 거니까, 관심받고 싶나보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요새 좀 바빠서 그랬어요.”
“야, 근데 넌 바탕화면이 그게 뭐냐.”
“뭐가요?”
“걸그룹도 많은데 웬 도라지꽃이야. 늙은이같이.”
“왜요, 뭐가 어때서요? 근데 아빠, 그거 뭐예요?”
아버지가 그걸 지금 봤느냐는 듯한 얼굴로 의뭉스레 웃었다.
“아름아 내가 뭘 갖고 왔는지 봐라. 집에 굉장한 게 왔어!”
아버지가 설레어 하며 손에 든 상자를 내보였다.
“짜잔!”
“………”
“안 좋아?”
“예? 뭐 그냥……”
“안 기뻐? 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게 안 좋아?”
“아니요. 기뻐요. 아빠가 샀어요?”
“아니. 어떤 시청자가 보내준 거야. 아름다운 시청자지.”
나는 아버지가 든 두개의 상자를 멀뚱 바라보았다. 티슈곽만한 흰색 상자에 PSP라는 글자가 깔끔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상자에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봉제인형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아버지가 더 좋아할 만한 물건인데요?”
“……그지? 근데 너한테 온 거니까 네 거야.”
“진짜요?”
아버지가 머뭇대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일단 한번 해보고, 아니 두어번 해보고, 그러고도 혹시 만에 하나라도 재미가 없으면 말이야.”
“네.”
“나 줘.”
*
그즈음 승찬 아저씨가 문병을 왔다. 잘 차려입은 여자와 동행하고서였다. 나는 한눈에 그분이 어머니의 단짝친구였던 인희 아줌마라는 걸 알았다.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어머, 네가 아름이구나?’ 하고 반색했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물은 뒤,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지려 휴게실로 나갔다. 병실에는 나와 아저씨 이렇게 둘만 남게 되었다. 승찬 아저씨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침대 아래에 있는 보조 침대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나쁘지 않아요.”
“방송 나가고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 누가 싸인해달라곤 안해?”
“뭐 가끔 있는데. 그보다는 편지가 많이 왔어요.”
“그래? 방송국 게시판에도 댓글이 많이 달렸어. 알고 있니?”
나는 그 글들을 다 봤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괜히 딴청을 피웠다.
“그래요? 찾아봐야겠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아저씨?”
“응?”
“아저씨는 공부도 잘하고 멋있었으니까, 여자친구도 많이 사귀어 봤겠죠?”
승찬 아저씨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어, 뭐 약간.”
“그럼 아저씨는 여자에 대해 잘 알겠네요?”
아저씨가 씩 웃었다.
“그럴 리가.”
“그래요?”
“그럼. 아저씨는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여자를 잘 모르겠어.”
“힛, 그렇구나. 실은 최근에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 사전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하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여성’이라고 쳤더니 ‘성의 측면에서 여자를 이르는 말’ 하고 뜨는 거예요. 나 참 어쩌라고.”
“사전은 원래 동어반복적이야.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자기만의 사전을 따로 쓰기도 하지.”
“누가요?”
“시인들이 그렇지.”
아저씨가 짧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는 승찬 아저씨가 장씨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나랑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란 걸 느꼈다. 그러자 새삼 그 아이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 친구가 얼마나 근사한 여자아이인지 나만 알고 있는 게 억울하고 답답하던 차였다.
“저…… 근데 아저씨한테 고마운 거 있어요.”
“응? 뭐?”
“메일주소 알려준 거. 이서하라고. 방송국에 세번이나 연락했다 그러던데. 아저씨가 알려준 거 아니에요?”
“어? 나는 기억이 없는데. 우리 작가가 알려줬나보다. 이런…… 아저씨가 돌아가서 혼낼게.”
“아녜요. 그러지 마세요. 덕분에 저 친구가 생겼는걸요.”
“그래? 누구?”
“음, 아직 저도 잘 모르지만. 걔도 병원에 있는 애래요. 저랑 동갑.”
순간,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승찬 아저씨의 눈이 번쩍였다.
“아파? 그 여자애가 아프대?”
“네.”
“근데 너랑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이거지?”
“네……”
아저씨는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다시 유쾌하게 말을 돌렸다.
“이녀석, 그래서 물어봤구나. 여자 어쩌구. 음흉하게시리.”
“어? 아니에요. 그냥 두서없이 꺼낸 이야기에요. 근데 아저씨 조금 전 제가 한 얘기 우리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이에요. 아저씨만 아셔야 해요. 알았죠?”
“흐흐, 알았어. 근데 이거 뭐니?”
승찬 아저씨가 수납함 아래 있는 종이상자를 가리켰다.
“시청자가 보내준 거예요.”
“포장도 안 뜯었네?”
“예, 고맙긴 한데 저 별로 게임 안 좋아해요.”
“그래? 우리 아들은 만날 컴퓨터만 들여다봐서 걱정인데. 너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승찬 아저씨와 인희 아줌마를 배웅 나갔다. 나는 병실에 남아 노트북을 켰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사이, 문득 아저씨가 말한 상자에 시선이 갔다. 상자 위에 그려진 봉제인형이 나를 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두꺼운 털실로 짠 피부, 큰 머리, 수술자국처럼 배 한가운데 달린 지퍼,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캐릭터였다. 나는 무심코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러곤 설명서를 읽고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했다.
게임의 이름은 ‘리틀 빅 플래닛(Little Big Planet)’이었다. 가이드 영상을 틀자, 작은 유리관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봉제인형이 나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단독 조명을 받으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다. 2D와 3D 화면이 적절히 섞인 아기자기한 화면이 매력적이었다. 곧이어 어린이 방송프로에나 나올 법한 여자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리틀 빅 플래닛에서 당신은 작은 리빅이에요. 이게 당신이죠. 너무 작고 귀엽죠? 리틀 빅 플래닛에는 돌아다닐 곳이 많아요. 그러니 신나게 걸으며 시작해볼까요?”
여자는 차근차근 게임 키의 작동법과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높이 뛰는 건 리틀 빅 플래닛에서 필수적인 능력이에요. (…) 리빅들은 스티커를 벽이나 건물, 동물, 창조물에 붙이고 이름을 지어요. (…) 이런 충고를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모르는 곳에 함부로 가지 마라. 자기 것이 아닌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이 마법 같은 세계는 마음껏 돌아다니고 만져보도록 권장합니다.”
‘음, 흥미로운데?’
나는 여자가 일러주는 대로 이런저런 키를 누르며 기술을 익혔다. 그녀는 캐릭터를 꾸미는 방법에 대해서도 일러줬다.
“리틀 빅 플래닛에서 멋있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키트를 얻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옷 입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맨 위에 버튼을 누르면 (…) 신비한 마술과 비극도요. 오우! 이제 곧 리틀 빅 플래닛에서 유명인사가 되겠는걸요? 아니면 웃음거리가 되든지요.”
그런 뒤 미친 듯이 혼자 호호호호 웃어댔다. 나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화면 속 인형을 가만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에 발가벗은 게 나를 보고 자꾸 속없이 방싯거렸다.
*
우리 사이는 예전과 좀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만든 문장과 리듬, 그리고 온도가 섞이고 삭혀져 화학작용을 일으킨 거였다. 나는 수시로 ‘보낸 편지함’을 열어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받은 편지함’을 뒤져 그애가 준 메일을 그보다 더 자주 읽었다.
아름에게
어젠 새벽에 한참 동안 깨어 있었어.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럴 땐 침대 모서리로 기어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어. 그러면 세상에 그 음악의 수신인과 발신인 이렇게 딱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마음에 드는 고독이지.
우리는 이미 아주 많은 단어를 갖고 있지만, 게다가 또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지만, 어느 때는 그것도 모자라 노래하고, 또 듣게 되는가봐. 음악 갖고 하느님이 협상한 거지. 아무래도 말 가지곤 안되겠어요, 하느님. 우리를 왜 우리로부터 떨어지고 멀어지게 만든 거예요.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제발. 너도나도 항의하니까 미안하다, 이것 갖고 좀만 견뎌봐라 하고 음악을 선물하신 거지. 어때? 그럴듯하지 않아? ^^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하느님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척, 오늘도 나는 음악을 들어. 특히 오늘처럼 힘들었던 날에는 말이야. 나는 정말 병원이 싫어.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을 절약하고, 건강에 집중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는 대신 건강을 낭비하고, 하대하면서 방탕하게 살아보고 싶어. 꼭 그래야지. 그러고 말 테야.
서하에게
안녕. 날이 차다. 앞으로 더 추워지겠지? 나는 따뜻한 날 태어나서 그런지 추위를 잘 타. 하지만 내가 누구건, 또 어디가 아프건 개인적인 사정 따위 절대로 봐주지 않는 바람이 기꺼울 때도 있지. 그럴 때면 어쩐지 나,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지니까.
어릴 때부터 한 단어가 맘에 걸리면 그걸 쥐고 오랫동안 만져보는 버릇이 있었어. 그걸로 나는 이야기를 짓거나,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지. 어느 때는 그 말이 가진 두께가 너무 얇고 초라해 쓸쓸했어. 세상에 그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하지만 요즘 나는 내가 말〔言〕을 가져서, 덜 아플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들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진 않을지라도 좀더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나도 음악 하나 보내. 전에 준 선물에 대한 보답이야. 안녕.
동봉한 음악은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오리지널 싸운드 트랙이었다. 제목은 ‘활공’.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푸른 들판 한가운데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예고편이 인상에 남아 영화를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초록에 묻혀 뭔가 듣고 있는 그애 표정이 하도 아득해, 같은 곡을 찾아 들어봤던 것도. 아름다운 곡이었다. 가사는 부러 첨부하지 않았다. 그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쪽이 먼저 해석하고, 번역하고,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상대에게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것도 배려와 놀이의 한 방식이라고 믿었다.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빈자리에 같이 앉아 가자는 식으로 나는 내 몫까지 챙겼다.
I wanna be 난 되고 싶어
I wanna be 난 되고 싶어
I wanna be just like a melody 난 그냥 노래 한가락이 되고 싶어
just like a simple sound 그냥 단순한 소리같이
like in harmony 하모니처럼
I wanna be 난 되고 싶어
I wanna be 난 되고 싶어
I wanna be just like the sky 난 그냥 하늘이 되고 싶어
just fly so far away 멀리 날아올라
to anther place 또다른 곳으로
to be away from all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to be one of everything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되어
……
노래는 뭔가 ‘되고 싶다’는 데서 시작해, ‘되고 싶다’는 데서 끝났다. 쉽고 단순한 노래였다. 이어폰을 낀 채 그 아이의 입장에서 그 노래를 한번 더 들어보았다. 내 눈은 그 아이의 눈이 돼 가사를 보고, 내 귀는 그 아이의 달팽이관이 되어 음표를 더듬었다. 노래는 이퀄라이저 파동을 따라, 한 행성에서 쏘아올린 전파가 되어, 해독을 기다리는 꿈을 안고, 다른 행성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외로운 여행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의미 없는 여정은 아닐 터였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 놓인 우주는 무시무시하게 어둡고 또 엄청나게 추울 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어붙지 않을 거니까.’
아름에게
‘활공’ 잘 듣고 있어. 나는 그렇게 힘을 빼고 부르는 노래들이 좋아. 그건 내게 힘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들의 흥얼거림을 듣고 있다 보면 어쩐지 그 사람들, 인생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박수치진 않아도 끄덕이는 느낌. 그래서 나도 숨 고르게 돼. 그런데 이 가수, ‘뭔가 되고 싶다’는 얘길 어쩜 이리 쓸쓸하게 하는 걸까. 우리가 애초에 그것이 될 수 없었다는 걸 알고 있기나 한 듯.
어쨌든 하느님은 아름이 네 덕분에 오늘도 내가 당신의 실수를 눈감아드린 줄 아셔야 할 거야. ^^ 또 쓸게, 잘 자.
그사이, 한 계절이 지나갔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 즐겨한 농담, 나눠들은 음악 속에서. 꽃이 지고 나무가 야위어갔다. 그리고 한 계절만 더 지나면 봄이 올 터였다. 그리고 또 여름, 가을…… 그렇게 피었다 사위어가는 것들의 기운을 먹고,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자만하게 되는 나이, 그 찰나의 정점으로 달려가게 될 터였다. 나는 전보다 그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는 게 많아질수록 궁금한 게 더 늘어났다. 그애의 꿈이라든가 가치관, 신조 같은 거창한 건 아니었다. 혈액형, 발 치수, 생일, 좋아하는 색깔, 아끼는 물건, 싫어하는 과목 같은 게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저런 걸 누가 하나 싶었던, 웹싸이트에 떠도는 100문 100답 같은 것. 한번은 그걸 복사해 정말 보낼 뻔도 했다. ‘그러지 말자’ 결심했으면서, 포털싸이트에 그애 아이디를 검색해본 적도 있었다. 메일주소 하나로 그 사람에 관한 몇몇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하지만 검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쇼핑몰에서 뭘 샀다든가, 어떤 영화평을 남겼다든가, 소속된 커뮤니티는 어디라든가 하는 사소한 단서조차 없었다. 전화번호를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거리’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나본다든가, 손을 잡는다든가 하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몇번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실제 입맞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내가 내 입술을 슬며시 빨아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론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내게 일어날 수도, 일어날 리도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딱 한번, 나도 욕심을 부려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소박한 바람은 단 하나, 그애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물이 아니라 사진이라도. 나는 그애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쓰는 문장들이 좋다고. 소설보다 좋고, 영화보다 좋다고. 그러곤 다음 말을 덧붙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주위의 풍경과 사물들을 늘 마지막인 것처럼 보게 됐어. 그건 다시 말해 늘 처음 보는 것처럼 본단 뜻이지. 어두운 얘기를 해서 미안. 그렇지만 요즘 네 글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눈멀기 전, 봐둬야 할 것을 봐두자 생각했는데, 봐도 좋을 것을 보아 다행이라고. 그리고 오랫동안 망설이다 이 얘기를 해. 괜찮다면 네가 마음에 드는 사진 한장을 보내줄 수 있겠니. 아프기 전 모습이나 어렸을 때 사진도 좋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이렇게 무례한 부탁을 한다. 혹 거절한대도 절대 서운해하지 않을게.’
답장은 며칠째 오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전전반측하다 두차례에 걸친 사과 편지를 보냈다. 물론 그뒤로도 소식은 감감했다. 나는 머리통을 감싸안으며 ‘아아! 내가 왜 그랬을까’ 자학했다. 욕심이 모든 걸 그르쳤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나는 며칠 동안 내가 보낸 편지에 묶여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물리치료를 받을 때도, 변기에 앉아서도 그애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편지를 쓰는 일보단 답장을 기다리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신은 혼자 할 수 있는 거지만, 수신은 그렇지 못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적어도 그렇게 둘 이상이 있어야 하고 받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가 무얼 받았는지 알아차려야 가능한 것이 바로 ‘소통’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것을. 말 그대로 내가 뭔가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사용해서 한 일…… 그게 또 ‘마음’이라, 처방할 약으로는 상대의 ‘마음’만한 것이 없는…… 나는 그애에게 혹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뒤척였다. 아무리 씩씩한 사람이라도, 하루에도 몇번씩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지 않으면 안되는 게 여기 규칙이니까. 어느 순간, 근거 없는 낙관 따위 발로 빵 걷어차버리고 싶어진 게 아닐까 걱정됐다. 하나를 놔버리면, 모든 것을 놓고 싶어지니까. 그리고 그중에 나도 포함돼 있을까봐……
그애는 내가 비관의 끝을 잡고 거의 탈진했을 즈음, 뒤늦은 안부를 전해왔다. 누가 보면 연애도사라 할 만큼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받은 편지함’ 목록에 뜬 그애 이름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단순히 ‘반가움’이라고 하기엔 복잡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애에게 ‘복수심’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나는 그애를 벌할 방법부터 찾고 있었다.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을 그애도 느끼기를. 내가 겪은 것과 같은 것을 그애도 경험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내가 택한 무시무시한 형벌은 겨우 이랬다. 나 지금 엄청 화났어. 너는 그걸 알아야 해. 그러니까 나는 이 편지를……
‘내일 읽을 거야.’
메일을 읽고 싶은 마음을 참는 데는 초인적인 힘이 필요했다. 만 하루 동안, 나는 노트북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며칠간 ‘뭐야? 이러니까 벌써 약자가 된 거 같잖아’ 하며 울적했으니, 이 잠깐의 사소하고 달콤한 권력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수신 확인’을 눌러봤을 때, ‘읽지 않음’이란 표시가 뜨는 걸 보고 그애가 느낄 실망과 초조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게임에서 졌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쾌락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거였다. 내가 벌하고 있는 건 결국 그애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건 내가 그 형벌을 즐기고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만일 이게 병이래도, 적어도 내가 겪은 그 어떤 병보다 나는 이걸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병은 꼭 겪어봐야 살 수 있는 병도 있으니까. 감기나 홍역, 또는 놀다 생긴 찰과상처럼 아프지 않고는 자랄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병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아름에게
답장이 늦어 미안해. 그사이 큰 수술을 받았어. 이번이 두번째야. 결과는 괜찮다는데 믿을 만한 얘기인지 모르겠어. 우리 아버지, 전에도 엄마에게 자주 거짓말을 했거든. 나한테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잔소리는 엄청 하면서 자기는 만날 폭음에 줄담배. 그러고 보면 사람은 시련을 통해 반드시 뭔가를 배우지는 않는가봐. 그렇게 몸에 나쁜 걸 왜 하시나 싶다가도 담배 한모금에 아버지가 진정되는 걸 보면, 가끔은 우리 몸이 죽음을 좋아한다는 느낌도 들어. 심지어 여기 의사 선생님도 알아주는 골초야. 이상하지? 이상한 거 투성인 거 같아, 세상은.
사진, 망설였어. 하지만 나만 네 얼굴을 아는 건 불공평한 일이겠다 싶어. 나는 네 목소리도 알고, 표정도 알고, 심지어 네 부모님까지 봤잖아. 그래서 부족하나마, 이 사진을 보내. 내 딴에는 용기를 낸 거니까, 투정하지 않기다? 그럼 오늘도 네 눈에 봐야 할 것, 봐도 좋을 것들이 가득 차는 하루가 되기를. 안녕.
메일 하단의 이미지 파일을 클릭했다. 큼지막한 사진 하나가 화면 위로 호로록 펼쳐졌다. 사진 속엔 단풍처럼 작고 귀여운 손이 클로즈업 돼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그걸 만지려는 듯, 해를 향해 쭉 뻗은 모습이었다. 그림자 탓에 선명히 보이진 않았지만, 딱 봐도 ‘어린’ 손이었다. 사진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화소가 떨어지는 구식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오래된 질감이 정다웠다. 나는 그애의 한쪽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모니터 위로 내 손을 가만 포갰다. 컴퓨터 열기 때문인지 액정화면 위로 온기가 전해졌다.
*
승찬 아저씨의 전화가 온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아저씨는 내게 간단한 안부를 물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름아, 너 지금도 연락하니? 그 편지 줬다는 아이랑.”
“네.”
“혹시 전화번호 알아?”
“아니요.”
“그럼 그애 메일주소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왜요?”
“그애한테 뭣 좀 물어보려고.”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대꾸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승찬 아저씨가 애써 자상한 말투로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회의를 했는데, 너랑 그 아이, 두 사람의 사연을 소개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어.”
“………”
“아름아?”
“………”
“여보세요?”
아저씨의 직업정신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했다.
“아마 안한다고 할 거예요. 전에도 저한테 그랬어요. 자기는 사람들한테 관심 받는 거 싫어한다고. 그러니까 연락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곤 승찬 아저씨에게 다시는 비밀 따위 고백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아저씨도 그애가 싫다고 하면 안할 거야. 그렇지만 물어는 볼 수 있는 거잖아. 아름이 너도 그애 궁금하지 않아?”
“………”
“어쩌면 둘이 만나게 될지도 몰라. 아름이 너도 방송 해봐서 알겠지만 좋은 점도 많다고. 그애한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다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게 될지도 몰라……’ 한마디는 귓가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그런데…… 걔가 화내면 어떡해요, 제가 함부로 주소 알려줬다고.”
수화기 너머로 아저씨가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잘 설명할게. 걱정하지 마.”
그날 밤, 그애에게서 뜻밖의 편지가 왔다. 평소보다 답신이 늦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문장 속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름에게
오늘은 좀 다른 얘기를 해보려고 해. 우리 서로에게 궁금했던 걸 하나씩 물어보면 어떨까? 기회는 한번. 그리고 누구도 화내지 않기. 네가 먼저 시작해.
별 얘기가 없는 걸로 봐서 아직 방송국 쪽 연락은 못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그애답지 않았다. 나는 새삼 단계를 건너뛰고 다가오는 그애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불안했다. 역시 여자들이란 가늠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보통 이상의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애가 정말 그걸 원한다면, 나도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그애가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애에게 한줄짜리 답장을 보냈다.
서하에게
너는 어디가 아프니?
답장은 어느 때보다도 늦게 왔다.
아름에게
궁금했구나. 일부러 말 안한 건 아닌데. 먼저 물어보게 해서 미안해.
나는 지금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어릴 때 어머니가 골수암으로 돌아가셨어. 우리 엄만 결벽증이 심하셨는데 남들은 일년에 한번 살필까 말까 한 장롱 위의 먼지도 매일 닦는 수준이었지. 엄마는 숨을 거두기 전에도 몇번이고 아버지한테 씻겨달라고 하고, 자기 몸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어. 어느 때는 거의 발광해서, 강박적으로 말이야. 어느날은 아버지가 참다 못해 엄마한테 욕하듯이 소리를 질렀어. 난다고, 냄새. 그것도 아주 더럽게 난다고. 그러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면서 알아, 알고 있으니까 내 옆에서 나쁜 냄새를 풍기며 계속 살아줘, 그러셨어. 아름아, 내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 나는 우리 엄마랑 같은 병에 걸렸어.
나는 그 다음 편지를 오랫동안 공들여 썼다.
서하에게
오늘은 장대비가 내린다. 아마 더 추워지려나봐. 사방에서 땅 식는 소리가 들려. 한 계절이 지나면 우린 더 자라 있겠지? 네가 열여덟이 되면 내가 축하해줄게.
나는 거울을 잘 보지 않지만, 보지 않으려 해도,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봐. 그 얼굴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단어장에서는 돌연 이런 말이 튀어나오지. ‘병원에서 나이 먹은 얼굴……’ 그렇지만 내가 열여덟이 돼도 내가 축하해줄래.
어릴 땐 나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몰랐어. 안다 해도 별 소용은 없었지. 항상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는 내게 이런 말을 하셨어.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건 위로가 되지 않았지. 내게 필요한 건 의미가 아니었거든. 나는 그냥 내 나이가 필요했어. 그리고 지금도 그게 참 갖고 싶어.
예전에는 네가 나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진통제가 필요하듯, 네겐 너보다 더 아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닐까. 네 인사에 대꾸조차 안하려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만일 네게 그게 필요하다면 나는 그걸 주고 싶다고. 왜냐하면 나는 네가 좋고, 가진 것이 별로 없으니까.
예전에는 나도 잘 견디고 있다 믿었어. 씩씩하고 좋은 자식이 되려 노력했지. 그런데 아마 아니었나봐. 마음을 속였더니 단박에 몸이 알아채더라. 그 다음엔 너도 알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거나 낯선 곳에 가 있는 거.
이 얘긴 너에게 처음 하는 건데, 몇해 전 나, 병실을 뛰쳐나간 적이 있었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그러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았거든. 환자복 차림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어. 이른 아침이라 다행히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그때 나는 교외에 있는 신설 병원에 있었거든. 아침 공기는 쌀쌀하고, 주위는 황량했어. 슬리퍼 바람에, 돈 한푼 없으면서 어디든 이곳이 아닌 데로 가겠다며 배회하고 있었지. 하지만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더라. 마치 썰물처럼, 한꺼번에. 나는 놀라 뒷걸음질쳤어. 자칫하다가는 깔려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 하나같이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더라.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팬츠, 운동화…… 그래 맞아. 그날 아침, 마라톤 대회가 있었던 거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어. 흑인, 백인, 동양인…… 건장한 체구와 근육을 자랑하는 다양한 인종들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지. 그리고 다시 텅 빈 거리. 나 혼자였어. 그리고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내가 한자리에 앉아 그렇게 오래 운 것은.
서하야, 치료받는 거 많이 힘들지? 그동안 얼마나 아팠니. 그게 내가 아는 고통들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넌 여자애라 나보다 힘든 부분이 많았을 거야. 나는 내 얼굴을 하도 빨리 잃어, 그걸 가진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만 너는 아프기 전 네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가져본 걸 그리워하는 사람과 갖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전자일 거라고 생각해.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떠오르는 문장은 하나 있어. 오래전, 내가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이 내 엉덩이를 때리며 하셨다는 말. “옳지, 옳지. 울어야 산다……”
그리고 서하야, 나는 네가 있어 기뻐.
이틀 뒤, 그애에게서 답장이 왔다. 지난번 어머니 얘기를 했을 때보단 다소 누그러진 말투였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어딘가 좀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름에게
‘서하야’라고 쓴 부분을 오래도록 바라봤어. 알고 있니. 네가 나를 그렇게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란 거. 너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텐데, 마음을 열어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하나씩 질문하기로 한 거 잊지 않고 있지? 지난번에는 네 물음에 내가 답했으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인 것 같아. 네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들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늘 네가 하는 말을, 내가 하는 말인 양 듣고 있거든. 혹 불편하다면 굳이 답해주지 않아도 좋아. 아름아, ‘너는…… 언제 살고 싶니?’
서하에게
사실 좀 당황했어. 만일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분명 거절했겠지만 네가 궁금해하는 거니까 대답해줄게. 그리고 나 화 안 났어.
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게. 우리 집엔 황토쌀독이 하나 있어. 이른 아침에 어머니는 밥을 하려고 거기서 쌀을 푸곤 했는데, 나는 그때 부엌에서 어렴풋이 새어나오는 독 뚜껑 닫히는 소리가 좋았어. 그 소리를 들으면 살고 싶어졌지. 상투적인 멜로영화 예고편, 그런 것을 봐도 살고 싶어지고. 아! 재미있는 오락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재치있는 애드리브를 던질 때, 그때 나는 살고 싶어져. 동네 구멍가게의 무뚝뚝한 주인아저씨, 그 아저씨가 드라마를 보다 우는 것을 보고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어.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저녁 구름. 그걸 보면 살고 싶어져. 처음 보는 예쁜 단어, 그걸 봐도 나는 살고 싶어지지. 다음은 막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볼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 밑줄이 많이 그어진 더러운 교과서, 경기에서 진 뒤 우는 축구선수들, 버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들, 어머니의 빗에 낀 머리카락, 내 머리맡에서 아버지가 발톱 깎는 소리, 한밤중 윗집 사람이 물 내리는 소리, 매년 반복되는 특징 없는 새해 덕담, 오후 두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말도 안되는 성대모사를 하는 중년 남자, 내 상상의 속도를 넘어서며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전자기기들, 한낮의 물리치료실에서 라디오를 통해 나른하게 들려오는 복음성가, 집에 쌓인 영수증…… 와, 정말 많다. 그치? 아마 밤새워도 모자랄걸? 나머지는 차차 알려줄게.
어쨌든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나를 두근대게 해.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네가 보낸 편지. 그럼 또 쓸게. 잘 자.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애는 말도 없이 연락을 뚝 끊어버렸다. 몇번이나 편지를 보내고 안부를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그애가 승찬 아저씨의 연락을 받고 내게서 완전히 떠나버린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혹은 그애에게 절대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사이 내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갔는지, 내가 얼마나 깊은 상실감 속에 묻혀 살았는지, 그런 것은 얘기하지 않겠다. 어쩌면 내게 ‘언제 살고 싶어지느냐’ 같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혹은 내게 손바닥 사진을 보내줬을 때. 혹은 그 전에라도 알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지 몰랐다. 그걸 내가 안 본 건지 못 본 건지 모르겠다. 어느날 나는 알게 되었다. 나와 유일하게 비밀을 나눴던 아이,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설레게 한 아이, 나의 진짜 여름, 나의 초록, 나의 첫사랑, 혹은 마지막 사랑이었던 그 아이가, 실은 열일곱살 소녀가 아닌 어른이었다는 것을. 그것도 서른여섯살이나 된 아저씨였다는 것을 말이다.
*
그애의 정체를 알게 된 뒤, 내가 그애에게 보낸 메일은 딱 한통이었다. 그 안에는 단 한줄의 문장이 씌어져 있었다.
“누구세요?”
답장은 없었다. 설명도 사과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나는 인터넷을 뒤지며 자신을 ‘이서하’라 말한 사람에 관한 정보와 단서를 알아내려 애썼다. 누군가 ‘알아낸 뒤, 그다음은?’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우선은 그걸 찾는 게 중요하다 믿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나는 모든 것에 심드렁해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노트북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단어장을 매만지거나, 메일함을 들락거리거나, 음악을 듣는 일도 하지 않았다. 소설 따위 뒷전으로 미뤄둔 지 오래였다. 대신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렸다.
어느날, 어머니가 물었다.
“아름아 뭐 하니?”
나는 신이 나서 종알댔다.
“PSP 게임이에요, 엄마. 여기 얘 이름이 ‘리빅’인데, 이렇게 R1버튼을 누르면 앞으로 나가고, 여기 X를 누르면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어요. 은근 재밌어요. 내가 여태 왜 이거 할 생각을 못했을까.”
어머니가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슈퍼마리오 같네?”
“응, 비슷해요.”
“처음 치고 잘하는데?”
“아, 이거요? 간단해요. 피하고 달리고 매달리기만 하면 돼요.”
“그렇게?”
“네. 이 게임은 특히 물리엔진이 중요한데, 어딘가에 매달려야 잘 살 수 있어요.”
또 한날엔 간호사 누나가 약을 주며 말했다.
“한아름군, 이거 먹고 하세요.”
나는 간호사 누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게임기만 쳐다보며 말했다.
“거기 두고 가세요.”
그리고 또 어느날, 오랜만에 병실에 들른 아버지가 말했다.
“아름아,”
“………”
“인마, 아빠가 불렀음 대꾸해야지.”
“………”
“야! 한아름!”
“아, 잠깐, 말 시키지 마요. 지금 되게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에요.”
그 아이가 누군지 알게 된 건 승찬 아저씨를 통해서였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터라,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인 얼굴로 아저씨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저씨의 낯빛을 보는 순간,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는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전화로 하려다가 직접 전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 들렀다고. 나는 그게 서하 얘기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뭐래요?”
아저씨가 잠시 머뭇거렸다.
“싫다죠? …… 에이,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승찬 아저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아름아, 그애를 만나봤는데, 지금 많이 아파.”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얼마나요?”
“중환자실에 있어. 어쩌면 다시 네게 연락을 못할지도 몰라. 그애 엄마 말로는 다른 수술을 위해 외국에 갈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
얼마 뒤 나는 병실을 나섰다. 아저씨께 들은 말 중 걸리는 게 있어 한번 더 확인해보려는 마음이었다. 당시에는 감정이 북받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혼자 남게 되자 불현듯 ‘엄마……?’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나는 아저씨가 아직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기를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저쪽, 승강장 앞에서 어머니와 승찬 아저씨가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승찬 아저씨가 우리 사이의 비밀을 한번 더 깼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저씨가 또 뭐라 하나 두고 보려고 복도 끝에 몸을 숨겼다. 그래도 남자끼리 한 약속인데, 벌써부터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의 말투는 조금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요즘 참 정신 나간 새끼들 많아.”
나는 곁눈질로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뭐 하는 놈인데?”
“모르겠어. 지 말로는 씨나리오를 쓴다는데 제대로 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더라고.”
“씨나리오?”
“응. 무슨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나봐, 불치병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다룬……”
순간 어머니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경찰에 연락했어?”
“아니.”
어머니는 아저씨의 팔을 흔들며, 마치 아저씨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소리쳤다.
“왜? 너 왜 가만히 있는데? 응? 사기죄로 고발 안되는 거야? 뭐 어떻게 할 수 없어?”
“미라야.”
“………”
“네 말이 맞아. 거짓말은 나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의 모든 거짓말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리틀 빅 플래닛’ 속 공간은 아름답고 섬뜩했다. 8개의 월드로 구성된 각각의 배경화면은 두꺼운 도화지를 오려붙인 듯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었다. 음악은 단조롭고 아기자기했다. ‘리빅’이란 이름의 주인공을 비롯해 많은 캐릭터들은 잔혹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슬픈 듯 우스꽝스럽고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그것들은 기계처럼 움직이는데다, 딱 한가지 표정만 짓고 있어 더 기괴했다. 리빅은 장애물을 피하고, 과제를 수행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중국에서 시리오 황제를 만나고, 인도에서 램프를 훔쳐간 원숭이를 찾아내고, 아프리카와 이집트로도 달려간다. 그것도 무기 하나 없이…… 그가 할 수 있는 건 달리고 피하고 뛰어오르는 것뿐이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게임 방식은 쉽고 단순한 편이었다. 무조건 앞으로 나가기. ‘리틀 빅 플래닛’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리틀 빅 플래닛’은 보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리틀 빅 플래닛’의 세계에선 죽는 존재가 거의 없었다. 물론 리빅은 번번이 불구덩이에 빠지고, 톱니바퀴에 깔리고, 용에게 쫓겼다. 하지만 어느 때고 ‘계속하기’만 누른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을 ‘리틀 빅 플래닛’을 하는 데 쏟았다. 임무 수행에 성공하면 스티커를 얻었다. 나는 그걸로 리빅에게 머리카락을 사주고, 안경을 씌우고, 새 피부를 선물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 오른쪽 시력과 함께 면역력 수치가 떨어졌다며 나를 나무라셨다. 당연한 결과지만 부모님은 그날로 당장 게임기를 빼앗아갔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가 치료를 거부하고 밥을 안 먹고 다섯살 난 아이처럼 떼를 쓰며 발광하자,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손을 드셨다. 그러곤 내게 딱 하루만 게임을 할 수 있게 허락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굳게 받아낸 뒤의 일이었다.
난이도가 올라가자, ‘레벨 업’이 될 때까지 시간이 꽤 지체됐다. 이 게임은 특히 사용자의 섬세한 손놀림이 중요한데, 나는 손힘이 약하고 움직임이 느린 편이라 애를 먹었다. 실패가 거듭되자 짜증이 났다. 짜증에 비례해 승부욕도 커졌다. 집중력은 점점 떨어졌다. 어깨가 뻐근하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시작’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7레벨을 뚫고, 마침내 마지막판에 도달했을 때 만난 괴물은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인상의 아저씨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하하하, 누구도 내 가게를 부술 수 없어.”
8레벨은 7레벨에 비해 임무 수행이 수월했다. 나는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이용해 녀석의 요새를 가뿐하게 격파해버렸다. 그러자 화면 위에 실뭉치로 만든 지구가 환하게 나타났다. 지구 주위로는 꽃과 함께 팡팡 얼음 폭죽이 터져나왔다. 그러곤 끝. 리빅의 둥근 얼굴 아래로 ‘클리어’란 글씨가 산뜻하게 떠올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때까지 노심초사 나를 바라보다 설핏 잠들었던 아버지가 화들짝 일어나며 물었다.
“아름아, 왜 그래?”
나는 숨이 넘어갈 듯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왜 그래? 응?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걱정스런 얼굴로 재차 물었다. 목울대가 뜨겁고 숨이 가빠왔다.
“아니요, 아빠. 그게 아니고요.”
“어, 그래.”
나는 결국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목놓아 울고 말았다.
“너무 좋아서요.”
*
첫눈이 왔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됐다.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구름다리를 이동하다, 볼에 차가운 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내 스륵 하고 녹았다. 그래서 나는 그게 눈〔雪〕이란 걸 알았다.
“눈 와요, 엄마?”
어머니가 휠체어를 멈춰세웠다.
“응.”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얼마나요?”
어머니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이 느껴졌다.
“아주 많이.”
“어떤 눈인데요?”
“그냥 보통 눈이야.”
“아니요. 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눈 이름도 얼마나 많은데요. 조금만 자세히 말해주세요, 어떤 눈인지.”
어머니가 자신의 어휘력을 최대한 동원해 더듬더듬 설명했다.
“글쎄 눈송이가 제법 크고…… 보송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조용하게 내려.”
나는 그게 보이기라도 하는 양 희미하게 웃었다.
“아, 함박눈이구나. 전에 아빠가 구해다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적 있어요. 싸락눈, 만년눈, 소나기눈, 가루눈…… 아, 그리고 세상에는 도둑눈이란 이름도 있대요.”
“응. 엄마도 알아.”
“그럼 현미경으로 찍은 눈 결정 모양도 봤어요?”
“그럼.”
“나는 그게 참 이상했는데.”
“뭐가?”
“뭣하러 그렇게 아름답나.”
“………”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땅에 닿자마자 사라질 텐데.”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다가, 휠체어에 힘을 주었다. 바퀴 아래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엄마 춥다, 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런데 엄마, 나 오늘 처음 알았어요.”
“뭐를?”
“눈에도 냄새가 있다는 걸.”
반복적인 하루가 흘러갔다. 무얼 해야 할지, 혹은 무얼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병실에는 주기적으로 새 환자가 들어왔다. 짐을 풀고 싸는 기척, 낯선 목소리, 처음 맡는 체취로 그 사실을 알았다. 예전 같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우스갯소리도 건넸겠지만, 금방 헤어질 사람과는 마음을 나누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이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길 바랐다. 가끔은 침대 위에 웅크려 라디오를 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수다, 고민, 그리고 농담이 여러 채널에서 쉴새없이 방출됐다. 마당 위에 햇빛이 끓듯, 바깥에서 말이 끓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때고 쉬지 않고, 활달하게 들려왔다.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고립감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갔다. 예전에는 그나마 책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 덧문을 쾅! 닫은 뒤 블라인드를 내려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그 방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슬픈 얘기, 재밌는 얘기, 아름다운 얘기를 적어 방송국에 보냈다. 그것은 다시 전파를 타고 지상 곳곳에 뿌려졌다. 가끔은 라디오에서 내가 아는 노래가 나왔다. 오래전, 그애와 주고받던 음악이었다. 나는 그애가 그애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어느 땐 며칠이고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커다란 트램펄린 위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퉁— 하고 뛰어오른 뒤 개운하게 웃고, 다시 퉁— 하고 날아오른 뒤 만세를 부르고…… 우리는 얼어붙지 않을 거라 노래했다. 기구 주위로 노인들이 둥그렇게 모여 입을 벌린 채 나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하나같이 이빨이 없고, 눈동자가 하얬다. 나는 폴짝 공중으로 날아오른 뒤 바닥에 착지했다. 순간 트램펄린의 지지대를 에워싼 검은 천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땅 밑으로 사정없이 빨려들어갔다. 얼마 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사방이 벽돌로 둘러싸인 어둡고 깊은 우물이었다. 나는 그곳에 대자로 떠 있었다. 그러곤 어두운 허공을 향해 씩씩하게 외쳤다.
“여자친구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주위에선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나는 한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여자친구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네?”
그러자 하늘에서 ‘텀벙’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균형을 잃고 물속에서 텀벙댔다. 사방이 너무 캄캄해 주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장님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저쪽에서 아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
“그러니까 너도 아무것도 아니지……”
*
점심때가 되자, 복도에서 밥 냄새가 풍겨왔다. 병원 밥 특유의 헛헛하고 심심한 표정의 음식들이었다. 어머니는 기계적으로 밥 시중을 들다, 내가 입을 다문 채 도리질을 하자 걱정스레 물었다.
“더 안 먹어? 너 좋아하는 거 나왔잖아.”
“응. 입맛이 없어서요.”
“왜 또 속이 안 좋아?”
“아니요,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어머니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나를 채근했다.
“아름아,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그래야 엄마가 알지. 그래야 의사 선생님한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니까 엄마. 그리고 내가 언제 안 아픈 적 있어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리에 누웠다. 얼마 뒤, 얕은 한숨과 함께 플라스틱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국그릇과 밥그릇에 뚜껑이 얹어지는 기척이었다. 나는 몇번 주저하다 다시 일어나 식판 앞에 앉았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엄마. 근데 돈까스가 바삭바삭하지 않고 너무 눅눅하잖아.”
식사를 마치고 멍하니 누워 있는데, 어머니가 누군가를 향해 ‘웬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의 말투가 미적지근한 것으로 봐 그다지 반가운 손님은 아닌 듯했다. 나는 병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아름이 생각이 나서.”
“어?”
목소리의 주인은 부스럭거리며 엄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가벼운 비닐봉지 소리와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기척이 났다. 어느새 내 곁에 가까이 온 그에게서 선선하고 비릿한 바깥냄새가 났다.
“이야, 너 영화배우 같구나?”
장씨 할아버지였다. 나는 한손으로 썬글라스를 치켜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이미 공중파 한번 탔는걸요.”
우리는 여느 때처럼 편안하고 쓸데없는 대화를 나눴다. 나는 주로 병원에서 일어난 에피쏘드를 들려드리고 장씨 할아버지는 노인정에 떠도는 소문과 스캔들을 전해주었다.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얼마 뒤 장씨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름 엄마, 내 부탁 하나 하세.”
“예? 무슨?”
“아름이랑 잠깐 바깥바람 좀 쐬게 해주구려.”
“할아버지……”
“그냥 잠깐이면 되네. 멀리도 안 가. 그냥 요 앞만 구경하고 올게.”
“할아버지, 지금 아름이 상태가……”
“엄마.”
나는 서둘러 어머니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게 해주세요.”
“………”
“그럴래요. 나. 그동안 하고 싶은 게 전혀 없었는데, 지금 그게 생겼어요.”
겨울의 풍경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삭풍에 실려오는 여윈 사물들의 냄새로, 나는 이 겨울이 여느 겨울과 같은 겨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헐벗은 나무들이 심호흡을 하며 겨울 햇빛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자, 내 몸의 땀구멍도 일제히 열리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허공에다 ‘하아’ 입김을 불어보았다. 입가에 번질 뿌연 김을 떠올리니, 그걸 한번 더 보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장씨 할아버지는 나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정원 주위를 맴돌다 다소 외진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안아 벤치 위에 옮겼다. ‘의자라고 같은 의자가 아니지’ 혼잣말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갔다. 장씨 할아버지의 팔에 안겨 공중에 머무는 사이 나는 내 몸이 깃털처럼 가볍단 걸 느꼈다. 그곳에서 우리는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다. 주로 내가 묻고, 할아버지가 답해주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의미있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시간, 나보다 나이가 세배는 더 많은 누군가와 나란히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 좋았다.
“할아버지?”
“왜?”
“나 또 뭐 물어봐도 돼요?”
“그래.”
“만일 평생 아픈 자식을 두는 것과 건강한데 일찍 죽는 자식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할아버지는 무얼 고르시겠어요?”
장씨 할아버지는 살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식으로 ‘허’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뉴스에 많이 나오는 안락사 같은 거 말이에요. 환자가 괴롭더라도 곁에 두는 게 맞는지, 아니면 고통에서 풀어주는 게 최선인지. 그걸 갖고 토론도 하고 그러잖아요. 상황은 좀 다르지만 그게 내 자식이라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거든요. 만일 하느님이 너한테 자식을 주겠다, 대신 두가지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 첫째, 아프더라도 오래 산다. 둘째, 짧게나마 건강한 삶을 누린다…… 그러심 어떡하나 고민했었거든요.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장씨 할아버지에게서 노여운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호흡이 느껴졌다.
“아름아.”
“네?”
“그런 걸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
“………”
“넌 입버릇처럼 늘 네가 늙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그걸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거, 그게 바로 네 나이야. 질문 자체를 잘못 하는 나이. 나는 아무것도 안 고를 거야. 나는 둘 다 원하지 않아. 세상에 그럴 수 있는 부모는 없어……”
“할아버지?”
“응?”
“사람은 언제 어른이 돼요?”
“엥?”
“주민등록증이 나올 때인가요, 군대에 다녀온 뒤인가요, 결혼한 다음인가요?”
“그야…… 물론 애를 낳은 다음이지.”
나는 두 눈을 끔뻑이다, 괜히 할아버지에게 까불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앳된 소리를 냈다.
“어? 그럼 할아버지도 아직 어린애게요?”
장씨 할아버지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있었지…… 나도.”
“………”
“다 컸음 딱 네 애비만 했겠구나.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자라주었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그제야 나는 내가 확실히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장씨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머리를 짰다. 하지만 태연하게 딴청을 부린 쪽은 장씨 할아버지였다.
“에구, 나도 사람이 언제 다 크는지 모르겠구나. 더 자랄 수 없는 사람은 무얼 하는지, 그런 것도 모르겠고.”
나는 가만히 할아버지 얘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내가 마흔 넘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하는. 몸이 좋아 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 게 지금까지의 삶이었구나. 그런데 이제 앞으로는 뭔가 잃어버리는 일만 남았겠구나. 그랬더니 세상 보는 눈이 좀 달라지더라고.”
“음.”
“그래도 그땐 그냥 짐작이었지. 내가 20대 때만 해도 딴사람들 머리통에 털이 얼마나 박혀 있나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고. 막말로 세상에 대머리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머리가 풍성하다고. 어디 가면 내가 우리 아빠 아빤 줄 알아.”
“어? 나도 가끔 그런 생각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늙으면 내 얼굴이 되겠구나 하고. 먼 훗날의 아버지 얼굴이 궁금하면 지금 내 얼굴을 보면 되겠구나 하고요.”
“다를 수도 있지.”
“왜요?”
“나이는 몸으로만 먹는 게 아니니까.”
“………”
“하나가 바뀌면 모든 게 바뀌어. 이것도, 이것도.”
할아버지가 내 손을 갖다 자기 눈과 머리에 한번씩 대었다.
“그런데 그런 게 한꺼번에 온다고 생각해봐라, 야. 젊었을 때 자기 등에, 입술에, 그리고 그, 저, 거시기에 주름 생길 거라고 상상하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
“맞아, 예전에 목욕탕에서 어떤 형이 저한테 세상에 하얀색 겨드랑이 털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참 나.”
할아버지가 문득 내 이름을 불렀다.
“아름아.”
“네?”
“부모님은 잘 계시지?”
“네. 아까 다 보셨잖아요.”
“그렇지.”
잠시 후, 할아버지가 다시 내 안부를 물었다.
“너도 잘 지내지?”
“그럼요.”
“실은 어제 네 엄마를 봤어. 택배 갖다주러 갔는데…… 네 엄마가 현관 앞에 앉아 울고 있더구나. 집에도 못 들어가고.”
“………”
“그래서 나는 도로 집으로 왔어, 암 소리 안하고. 그랬더니 새삼 네가 보고 싶지 뭐냐? 주책맞게.”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러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그냥 내가 제일 잘하는 말을 했다.
“할아버지?”
“응.”
“나 괜찮아요.”
“그치?”
“그럼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얼마나 됐을까. 가까이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씨 할아버지가 푹신한 점퍼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 어디께를 더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장씨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손난로를 주듯, 자신의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감싸쥐고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손바닥에 물컹 하는 촉감이 전해졌다.
“내가 참 이래도 되는가 모르겠다……”
손에 든 물체를 더듬어 만져봤다. 나는 곧 그것이 물렁물렁한 직육면체란 걸 알았다. 이번에는 그걸 귓가로 가져가 흔들어보았다. 안에서 찰방찰방 소리가 났다.
“소주야, 아름아.”
나는 손동작을 멈췄다. 뭐라 너스레를 떨고 싶은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천천히 마셔야 해. 알았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이 떨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는 것도 같았다. 장씨 할아버지는 팩소주에 빨대를 꽂아 내게 건넸다. 나이 탓인지 추위 탓인지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계신 게 다 느껴졌다. 나는 그걸 두 손으로 감싸쥔 뒤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곤 조심스레 한모금을 들이켰다.
“쓰지?”
내가 이마를 찡그리자, 할아버지가 어린애 다루듯 다정하게 물었다.
“네.”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마셔.”
바람이 찼다. 나는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조금씩 팩소주를 홀짝였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가 어딜 보고 계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나란히 앉아 칼바람을 오래 맞고 있으니, 어쩐지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라디오에서 동파된 수도관과 얼어죽은 새들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시골에선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어류 양식장도 얼어붙었다고 했다. 현재 기온은 영하 15도. 체감온도는 영하 21도였다. 그리고 그걸 다르게 만드는 게 바람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눈 덮인 도시는 고요했다. 병실에선 하루 종일 가습기가 돌아갔다. 후텁지근하고 생기 없는 공기가 조급하게 폐 속을 들락거렸다.
나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해풍에 오래 말린 생선처럼 간신히 형체만 간직한 채 안쪽으로, 안쪽으로 졸아들고 있었다. 얼마나 더 작아져야 노래처럼 가벼워질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줄인 몸피가 과연 바깥의 둘레를 넓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살아 있는 것. 그리고 그 무게는 스스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몰랐다. 어둡고 긴 날들이 이어졌다. 낮과 밤. 그리고 또 낮과 밤.
DNR(심폐소생술 금지) 각서를 제출한 건 오래전이었다. 부모님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침대에서 보냈다. 가끔은 내 얼굴이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설명해달라곤 하지 않았다. 팔다리를 가누는 것도,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도 힘에 부쳤다. 눈을 감으면, 아무렇게나 버려진 단어들이 어지러이 뒹구는 기척이 났다. 누군가 오랫동안 방치해둔 정원처럼 흉흉하고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뒹구는 낱말카드 중 하나를 들어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아파서, 또 어려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게 연애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 더 있었다. 노동. 그것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말이었다. 아울러 부모님과 제일 친한 낱말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끝끝내 알지 못하고 가게 될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곤 열일곱살 때부터 아버지가 이고 온 그 단어와 고단함에 대해 그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잘 헤아려지지가 않았다. 그런 건 절대 상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듯.
어려서부터 나는 늘 내가 가진 사전을 고쳐 쓰고 싶었다. 그때그때 나이에 맞게. 그리고 경험에 따라. 하지만 이제는 익히 알고 있는 단어를 추스르기도 버거웠다. 어느 땐 아주 쉬운 단어도 잘 생각나지 않아, 휘휘 돌려 설명해야 했다. 엄마, 그거 있잖아요, 하얗고 네모난 거…… 나는 내게서 말들이 떠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가 집에 다녀오겠다며 빨랫감과 반찬통을 가지고 병실을 나섰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어머니가 올 때까지 오줌이나 똥이 마렵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다시 어둠 속에 갇혀 이런저런 말들을 매만지다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제 풀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썬글라스부터 찾았다. 그런데 주변에 평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뭔가 낯설고 섬뜩한 기운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내가 그걸 몰랐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까지도.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애써 불안한 기운을 누르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엄마?”
주위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한번 더 물었다.
“엄마야?”
그러나 묵묵부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숨죽인 채 상대의 반응에 집중했다. 불현듯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거칠고 가쁜 듯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구세요?”
이번에도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곤 어느 순간 그가 긴 정적을 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 뭐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한없이 깊고 낮은 울림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건조하고 불안정한 소리이기도 했다. 순간 그럴 리 없다 싶으면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 가슴 한쪽이 옥죄어 왔다. 나는 용기를 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서하니?”
“………”
“서하야?”
“………”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댔다. 놀라움인지 노여움인지, 반가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애가 떠날까봐 겁이 났다. 어쩌면 이게 그애와 나눌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무슨 말로든 그애를 붙잡고 싶었다. 그런 뒤 시간이 되면 그애의 말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자,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그렇게 오래 생각했는데. 묻고 또 묻고, 나 혼자 한 대답들도 꽤 많은데. 묻고 또 물어봤자 끝끝내 알 수 없던 얘기도 정말 많은데. 도대체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무언가 꼭 전달해야 한다면, 그애가, 혹은 그 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전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나는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 내 앞의 누군가를 향해 우두커니 혼잣말을 했다.
“맞구나. 그럴 줄 알았어.”
“………”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 다행이야.”
“………”
“네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 너는 지금 내가 무척 화가 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래 맞아. 원망했던 것도, 미워하고 저주했던 것도 사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몰라.”
그 사람은 꼼짝 않고 내 얘기를 경청했다.
“그래도 한번쯤은 네게 이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 우린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 직접 목소리를 들은 적도,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하지만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
“………”
“그리고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
나는 뭔가 더 전할 말을 찾아 마음속을 급히 더듬었다.
“누구세요?”
갑자기 이제 막 병실로 들어선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마디도 않던 그 사람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죄송합니다. 제가 병실을 잘못 찾았나봅니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허망한 마음으로 병실 입구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내 말을 끊기가 미안해 거기 계속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얼마 뒤 나는 쇼핑백을 정리하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엄마.”
“응?”
“누구예요?”
“뭐?”
“방금 나간 사람…… 누구였어요?”
“아, 신경 쓰지 마. 잘못 들어왔대.”
“어떻게 생겼는데요?”
어머니가 문득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봤다. 목소리의 크기와 방향이 내게 그렇다고 일러줬다.
“왜, 아는 사람이니?”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다 조용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날,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여느 때와 달리 색(色)이 많아 선명하고, 눈맛이 시원해지는 꿈이었다. 그것도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탐스러운 주황이 안개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나는 어느 들판에 서 있었다. 예전에 한번 와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동네였다.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누가 보면 촌스럽다 말할 파랑. 그렇지만 지평선에 솟은 감나무와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하늘이었다. 나는 고개를 젖혀 우뚝 솟은 감나무를 우러러봤다. 여윈 가지에, 붙어 있는 이파리라곤 한장도 없는데, 열매 하나는 끝내주게 많이 달린 고목이었다. 몸통은 날렵했고 허공으로 실핏줄처럼 뻗은 가지의 곡선이 유려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나와 가장 가까운 가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열매가 손에 닿지 않았다. 몇번이고 제자리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나를 들어올리기라도 한 듯 발아래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났다. 나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탱글탱글한 홍시 하나를 땄다. 그러곤 그 자리에서 바로 덥석 베어물었다. 이윽고 툭— 입속에서 황혼이 터지는 느낌이 났다. 차고 달고 깊은 감각이었다. 나는 혀끝으로 그 주황의 맛을 오래 음미했다. 그러곤 입맛을 다시며 나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이상하다…… 꿈이 이렇게 생생하다니.”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중환자실에 있었다.
*
면회는 하루 두번, 가족에 한해 30분만 허용됐다. 부모님은 면회시간 한참 전부터 복도에 있는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초조하게 종소리를 기다렸다. 나는 종일 침대에 누워 오직 그 시간이 오기만을 바랐다. 하루 중 그 30분이 유일하게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주위에선 이따금 경보음이 울렸다. 그러면 곧 사람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고…… 그리고…… 급기야는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혹은 내 뒤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열흘 혹은 보름쯤 됐을까. 나는 몇번 혼수상태에 빠져 부모님을 놀라게 했다. 어느 때는 사경을 헤매다 난데없이 ‘아빠? 편지 왔어요?’ ‘편지 왔어요?’ 하고 묻는 바람에 아버지를 당황시켰다고 했다. 부모님이 아니라 간호사 누나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승찬 아저씨를 통해 그 아이에 대해 알고 계셨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단 사실은 모르고 계셨다. 그래서 한때 내가 미친 듯이 게임에만 빠져 있을 때도, 부모님은 그게 다 서하의 병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오해를 오해대로 놔뒀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되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느꼈다.
한날,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뭔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아버지가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응, 얘기해.”
아버지의 손에서 엷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다시 오실 때, 제 컴퓨터에서 파일 하나만 갖다주실 수 있어요?”
“무슨 파일?”
“제 메일에 들어가면 ‘내게 쓴 편지함’이란 게 있을 거예요. 거기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올린 파일들이 있는데, 그중 맨 위에 있는 걸 뽑아다주시면 돼요. 전에 비밀번호 알려드린 거 기억하고 계시죠? 대신 절대로 먼저 읽어보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뭔데 그러니?”
“나중에 꼭 말씀드릴게요. 저한테 무척 중요한 일이에요.”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내가 부탁한 원고뭉치를 들고 왔다. 아버지는 내가 하도 당부해 서류봉투에 테이프까지 붙여놨다며 생색을 냈다.
“아, 그리고 이거.”
아버지가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부스럭 꺼냈다.
“출력하려다 짧아서 그냥 적어왔어.”
“뭐예요, 아빠?”
“편지.”
“편지요?”
내게 딱히 그런 걸 보낼 사람이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데요?”
아버지가 주저하다 대꾸했다.
“이서하라는데?”
순간 나는 피식 웃으며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무심코 ‘뭐라는데요?’ 하고 호응하고 말았다.
“읽어줄까?”
“네.”
아버지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름이에게. 안녕, 나 서하야. 잘 지냈니……”
나는 눈을 계속 깜빡이며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답장이 늦어 미안해. 그동안 많이 아팠어. 네가 내 소식을 듣고 힘들어한다는 얘길 들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해. 나는 중환자실에서 나와 잘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좋아질 수 있을 거야. 건강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 수술 뒤 그걸 더 깨달았어. 그러니까 우리 건강하자. 그래야 이렇게 편지도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나지. 그럼 잘 지내. 안녕.”
아버지가 가만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울리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 아이였구나. 전에 네 엄마가 말해서 나도 궁금했었어.”
“………”
“다시 읽어줄까?”
나는 그제야 힘없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며칠 뒤, 나는 아버지께 답장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수신인이 이서하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나는 서하를 서하라고 부르며, 다른 이름을 생각할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이 그들에게 도착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준비되셨어요?”
“응.”
“그럼 말할게요. 혹시 너무 빠르면 얘기하세요.”
“그래.”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한번에, 쉬지 않고 부르기 위해, 중환자실에서 오랫동안 혼자 매만진 말들이었다.
“서하에게”
“서하… 에게…”
사각사각 종이 위로 연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냈니.”
“……지냈니.”
“수술이 잘됐다니 기뻐.”
“……계속해.”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30분 동안 내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진지하게 받아적었다.
어릴 때 나는 까꿍 놀이라는 걸 좋아했대. 아버지가 문 뒤에서 ‘까꿍!’ 하고 나타나면 까르르 웃고, 감쪽같이 사라진 뒤 다시 ‘까꿍!’ 하고 나타나면 더 크게 또 웃었다나봐. 그런데 어느 책에서 보니까, 그건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을 저장하는 거라더라. 그런 걸 배워야 알 수 있다니. 그렇게 작은 바보들이 어떻게 나중에 기술자도 되고 학자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처음부터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나이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손을 타야 했던 걸까. 내가 잠든 새 부모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나도 가끔 놀라워.
……오늘은 네게 꼭 전할 말이 있어 편지를 써. 어쩌면 앞으로 네게 편지를 못 보내게 될지도 몰라. 며칠 전 나도 중환자실에 들어오게 됐거든. 그렇지만 다시 나오게 될 때를 대비해 이곳에서 나, 항상, 네게 쓸 편지를 궁리해두고 있을게.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면 제일 먼저 너에게 메일을 보낼게. 그러니 당분간 내가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까꿍’ 하고 짓궂게 사라진다 해도, 어릴 때 우리가 애써 배운 것들을 잊지 말아줄래? 그사이 나는 네게 들려줄 얘기를 모아두고 있을게. 그리고 언제고 너의 행운을 빌게. 그럼 또 봐. 안녕.
아버지는 내 말을 받아적는 동안 거의 한마디도 안하셨지만, 나는 어느 순간 아버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같은날, 아마 새벽 무렵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면회시간이 아닌데도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나를 급히 찾아왔다. 몇번 반복돼온 일이지만 나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부모님도 같은 느낌을 받으셨는지도 몰랐다. 나는 손짓으로 베개맡을 가리켰다. 그러곤 부르튼 입술을 움직여 가까스로 얘기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다 쓰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런 것도 하나 완성하지 못하고 가다니 속상하다고. 그렇지만 이게 당신들을 기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대신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 뒤 조그맣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그래, 아름아.”
“저, 눈이 멀고 나서야 평소 내가 아빠 얼굴 보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았어요.”
아버지가 손으로 내 머리를 만졌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내 이마가 폭 안기는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
“응?”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다 물어봐.”
“혹시 나 무섭지는 않았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녀석아.”
“가끔 궁금했어요. 엄마랑 아빠랑…… 내가 병들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우시진 않았을까.”
어머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어머니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냈다.
“응.”
“배 한번 만져봐도 돼요?”
어머니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그냥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알고…… 있었니?”
“응. 한참 전에. 엄마 먹는 그 약, 엽산 맞죠? 걱정돼서 찾아봤었어요.”
“일부러 숨긴 거는 아니야.”
“응. 알아요. 그러니까 엄마, 언젠가 이 아이가 태어나면 제 머리에 형 손바닥이 한번 올라온 적이 있었다고 말해주세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꼭 잡았다. 내 몸짓은 잠에 취한 사람처럼 느리고 아둔했다.
“아빠.”
“응?”
“그리고 엄마.”
“그래.”
나는 남아 있는 힘을 가까스로 짜내 말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두분은 내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맞댄 채 당신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두분 숨소리와 기척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럴 때 두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내가 또 바라본다. 나는 내가 적은 첫 문장과 다음 문장,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을 떠올린다. 그러곤 같은 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읽고 있는 부분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고 따라가려 애쓴다. 가물가물 눈이 풀리고, 숨이 가쁘다. 아무래도 나는 두분이 뭐라 하나 꼭 듣고 갈 모양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것은 나무들이 제일 잘 안다. 이 문단은 이미 건너가셨겠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날, 짝짓기를 해야 한다는 건 아버지가 제일 잘 안다. 이 단락쯤 도착하셨겠구나. ‘나랑 해, 나랑 해’는 어떠실까. ‘나도 잘해, 나도 잘해’는 또 어떡하고. 행여 부끄러워하지는 않으실까. 귀를 쫑긋 세운 채 두분 숨소리를 경청한다. 이윽고 간헐적인 훌쩍임 사이로, 어디선가 아버지의 ‘쿡’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반색하며, 다급하게,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기세로 묻는다.
“아빠.”
“응?”
“어디예요?”
“뭐?”
“조금 전……”
아버지가 뭐라 대답하지만 자세하게 들려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어렴풋해진다. 두 눈 위로 밀린 잠이 눈사태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찢어질 듯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바람보다 키 큰 그물채를 들고, 뱅글뱅글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문장들을 붙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몸이 날쌔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이윽고 그 말들은 저 스스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낳아드릴게요.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배어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 아버지, 내가. 어머니, 내가. 그런 뒤 물뱀처럼 허리를 꺾어 어디론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가 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린다. 그러곤 아버지의 눈이 되고 어머니의 입이 되어 한번 더 그것을 읊어본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은 모르겠다. 다만 조금 전 내가 던진 한마디, 어디예요? 그 한마디가 어쩌면 내가 지상에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그것. 아빠. 응? 어디예요. 뭐? 조금 전…… 어디에서 웃었어요?